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혜를 깨달은 날부터 (골 1:3-8)
골로새서 1장 3에서 8절에 있는 말씀을 가지고 "은혜를 깨달은 날부터"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드립니다. 6절 중반절을 보면 '너희가 듣고 참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깨달은 날부터'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그 말씀 그대로 제목을 정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깨달은 날부터라는 말은 하나님의 은혜를 받은 날부터라고 바꾸어도 뜻은 같습니다.
우리 교회가 지나간 주일에 산상 부흥회를 했습니다. 그 부흥회에서 많은 은혜를 받았습니다. 하나님의 은혜, 하나님의 복음을 깨달은 바가 크고 많았습니다. 이렇게 은혜를 받고 깨달았으면 뒤따르는 생활이 있어야 합니다. 부흥회 기간에는 열심을 내어 박수치며 찬송 부르고 아멘 아멘 하면서 굉장했는데 그것으로만 끝나고 뒤끝에 아무것도 없다고 하면 그 은혜가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부흥회를 하고 나면 변화가 있어야 되고 은혜를 받았고 은혜를 깨달았으면 거기에 뒤따르는 생활이 있어야 한다는 이야기입니다. 은혜를 깨달았다할 때는 깨달음이 중요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한시간 동안 또는 일주일 동안 듣고도 깨달음이 없었다고 한다면 그 집회는 결과가 아무것도 없는 집회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깨달음이 있을 때 변화가 일어나고, 깨달음이 있을 때 생활이 뒤따르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의 말씀에 따라 지나간 주간에 큰 은혜를 받고 그 은혜를 받은 날부터 어떻게 살 것인가를 본문에서 상고해 보겠습니다.
감사의 생활 (3-5) 바울사도가 깨닫지 못할 때에는 감사하지를 못했습니다. 그러나 복음을 깨닫고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고 난 후에는 말끝마다 감사했습니다. 바울사도는 다메섹으로 가는 길에서 주님과 일대 일로 만났습니다. 그 현장에서 엄청나게 많은 것을 깨달았습니다. 이때 바울은 교회론, 기독론, 인론을 깊이 깨달았습니다. 그 이후로 바울사도가 감사하는 것 중에 대표적인 것이 '내가 주께 감사함은 나를 충성되이 여겨 내게 직분을 맡기심이라'고 하면서 직분 맡겨주심을 감사했습니다(딤전 1:12). 주님께서 자기를 만나 부르시사 사도라고 하는 직분을 맡겨 주셨는데 그 직분이 얼마나 귀한 직분인지 깨닫고 나니 그렇게 감사하더라는 이야기입니다.
예를들어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성가대원이라고 하는 직분을 귀히 여기지 못하면 성가대원이 되었다는 사실에 감사하지를 못합니다. 귀히 여기고 감사하지 않을 경우 나오고 싶으면 나오고 말고 싶으면 말고 자기 멋대로 합니다. 하나님께서 그 찬양을 기뻐하시겠습니까? 성가대원은 내 젊음을 하나님께 바치고 내 중심에서 우러나오는 목소리로 하나님을 찬양하여 높이는 직분입니다. '이 직분이 얼마나 귀한가'라고 생각하고 또 감사하여 부르는 찬양은 귀하고 복된 찬양이 되는 것입니다. 그 다음으로 바울 사도는 로마서 16장 3절과 4절에서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나의 동역자인 브리스가와 아굴라에게 문안하라 저희는 내 목숨을 위하여 자기의 목이라도 내어 놓았나니 나뿐 아니라 이방인의 모든 교회도 저희에게 감사하느니라'고 하였습니다. 나는 말해 볼 것도 없고 이 이야기를 듣는 이방교회에서까지도 감사한다는 이야기입니다. 한마디로 이야기하면 그렇게 훌륭한 협조자 그런 동역자를 만나게 해 주신 것이 감사하다는 이야기입니다. 바울사도가 에베소에서 전도하다가 한번은 매 맞아 죽을 뻔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 때 브리스가와 아굴라 부부가 목을 내어놓고 막아 주어 바울로 하여금 피하여 살도록 도와주었습니다. 바울의 목숨을 위해서 자신의 목숨을 내어놓는 사람들을 만나게 해 주심을 감사했습니다. 만남이 이처럼 귀한 것이요, 복된 것이기 때문입니다.
