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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이야기 스크랩 셀주크 투르크 제국과 오스만 투르크 제국(2)
임광자 추천 0 조회 111 08.05.09 08:30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다.

다. 십자군 전쟁(1096 ~ 1270)과 이슬람세계                     이길상

(1) 이슬람세계의 사분오열(四分五裂)

알라의 영광. 검은 황금을 퍼 올리는 유전"....항복하면전 시민을 포로로 한다. 단 남자는 금화 열 닢을 내면, 해방시켜 주겠다. 여자는둘, 어린이는 열 명을 남자 하나로 간주한다.....기간은 40일간이다...."
1187년 9월 20일 예루살렘 성문에는 이집트의 아이유브왕조의 술탄 알라딘의 이름으로이와 같은 포고문이 나붙었고, 이런 조건을 받아들인 예루살렘 시민들은 성문을 열고,울면서 그리스도의 무덤에 인사를 드리고 흩어졌으나, 살라딘의 명령으로 치안은엄격히 유지되고, 약속된 기간 40일 지나도 가난한 사람들은 돈을 내지 못하자 각가지명목을 붙여 이들을 사면했다고 합니다.

이렇게 해서 1099년 제 1회 십자군에 의해서 예루살렘이점령된 후, 88년만에 이 성도(聖都)가 다시 이슬람세계로 넘어가, 1967년 여름 이스라엘에의해서 점령될 때까지 그들의 지배하에 놓이게 되었는데, 유럽의 십자군이 이 도시를점령했을 때는 유대교도건 이슬람교도건 닥치는 데로 학살하고, 약탈한 물건들을추렴해서 피묻은 손으로 그리스도 무덤에 제물을 올리고 신의 은총에 눈물을 흘리면서감사했다고 하는 것과는 너무나 대조적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휴머니티와 기사도 정신이 충만했던살라딘이라는 한 개인의 치적일 뿐, 유목(遊牧)과 대상(隊商)과 약탈(掠奪)로 일관된이슬람세계는 11세기를 고비로 더욱 사분오열(四分五裂)되어 있었는데, 이런 속사정을좀더 깊이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들의 제도와 관습과 자연환경을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사막 혹은 반사막화 지역은 강수량이 극히 부족하기때문에 교목(喬木)은 고사하고 관목(灌木)조차 자라기 힘든 곳으로 농경은 그 자체가불가능하며, 이런 곳이 시리아, 이라크, 이란, 아라비아반도, 동 서 투르키스탄,아프가니스탄, 파키스탄 등 넓은 지역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이들이 의지하고 사는곳은 오아시스, 강수량만으로는 절대량이 부족한 물을 얻는 유일한 곳입니다.

사막의 오아시스. 湧水泉태양이 작렬하는 사막에서물 그 자체는 글자 그대로 생명수(生命水), 사막의 오아시스는 크게 세 가지, 그첫 번째가 하천의 관류(貫流), 두 번째가 높은 산정에서 흘러내리는 눈 녹은 물(雪氷水),세 번째가 땅에서 솟아나는 샘물(湧泉水) 등인데, 이집트 나일, 티그리스, 유프라테스,인더스 강 등이 첫 번째 경우이고, 텐산산맥과 쿤륜산맥 자락에 발달한 하미, 투르판,쿠처, 누란, 호탄 등이 두 번째 경우이며, 사막에 점점(點點)이 찍혀 있는 도시들이세 번째 경우가 됩니다.

어느 경우를 막론하고 농지는 한정될 수밖에 없고,따라서 토지의 부양력에 따라 인구도 한정될 수밖에 없겠지요. 농경으로 부족한 식량을얻기 위해서 거친 잡초도 잘먹고 소화시키는 염소, 양, 낙타 등을 유목하거나, 낙타등에짐을 싣고 머나먼 장사 길을 나서는 대상무역이 발달한 것도 이런 자연환경에 적응할수밖에 없었던 처절한 생존의 투쟁이리고 볼 수 있습니다.

