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슬비가 내린다. 수도권은 비 예보가 있었지만 충남 지역은 구름이 많이 끼는 날이 예상되었고 오늘 새벽까지도 구름끼는 정도였는데 어느 순간 비 예보로 바뀌면서 비가 내린다. 봄 날씨는 변덕이 심해서 예보 자체가 어렵다고 하지만 이렇게 몇 시간만에 변하니 봄의 심술에 놀랄 뿐이다. 우산을 챙기기는 했지만 그것은 귀가할 때 수도권에 비가 내린다는 예보가 있어서 그때를 위해 가져온 것인데 오히려 전화위복이 된 것인지 모르겠다. 삼길포항의 아라메길관광안내소 앞에서 하차한다. 작은 우산을 펴서 비를 막는다.
QR 코드를 찍고 제방으로 다가간다. 대호방조제는 멀리 도비도에서 우측으로 뻗어가다 삼길포항으로 꺾어 나가고 있다. 저 긴 방조제를 한 걸음 한 걸음 걸어서 이곳까지 왔다니 발품의 노고가 고맙다. 이슬비에 가려 다소 흐릿하게 다가오는 삼길포항의 붉은 등대는 아름답고 우아한 모습이 변함없으니 방파제 끝에 홀로 서 있어도 많은 사람들에게 편안함을 주고 있다. 관광안내소 옆의 산자락 길을 따라 펜션들이 서 있는 길을 따르지만 금방 우측의 임도로 들어간다.
군부대 경고 안내판을 스치면서 보고 그 옆으로 길가에 세워진 표지석을 살펴본다. 이 임도는 1996년도에 조성되었다. 지금은 포장된 상태라서 덕분에 삼길산을 편하게 오른다. 임도 좌우에는 큰 나무들이 즐비하다. 비는 부슬부슬 내리지만 이슬비와 싱싱한 신록의 조합은 신선한 향기를 전해주어 마음을 상큼하게 만들어 주고 있다. 겨울에 나뭇가지에 눈꽃이 피어 있을 때와 비슷하다. 햇빛 가림막이 있는 쉼터가 나온다. 폭이 넓은 도로는 공터를 활용하여 차량이 주차할수 있도록 배려를 했다.
이곳은 삼길산전망대. 일행들이 쉬고 있다. 미세 먼지가 그나마 좋은 편이라서 비는 내리지만 바다 주변은 그런대로 자신의 형태를 유지하고 있다. 맑은 날에 비할수는 없지만 그래도 비 내리는 것 치고는 조망이 우수한 편이다. 지난 코스에서 지나온 당진발전소는 너무 멀어서 도비도항 너머로 보이지 않는 듯 하지만 눈을 치켜뜨고 유심히 바라보면 대호방조제와 함께 아주 희미한 모습을 보여준다. 아울러 도비도항에서 보았던 섬들도 삼길포항을 사이에 두고 모여 있다. 대,소조도와 우무도 그리고 난지도가 흐릿한 공간을 사이에 두고 서로 마주보고 있고 그 옆으로 좀 떨어진 대산항 앞에는 비경도도 잘 있다. 난지도 섬자락 끝 뒤쪽으로 작은 섬이 희미하게 보이는데 풍도인지는 확실하지 않다. 날이 제법 화창했으면 서해안의 다도해 풍경을 약간은 느꼈을 것인데 아쉽게 되었다.
삼길포를 알리는 조형물이 보인다. 아치교를 연상케하는 구조물 위에 삼길포를 영문으로 쓴 글자를 세웠고 그 뒤로는 안전을 위한 난간이 설치되어 있다. 이 곳에서 바다를 배경으로 인증샷을 날린다. 그런데 난간 맨 위에 써 있는 어느 문구에 시선을 끈다. 내 마음을 바다줄래? 여기서 찍은 사진을 사랑하는 사람에게 보내면 자신의 마음을 알아줄 지도 모르겠다.
