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태백산맥' 벌교를 찾아서 글/사진:이종원
우리나라 소설 중에서 가장 위대한 소설을 꼽으라면 난 주저 없이 태백산맥을 꼽는다. 질곡의 역사를 살아온 민초들의 고달픈 삶과 비극을 가장 진솔하게 그려내고 있기 때문이다. 소설을 읽으면서 그들이 과연 실존인물일까? 그리고 작가가 벌교의 무엇을 보고 그렇게 생생하게 그려냈을까? 그런 의문을 품으면서 벌교라는 땅을 꼭 가고픈 충동을 느꼈다.
보성과 순천 사이에 있는 벌교를 몇 번 지나쳤지만 늘 경유지에 불과했기에 늘 미안한 감을 가지고 있다. 그러면서 언젠가는 일부러 시간을 내어 태백산맥의 살아 있는 현장을 찾겠노라고 결심을 했다. 몇 년 전 보성공무원인 위승환씨로부터 문학기행 윤곽을 대충 더듬어 보았고 이번에 또다시 기회가 왔다. 이번 여정은 순전히 벌교만을 위한 시간을 갖고 싶었다. 그러나 그런 내 염원을 시샘이나 하듯 35도를 오르내리는 폭염이 내발걸음을 무디게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차로 다니지 않고 두 발로 다니면서 도심 속에 스며 있는 문향을 맡으려고 애를 썼다.
주차는 읍사무소에 하는 것이 좋다. 그곳부터 벌교역까지 걸으면서 숨은 그림 찾아내듯 흔적들을 발견해냈고 그 곳에서 살았던 인물들을 대입해보면서 짜릿한 흥분을 맛보았다. 다 쓰러져가는 적산가옥에서 당시의 역사를 찾아냈고, 말끔하게 새로 지은 건물에서도 활자 속에 스며든 추억을 끄집어냈다. 득량만의 찰진 꼬막 내음부터 소금땀 흘리면서 밭 갈고 있는 농민으로부터 태백산맥은 단절된 역사가 아닌 오늘날에도 이어진 살아 있는 역사임을 깨닫게 되었다.
(사진:읍사무소에 주차하고 벌교 시내를 걷는 것이 좋다.) 아마 10년전 쯤 소설 태백산맥을 처음 접했던 것 같다. 전라도 사투리에 익숙하지 않아 한 줄한 줄 읽어내기가 무척이나 고역이었다. 그러나 책 속에 푹 빠지면서 나도 모르게 벌교 사람이 되어 있었고 함께 긴장하면서 시대의 아픔을 나누면서 어느덧 내가 벌교사람이 되어 버렸다. 그만큼 소설은 사람을 흡인하는 마력이 있었다. 아마 10일동안 소설책은 내 분신과 다름없었다. 밥을 먹으면서도 책을 펼쳤고 화장실이나 버스에서도 그 책은 날 떠나지 않았으며. 감동의 여운을 확실히 각인 시키고자 임권택 감독의 '태백산맥' 비디오까지 빌려보는 정성을 발휘했다.
그에 그치지 않고 소설 '아리랑'을 연달아 읽으면서 김제와 변산반도를 둘러보게 되었고, 소설 ‘한강’을 읽으면서 나 역시 굴절된 역사를 살았던 사람임을 알게 되었다. 단순히 소설 때문에 이 머나먼 벌교까지 제발로 찾아 왔으니 난 아무래도 조정래씨의 올가미에 단단히 걸려든 모양이다. 며느리에게 '태백산맥' 10권을 모두 필사하라고 명을 내릴 정도로 이 소설에 대한 그의 애착은 대단하다. 힘겨운 역사를 민초들의 고단한 삶으로 부드럽게 아우르는 재주도 그만이지만 나열된 언어 하나하나가 꿈틀거리는 생명력을 가지고 있어 충분히 필사할 만한 가치가 있다.
소설 태백산맥의 '벌교'
벌교를 문외한이 설명하는 것보다 차라리 소설 '태백산맥'에 묘사된 글을 통해 벌교를 보는 것이 훨씬 나을 것이다.
