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놀드 인생 60년
영화 같은 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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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2막 장면 Ⅰ 1970년. 미국으로 다시 돌아와 훈련에 전념중인 아놀드. 남부 캘리포니아 체육관 벽에는 분필 표시가 없다. 더 이상 그럴 필요가 없기 때문. 아놀드는 자신의 목표가 뭔지 안다. 미스터 올림피아. 게다가 이제부터는 프랑코 콜럼부와 함께 훈련한다. 친구를 한명 데려와 훈련 파트너로 삼고 싶다고 조에게 부탁한 덕분이다. 아놀드에게 대회 준비는 따로 없다. 매일같이 몇 시간씩 훈련하며 엄격한 식단을 지키고 있다. 완벽한 포즈를 위해 UCLA에서 발레 수업까지 듣고 있다.
캘리포니아에서 아놀드가 경험한 것은 훈련이 다가 아니었다. 그라츠, 혹은 독일에서조차 멀린 떨어진 곳이었으니 놀랄 것도 없다. 이 곳에서도 아놀드는 모든 것을 스폰지처럼 습득했다. 아놀드는 "로스엔젤레스에 도착하자마자 엄청난 경험을 했다. 항상 좋은 시간을 보냈다. 조는 늘 멋진 외모의 여자들을 카메라에 담았다. 물론 다른 보디빌더도 함께 촬영했다. 참 재미있는 사람들이었다. 캘리포니아에서 몇 달을 보낸 뒤 잠시 오스트리아로 돌아갔다. 간지 이틀 만에 이미 미국이 그리워졌다."고 말한다. 지난 해 미스터 유니버스와 미스터 올림피아는 연달아 열렸다. 하지만 1970년, 아놀드는 15일새 3개 주요대회에 참가했다. 첫번째 경기인 9월 18일 런던에서 열린 미스터 유니버스 방어전은 그 어느 때보다 힘든 경기였다. 이유는 하나, 레그 파크가 무대로 다시 돌아왔기 때문이다. 대회 전 아놀드는 여러 가지 가능성을 가늠해보았다. 자신의 우상과 경기해서 이기든지, 아니면 대회를 포기해 모든 상황을 피하든지. 아놀드는 경기를 지속했고 레그를 이겼다. 경기 후 아놀드는 "우리 둘은 경쟁자이고 스포츠맨이다, 서로간에 존엄성을 지켜야 한다. 레그를 이긴 것이 아니라 그와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있게 된 것이라 생각한다. 마침내 레그와 동등한 위치를 차지하게 됐다."고 말했다.
다음 대회는 하루 뒤 오하이오, 콜럼부스에서 열린 AAU 프로 월드였다. 아놀드가 프로모터 짐 로리머를 처음 만난 곳이다. 짐은 아놀드를 런던에서 뉴욕으로, 그리고 대회에 맞추기 위해 개인 제트기로 콜럼부스까지 데려왔다. 둘은 금새 친분을 맺게 됐고 나중에 '아놀드 슈워제너거 클래식'으로 사업 파트너가 된다. 이는 오늘날 세계에서 가장 큰 보디빌딩 대회 중 하나다. 더 잊을 수 없는 일은 2주 뒤 열릴 올림피아에서였다. 경쟁하게 되리라곤 예상치도 못했던 세르지오 올리바가 깜짝 등장했다. 지난해 세르지오의 몸은 굉장했다. 하지만 아놀드 역시 69년 대회 때보다 훨씬 나아졌다. 훨씬 섬세해졌고 근육의 갈라짐도 좋았다. 게다가 108㎏로 체중으로 기민한 포즈까지 취할 수 있다. 이번 대회 우승은 아놀드에게 돌아갔고 관중들은 그의 발 밑에서 환호했다. "아놀드! 아놀드! 아놀드!" 다가오는 10월 3일 뉴욕 미스터 올림피아는 헤비급간의 싸움이 될 것이라는 광고가 나돌았다. 하지만 둘 간의 심리싸움은 아놀드에게 유리했다. 콜럼부스 대회 후, 아놀드는 세르지오에게 올림피아 대회전에 6.8㎏는 더 늘려야 할 거라고 "조언"했다. 그래야 우승 확률을 높일 수 있을 거라고 설명했다. 세르지오는 아놀드의 조언을 받아들였고 체중 중가를 목표로 삼았다. 