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우면 고요해지고, 고요하면 밝아지고, 밝아지면 통한다.
容恕의 苦痛
이청준 《벌레 이야기》에서
ㅡ ‘벌레’라는 말은 ‘존엄성이 짓밟힌 인간’을 가리킨다.ㅡ
"용서"
"사람들은 용서가 아름다운 일이라고 말한다.
정작 자신이 용서할 일을 당하기 전까지는·····."
―C.S. 루이스ㅡ
영화 속에서
영화 밀양 이청준 원작 "벌레 이야기"
아들을 유괴당하고 거의 폐인이 되어 갈 쯤
종교에 의지하며 추수려 가던 과정,
그리고 아들죽인 철천지 원수, 유괴범을 용서하러
찾아가는 장면,
사형 집행일을 앞 둔 유괴범을 마주했을때의 절망과 배신감.
자식잃은 엄마는 절규속에서 폐인이 되어가고 있을 때,
정작 유괴범은 이미 그가 선택한 하느님으로부터
용서와 구원을 받고 세상에서 가장 평화로운 사람이 되어 있었다.
오히려 그는 죽은 아이의 엄마를 위로한다.
그 온화하던 유괴범의 말과 행동에 엄마는 충격을 받고
다시 혼란에 빠진다.
자신이 용서하기 전에는 그 누구도 그를 용서할 자격이 없다.
하나님이라도 마찬가지다.
용서를 해도 죽은 아이의 엄마가 먼저다.
영화에서 잊혀지지 않는 장면을 딱 하나만 뽑으라면 바로
철창 안에서 뻔뻔스럽게 평온하던
사형수의 말과 행동 그리고 표정이다.
그 평온함이 왜 지금도 끔찍하게 클로즈업 되는 것일까.
이 시나리오의 원작은 이청준의 중편소설 '벌레 이야기'이다.
물론 시나리오와는 다른 점이 있지만 뼈대는 거의 비슷하다.
서울에서 실제 유괴 살인사건이 일어 났고 그 범인이 남긴 말
'나는 하나님의 품에 안겨 평화스러운 마음으로 떠나가며
그 자비가 희생자와 가족에게도 베풀어지기를 빌겠다'는
이야기를 뉴스에서 듣고 이청준은 이 소설을 쓰게 되었다고 한다.
날이 갈수록 매체에서는 아동과 관련된 사건을 끊임없이
보도하고 보는 사람을 경악과 분노에 떨게 한다.
小說 속에서
약국집 부부의 아이는 유괴된 지 두 달 스물 날째 되던 날
참혹한 시체로 발견된다. 범인은 면식범,
아이가 다니던 주산학원의 원장.
금품을 노리고 저지른 천인공노할 살인이었다.
아이의 엄마는 인사불성으로 정신마저
오락가락한 상태로 절망과 자학속에 지낸다.
분노의 수렁에서 복수를 다짐하고 있는 그녀에게
종교의 힘을 빌어 스스로와 죽은 아이까지도
구원받게 하려는 사람이 있다.
이웃집 김집사.
아이엄마의 찢어지는 아픔은 뒤로하고
하나님의 역사와 섭리와 은혜와 사랑에 입이 닳던 김집사.
물론 그녀의 전도 자체를 나무라는 것은 아니다.
다만 지나치게 성급하지 않았나 싶다. 자식을 잃었다.
본인이 아니면 상상할 수도 없는 고통이다.
상처가 치유되기 위해서는 시간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세월 앞에 장사 없으니 언젠가는 아이에 대한 아픔도
희미해질 때가 올 것이며 아마 그때 쯤에는
살인범에 대한 용서도 생길 수 있지 않을까.
교회 생활을 한 지 몇 달이 지나자
김집사는 아이 엄마에게 사형수가 된 그 유괴범을
용서할 것을 종용한다.
7월에 아이의 사체가 발견되고 바로 범인이 잡힌 후,
다섯 달도 지나지 않아 살인범을 용서하라니
이것이 사람으로서 가능한 일인가.
그를 용서하는 것이 죽은 아이를 구원하는 길이라는
김집사의 말에 결국 교도소를 찾는다.
그런데 그 곳에서 아이엄마는 이미 절대자에게
죄 사함을 받고 성인같은 모습으로 하나님 품의
어린 양이 되어 있는그를 만나게 된다.
그 후 그녀는 더 깊은 수렁에 빠지게 되고 절규한다.
