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Daum
  • |
  • 카페
  • |
  • 테이블
  • |
  • 메일
  • |
  • 카페앱 설치
 
카페정보
창작과 감상
 
 
 
 

친구 카페

 
등록된 친구카페가 없습니다
 
카페 게시글
검색이 허용된 게시물입니다.
음악의 세계 스크랩 작가초대석 고복수-황금심
산책시간 추천 0 조회 94 06.05.16 02:21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스타부부가수 1호, 타향살이로 국민을 울린 알뜰한 당신네들의 삶

온 국민이 좋아 하는 대중가요 ' 타향살이'의 주인공 고복수. 그는 신인 가수 경연 대회 입상을 통해 데뷔한 최초의 가수로 기록되어 있다. 고향과 고국에 대한 향수를 달래 주는 대중 가요의 대명사 ‘타향살이'가 처음 음반으로 발표된 것이 1934년 12월. 꼭 70여년의 세월이 흘렀다. ‘ 알뜰한 당신'으로 유명한 황금심은 그의 부인. 스타부부 1호라 할 만큼 두 사람은 한 시대를 풍미했을 뿐 아니라 금실 좋고 모범적인 삶으로 후배들에겐 귀감이 된 삶을 살았다.

고복수는 경남 울산에서 잡화상을 경영하는 가정에서 1912년 12월 태어났다. 키 크고 얌전하던 그는 마을 뒷산 언덕에 올라 가 노래 부르기를 좋아 했다. 울산 병영초등학교에서 4학년까지 다니다가 5학년초 부산 내성초등학교로 전학해 그곳에서 줄곧 성장했다. 보통학교 시절 이미 남다른 음악적 재질을 보이기 시작했다. 그는 노래를 배우기 위해 울산 장로교 합창단에 들어 갔다. 당시는 음악 학원이나 개인 교습소가 없던 시절. 고복수는 교회에서 선교사들로부터 드럼과 클라리넷 연주를 익혔다. 이후 ‘ 창가 잘 부르는 학생'으로 소문난 그는 울산실업중학에 특채로 입학하고 1930년 부산 동래고보를 졸업했다.

1932년 콜럼비아 레코드사 주최하고 조선일보가 후원하는 전국 신인가수 선발대회가 사상 최초로 열렸다. 대부분 인기 배우나 기생들이 가수로 나섰던 당시, ‘ 참신한 신인 발굴을 통해 음반 예술의 위상을 높여 보자'는 취지로 전국 9개 도시에서 예선대회가 치러졌다. 노래 잘하는 23살의 청년 고복수는 부산 경남 예선에 참가해 1등을 했다. 9개 도시에서 3위까지의 입상자 27명이 최종 경합을 벌이는 전국 대회에 참가하기 위해 부친의 가게에서 거금 60원을 훔쳐 단신으로 상경했다. 최초의 직업 가수 채규엽이 노래한 ‘ 비연'이 지정곡이었고 자유곡으로 ‘ 낙화암'을 부른 결과는 남자로는 유일한 2위 입상이었다. 당시 1위는 정일경, 3위는 조금자였다. 당시는 유행가라기보다는 가곡 형식의 노래들로 심사위원들도 홍난파, 현제명 등이었다고 전해진다. 입상을 했지만 여자가수인 정일경, 조금자만 특별 방송 출연과 요란한 취입 곡 홍보 등으로 관심이 쏟아졌을 뿐 고복수는 완전히 찬밥 신세였다.

1934년 4월 동아일보 학예부가 주최한 ‘당선가 발표 음악대회’가 소공동 공회당에서 열렸다. 입상 신인 가수들 보다 전옥 등 찬조 출연자들이 대단했다. 고복수는 ‘ 서울의 노래', ‘ 비연', ‘ 소쩍새 우는 밤'을 불렀다. 이때 콜롬비아의 경쟁회사인 OKHE 레코드의 이철 사장은 고복수의 노래를 듣고 반해 버렸다. 콜롬비아의 인기가수 채규엽, 강홍식에 필적하는 남자가수로 그는 고복수를 스카우트 했다. 1934년 12월, 요란한 선전 문구를 앞세우고 그의 데뷔 SP 음반이 발표되었다. 손목인 곡인 타이틀곡 ‘ 이원애곡'과 ‘ 타향' 등 2곡을 수록한 음반은 단시일에 2만장이 팔려나갔다고 한다. 타이틀곡 보다 뒷면 ‘ 타향'에 대한 반응은 대단했다. 빅히트가 터지자 고복수는 전속 축하금으로 거금 1천원을 거머쥐게 되었다. 1935년 1월 ‘ 고독한 꿈', 2월 ‘ 오 새벽이로다', 4월 ‘ 사막의 한', 5월 ‘ 바다 넘어' 등을 매달 연속적으로 발표했다. OKHE레코드는 ‘ 목포의 눈물' 이난영과 ' 타향',' 휘파람' 등으로 새롭게 떠오르는 고복수를 주력 가수로 삼았다. 1937년 1월에 발표한 ‘ 짝사랑'에 이어 39년 4월 ‘ 제2 타향'을 내놓았을 때까지 ‘ 타향'은 이미 5만장의 판매기록을 세우고 있었다.

