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강 여행13 - 구시가지 시진두에서 돌아와 호텔 텔레비젼에서 대만을 보다!
여행 7일째인 10월 25일 안휘성 성도 허페이(합비) 에서 기차를 타고 난징을 거쳐 전장
镇江(진강) 에 도착해 초산공원 焦山公园 과 북고산 北固山 甘露寺 (감로사) 를 봅니다.
그러고는 진산 金山(금산) 에 이르러 금산사 金山寺 를 구경하고는 두정거장 떨어진
옛날 가옥 이 늘어선 오래된 동네인 시진두 西津度(서진도) 구시가지를 구경합니다.
진강의 구시가지 시진두 西津度(서진도) 歷史文化街(역사문화가) 는 2차 아편전쟁후 개항
된 5곳 항구중에 하나 로 구 영국대사관 등 옛 건물들이 그대로 남아있는 동네 입니다.
그러고는 밤이되어 버스를 타고 호텔에 돌아와 텔레비전 을 보는데 石林斗牛记(석림두우기)
라고 해서 소싸움 을 하는데...... 싸움소를 기르는 사람의 얘기 가 잔잔히 펼쳐집니다.
소싸움을 보다가 불현듯 유도 가 생각나는 것이니, 거구의 소가 있는 힘껏 돌진하다가
상대방 소에 받혀 한바퀴를 굴러서 쓰러지는데.... 상대방 힘을 이용하는 것 이라?
나는 폐 타이어 는 야구선수 들이 배트를 단련 하는데만 쓰는줄 알았더니
소가 상대방을 들이받는 연습 용도로 쓰이는데는.... 그저 놀랍네요?
화면이 바뀌더니 오래된 탑과 성 이며 해자 가 나오더니 또 산정에 우뚝 서있는
정자 까지 중국은 크고 넓은 나라라 관광자원 이 무진장 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러고는 화면이 바뀌는데 CCTV 4 中文国际(중문국제) 텔레비젼인데 "대만특집"
으로 과거 일본이 대만을 점령하고 총독을 보내 통치 하던 시절이라....
화면에는 1,895년 6월 7일 이라는 날자가 나오고 일본 군대가 저항하는 대만인들을
잡아다가 목에 칼을 씌워 구금한후 처형 하는 장면이 이어지는데... 그런데
일본의 대만 침략은 우리 조선과 관계가 있으니 조선 대신 대만을 침략한 것이지요?
생각해 보니 오늘날 우리 대한민국은 대만의 중화민국 에서
볼 때 “의리없고 신의를 저버린 배신자”
이니..... 나는 그런 점에서 부끄럽고 가슴이 아픕니다.
1992년 8월 24일 한국은 중국(중화인민공화국) 과 수교 를 하면서 중국이 내세운
“하나의 중국 원칙”때문에 오랜 우방국인 대만(중화민국)과는 단교 해야 했습니다.
한국과 중국이 베이징에서 한중 수교를 축하 할 때.... 서울 한복판 명동의
대만 대사관 에서는 2천여 직원과 화교들의 믿는 도끼에 발등
찍힌다고 눈물 속에 조국 중화민국의 국기인 청천백일기 를 내려야만 했습니다.
마지막 대만대사였던 진수지 는 "우리는 반드시 돌아온다" 는 의미심장한 말을 남기고
한국을 떠났으며 타이베이 한국 대사관은 “오랜 친구” 한국의 배신에 항의 하는
성난 시민들의 시위 속에 황망히 “대한민국 제1호 재외공관” 대사관 현판을 떼었습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는 장개석의 지원 이 아니었으면 모두 굶어죽었을 것이며 카이로회담
에서 장개석이 처칠과 루스벨트를 설득해 한국의 독립 약속을 받아내지 않았던가요?
김구는 일본 패망소식에 대성통곡하자 사람들은 기뻐서 우는줄 알았지만... 김구는 얼굴이
사색이 되었으니 광복군은 독립전쟁을 시작도 못했는데 미국이 우릴 독립시켜줄지 걱정이라?
조선인이 일본에 쌀과 면화 공출을 거절하고 징용이나 징병도 거부하며 2천만 조선인들이
들고 일어나 싸웠으면 태평양전선에 갈 일본군 50만이 3년간 조선에 발이 묶이니 미군
1만명 목숨을 구했다면 독립을 주장할 권리 가 생기는데... 조선인들이 건설한 활주로
에서 뜬 일본기가 미 함정을 격침하고 조선인들이 일본군에 입대해 미군을 쏘아 죽였으니?