본문으로 돌아가서 3절에서 5절을 보면 '우리가 너희를 위하여 기도할 때마다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 감사하노라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의 믿음과 모든 성도에 대한 사랑을 들음이요, 너희를 위하여 하늘에 쌓아 둔 소망을 인함이니 곧 너희가 전에 복음 진리의 말씀을 들은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이 말씀의 뜻과 배경을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먼저 골로새서를 쓸 당시는 바울사도가 로마 옥에 갇혀 있을 때였습니다. 그렇게 옥에 갇혀 있을 때에도 바울은 감사하다고 했습니다. 은혜를 깨닫고 은혜를 받고 나면 옥중에 있어도 감사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 기도할 때마다 너희를 인하여 감사하다고 했습니다. 바울이 어쩌다가 한두번 기도하는 사람이었습니까? 바울은 무시로 성령 안에서 기도하는 사람이었습니다. 바울은 골로새 교회를 기도할 적마다 감사했다는 것입니다. 결국 항상 감사했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기도하는 중에 감사한 이유가 있었습니다. 즉 예수 안에 너희의 믿음을 감사했습니다. 바울사도가 예수 밖에서 믿음 생활했다가 엄청난 실수와 과오를 범하지 않았습니까? 예수 밖에서 믿음생활을 하다가 그렇게 된 것입니다. 예수 밖에서 믿음생활을 하게 되면 '너는 너고 나는 나다'라는 식이 됩니다. 즉 '예수는 예수고 나는 나다'라고 생각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번 부흥회 기간 동안 우리가 은혜를 받았다고 해도 예수밖에 믿음 생활을 하면 '예수는 예수요 나는 나다'라고 생각하게 됩니다. 예수의 정신, 예수의 생활은 나와 상관없는 것으로 여깁니다. 이렇게 행동하는 믿음이 예수 밖의 믿음입니다. 그러나 예수 안의 믿음은 예수님이 나의 최고입니다. 예수님이 제일이요, 예수님 중심이 되는 것입니다. 골로새 교인들의 믿음이 예수 안의 믿음이었습니다. 그리고 성도에 대한 사랑 즉 성도간의 사랑이 뜨거웠었습니다. 은혜를 받았다고 하면 성도간에 사랑이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성도간의 사랑이 있다면 저 사람이 내 아들의 결혼식에 참석해 주었을 경우 나도 그 집 아들 결혼식에 찬석해 주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저 사람은 베풀기만 하고 나는 받아야만 하는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저 사람이 내 집에서 초상났을 때 위로해 주었으면 나도 그 집 초상났을 때 찾아가 주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서로 서로 사랑을 나누고 교제할 때 그 사랑이 풍성해 지고 넘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골로새 교인들은 서로 서로가 사랑을 받을 줄도 알고 사랑을 베풀 줄도 알았습니다. 즉 깊은 사랑의 교제를 나누었습니다. 사랑의 깊은 교제야말로 얼마나 귀하고 아름다운 생활입니까? 그래서 바울은 골로새 교회를 생각할 수록 감사했습니다. 그리고 하늘의 소망을 인하여 감사했습니다. 땅의 소망이 아닙니다. 땅의 소망은 육신이 죽으면 끝나는 것입니다. 이것을 죽은 소망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하늘의 소망은 죽음과 상관이 없습니다. 죽어도 소망이 있습니다. 그러기 까닭에 베드로 사도는 하늘의 소망을 산 소망이라고 하였습니다. 이상의 말씀을 종합해 보면 믿음?사랑?소망 그 어디 하나 흠잡을 데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어디에 내 놓고 자랑을 해도 더 자랑하고 싶을 지경입니다. 그 하나 하나를 생각할 때 바울사도는 감사했습니다. 바울사도는 은혜를 깨달은 뒤로 말끝마다 감사했고 생각하는 것마다 감사했습니다. 우리가 은혜를 받았다면 감사의 생활이 반드시 뒤따라야 한다는 사실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미국에서 청년 하나가 돈을 좀 벌어야겠다 생각하고 보험회사에 취직을 했습니다. 보험이라고 하는 것은 계약고를 올리는 만큼 또는 자기의 능력에 따라 돌아오는 몫이 있습니다. 그러기 까닭에 큰 꿈을 안고 보험회사에 들어갔습니다. 들어가서 얼마 안되어 계약고를 이렇다하게 올리기도 전에 경제불황이 닥쳤습니다. 그 어려운 시기에 누가 보험에 들겠다고 하겠습니까? 그래서 타의 반 자의 반으로 보험회사에서 밀려났습니다. 이 청년은 음악에 굉장한 소질이 있었습니다. 이 청년이 노래를 부르면 그 노래가 얼마나 우렁차고 아름답고 귀한지 모릅니다. 보험회사에서 나온 뒤로 이 청년은 술집에 나가서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습니다. 박수를 많이 받고 돈을 많이 받았습니다. 여러분 우리나라 가수가 텔레비전에 나와서 노래를 부른다고 할 때 돈을 받고 부르는 줄 아십니까? 돈을 가져다주고 부르는 것입니다. 그러면 가수들은 어디서 돈을 버는 줄 아십니까? 전부 야간업소인 술집에 나가 노래를 불러 주고 계약금을 큰직하게 받는 것입니다.