‘벌교는 한마디로 일인들에 의해서 구성, 개발된 읍이었다. 그 전까지만 해도 벌교는 낙안고을을 떠받치고 있는 낙안벌의 끝에 꼬리처럼 매달려 있던 갯가 빈촌에 불과 했다. 그런데 일인들이 전라남도 내륙지방의 수탈을 목적으로 벌교를 집중 개발시킨 것이었다. 벌교 포구의 끝 선수머리에서 배를 띄우면 순천만을 가로질러 여수까지는 반나절이면 족했고, 목포에서 부산에 이르는 긴 뱃길을 반으로 줄일 수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벌교는 고흥 반도의 순천, 보성을 잇는 삼거리 역할을 담당한 교통의 요충이기도 했다. 철교아래 선착장에는 밀물을 타고 들어온 일인들의 통통배가 득실거렸고, 상주하는 왜인들도 같은 규모의 읍에 비해 훨씬 많았다. 그 만큼 왜색이 짙었고, 읍 단위에 어울리지 않게 주재소 아닌 경찰서가 세워져 있었다. 읍내는 자연스럽게 상업이 터를 잡게 되었고, 돈의 활기를 좇아 유입인구가 늘어났다 모든 교통의 요지가 그러하듯 벌교에도 제법 짱짱한 주먹패가 생겨났다. 그래서 언제부턴가 '벌교에 가서 돈자랑, 주먹자랑 하지 말라'는 말이 '순천 가서 인물 자랑하지 말고, 여수 가서 멋 자랑 하지 말라' 는 말과 어깨를 나란히 하게 되었다.‘
내가 소지하고 있는 소설책 1권에 밑줄이 쳐 있었고. 여백에 다음과 같은 글귀가 적혀 있었다. '언젠가는 벌교에 꼭 갈 것이다. 그리고 느낄 것이야'
김범우의 집
국회의원 최익승의 계략에 의해 빨갱이로 몰린 김범우가 경찰서 유치장에 갇혀 있다가 순천경찰서에 이첩된 뒤 그에 대한 대책을 세우기 위해 김범우의 아버지 김사용이 황급히 문중회의를 열었던 곳으로 묘사된 곳으로 나온다. 김사용은 대쪽같은 지조를 지진 유학자지만 큰아들 김범준을 독립군으로 내보내면서 작은아들 범우를 학병으로 보낼 수밖에 없었다. 선대로부터 물려받은 전답을 팔아 독립군 자금으로 지원했고 또 한편으로는 일본을 위해 거액을 희사할 수밖에 없었던 이중적 삶을 살 수밖에 없었다. 아무런 대가도 바라지 않은 채 선뜻 땅을 내주며 도왔던 자식과도 같은 염상진에 의해 인민재판에까지 끌려 나가 수모와 배신감을 눈을 감고 침묵으로 삭혀야 했던 김사용 노인의 회한이 서린 곳이 바로 김범우의 집이다.
소설 속에 나온 김범우나 김사용은 실존인물이 아니다. 다만 작가와 이 집 아들이 초등학교 동기였고, 그 집에 자주 놀러갔다고 한다. 실제 조정래 생가에서 그리 멀리 떨어져 있지 않다. 당시에 먹기 힘든 쌀밥누룽지에다가 귀한 설탕을 뿌려 먹은 기억이 강렬했다고 한다. 어린 시절 지조와 부의 상징으로 여겨졌고 이 집을 소설 속의 배경으로 선택한 것이다. 지주의 집답지 않게 마당도 작고 소박해 조금 의아스러웠다. 지주의 집은 쌀을 넣는 곳간만 크면 됐지 마당이 넒을 필요가 없기 때문이란다. 대신 집 옆에 엄청 넓은 곳간터가 자리 잡고 있다.
담장 넘어 시선을 내려다보면 낙안 들녘이 한없이 펼쳐진다. 소작농들이 일을 잘 하나 못하나 감시하는 곳이기도 하다. 그 너머에 조정래가 태어났던 선암사를 품고 있는 조계산이 보인다. 그 곳 어디엔가 율어마을이 있을 것이다. 낮에는 경찰이, 밤에는 산사람이 나타나는 곳이다. 소설속의 지명이 하나둘씩 나타날수록 가슴에 묘한 흥분으로 일렁인다. 김범우 집에서 벌교천을 건너면 소설속 횡갯다리로 불리는 벌교홍교가 나온다.
벌교 홍교 (보물 제304호)
우리나라에 남아 있는 홍교 가운데 규모가 가장 큰 것이 바로 벌교 홍교다. 이 다리는 선암사 승려가 만들었다고 하는데 아름다운 승선교의 비밀을 이곳 홍교에 적용했을 것이다. 원래 벌교 (筏橋) 의미는 '뗏목다리'란다. 3아치의 홍교 이외에 나머지는 뗏목으로 된 다리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니까 바닷물이 드나들면서 뗏목다리도 조수간만의 차로 위아래로 오르내렸을 것이다. 홍교는 한눈에 봐도 튼튼하게 짜여 있음을 알 수 있다. 아치 가운데 놓여 있는 용두석은 물길을 타고 들어오는 나쁜 기운을 막기 위함이다.