이런 한정된 공간(空間)을 두고, 예로부터 끝없는투쟁이 계속되었는데, 그래도 강이나 산록에 자리잡은 오아시스 지대는 항상 물을얻을 수 있지만, 넓은 지역을 차지하고 있는 점점의 오아시스, 즉 용수(湧水)에 의존하는곳은 사정이 이런 곳과는 사뭇 다릅니다. 샘물이 언제나 솟아나는 것이 아니라 일정한시기가 지나면 샘은 말라 버리고, 그렇게 되면 또 다른 샘을 찾아야 되는데, 처음발견된 곳이라면 들어가 살면 되지만 다른 사람들이 미리 차지하고 있다면 이들과목숨을 건 싸움은 피할 수 없는 일. 뺏고 빼앗기는 가운데 모든 남자는 전사가 되어야하고,...패배는 곧 죽음을 의미하지만 승자와 패자는 나오게 마련이고,

패자(敗子)의 부녀자들은 남편과 부모를 죽인 승자(勝者)의아내가 되고, 이런 수치(?)를 없애기 위해서 얼굴을 비롯, 온 몸을 천으로 뒤덮어누가 누군 지를 분간 못하게 하고,... 일부다처제의 관습을 만들고,... 사막 길을가다가 오아시스를 만나지 못하면 그 역시 기다리는 것은 죽음, 이정표라고는 밤하늘의별 뿐, 그래서 언제나 별을 관측해야 되고 이래서 점성 천문학이 발달되고,....식사는반드시 오른손으로, 용변후의 뒤처리는 물을 묻힌 왼손으로, 집단(부족)을 떠나서혼자 산다는 것은 상상 자체가 불가능,...지도자에 대한 복종은 누가 시켜서 하는것이 아니라 다른 대안이 없다는 것,

이런 사정들로 인해서 베드윈 사회의 계급 구성에서도낙타 사육 1계층, 양과 염소 유목 2계층, 상업 종사 3계층, 농업 종사 4계층 등으로분화를 이루는데, 그 외 하층민으로 노예와 선생(교사)이 있습니다. 여기에서 노예는일반인들에게는 이들을 부릴만한 일거리도 없고, 그들을 먹여 살린 만한 여유도 없기때문에, 궁정 잡역에 동원된 이른바 궁정노예나 군사에 동원된 군인노예를 말하며,글을 배운다는 것은 별다른 용도가 없었기 때문에 사치에 불과, 선생은 골 빈 양이나눈먼 낙타에 비유되기도 하였습니다.

이런 사정인데도 이슬람 세계가 훌륭한 문화적 업적을많이 남긴 것은, 넓은 지역에 많은 종족이 각기 다른 풍속과 전통을 가지고 있어서,마치 뷔페 식단 같은 다양한 양상을 보이고 있었고, 이것이 이슬람교라는 종교를정점으로 귀일 했을 때 거대한 문화권의 형성이 가능했다고 보고 있습니다.

문제는 이들 노예, 돈을 주고 산 이들 맘루크(Mamluk: 복수형 Mamaluk)를 우리말로 옮길 적당한 낱말이 없어서 노예라고 직역(直譯)하고있지만, 고대 그리스나 로마의 매매노예나 미국의 농장에 사역되던 흑인노예와는본질적으로 다릅니다.

이들은 말이 노예지 사실은 이슬람사회의 엘리트층을형성하고 있었고, 혈통도 매우 다양하여 투르크인, 키르카시아인을 중심으로 몽골인,쿠르드인, 그리스인, 아르메니아인 등이 포함되어 있었으며, 특히 기마전투력이 뛰어난투르크인들이 군인노예로 채용되면서 아랍과 이란인의 이슬람 세계는 투르크인으로대체되는 순환과정에 들어서게 되었고, 이들 투르크인들의 오랜 관습에 따라 이슬람세계는 더욱 분열 상을 나타냈습니다.

11세기 중엽 이슬람세계의 지도를 그려보면, 바그다드에는아직 칼리프가 있었으나 셀주크왕조의 괴뢰에 불과했고, 셀주크왕조는 본가(本家)와여러 분가(分家)로 나누어 젓다가 말리크 샤가 죽고(1192) 나서 셀주크왕조의 통일은더욱 어렵게 되었으며, 아프가니스탄에는 투르크계의 가즈니 왕조가 있었으나 인도약탈에 정신이 없었고,

711년 대서양에서 지중해로 들어서는 좁은 길목 세우타까지진출했던 이슬람군은 다시 지브롤터를 건너 이베리아 반도로 들어가 손쉽게 고트왕국을몰아내고, 756년 코르도바에 후 우마이야 왕조를 세워 마그레브(북아프리카)일대까지 지배하는 강력한 제국을 세웠으나 1016년 모로코의 함무드가(家)가 코로도바를점령, 1031년 칼리프 히삼 3세가 쫓겨나 아랍인의 우마이야왕조는 끝나고 그 지배는모로크인의 손으로 넘어갔으며, 이집트의 카이로에서는 파티마왕조가 들어서고 스스로칼리프를 선언하였습니다.

