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이 용한(시인) 사진/안 홍범(사진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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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수에게도 예를 베푼다." 구례의 넉넉한 인심을 빗댄 말이다. 이는 모름지기 어머니와도 같은 지리산과 섬진강이 낳고 기른 풍요로움에서 비롯된 말일 터이다. 조선 중기 이 중환이 쓴 <택리지>에는 구례를 가리켜 볍씨 한 말을 뿌려 백마흔 말을 거둘 수 있는 곳이라 하여, 이 나라에서 가장 기름진 땅의 하나로 꼽았다. 또한 지리산을 일러 두툼하고 기름진 땅이 많아 사람이 살기에 적당한 곳이라 했으며, 산속에 대나무와 밤, 감이 많아 "가꾸는 사람이 없어도 저절로 열리고 저절로 떨어지고 높은 봉우리 위에 기장과 조를 뿌려도 무성하지 않은 곳이 없다"고 하였다. 이렇게 지리산이 가져다 준 기름진 땅은 다시 섬진강이란 젖줄을 만나 한결 살지고 튼실해진다 하겠는데, 지리산이 낳은 풍요를 섬진강이 길러 주는 셈이다. 예부터 구례는 "세 가지가 크고, 세 가지가 아름다운 땅"이라 불려 왔다. 웅장한 지리산과 젖줄 구실을 하는 섬진강, 지리산과 섬진강에 얽혀 있는 너른 들판이 세 가지의 큰 것이고, 산과 강이 어우러져 빚어 낸 빼어난 경치와 기름진 들판에 넘치는 곡물과 푸성귀, 순박한 사람들의 넉넉한 인심이 세 가지의 아름다움이다. 이 가운데서도 국립 공원 제일호인 지리산은 빼놓을 수 없는 자랑으로, 구례에는 지리산자락을 낀 다른 어떤 지역보다 이름난 곳이 많다. 우선 노고단과 반야봉, 왕시루봉과 피아골, 종석대, 만복대, 심원 계곡이 모두 구례 쪽 지리산에 위치해 있으며, 화엄사와 연곡사, 천은사와 같은 유서 깊은 큰 가람도 모두 구례에 속해 있다. 전라남도 구례와 전라북도 남원, 경상남도 함양과 산청, 하동의 다섯 개 군과 세 개의 도에 걸쳐 있는 지리산은 그 펼쳐진 자락만도 팔백 리가 넘고, 국립 공원 구역의 면적도 사백사십 제곱킬로미터에 이른다. 명실공히 우리나라에서 가장 덩치가 큰 산이요, 가장 넓은 산악 공원인 셈이다. 지리산이 처음 국립 공원이 된 것은 천구백육십오년으로, 구례군 교원단과 지리산악회를 중심으로 펼쳐진 몇 년 동안의 자연 보호와 관광 개발을 위한 "국립 공원 운동"에 힘입은 바 크다. 본래 지리산은 신라 때부터 금강산, 한라산과 더불어 삼신산의 하나로 방장산이라 일컬어져 왔다. 백두산의 힘찬 기운이 남으로 뻗어 내리다 다시 솟아올랐다 하여 두류산이라 불리기도 했으며, 우리나라 오악 가운데 하나인 남악으로서 오랜 옛날부터 사람들은 이 산을 신령이 깃든 "영산"으로 여겼다. 전하는 바에 따르면 오랜 옛날 하느님의 딸 성모 마고가 지리산에 내려와 반야 도사와 혼인한 뒤 여덟 명의 딸을 낳아 모두 무당으로 길러 팔도에 내려보내 민속을 다스리게 했다고 한다. 또한 석가의 어머니 마야 부인을 지리산 신령으로 모셨다는 이야기도 전해 오는데, 예부터 천왕봉에 마고와 마야 부인을 상징하는 두 석불을 함께 모셔 오는 까닭도 두 이야기에서 비롯된 것이다. 한편 <삼국유사>에는 신라 시대를 열었던 박 혁거세의 어머니를 지리산의 산신으로 모시면서 봄과 가을에 제사를 올렸다고 적고 있으며, 이 승휴가 쓴 <제왕운기>에는 고려 태조 왕 건의 왕비를 지리산 산신으로 모셨다는 기록도 전해 온다. 