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월10일 [연중 제10주간 금요일]
마태오 5,27-32
인간은 죄의 쾌락을 위해 기꺼이 지옥을 선택하는 존재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음란한 마음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눈으로 죄를 짓지 말고 차라리 눈을 빼버리라고 하십니다. 왜 이렇게까지 말씀하실까요?
진짜 그렇게 하라는 말씀이 아닙니다. 혼자 힘으로는 죄를 벗어나는 것이 불가능함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불륜을 다룬 영화 ‘언페이스풀’(2002) 줄거리는 이렇습니다.
뉴욕 맨하탄의 어느 고급 저택에 결혼 10년 차 부부인 에드워드와 코니는 8살 아들과 함께 살고 있습니다.
이상적인 행복을 누리고 있는 그들에겐 권태기나 불신은 없어 보입니다.
어느 날 코니가 시내로 쇼핑을 나갔다가 낯선 남자와 부딪혀 다치게 됩니다.
친절한 프랑스 남자는 바로 자기 집 앞에서 그녀를 치료하고 보내면서 책 한 권을 선물하게 됩니다.
집에 돌아와 남편에게 이야기하자 가장 싼 와인이라도 보내줄 걸 그랬다며 아내를 놀립니다.
코니가 그가 준 책을 보다가 그의 전화번호가 적혀 있는 종이를 발견하게 되고, 거리를 걷다 그의 생각이 나서 고민 끝에 전화합니다.
그날의 고마움을 전하고 싶다는 그녀에게 집에 잠깐 들러 커피라도 먹고 가라고 합니다.
그의 집에 잔뜩 긴장한 채 들어온 코니는 화려한 언변 술에 끌려 들어가고 자연스러운 그의 손길을 거부할 수 없습니다.
괜한 죄책감에서였던지 남편에게 들러 선물을 전해줍니다. 하지만 그날 이후 폴에 생각으로 가득 찼고 다시 그를 찾습니다.
자연스럽고 대담한 손길로 폴의 관심에 응대합니다. 죄책감에서인지 집을 나오지만 놓고 온 코트를 가지러 다시 들어갔다가 자기감정에 솔직해지기로 합니다.
코니는 돌아오는 기차에서 죄책감을 이기는 이상야릇한 일탈의 쾌감을 느낍니다.
에드워드는 자기 동료를 통해 코니가 거짓말한 사실을 알게 되지만 ‘설마 아내 코니가?’라는 생각에서인지 대수롭지 않게 생각합니다. 남편의 어설픈 눈치도 알지 못한 채 점점 폴과의 관계에 빠져들게 된 코니는 그 행동 수위에 대담함을 드러내게 됩니다.
결국 다른 사람들의 눈에 띄고 에드워드의 부하직원에게 들키게 됩니다.
에드워드도 자신을 대하는 코니의 모습과 거짓말하는 그녀의 모습에서 점점 더 의심하게 됩니다.
그리고 친구들과 대화 도중 외도가 가져오는 파경 이야기를 듣고는 마음에 걸렸던지 코니는 폴에게 헤어지자고 합니다.
하지만 몸은 계속 폴에게 향하고 있었습니다. 쾌락의 맛에 빠져버린 것입니다.
에드워드가 아내의 외도를 목격한 부하직원과 언쟁 끝에 싸우게 되자 그에게 가족 간수나 잘하라는 막말을 듣게 되고
흥신소에 아내의 추적을 맡기고 시카고로 1박 2일 출장을 갑니다.
코니는 또 나쁜 아내 나쁜 엄마가 됩니다. 코니는 아들 픽업까지 놓칩니다.
아들에게까지 사랑을 주지 못하게 된 자신을 보며 코니는 정말 이 관계를 끝내야겠다고 생각하며 폴을 찾았는데,
폴은 다른 여자와 즐기고 있었습니다. 질투에 눈이 먼 코니는 여자를 폭행하고 폴을 자신의 것으로 만들려고 합니다.