이 청년은 본래 믿음의 생활을 하던 청년이었습니다. 그러나 술집에 나가서 노래를 하다 보니 손님들이 오라고 하면 손님 자리에 가서 술을 마시곤 했습니다. 술집에 남자 손님만 있습니까? 여자 손님도 있어서 여자 손님들과 어울리다 보니 생활이 아주 난잡해졌습니다. 그러다 보니 자기가 그런 생활을 하면서 돈은 벌었지만 마음에 갈등과 고뇌와 번민은 이루 말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 때마다 그 생각을 잊기 위해 또 술을 마셨습니다. 이런 난잡한 타락 생활이 계속되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그 날도 술이 약간 취해서 들어왔습니다. 피아노에 앉아서 실컷 소리지르고 노래부르면 속이 풀릴 것 같아서 피아노 앞에 앉았는데 그 앞에 종이 한장이 있었습니다. 그 쪽지를 보니 '주 예수 보다 더 귀한 것은 없네 이 세상 부귀와 바꿀 수 없네 이 세상 명예와 바꿀 수 없네 이 세상 행복과 바꿀 수 없네 유혹과 핍박이 몰려 와도 주 섬기는 내 맘 변치 못해 세상 즐거움 다 버리고 세상 자랑 다 버렸네 주 예수 보다 더 귀한 것은 없네 예수밖에는 없네'라는 내용이 적혀져 있었습니다. 바로 어머니 밀러가 아들을 위하여 기도하면서 쓴 시였습니다. '네가 돈 좀 번다고 해서 그렇게 살아도 되느냐? 얼마의 돈 때문에 예수님을 팔고 믿음을 저 버리고 그래도 좋으냐? 예수님을 잃어버리고 돈푼이나 번다고 해서 그것이 성공이요, 네 인생이 승리한 것이냐? 이것이 아니지 않느냐?'하는 뜻으로 적어 놓은 것입니다. 그 때 바로 그 청년의 가슴이 뜨거워졌습니다. 무릎을 꿇고 엎드려 통회를 했습니다. 그리고 그 가사에 곡을 붙였습니다. 그 노래가 지금 우리가 가지고 있는 찬송가 102장에 나오는 것입니다. 그리고는 술집에 나가던 일을 그만 두었습니다. 과거를 청산했습니다. 처음에는 생활이 어려웠습니다. 그러나 그 다음부터 그 소식이 알려지고 전파되면서 기독교 계통의 집회란 집회에서는 초청을 받았습니다. 그 사람이 가면 그냥 갑니까? 그러다보니 그 전 수입의 갑절을 벌게 되었습니다. 자기의 재능인 노래하는 솜씨를 가지고 하나님을 찬양하고 하나님을 자랑하고 하나님을 높이는 생활을 했더니 수입은 오히려 갑절이나 많아졌고 믿음은 풍성해졌습니다. 그는 깨달았습니다. 감사했습니다. 이 사람의 이름은 베불리시아입니다. 아까운 재능을 가지고 세상의 돈 몇 푼 더 번다고 예수님을 저 버리지 마시기를 바랍니다. 예수님과 새로운 관계를 정립하시고 항상 예수를 높이고 예수님을 자랑하고 예수님께 감사하는 생활을 하시기를 바랍니다. 감사의 생활에는 축복도 뒤따른다는 사실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감사가 감사를 받습니다. 베불리시아는 오래 전에 빌리그레헴 전도집회가 여의도 광장에서 모였을 때 그 사람이 와서 간단하게 자기 소개를 한 다음에 이 찬송을 부르지 않았습니까? 얼마나 큰 은혜를 받았는지 모릅니다. 은혜를 받았으면 하나님을 높이고 감사하는 생활이 뒤따라야 한다는 사실을 명심하시기 바랍니다.