자애병원(현 벌교어린이집)
홍교에서 읍사무소 가는 길 왼편에 벌교어린이집 건물이 바로 자애병원이다.실제 이름이 아니라 후생병원이라는 양의원이 있었는데 소설속 상상으로 그린 곳이다.총상을 입은 안창민이 고통과 죽음에서 벗어나기 위해 몸을 피한 곳으로 나온다. 생명의 고귀함을 존중하는 전명환 원장을 믿었기 때문이다. 병원으로 들어가는 정문과 안채에서 벌료천으로 나가는 뒷문이 있었기에 부상을 치료한 안창민은 뒷문으로 나갈 수 있었다. 어린이집의 아이들 재잘거리는 소리에서 이지숙, 안창민, 염상진, 낙안댁, 소화등 태백산맥을 그려냈던 인물들이 오버랩 된다.
채동선 악보비 와 청년단숙소(벌교읍사무소)
읍사무소는 채동선음악당과 함께 건물을 쓰고 있다. 주차공간도 넉넉해 문학기행을 오신 분들은 이곳에 차를 주차하고 걷는 것이 좋다. 채동선 선생은 1901년 벌교에서 태어나 일본과 독일에서 음악을 공부했으며 정지용의 시 ‘고향’에 곡을 만들었으며 1백여편에 달하는 곡을 남겼는데 민족성과 애국성을 지닌 음악을 남겼다.
박물관에는 채동선의 음악세계를 엿볼 수 있는 다양한 유물이 전시되어 있다.
읍사무소 뒤편이 바로 청년단 건물이 있던 자리인데 지금은 건물은 사라지고 텅빈 공간만 자리하고 있다. 청년단 염상구가 자애병원 간호원을 족쳐 안창민을 치료했던 사실을 밝혀낸 곳이며 평소 흑심을 품었던 솥공장 딸 윤옥자의 가방에 편지를 넣어 빨갱이로 몰아 넣고 마누라를 삼은 곳이기도 하다. 그 뒤편 산이 계엄사령관 심재모가 벌교를 지키기 위한 M1고지이고 그 속내에 문기수가 지령을 받기 위해 들렸던 용연사가 자리하고 있다.
북초등학교(현벌교여자 중학교)과 금융조합(현 벌교농민상담소)
북초등학교는 여순반란사건으로 벌교를 장악한 염상진 등 좌익세력들이 인민재판을 열었던 곳이다. 처단했던 대상이 경찰관, 우익청년, 월남가족 이외에도 무고한 양민이 피해를 당한 곳이며 작품속에서 김범우의 아버지 김사용이 인민재판을 받던 곳으로 나온다.
금융조합은 비교적 번듯한 일제 건물이 여태 남아 있었다. 붉은 벽돌을 바탕으로 하고 그 사이사이에 돌을 깎아 박아 건물의 견고함과 장식적 효과를 동시에 노린, 일본인들이 관공서형 건물로 즐겨 지었던 그 모습이다. 소설 속에서 금융조합장 송기묵이 일제 강점기로부터 금융조함에 근무해온 이력을 지닌 것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친일파가 척결되지 못한 이 땅의 비극이 수없이 많은 분야에서 이런 식으로 기득권을 행사했음을 작가는 보여주고 있다. 송기묵은 돈을 다루는 사람답게 치부에도 능해 은밀하게 고리대금업까지 해가며 탄탄한 재력을 확보해 딸을 서울이화여대에 유학시키지만 결국은 좌익에게 죽고 만다. 금융조합은 현재 벌교읍 농민상담소로 쓰인다.
남도여관
판자벽에 함석지붕을 한, 전형적인 일본식집이다. 한때 보성여관이란 간판을 달고 영업을 했지만 거의 손님이 없었고 지금은 그나마도 문을 굳게 닫고 있다. 근대문화유산으로 지정되어 보성군과 문화재청이 협력한 문화유산국민신탁에서 유물을 관리하고 있는데 현재는 보수 및 리모델링 중이다.(관람문의 나종필 016-417-4388)
"아줌마..손님 많게 하려면..이 곳에 '태백산맥 남도여관' 이라고 써붙이세요. 그럼..사람이 많이 몰려들 겁니다." 그렇게 얘기했더니 수줍음을 감추지 못하는 보성여관 할머니가 왠지 정겹게 보인다. 하긴 사람이 몰려드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예전의 모습을 변함없이 지키는 것이 더욱 중요하리라.
"어렸을때부터 조정래씨가 이곳에 자주 놀러왔어요. 소설을 쓰면서도 자주 들락거렸는데...어휴..그렇게 유명한 소설가가 될 줄은 몰랐어요."
남도여관은 소설 속에서 경찰토벌대장 임만수와 그 대원들의 숙소로 이용되어오다가 계엄사령관으로 부임한 심재모에 의해 민폐를 없애고 경찰토벌대의 기강을 세워야한다는 이유로 선창 옆 창고로 내몰리게 된다.