점점 더 나락으로 치닫는 것입니다.
사진으로 아내의 불륜을 확인한 에드워드는 폴에게 접근합니다.
그리고 자기 아내를 하나의 노리갯감으로 여기는 폴에 분노가 치밉니다.
그리고 자신이 코니에게 선물한 커다란 유리구슬이 폴의 집에 있는 것을 보고는 우발적으로 그의 머리를 내리칩니다.
폴은 사망합니다.
에드워드는 자수하려 합니다. 그러나 폴이 죽은 지 모르고 그에게 헤어지자는 음성 메시지를 남기는 아내의 목소리를 듣고는 가정을 위해 그의 시신을 처리하고 아내와 함께 아들 학예회에 갑니다.
그런데 경찰이 들이닥칩니다. 폴의 살인이 일어난 집에서 코니의 전화번호가 발견되었기 때문입니다.
코니는 폴이 죽었다는 소식에 적잖게 놀랍니다. 그리고 세탁소에 맡기러 간 에드워드의 옷에서
자기 불륜 사진을 보고는 모든 것을 알게 됩니다. 둘은 아이를 위해서라도 함께 계속 살아야 할지,
아니면 자수해야 할지를 두고 경찰서 앞에서 고민하며 영화는 끝이 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성욕 자체가 죄라고 말씀하십니다. 결국 우리가 싸워야 하는 것은 행위가 아니라 욕구입니다.
“‘간음해서는 안 된다.’고 이르신 말씀을 너희는 들었다.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음욕을 품고 여자를 바라보는 자는 누구나 이미 마음으로 그 여자와 간음한 것이다.”(마태 5,27)
일단 욕구가 커지면 걷잡을 수 없어집니다. 왜냐하면 그 욕구보다 더 만족시킬 행복이 보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금강산도 식후경입니다.
배고 고프면 다른 행복은 눈에 들어오지 않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음욕이 증가하지 않게 해야 합니다.
그러려면 이 욕구를 증가시키는 것이 무엇인지 알아야 합니다.
‘생각’입니다. 뱀은 하와와 대화를 통해 하와의 욕구를 증가시켰습니다.
뱀이 하와와 대화하는 것을 ‘생각’이라고 합니다. 생각하면 욕망이 더 커집니다.
그래서 결코 그 죄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생각에서 벗어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나를 미워해야 합니다.
그래서 죄를 지으면 눈을 빼고 손을 자르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주님께 가는 길에 반드시 거쳐야 하는 것이 나를 십자가에 못 박는 일입니다.
하지만 나를 미워한다는 것은 너무 힘이 듭니다. 쾌락이 바로 눈앞에 있기 때문입니다.
안 되는 줄 알면서도 죄에 떨어집니다. 사실 인간은 지옥에 갈지 알면서도 죄의 쾌락을 선택하는 약한 존재입니다.
영화 ‘번지 점프를 하다’(2000)에서는 남자 주인공이 대학생 때 사랑했던 여자를 잃었는데,
교사가 되어 그 여자가 환생한 남자를 만난다는 이야기입니다.
하지만 동성애는 이 사회에서 허용되지 않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둘은 다음 생에서는 사랑할 수 있는 모습이기를 바라며 줄을 매지 않고 번지 점프대에서 함께 뛰어내립니다.
환생이 100% 확실하다면 모를까, 그리스도교 교리 안에서는 자살은 지옥에 갈 확률이 매우 큽니다.
그런데도 이런 선택을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사실 인간은 즐거움을 위해 지옥에 가는 것까지 감수할 미련하고 약한 존재란 뜻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죄에서 벗어나려면 내가 번지 점프를 하기 전에 아파할 사람들을 생각해야 합니다.
부모님과 형제들, 친척과 친구들을 생각해야 합니다.
이웃 사랑만이 우리를 죄에서 벗어나게 해 줄 수 있습니다.
어떤 가정의 독실한 그리스도교 가장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는 음란한 동영상과 행위에 빠져있었습니다.
