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전문학의 뿌리와 호서문학의 창간
-광복 전후 충청 ․ 대전 문학의 현황과 뿌리-
대전문학관장 박 헌 오
Ⅰ. 머리글
대전의 문인들이 바라던 대전문학관이 문을 열고 첫 걸음마를 시작했다. 없는 것과 있는 것은 엄청난 차이가 있음을 알게 하고, 의미를 창출하여 보여주어야 한다는 중압갑을 느낀다. 그 첫 과제가 바로 뿌리를 찾는 것이다. 지금껏 문학관 골격을 갖추고 운영시스템을 구축하는데 쫓겨 문학사 연구는 착수하지 못하고 있었다.
대전은 1930년대부터 1988년까지 충청남도청소재지로 충남지역의 중심지가 되어왔다. 대전과 충남의 이러한 지역적인 긴밀한 관계로 향토문학적 뿌리를 내린다고 해서 통합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며, 대전과 충남이 분리되었다고 해서 완전히 금을 긋게 되는 것도 아니다. 대전을 중심으로 한 현대문학의 실질적 활동을 뿌리로 규명하고, 의의를 찾는 것이 합리적인 방법일 것이다.
그동안 많은 문인들이 문학사를 편찬하고 언급해 온 바가 있다. 그런데 한정된 자료에 기초한 기술의 한계를 벗어나지 못하고 이를 반복해온 면은 없는지 문제의식을 가질 필요성도 있는 것 같다.
어느 누구라도 긴 연대의 방대한 자료를 한꺼번에 짧게 다루다보면 오류와 누락의 문제를 일으킬 가능성이 있다. 이제 문학관을 만들었으니 두고두고 소중한 자료들을 찾고, 다양한 논거를 종합·정리하여 그 정체성을 정립해 가야 하겠다.
『호서문학』은 대전문학의 큰 뿌리가 되어왔다. 이러한 논의는 사실을 있는 그대로 밝히는 것이지 다른 뿌리의 흐름을 간과하거나 우위를 논하는 어리석은 입장을 가지고 보는 것은 아니다. 상호 다양성을 가지고 조화를 이루어 온 점을 살펴보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호서문학』은 1951년 11월 11일에 창립되어 60여년을 이어오면서 수없이 넘어지고 다치면서도 한국 현대문학단체로 최고의 명맥을 유지해 왔음을 공인받고 있다. 우리 대전문학의 자부심이며 대전문인의 긍지임을 부인할 수 없다.
호서문학 창간 60년을 기리고 겸허히 숭앙하면서 대전문학의 뿌리를 찾아보고자 한다. 미쳐 자료를 찾고 연구를 깊이하지 못한 입장에서 부족함이 많으나 그 시작에 의미를 두고자 한다.
Ⅱ. 대전문학의 뿌리 가꾸기
상한 뿌리는 잘라내고, 성한 뿌리를 잘 뻗어가게 해야 건강한 역사가 자리를 잡는다. 문학의 높은 가치와 달콤함과 향기로움 때문에 문학에는 유난히 탈도 많고 아전인수의 유혹도 많은 것 같다.
그렇기 때문에 수많은 시련과 갈등을 겪으면서도 60여 성상을 지켜온 『호서문학』의 맥이 대전문학의 뿌리로서 소중한 의의를 지님은 더 말할 나위가 없다. 그렇다고 『호서문학』만이 대전문학뿌리의 전체라고는 말할 수 없다. 엉뚱한 비유 하나를 인용하겠다. 문학관에는 참 귀중한 나무 한그루가 있다. 백년은 넘었을 것으로 보이는 참나무 한 그루가 있는데 한 뿌리에서 여섯 가지가 똑같이 뻗어 올라가 조화롭게 자랐기에 ‘문학나무’라는 이름을 붙였다. 대전문학도 한 뿌리임을 명심하면서 여러 줄기의 문학단체로 자라나더라도 서로 인정하고 격려하며 조화를 이루기를 소망하는 뜻에서이다.