이렇듯 온갖 전설이 깃든 지리산은 해발 천구백십오 미터의 천왕봉과 천칠백삼십이 미터의 반야봉, 천오백칠 미터의 노고단을 주봉으로 하여 천 미터 안팎의 크고 작은 봉우리가 무려 백여 개나 솟아 있고 그 많은 봉우리를 타고 내려온 자리마다 길고 깊은 계곡이 이리 꺾이고 저리 내달리며 궁궁을을 저마다의 아름다움을 펼치고 있다. 그 가운데서도 가장 빼어난 경관을 꼽아 "지리산 십경"이라 부르니, 끝 간 데 없이 이어진 노고단의 구름 바다, 가을이면 붉은 물결을 이루는 피아골 단풍, 반야봉의 지는 해, 벽소령에 뜨는 밝은 달, 세석평전의 철쭉 깊은 골에서 쏟아져 내리는 불일 폭포, 기암 괴석과 온갖 꽃들이 어우러진 연하봉 풍경, 천왕봉에서 바라보는 아침 해, 일곱 개의 크고 작은 폭포를 거느린 칠선 계곡, 지리산을 서남쪽으로 에돌아 나가는 섬진강의 맑은 물이 바로 그것이다. 하지만 이런 가름은 어디까지나 손가락 꼽기 좋아하는 사람들의 매김일 뿐, 어찌 지리산에 이 열 가지 경치만이 빼어나다 하겠는가. 지리산 반달곰과 섬진강 은어 현재 지리산에는 그 웅장한 규모만큼이나 많은 동식물이 공존하고 있는데, 가장 관심을 끄는 것은 멸종 위기에 처한 지리산 반달가슴곰과 지리산 아랫자락 섬진강에 사는 수달이라 하겠다. 지리산 생태 보존회 회장을 맡고 있는 우 두성 씨는 반달곰의 특유한 흔적을 근거로 내세워 지금 지리산에 살고 있는 반달곰을 십여 마리로 보고 있다. "흔히 곰 발자국의 크기나 배설물, 나무에 긁힌 흔적을 통해 그 숫자를 추정합니다. 나무에 긁힌 흔적이 폭 육 센티미터 정도면 일 년 내지 이 년생이고, 폭 십 센티미터 정도면 사 내지 오 년생으로 볼 수 있죠. 또 상사지(나뭇가지를 꺾어 곰이 올라앉도록 만든 자리)를 보면 큰 가지 끝에 해 놓은 것은 분명 큰놈이고. 작은 가지 끝에 해 놓은 것은 작은놈으로 볼 수 있는데, 이 모든 흔적을 통해 볼 때 약 십여 마리의 반달곰이 지리산에 살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그이는 표범의 생존에 대해서도 확신하고 있다. 공식적인 조사는 없었지만, 직접 발자국을 본 사례가 있다는 것이다. 우씨가 이끄는 지리산 생태 보존회는 천구백구십육년 구례에서 생겨나 지리산과 섬진강의 아름다운 자연 경관과 생태계 보전을 위해 활동해 오고 있으며, 때때로 지리산에 올라 밀렵 도구를 없애는 활동도 벌이고 있다. 이들의 밀렵 예방활동에 힘입어 요즈음 노루와 고라니, 멧돼지, 꿩의 수가 몰라보게 늘어났으며, 구례 지역 섬진강에 사는 수달만도 십여 마리 정도 자연 증식된 것으로 짐작된다. 실제로 구례읍 봉북리와 토치면 용두리, 광의면 온당리, 용방면 죽정리에서 각각 주민의 목격 사례와 배설물, 발자국이 발견되었다. 수달의 서식 환경이 급속히 나빠지는 상태임에도 이렇게 수달의 수가 늘어난 것은 역시 밀렵에 의한 피해를 줄였기 때문이다. 사실 강물이 오염될 경우 가장 먼저 멸종되는 것이 수달인데, 아직까지 구례에 십여 마리 정도의 수달이 살아 있다는 것은 그만큼 구례를 지나는 섬진강이 깨끗하다는 증거일 터이다. 이에 대해 우 회장은 지리산과 섬진강을 서로 나누어 생각할 수 없는 관계로 설명하고 있다. "섬진강이 상류에서부터 조금씩 오염되어 설사 이급수, 삼급수로 구례에 도착한다 해도 지리산의 깨끗한 계곡 물을 만나 다시 일급수로 태어나게 됩니다. 그래서 아직까지도 바다에서 은어와 농어, 뱀장어, 황어, 참게 들이 안심하고 섬진강을 찾는지도 모릅니다. 