또 이런 대목도 있다. 억지로 경찰토벌대의 후원회장을 떠맡은 정현동이 임만수와 그 휘하의 경찰토벌대가 묵었던 비용을 도맡다시피 했었고, 이 때문에 정현동은 더 이상 벌교에서 미적거려 보아야 축나는 것은 그의 재산뿐이라는 생각 하게되어 결국 광주로 떠나 안전을 도모하는 것이 현명한 일이라고 결정하게끔 한 곳이기도 하다.
남초등학교
벌교남초등학교는 손승호와 이지숙이 교사로 근무했던 학교일 뿐 아니라, 6·25남침으로 벌교를 장악한 빨치산, 소위 야산대 사람들이 인민재판이라는 미명으로 무고한 양민에게 총살결정을 내렸던 곳이며, 또한 심재모-백남식-양효석으로 계엄사령관이 바뀔 때마다 열병식을 갖던 곳이기도 하다.
특히 심재모의 계엄군이 처음 벌교에 진주했을 때 일정시대부터 그때까지 읍내사람들은 무장을 갖춘 이 백 여명의 대오를 이룬 병력을 본적이 없었기에 계엄군의 행군 그 자체가 구경거리였고 교문에서 제지당한 읍내 아이들이 발맞추어 행군하는 그 신기한 모습을 보기 위해 닫친 교문의 창살사이로 크게 뜬 눈알을 굴렸던 것이 묘사되고 있기에 천진난만하고 맑은 그 때 그 아이들의 모습과 휘 둥그레 뜬 눈알을 상상하면 재미있을 것이다.
안창민을 숨기고 치료하도록 도와주고 피신하도록 연락했던 죄로 징역 1년에 집행유예를 선고받은 이지숙이 사표를 내기 위해 학교에 나갔다가 마지막으로 아이들이라도 한 번 만나보고 싶었지만 '정작 만나서 무엇을 할 것인가, 만나보고 싶은 마음만 간직하면 되었지.'하는 생각으로 마음을 추스리고 책상서랍을 정리하고, 뒤돌아보지 말자고 자신에게 거듭 약속했던 곳이다. 고개를 숙인 채 운동장을 가로질러 나오던 모습을 상상해도 좋다. 지금은 운동장에 잔디를 깔아놓아 도무지 예전의 비극의 흔적을 찾아내기 힘들다.
술도가(현 국일식당)
소설에서 묘사하고 있는 술도가집 주인 정현동을 보자. 정현동은 일본인에게 금덩이를 주고 그 술도가를 손에 넣었던 전력 때문에 도둑이 제 발 저리더라고, 해방의 들뜬 분위기 속에서 친일파의 이름이 줄줄이 엮어지고 또한 그 이름들은 욕과 함께 뒤범벅이 되어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게 되자 고민 끝에 정현동은 ‘치안대의 이름으로 친일파를 가차없이 처벌해야 한다’면서 기세를 올리는 청년단장 염상구에게 은밀하게 돈 뭉치를 내밀어 매수하는 기지를 발휘하였고, 상상할 수 없는 거액을 손에 쥐게 된 염상구는 「공일날 남국민학교 운동장에서 잔치를 벌여 여론을 잠재우자」는 제안으로 명분과 실익을 서로 나누기도 한다.
또한 소설에서 벌교를 장악하고있던 반란군들이 지주들을 반동으로 몰아 처단할 때 정현동은 악덕 지주로 몰렸음에도 아들 정하섭의 덕택에 수월하게 죽음을 면하지만, 반란사건이 진압된 후 결국 빨갱이로 몰려 경찰서 유치장에 갇히게 되고, 부패한 국회의원 최익승의 힘을 빌어 풀려 나오면서 얼떨결에 술도가의 반을 넘기기로 했다가 욕심을 부려 고흥의 지주에게 몰래 팔아넘기려 하기도 한다.
정현동은 중도방죽 안에 이 백 말뚝이나 되는 많은 농지를 사들이고 농지개혁에서 자기 논을 제외시키기 위해서는 논을 염전으로 만들면 된다는 얄팍한 요량으로 바닷물을 퍼 올리다가 결국 흥분한 소작인들의 손에 죽임을 당한다. 정현동의 주검은 그가 꿈꾸던 염전이 아니라 바닷물이 담긴 논바닥에 눕게 된 것이다. 논고랑에 쳐 박혀 툴툴거리며 발동이 꺼져가던 그의 양수기와 함께 허망하게 눈을 감는다.