2차대전이 끝난 후에도 이승만과 장개석 은 아시아 반공연맹 을 창설하고 공산주의 위협
을 비롯해 모든 분야에서 대만과 한국 은 절친한 "우방" 으로 서로 협력해 왔습니다.
우리 한국으로서는 광대한 중국 시장이 탐이나니 대만과 단교하는 것이야 어쩔수 없다손
치더라도 사전에 "특사" 를 보내 이해를 구하고 사후를 논의 했어야 옳았습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시절부터 전후 동서냉전에 우방 으로 저들의 상실감 을 달래야 했거늘!
하지만 노태우 정권 은 수교 협상을 비밀리에 진행 했으니 특사는 없었으며 사전통지
조차 하지 않았고 협상 발표 하루전 에야 "대사관을 통해 일방통고" 합니다.
대만인들은 들고 일어나 태극기를 불태우며 배신자 한국을 성토하는 데모대 로 덮힙니다.
그리고 "대한민국 정부는 은혜를 원수로 갚는다" 고..... 대만 정부의
재산인 서울의 대사관 등 여러 건물을 경찰을 동원해서
협박해서는 무력 으로 빼았아 중국(중공)에 무상으로 갖다바쳤던 것이지요!
국제사회는 이런 일련의 과정을 유심히 보았거니와 “한번 배신한자는 두 번도 배신”
하는 것이니 "어려울때 친구가 진정한 친구" 라고 했는데.....
달면 삼키고 쓰면 뱉는다고 중국은 훗날 유사시 과연 신의없는 한국 을 믿을수 있겠는가?
국제관계란게 원래 냉혹한 것이라... 영원한 친구도 없고 영원한 적도 없으니 국익에 따라
움직이는 것이지만, 대만과 단교하더래도 우리가 장개석 정부에서 은혜를 입었으니
대통령 특사 를 보내 처지를 설명하고 어쩔수 없는 점을 이해시켜 양해를 구하고...
대사관 대신 설치할 기구등 미래관계를 의논하는 절차가 전혀 없이 일방 통고로 끝냈네요?
대만의 역사 를 살피건대... 1543년 포르투갈 이 대만을 발견(?) 하고 차지하자
1662년 네델란드 가 포르투칼인들을 총포로 쫓아내고 빼았는데... 스페인 도
대만 북부를 일부 점령하는 가운데 청나라가 만리장성을 넘어 명나라를 멸망 시킵니다.
그러자 정성공 이 대만으로 들어와 소수 수비병을 두었던 네델란드를 축출하고 지방정권 을
세우는데 청나라가 해군이 약하니 정씨왕국은 영국과 통상조약 을 체결하는 등 일본,
필리핀, 캄보디아 등과 통상하고 1665년 청의 공격을 방어하나 결국은 청의 영토 가 됩니다.
1840년 아편전쟁 에 이어 1858년 영.불 연합군의 공격에 굴복한 청조는 6월 텐진에서 서구
열강 4국과 조약을 체결하고 대만의 4개 항구 ( 안핑.단수이.지룽.다고우 ) 를 개방합니다.
1884년 프랑스군이 지룽을 공격 하였으나 청나라 수비군의 반격으로 격퇴 되었으며
미국, 영국 등 서구열강들은 각종 구실로 대만을 침략 하였으나 성공하지 못합니다.
1871년 일본(유구, 오키나와) 어선 선원 이 대만 원주민에게 살해 되자..... 일본 은
조선을 침략하자는 정한론 을 주장하는 무사들의 불만도 달랠겸 1천 300명의
원정대를 대만에 파견했는데 청나라가 병력을 증파 하자 50만냥을 받고 철수 합니다.
당시 일본에서는 메이지유신 의 주역 사이고 다카모리 등의 "조선을 정벌" 하여 손에
넣자는“정한론”이 팽배했는데 오쿠보 도시미치 와 이토 히로부미 는 이를 거절합니다.
조선을 침략 하자면 종주국 청나라 나 러시아등 여러나라와 전쟁해야 하는데 일본은 아직
군대를 갖추지 못했으니 그 대안으로 소수병력을 대만에 보내 민심을 달랬던 것인데...
그럼에도 분이 차지 않으니 사쓰마등 무사들의 추대로 사이고 다카모리는 반란 을
일으켜 1만 5천 무사들이 구마모토 로 진격하니 6개월 넘게 이어진 서남전쟁 내란 입니다!