유일하게 바다와 강과 산이 고루 연결된 가치 있는 생태 통로가 바로 섬진강인 셈이죠." 본래 섬진강은 모래가람, 다사강, 사천, 기문화, 두치강으로 불릴 만큼 고운 모래로 이름이 나 있었다. 전라북도 진안의 마이산에서 발원한 섬진강 물줄기는 남해의 광양만에 도달하기까지 이백십이 킬로미터를 넘게 흘러오면서 순차에 이르러서는 오수천과 만나고, 남원에서는 요천과 합류하며, 구례에 이르러 보성강과 물길을 섞어 하동군 화개를 에돌아 남해로 빠져 나간다. 전설에 따르면, 고려 우왕 십일년(천삼백팔십오년) 왜구가 섬진강 하구에 침입했을 때 몇십만 마리의 두꺼비가 울부짖어 왜구가 광양 쪽으로 피해 갔다는데, 이때부터 두꺼비 섬 자를 붙여 섬진강이라 불렀다고 한다. 이름처럼 잔잔하고 매끄러운 물살을 간직한 섬진강에는 약 삼십여 종에 가까운 물고기가 살고 있으며, 그 가운데서도 은어는 섬진강을 대표하는 물고기라 할 수 있다. 보통 은어는 어린 시절을 바다에서 보내고 사월 초에 강을 거슬러 올라와 알 낳을 장소를 찾는다. 자갈이 많고 물살이 빠른 곳이 은어가 좋아하는 산란처이다. 알을 낳은 지 일 주일 정도면 부화가 되며, 이렇게 태어난 새끼는 바다로 내려 갔다가 이듬해 사월에 다시 어미 강을 찾아 올라온다. 구례에서는 오월부터 팔월까지가 은어의 성어기이며, 이때 은어는 몸 길이가 삼십 센티미터 안팎에 이른다. 이 수광의 <지봉유설>에는 "은어는 봄에 바다에서 하천으로 거슬러 올라온다. 여름과 가을에 살이 찐다. 가을이 깊어지면 말라 죽는다. 어떤 사람은 이 물고기를 오직 남쪽의 흐르는 물에서만 볼 수 있다고 하지만 그 말을 믿어야 할지 아직은 모르겠다"고 하였다. 옛날 섬진강에서 나는 은어는 임금에게 진상했을 정도로 알아주는 것이었으며, 오늘날에도 매운탕과 회, 구이로 미식가의 입맛을 돋우는 음식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은어와 더불어 섬진강의 맛을 대표하는 것으로는 참게가 있다. 바닷게만한 섬진강 참게는 맛도 맛이지만 소화에 좋다 해서 매운탕으로 끓여 먹거나 간장에 참기름과 깨소금, 마늘을 넣어 찜을 해 먹기도 하며, 가을에 게장을 담가 봄까지 반찬으로 내놓기도 한다. 또 이곳에서는 대사리라 하여 섬진강에서 잡은 다슬기로 끓인 탕이 알려져 있는데, 이를 "대사리탕"이라 한다. 이 대사리탕은 다른 지역과 달리 된장이나 부추, 아욱을 넣는 것이 아니라 마치 재첩국처럼 끓인 국물에 수제비 반죽을 넣어 그 맛이 담백하고 시원한 것이 특징이다. 이름난 산수유와 구례 오이 섬진강에서 나는 것 가운데 대표적인 것이 은어와 참게라면, 지리산자락에는 산수유와 고로쇠 물, 구례 들판에는 오이가 잘 알려진 것들이다. 구례 오이는 구례 모든 지역에 걸쳐 한 해에만 오천 톤 정도가 생산되며, 서울 가락동 시장에서도 다른 지역의 오이보다 높은 값으로 거래되어 우리나라에서 가장 품질이 좋은 오이로 손꼽힌다. 지리산 들풀로 만든 퇴비로 기르는 이곳의 오이는 맛이 담백하고 비타민과 미네랄이 풍부할 뿐만 아니라 오이 그 자체에 특유한 향을 품고 있어 소박이나 장아찌를 담그는 데도 제격이다. "딴 디 오이보다 여 오이가 맛도 좋고 사나을 놔두도 흥청거리지 않애요. 딴 디 꺼보다 달고 진도 많이 나고, 쩌기 뵈는 하우스가 다 오이요, 오이. 보믄 엄청나불지." 봉북리에서 구백 평 가량 오이 농사를 짓는 박 평수 씨의 구례 오이 자랑이다. 하지만 그이에 따르면 오이값이 너무 싸서 한 상자에 적게는 만팔천 원, 많게는 이만삼천 원 정도밖엔 안 한다고 한다. 