그 정현동이 집밖에서 참혹하게 죽은 까닭에 혼을 달래기 위한 굿을 하게 되었고 그 씻김굿을 주관하는 소화는 이지숙의 부탁을 받아 죽은 정현동의 혼(魂)의 소리를 빌어 중도방죽 소작인들에게 계속해서 소작을 부칠 수 있도록 해주기도 한 곳이다. 전혀 상관이 없는 술도가 사장이 소설에서 그렇게 그려지는 바람에 조정래씨에게 아주 좋지 않는 감정을 가지고 있다고 전해진다. 하긴 그럴만 하다. 소설속에서 가장 치사한 인간이 정현동이었으니까... 소설은 그저 소설일진대.
남원장
당시 벌교에서 유일했던 요정 남원장은 샛길의 중간쯤 왼편에 위치해 있었다고 한다. 남원장은 유지들의 대소모임이나 기관장들의 연회가 자주 열렸던 장소로 나온다. 소설에서는 구석진 방에서 정현동이 고흥의 서운상과 마주 앉아 양조장과 논을 은밀하게 흥정하기도 한 곳이며, 계엄사령관 심재모의 환심을 사기 위해 유지들이 큰방에다 걸찍한 술판을 벌이지만, 예정된 공무를 이유로 들어 심재모가 불참해 버리자 자기네들끼리만 서울 말씨를 쓰는 나긋나긋한 아가씨들과 함께, 찝찝하기는 했지만 그런 대로 흔쾌한 술자리를 갖기도 한 곳이다.
남원장에 있는 아가씨들 가운데 제일 예쁘고 또한 소리 잘 하기로 이름난 경월이를 끌어안고 흐물거리며 즐기던 경찰 토벌대장 임만수가 훗날 다른 지역으로 전근 발령을 받고 벌교를 떠나게 되어 송별연을 갖던 날, 경월이가 임만수의 아기를 가졌다고 떼를 쓰는 바람에, 갑자기 난처해진 임만수는 자기편이 되어줄 것으로 믿고 염상구에게 구원의 눈길을 보내지만 염상구는 의외로 경월이 편이 되어 ‘자기가 외서댁에게 했던 전례(?)에 따라 쌀 열 가마 값을 배상하든지 경월이와 살림을 차리든지 선택하라’고 차갑게 내쏘는 바람에 결국 유지들에게 쌀 열 가마 값을 급전으로 빌어 해결하고 나서야 벌교를 떠날 수 있었다.
벌교역
새로운 권력이 가장 먼저 밟는 곳이 바로 벌교역이다. 국회의원, 계엄사령관, 경찰서장이 부임 할 때마다 권력의 추종자들은 그들에게 아부를 해야만 했고, 어떤 때는 민초들 앞에서 수모도 당하는 장면도 나온다. 형 염상진을 너무나 미워했기 때문에 덩달아 빨갱이를 미워할 수밖에 없었던 깡패 염상구. 그러나 형이 죽고 시신이 경찰서에 걸렸을 때 죽음을 각오하고 시신을 끌어내린다. 형의 시신을 거두면서 핏줄이 이념보다 진하다라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그려, 그려, 니가 사람이다. 하먼, 느그 성인디."
그제서야 마음을 놓고 서러운 눈물을 쏟아내는 호산댁과 ‘워메, 워메, 아즘찮은거.’시동생에 대한 고마움과 서러움으로 흘렸던 죽산댁의 눈물이 젖어있는 곳이 바로 벌교역이다. 형제는 달리는 기관차처럼 다른 이념을 가지고 총부리를 겨누면서 미워했지만 결국 형의 죽음으로 형제는 화해하게 된다. 이토록 남과 북의 이념적 비극을 형제의 극단적인 양태를 통해 전달했으며 핏줄이 이념을 뛰어 넘는다는 것을 작가는 자연스레 어필하고 있다. 소화다리근처에 철교가 놓여 있다. 이 철교에서 벌교의 주먹세계를 장악하기 위해 쌍칼과 오래 버티기 시합을 한다. 기차가 굉음을 내며 미친 듯이 달려오지만 결국 염상구는 쌍칼보다 조금 늦게 떨어지는 바람에 벌교주먹의 패권을 장악한다. 오늘날 깍두기 아저씨들의 뿌리는 염상구가 아닐까 싶다.
벌교역 왼쪽 맞은편에 우체국이 있는데 예전에 차부다. 염상구가 상인보호 명목으로 돈을 뜯어냈던 그 현장을 상상해보길.....
소화다리
다리에는 '부용교'라고 쓰여있는데 소설 때문인지 아니면 예쁜 어감 때문인지 사람들은 소화다리라고 부르는 것을 좋아한다. 실은 일왕 히로히또 때 (昭和 6년) 만들어져서 소화다리라고 부른 것이다. 친일의 상징인데도 말이다.