『호서문학』 60년사에 최문휘의 「대전문단의 발아기와 호서문학」의 기고문에 보면 대전의 첫 문예지로 알려진 『향토』는 1945년 10월 ‘종랑도’라는 단체의 회지 성격으로 출발하여 문예지에 온전한 뜻을 둔 것이라고 보기에는 의문이 있다고 전하고 있다. 정훈을 주축으로 원영한, 송석홍, 최영자, 이춘우, 이교탁, 남준우, 민병성, 권용두 등이 만든 ‘향토시가회’에서 1946년 2월 창간한 『동백』이 본격적인 시 동인지이며 『호서문학』의 전신으로 본다는 견해가 우세하다. 정훈이 교장으로 있는 호서중학교에 교사로 불러들인 박희선, 정해붕, 원영한, 이교탁, 박용래, 민병성 등과 이재복, 이춘우, 남준우, 권용두, 한덕희, 김소정, 하유상 등이 함께하여 1947년까지 8집을 내면서 본격적인 문학지 역할을 다하였다 하겠다. 그러나 좌익계인 이병권은 앞장서 정훈의 사퇴를 주장하고 민병성 등이 압박하는 와중에서 동백을 꾸려나오던 박희선 마저 떠나버림으로서 안타깝게도 『동백』은 막을 내리게 되었다고 한다. 만일 그 같은 일이 없었다면 『동백』이 오늘에까지 맥을 이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이후 좌경문인이었던 민병성, 전여해, 염인수 등이 활동하였으나 그동안 『동백』으로 다져진 대전문단을 호락호락하게 장악하지는 못한 것으로 보인다. 전란의 와중에서 1951년 11월 11일 ‘호서문학회’가 창립된 것은 『동백』의 맥을 잇는 바탕 위에서 오늘의 대전문학의 발아로 볼 수 있을 것이다. 이듬해인 1952년에 창간된 『호서문학』 창간호 창간사는 당시 『호서문학』 창간정신이요 대전문학정신의 발현으로 삼을 수 있을 것이므로 이를 문인들 모두가 두고두고 되새겨야 할 것이다.
파괴와 출혈과 기아와 우수가운데에서 무에 그리 굉장한 것이 있으랴만 그래도 한번 우리 기운을 내보자는 것이다. 앞으로 호서문학지가 잎마다 아름다운 열매를 맺으려는지 미리 말하기는 어려우나 깜양깜양대로 황홀한 꿈을 가져본다. 풀 한포기 거슬림 없고 때때로 거센 바람만 치는 토박한 풍토 가운데서도 사보랭이 다락같이 무성하고 불을 피우듯이 우리 또한 그렇게 희망하여 보는 것이다. 보-르랭이 2년간에 7만 프랑의 투자로서 『악의 꽃』을 얻었다고 하지만 우리는 그와 같이 현금출자는 없으나 가지가지 수난과 굴욕과 우리의 운명은 보다 더 고귀한 투자를 하였고 또 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나라는 정치와 경제도 그러려니와 문화에 있어서도 무에 유를 낳아야 하며, 거의 황폐한 터전에서 새로이 개척해야 할 노고와 희생의 세대에 살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비상한 각오로서 신념과 의욕과 정열과 자부를 잃지 말고 굳게굳게 싸워가는 동안 비록 맨주먹으로도 적막한 조국 문단에 호사스런 꽃을 피게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뿐이랴 나아가서는 우리 호서문단을 비단 조국의 빛으로서 끝칠게 아니요 인류문화사상에 또한 빛이 될 수 있도록 매양 고매한 이념에 살고 수련과 노력을 쌓고 쌓아야 할 것은 물론이다. 끝으로 글 쓰는 벗들은 초지일관 아름다운 끝맺음을 거두도록 굳은 결심이 있기를 바라며 창간사를 대신한다. < 정훈 >』
인민군이 2개월 여 동안 대전을 점령하고 있을 때 문인들은 피난과 은거로 생존했고, 처절한 전란의 폐허가 있었음에도 『호서문학』은 살아있었기에 『호서문학』 2집이 나오고 이어서 1956년 6월 25일에는 완전한 종합문예지의 면모를 갖춘 『호서문학』 제 3집을 발간하였다. 『호서문학』 제 3집의 출간은 대전문학사에 가장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고 하겠다.