아놀드는 "미스터 월드 대회에서 세르지오에게 말했다. '사람들이 이구동성으로 당신이 조각 같은 몸을 지니고 있긴 하지만 크기가 좀 준 것 같다고 말한다.' 세르지오는 '6.8㎏는 금방 불릴 수 있다. 뉴욕 대회에선 다시 예전의 모습을 선 보일 것이다.'고 답했다. 물론 그 계획은 완전히 실패했다. 6.8㎏는 그렇게 쉽게 늘릴 수 있는 체중이 아니다. 2주 안에 1.5~2.3㎏면 몰라도 6.8㎏는 불가능하다."고 말한다. 아놀드는 미스터 올림피아에서의 역사적인 첫 우승 후 계속 승승장구하며 명백한 세계 최고의 보디빌더가 됐다. 10년 안에 세계 최고의 보디빌더가 되겠다던 목표를 달성했다. 하지만 아놀드의 얘기는 이제 시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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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놀드 연대기 |
1970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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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0년 첫번째 영화 '헤라클레스 인 뉴욕' 출연 9월 18일 런던에서 열린 프로 NABBA 미스터 유니버스에서 우상 레그 파크와 경쟁해 우승 차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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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 19일 콜럼부스에서 열린 미스터 유니버스에서 세르지오 올리바를 누르고 우승, 같은 대회에서 짐 로리머를 만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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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 3일 뉴욕 대회에서 첫 미스터 올림피아 타이틀 획득 10월 5일 IFBB로부터 유공증(有功證) 수여 받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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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 5일 IFBB로부터 유공증(有功證) 수여 받음. | |
장면 Ⅱ 1970년 초. 또 다시 뭔가를 쳐다보고 있는 아놀드. 이번엔 골드짐 창가로 비치는 햇살을 바라 보고 있다. 아놀드는 산타 모니카에 있는 대학에 갈 예정이다. 그리고 콜럼부와 벽돌 사업을 시작했고 나름의 우편주문 방식을 사용하고 있다. 자각하든 못하든 아놀드는 보디빌딩의 황금기에 살고 있다. 골드짐에서 콜럼부, 데이브 드래퍼와 함께 거의 매일 훈련하다시피 한다. 모든 일이 순조롭다. 아놀드와 친구들은 매일 아침 근무 전 훈련을 한다. 아놀드의 친구이자 'Artie Zeller'상의 주인공 전설의 사진작가 알버트도 함께 한다. 물론 늘 카메라를 들고 온다. 햇살이 밝게 부서지는 창가는 사진작가 알버트에게 최상의 공간이다. 아놀드, 데이브, 콜럼부가 중량을 들어 올릴 때 마다 알버트는 셔터를 누른다. 아침 햇살이 체육관 전체를 찬란하게 비치고 시간을 초월한 전설의 사진이 탄생한다. 자 지금부터 감상해보시길.
