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포니 Pony
1967년 설립되어 미국 포드자동차회사와의 제휴로 ‘코티나’ 자동차를 처음 조립 생산하기 시작한 현대자동차는 1973년부터 최초의 국산 독자모델 ‘포니’의 개발에 나서게 된다.
당시 우리나라는 5개년 경제개발이 한창 진행되던 시절이었는데, 70년대에 들어서면서 정부는 ‘장기 자동차공업 육성계획’의 일환인 부품 국산화에 박차를 가하기 시작하였다. 이 계획이 바로 한국자동차 고유모델 개발의 밑거름이 되었으며, 우리나라 최초의 토종 디자인 1호인 ‘포니’ 자동차의 탄생으로 연결된 것이다.
이 때 현대자동차가 독자 모델의 개발을 착수하려고 하자, 이웃 일본의 자동차 회사들은 미친 짓이라며 비웃었다. 더구나 당시 현대자동차 개발팀들도 대부분 반대 의견이었다.
그러나 정부의 강력한 완전국산화 추진지시에 따라 현대 개발팀은 연구에 연구를 거듭하게 되었다. 하지만 조립생산만 하던 현대자동차는 포드와의 독자모델의 개발사업 추진이 허사로 돌아가자 허탈에 빠지게 된다. 당시의 현대자동차 개발팀은 스타일링 디자인에 대한 업무조차 수행할 수 없었던 시절이라 자동차 디자인의 선진국인 이탈리아로 갈 수밖에 없었다. 디자인을 ‘도안’이라고 말하던 그 시절이라 개발팀에는 아쉽게도 디자이너는 없었다.
참으로 안타깝지만 현대자동차는 이탈리아의 베르토네, 피닌파리나, 이탈디자인 등과 만난 결과, 이탈디자인의 ‘조르제토 쥬지아로’에게 토종 아닌 토종디자인의 스타일링을 맡기게 된 것이다.
초기의 ‘포니’의 개발 컨셉트는 ① 4도어 세단 LHD ② 1200~ 1400cc급 5인승 ③ 휠베이스 2,340mm ④ 새로운 스타일로 미국 및 일본의 유형 ⑤ 작동부분은 기존부품을 사용 ⑥ 1일 1교대 8시간 작업으로 100대 생산 ⑦ 일본표준규격에 만족하는 설계기준 등 제원에서 디자인 생산까지 간략하지만 비교적 포괄적으로 설명되어 있었다.
그러나 디자인에 대한 지식이 부족한 시절이라 전적으로 이탈디자인의 쥬지아로에 의존하였다.
여기서 잠시 쥬지아로를 설명하면, 자동차디자이너인 조르제토 쥬지아로 Giorgetto Giugiaro는 1938년 이탈리아 토리노 근교 피에몬테지방의 가레지오에서 출생하였다.
음악을 하는 할아버지와 화가인 아버지 영향으로 자연스럽게 예술적 감성을 몸에 익히며 미술공부를 하면서 자라났다.
이러한 환경 속에서 자란 그는 1950년 토리노에 건너가 회화를 계속 공부하였으며. 유제미소 코르모의 문하생으로 패션디자인 및 일러스트레이션도 배웠다.
세계 2차대전이 끝나자 이탈리아를 중심으로 급격히 산업화가 진행되는 것을 느끼고, 앞으로는 제품디자인도 중요할 것이라 생각하여 낮에는 순수미술을, 밤에는 야간학교에 등록하여 제품디자인을 공부하였다.
그는 당시 널리 보급되기 시작하였던 자동차에 마음을 뺏기게 되어 자동차 디자인에 몰두하게 된다.
그 후 1955년 국립예술 아카데미 졸업 작품전에 내놓은 ‘쥬지아로’의 자동차 그림을 보고 피아트의 디자인 책임자이자 초대 피아트 설계자인 '단테 지아코사'가 그를 받아 들였다. 이 때 입사할 당시 그의 나이는 겨우 17세였다고 한다.
쥬지아로는 피아트의 특수차 디자인연구소에 배치되어 자동차에 대한 지식을 쌓지만 본격적인 디자인을 하지는 못했다.
여기서 그는 1959년 말 21세의 나이로 베르토네의 스타일링 책임자로 자리를 옮겼다. 그의 재능을 눈여겨 본 '누치오 베르토네'가 전격 발탁한 것이다.
그는 이 회사에서 불과 4년만인 1963년에 알파 로메오 테스투도를 첫 작품으로 내놓으면서 세계적인 명성을 얻게 되었으며, 또 다른 작품 줄리아 GT는 12만대 이상 팔리는 베스트셀러로 기록되기도 하였다.