첫째는 192쪽에 달하는 제대로 된 종합문예지가 탄생되었음이다. 그동안 축적된 지역문단의 힘을 결집하여 오늘에까지 흘러올 수 있는 큰 출발을 이루었음이다.
둘째는 한국 문학가협회 충남지부 발족은 그 나름대로 충청문학과 중앙문단을 잇고, 지역문단의 또 다른 다양성을 모색한다는 데서 의의를 찾을 수 있다. 그러나 처음부터 완전한 출발을 한다는 것도 무리였을 것이다. 이를 전후하여 일어난 대전문단의 분열과 갈등을 엿볼 수 있는데 1956. 3. 1일 발간된 『호서문단』이 그것이다. 『호서문단』은 결과적으로『호서문학』과는 뜻을 달리하게 된 몇분의 문인들이 만든 문예지로 호서문학의 호수로 인정하지 않은 듯하다. 창간호에 참여한 문인이 불과 10명 정도였던 것으로 보아 완전한 호응을 얻지 못했음을 알 수 있다. 불과 3개월 후에 발간된 『호서문학』제3집에는 문협 충남지부 참가자 전원을 포함하여 약 40명의 문인들이 작품을 내고 참여하였다. 『호서문학』은 명실공히 지역문단을 총체적으로 아우르고 있었음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셋째는 전형의 권두 기고에서 나타나듯이 현대문단의 계보가 가지는 병폐와 정체를 지양하고 향토문학의 고유성을 견지하면서 토착성을 확립하고 있음이다. 그러면서도 전국 문인들의 글을 청탁하여 게재하는 독자적 연계성을 견지하는 힘이 있었다는 점을 주목할만하다. 지역문단에서 소위 중앙문단이 정하는 기준대로 추천이라는 등단 절차를 밟았느냐를 가지고 새로운 갈등이 일어날 수 있는 개연성이 충분히 있다. 그 여파가 지역문단을 지키고 성장해 온 문인들의 자존심에 충격을 주고, 소요를 일으키게 되었을 지라도 단호하게 배격하고 지역문단의 정체성을 흔들림 없이 지켜 나가겠다는 의지가 담겨 있다.
넷째는 『호서문학』이 그 많은 시련과 도전을 이겨내고 제대로 면모를 갖추어 도약으로 출발했다는 점이다. 이로써 오늘의 『호서문학』이 한국 최장수 종합 문학동인지로 명맥을 이어올 수 있는 기반을 만든 것이다. 『호서문학』 제 4집을 살펴보면, 과거 『호서문학』이 견뎌야 했던 고난의 한 국면이 잘 나타나 있다. 『호서문학』 제 4집은 1958년 1월 25일 활문사에서 인쇄되었다. 그런데 그 책이 1959년 2월 1일 발행되었다고 표기되었다. 인쇄한지 무려 1년 만에 발행된 것이다. 원로 한 분께 그 연유를 여쭈어 보았다. 그분 말씀이 “책을 인쇄해 놓고 찾을 돈이 없어서 발행을 못하고 있다가 천주교 대흥동 성당 오기선 신부의 도움으로 1년 만에 발행한 것.”이라고 귀띔해 주었다. 이 같은 역경과 기다림과 회생의 과정을 거쳐서 『호서문학』의 명맥을 이어온 것이다. 더욱이 『호서문학』제 4집 <권두언>에 “호서문학회가 출발한지 해를 거듭했고 이제 『제 4집』을 내놓는다. 자기의 심화와 사회의 순화를 내걸은 이 서클이 걸어온 길로 6.25이후의 파동 속에 안한하지는 못했다. 비굴과 도피와 싸웠다. 편당적인 잡음과 싸웠다. 이유 없는 중상모략을 배제하여야 했다. 자주성을 잃은 추종아부를 배격하고 나온 것이다. ……중략……<장암>”장암 지헌영의 숨김없는 글에서 느껴지는 바가 너무나 많다.