이런 모든 행운 속에서도 아놀드는 여전히 목말랐다. 세계 최고의 보디빌더가 되는 것은 아놀드의 평생 소원이었다. 이제 아놀드는 세계 최고의 자리에 올랐고 챔피언이 되고자 하는 누구와라도 대결을 벌일 준비가 돼있다. 1971년 올림피아 대회는 전대미문의 치열한 경기가 될 만한 조건을 갖추고 있었다. 특히 아놀드에게 도전하는 두명의 일류 선수때문. 아놀드는 "정말 천국 같은 세상이 있다면 바로 1971년 런던 미스터 프로 유니버스 대회다. 세르지오와 당시 미스터 유니버스였던 빌 펄 때문이다. 세르지오는 몸이 많이 커져 있었고(체중이 110.3㎏까지 불었다) 위협적인 상대였다. 빌은 NABBA 미스터 유니버스(전통 보디빌딩 대회)의 왕좌를 차지하고 있었다. 내 몸도 충분히 컸고 훈련도 열심이었고 체중도 110.7㎏였다. 이정도면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이 두 명을 무찌르는 것 말고는 더 이상 올라갈 곳이 없다고 생각했다."라고 말한다. 하지만 아놀드는 소원을 이루지 못했다. 대회를 몇 주 앞두고 IFBB는 IFBB가 인가하지 않는 대회에 참가한 경우 올해 올림피아에 출전할 수 없다고 발표했다. 결과적으로 아놀드는 경쟁 없이 올림피아 타이틀 방어에 성공했다. 결과적으로는 일어 나지 않았지만 빌 펄과의 대결을 회상하며 아놀드는 말한다. "세르지오, 빌과 대결할 수 있다면야 지상낙원에 온 기분일 것이다. 꼭 맛보고 싶었던 도전이다." 1972년, 아놀드는 서독 에센에서 3회 연속 올림피아 타이틀을 거머쥐며 세르지오와의 싸움에 종지부를 찍었다. 하지만 이번 우승에는 약간의 논란이 따랐다. 세르지오가 '크기와 섬세함'을 갖춘 크게 향상된 몸을 선보였기 때문이다. 그만큼 보디빌딩을 잘 아는 사람들 사이에서는 세르지오가 확실히 월등한 몸을 지녔다는 얘기도 오갔다. 하지만 두 사람의 차이는 스타 파워와 단순한 육체적 파워에 있다. 상대선수보다 수완이 뛰어난 것과 그렇지 못한 것. 세르지오가 상대에게 이런 무형의 힘을 발휘했다면 아마 70, 72년 올림피아 결과는 달라졌을 것이다. 물론 사실은 그렇지 못했다. 아놀드는 73, 74년 이전 우승을 둘러싼 논란을 잠재우며 다시 올림피아 우승을 차지했다. 그 누구도 아놀드의 우승에 이의를 달지 않았다. 세르지오는 72년 패배 후 스스로 IFBB 대회에서 물러났다. 아놀드의 몸은 날로 좋아졌고 주 경쟁자는 콜럼부와 프랑스인 세르게 뉴브렛이었다. 둘 다 뛰어난 보디빌더였지만 아놀드에 비할 바는 아니었다. 보디빌딩 무대에서는 더 이상 도전할 곳이 없게된 아놀드는 시야를 넓히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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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놀드 연대기 |
1971년 |
1972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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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 20일 형 메인하드 차 사고로 사망. 후에 조카 패트릭을 미국으로 데려옴 9월 25일 두 번째 미스터 올림피아 우승(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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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타 모니카 시티 컬리지 재학 9월 16일 조지 버틀러 감독을 처음 만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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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 24일 세 번째 미스터 올림피아 우승(에센) 11월 남아프리카공화국에서 '게스트-포징' 중 무릎 부상을 입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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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월 11일 아버지 구스타프 65세 나이로 별세 | |
장면 Ⅲ 1974년 10월. 아놀드는 보디빌딩에서 은퇴하길 원한다. 여기서 더 이상 할 게 없다고 생각한다. 막 다섯 번째 미스터 올림피아 타이틀을 거머쥐었다. 벽에 분필로 '미스터 올림피아 5번 우승' 이라 적어 놓고 아래 5개 선을 다 그은 것이나 마찬가지다. 이제는 새로운 목표를 설정할 때다. 영화 경력을 진척시켜 나갈 시기다. 하지만 잠깐. 여섯 번째 미스터 올림피아 타이틀까지 얻으면 영화 경력을 키워나가는 데 도움이 될까? 그래, 한번 더 해보는 거다. 1975 미스터 올림피아는 놓칠 수 없는 경기다. 조지 버틀러가 그 자리에 있을 것이다. 조지 버틀러는 찰스 게인즈와 함께 책 <펌핑 아이언: 더 아트 앤 스포츠 오브 보디빌딩>을 쓴 작가다. 보디빌딩 문화와 아놀드를 비롯한 유명 선수들에 대해 탐구한 책으로 1974년 발표됐다. 책은 호평을 받았고 지금 조지는 다큐멘터리 영화로 만들 생각이다. 아놀드가 주연을 하면 어떨까 생각을 하고 있다. 아놀드만한 경력, 존재감, 카리스마를 가진 보디빌더가 없다. 남아프리카공화국에서 열리는 1975 미스터 올림피아를 준비 중인 보디빌더들의 최종 결승 무대를 봐야겠다는 계획이다. 아놀드는 기회를 놓칠 수 없었다. 아놀드, 헐크 시리즈의 주인공이 된 루 페리그노, 아마추어 선수 마이크 캐츠, 켄 월러 등이 캐스팅 됐다.