결실의 생활 (6) 한번은 예수님께서 씨뿌리는 비유를 말씀하셨습니다. '씨를 뿌리러 나간 사람이 씨를 뿌릴 때에 더러는 길바닥에 떨어지매 새가 와서 먹어버렸고 더러는 흙이 얇은 돌 짝 밭에 떨어지매 싹은 났지만 햇빛이 내리 쬐어서 말라 죽어버렸고 더러는 가시덤불에 떨어지매 싹이 나고 자라지만 가시가 워낙 엉키어 기운을 막아 버리므로 결실을 하지 못했고 더러는 옥토에 떨어지매 30배, 60배, 100배의 결실을 하였느니라'고 말씀하시면서 결론적으로 하신 말씀이 '그 옥토에 떨어진 씨처럼 30배, 60배, 100배의 결실을 맺는 사람은 듣고 깨닫는 자니라'고 하셨습니다. 반드시 듣고 깨달음이 있을 때는 결실의 생활이 뒤따르는 것입니다. 듣고 깨닫고 은혜를 받았다고 하면서 열매가 없다고 한다면 그 깨달음은 의미가 없고 은혜라고 하는 것은 어디에도 쓸데가 없습니다.
갈라디아서 5장 22절에서 23절을 보면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니 이 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고 바울사도는 말했습니다. 열매를 맺는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은혜 받은 사람이 맺어야 할 열매가 무엇입니까? 바로 이 성령의 열매를 의미합니다. 성령 받았으니까 믿는 것 아닙니까? 성령을 받지 않고서는 예수님 믿을 재간이 없습니다. 바울사도는 성령을 받아서 믿는다면 반드시 성령의 열매가 있어야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 열매의 첫째가 사랑입니다. 우리가 지난주간 부흥회에서 은혜를 받았으면 사랑의 열매가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혼자 은혜 받은 것처럼 날뛰었지만 여전히 며느리를 미워한다면 그 시어머니가 받은 은혜가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며느리가 은혜 받았다고 눈물많이 흘려도 시어머니는 귀신도 안 물어간다고 미워한다면 며느리가 받은 은혜가 무슨 은혜입니까? 여러분 그 전에는 미워했지만 은혜를 깨닫고 은혜를 받았으면 사랑의 열매가 있어야 됩니다.
두번째로 희락 즉 기쁨입니다. 이 기쁨은 하늘이 주는 기쁨입니다. 하나님을 바라다보고 영적으로 누리는 기쁨을 이야기합니다. 돈 몇 푼 더 벌어서 기쁘다고 하지 마십시오. 돈이 떠나가면 기쁨도 떠나가는 것입니다. 그런 기쁨은 믿지 않는 사람이 더 많이 기뻐합니다. 그러나 믿는 사람의 기쁨은 그런 것이 아닙니다. 하늘의 기쁨 즉 신령한 기쁨입니다. 은혜를 받았으면 신령한 기쁨이 있어야 한다는 이야기입니다. 이런 기쁨은 누구도 빼앗지 못하는 참 기쁨이요, 영원한 기쁨인 것입니다.
세번째로 화평입니다. 우리가 은혜 받기 전에는 그 누구와 등지고 원수 맺고 살았지만 은혜를 받고 깨달았다면 다 풀고 화해를 해야 합니다. 그런데 은혜 받았다고 하면서 여전히 등지고, 은혜 받았다고 하면서도 둘 사이를 이간질 시켜 싸움이나 붙여 놓는다면 그 사람이 받은 은혜가 몇 푼어치나 되겠습니까? 쓸모 없는 은혜입니다. 은혜를 받았으면 화평의 열매가 있어야 합니다.