노래 뿐 아니라 훤칠한 키에 항상 연미복을 쭉 빼어 입은 말쑥한 용모로 무대에 올라 여성 팬들의 대단한 인기를 끌었다. 고복수는 2살 어린 작곡가 손목인의 노래를 주로 불렀는데 죽을 때도 그를 선생님으로 깍듯하게 모셨다. 손목인은 "한때는 극장 앞에 장안의 한다 하는 기생들이 보낸 인력거가 10여대씩 늘어 섰었다. 만나 주질 않아 머리가 돌아 버린 여인이 '고복수'의 이름을 외치면서 돌아 다닌다는 소문이 나돌 정도였다"고 회고했다. 하지만 1937년 혜성처럼 등장한 남인수와 김정구 등에 밀려 고복수의 인기는 물러 나기 시작했다. 데뷔 곡이자 대표 곡인 '타향'은 1940년대 이후 '타향살이'로 제목이 바뀌어 불려졌다.

1939년, 3년 간의 연애 끝에 10살 아래 19살의 빅타레코드사 신인가수 황금심과 결혼을 했다. '알뜰한 당신', '삼다도 소식'으로 유명한 황금심은 30년 넘는 부부생활 중에 공석 사석을 가리지 않고 언제나 고 선생님으로 남편을 호칭했다고 전해진다. 1921년 12월 10일 서울 영천에서 태어난 황금심(본명 황금동)은 예쁜 목소리와 외모, 그리고 얌전한 성격으로 동네의 귀염을 한 몸에 받고 자랐다. 1934년 덕수보통학교 5학년 때 청진동 집에서 축음기를 틀어놓고 노래를 하고 있는데 동네 음반 가게 점원이 지나 가다가 그녀의 목소리에 반했다. 그의 주선으로 OKEH레코드 봄 전속 가수 선발 모집에 응모해 20명 중 혼자 뽑혔다. 이때 그녀의 나이는 14세. 16세 때 '왜 못 오시나요'라는 노래를 처음으로 취입했다. 이 노래를 듣고 반한 작사가 이부풍의 주선으로 빅타레코드로 스카웃이 되었다. 이부풍은 그녀에게 황금심이란 예명을 지어주며 전속 작곡가 전수린과 콤비를 이뤄 대표 곡 '알뜰한 당신' 취입을 주선했다. 이 음반이 대히트를 기록하며 당시 '이부풍 작사 전수린 작곡 황금심 노래'시스템은 빅타레코드의 '히트 제조 트리오'로 자리를 잡았다. 뒤늦게 장래성 있는 가수를 빼앗긴 OKHE레코드는 황금심을 2중 계약자로 몰아 법정 문제로까지 비화되었다.

 


스타부부가수 1호, 문화침탈의 역사 겪어내며 대중음악사에 큰 족적 남겨

소속사 분쟁의 최종 승자는 빅타레코드. 이에 O.KHE레코드는 이미 녹음해 두었던 '왜 못 오시나요'를 '황금자'란 이름으로 김정구의 '눈물 젖은 두만강'음반 뒷면에 수록해 발매하며 분풀이를 했다. 이때가 1937년 말. O.KHE레코드 소속시절 착하고 예쁘게 생긴 황금심을 본 노총각 고복수는 한순간에 마음을 빼앗겼다. 남편에게 순종하는 구식 한국여성의 표본인 황금심이었지만 노총각 인기가수와의 사랑을 위해 집안의 반대를 무릅쓰고 가출을 하고 혼전 임신까지 하는 대담성을 보였다. 당시로서는 큰 사건이었다.