비오는 날은 사진찍기가 불편하다. 우의를 써도 비슷하다. 바람이 약하게 불고 폭우가 아닌 이상 우산이 편하지만 사진을 찍을 때는 빗방울이 카메라 렌즈에 부딪히지 않게 하기 위해 바람과 우산을 함께 신경써야 하기 때문에 손동작이 불편해진다. 오늘은 우산 쓰고 걷기에는 그나마 적당하다. 바닷가인데도 바람의 세기가 작은 편이라서 우산을 어깨에 걸고 두 손으로 핸폰을 잡고 사진을 적당히 찍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매번 편한 것은 아니지만 이 정도는 감수해야 할 몫이다. 임도 길은 비포장길이다. 잘게 부순 자갈들을 깔아 놓았다. 길을 돌아가자니 좌측으로 삼길산전망대 안내판이 계단 옆에 세워져 있다. 정상가는 길로 생각하여 올라가본다. 산이 낮아서 정상이 금방 나올 것으로 예상했는데 부지런히 걸어도 5분은 지나야 얼굴을 보여 준다. 봉수대가 보이고 안내판은 삼길산 봉수 전망대로 알려준다. 정상(166m)은 나무데크가 설치되어 있고 네 곳에 전망처를 만들었고 중앙에 봉수대를 세웠다.
조금 전에 보았던 전망대와 비슷하게 조망되지만 정상에 있다보니 다른 것이 눈에 띈다. 대산항의 접안시설과 컨테이너 크레인이 일부 보이고 그 옆으로 대산산단 공장의 건물과 굴뚝이 높이 솟아 있다. 도비도항에서 연결된 대호방조제가 기억자 형태로 삼길포항까지 뻗어 있고 배수갑문 시설까지 보이니 지금은 그저 화창한 하늘이 마냥 그리운 날이다. 서둘러 내려가다 보니 뭔가 이상하다. 올라 올 때와 다른 모습이다. 다시 원위치 해보니 나무데크의 계단이 비슷하여 내려가는 위치가 바뀌었다. 몇 분의 알바를 보내고 다시 삼길산의 임도를 걷는다. 당연한 말이지만 앞서가는 일행들은 전혀 보이지 않고 오고가는 사람들도 없다. 비가 오는 날이라서 서해랑길을 걷는 사람들도 두문불출인 모양이다.
유유자적하는 마음으로 걷는다. 임도 옆의 나무들은 나무가지를 서로 뻗어 넓은 터널을 만들어 놓아서 그 아래를 지나며 싱그러운 연녹색의 향기를 흠뻑 마신다. 속이 깨끗한 공기로 채워지니 마음이 절로 가벼워진다. 나뭇가지 사이로 살짝 트인 공간안으로 대산산업단지의 공장 등을 보여준다. 삼길산의 임도는 이렇게 전망이 없는 곳이다. 바위가 별로 없는 흙산이라서 나무들이 빽빽히 들어서 있으니 조망을 즐기기는 어려운 구조다. 이슬비가 잠깐 소강상태를 보이지만 비는 멈춤을 모른채 계속 내린다. 일기에보를 확인한다. 종일 비가 내린다는 화면을 보여준다.
등산화 콧등에 이미 빗물에 흠뻑 젓어 있지만 안쪽으로 빗물이 들어오지는 않고 있다. 방수 상태가 아직은 유효한가 보다. 이렇게 임도는 끝없이 이어지고 있으나 때가 되니 차량들이 지나가는 소리가 들려온다. 화곡어린이집을 지날 즈음에 길가 옆으로 금계국 꽃이 한창이다. 빗물을 머금고 있어도 화려한 자태는 변함이 없고 연록색의 풀들 사이에 군락을 이루며 핀 꽃들은 약한 바람에 흔들리며 노랑 잔물결을 보여준다. 그 옆으로 자신의 이쁜 모습도 알아 달라며 연분홍의 수레국화도 아우성이다. 언뜻보면 패랭이꽃과 유사하게 보인다.
도로를 만난다. 대산항에서 넘어오는 왕복 4차선 도로다. 인도와 도로는 물기가 가득하다. 틈틈히 대형 화물차나 탱크로리가 지나갈 때는 물보라가 일어나며 잔물방울들이 인도까지 뿌려진다. 우산이 뒤집어질까 우산대를 꼭 잡으며 카메라에 물 묻을까 조심한다. 서해랑길 주최측이 설치한 이정표에는 오늘의 종착지인 대산버스터미널이 8.2Km 남았음을 알려준다. 이번 트레킹 코스의 거리가 12.2Km 이니 삼길산을 넘어 오는데 4Km를 걸은 것이다. 아스콘이 깔린 인도 옆 공간에도 금계국이 줄지어 피어서 눈을 호강시켜 주고 있다.