예쁜 이름과는 달리 이 다리에서 참 많은 사람들이 죽어간 곳으로 유명하다. 여순사건때는 100여명의 우익인사를 처단했고, 다시 반란군이 진압되었을 때는 반대로 반란가담자를 처단했던 곳이다. 지긋한 전쟁이 끝나고 다리 위엔 또 한번의 붉은 피로 얼룩진다. 빨치산에 가담했던 자들을 색출해 총살을 했던 곳을 나온다.
여순 반란사건으로 이름났었던 14연대 반란 사건의 회오리로부터 6·25로 이어진 우리 민족의 비극을 고스란히 담고 있다. 피비린내로 범벅되었던 아픈 과거를 안으로 삭힌 채 차디찬 주검을 말없이 받아들였던 그 때와 다름없이 지금도 침묵으로 살아가고 있다. 다만 늙고 쇠약해진 모습으로.... 이젠 다리가 낡아 차도 지나가지 않는다. 부용교란 이름표만 간신히 달고 있다. 다리 옆에는 중도방죽이 이어진다. 나까시마로 대표되는 동양척식주식회사의 창고가 있던 곳이다 이 곳에서 쌀을 수탈해 가는 전진기지인 셈이다.
회정리 교회(현 대광어린이집)
1935년에 지어진 교회다. 소설에서는 야학을 하는 곳으로 묘사되었는데 이지숙은 부상당한 안창민을 자애병원에서 간호하고 피신하도록 도운 죄목으로 징역 1년에 집행유예 선고를 받고 석방된 뒤 학교에 사표를 낸다. 이틀 동안이나 자리에 누워만 있던 이지숙은 사흘째 되는 날 외출을 해 고뇌하는 지식인 서민영을 찾아가 야학에서 일하게 해 달라고 부탁을 했고, 서민영은 이지숙을 받아들이고 아이들에게 사회주의의 이념을 가르친다. 그 곳에 올라서면 벌교 일대가 훤히 보인다. 지금은 어린이집으로 사용되고 있다.
현부자집
벌교터미널에서 산길로 올라가면 현부자네 집이 나온다. 길 양편으로는 친일의 상징으로 심었다는 벚나무들이 서있다. 작가는 소설 속에서 이 벚나무에 대해 ‘스스로 기구함을 감내 할 수밖에 없는 사꾸라’로 표현하고 있다.
소설은 현부자집을 이렇게 쓰고 있다.
‘반원을 이루고 있는 대숲이 작고 낮은 한 채의 기와집을 보듬듯 하고 있었다. 그 기와집들은 현부자네 제각과 부속 별장이었다. 그 자리는 더 이를데 없는 명당으로 알려져 있었는데 풍수를 전혀 모르는 눈으로 보더라도 그 땅은 참으로 희한하게 생긴 터였다. 산줄기가 경사를 이루며 흘러내리다가 문득 다리 쉼이라도 해야겠다는 듯 중턱 조금 아래에다 펑퍼짐한 평지를 이루어 놓고는 다시 아래로 내리 뻗친 것이다. 그러니 그 터는 후덕한 부인네가 치마폭을 펼쳐 떨어지는 아이를 받아 올리는 형상이라는 것이었다.
죽어가는 목숨을 구해 올리는 터이니 부귀와 영화는 더 말해 무엇하며 정남향에 좌청룡 우백호 거느리고 앞에 물길까지 트였으니 이에 더 할 명당이 또 어디 있느냐는 것이었다. …그 터는 눈여겨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신묘함을 느끼게 했다.‘
중도들녘이 훤하게 내려다보이는 제석산 자락에 세워진 이 제각은 본래 박씨 문중의 소유이지만 소설에서는 현 부자네 집으로 꾸며졌고, 정하섭이 무당의 딸 소화의 도움을 받아 그 현부자네 제각에 몸을 숨기는 것으로 전개되고 있다.
현부자네 집은 말끔히 복원해 놓았다. 누마루가 있는 문간채며, 박석을 쌓은 기단이며, 문간채 앞에 배치한 연못 등이 배치되어 있다. 이 집의 안채를 보면 한옥을 기본 틀로 삼았지만 곳곳에 일본식을 가미한 색다른 양식이 눈에 띈다.
마루는 조선식, 천장은 일본식이고 사방으로 둔 퇴칸를 따라 돌아가면 안채에 설치된 화장실에 이를 수 있도록 했는데 우리 한옥에는 안채에 화장실을 배치하는 경우가 없었을 뿐 아니라 당시에는 일반 사람들이 구경조차도 하기 힘든 양변기가 놓여있고 목욕탕까지 갖추고 있다. 지붕 아래 처마의 서까래에는 벚꽃무늬를 단청한 것이 특징이다.