1939년 빅타레코드는 공연단체 '반도악극좌'를 구성했다. 황금심은 최고 스타였고 남편 고복수도 특별출연 형식으로 순회공연에 참가했다. 원로 가수 신카나리아씨는 "황금심 그이는 너무 고왔어요. 한복을 곱게 차려입고 나서면 아휴, 같은 여자들도 탄성을 질렀지요"라고 회고했다. 1940년대 태평양전쟁 때 고복수부부는 성전 완수를 부르짖는 일제의 강요에 의해 눈물의 여왕 전옥이 주관하는 남해위문대 무대에 올라 고복수는 장고를 치고 황금심은 꽹과리를 두들기며 일본어 노래를 불러야 했다.

‘타향살이’는 멜로디 자체가 짧고 쉬워 대중들도 한번만 들으면 따라 부를 수 있는 노래다. 일제 강점 하에서 타향살이의 설움을 받던 사람들은 모두 ‘타향살이’를 듣고 부르면서 설움을 달랬다해도 무리는 없을 것이다. 만주 하얼빈 공연 때. 객석은 울음바다가 됐고, 무려 열 번이나 ‘타향살이’를 불러야 했다. 간도 공연 때는 부산이 고향인 중년여인이 찾아 와 “남편이 전쟁통에 죽고 생활고에 시달려 고향에도 한번 못 가보는 신세”라고 울먹였다. 이 여인은 감정이 격해져 끝내 자살을 해버렸을 만큼 타향살이의 영향력은 대단했다.

이처럼 고복수부부는 일제강점기인 1930년대 말부터 '고복수와 그 악단'을 결성해 공연 활동을 펼치는 한편, 일본·만주·사할린으로 위문공연을 다니며 나라 잃은 동포들의 애환을 달래 주었다. 한국전쟁 때 고복수는 인민군에 붙잡혀 의용군으로 북으로 끌려갔다 북진하던 국군 낙하산 부대원들에 의해 포로수용소행 일보 직전에 구출한 사연도 있다. 이후 그는 육군 정훈공작대에 자원해 군 위문 연예대원으로 활동했다. 1.4후퇴 때 이들 부부는 피난지인 대구에서 '해피'라는 이름의 다방 경영과 쇼 공연을 기획했다. 전쟁이 끝난 1953년 황금심은 오랜만에 박시춘곡 '삼다도 소식'을 발표하면서 가히 가요계의 여왕으로 군림했다. 마이크보다 육성공연을 고집했던 황금심은 1950년대까지 무려 4,000여 곡을 발표하며 '꾀꼬리의 여왕'이라는 별명으로 1960년 아시아 영화제에 초대가수로 무대에 올랐다.

1958년 가을 명동 시공관무대. 고복수는 후배가수들의 도움으로 가수생활 25주년을 기념하는 은퇴공연을 열었다. 은퇴 후 '동화예술학원'을 창설했다. '대전블루스'의 오리지널 가수 안정애와 '동백아가씨'의 이미자는 이곳을 거쳐간 대표적인 가수. 이후 택시사업에 이어 거금 3천 6백만 환을 투자해 '타향살이'의 영화를 제작해 빚더미에 앉았다. 고복수는 가족의 생계를 위해 서적외판원으로 나서기도 했다. 1972년 2월 10일 회갑을 맞은 그는 고혈압으로 연세대 의료원에서 세상을 등졌다. 극진한 내조로 유명한 황금심은 사업에 실패, 서적외판원을 하는 신세가 됐던 남편 고복수가 세상을 뜰 때까지 한시도 곁을 떠나지 않고 눈물겨운 간호를 했다. 수유리에서 민속주점 '타향살이'를 운영하던 82년 10월, 신인가수 전미경은 존경하는 선배가수 황금심의 일생을 '들국화'로 헌사하여 화제가 되기도 했다. 울산시는 1987년 12월 전통가요의 계승발전을 위해 <고복수 가요제>를 개최, 1회 최우수 남녀가수로 나훈아와 이미자를 선정했었다. 이후 MBC에서도 고복수 가요제를 열기도 했다.

