임종욱-旅窓筆滴-이란 편-18.
18.페르세폴리스 유적(Persepolis ruins: Parsa)-3:
2008.9.18.
空慧
아파다나궁 옆에는 사방 70m, 100개의 기둥이 있었던 소위 백주궁(百柱宮:
Hypostyle hall)이 있다. 페르세폴리스 최대의 궁이며 크세륵세스의 알현실이나
집무실 또는 회의실이라고 추정들 한다. 그러나 모두 황금으로 도장된 뿔
달린 황소머리 조상(彫像)들의 주두(柱頭)만 몇 개 남아 빈터를 지키고 있다.
북문(北門)에는 양편 기둥 안쪽에 서로 대칭으로 여러 단(段)에 모두 100명의
만조백관(滿朝百官)들이 도열(徒列)한 부조가 있는데 몇 사람의 무관(武官)이
찬 도표(刀鏢:scabbard: 칼집)는 남근(男根)을 상징하여 웃음을 자아낸다.
매우 해학적이다. 당시 근위병은 약 1만 명, 엄한 군율(軍律)과 강성한
정예군이지만 매우 자유롭고 상명하달(上命下達)이 화기애애(和氣靄靄)하게
이루어 졌음을 짐작케 한다.
서쪽에는 다리우스황제가 적을 단검으로 무찌르는 장면을 그려 적을 제압하는
왕의 위력을 표현하였다. 이 역시 조라아스타교의 원리에서 선이 악을
물리친다는 효시(曉示)이리라.
![](http://cfs12.blog.daum.net/image/12/blog/2008/09/23/08/22/48d82895d5a4c&filename=9.parsa-A1-S.jpg)
↑ 뒤에 보이는 건물은 핫사르 궁
![](http://cfs12.blog.daum.net/image/11/blog/2008/09/23/08/22/48d82896b985c&filename=9.Parsa-GateReli-2.jpg)
↑ 28개국 사신들을 5단으로 부조했다.
↑ 남근(男根)을 상징한 칼집(刀鏢:scabbard)
좀 더 서쪽 편에는 자그마 한 다리우스-제왕의 편전(便殿)인 대리석궁전
‘핫사르(일명 타차라’라고 하는 궁이 있다. 겨울 궁전이라고도 하는바 텅빈
유지(遺址) 일 다름이다. 그래도 이 방에 문기둥에 부조가 남아있고,
꽃모양을 한 문훤(門楦: door post)으로 보아 크고 아름다운 출입문이 있었을
것이다. 문 벽면에는 조로아스타교의 문양(紋樣)인 ‘파라바하르(Faravahar)가
높이 새겨저 있고 그 밑에 사람의 부조는 파괴되어 내용을 알 수 없다.
이 파르마하르는 이집트의 ’매트(Ma'at)' 신상(神像)과 같다.
태양신 Ra의 딸인 Ma'at는 진실, 정의 그리고 조화의 여신이었다. 그 녀는
지구상의 모든 조화와 관련이 있고, ‘올바름’ 즉, 법과 질서의 여신이며.
이집트의 창세(創世)에서 Thoth, Ptah, Khnemu 등과 연관하여 오시리스의
심판의 전당에서 죽은 자들의 영혼 위에 앉아 심판 내리는 명계(冥界: nether
world)의 여신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조로아스타교에서 이것을 그대로 인용
(引用)하였으리라.
↑ 핫사르궁의 파라바하르(Faravahar)
![](http://cfs11.blog.daum.net/image/23/blog/2008/09/23/10/45/48d84a3558715&filename=Maat-1.jpg)
↑ 이집트 고대 신화의 매트(Maat)여신
알현실 사이에는 부조를 새긴 계단으로 연결되는 트라이파일런(tripylon:
3방문)이 있다. 아파다나 궁과 침전으로 통하는 문이 각각 하나 또 하나는
하렘으로 통하는 문이 더 있어서 이런 명칭이 붙었다. 세계를 제패(制覇)한
제왕이 거주했던 궁궐이기엔 너무 작지만 품위있는 궁궐이었을 것이다.
그 외에 그의 아들 크세륵세스 1세가 기거하던 궁전인 ‘하다쉬‘가 있고,
남쪽에는 하렘이 있으니 왕비와 왕의 여인들만의 공간인데 이곳 역기 초석들만
남아 그 옛날의 영화(榮華)를 읍참(泣斬)하고 있는 듯하였다. 그 동쪽으로는
보물창고였던 커다란 광장도 있는데 여기도 역시 무참히 소실되어 초석들만
남아있다.
![](http://cfs12.blog.daum.net/image/30/blog/2008/09/23/08/22/48d82898739c5&filename=9.Parsa-Reli-harem.jpg)
↑ 하렘(Harem)의 표식
서편에는 조그만 박물관이 있는데 당시의 기둥의 건축양식을 재현하였고
중요한 문화재들이 국립박물관에 이전되어 안에는 볼만한 것이 많지 않다.