야산을 바라보니 구름인지 안개가 산 중턱에 머물고 있어서 정상은 보이지 않는다. 산자락 아래 인도와 만나는 곳은 흙으로 작은 둑을 쌓아 격리하였는데 그 경사면에 금계국이 활짝피어서 끄무레한 거리를 우산쓰고 걷는 이방인의 침울한 마음을 달래준다. 반곡교차로가 보일 즈음 둑 경사면에는 이번에는 양귀비가 홍조를 띄고 반긴다. 비가 내리고 있는 상황이지만 다양한 꽃들을 만나다보니 5월의 아름답고 화려한 계절의 여왕 느낌이 길거리에서도 다가온다.
교차로에 닿기 전에 길은 좌측으로 돌아 나간다. 여기도 금계국이 길거리에 자신들의 세상을 만들어 놓았다. 세상이 밝아지는 기분이다. 다시 38번 국도를 만나 굴다리를 통과한다. 38번 국도는 이번을 끝으로 더 이상 만나지 않는다. 짝수 번호의 국도는 동과 서를 이어주기 때문에 남진을 하는 서해랑길과는 앞으로 인연이 닿지 않는다. 평택에 있는 메인스트리트 카페 앞에서 처음 조우한 이후 아산시, 당진시 그리고 서산시를 돌고돌아 이곳에서 몇 방울의 눈물을 흘리며 작별을 고한다. 예전에 사무실 앞으로 38번 국도가 지나가고 있었고 자주 이용했던 도로라서 이별의 순간에 발길이 자꾸 뒤돌아보게 만든다.
진분홍의 장미꽃이 담장을 가득 채운 어느 사무실을 돌면 넓은 마당이 있는 화곡1리 마을회관이 보인다. 비막이 지붕이 있는 계단에서 일행들이 쉬고 있다. 이번에도 조민행/성판득 선배님이 소주 한 잔과 안주로서 쑥떡을 주신다. 잠시나마 담소를 나눈다. 마을 건너 작은 야산 숲 위로 고풍스런 궁전같은 건물 윗 부분이 살짝 보인다. 무엇일까? 나중에 지도를 살펴보니 서산수 골프앤리조트의 클럽하우스 건물이다. 아침에 서해의 일출을 볼 수 있는 곳이고 몇 년전에 남녀 프로골퍼들이 참여한 SBS의 맞수한판이 촬영된 곳이기도 하다.
비가 내리는 마을회관 앞의 도로를 따라 우산 쓰고 다시 걷는다. 길 주변은 모내기를 끝낸 논이 많이 보이지만 아직도 물만 가두운 곳도 있다. 5월이 끝나가는 시간인데 모내기를 마치지 않은 곳은 벼 수확 시기가 늦은 조생종을 심을 예정일지도 모르는 일이다. 그래도 모판은 논두렁에 있으니 곧 마무리될 것이다. 화곡저수지와 연결된 하천의 작은 다리를 건너며 바라보니 수초가 어느새 무성하게 자랐다. 모내기가 끝난 논을 바라본다. 이앙기로 심은 잘 생긴 벼들이 물 속에 자리잡고 줄지어 서 있는 것이 열병식을 보는 듯하다.
마을 길을 따라 언덕을 오른다. 어느 집 앞 텃밭에서 크게 자란 풀들을 듬성듬성 뽑아 모아두고 있는 어르신이 있어서 무엇인지 물어본다. 명아주라고 한다. 농촌 경험이 없어서 처음보는 듯 하지만 데치고 무쳐서 나물반찬을 할 수 있다고 하니 예전에 먹어본 적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특히 명아주 줄기로 만든 지팡이는 가볍고 단단하여 청려장으로 부른다. 매년 10월 2일 노인의 날에 100세 되는 어르신에게 청려장을 수여하고 있다. 주변 공터 밭에도 여러 식물들이 보이지만 아는 것이 없어서 바라보기만 한다.
전봇대들이 촘촘히 세워진 언덕길을 넘는다. 경사길을 내려가면 충남 문화재로 등록된 김적 및 그의 아들인 김홍욱의 묘지가 있다. 길가 우측에는 신도비가 세워져 있고 경사진 곳에 묘역이 있다. 그 너머 산불 흔적이 있는 민둥산이 옥녀봉이다. 비각을 세워 신도비를 보호하고 있는데 묘지의 주인은 적어도 종2품 이상 고위 관직에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세부적인 자료들은 많이 있으므로 여기서는 생략한다. 신도비 맞은 편에는 김홍욱의 시비가 세워져 있다. 제목은 청풍 한벽루. 2층 누각인 한벽루는 충주댐의 완공으로 충주호가 조성될 때 수몰지역에 있어서 지금은 청풍문화재단지로 이전되었다. 시비의 내용을 아래와 같이 일부 인용한다.