상임위원 총무간사를 맡았던 정주상의 후기 가운데 보면 지면의 사정으로 작품을 다 싣지 못하게 되어 서운하다는 내용이 들어있다. 그리고 말미에 “회원들의 가난한 주머니를 털어서 하는 일이라 할 수 없다. 적잖은 경제적 출혈을 해가면서도 이런 일을 하지 않고는 백이지 못하는 의욕, 이것이 우리의 부동산이기는 하나 이해있는 독지가들이 좀 더 있다면 우리도 더 잘 자랄 것 같다.”고 적고 있다.
『호서문학』사정이 가난과 내우외환을 함께 겪으면서도 문학을 사랑하고 대전문단을 바로 세우고자 하는 큰 뜻에서 좌절하지 않고,『호서문학』을 발간해 왔음을 체감하게 하는 대목이다.
다섯째는 호서문단의 성장을 통해서 다져진 충청문단은 다양한 문학단체들을 탄생시킬 수 있는 힘이 축적되었음을 유추할 수 있다.
1976년 4월에 『호서문학』제 5집이 발간되었다. 4집이 발간되고 나서 무려 17년 만의 일이다. 그러나 1965년에는 『충남교단』 창간호가 발간되었고, 같은 해 시조 전문지 『청자』가 발간되었다. 또 1966년에는 『시혼』을 창간하였고 1967년에는 『중도문학』 창간호가 발간되었으며, 문인들의 창작활동도 활발하게 나타나고 있다. 그리고 『호서문학』이 중단되었던 것은 아니었음을 알 수 있다. 김학응이 작성한 것으로 보이는 『호서문학』 제 5집 편집후기에서 “오랜 침묵 끝에 5집을 내놓게 되는 기쁨이 크다. 그동안 쉼 없이 달마다 월례회는 계속 되었다. 내일의 대계를 위한 시기였다 하겠다. 『호서시선』및 『속․호서시선』을 간행하는데 힘이 기울었었는지도 모른다. ~하략~”고 적고 있다. 다행히 호서문학 회원들의 모임과 합평회 등이 계속되면서 호서시선을 엮어내고 전통을 살려낸 것이다.
한국 문학가 협회 충남지부가 창립되고 『호서문단』 제1권 제1집을 발간하고 나서 다시 『호서문학』과 『호서문단』을 합해서 『충남문학』 제 6집으로 표기하여 반발을 불러일으킨 것은 유감스런 일이기는 하지만 결과적으로 『호서문학』지의 명맥이 끊어지지 않도록 지켰음은 다행한 일이다. 그것은 『동백』으로 부터 이어오는 『호서문학』의 전통과 문맥을 계승하고, 『동백』이 8집까지 계속되다가 불행한 소동에 의해서 중단을 겪었던 전철을 다시는 되밟지 않겠다는 굳은 의지의 발로였을 것이다.
『호서문학』제 5권에서 하유상은 동백시절을 회고하면서 30년이란 세월을 지나 벌써 중년에 접어들었음을 생각하고 착잡한 심정을 토로하였으며, 『호서문학』 발간을 주관해온 박희선은 ‘『호서문학』 30년과 나’라는 회고문에서 “30년이 엊그제 일이 아니라 바로 오늘 이 시각의 탁상위의 현실로 다하면서 시간을 잊게끔 되었다.”고 적어놓았다. 호서문인의 정신은 쉼 없이 흐르고 있었다.
앞서 문학관 참나무가 깨우쳐 주듯이 『충남문학』은 『충남문학』대로, 『호서문학』은 호서문학대로 또 다른 문학은 그 나름대로 전통과 명맥을 지속해 가면서 서로 침해하거나 방해하지 않고 발전해 온 것이다. 더불어 상호 고유성을 존중하고, 기능적으로 합리성을 견지하도록 분담하면서 협력해 나가야 했을 것이다. 길고 큰 안목이 발휘되어 『호서문학』은 호서문학대로 지킬 수 있었던 일인지 모른다.