그래요. 내가 그 사람을 용서할 수 없었던 것은
그것이 싫어서보다는 이미 내가 그러고 싶어도
그럴 수 없게 된 때문이었어요....하지만
나보다 누가 먼저 용서합니까.
내가 그를 용서하지 않았는데
어느 누가 나 먼저 그를 용서하느냔 말이에요.
그의 죄가 나밖에 누구에게서 먼저 용서될 수가 있어요?
그를 용서할 기회마저 빼앗기고 만 거란 말이에요.
내가 어떻게 그를 다시 용서합니까.
결국 그녀가 선택한 것은 스스로 목숨을 끊는 일이었다.
김집사에게 묻고 싶다.
易地思之 입장 바꾸어 똑같은 일을 당하게 된다면
아이 죽음과 동시에 그 살인범을 용서할 수 있을지.
그런 사람이 몇 명이나 될지.
*****
어렵사리 면회 온 희생자의 어머니에게
유괴살인범은 말간 표정으로 묻는다.
“저는 주님의 도움으로 이미 구원받고
마음의 평화를 찾았는데,
당신은 왜 그리 고통스러워하십니까?”
한술 더 떠 그녀가 남을 미워하지 않고
용서하는 마음을 갖도록 기도해주겠다는
살인범의 ‘강 같은 평화’ 앞에서 여자는
무너져 절규하고 만다.
ㅡ죄사함은 이런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평생 죄책감 가운데 짓눌려 살 수 없고
죄사함을 받긴 해야 하지만 말이다.
기독교의 죄사함을 곡해하면
죄를 더 짓게 될 수 있다.
죄를 실컷 짓고는 하나님께로부터
용서만 받아버리면 이로써 모든 것이
결되고 끝난 것처럼 되어 버리기 때문이다.ㅡ
ㅡ살인자는 죽을 때까지 그녀에게 진심으로
미안한 마음을 갖고 속죄하는 심정으로
살아야 옳았다. 이것이 신앙의 자세다.
성경에서 바울은 회심하여 분명 하나님께로부터
죄사함을 받았음에도 그 이전의 죄에 대해서
괴로워했으며 자신을 ‘죄인 중의 괴수’라고 했다.ㅡ
우리 곁의 현실도 어처구니없기는 마찬가지다.
학교폭력을 견디다 못해 투신한 아들의 시신을
막 수습하고 돌아선 피해자의 어미에게
가해 학생들의 부모가 찾아와 통사정한다.
‘기왕 그렇게 된 당신 아이의 죽음’은 안타깝지만,
‘앞날이 창창한 우리 자식들 삶’까지
망치지는 말자고.
易地思之로 생각해 보자.
반성과 속죄의 의미를 당최 알지 못하는
일본 위정자의 망언이 터질 때마다
위안부 할머니의 오래된 상처에는
더 깊숙한 대못이 박히고,
유명 연예인을 희생 제물로 삼은 악플러는
‘설마 자살까지 할 줄은 몰랐다’며
선처를 호소한다.
ㅡSt. Augustine은 거듭난 후에 ‘고백록’에서
유아 때의 죄도 고백하지 않았는가.
신앙은 사람으로 하여금 죄사함 받았다고
하여 양심을 마비시키는 것이 아니라
그 반대로 더욱 양심을 민감하게 만들고
죄인됨을 깨닫게 한다.ㅡ
ㅡ “인간에게 과연 용서할 수 있는 권한이 있는가,
누가 누구를 용서할 수 있단 말인가,
과연 용서는 신의 영역인가.!
인간의 영역인가!
그러나 가해자 측면에서는 피해를 입은
사람에게도 용서를 구해야 하는 것이 아닌가,
피해자가 아직 용서하지 않았는데
가해자는 하나님으로부터 용서받았다고 한다면
그것이 과연 진실한 것이 될 수 있는가,
주기도문에서는 왜 상대방에 대한 인간적 용서를
하나님으로부터 용서의 전제 조건처럼
말하고 있는 것일까,
그리고 주인공처럼 신앙을 가졌다고 하지만
상대방을 잘 용서하지 못하는 것은
어떻게 보아야 하는가,
자신의 신앙과 타인의 존엄성과의
상관 관계는 어떤 것인가?” 하는
매우 종교적이고도 철학적이며,
현실적인 문제 등을 두루 생각하게 만들어 준다.
어쩌다가 이청준의 단편선을 읽다보니
별생각이 다 들어 영화 "밀양"을 Netflix에서 보았다.
주제넘게 적어 보았습니다. 죄송합니다.
불비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