네번째로 오래 참음입니다. 이것은 고난을 견디는 것을 의미합니다. 고난을 끝까지 버티어 이겨내는 것 말입니다. 은혜를 받았다고 하면 어떤 고난이 닥쳐와도 그것을 버티어 내고 이겨내야 하지 않겠습니까? 은혜를 받았으면 이런 오래 참음이 열매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다섯번째로 자비입니다. 자비는 관용을 의미합니다. 즉 너에 대한 폭넓은 마음을 의미합니다. 부모는 자식에게 폭이 넓지 않습니까? 남의 자식에겐 그렇지 못하면서 제 자식에겐 그렇지 않습니다. 이것이 자비입니다. 우리가 똑같은 일을 저지르고서도 나는 괜찮고 너는 죽일 놈이라고 합니다. 이것은 나에 대해서는 한없이 넓히고 너에 대해서는 아주 좁은 마음을 가졌기 때문입니다. 자비는 그 반대입니다. 나에 대해서는 좁게 그리고 너에 대해서는 넓게 마음을 갖는 것입니다. 이것이 성령의 열매입니다.
여섯번째로 양선입니다. 선은 선이로되 양심적이고 좋은 선을 의미합니다. 선은 선이로되 덕을 세우지 못하는 선이 있습니다. 이것은 은혜 받고 할 일이 아닙니다. 반드시 덕을 세우는 선입니다.
일곱번째로 온유입니다. 야생마가 길들여지면 얼마나 순해집니까? 그러나 야생마가 길들여졌다고 해서 힘이 모두 다 빠지는 것입니까? 힘은 그대로 있으면서도 순해지는 것입니다. 이것을 온유라고 합니다.
여덟번째로 충성입니다. 은혜를 받고도 충성이 없다고 한다면 그것은 쭉정이 은혜입니다. 믿음과 충성은 하나입니다.
그 다음으로 절제입니다. 우리는 입 조심을 해야 합니다. 내가 말 한마디 조심하지 못해서 다른 사람에게 깊은 상처를 주는 일이 얼마나 많이 있습니까? 말 한마디 절제 못해서 이간질 시켜 싸움 붙이는 일이 얼마나 많이 있습니까? 여러분 아무리 좋은 것일지라도 남에게 덕이 않되면 절제 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런 열매 맺는 생활이 있어야 합니다. 은혜를 받았으면 성령의 아홉 가지 열매가 있어야 할 줄로 믿습니다. 이런 열매를 맺다보면 전도하지 말라고 해도 자연스럽게 전도를 하는 것입니다.
본문으로 돌아가서 6절을 보면 '이 복음이 이미 너희에게 이르매 너희가 듣고 참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깨달은 날부터 너희 중에서와 같이 또한 온 천하에서도 열매를 맺어 자라는도다'라고 하였습니다. 이 말씀은 골로새 교인들이 복음을 받아들이고 예수를 영접하고 은혜를 받은 다음에 열매가 얼마나 풍성했는지 '너희를 바라보는 로마 제국 온 천지에 있는 교회들이 다 그것을 본받더라'는 것입니다. 은혜를 깨달으면 반드시 이런 열매가 맺어져야 은혜다운 은혜입니다.
배움의 생활 (7-8) 본문 7절에서 8절을 보면 '이와 같이 우리와 함께 종된 사랑하는 에바브라에게 너희가 배웠나니 그는 너희를 위하여 그리스도의 신실한 일군이요 성령 안에서 너희 사랑을 우리에게 고한 자니라'고 하였습니다. 이 말씀의 뜻을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바울사도가 골로새 교회를 직접 세운 것이 아닙니다. 한번은 바울사도가 소아시아 지방에서 전도하고 있을 때 골로새 사람인 청년 하나가 와서 바울의 전도를 받았습니다. 예수님을 영접하고 바울에게서 성경을 잘 배웠습니다. 그 후에 고향에 돌아가 세운 교회가 골로새 교회입니다. 바울의 전도를 받은 에바브라가 돌아가서 교회를 세웠기 까닭에 골로새 교인들은 바울의 믿음의 손자라고 해도 좋습니다.