이는 아놀드의 첫 번째 영화가 아니다. 아놀드는 75년 봄, 여름동안 영화 '스테이 헝그리'를 찍었다. 상당히 비중 있는 역할인 오스트리아 보디빌더역을 맡았다. 역할 때문에 체중을 94.5㎏으로 감량했다. 7월에 영화 촬영이 끝났다. 올림피아 대회를 3달 앞둔 터라 체중을 다시 103.5~108㎏으로 늘려야 했다. 사전 심사 내내 카메라가 쫓아 다녔고 아놀드는 잘 해냈다. 하지만 영화 발표회는 열리지 못했다. 찰스와 조지는 보디빌딩에 관한 책을 영화로 만드는 게 쉽지 않을 거라 생각했고 책의 최초 출판인인 더블데이는 대본을 받자마자 손을 뗐다. 이유인 즉슨, 아무도 아놀드 슈워제너거라는 인물에 관심을 가지지 않을 거라는 것. 영화를 완성하는 것은 꽤 어려운 과제였다. 조지는 영화를 위해 기금 4십만 달러를 모았다. 하지만 영화를 찍기엔 충분치 않은 돈이었다. 조지는 기금 조달자의 도움은 물론 자기 돈에 더해 빚잔치까지 벌였다. 결국 영화는 완성됐고 개봉됐다. 다시 한번, 운명은 아놀드의 편에 섰다. 만약 이 영화가 완성되지 못했다면 아놀드의 헐리우드 진출이 어떻게 됐을지는 아무도 장담 못한다. '펌핑 아이언'에서 아놀드는 추상적인 '무언가'를 사용했다. 콜럼부, 마이크, 켄, 로우도 가지지 못한 '무언가'를 권력적인 아버지에 복종하는 아들 역을 소화하는 데 사용했다. 그 '무언가'가 뭘까? 아마도 바로 아놀드 자신일 것이다. 체육관에서 '펑핑'현상을 맛 볼 때 느낌은 섹스와 같다. 매일 하루 종일 어떻게 그 느낌을 얻어 내는지 아놀드의 달변으로 설명을 해낸다. 하지만 그 '무언가'가 무엇인지 누가 신경 쓰겠는가? 아놀드 자신은 더더욱 그렇다. 아놀드는 " 그게 무엇이든 간에 난 그것을 가지고 있다. 성격적 측면에서 얘기하면 일종의 삶에 대한 열정, 호기심, 재미, 무대 위를 즐기는 것, 스포트라이트를 즐기는 것 등이다. 영화 촬영 당시, 촬영기사가 항상 내게 말한 것이 있다. '카메라가 당신을 좋아하는 것 같아요.' 어떤 이들은 이런 행운을 타고 난다. 타고난 장점, 이는 한계를 넘어 더 많은 걸 이룰 수 있다는 걸 의미한다."고 웃으며 말한다. 물론 아놀드는 1975 미스터 올림피아 대회 90㎏ 체급에서 세르지오와 루를 누르고 우승을 차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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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놀드 연대기 |
1973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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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4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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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3년 캘리포니아 야간 대학에서 경영학 수업을 듣기 시작함 1월 남아프리카공화국에서 얻은 부상으로 왼쪽무릎 수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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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 7일 두 번째 영화 '더 롱 굿바이' 시사회 9월 8일 네 번째 미스터 올림피아 우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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찰스 게인즈와 조지 부틀러가 공저한 책 '펌핑 아이언' 호평 받음 10월 12일 다섯 번째 미스터 올림피아 우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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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 '스포츠 일러스트레이트'지에 대서특필 됨 11월 19일 TV 드라마에서 이탈리안 안마사로 출연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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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5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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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6년 |
6월 16일' '피플'지에 대서특필 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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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 8일 여섯 번째 미스터 올림피아 우승, 은퇴 발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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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 22일~23일 피츠버그에서 6개 도시 순회 세미나 개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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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월 25일 뉴욕에서 열린 시범경기에서 프랭크 제인, 에디 코네이와 함께 포즈를 선 보임 4월 23일 '스테이 헝그리' 개봉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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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면 Ⅳ 1977년 1월. 로스엔젤레스 힐튼 호텔, 무대를 응시하고 있는 아놀드. 아놀드에겐 전혀 새로운 경험이다. 물론 수없이 무대에 서 봤고 관중석에 앉아 본 적도 있다. 하지만 항상 트렁크, 운동복 차림에 보디빌더들과 함께 였다. 턱시도 처음이다. 로버트 드니로, 더스틴 호프만, 실베스타 스탤론과 함께 하는 것도 처음이다. 그리고 갑자기 아놀드의 이름이 호명된다. 무대 위로 올라간다. 아놀드는 1976년 개봉작인 데뷔 영화 '스테이 헝그리'로 골든 글러브 최우수 연기상을 받는다.