1965년 그가 베르토네 회사를 그만둘 때까지 유럽에서 유명한 자동차 27대를 디자인하였으며 그 중에서 무려 12대가 실제 판매되었다고 한다.
이후 다른 디자인업체인 기아Ghia에 들어가면서 경영에 참여하여 스타일링 센터와 프로토타입 부문 책임자로 일하게 되었다. 이 곳에서 2년간 디자인한 자동차는 12대이고 양산된 자동차는 5대였다.
하지만 회사의 경영권이 아르헨티나 출신의 데토마소에게로 넘어가자 독립을 하기로 결심하고 프리랜스 디자이너가 되었다. 이때 베르토네에서 초창기에 같이 근무하며 알게 된 엔지니어 '알도 만토바니'와 뜻이 맞아 1968년 이탈디자인을 설립하게 된다.
대표인 쥬지아로가 디자인을 맡고, 전무인 만토바니가 엔지니어링을 맡는 튼튼한 협력체제가 이탈디자인의 밑거름이 되었다.
설립한 이듬해 첫 양산차인 일본 스즈키 ‘캐리’를 선두로 72년 로터스 에스프리, 74년 폭스바겐 골프, 80년 판다와 우노 등을 빅 히트시키면서 자동차산업 디자인업계의 최고 영예인 영국 골든콤파스 상을 수상하기도 하였다.
현재 이탈디자인은 3개의 생산라인을 갖추고 연간 150대의 프로토 타입을 만들 수 있다. 최근에는 스페인과 미국 캘리포니아에 디자인 스튜디오를 더 세웠다고 한다. 그러나 세계적인 경제 불황으로 몇 년째 인력의 변화 없이 직원은 750여명으로 어려움을 받고 있는 이탈디자인이라는 소문도 무성하다.
우리나라의 자동차회사들과는 각별한 인연이 시작되어 1973년 현대 포니를 시발점으로 스텔라, 엑셀, 소나타, 라노스, 레간자, 마티즈, 매그너스, 레조 등 차종은 다르지만 인기를 누려온 이 차들이 바로 이탈리아 자동차 디자인전문회사인 이탈디자인의 작품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이탈디자인을 만든 사람이 바로 ‘조르제토 쥬지아로’이다. 그는 자동차 디자인 역사상 빼놓을 수 없는 인물로 지난 1999년에는 미국 세기의 차 선정위원회에서 ‘20세기 최고 자동차 디자이너’로 선정되는 영예를 누리기도 하였다.
다시 포니로 돌아와 보자.
이러한 세계적으로 유명한 이탈디자인에서 1973년 9월 스타일링 디자인을 시작하여 10월 4종류의 스케치를 완료하여 품평을 거쳐 디자인을 결정한 후 시작품을 만들게 되었다. 그리고 이 모델은 1974년 10월 30일 제55회 이탈리아의 토리노 모터쇼에서 성공적으로 데뷔하게 된다.
1975년 12월 울산공장에서 생산에 들어간 포니는 ‘꽁지 빠진 닭’같다는 소비자의 반응처럼 해치백 스타일의 원조라 할 수 있다.
그때까지만 해도 승용차들이 거의 노치백인 세단형이었기 때문인데 신선한 느낌이 들어 곧 인기리에 판매되기 시작하였다.
스타일링 디자인을 자세히 살펴보면, 전면부의 그릴은 격자형으로 한국의 창살문양의 분위기를 연출하였다.
당시 컬러범퍼가 없었던 시절이라 범퍼는 검정색으로 사이드 캐릭터라인과 연결되면서 현대적 감각을 주었고, 긴 보닛은 롱 노우즈 타입으로 기능감과 안정감을 주었다.
또한 C 필라의 ‘ㄱ’ 자형과 함께 당시로서는 수준급의 디자인을 연출하였으며, 외장 컬러 역시 검정색 일변도에서 노란색, 하늘색 등 밝은 색으로 도장되었다.
포니는 1975년 12월 생산에 들어가 1976년 2월 울산공장에서 첫 출고되었으며, 판매 첫해에 1만726대가 팔려나가 국내 승용차시장 점유율 43.6%를 차지하면서 단번에 최고 인기차로 떠올랐다고 한다.
1977년에는 1,439cc 92마력짜리 엔진이 장착된 포니와 왜건, 픽업트럭 등 가지치기 모델도 등장하기도 하였다. 이때 1976년 당시 판매된 포니의 차값은 2백27만3,270원이었다고 한다.
‘포니’ 자동차의 엔진은 일본 미쯔비시 자동차회사의 새턴이 장착되었고, 언더 바디는 랜서 것을 이용하였다. 변속장치는 동시치합식 전진4단 후진1단의 수동변속기였으며, 현가장치는 앞바퀴의 맥퍼슨 스트럿, 뒷바퀴의 판스프링 방식이었다.