(2) 카이로의 칼리프 파티마 왕조

나일강을 끼고 있는 지금의 카이로 원경이집트에노예왕조를 연 것은, 아흐마드 이븐 툴룬(Ahmad ibn Tulun)이라는 투르크계 노예출신,그는 사만왕조의 왕이 바그다드의 칼리프에게 선물한 노예였는데, 이 아흐마드가이집트 총독이 되어 독립된 국가를 세우고(868) 이집트와 시리아까지 지배, 백성을다스리는 일에 힘써 나일강 유역은 다시 번창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사마라(Samarra : 이라크 중부에 소재, 시아파 이슬람교성지) 출신인 그는 수도인 푸스타트(구 카이로) 북쪽에 알 카타이(Al-Katai)라는구역을 만들고, 고향을 그리워하여 거대한 이븐 툴룬 모스크와 광탑(光塔)을 세우고,수도(水道)와 시가지를 정비하고, 병원을 세우는 등 왕조의 기반을 다졌으나, 그의아들 쿠마루야(Khumaruya : 884 ~ 894)는 아버지가 남긴 재산과 병력으로 온갖 영화를누리면서 재정을 바닥내고, 암살된 후 바그다드에서 보낸 아바스 군대에게 멸망당했습니다(895)

그후 이집트는 바그다드 칼리프의 지배를 받았으나,페르가나 출신의 투르크계 이스마일파의 비밀운동원 우바이드 알라 알 마흐디가 튀니지에서이흐시드왕조를 열고(909), 마디(구세주)인 동시에 칼리프를 선언하고, 마그레브(북아프리카일대의 총칭) 지역을 지배하자, 바그다드, 코르도바에이어 튀니지에도 칼리프가 등장,이슬람세계에서 칼리프는 세 명이 동시에 난립하는 모양새가 되었습니다.

969년 초대 왕 무하마드는 이흐시드 칼리프를 무너뜨리고마그레브 일대를 장악, 다시 이집트를 정복한 후, 카이로를 건설하여 이곳으로 수도를정하고, 시리아까지 지배하는 강력한 시아파 왕조를 열었으나, 이 왕조 역시 11세기중엽이후, 여러 가지 사정으로 시리아 지방의 도시들을 대부분 잃게 되었습니다.제 1회 십자군 전쟁은 이 왕조가 담당하였는데 튀니지에서 카이로시대까지 이어지는이 왕조를 파티마왕조(909 ~ 1171)라고 합니다.

파티마왕조의 전성기는 제 5대 칼리프 알 아지즈(al-Aziz ; 976 ~ 996) 치세 20년간, 이 때의 영토가 서쪽으로는 대서양에 이르고, 남쪽은아라비아 남해안, 북쪽은 시리아의 북쪽 경계까지 세력을 확장하였으며 이집트는파티마왕조에 의해서 다시 번영을 누리기 시작하였는데, 알 아지즈가 죽고 그의 아들알 하킴(al- Hakim ; 996 ~ 1021)이 11살의 나이로 즉위, 바르자완이라는 환관이후견인이 되어, 다스리다가 15살이 되었을 때 후견인을 죽이고 친정(親政)을 하면서많은 기행을 남기고 있습니다.

그의 기행 가운데 예루살렘이 있던 크리스트교 성묘(聖廟)교회를파괴(1009)하여 기독교 세계에 큰 충격을 주었고, 개와 고양이를 모두 죽이라는 명령을내리는가 하면, 기독교도의 수도원과 교회재산을 몰수하고, 기독교도와 유다교도는검은 허리띠와 검은 터번(Turban)을, 목욕할 때는 기독교도는 십자가를 유다교도는작은 방울을 몸에 지니도록 하여, 이슬람교도와 구별하였으며, 일반인들이 목욕할때는 바지를 입을 채로 물에 들어가야 하고, 비늘 없는 고기는 잡지도 팔지도 못하며,해 가진 후에는 일체의 상거래를 금하고, 금주령을 내리고 술병을 전부 깨뜨렸으며,건포도의 수입과 판매를 금하고 재고품은 나일강에 버릴 것,......