높고 산뜻한 누각은 푸른 물굽이 가로질렀고
강 빛은 푸른 병풍 사이에서 일렁이네
난간 밑 맑은 물에는 물고기 뛰어 놀고
처마 끝 높은 나무에는 학이 돌아드네
꼿꼿이 서 있는 소나무 두 그루를 끼고 다시 농로를 따라 걷는다. 이 지역의 논들은 대부분 모내기가 진행되지 않았고 논두렁에는 연녹색의 모판이 놓여져 있다. 물이 가득 담긴 논들 너머 멀리에는 조성된 수로가 고속철도 교량같이 보인다. 산자락 사이로 골프연습장과 아파트 단지 고층이 보인다. 대산읍내가 조금씩 가까워지고 있다. 그렇게 길은 논과 밭을 오고가며 마을 사이를 지나면서 조금 전에 보았던 아파트 단지 담장 옆으로 걷는다. 아직 읍내는 좀 더 들어가야 하는데 대형 아파트 단지가 나타난 것이다. 대산산업단지에 있는 롯데케미칼의 대산공장 사택 아파트다. 대산공장에서 승용차로 15분 거리에 있으니 출퇴근 조건은 우수한 편이고 바로 앞에 골프연습장까지 갖추고 있으니 다른 고민도 있겠지만 여가 측면에서는 이렇게 좋을 수 없다.
물안지 저수지에서 흘러 나오는 하천을 건너 좌측으로 약간 이동한 후 농로따라 우측으로 진행한다. 다시 넓은 농경지를 지난다. 여기의 대부분 논들은 푸릇푸릇하여 보는 눈과 가슴에 생기를 돋게 만든다. 후미로 가는 일행 두 명을 만나 동행한다. 건넌 편의 논길을 따라 가는 다른 일행도 몇분이 있다. 길은 직선으로 길게 뻗어 있다. 여전히 이슬비는 멈출줄 모르지만 빗줄기는 가늘어지고 있다. 어느새 마을길을 다시 따른다. 좌측 산자락 아래 낮은 언덕배기의 아담한 곳에 연한 벽돌색깔의 대산큰빛성결교회가 마을을 내려다보고 있고 그 전경은 모내기를 끝낸 논바닥물에 은은히 번져 나가면서 농촌의 풍경화로 다가온다. 건너편에서 오신 일행분들과 합류하는데 장 대장과 성판득 선배님을 조우한다.
평화롭고 한적한 마을길을 걸으며 돌아가는 구간에 이정표는 대산버스터미널이 1.7Km 남았음을 알려준다. 이런 숫자를 보면 왠지 몸이 가벼워지고 기분이 좋아진다. 얼마 남지 않았다. 지금 걷는 이 길이 경작로인가 보다. 논가에 있는 현수막엔 이런 글이 써 있다. 농번기 경작로 출입금지. 농번기 출퇴근 차량은 우회하라고 한다. 주말이고 출퇴근 시간대가 아니라서 그런지는 몰라도 지난 코스부터 농로길을 걸을 때 혼잡한 구간은 만나지 못했는데 다른 연유가 있는가 보다. 대산5리경로당을 지나며 차량들이 속도를 올리며 달리는 29번 국도와 함께 한다. 한동안 도로 옆의 작은 길을 걷는다. 하늘은 찌뿌둥하지만 비는 잠시 소강상태에 들었다. 국도따라 대산삼호아파트를 지나고 고층의 한성필하우스아파트가 보일 때 서산수협 앞에서 우측으로 고개를 돌리면 대산버스터미널 옆에서 서해랑길79코스 안내판이 반겨준다.
5월은 계절의 여왕인데 올 봄은 유난히 비가 잦아 시골길의 멋드러진 모습을 제대로 즐기지 못했다. 오늘도 충남 서산지역은 비 예보가 없는 구름이 많이 끼는 정도 였으나 결국엔 하늘이 꼬장을 부려서 아침부터 종일 이슬비와 함께 걸었다. 늘 좋은 날을 만날 수는 없지만 비가 오더라도 오늘같이 시야가 깨끗한 날과 함께 한다는 것은 거인 서해랑팀에게 행운이 깃든 것으로 생각한다. 좋은 사람들과 함께하니 하늘이 어찌 무심하리오. 그런 마음이 하늘에 닿아 부근에 있는 황금산의 코끼리바위를 방문할 때는 구름낀 하늘은 변화 없었지만 비는 내리지 않아서 서산 내 서해안 끝자락에 감추어 두었던 비경을 감상하는데 어려움이 없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