일본식 누각에 올라 일꾼들이 일하는 것을 감독하게 된다.
소화의 집 저녁 어스름과 함께 갑자기 쏟아지는 빗줄기를 피해 무당 월녀의 집에 들어선 정참봉이 처마 밑에 서서 젖은 옷을 털며 비가 개이기를 기다리지만 좀체 비가 그칠 것 같지 않은데다 월녀의 권유도 있고 해서 못이긴 채 양반의 체통을 접고 무당 집 방에 들게 된다. 비를 맞아 추웠던 탓인지 저녁 먹은 게 탈이 난 정참봉은 한밤중에 월녀가 풀어준 된장 물을 먹게되고, 월녀가 등을 두드려준 때문인지 트림을 하게 되어 속이 편해지자마자,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그 밤에 월녀와 몸을 섞게 된다. 그리고는 소원대로 임신을 하게 된 월녀는 주변의 소문을 피해 멀리 남원까지 가서 몸을 풀어 딸 소화를 얻게 된 것이다. 중풍으로 말도 못한 채 반신불수로 누워서만 사는 월녀가 정참봉의 손자 정하섭과 딸 소화와의 사랑을 눈치채지만 끝내 「술도가 집 아들과 딸 소화의 관계」를 밝히지 못한 채 ‘안 돼야…’를 속으로 무수히 되뇌이며 눈을 부릅뜨고 죽어간 안타까운 곳이기도 하다. 개인의 감정이 이념과 봉건사고를 뛰어 넘는 모습을 그려내고 있던 것이다. 소화의 아픔이 느껴진다.
진트재
멀리로 바라보이는 벌교읍은 절로 감탄이 흘러나올 만큼 아름다운 경치를 이루고 있었다. 서북쪽으로 반원을 그리며 이어져 나간 산들과 동남쪽으로 긴 자취를 끌며 펼쳐진 들판과 포구, 그 가운데 감싸이듯 시가지는 아스라하게 멀었다. 아늑하고 포근한 느낌의 경치. 벌교지구 계엄 사령관으로 부임하던 국군장교 심재모는 구룡쪽에서 진트재를 걸어올라 마루에 서서 벌교를 처음 바라보았을 때의 느낌을 저렇게 표현하고 있다. 소설에서는 진트재 터널 입구에서 안창민과 하대치가 순천행 군용열차를 기습하고 군수품과 무기를 탈취해 조계산으로 옮기는 내용이 묘사되고, 마동리 터널은 염상진이 조성면을 기습함에 따라 심재모가 조성을 긴급 지원하기 위해 철길을 따라 병력을 지휘, 구보 행군하던 곳으로 각각 그려지고 있다.
벌교를 떠나며 염상진이니 이태식이니 수많은 영웅들은 결국은 죽어갔지만 외서댁이니 하대치 같은 민초들은 죽지 않고 민중들의 가슴속에 오랫동안 남아있는 것으로 소설은 결말을 맺고 있다. 아쉽게도 벌교를 떠나지만 그 혼돈과 아픔을 소설속의 현장에서나마 느낄 수 있었다. 그 고통을 이겨내고 오늘날까지 살아준 벌교 사람들에게 그저 머리를 조아릴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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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10권짜리 태백산맥을 읽은지가 10년도 더 지났건만 등장인물들이며 우여곡절 상황들이 지금도 생생합니다. 하대치와 외서댁이 제일 기억에 남아요. 꼬막만 보면 외서댁이 떠오르죠. 저도 소설을 읽고나서 벌교 일대를 뒤졌는데 어디가 어딘지 도무지 찾을 길이없어 벌교의 허름한 식당에서 장뚱어 지짐이만 먹고......그때 이런 길라잡이 여행서가 있었더라면 ...대장님을 그때 알았더라면...
태백산맥을 생각하면 언제나 궁금했던 벌교를 이더운 여름낮에 올려 주시니 연달아 아리랑과 한강을 읽으며 느꼈던 감흥이 되살아 납니다. 대장님! 더운 날씨에 수고 하셨고 후기 올려 주시니 너무 감사드립니다.^^*
저도 태백산맥과 혼불...을 가장 최고의 소설로 생각합니다..아리랑이나 한강보다 한수 위로... 벌써 20년쯤 되었겠네요..소설을 읽고 너무가 가보고 싶었던 벌교...
이 더운 날씨에 애 많이 쓰셨네요, 덕분에 " 태백산맥 " 의 그늘에서 잠시 쉬어갑니다.