정성진 목사가 시무하는 일산광성교회는 개척한지 3년도 안되어 출석하는 어른이 1,000명이 넘었습니다. 얼마 전에 정성진 목사가 전화를 했습니다. "목사님, 기뻐하십시오" "왜요?" "파주에 파주 광성교회를 지금 개척하려고 짓기를 시작했습니다. 목사님, 손자 본 줄 알고 기뻐하십시오. 창립 예배하는 날 목사님 스케줄 맞추어서 모시도록 하겠습니다" 라는 전화였습니다. 광성교회는 지금 손자를 보게 되었습니다. 얼마 있으면 손자의 생일을 축하하게 생겼습니다. 여러분 바로 골로새 교회가 바울의 손자 교회입니다. 바울에게 배운 에바브라에게 너희가 배우지 않았느냐고 바울사도는 말하고 있습니다. 무엇을 배웠습니까? 성경 즉 복음 진리를 배웠습니다. 너희들이 에바브라에게서 가장 정확하게 배웠기 까닭에 너희들의 믿음, 너희들의 사랑, 너희들의 소망은 흠잡을 데가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배우다 보면 깨닫게 되고 깨닫게 되면 너무 재미가 있고 재미있다 보니 계속 배우고 계속 배우다 보니 성경을 듣고 배우는 시간이 기다려집니다. 그래서 말씀 충만이 이루어지고 믿음이 풍성해 지는 것입니다.
저는 요즘에 "사랑은 아무나하나" 라는 연속극을 보고 있습니다. "별로 인기 없는 걸 뭘 그렇게 보세요" 라고 하실 분들이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어느 날 텔레비전 채널을 돌리다 보니 그 연속극이 나오고 있었습니다. 처음부터 본 것이 아닙니다. 이 연속극은 쌍둥이 두 딸의 결혼문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아직 결혼하지 아니한 아들과 딸을 가진 아버지로서는 관심이 갑니다. 양쪽 부모님들의 묘한 심리와 갈등을 어떻게 잘 묘사를 했는지 모릅니다. 그래서 그 시간 돌아오기를 기다립니다. 그 연속극 하는 시간은 토요일 밤 8시입니다. 토요일이 빨리 돌아왔으면 하고 기다리게 됩니다. 연속극이 토요일 날만 하는 것이 아닙니다. 주일날 밤 8시에도 합니다. 주일날 밤 8시면 우리교회는 저녁 예배를 드립니다. 목사가 예배를 안 드리고 연속극을 볼 수는 없지 않습니까? 그래서 비디오 녹화를 시켜 놓고 예배를 드립니다. 그 연속극을 하는 시간이 그렇게 기다려지고 끝나는 시간이 아쉽고 보고 싶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뭔가 느낌이 있고 생각 키워지는 바가 있고 얻는 것이 있고 재미가 있기 때문입니다. 한마디로 이야기하면 깨달음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예배드리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 귀에 쏙쏙 들어오므로 느낌이 있고 배움이 있고 얻는 것이 있고 재미가 있지 않습니까? 성경을 읽으면서 하나 하나 깨우쳐 가는 것이 얼마나 재미있습니까? 은혜를 깨닫다 보니 열심히 성경공부를 하고 성경공부에 더 깊이 들어가다 보니 재미가 있습니다. 그래서 훌륭한 그리스도 인이 되는 것이 아닙니까? 골로새 교인들은 은혜를 깨달은 날부터 그렇게 열심히 성경을 배워가더라는 이야기입니다. 우리가 은혜를 받았으면 이제는 성경을 펴놓고 살기를 바랍니다. 성경을 묵상하십시오. 말씀을 통해 은혜를 받고 말씀이 여러분의 생활 속에 그대로 적용이 될 때 놀라운 은혜와 축복의 역사가 일어날 것입니다.
결론을 지어 말씀드립니다. 첫째로 골로새 교인들은 은혜를 깨달은 날부터 감사의 생활을 했습니다. 감사하는 자에게는 하나님께서 더 주시고 더 주십니다. 감사가 감사를 낳기 때문입니다. 두번째로 그 사람들은 은혜를 깨닫고 은혜를 받은 날부터 성령의 아홉가지 은혜를 맺기 시작했습니다. 골로새 교인들의 열매를 지켜보는 모든 교회들이 그대로 본받아 온 천하에서 열매 맺어 자라가게 되었습니다. 세번째로 에바브라 같은 신실한 종에게서 성경공부를 열심히 했습니다. 열심히 성경공부 하는데서 끝내는 것이 아니라 생활에 적용시킬 때 은혜와 축복은 우리의 것이 될 줄로 믿습니다.
|
출처: 창조주가 선물한 세상 원문보기 글쓴이: 박종태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