한 상자에 삼만 원 정도는 해야 수지 타산이 맞는데, 이렇게 싸게 내도 소비자는 비싸게 사서 먹으니 도대체 어디에서 오이값을 떼어먹는 것일까. 구례 오이만큼이나 널리 알려진 것이 있다면, 역시 산동에서 나는 산수유를 꼽을 수 있다. 산동면을 중심으로 재배되는 구례 산수유는 자갈이 많이 섞인 양질의 부엽토와 밤낮의 기온차가 심하면서도 눈과 늦서리가 적은 최적의 조건에서 재배되므로 열매가 튼실하고 빛깔도 좋아 우리나라에서 가장 좋은 품질로 인정받고 있으며, 생산량도 전국 생산량의 절반 가량을 차지하고 있다. 흔히 봄을 알리는 대표적인 나무로 알려져 있는 산수유는 살얼음이 녹을 때쯤 꽃이 피기 시작해 사월 초까지 노란 꽃을 피운다. 열매는 시월에 발갛게 열리며, 보통 십일월에 딴다. 이렇게 따낸 산수유는 씨앗을 발라 내서 얻은 빨간 육질로 술과 한약재, 차와 즙으로 만든다. 한약재로는 주로 정력 강장과 보신용으로, 민간에서는 식은땀이나 오줌싸개 치료로 쓴다. 사실 산수유 씨 발라 내는 일은 여간 번거로운 일이 아니다. 그 작은 열매를 하나하나 입으로 깨물어 씨앗을 발라 내야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옛날 산동에서는 어려서부터 집집마다 산수유 씨 발라 내는 일을 해야 했으므로, 나이가 차서 시집갈 때쯤이면 앞니가 발갛게 물든 홍니로 시집가는 처녀가 한둘이 아니었다고 한다. 산동에는 <산동애가>라는 노래도 전해 오는데, 여순 반란 사건 때 중동 마을에 살던 백 부전이라는 열아홉 살 처자가 국군에게 끌려가며 부른 노래라고 한다. 그러나 반 세기가 지난 지금은 산동 사람들이 산수유 작업을 할 때 즐겨 부르는 노동요로 자리잡았다. 잘 있거라 산동아 너를 두고 나는 간다 산동에서도 산수유가 가장 많아 산수유 마을이라 불리는 곳은 상위 마을로, 봄이면 마을이 온통 노랗게 뒤덮이고 늦가을이면 온통 마을이 붉게 타오른다. 이 마을은 임진 왜란 때 생겨나 여순 반란 사건 때만 해도 팔십여 호에 이르는 큰 마을이었으나 지금은 이십여 가구만이 남아 있을 뿐이다. 본래 산동이라는 땅이름은 산수유에서 유래된 것으로 보인다. 옛날 중국 산둥 성의 한 처녀가 지리산에 시집을 오면서 산수유나무 한 그루를 가져와 심은 것이 오늘날에 이르러 번창하게 되었다는데, 실제로 구례의 산동과 중국의 산둥은 모두 산수유 주산지라는 공통점을 지니고 있다. 이곳 산동에는 산수유나무에 얽힌 재미있는 이야기도 하나 전해 온다. 어느 날 사돈네가 산동에 사는 딸네 집을 찾아왔다고 한다. 용변이 급한 사돈은 일을 마친 뒤 마땅한 밑씻개가 없어 뒷간에까지 늘어진 산수유 가지에서 잎을 따 뒤를 닦았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쓰리고 따갑고 아프고 그야말로 지독한 쓰라림을 맛봐야 했는데, 이에 사돈네가 말하기를 "사돈네가 어렵다 어렵다 하지만 글쎄 나뭇잎까지 독할 줄은 내 미처 몰랐다"며 혀를 내둘렀다는 것이다. 사돈네가 산수유 껍질이나 잎이 살갗에 닿으면 가려움증을 일으킨다는 사실을 어찌 알았으랴. 하늘이 내려 준 약수, 고로쇠 물 지리산자락에 깃든 여러 마을에서는 해마다 경칩을 앞뒤로 하여 이십여 일 동안 고로쇠(단풍나무의 한 갈래) 물 채취에 매달려 산다. 이 고로쇠 물은 일종의 알칼리성 이온 음료로서 위장병과 신경통, 관절염을 낫게 한다고 한다. 해발 천 미터나 되는 산중 깊은 곳에서 나는 고로쇠 물은 지리산과 백운산, 곧 구례에서 나는 물을 최고로 친다. 