1991년 6월, KBS의 주관으로 러시아 알마아타에서 열린 교포위문공연. 고복수의 아들인 트로트 가수 고영준이 무대에 올라 '타향살이' 불렀다. 놀랍게도 러시아 교포들 모두 노래를 따라 부르며 이내 공연장은 눈물바다를 이루었다. 고영준은 "아버지의 위대함을 새삼 느꼈다"고 당시를 회상했다. 이들 부부는 슬하에 3남 2녀를 두었다. 큰 아들 고영준과 둘째 며느리 손현희는 가수로 활동했고 셋째 아들 고병준씨는 SBS 인기사극으로 사랑 받았던 "여인천하"의 음악감독으로 활약하며 2대에 걸쳐 음악계보를 잇고 있다. 음악감독인 고병준은 MBC 특집 미니시리즈 ‘다모’의 음악 감독으로도 유명하다.

지난 91년 10월 울산시는 2천만 원의 시비를 들여 중구 북정동 북정공원에 ‘고복수 노래비??건립해 그의 업적을 기렸다. 황금심은 원로 연예인들의 모임인 상록회 최고위원을 지냈고, 대중문화에 기여한 공을 인정받아 1992년 옥관문화훈장을 받았다. 93년엔 '삼다도소식'으로 한국가요창작인 공로대상을 수상했다. 하지만 1996년부터 파킨슨병을 앓다가 2001년 7월 30일 세상을 등지고 용인 카톨릭 공원묘지에 안장되었다. 작년 8월엔 울산시에서 울산시 병영2동에 '고복수 마을'과 '고복수 길'을 만든다고 발표했다. 대중가수의 이름을 딴 마을과 길이 만들어지는 것은 보기 드문 케이스다. 고복수.황금심 부부가 대중음악사에 남긴 공적은 단순히 한 시대를 풍미했던 가요계의 1호 스타부부라는 사실을 뛰어넘는 큰 의미가 부여된다.

 

 

 

 

부부가수 - 고복수 황금심

 

[민족의 설움 타향살이]

고복수

조국을 잃고 고향을 떠난 사람들에게 한맺힌 설움을 달래주던 타향살이!
그 노래를 불러주던 고복수가 세상을 떠난지도 28년이 흘러갔지만 중국땅 소련땅에서 살고있는 우리교포들은 타향을 부르면서 아직도 고향땅을 그리고 있다.

1991년 KBS에서 인솔한 최희준, 방미, 현숙, 양수경등의 소련 교포위문 공연단이 알마타이에서 공연할 때 고복수 아들 고영준이 타향살이를 노래하였다.

`타향이라 정이들면 내 고향 되는 것을 가도 그만 와도 그만 언제나 타향.`

"타향" 4절까지 노래하는 동안 교포2세 3세가 다같이 따라서 불러 무대와 객석이 하나로 감동의 물결을 이루었다고 한다.

1934년 작곡가 손목인의 작품으로 작사가인 금능인은 동요창작과 보급운동을 하던 인물로 본명은 승응순이다. 노래의 원래 제목은 "타향"이나 가사의 첫 구절인 타향살이가 제목으로 변하여 굳어졌다.

힛트된 "타향"은 국내보다는 중국 만주지방으로 간 사람들에게 더욱 많이 불러졌다. 기록에 의하면 1927년 만주지방으로 이민간 조선인이 100만명이며 고향을 떠나 함경도 등 산악지대에서 화전민이 된 사람이 120만이나 되었다.

" 젖꿀이 흐르는 내 땅 버리고 남의 집 종사리 왠말이런가 해마다 봄오면 고향간다고 십여년 벌어도 갈길이 아득 울어라 울려라 애닲은 소리" <1932년 농민:내신세>

많은 조선인들은 가혹한 일제식민지 수탈에 못이겨 자작겸 소작을 부치던 생활을 청산하고 조상대대로 지켜온 고향을 뒤로하고 만주벌판과 러시아로 떠나갔다.
나중에 돈벌어서 먹을 만하면 조상의 숨결이 살아있는 고국땅 고향땅을 찾아오리라 하면서 북으로 떠나 "타향"을 부르면서 설움을 달래었다.

"타향"에는 민족의 설움이 서려있고 한스러운 역사의 한 페이지가 담겨져 있다. 1940년 만주 하얼빈의 극장공연에서 고복수가 "타향"을 부르자 객석에서 다같이 합창을 하면서 눈물의 바다를 만들었다. 공연이 끝나자 30대의 여인이 무대뒤로 찾아와서 고향으로 보내달라는 편지 한통을 전하면서 전쟁에 남편을 여위고 부모형제를 만나고 싶어도 갈 수 없는 신세라면서 눈시울을 적시었다.

