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된 물음 하나(나에게 묻는다 -수정본)

[송용식]

오래된 물음 하나

송 용 식

  휴학계를 제출했다. 1년 남은 대학 생활이었지만 누구도 내 등록금을 신경 써줄 처지가 못 되었다. 막막하고 외로운 심정을 추스르기 힘들었다. 익숙한 얼굴들과 겉도는 내가 싫어 외할머니댁 가는 버스를 탔다. 당분간 거기서 지낼 요량이었다.

  어느 날, 가깝게 지내는 대학 동아리 형이 불쑥 찾아왔다.

  “너 이렇게 대책 없이 시간만 때울 거면 군대를 다녀오면 어떻겠냐. 그 사이 집안 형편이 나아질 줄도 모르고”하는 것이었다. 어차피 다녀와야 할 군대, 형의 말에 솔깃해졌다. 막차를 타고 떠나는 형을 배웅하고 터벅거리며 돌아오는 시골길. 말없이 동행하던 초승달이 묻는 듯했다. 이제 어떡할 거냐고. 형의 제안은 아무리 생각해도 신의 한 수였다.

  다음 날 광주에 있는 병무청을 찾았다. 건축과 3학년을 마쳤는데 가장 빠르게 입대할 방법이 없느냐고 물었다. 기술행정병은 매주 토요일 훈련소로 출발한다고 했다.

  “저 이번 주 토요일에 군대 가요” 했더니 어머님은 깊은 한숨을 내쉬며 말없이 돌아앉으셨다. 광주역에서 선임하사가 인솔하는 열세 명의 지원병과 논산행 입영 열차를 탔다. 짙은 밤안개를 가르는 묵직한 기적소리가 외로움과 두려움에 싸인 나를 더욱 강하게 조여 왔다. 친구들과 그 흔한 이별주도 없이 번갯불에 콩 볶아 먹듯 일주일 만에 벌어진 일이었다. 돌아보면 내 삶에서 젊은 날의 시간 낭비를 줄여준 가장 현명한 선택이 아니었나 싶다.

  입대 후 일 년쯤 지났을까. 그동안 수자원공사에 입사하여 소양댐에서 근무하던 형이 면회를 왔다. 내 휴가 때는 제목조차 흐릿한 시집 책갈피에 오천원권 한 장과 편지를 넣어 집으로 보내왔다. 우리 집 형편을 잘 알고 있는 형의 속 깊은 배려였다. 울컥 소리 내 울 뻔했다.

  군대 생활이 익숙해질 무렵 가끔 부대를 출입하는 사단 사진병이 물었다.

  “어이, 송 상병. 그동안 시 써 놓은 것 얼마나 돼?” 몇 차례 전우신문에 실린 글을 보고 묻는 말 같았다.

  “한 오십여 편 될까. 근데 왜?” 정훈참모가 시화전을 할 수 있는지 알아보라 했단다. 시화는 종이에 시를 쓰고 그림을 그려야 하는데 그건 내가 할 수 없다고 했더니 휴가를 보내준다고 했다. 휴가 가서 시화를 만들어 왔더니 대대장이 공병 예하 중대에 액자를 만들도록 지시했다.

  사루비아 꽃이 사단 연병장 주변을 붉게 물들인 초여름날, 전시장인 장교식당에 걸린 시화에서도 꽃향기가 배어 나오는 것 같았다. 사단장과 참모들이 찬찬히 돌아보더니 한 점씩 골랐다. 평생 경험하기 힘든 추억 하나를 얻었다.

  전시회가 끝나자 표창장과 일주일간의 포상휴가가 내려왔다. 형에게 선물하려 따로 챙겨둔 액자를 들고 경춘국도를 달리는 버스를 탔다. 나도 강바람도 신이 났다.

  춘천 시외버스터미널에 내리자 헌병이 나를 불러 세웠다. 괜스레 겁이 덜컥 났다. 손에 들고 있는 물건이 무엇이냐고 따지듯 물었다. 순진하게 있는 그대로 설명했다. 군용품으로 제작한 것이니 외부로 반출할 수 없다고 했다. 버티는 기미를 보이자 헌병은 TMO(이동식헌병박스차) 안에 있던 선임하사에게 나를 인계해 버렸다. 중사 계급장을 단 까무잡잡하면서 살짝 얽은 얼굴의 선임하사에게 다시 자초지종을 설명했다. 그는 포장지를 찢어보더니 군수품이기 때문에 압수한다고 같은 말을 했다. 순간 번뜩이는 그의 눈빛을 보았다. 견물생심見物生心이라 했던가.헌병의 논리는 명분에 불과하고 액자를 보고 욕심이 생겨 뺏으려 한다는 확신이 들었다. 남이 가진 것을 탐할 때는 온갖 명분과 자기 합리화가 필요한가 보다. 나를 구석 의자에 한 시간 넘게 앉혀 두었다. 이 일로 일어날 여러 상황을 가늠해보며 누가 이기나 오기가 발동했다. 이 시화를 꼭 형에게 선물하고 싶은 내 절실한 마음을 알 길이 없는 선임하사는 군홧발로 내 정강이를 차면서 ‘지독한 놈이네’하면서 그만 보내주었다. 내가 이겼다는 쾌감이 밀려왔다. 채인 정강이가 몹시 아프긴 하였지만.

  포장지가 찢어진 액자를 주섬주섬 싸 들고 소양댐 사택에 도착했다. 사연을 말하자 형은 어처구니없어하면서도 얼굴 가득 밝은 표정을 지었다. 대안없이 시간을 허비하던 나에게 군 문제 해결의 지혜를 주었던 형. 신입사원 첫 휴가 때 면회를 와 주고 내 휴가 때는 용돈까지 챙겨 주었던 형. 그 고마운 형에게 하마터면 빼앗길 뻔했던 ‘자화상’이라는 시화를 선물하게 되어 마음의 짐을 조금은 덜어낼 수 있었다.

  그 후 살아오면서 많은 일과 다양한 인연이 있었다. 나는 그 인연들에게 어떻게 기억되어 있는지 궁금하다. 세상에 널리 알려진 시 한 편.

  ‘연탄재 함부로 발로 차지 마라 / 넌 누구에게 한 번이라도 뜨거운 사람이었느냐‘

  이 시는 참 부담스럽다. ‘넌 누구에게 한 번이라도 뜨거운 사람이었느냐’고 대놓고 묻는 듯해서. 세월이 참 많이 흘렀지만, 기억 속의 형은 변함없이 내게 뜨거운 사람이다. 그 기억을 꺼낼 때마다 나도 모르게 나 자신에게 던지는 오래된 물음 하나. “나는 누구에게 뜨거운 사람이었던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