보통 일교차가 크고 바람이 적은 곳에서 자란 고로쇠나무에서 물이 많이 나온다고 하는데, 기후 조건상 구례만한 데가 없다는 것이다. 예전에는 나무 밑동에 꺾쇠 모양의 상처를 내서 대롱을 끼워 물을 얻었으나, 요즈음에는 거개가 드릴로 나무의 속을 뚫은 다음, 비닐 자루가 달린 주사 바늘을 꽂아 얻어낸다. 물맛은 달콤하고 색깔은 정종 빛이 나며, 냄새가 없고 아무리 많이 먹어도 배탈이 나지 않는다. 물을 얻는 때가 되면 문수리를 비롯한 지리산자락 마을에는 아예 노가리며 북어포, 오징어와 같은 물 안주를 준비해 와 하루에 한 말 가량을 먹고 가는 사람도 있다고 한다. 또 이때쯤에는 예약을 하고 오지 않으면, 물 구경도 못 하고 갈 정도인데, 요즈음에는 이런 틈을 타 가짜 고로쇠 물을 파는 사람들까지 생겨났다. 구례에서 가장 늦게까지 고로쇠 물을 채취하는 곳은 "하늘 아래 첫 동네"라 불리는 심원 마을로, 지리산 일대에서 가장 높은 곳에 자리잡고 있어 고로쇠 물도 가장 늦게까지 나온다. 그래서 심원 마을에는 사월 초까지 고로쇠 물을 맛보러 오는 손님들로 넘쳐 난다. 이 마을 사람들이 모두 민박을 치는 까닭도 이른바 "고로쇠 손님"을 위한 것이라 하겠다. 노고단 북쪽에 심원 마을이 있다면, 남쪽에서는 아무래도 문수리를 꼽을 수 있다. 심원 마을이 주로 노고단과 날라리봉 인근의 고로쇠 물을 얻어내는 반면, 문수리에서는 왕시루봉과 형제봉에서 나는 고로쇠 물을 채취한다. 보통 고로쇠 물 채취는 마을마다 그 구역이 정해져 있어 남의 구역을 함부로 침범할 수가 없다. 고작 몇 년 전까지도 오지 마을로 불리던 문수리에는 아직까지 샛집과 초가, 귀틀집이 각각 한 채씩 남아 있다. 초가와 샛집은 오미리 하죽에 사는 조 광래 씨가 주인으로 본채는 초가로 되어 있고, "까대기"라 불리는 헛간채는 샛집으로 되어 있다. 초가와 샛집은 겉모양이 별로 차이가 없으나, 보통 샛집에 얹는 억새풀이 처마 밑으로 더 길게 내려와 있다. 볏짚과 억새의 질감에서도 차이가 나듯 샛집의 지붕은 좀 성기게 보이는 반면, 초가 지붕은 보다 차분하고 깨끔해 보인다. 또 샛지붕의 수명이 이십 년 정도인 것에 견주어 초가는 일, 이 년에 한 번은 이엉을 갈아 주어야 한다. 초가가 있는 중대 마을에서 형제봉 쪽으로 십 리쯤 가면 밤재라는 마을에서 귀틀집을 만날 수 있다. 이 귀틀집에는 일 년여 전까지 노인 내외가 살았으나, 할머니가 돌아가시고 할아버지마저 아들네로 들어가 지금은 빈집이 되고 말았다. 귀틀집 부엌에서는 지금은 거의 사라진, 조왕신을 모시는 조왕중발을 볼 수 있으며, 귀틀집 특유의 까치 구멍도 만날 수 있다. 또 통나무를 그대로 깎아 만든 나무 굴뚝과 잿막 화장실도 귀틀집에 남아 있다. 이곳 토지면 문수리는 한때 지리산을 오르는 빨치산의 출입 통로가 되었던 곳이기도 하다. 천구백사십팔년 시월 이십삼일 여순 반란 사건의 패잔병들이 문수골을 통해 지리산에 오르면서 천구백오십오년 오월까지 칠 년 동안이라는 기나긴 빨치산 투쟁의 막이 오른 것이다. 당시 남부군 사령관 이 현상도 패잔병을 수습해 포위망을 뚫고 섬진강을 건너 이곳 문수골로 들어왔다. 경찰의 기록에 따르면, 약 이천여 명의 빨치산이 문수골을 통해 지리산을 올랐던 것으로 보인다. 아무래도 지리산의 울창한 숲과 깎아지른 듯한 절벽이 그이들에게는 더없이 좋은 은신처이자 요새였을 것이다. 그러나 당시 토벌대의 끊임없는 소탕 작전과 빨치산의 반격 속에서 정작 힘들었던 것은 동족 상잔의 비극을 가슴 조이며 지켜보아야 했던 지리산자락의 민초들이었다. 