그 이튿날 한여인의 자살사건이 일어났다. 전날 찾아온 그 여인이었다. 비보를 접한 고복수는 순진하고 순한 천성에 밤새 잠을 못이루고 일생동안 잊혀지지 않았다고 한다.

`이원애곡` 광고(1934. 5. 27)

"기차로 하룻밤 걸어서 또 오백리 만주라 그곳은 우리님 계신다오 빚에 팔려 시집간 우리 누님은 칠년전 동짓달에 찬눈물 흘렸다오 <1935년 조선문학사:여인>

고복수의 대표곡은 민족의 한과 울분, 설움이 그 특징이다.

구름따라 흐르는 몸
마음이 설워 낯설은 땅
찬자리에 남모를 눈물
<이원애곡 1절>

도라가리 말만하고 안간지 몇해
가람가에 조각달도 모래가 되고
그 옛날의 푸른 언덕 장미가지도
잎새조차 시드런지 이제 몇 핸가

<꿈 길 천리 2절>


[최초 가수 선발에서 가수로 입문]

1933년 부산에서 열린 콜럼비아 가수선발 경남예선에서 1등으로 입상한 고복수는 1934년 2월 서울 결승에서 2등으로 입상하였다.
흰 고무신에 바지저고리와 검정두루마기 차림의 고복수는 유달리 큰키가 묘하게 조화를 이루어 주위의 시선을 모았다. 2등으로 입상한 고복수는 15원으로 구두와 양복 한 벌을 사입고 희망에 부풀었다. 그러나 콜럼비아 레코드사에서 취입의 기회가 주어지지 않자 OK레코드 이철 사장이 스카웃하였고 그해 5월에 "타향" "이원애곡" 으로 데뷔하면서 이 데뷔곡이 즉시 힛트하였다.

오케 악극단(1939년)

경남 울산에서 큰 잡화상을 하던 여유있는 집 아들로 태어난 고복수는 어릴때부터 노래를 좋아하여 교회에서는 노래 잘하는 아이로 소문났고, 보통학교(초등학교)에서는 학예회 마다 언제나 뽑혀나가서 창가를 불렀다. 외삼촌이 사 준 유성기(축음기)로 노래를 배우면서 보통학교를 졸업하였고 부산에서 실업학교 재학 중에 부모 몰래 60원을 훔쳐서 서울에 오게 된 것이다.

고복수, 남인수, 김정구

1936년 연말에 나온 "짝사랑"이 계속 힛트하여 1937년의 고복수의 인기는 계속되었다.

아 으악새 슬피우는 가을인가요
지나친 그 세월이 나를 울립니다


노래 가사중에 으악새에 관하여 한동안 설왕설래 말이 있었다. 으악새라는 새가 없고 억새풀을 뜻한다는 설과 상징적인 새라는 설로 분분하였지만 가고 없는 작가의 뜻을 알수가 없다.

1939년 8월에 나온 음반 "피장파장" 이후의 고복수 노래는 보이지 않는데 미성의 가수 남인수, 김정구등 신진가수 등장으로 음반취입이 없는 것으로 보인다.

[부부 가수의 탄생]

황금심

1940년에는 가수 고복수의 활동이 극단에 몸을 담고 극장에서의 활동이 주류를 이루었다. 반도악극단에서 공연된 춘향전에는 이도령역으로 노래와 연기를 하고 춘향에는 빅터 전속가수 황금심이었다.

반도 악극단은 출연진으로는 김용환, 박단마, 손일평, 이몽녀, 이인근, 김미라등과 연미복에 죠우넥타이 차림의 밴드 20여명으로 구성된 화려한 무대를 자랑하였다. 이 무대의 이도령과 춘향이는 무대밖에서 3년의 밀애 끝에 1941년 결혼하여 부부가수가 탄생하였다.

고복수와 황금심은 연예계에서 스캔들없이 살아온 잉꼬 부부였다. 황금심은 서울 태생으로 전문학교에 다니던 언니를 따라 부민관(구 국회의사당)에 구경 갔다가 무대의 가수에 매료되어 축음기로 노래를 배우는 중 OK레코드 제작부장의 눈에 띄었고, OK레코드사 사무실에서 사장 이철, 작곡가 손목인, 박시춘, 가수 고복수의 심사에서 가수로 합격하여 "지는 석양 어이하리" "왜 못오시나요" 두곡을 취입하였다.