'펌핑 아이언'은 아놀드의 골든 글러브 수상 직후인 1월 18일 마침내 개봉됐다. 이 다큐멘터리 영화는 곧 인기를 얻게 된다. 아놀드는 영화 홍보로 CBS 프로그램 등 방송 출연이 끊이질 않는다. 이렇듯 아놀드는 적어도 당분간은 미국 최고의 인기 배우로 지낼 것이다. 오스트리아 탈 출신의 어린 소년이 어느새 대단한 어른이 돼있다. 모든 것이 새롭기만 하다? 물론이다. 하지만 아놀드는 '스테이 헝그리'와 '펌핑 아이언' 개봉 후 참석한 칸 영화제 때 조차도 집에 있는 듯 자연스러웠다. "맞다, 집에 있는 듯했다. 매일, 1년이 늘 그래야 한다. 해변엔 아가씨들이 누워있고, 펠레와 축구를 하고, 제작자와 얘기를 나눈다. 하지만 칸에서 나눈 대화의 99%는 허풍이다. 여기 저기 제작자들이 영화 3편을 약속한다. 그리고 돌아와 언론에 말한다. '칸에서 계약을 많이 땄고 이런 저런 영화를 찍을 겁니다.' 하지만 모두 쓸데없는 허풍이 된다."고 말한다. 영화 '헝그리 스테이와 펌핑 아이언'의 공통점은? 후자에서 아놀드는 오스트리아 출신 챔피언 보디빌더로 스스로를 연기했다. 전자에서도 오스티라아 출신 챔피언 보디빌더 역할이었다. 성공의 공식이다. 스스로를 연기한다. 자기 자신을 잃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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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놀드 연대기 |
1976년 |
1977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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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 18일 짐 로리머와 함께 미스터 올림피아 대회 홍보에 나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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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스테이 헝그리'로 골든 글러브 최우수 연기상 수상 1월 최고의 보디빌딩 영화 '펌핑 아이언' 개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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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월 24일 '뉴스위크'지에 '펌핑 아이언' 영화 리뷰기사 실림 5월 5일 TV 시리즈 '더 스트리츠 오브 샌 프란시스코 콜드 "데드 리프트"' 출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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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 28일 뉴욕에서 열린 케네디 테니스 대회에서 마리아 쉬라이버를 만남 10월 1일 콜럼부스 올림피아 대회 홍보 | |
장면 Ⅴ
1977년 8월. 손에 테니스 라켓을 쥐고 있는 아놀드. 지금 테니스를 치고 있는 걸까? 꼭 그런 것 만은 아니다. 미국의 명문가, 케네디가와 어울리고 있다. 8월 28일 뉴욕에서 열린 로버트 F. 케네디 테니스 대회에 참가 중이다. 국가 최고의 힘있는 인물들이 모인 자리임에도 아놀드는 자연스럽게 행동하고 있다. 아놀드는 케네디가 사람들과 성공적인 자리를 보내고 있다. 특별히 21살의 JFK의 질녀 마리아 쉬라이버와. 아놀드는 더 이상 그냥 보디빌더가 아니다. 이젠 유명한 무비스타에 보디빌딩 대회 홍보를 시작한 엄염한 사업가다. 오하이오주 콜럼부스에서 열린 1976년 미스터 올림피아는 아놀드가 처음 홍보를 한 큰 대회다. 자연히, 마리아는 자수성가한 아놀드의 열정과 야망에 감명 받게 된다. 둘 사이 감정이 싹텄다. 마리아는 비록 미국 최고의 명문가 집안 출신이었지만 야망이 넘치는 재원이었다. 조지타운 대학을 갓 졸업하고 신입 기자로 일을 막 시작했다. 둘은 서로에게 이끌려 교제를 시작했다. 영화 '스테이 헝그리'와 '펌핑 아이언'의 성공 후 가장 눈에 띄는 역할은 영화 '빌리안'에서 맡은 역이다. 아놀드의 영화가 다시 잘 되기 시작한 것은 1982년이 되서 였다. 그 전 1979년, CBS는 미스터 올림피아를 방송했고 아놀드를 해설자로 고용했다. 하지만 1980년 이후론 다신 해설자를 할 필요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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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놀드 연대기 |