더욱이 빨치산 토벌 작전의 하나로 진행된 "거점 분쇄 작전"은 지리산 토착민들의 고향을 송두리째 앗아 가 버리는 결과를 낳고 말았다. 이념에 의한 싸움이 결국 지리산자락에 깃든 마을을 모조리 불태우거나 파괴해 버린 것이다. 하긴 그런 아리고 아픈 역사의 생채기가 골골이 스며 있어 지리산이 더욱 애틋해 보이는지도 모르겠다. 화엄사, 지리산에서 가장 크고 장엄한 절 본래 구례는 백제 땅으로 구차례현 또는 구차지현이라 불려 왔으나. 신라가 삼국을 통일한 뒤에 구차현으로 바뀌었다가 경덕왕 십칠년(칠백오십팔년)에 구례현이란 이름을 얻어 곡성군에 들었다. 고려 초에는 남원부에 속하게 되었으며, 조선 시대 들어 세조 때에는 순천부에, 선조 때에는 남원부에 속해 오다 광무 원년(천팔백구십칠년)에 이르러 구례군이라는 이름과 함께 행정 구역도 전라북도에서 전라남도로 바뀌었다. 백두대간 남쪽 끝자락에 자리잡은 구례는 북쪽으로 전라북도 남원시와 동쪽으로 경상남도 하동군과 지리산 줄기를 접하고 있으며, 서쪽과 남서쪽으로는 각각 곡성군과 순천시가 섬진강 줄기를 따라 자리잡고, 동남쪽으로 백운산 줄기가 광양시와의 경계를 가르고 있다. 북쪽은 지리산의 커다란 봉우리들이 마치 병풍처럼 둘러 있고, 남쪽은 백운산의 잇달은 봉우리들이 구례를 감싸 주고 있어 지리산과 백운산의 크고 높은 산줄기가 동서 남북 사방을 성처럼 두르고 있는 셈이다. 이런 지형적인 조건으로 인해 구례는 예부터 이름난 명승지와 명당이 많았다. 특히 덩치가 큰 만큼 지리산에는 꽤나 커다란 가람들이 둥지를 틀었다. 화엄사, 연곡사, 천은사에서부터 지금은 그 흔적만 남은 상곡사와 황룡사에 이르기까지 구례 쪽 지리산자락에서는 그 동안 숱한 사찰이 생겨나고 사라지기를 되풀이했다. 모르긴 해도 지리산에서 느낀 경건함을 사람들은 대가람으로 형상화했던 모양이다. 지금 구례에 남아 있는 사찰 가운데 가장 먼저 지은 절은 연곡사로, 신라 진흥왕 사년(오백사십삼년)에 창건되었으나, 임진 왜란과 한국 전쟁을 거치면서 숱한 파괴와 손실의 아픔을 겪어야 했다. 지금의 사찰은 천구백팔십일년 복원을 거쳐 새롭게 태어난 것이다. 천은사는 신라 흥덕왕 삼년(팔백이십팔년)에 덕운 조사와 인도의 승려인 "스루"가 터를 닦고 지은 것으로 전해 온다. 창건 당시에는 감로사라 하였으나, 천칠백칠십삼년 전불당이 불에 타 이듬해 혜암 선사가 재건하면서 이름을 천은사로 바꿨다고 한다. 연곡사와 천은사가 유서 깊은 절이기는 하나 아무래도 화엄사의 명성을 뛰어넘지는 못한다. 화엄사야말로 지리산에 있는 절 가운데서 가장 규모가 크고 장엄한 절이라 할 수 있다. 신라 진흥왕 오년 (오백사십사년)에 인도의 승려 연기 조사가 세운 것으로 전해 오는 화엄사는 한때 여든 개가 넘는 암자가 들어찬, 말 그대로 대가람이었다고 한다. 하지만 임진 왜란과 한국 전쟁을 거치면서 많은 건물이 훼손되었고, 오늘날의 모습은 임진 왜란이 끝난 뒤 인조 팔년(천육백삼십년)에 벽암 선사가 증축한 것이다. 사찰 경내에는 국보인 사사자삼층석탑, 영산회괘불탱, 각황전, 각황전앞석등을 비롯한 수많은 문화재가 모여 있고, 지장암 옆에 가면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올벚나무도 만날 수 있다. "피안앵"이라고 불리는 올벚나무는 본래 껍질과 더불어 무기를 만드는 중요한 자원이었는데, 병자 호란 뒤에 전쟁에 대비하기 위해 이 벚나무를 심었다고 한다. 