이 죄를 끊고 싶었지만 잘되지 않았습니다. 하느님께 이 죄를 끊게 해 달라고 청했는데도 매번 그 자리였습니다.
그래서 이번에는 자신이 죄를 지으면 고통스러운 벌을 달라고 청했습니다.
그날도 지방으로 출장을 가서 모텔에서 틀어주는 음란한 영상을 보고 죄를 지었습니다.
다음날 돌아와 보니 어머니가 위독했습니다. 의식이 없는 상태였습니다.
물론 건강이 좋은 상태가 아니었기에 그럴 수 있다고 여겼지만, 왠지 찜찜하였습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또 출장을 갔습니다.
또 죄를 지었습니다.
그때 아내에게 전화가 왔습니다.
아이가 교통사고로 다쳐서 병원에 입원했다는 것입니다.
이런 일이 반복되었습니다.
그러는 중에 나의 죄와 내 주위 사람들의 고통이 연관되어 있다는 확신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날은 가족을 위해 죄를 이겨냈습니다. 그랬더니 아팠던 어머니가 의식을 찾고 건강을 회복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이렇게 그분이 그 죄에서 벗어났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그런데 만약 아내도 사랑하지 않고 자녀도 사랑할 수 없는 사람이라면 어떨까요?
자신을 끝까지 사랑해 준 대상을 생각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를 사랑하기 위해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이것만이 나를 죄에서 벗어나게 합니다.
그리고 그 분은 예수 그리스도밖에 없습니다.
예수님은 우리 죄 때문에 아파하시기 위해 오셨습니다.
그래야만 우리가 죄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죄에서 벗어나게 해 주실 유일하게 나를 가장 완전히 사랑하신 예수님을 사랑하지 못한다면
우리가 진정 죄에서 벗어나는 일은 불가능합니다.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6월10일 [연중 제10주간 금요일]
마태오 5,27-32
“네 오른 눈이 너를 죄짓게 하거든 그것을 빼어 던져 버려라.”
다시 태어나도 이 길을
언젠가 ‘다시 태어나도 이 길을’ 이란 한 신부님의 회고록을 읽으며 많이 부러워한 적이 있었습니다.
무엇보다도 자신이 부여받은 사제성소에 대한 강한 확신과 자긍심을 지니고 열심히 살아가신 신부님의 삶이 제목에서부터 느껴졌습니다.
‘다시 태어나도 이 길을’ 이란 제목만 봐도 주님을 향한 신부님의 열렬한 사랑, 일생을 바친 순수한 봉헌, 용기 있는 신앙고백이 연상됩니다.
아직도 ‘긴가민가’하는, 그래서 아직도 갈 길이 먼 저 같은 ‘잔챙이’들을 부끄럽게 만드는 책이었습니다.
저도 ‘평화신문’의 도움으로 강론집을 한권 내게 되었는데, 제목이 ‘다시 태어나도 이 길을’ 만큼은 아니더라도 뭔가 느낌이 올 정도는 되어야 하는데, 너무 가볍다는 느낌이 들어 송구스럽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제목이 ‘아저씨, 신부님 맞아요?’이거든요.
꽤 나이 지긋한 한 남편이 공개석상에서 자신의 부인을 향해 큰 목소리로 이렇게 고백하더군요.
“당신은 내 영원한 짝궁입니다.
내 영원한 동반자입니다.
또 다른 삶이 내게 온다하더라도 내 선택은 절대 변치 않을 것입니다.”
표현이 너무 지나치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그래서 닭살이 조금 들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말할 수 있는 용기에, 그 일편단심에 박수를 보내고 싶었습니다.
이 한 세상 살아가면서, 그 누군가를 만나 한 평생 한 눈 팔지 않고 한 대상만을 지속적으로 바라볼 수 있다는 것, 참으로 큰 은총이라고 생각합니다.
인간은 대체로 욕심이 많은 존재이지요.