황금심은 본명이 황금동이 남자이름 같다고 이철 사장이 황금자라는 예명으로 취입시켰다. 이후 OK레코드에서는 부모의 승낙을 받아서 전속계약을 맺자고 독촉하였으나 엄한 아버지에게 이야기를 할 엄두도 내지 못하던 중 OK레코드와 빅터레코드에 작사를 하던 이부풍에 이끌리어 피아노 1대와 전속금 일천원을 받고 "알뜰한 당신"과 "한양은 천리원정"을 취입하였다.

1937년 12월에 발표된 "알뜰한 당신"이 힛트하자 아버지에게 발각되어 머리까지 깍이고 집에 구금되고 말았다. 16세의 황금심은 단식을 하면서 고집을 꺽지않자 어머니의 간청으로 가수의 길을 계속하게 되면서 본명 황금동과 OK에서 취입시 황금자 이름 대신 작사가 이부풍이 지어준 황금심으로 빅터 전속가수의 길을 걷게 되었다.

고복수, 황금심, 백설희(60년대)

고복수와 3년간 열애에서도 고난의 계속이었다. 고복수와 손을 끊으라는 아버지의 호통과 몇 번의 가출까지하며 임신 8개월의 몸으로 결국 부모의 뜻이 굽혀져서 겨우 결혼을 하게 되었다.

구전민요라고 알려져 있는 "울산 큰애기"는 고마부 작사 이면상 작곡으로 황금심이 취입하였다. 고복수의 고향이 울산이란 것을 알고 이면상이 황금심에게 이 노래를 부르게 한 것이다.

일제말기에는 부부가 함께 무대공연을 하였고, 8.15해방 되면서 전옥이 운영하는 백조가극단에서 함께 공연하였다.

그후 고복수는 50년대 조양악극단을 운영하고 황금심은 계속 노래를 불렀다. 8.15해방이후의 힛트노래로는 "삼다도 소식" "뽕따러 가세" "장희빈"등이 유명한 노래이다.

고복수 은퇴 공연 광고(57. 8. 5)

1957년 명동에 있던 국립극장에는 "팬이여 안녕"이라는 타이틀로 고복수 은퇴공연이 있었다. 100여명의 연예계 인물이 총출동하여 2개월 전국 순회공연까지 하여 수입금전부를 고복수에게 전달하였다.

은퇴한 고복수는 운수업을 하였으나 일평생 무대밖에 모르는 실정이라 실패하고 말았다.

1960년에는 영화 "타향살이"를 제작하여 국도극장에서 상영하였으나 4.19 학생의거로 어수선한 시국에 또 한번 실패하여 출판사의 외판사원이 된적도 있었다.

고복수 노래비(울산)

어질고 순한 고복수는 1972년 2월에 식도염과 고혈압으로 사망하였는데 연예협회의 주관으로 이봉조, 김세레나, 신카나리아, 신성일등 연예인들의 "타향살이" 노래속에서 장례식이 치루어 졌다.
황금심은 노환으로 지금 병고에 시달리고 있고 아들 고영준은 현재 가수의 길을 걷고 있다.

고복수의 고향 경북 울산시 울산동에는 고복수노래비가 1991년에 건립되었는데 고복수 흉상과 "타향"의 가사가 새겨져 있다.

해마다 11월에 고복수 가요제가 울산에서 열리고 있어 고복수를 기념하고 있다.


[고복수 대표곡]

타향 (1934년 OK레코드 금능인 작사, 손목인 작곡)
이원애곡(1934년 OK레코드 금능인 작사, 손목인 작곡)
휘파람(1934년 OK레코드 금능인 작사, 손목인 작곡)
사막의 한(1935년 OK레코드 금능인 작사, 손목인 작곡)
꿈길천리(1935년 OK레코드 남풍월 작사, 손목인 작곡)
짝사랑(1936년 OK레코드 박영호 작사, 손목인 작곡)

[황금심 대표곡 ]

알뜰한 당신(1937년 빅터레코드 조명암 작사, 전수린 작곡)
여창에 기대어(1938년 빅터레코드 이부풍 작사, 조자룡 작곡)
안오시나요(1939년 빅터레코드 이부풍 작사, 문호월 작곡)
만포선 천리길(1939년 빅터레코드 화산월 작사, 문호월 작곡)
외로운 가로등(1939년 빅터레코드 이부풍 작사, 전수린 작곡)
추억의 탱고(1939년 빅터레코드 이경주 작곡)

 

[고 복 수 노래 ]