올벚나무라는 이름은 벚꽃 가운데서도 가장 먼저 꽃을 피운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화엄사는 건물 배치에 있어서도 독특한 모습을 띠고 있는데, 일주문을 지나 북동쪽으로 오르면 금강문이 나오고, 그 문을 지나 한층 높은 곳에 천왕문이 있으며, 계속해서 올라가면 보세루에 이르게 된다. 다른 절에서는 보통 대웅전 앞에 자리잡은 누각의 밑을 통과하여 대웅전에 이르게 되는 반면, 이곳에서는 누의 옆을 돌아가게 하는 독특한 방식을 취하고 있다. 절 안에는 동서로 두 개의 탑이 사선 방향으로 서 있고, 동쪽 탑 위쪽에 대웅전이 있으며, 서쪽 탑에서 계단을 밟고 올라선 곳에 각황전이 자리잡고 있다. 각황전은 국보 육십칠호로 우리나라에 현존하는 목조 건물 가운데서는 가장 큰 규모인데, 본래 이름은 장육전이었다고 한다. 부처의 몸을 장육금신이라 한 데서 비롯된 것이다. 그러나 장육전은 임진 왜란 때 불에 타서 없어졌고, 뒤늦게 숙종 이십오년(천육백구십구년)에야 복원되었다. 건물 내부는 전체가 하나의 방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그 안의 기둥은 모두 한 나무만으로 세워져 있다. 천장은 우물 "정" 자 모양으로 주변이 굽어 있는데, 이렇게 천장을 경사지게 한 것은 우리나라에서는 그 예가 드물다 하겠다. 운조루, 구름 속의 새처럼 숨어 사는 집 가람이 성한 만큼 구례에는 유난히 명당도 많다. 조선 후기 지리학자인 이 중환을 비롯해 그 동안 무수한 풍수가들이 구례를 찾았고, 또 이들의 발자국을 따라 많은 사람들이 구례로 흘러 들어왔다. 구례에서도 알아주는 명당으로는 토지면 오미리와 금내리, 문턱면 토금리, 마산면 사도리 상사 마을을 꼽을 수 있는데, 이 가운데서도 최고의 명당으로 꼽는 곳은 오미리다. 지리산의 한 봉우리인 형제봉 아랫자락에 자리잡은 오미리는 천상의 옥녀가 형제봉에서 금가락지를 떨어뜨린 모양, 곧 금환낙지의 형국이어서 대대로 부귀 영화를 누릴 수 있는 명당으로 인식되고 있다. 때문에 전국 각지에서 권세 높은 양반네들이 이곳에 들어와 정착하기도 했다. 이를 뒷받침하듯 천구백삼십일년에 간행된 <조선의 풍수>에서는 이렇게 적고 있다. "오미리와 금내리 부근은 천구백십년 초부터 전국 각지로부터 이주자가 모여드는 곳으로서 충청, 전라, 경상지역의 양반들이 이곳에 백여 호 옮겨 왔고, 이런 추세는 계속 증가하고 있다. 이는 이곳 어딘가에 유명한 명당이 있다고 전해지는 까닭이다." 그러나 일찍이 오미리 "금환낙지"의 핵심에 아흔아홉 칸 집을 지은 이가 있었으니, 이백여 년 전인 천칠백칠십육년 경상도 안동에서 일가들을 모아 오미리로 들어온 유 이주라는 이가 그 장본인이다. 그이는 운조루 터를 닦으면서 "하늘이 이 땅을 아껴 두고 비밀스럽게 나를 기다린 것"이라고 기뻐했다고 한다. 운조루라는 이름은 본래 중국의 도 연명이 지은 <귀거래사>에서 따온 글귀인데, "구름 속의 새처럼 숨어 사는 집"이란 뜻을 지니고 있다. 무려 칠 년 동안이라는 대공사를 거쳐 완공되었다는 운조루가 사람들의 관심을 끄는 까닭은, 명당 자리에 집을 지었다는 것도 있지만, 이 건물이 조선 후기 건축 양식을 충실하게 따른 역사적인 유물로서도 훌륭한 가치를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완공 당시 아흔아홉 칸이었던 운조루는 이백여 년이 넘는 세월이 흐르면서 일부는 스러지고 일부는 낡아 오늘날에는 육십여 칸만이 전해 오고 있다. 마산면에 있는 사도리 상사 마을은 명당으로 알려졌다기보다 장수 마을로 꽤나 알려진 곳이다. 