제동장치는 하이드로릭 2중식으로 앞바퀴는 디스크 방식이고 뒷바퀴는 드럼방식이었다고 한다.
연료계통의 기화기 형식은 스트롬버그 2벤츄리 수직형이었으며 수동초크를 채용하였고 연료탱크 용량은 45ℓ, 냉각계통은 강제순환 수냉식, 서머스탯은 왁스형 타입을 사용되었다고 현대자동차 측은 설명하고 있었다.
포니 승용차는 우리나라의 취향과 체격, 그리고 도로사정에 맞는 경제형 자동차인 데다가 내구성이 좋아 국민들로부터 인기를 끌었으며, 마이카시대를 열어준 차라 할 수 있다. 국산화를 90%나 이룩한 최초의 국산 고유모델 승용차인 ‘포니’가 나온 뒤 당시 승용차 시장의 80% 정도였던 중형차는 밀려나면서 자연스럽게 소형차 시대가 열리게 되었다.
‘조랑말’ 이라는 뜻을 가진 ‘포니’ 자동차개발은 야심을 가지고 소 1,000마리를 몰고 북한을 다녀 올 정도의 고 정주영 명예회장의 성격만 보더라도 능히 가능한 일이 아니었을까.
이러한 과감한 도전정신의 회사 분위기의 현대자동차는 과감한 투자와 연구개발로 순수 토종 ‘포니’자동차를 완성하게 된 것이다.
지금 세대들은 ‘포니’라는 이름이 생소하겠지만, 순수 토종디자인을 열게 한 매우 중요한 차종이라 할 수 있다. 물론 현대자동차 독자의, 나아가 우리나라 순수의 힘은 아니었지만 세계에 고유모델을 선보인 것만으로 국내자동차 디자인이 진정으로 눈을 뜨게되는 전환점이 되었으며, 자동차를 수출할 수 있는 나라가 된 것이다.
그 당시 현대식 공장을 갖추고 1962년에 조립 생산된 최초의 차인 ‘새나라’와 중형차시장의 3파전을 이루었던 신진자동차의 ‘코로나’, 현대자동차의 ‘포드 20M’, 그리고 아시아자동차의 ‘피아트124’ 등 모두 둥글둥글한 곡선디자인에 익숙해 있었는데 이러한 취향을 직선형 디자인으로 바꾸는 계기가 된 자동차가 바로 ‘포니’인 것이다.
2. 포니 PONYⅡ
당시 국내 승용차 시장점유율 60%이상을 기록한 포니에 둥근 맛을 살린 후계 차로, 국내 최초의 페이스 리프트로 기록된 승용차가 바로 ‘포니Ⅱ’ 승용차이다.
포니의 너무 각진 느낌이 드는 부분을 살짝 다듬은 모습이었다. 이 모습이 바로 쥬지아로의 뛰어난 스타일링 감각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이러한 포니Ⅱ는 새로운 형태의 5도어 해치백 스타일로 출고가 되자마자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다.
1984년부터는 캐나다에서 판매를 시작하여 수입차 판매 1위를 기록, 훗날 미국 시장진출을 위한 기반을 닦은 차가 되었다.
포니Ⅱ는 길이 4,029mm, 너비 1,566mm, 높이 1,327mm이며, 배기량은 1.2ℓ와 1.4ℓ 2종류의 엔진을 얹었고, 각각 2모델씩 총 4개의 모델을 출시하였다.
엔진은 수냉식 직렬 4기통 OHC이며 1.2ℓ는 기존 포니와 같았으나 1.4ℓ는 최대마력 12마력이 증대되었고 토크 또한 10.8kg.m에서 12.5kg.m 즉 4,000rpm으로 향상되었다. 배기량도 1,238cc에서 1,439cc로 200cc가 증가하였으며, 최고속도 또한 155km/h에서 160km/h로 높아졌다.
변속장치는 동시치합식 전진4단 후진1단인 수동변속기와 1.4ℓ모델에만 적용된 전진3단 후진1단의 자동변속기가 적용되었다.
또한 해치백 스타일의 포니Ⅱ는 주행 때 공기저항을 최소화하는 절연바디를 적용하였으며, 뒷 유리 와이퍼 및 충격흡수식 스티어링 컬럼 Collapsible steering column, 브레이크 부스터를 설치하는 등 기술 분야도 향상되어 적용되었다.
이렇게 시작된 포니 시리즈는 1984년 단일 차종으로서는 처음으로 50만대 생산을 돌파하였다.