태백산맥, 아리랑, 한강,,,,,저도 조정래 선생님 글빨에 흠뻑 빠져 있는 사람 중에 한 사람. 4년 전 태백산맥 소설 장소를 찾아 2박 3일 동안 문학기행을 갔던 것이 그대로 생각나네요. 카메라가 좋아서인가 대장 님이 담아온 벌교는 부용교며 소화의 집, 현부자집 등이 말끔하네요. 대장 님, 더없이 귀하고 반가운 벌교 취재하시느라 고생하셨어요. 지금 당장 책장에서 태백산맥을 1권부터 다시 읽어나가며 더위와 맞짱 뜨고 싶다는 충동이 솟구치네요.
대장님의 멋진 사진으로 태백산맥의 감동에 다시 빠져봅니다. 더운날씨에 다니시느라 고생하셧네요
대장님 수고하셨네요,,,여기 살면서도 이런곳이 있다는것도 다 모르고 살고있는데...대장님 발걸음을 따라 저도한번 다녀와야 겠습니다..감사합니다 고생 많이 하셨습니다,,너무도 더운날씨에....오메~~~더운거,,먼놈에 날씨가 이렇게도 덥당가요,,,,ㅋㅋㅋㅋ
글쎄 마리요?~ 요새 날씨 징허게 덥당께요? 참말로 무슨놈의 날씨가 요로코롬 더운지 모르것소?~ 근디, 나는 보성이 고향인디 나무와 새님 고향은 어디 시당가요?~ 구수한 사투리에 정감이 갑니다. 오늘도 좋은시간 되세요?...
나무와새님은 순천이랍니다.^^
아~예, 우리동네 뽀짝 옆동네 이네요~ 미인의 고장 순천 참좋은 동네이지요~ 우리 학창시절때 순천여고의 교복 ‘세라복’ 이 어찌나 멋지게 보이던지요? 그때 그시절이 많이도 그립습니다...
35도의 폭염속에서 발로 찾아 다시 쓴 태백산맥 고맙게 잘 보았습니다. 수고 많으셨습니다.
태백산맥을 다시 읽고 싶습니다.
다시 거내들고 싶은 책....염상구 얼굴이 다시 살아나는 시간들...'벌교에 가서 주먹 자랑하지 말라' 는 말과 함께...으메...'징 한 거~~!수고 많았당게로 대장님요.
대장님!~ 멋쩌부러^^*. 깨끗한 사진에 곁들인 설명까징 구구절절 가슴에 와닿습니다~. 소화다리, 자애병원, 김범우의 집, 홍교... 태백산맥의 여정이 눈에 선하게 그려지네요?~ 대장님요!~ 여기가 생각만해도 가슴뭉클한 내고향 이랑께요. 거기까지 가셨는디 맛난것은 묵고왔소? 속살이 꽉찬 벌교 꼬막이랑 보양식품인 짱뚱이탕 말이요?~ 요것 한사발 묵으면 금년여름 보양걱정은 끝인디~ㅎㅎㅎ 대장님!~ 내고향을 넘멋지게 소개해 주심에 감사드려요, 제가 향좋은 보성녹차 한잔 대접해 드릴께 연락주세용~ 늘 건강하시고 행복하시길 ~♡
무더운 날씨에 벌교의 구석구석을 지도와 함께 역사의 뒤안길 보여주고 이야기 해주는 대장님 감사합니다.정~말 모놀가족 된게 행복합니다.
대장님~ 부러 다시 읽었습니다. 1권부터 10권까지 다시 읽은 느낌이예요. 대목 대목 잘도 짚어 주셨어요. 참 좋습니다.
제 고향 벌교를 이렇게 다른 시선으로 보니 반갑기 그지없네요. 이제는 쇠락해서 예전의 그 영광은 다시 볼 수 없어서 한번씩 갈때마다 가슴이 아릿하건만 이렇게 사진으로보니 금새 또 가고 싶어집니다.
쇠락이라니요. 교통의 요지로 발전을 하고있던데요.
저는 벌교하면 꼬막이 생각나네요. 대장님 덕분에 사진과 함께 태백산맥의 알짜배기 줄거리를 앉아서 챙긴 것 같습니다. 감사합니다.
벌교에 가기위하여 태백산맥소설책과 비디오를 보고 갔던 기억이 새롭내요. 벌교에 가서 놀란 것은 벌교사람들이 소화다리 등을 잘 모르는 점이였고 대장님이 소개한 음식점 중 한곳이 우렁탕집 바깥 사장님이 그 분야에 박식하더라는 것입니다. 제일 기억에 남는 것은 이념의 갈등속에서 번민하는 중도지식인 김범우였읍니다. 지금 소설속 그집은 규모가 커서 4사람 소유로 분리되었다고 하더군요(동네 중턱에 위치). 아무튼 대장님 발품덕분에 자세하게 보고갑니다. 그럼 제주에서 뵙지요.
한번 꼭 가보고 싶군요. 잘보고 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