타향 (1934년 OK레코드 금능인 작사, 손목인 작곡)

1. 타향살이 몇해련가 손꼽아 헤여보니
고향 떠나 십여년에 청춘만 늙고

2. 부평같은 내신세가 혼자도 기막혀서
창문열고 바라보니 하늘은 저쪽

3. 고향 앞에 버드나무 올봄도 푸르렸만
호들기를 꺽어불던 그때는 옛날

4. 타향이라 정이들면 내고향 되는 것을
가도그만 와도그만 언제나 타향

꿈길천리(1935년 OK레코드 남풍월 작사, 손목인 작곡)

1. 온길천리 갈길 천리 꿈길도 천리
천리길이 멀다마소 님만 계시면
폭풍우가 구질어도 나는 가겠네
가시성이 험난해도 나는 가겠네

2. 도라가리 말만하고 안간지 몇해
가람가에 조각돌도 모래가 되고
그옛날의 푸른 언덕 장미가지도
잎새조차 시들은지 이제 몇핸가

4. 옷소매를 여미면서 비는 마음은
꿈길천리 님계신곳 언제나 갈가
산과 물이 아침저녁 말이 없으니
물어볼 곳 조차없는 적막한 신세

짝사랑(1936년 OK레코드 박영호 작사, 손목인 작곡)

1. 아 으악새 슬피우니 가을인가요
지나친 그 세월이 나를 울립니다.
여울에 아롱젖은 이즈러진 조각달
강물도 출렁출렁 목이 메입니다.

2. 아 뜸북새 슬피우니 가을인가요
잃어진 그사랑이 나를 울립니다.
들녘에 떨고 섯는 임자 없는 들국화
바람도 살랑 살랑 맴을 돕니다.

3. 아 단풍이 휘날리니 가을인가요
무너진 젊은 날이 나를 울립니다.
궁창을 헤매이는 서리맞은 짝사랑
안개도 후유 후유 한숨집니다.

 

[황 금 심 노래]

여창에 기대어(1938년 빅터레코드 이부풍 작사, 조자룡 작곡)

1. 때묻은 소매자락 바람에 떤다
객창에 시달린 몸 객창에 시달린 몸
한숨만 긴데
정든 산천 정든 사람 다 버려두고
만리타향 여기까지
왜 내가 왔나 왜 내가 왔나

2. 흩어진 머리카락 달빛에 젖는다
떠돌아 지친 마음 떠돌아 지친 마음
한도 많은데
이름모를 낯선 땅에 외로이 와서
문설주를 부여잡고
왜 내가 왔나 왜 내가 왔나

3. 찢어진 치마폭에 눈물이 번진다
가슴에 엉킨 사정 가슴에 엉킨사정
풀길 없는데
설음 많고 눈물 많고 하소연 많은
의지가지 없는 몸이
어데로 가나 어데로 가나

외로운 가로등(1939년 빅터레코드 이부풍 작사, 전수린 작곡)

1. 비오는 거리에서 외로운 거리에서
울리고 떠나간 그옛날을 내 어이 잊지 못하나
밤도 깊은 이거리에 희미한 가로등이여
사랑에 병든 내마음속을 너마저 울어주느냐

2. 가버린 옛생각이 야속한 옛생각이
거리에 시드는 가슴속을 왜 이리 아프게 하나
길모퉁이 외로이 선 서글픈 가로등이여
눈물에 피는 한송이 꽃은 갈곳이 어느 편이냐

3. 희미한 등불아래 처량한 등불아래
죄없이 떨리는 내설음을 뉘라서 알아주려나
심지불도 타기전에 재가 된 내사랑이여
이슬비 오는 밤거리우에 이대로 쓰러지느냐

추억의 탱고(1939년 빅터레코드 이경주 작곡)

1. 야자수 그늘밑에서 둘이서 놀던 그때가
뚜렷이 내눈앞에서 애끓는 설음만 짜낸다
아- 지금은 추억만 남았다.
창앞에 보슬비 소리 울고만 싶구나

2. 흐르는 달빛 아래서 사랑을 풀던 꿈이여
아직도 나의 가슴은 그시절 노래를 부른다.
아 이제는 추억만 남았다.
외로운 내 노래소리 눈물에 젖는다.

 

 

이 근 태 (가요114 기획위원, 가요사 연구가)

출처 ; 추억의 음악감상실 가요114

 
다음검색
댓글
최신목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