일본은 1879년에 이르러 옛날 17세기 초반에 사쓰마번(가고시마현) 이 이미 점령해
비밀리에 간접 통치하던 류추번 (유구번, 오키나와) 을 폐하고 오키나와현 을
세워 정식으로 류구를 일본 영토에 편입 시켰으며 "대만 병합" 에도 눈독을 들입니다.
1894년 조선의 영유권 을 놓고 벌어진 청.일 전쟁에서 승리한 일본 은 이홍장을
시모노세키로 불러 강화회담 끝에 2억냥의 전쟁배상금 외에 요동 반도 및
대만, 펑후 제도 를 일본에 영구 할양받았으니... 일본 영토는 만주로 확장됩니다.
대만인 들은 1895년 대만민주국 성립을 선포하고 초대 총통으로 대만순무 당경숙 을
추대하니 일본군 해군 대장 가바야마 스케노리의 제1 여단은 지룽을 점령 합니다.
6월 당경숙은 본토로 도망쳤고 일본군이 타이베이에 무혈 입성 하므로써
대만민주국은 와해 되고..... 일본은 "총독을 보내 통치" 하게 됩니다.
대만 도 그러하지만 아시아 각국은 2차 대전시 일본군의 침략 을 받아 큰 희생 을 치뤘는
데도 중국이나 한국 과 달리 "일본에 대한 호감도가 80%" 를 넘는 것은 불가사의 라?
이는 인도와 미얀마 및 말레이는 영국 이 베트남, 라오스, 캄보디아는 프랑스 가
인도네시아 는 네델란드 그리고 필리핀은 스페인과 미국 의 "식민지" 였으니...
아시아 40여개 국가 중에 완전 독립을 유지한 유일한 나라 가 "일본" 으로 근대화마저
이룩해 강국이 되자 아시아인들은 "일본을 존경하고, 꿈의 대상" 이 되었던 것입니다.
해서 중국의 국부 손문 과 미얀마의 아버지 아웅산 을 비롯해 인도, 말레이, 베트남
및 필리핀 독립지사 들은 "일본에 망명" 해 일본인들의 도움으로 조국 독립을
준비했던 것이니.... 이들 동남아 국가의 독립지사들에게는 "일본은 은인의 나라" 라!
비록 2차대전시 일본의 침략을 받아 점령되고 피해 를 입었다고는 하나 이로인해 전후 독립
하게 되었으니 만일 일본의 침략이 없었다면 아시아 각국은 수십년간 더 "유럽인들의
가혹한 식민통치" 에 시달렸을 것이라? 알제리는 1954년에 독립전쟁 을 시작해 9년간
프랑스군과 전쟁해 150만명이 죽고서야 독립을 쟁취하니 아프리카국가들은 대동소이 합니다!
실제로 프랑스 는 2차대전 독일에 점령당했고 베트남도 일본에 빼았겼는데 전쟁이 끝나자
산적한 국내재건을 뒤로 미루고 배에 군인들을 태워 머나먼 베트남 까지 보내 식민지를
사수하기 위해 발악했으니 10년이라는 긴 전쟁끝에 디엔비엔푸 패배후에야 철수했으며
네델란드도 인도네시아 를 되찾을려고 군대를 보내 독립군과 싸우는등 집요함 을 보입니다?
더욱 일본의 대만 식민통치 는 영국과 프랑스 식민지에 비해 부드러웠으니....
일본 점령기에 학교를 세워주고 도로를 놓고 철도를 건설 하며
발전소와 부두시설 및 공장 을 지어주고는 전후 떠났으니 "근대화의 은인" 이라!
일본은 전후 다시 경제를 재건 하게 되자 대만을 비롯 아시아 각국에 원조와 투자 를 병행
했으니 그로 인해 경제가 발전 하는데 아시아인들이 "일본을 싫어할 리가" 있겠는지요?
한국인들은 대만등 동남아인들이 침략 을 받았으니, 일본을 싫어할거라는 편견 을 갖습니다.
그리고 이어지는 장면은 중국 동남쪽 해상 에 서사군도(파라셀) 와 남사군도
(스프래틀리) 에서 "중국과 미국이 힘겨루기" 를 하는 장면이라?
장차 중국과 미국에서 선택을 강요받는 상황이 오면 우린 "누구편에 서야" 할러나?
첫댓글 선생님 덕분에 동아시아 근현대사 공부를 많이 하고 갑니다. 감사합니다.
대만의 역사도 파란만장 한가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