문인은 각자 자기작품을 창작하고, 문학단체는 각기 창립이념과 고유한 전통이 수립된다. 반면교사로 삼아야 할 것은 상호 고유성을 침해하거나 갈등을 일으키지 말아야 하고, 문단을 이데올로기나 정치적 파쟁의 마당으로 끌어들이지 말아야 하며, 이권 경쟁의 시장이나 감정적 다툼의 소용돌이가 되지 않게 해야 할 것이다. 각자 창작에 열중하면서 향토문학을 사랑하고, 상생의 길로 함께 나아가는 문단을 구축하는 것이 『호서문학』의 정신일 것이다. 60년을 지켜오면서 바쳐 온 희생과 열정과 노력으로 구축해놓은 기반을 손상시키지 않는 것이 우리의 소명일 것이다. 대전문학의 뿌리를 우리 대에 와서 올바르고 왕성하게 가꾸어놓지 못하고 갈등구조를 남겨둔 채 후대에 물려준다면 우리는 영원히 씻지 못 할 부끄러운 역사의 주인공이 될 것이다. 무엇을 얻고 무엇을 남기겠는가?
소음은 시간이 가면 가라앉는다. 그 저의와 흔적만이 남을 뿐이다.
Ⅲ. 대전문학의 줄기 캐기
머리글에서 언급했듯이 지역문학사를 밝히는데 있어서 한번 잘못 기술했거나 자료의 한계를 넘지 못하고 서술된 내용들이 반복적으로 인용되는 오류를 바로잡기 위한 작업은 계속 되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묻혀있는 자료들을 찾아내고, 은닉 되거나 왜곡된 진실을 밝혀내며, 추호라도 비굴한 추종이 있다면 벗어나는 결단이 있어야 한다. 필요한 때에 필요한 사록(史錄)을 인용 하고, 개인적으로 사장시키고 있는 물증들이 있다면 공익을 위해 공개 ․ 활용하도록 해야 할 것이다.
언뜻 떠오르는 몇몇 사례들을 예시해 보겠다.
문학관에서 두 번째 기획전으로 작고문인 회고전을 마련하면서 얻은바가 적지 않다. 소중한 자료들이 사정없이 사라지고 있고, 밝혀야 할 정사(正史)가 수없이 잠들어 있다는 것을 실감한 일이다. 또한 찾아내야 할 자료들이 목록만 기록되어 있고 실질적 증거가 나타나지 않고 있는 것들도 많고, 찾아낸 자료들을 연구해야 할 과제들도 산적되어 있다.
호서문학』 창간 60년을 맞아 60년사를 정리하고, 『호서문학』 창간호를 서울대학교 도서관에서 찾아 알아낸 일은 큰 성과이지만, 『호서문학』 제 2집은 아직 구하지 못하고 있으며, 『동백』과 『호서문학』에 참여한 문인들 가운데 작품세계를 연구하지 못한 분들도 상당수 있다.
또 하나 재조명해야 할 중요한 문인으로 금당 이재복을 들 수 있다.『동백』의 회원으로도 활동했고, 호서문학회에서도 활동했으며, 『불교문학』과 『시조문학』에도 주옥같은 작품들을 많이 남겼음에도 그 기록이 이에 미치지 못하여 심지어는 문인으로 등단여부에 의문을 제기하는 기록마저 나타나고 있다. 이재복에 관한 자료는 쉽게 접할 수가 있다. 우선 이재복 전집을 살펴보아도 알수 있으며, 한국 불교문학가 협회에서 1973년 발간한 『한국불교시선』에 작고시인으로는 한용운, 이광수, 김소월, 오상순, 유치환, 조지훈, 최인희, 해방 전 시인으로는 김광섭, 김달진, 박종화, 서정주, 신석정, 신석초, 이재복, 홍영의 등으로 나란히 등재하고 있다. 또 한국문인협회에서 1965년 발간한 『연간 한국시집』에 200명의 시인들의 작품과 함께 이재복의「거울」이란 작품이 등재되어 있다. 특히 그가 공주사범대학 교수로 재임하던 (1949년~1954년)시기에 시회(詩會)를 이끌었는데 여기에는 이원구, 정한모, 김구용, 임강빈, 임성숙, 김상억, 최원규 등이 참여하여 이 지역문단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사실은 이번 전시회 자료수집과정에서 당시 합평회 자료로 사용된 프린트물 다발이 나와 충남문학사 뿐만 아니라 한국문학사의 연구 자료로도 중요한 부분으로 생각된다.