근본적으로 한 대상에게 꾸준하지 못한 속성도 지니고 있지요.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나비처럼 이 사람 저 사람 건너다니면서 또 다른 ‘누군가’를 찾아 헤매지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꾸준히 자신이 선택한 한 대상만을 바라보면서, 끔찍이도 위하면서, 끝까지 한 길만을 걸어가는 사람들의 모습은 얼마나 아름다운지 모릅니다.
오늘날도 별반 다를 바 없지만 예수님 시대 당시 결혼생활과 관련된 유다인들의 도덕적 기반은
많이 붕괴되어 있었고, 이완되어 있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혼인과 관련된 율법을 자기들 편한대로, 자기들 위주로 해석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부득이한 경우 이혼장을 써주라’는 모세의 어쩔 수 없는 양보를 악용했습니다.
겉으로는 모범적인 결혼생활을 해나가는 것처럼 처신했지만, 아주 경건하게 살아가는 듯 했지만,
뒤꽁무니로는 엄청 호박씨를 깠습니다.
들키지만 않으면 된다는 식으로 그렇게 위선적으로 살아갔습니다.
눈빛만 봐도 모든 것을 파악하셨던 예수님이 아니셨습니까?
그들의 위선, 그들의 이중적인 생활을 환히 들여다보고 계셨습니다.
실제로 6계명을 어기지 않았다 하더라도, 그래서 현행범이 아니라 할지라도, 마음으로, 정신으로, 눈으로, 생각으로 엄청 많은 죄를 짓고 있는 유다인들의 타락한 영혼을 정확하게 바라보고 계셨던 예수님이셨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간음해서는 안 된다’는 6계명에 대한 권위 있는 포괄적 해석을 내리십니다.
그간 불투명했던 6계명에 대해 정확하게 유권해석을 하십니다.
실제 현행법상 죄인이 아닐지라도 하느님 법으로는 죄인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하느님께 나아갈 때, 고백소를 들어갈 때 ‘특별한 죄가 없다’고 말해서는 안되겠지요.
실제 외적인 행동으로 저지른 죄도 죄지만, 하느님 앞에서는 마음으로, 생각으로, 눈으로, 귀로, 입으로, 영혼으로 지은 죄도 똑같은 죄인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처럼 정신의 우위성, 내면의 가치를 강조하시면서 순수한 영혼의 상태를 지속적으로 유지할 것을 당부하셨습니다.
(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바라는 만큼>
2022. 06. 10 연중 제10주간 금요일
마태오 5,27-32 (극기하여라, 아내를 버려서는 안 된다)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간음해서는 안 된다.’고 이르신 말씀을 너희는 들었다.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음욕을 품고 여자를 바라보는 자는 누구나 이미 마음으로 그 여자와 간음한 것이다.
네 오른 눈이 너를 죄짓게 하거든 그것을 빼어 던져 버려라. 온몸이 지옥에 던져지는 것보다 지체 하나를 잃는 것이 낫다. 또 네 오른손이 너를 죄짓게 하거든 그것을 잘라 던져 버려라. 온몸이 지옥에 던져지는 것보다 지체 하나를 잃는 것이 낫다.
‘자기 아내를 버리는 자는 그 여자에게 이혼장을 써 주어라.’ 하신 말씀이 있다.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불륜을 저지른 경우를 제외하고 아내를 버리는 자는 누구나 그 여자가 간음하게 만드는 것이다. 또 버림받은 여자와 혼인하는 자도 간음하는 것이다.”
<바라는 만큼>
그리 될 수야 없겠지만
더 이상 맑을 수 없을 만큼
맑아지기를 바라는 만큼
더디더라도 조금씩 맑아지겠지
그리 될 수야 없겠지만
더 이상 밝을 수 없을 만큼
밝아지기를 바라는 만큼
더디더라도 조금씩 밝아지겠지
그리 될 수야 없겠지만
더 이상 깨끗할 수 없을 만큼
깨끗해지기를 바라는 만큼
더디더라도 조금씩 깨끗해지겠지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