소형 해치백 스타일의 단순하면서도 새로운 디자인 이정표를 제시한 포니Ⅰ,Ⅱ는 국내 최초 앞바퀴 굴림형인 포니 엑셀에 자리를 물려주게 된다.
3. 포니 엑셀 PONY EXCEL
사실 포니는 포니Ⅰ,Ⅱ로 계보가 끝난다. 하지만 엑셀 계보 중에 ‘포니’라는 단어가 들어가기 때문에 좀더 살펴보기로 하자.
1978년도부터 전륜구동(FF·Front Engine Front Drive)방식 차에 대한 자료 수집 및 기본 설계 방향 수립에 착수했던 현대자동차는 1979년부터는 본격적인 디자인 컨셉을 결정하여 1981년부터 ‘X Car’라는 프로젝트 명으로 스타일링 디자인과 기본 설계에 착수하였다.
착수한지 4년 후인 1985년 2월에 5도어 해치백 스타일로 탄생을 한 ‘포니 엑셀’의 가장 큰 특징은 기존의 국내 승용차들이 사용하고 있던 후륜구동(FR·Front Engine Rear Drive)방식이 아닌 신개념의 전륜구동 방식의 자동차라는 것이었다.
포니 엑셀은 포니와 마찬가지로 미쓰비시의 엔진과 새시기술, 이탈디자인의 스타일링 그리고 전륜구동의 핵심 부품인 CV조인트 기술을 영국의 GNK사에서 도입하여 생산되었다.
세계적인 추세로 볼 때 전륜구동 방식이라는 것이 엄청난 신기술이라고 할 수는 없었지만, 당시 국내의 승용차들이 모두 후륜구동 방식을 채택하고 있었던 것을 감안하면 자동차 시장에 화제를 불러일으키기에는 충분하였다.
처음부터 수출을 염두에 두고 개발된 수출전략형 차인 만큼 차 이름에도 많은 노력을 들여 기존 해외시장에서의 포니의 인지도와 명성을 살리면서도 차별화를 위해 '좀 더 나아진 포니, 뛰어난 포니'라는 뜻을 지닌 포니 엑셀로 정해지게 되었다.
포니, 스텔라에 이어 세 번째 고유모델인 포니 엑셀은 5도어 해치백 스타일로 4기통 1.3ℓ와 1.5ℓ엔진을 장착하였다. 발표 당시에는 1.3FX, 1.5FX, 1.5수퍼 등 세가지 모델이었다. 하지만 같은 해 가을 4도어 세단 스타일의 ‘프레스토’를 추가하고, 1986년 가을에는 3도어 ‘스포티’를 선보이면서 종류를 많이 늘려갔다.
당시 후륜구동FR은 오일쇼크 이후 차체의 무게를 줄여 연비를 높여야 한다는 과제와 전륜구동FF 위주인 일본 자동차 모델의 본격 도입에 밀려서 소․중형차 위주의 국내 시장에서는 선호하지 않게 않았다. 그래서 1985년 현대자동차가 국내 최초의 전륜구동FF인 포니 엑셀을 내놓은 계기가 된 것이다.
그러나 전륜구동FF보다 큰 엔진룸에다 프로펠러, 샤프트 등으로 차체가 크고 무거워 기름을 많이 먹는다는 단점 때문에 지금은 자취를 감추다시피 하였다.
그러나 최근에는 국산 대형 승용차의 후륜구동시대가 본격적으로 열리게 되었다. 현대자동차는 금년 울산에서 열린 수출 1천만대 돌파 기념식에서 2007년까지 벤츠E클래스나 BMW5시리즈 등과 경쟁할 프리미엄카를 개발하겠다고 밝혔는데 현재처럼 전륜구동FF이 아니라 엔진은 앞으로, 구동은 뒷바퀴로 나누는 후륜구동FR 승용차를 개발할 계획이라고 한다.
이번 현대자동차의 참여로 대우의 프린스, 기아의 포텐샤에 이어 쌍용의 체어맨 등으로 겨우 명맥을 이어 온 국산 자동차의 후륜구동FR 시대가 다시 재개되게 되었다고 한다.
자동차 역사는 계속 반복되어 발전되어 가는 것 같다. 전륜구동FF의 신기술을 선보인 포니 엑셀은 1989년 4월 ‘뉴엑셀’로 거듭나고 1991년 마이너 체인지를 거치면서 1994년 7월 ‘뉴엑셀’이 단종하게 된다.
따라서 조랑말 ‘포니’라는 이름은 영원히 역사 속으로 사라지게 된다.
다시 포니의 부활을 꿈꾸면서 순수 토종 디자인 1호인 ‘포니’ 자동차의 전설을 정리해 보았다.
첫댓글 읽느라 죽는줄 알았넹... ㅡㅡ^
나둥 ㅜ.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