1967년 9월 『중도문학』이 창간되었다. 윤채한 시인이 중심이 되어 ‘한국문학의 새 기풍을 조성하는데 앞장 서겠다’는 기치를 내걸고 출발하면서 충남의 문학전통을 이어 한용운, 윤곤강, 심훈을 따른다고 밝히고 있다. 여기에는 많은 문인들이 참여했는데 수필에 김일엽, 안세영, 임헌도, 안영진, 김세진, 시에 김정욱, 최원규, 서창남, 이덕영, 박희선, 채규판, 양채영, 조남익, 유안진 등의 작품이 수록되고 논단에는 황희영 송영준, 송하섭, 중도문단 소사에 박희선, 최문휘, 좌담에 임강빈, 김중권, 소설에 이경우, 김수남 등의 작품이 수록되어 있다.
『중도문학』을 읽어보면서 박희선의 기고문에서 또 하나 묻혀있던 사록을 발견하게 된다. 일반적으로 해방이후 학생문학동인회로는 머들령, 돌샘, 판도라 등으로 알아왔다. 그런데 1946년 학생문학단체 「미래」가 조직되어 활동했다는 내용이 들어있다.
“…… 이 무렵 학생시회 <미래>라는 것이 탄생하여 대전의 학생 시운동의 중추 내지 선도적인 위치에 서 있었는데……,”
이 단체는 박희선과 박용래 등이 지도해온 문학단체이며 최재문, 조용구, 정해붕, 정옥순, 조남중, 정해강 등 여러 학교의 학생들이 참여하였다.
또 하나, 중요한 사항이 있다. 충남(대전)문학에서 단재 신채호에 관한 내용이 누락되다시피 했다. 단재 신채호의 생가가 중구 어남동이란 사실도 근자에 와서야 알려졌다. 『충남문학』 창간호에 한용운, 윤곤강, 심훈의 정신을 이어받는다는 내용은 있으나 신채호에 대한 언급은 찾아볼 수 없다. 특히 오늘의 대전문단에서는 단재에 대한 비중을 높이 알고, 그 정신을 올바로 이어받을 수 있는 교육 방안이 적절히 마련되어야 할 것이다.
단재 생가가 문화재 복원 차원의 관람 장소에 그친다는 것은 지나친 방관이 아닌가 생각된다. 강원도, 경기도 지방에서는 사소한 연고만 있어도 문학촌을 만들어 효과를 거두고 있음을 비교해 본다면 부끄러운 일이다.
Ⅳ. 호서문학정신
6.25 전란을 겪는 열악한 환경에서 발아하여 한국 최장수 문학동인회로 자리 잡은 호서문학회의 설립과 호서문학지의 발행은 충청문단은 물론 한국 문단사의 중요한 부분이다. 온갖 난관과 갈등과 격동이 있었지만 이를 극복하고 오늘날까지 이어 나오게 한 정신을 본보기로 삼아야 한다. 그것은 오류와 절망에 있었던 것이 아니라 밝고 바른 미래의 활로를 꿈꾸고, 힘을 모아 지키고자 지향해왔던 문학정신일 것이다. 호서문학회 창설을 계기로 엿볼 수 있는 호서문학 정신을 나름대로 생각해 본다.
첫째 미래를 개척해가는 향토문단을 창설하고자 하는 정신이다. 호서문학 창간호에 실린 창간사에 나타나듯이 거센 바람을 견뎌내고 비상한 각오로 조국문단에 꽃을 피우기 위해 초지일관 노력하여 최장수 문학지의 자긍심과 자존심, 그리고 명예로운 전통을 지키자는 것이다.
둘째 시련과 역경을 극복하고 끝까지 서로 존중하고 포용하면서 문단을 세워나가는 전통을 지키자는 것이다. 때로 의견을 달리하고 다른 조직을 가졌더라도 갈라서는 것이 아니라 큰 명분과 긴 전통을 내세울때는 배척함 없이 함께하는 것이다.