1978년 |
1979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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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펌핑 아이언' 달력 출판 영화 'SEXTETTE' 출연제의 거절 9월 23일 오하이오 콜럼부스에서 열린 미스터 올림피아 대회 홍보, 프랭크 제인 우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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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놀드/더글라스 켄트 홀 공동저서 <아놀드의 보디쉐이핑 포 우먼> 출간 아놀드/빌 도빈즈 공동저서 <아놀드의 보디쉐이핑 포 멘> 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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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BS 전문 해설위원으로 일함, 오하이오주 콜럼부스에서 열린 미스터 올림피아 대회 해설 영화 '빌리안' 주연 영화 '스캐벤저 헌트' 카메오 출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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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 7일 오하이오주 콜럼부스에서 열린 미스터 올림피아 대회 홍보, 프랭크 제인 우승 11월 10일 위스콘신 대 졸업, 휘트니스 비즈니스 국제 마케팅 학사 | |
장면 Ⅵ 1980년 10월. 호주 시드니 편 비행기에서 창가를 내다보고 있는 아놀드. 1980년 미스터 올림피아 대회에 참석하기 위해서다. 아놀드는 CBS에 고용된 몸이다. 대회의 TV 해설을 위해 해외를 오가고 있다. 어떤 연유에서인지 대회를 앞두고는 자신도 열심히 훈련을 한다. 이유는? 영화 역을 따내기 위해? 아니면 무대로의 컴백을 계획하고 있는 것인가? 아놀드는 요즘 이런 질문들을 수도 없이 받는다. 그럴 때 마다 아놀드는 아니라고 답한다. 당대 최고의 보디빌더 프랭크 제인, 마이크 멘쩌는 전혀 걱정할 필요 없다.
아놀드가 그렇게 열심히 훈련한 이유는? 몇몇 사람들에 아놀드가 말한 이유인 즉슨, 곧 텔레비전 영화로 만들어질 1959 미스터 유니버스 미키 하지테이역 때문이다. 영화 '제인 맨스필드 이야기'. 하지만 이미 촬영을 마친 상황이었다. 대회를 앞두고 콜럼부가 아놀드에게 대회에 참가할 예정이냐고 물었다. 아놀드는 아니라고 대답했다. 달리 뭐라고 답할 수 있겠는가? 아놀드는 실제 경기에 참가할 계획이었다. 프랭크와 다른 선수들이 더 열심히 훈련하도록 자극하기 위해서? 경기에 참가한다 할지라도 대회 날 아침까지 함구할 것이다. 10년 전 아놀드는 올림피아에서 세르지오 올리비아를 당황케 했다. 이제는 깜작 등장으로 프랭크와 마이크를 놀라게 할 차례다. 아놀드는 역사상 가장 논란이 됐던 올림피아 대회에서 우승을 차지했다. 플랭크는 3위, 마이크는 5위로 밀려났다. 혹자는 아놀드가 행운의 우승을 차지한 것이라 했다. 아놀드는 전성기 시대의 몸이 아니었고 다리도 승리를 할만큼 크지 않았다고 말한다. 어쨌든, 아놀드는 일곱 번째 올림피아 타이틀을 거머쥐었다. 당시 최고의 기록이었다(이후, 리 하니, 로니 콜먼이 아놀드의 기록을 깼다). 이 대회는 하나의 사실을 증명해 줄 뿐이었다. 아놀드는 최고가 아닐 때도 여전히 최고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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