"우리의 재산은 알라의 것, 사람은 모두 알라께서만드신 것이다"라고 하면서 재산을 마구 나누어주고, 자신은 흰옷 하나를 걸치고샌들을 신고 헝겊 한 장으로 머리를 감고, 나귀등에 얹혀 수 없이 돌아다니면서 뱃사공이나횃불을 밝혀 든 노예에게 많은 토지를 주는가 하면, 관리의 팔과 다리를 사정없이자르고, 그런 후에는 많은 돈과 옷을 주고, 그런 그가 37세의 젊은 나이에 어떻게죽었는가는 아무도 모르고, 나일 강변에 피 묻은 그의 옷과 샌들만이 발견되었다고합니다.

그의 치세 25년간 이런 기행 이면에는 학문을 좋아했던칼리프로서 카이로에 연구기관을 세우고 학자를 보호했으며, 장엄한 건축미를 자랑하는알 하킴의 모스크를 세우는 등 이스마일파의 이슬람교를 위해 헌신했다고는 하나정신 이상이 있는 불면증 환자였다고도 합니다.

그러나 파티마왕조는 번영했고, 하킴의 손자로서 제8대 칼리프가 된 알 무스탄시르(1036 ~ 1094)의 치세 60 여 년간이 고비를 이루었는데,나일 하구의 델타지대에서는 아마(亞麻) 재배와 직물제조업이, 카이로에서는 견직물이,알렉산드리아에서는 유리제품이 발달했는가 하면, 누비아의 황금이 들어오고 막대한세수(稅收)는 칼리프의 궁전을 더욱 장엄하고 화려하게 치장, 기둥은 황금으로 칠하고,대리석 연못과 수로(水路)에는 금과 은으로 만든 관(管)을 통해서 물이 흘러들게하고, 1천명이 넘는 호위군사들에게는 금과 은으로 된 갑옷을 입히고, 금으로 만든왕좌(王座)에서 베일로 얼굴을 가리고 신하와 외국 사절들을 접견하고.....

이런 번영의 그늘에는 상대적으로 고통받는 백성들의반동이 있게 마련인데, 11세기 중엽에 이런 조짐들이 튀니지와 알제리 등에서 이반의움직임을 보이자, 칼리프는 이들에 대한 보복으로 아라비아 중부 고원지대에 살고있던 유목 아랍족(Sulaim, Hilal 족 등)을 대거 이곳으로 이주 시켜, 원주민인 베르베르(Berber)족을약탈케 했으며, 정기적으로 범람하던 나일강이 발원지의 기상 이변으로 7년간(1065~ 1071) 큰 홍수를 몰고 와 기근(饑饉)이 덮치자 일반인은 말할 것도 없고 칼리프자신도 굶어 죽을 뻔하였으며, 이 칼리프가 죽은 5년 후 이른바 제 1차 십자군에의해 이 파티마왕조가 지키는 예루살렘은 함락되었습니다(1099년 7월)

그리고 1168년 말, 십자군이 수에즈 지협(地狹)에나타나자 미리 겁을 먹은 재상 샤와르는 푸스타트 전 시가지를 불질렀는데, 무려54일 간이나 시가지는 검은 연기로 휩싸였고, 이 불길 속에서도 수 많은 사람들은약탈을 일삼았다고 하는데 불을 지른 이유는 십자군의 점령을 가정해서 그들에게아무 것도 남겨 주지 않기 위해서 였다고 합니다. 이런 말기적인 현상을 보인 파티마왕조는더 이상 지탱하지 못하고 이듬해 사라딘의 아이유브왕조와 교체되었습니다.

다음 이야기 - 셀주크 투르크 제국과 오스만 투르크제국(3)- 이번 회로 이 지루한 이야기는 끝내고자 계획했었으나, 이해하기 힘든 만큼해야할 이야기도 많아지네요. 줄였다고 줄인 것이 이렇습니다. 살라딘의 아이유브왕조,오스만 투르크의 콘스탄티노플 점령과 동로마제국의 멸망 등은 다음 회로 미루겠습니다.이점 널리 양해 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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