셋째 향토 사랑과 전통적 토착문단의 주체성을 확립하자는 것이다. 중앙문단의 격류나 다른 정치사회적 혼란이 있더라도 향토문단은 독자적인 탄생과 발전 과정의 산물로서 중심을 지키며 나간다는 것이다.
넷째 다양성을 인정하는 포용력으로 상생을 도모하는 문인정신이다. 새로운 단체가 설립되고 다양한 활동형태가 나타난다 할지라도 서로 적대감을 갖거나 참여를 제한하는 일이 없이 자유의사에 따라 모두의 참여를 허용하고 받아들이는 것이다. .
다섯째 명예로운 문인의 자존과 문우애와 문단존중의 전통을 지키는 것이다. 문단이 정치나 사회적 격동에 흔들리고 파괴되지 않고 결국은 본연의 위치로 돌아와 미래를 향해 발걸음을 옮겨가는 것이다.
여섯째 향토문단을 흔들거나 갈등으로 몰고가는 행위를 용납하지 않는 것이다. 이권이나 야심이나 감정 때문에 잠시 충격을 받더라고 끝내는 모든 문인이 함께 향토문단을 지켜가는 일원으로 동참하게 하는 흡수력을 바탕으로 대의명분에 충실함이다.
일곱째 선비고장의 품격을 지키는 것이다. 개별적으로는 생각이 다르고 가치관에 차이가 있을지라도 문단의 전체적 운영은 선비고장다운 면모를 유지해가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다.
과거에 비하면 오늘의 문단여건이나 창작활동은 너무 많이 다르다. 문학지를 낼 돈이 없어 발행을 미루고 중단하며 합평회만 계속하던 때가 있었으며, 문인들도 가난에 허덕이던 때를 생각해 본다. 그 시절에는 지키기 힘들었지만 향토문학에 대한 꿈과 애정과 의지는 무엇보다 강렬했다.
오늘 우리 문단의 여건이 획기적으로 나아졌지만 아직도 그 꿈을 실현해내지는 못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이제 호서문학정신이 호서문학만의 것이 아니라 대전문학 전체의 것이 될 수 있도록 교훈으로 삼아야 할 것이다.
Ⅴ. 꼬리 글
대전은 전국에서 최장수 종합문학동인회를 키워온 당당한 문학의 도시이다. 대구에서 1949년에 『호서문학』창간보다 조금 앞선 『죽순』이란 시 전문지가 발행되었지만 종합문예지는 아니며, 이 문학지도 금년에 46호를 발간하고 있는 것을 보면 호서문학에 못지않은 역경이 있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호서의 선배문인들은 온갖 어려움과 아픔을 겪으면서 그 기반을 닦아왔음을 우리는 『호서문학』의 도도한 흐름 속에서 간파할 수 있다.
『호서문학』은 좌우익의 갈등 속에서 모욕을 당하고, 전쟁의 와중에서 목숨을 위협 받았으며, 문학단체가 난파당하면서도 새로운 문학단체를 설립하여 발전시켜 왔다. 문인들은 때로 의견이 달라 격론을 벌리면서도 연대의식을 가지고 대전문단을 위해서 헌신해 왔다. 그 가운데 크고 긴 줄기가 『호서문학』이었다. 여러 단체들이 서로 지원하고 격려하면서 상생을 모색해 왔다. 문인들의 선택을 강요하거나 비난하지 않으면서 참 자유를 서로 지켜주고, 왕성한 창작활동을 격려해주는 풍토를 만들기에 힘써왔다. 또한 대전문단의 정체성을 확립해 나가고, 향토문단의 고유한 전통을 이어가면서 취할 것과 버릴 것을 가려 날로 아름답고 향기로운 문단의 발전구조를 구축하는데 부심해왔다.
문인의 신성한 명예를 걸고 정도를 지키면서 교란에 말려들지 말자. 눈앞의 이익도 무책임한 위협도 혼란스런 허상도 물리치자.
우리 스스로 문단을 성역화하고, 문인정신과 명예를 존중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