당시 불타버린 궁의 금장식과 쇠부치의 잔해가 남아 있다. 대리석 식기류,
door post, 비문, 고대 페르시아 문자, 바빌로니아 문자, 엘람 문자 등
당시의 문자들, 군용 수통같이 생긴 술병, 마스티프(Mastiff: 용맹의 상징으로,
털이 짧은 맹견의 일종으로 크고 매끈한 몸이 특징) 석상, 만(卍)자 보석
목거리.청동제 마구(馬具), 상수도 토관, 꽃병, 당시의 옥새(玉璽)라 할 도장은
초라할 정도로 작았다. 그만큼 신용사회였다는 증거이겠다.
일일이 서명하기 잔닥스러워 사진으로 대신한다.
![](http://cfs11.blog.daum.net/image/23/blog/2008/09/23/10/45/48d84a34df3b0&filename=9.parsa-tresuary.jpg)
↑ 페르세폴리스 박물관의 보물들
남쪽 암산(岩山)에는 아케메네스 시대의 2왕을 모신 암벽묘(岩壁墓)가 있다.
찌는 듯한 해볓을 받으며 땀흘려 올라가 보니 암벽묘 보다는 뒤돌아 본
페르스세폴리스의 전망이 더 장관이다. 아케메네스조 때 왕 2사람을 모신
곳인데 누구의 묘혈(墓穴)인지는 밝혀지지 않았고 다만 조로아스타교 사제
(司祭)가 아후라마즈다에게 예배하는 그림이 부조(浮彫)되어 있다.
![](http://cfs11.blog.daum.net/image/29/blog/2008/09/21/17/18/48d6032252db4&filename=9.pars-hillsideview-S.jpg)
↑ 페르세폴리스 암벽묘에서
기원 전 330년 이 페르세폴리스가 알렉산더의 의해 함락되엇다. 2달 간
머물면서 알렉산더대왕은 1만 필(匹)의 말과 5천 필의 나귀(donkey)로 보물을
실어 나갔다. 그가 떠나면서 이 화려하고 장대했던 궁전은 모두 불태웠다고
전해진다. 150년 전 페르시아의 아테네 침공에 대한 알렉산더의 복수였을 것
이라고 추정들 한다. 그 후 이 장대한 문명의 도시 페르세폴리스에는 아무도
살지 않은 죽음의 도시로 사막의 모래 속에서 1930년까지 약 2000년 동안이나
동면을 하였던 것이다.
다리우스 1세는 전승왕(戰勝王)이기보다도 탁월한 행정가라 함이 타당하다고
생각된다. 그는 역사상 처음으로 각 지역의 자치권을 인정하고 총독제
(總督制)를 실현했다. 금융통화제(金融通貨制)라고 할 만한 금의 함량유지로서
통화의 기준을 조절하는 표준을 만들고 조세제도를 개혁하고 국민복지제도도
마련한 제왕이기도 하다. 치세뿐 아니라 속구(屬國)에 빠른 파발(擺撥)을
보내기 위해 111개 도로망(royal road)과 교역을 위한 수로(水路)를 개척했으니
오늘날 나일강과 홍해을 잇는 수에즈 운하의 창시자이기도 하다.
그는 어느 고대제국 군주보다도 평화를 사랑했고, 타민족의 생활방식과 그들의
문화를 인정하고 유지할 수 있게 허용하는 관용적인 위정이덕(爲政以德)의
제왕이었다는 사실이 유적에서 발굴된 설형문자(楔形文字)를 해독해 알아낸
사실이다. 하지만 아쉽게도 페르시아인들은 역사에 거의 문서를 남기지
않았기에, 페르시아에 대해 아는 건 대부분 그리스의 자료를 통해서뿐이다.
즉 이 위대한 페르시아는 그들을 정벌한 그리스에 의해 오늘날까기 왜곡된
역사로 치욕스럽게 기록되어 있다. 전승국인 그리스인들은 스스로를 미화하고
페르시아인들을 미개한 야만적이며 잔인한 민족으로 의도적으로 폄하하여
곡필(曲筆)하였다.
페르시아인들이 그리스인들의 역사표기대로 미개한 야만인들이었다면
기원전 이렇게 웅대하고 미려(美麗)한 건축물을 지을 수 있었겠는가.....
역사서에 영웅으로 미화된 알렉산더 대왕의 편이 아닌, 페르시아의 편에 서서,
침략자, 파괴자 알렉산더를 지켜보면 그리고 우리가 배운 서양사를 되새겨
보면 우리는 무던히도 잘못된 교육을 받았다는 생각을 또다시 하게된다.
p.s:
-다음 편은 낙쉐러스탐 암벽묘.
-별도 본인 제작의 동영상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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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그들의 생활도기들..거대했던 궁궐의 잔터에 남은 석주기둥들이 역사의 현장을 상상하게 해줍니다.흘러간 역사의 잔형들은 늘 대단한 힘을 느끼게 해줍니다.....페르시아의 문명은 화려하고 섬세합니다.전쟁의 역사라기보다 문명예술의 역사같아요^^
역시 달님다운 예안입니다. 잘 봤어요...우리들이 서양문명의 영향으로 그들을 야만적이며 호전적인 나라로 역사에서 배웟고 그리스-로마를 문명국인 것으로 배워왔지만 그 반대였다고 느껴집니다. 실로 그들의 문명은 대단하였습니다...그리스로마으 문명이 노예문명이었다면 이들은 각국의 장인들과 노동자들을 수입하여 임금을 지불하였으며 그외 여러 정책 등이 문명국다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