이 마을에서 가장 나이가 많은 이는 김 양순 할머니로, 올해 백 살에 접어들었다고 한다. 할머니는 백 살에도 불구하고 가는귀만 먹었을 뿐, 밥도 술도 잘 먹고, 요즈음도 들에 나가 나물을 캘 정도로 건강하다. 지금 상사 마을에는 칠십 고희를 넘긴 노인도 오십 명이 넘어 환갑을 지낸 노인이라도 여기에서는 아직 창창한 청춘이라 할 수 있다. 이곳 사람들은 장수의 비결로 한결같이 "지리산 약초 뿌리 녹은 물이 다 흘러든다"는 당몰샘을 꼽는다. 조선 말기 의성 김씨 일가가 명당을 찾아 전라도 고을을 떠돌다가 이 당몰샘을 저울로 달아보니 물 무게가 다른 곳보다 많이 나가고 수량 또한 풍부해 이곳에 정착했다고 한다. 이렇게 상사 마을의 장수 샘이 알려지자 조용하기만 하던 산간 오지 마을이 요즈음 들어 사람들이 심심찮게 찾아오는 관광지로 탈바꿈하고 말았다. <택리지>에서 지목한 살기 좋은 땅, 구례! 하지만 아무리 살기 좋은 땅일지라도 그렇지 못한 사람들이 있게 마련이다. 이른바 흙에 발목을 묻고 사는 농투성이들이 그이들이다. 곡물수매값은 오르지 않고, 채소와 과일값이 비싸다 한들 언제나 내는 값은 헐값이고, 비료값, 농약값 제하고 농협 빚 갚고 나면 손아귀에 남는 돈은 얼마 되지 않아 늘 한숨만 쉬어야 하는 사람들. "작년엔 비가 많이 와싸서 벨로 소출이 없었는디, 올핸 어쩔랑가 모르겄소. 베농사 허고, 버리농사 쪼게 짓는디, 비가 자꼬 와서 버리가 겉자라요. 바닥에 물기가 계속 있응게. 노상 보믄 농사짓는 사람은 아무것도 읍써. 쌀값 쪼게 올라 봐야 농자재가 또 안 올랐소. 농약금, 비료금도 삼분지 이가 올랐소. 베농사 지가꼬 한 가마에 십오만 원인디, 한 달에 전기세, 전화세, 의료 보험, 연금, 거라지맹키로 이것저것 띠고 나믄 뭐이 남겄소. 이리 농사가 안 댕께로 다들 떠나지. 도시 사람 열흘만 벌어 불믄 논 한 마지기 소출이 나와 분디. 허니 누가 농사짓겄소. 그라도 인자 기계 가지고 허는 사람들은 쪼께 낫지. 나가 늙어징께 하우스 해서 오이 농사도 못 허고. 그냥저냥 사요. 논 묵콰 불 수 없응게." 광의면 수월리에서 만난 김 봉택 씨가 한숨을 섞어 털어놓은 이야기다. 그러나 결코 남의 이야기로 흘려 보낼 수 없는 말이다. 사실 이들이야말로 풍요의 땅을 위해 봉사해 온 구례의 진정한 섬진강이고 지리산이거늘……. <샘이깊은물> 1999. 5 |
첫댓글 이현님 이렇게 우리 고향 구례의 좋은 자료를 올려 주심을 감사 드립니다. 미처 알지 못했던 정보를 또한번 이런 자료를 통하여 알수 있게 됨을 감사드립니다. 날마다 건강과 이 ^..^..^^..^^^..^
감사합니다...늘 건승하소서....()()....
"지리산이 낳고 섬진강이 기른 땅 구례" 누군가가 표현을 참으로 잘하셨다고 생각합니다. 언제나 수고가 많으심을 감사드리면서 ...
더위에 고생이 많으십니다... 건강은 어떠신지요??..뵈올날을 기달립니다...^^*
우리고향은 정말 아름다움과 정이 넘치는 고향입니다. 울 고향에서 나는 농산물은 마음까지 사로 잡습니다. 우리회사에서 구례농산물 홍보 열심히 하며 농산물 지원행사시 구례쌀로 늘 준비하고있습니다.
감사합니다..울 고향 농특산물이 최고가 되도록 열심히 노력 하겠습니다...()...
자세한글.감사히 잘읽었습니다.골리수.생각이납니다 .노년기는 고향에돌아가 당몰샘 물로 먹고 섬진강 은어나 낚으면서 살까싶어요.
감사합니다...고향 구례가 선생님의 노년에 안식처가 되었으면 합니다..늘 건승하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