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일 강리 역대 국도 지도[混一疆理歷代國都之圖]>-혼리 강리 역대 국도 지도.
혼리 강리 역대 국도 지도[混一疆理歷代國都之圖]>>[混夷疆理歷代國都之圖]
혼리 강리 역대 국도 지도는 1402년 태종2년 좌정승 김사형, 우정승 이무가 발의하고
의정부 검상 이회가 실무를 맡아 제작한 지도이다.
원본은 전하지 않으며 일본 용곡[龍谷]대학 [류코쿠대학] 도서관에 소장되어 있으며,
이를 다시 필사한 모사본이 규장각에 소장되어 있다.
현존하는 동양 최고의 지도로 당대 동서양을 막론하고 아프리카 지도까지 그려져 있는 최고의 지도이다.
조선 부분이 상대적으로 크게 그려져 있고 조선을 중심으로 그려진 지도이다.
혼일 강리 역대 국도 지도[混一疆理歷代國都之圖]에서 ㅡ[한일]은 壹[한일]이 아니다.
혼리 강리 역대 국도 지도[混夷疆理歷代國都之圖]이며 夷[오랑캐 이/리]라는 뜻이다.
ㅡ[한일]의 약자 壹[한일]로 쓴 것으로 보이지만, 夷[오랑캐 이/리]자를 흘려 쓴 것이다.^^
[混夷疆理歷代國都之圖]에서 混[섞을혼, 오랑캐곤]은 夷[오랑캐 이/리]족이
말그대로 섞여 사는 疆[지경 강, 굳은 땅 강] 지역인 신강성[新彊省]지방을 중심으로
리[理=利族]지방인 신강성, 감숙성 이리강의 이리하[기련산에서 신강성 적화, 북인도의 항하로 흐르며
카자흐스탄의 발하슈 호로 흘러들어 가는 강. 발해라는 말에서 발하슈 호가 나오는 것임]까지 살았던
사람들이 그린 지도이다.
混(섞을혼, 오랑캐곤)을 오랑캐곤으로 읽지 않는 이유는 그다음에 夷(오랑캐리/이)라는 말이
다시 나오기 때문에 굳이 또다시 오랑캐 곤으로 읽을 필요가 없으므로 섞을 혼으로 읽는 이유이다.
기련산(지련산) 아래로 흐르는 강을 이리하(伊犁河)라고 부르기 이전엔
이리하(利犁河/이려하/리려하)라고 불리워졌고, 그 이전엔 이리하(理犁河/리려하)라고 불렀다.
키르키즈스탄의 이식쿨 호수[이식홀 호수]에 있는 촐본-아타[금성의아버지]는 "졸본왔다"라는 말이다.
대월지가 감숙성 돈황지구를 장악한 북흉노에 밀려나자 우즈베키스탄 사마르칸트로 들어가 점령할 때
생겨나는 말이다.
우즈베키스탄의 사마르칸트[셀레우코스 왕조]를 점령하자,
대월지가 귀상족, 휴밀족>휴저족/휴도족, 돈밀족, 도밀족, 힐돈족[돈황지구 족], 쌍미족 등으로 분화하고
내전이 발발하여 귀상족이 통일하고 다시 동진하면서 실크로드 중간 길에서 세금을 가로채
막대한 부를 형성하며 키르키즈로 들어간 월지가 박트리아 왕조를 이어간다.
북인도 카슈미르로 들어간 월지가 귀상왕조를 세웠다가 중인도로 남하하여 쿠샨왕조를 이어 간다.
혈통이 희석되는 것을 막기 위해 다시 초원의 길 루트를 개척하며 동진하여 서장성 서부 아리지구에 머물던
소월지를 합류시키고 신강성 서북부에 머물렀던 소월지를 합류시킨 후 청해성 서부로 남하하여
귀상족과 합류한 대월지가 사천성 성도[청두],보주로 들어와 신나라의 왕망, 김당과
비단길 중계 무역을 독점하자,
여기에 고무된 왕망, 김당이 감숙성 돈황지구의 북흉노[두만선우, 모돈선우 ,노상선우계]를
북부여[감숙성 평양시 고원, 고구원족/고려족(고선비)]와 동맹을 맺고 타도하려다가
산서성 태원시를 주름잡던 유수장군[동한/후한, 광무제]이 북흉노 편을 들게 되면서
하남성 낙양의 신나라가 멸망당하여 반도로 탈출한다.
전한 [서한] 선제의 황후였던 허황옥 일파는 왕망, 김당에 협력하였다가 사천성 보주로 피신한 후
광무제 유수의 추격으로 1년 후 포위망이 좁혀오자 강소성 마산으로 대피하였다 반도 마산포로
피신해 들어오게 된다.
한나라의 오수전이 대량 발견됨으로써 증명된 사실이다.
산서성 태원시에 있던 북한산[北漢山]은 훗날 동한 망 후 서울로 들어와 북한산[北漢山]으로 이어진다.
비단길 실크로드무역과 동유럽 초원의 길 반달무역을 펼치면서 양대 무역로가 갈라지는
우즈베키스탄의 사마르칸트 물류 분기점에서, 동유럽 [초원의길 반달무역]으로 들어가는 거점인
크림반도와 아라비아로 들어가는 초승달 [비단길]무역을 하던 사람들에 의해서 알려지게 되면서
잊혀지지 않고 있다가 그려진 지도이다.
비단길 무역이 쇠퇴하고 초원의 길 무역이 활성화되자 징기즈칸[성길사한] 때 타타르족을 내세워
크림반도 [크림한국/그림한국]를 점령하면서 동서양이 만나 중간 거래하는 물류거점으로 활용되면서
훗날 오스만 터키 제국으로 급성장하게 된다.
터키 콘스탄티노풀 [이스탄불]을 장악하고 있었던 비잔틴 제국은 서기[ad] 300년대 흥하게 된다.
600년대 초 이슬람 제국에 멸망당하면서 로마제국으로 옮겨 들어가게 되고 콘스탄티노풀은
이슬람계에 넘어간다.
페르시아인들은 신강성, 감숙성 돈황지구에서 정식 거래하면 손해를 보았기 때문에
내몽고 자치구 시라선맹 [사라선맹/아라선맹] 지구에서 번외 거래로 손해 본 비용을 충당하며
사라선맹 지구에 머물며 중원 문물을 사들여 아라비아로 가져가 되팔면서 국제정세를 보는 눈이 뛰어났고
이것을 기회로 힛타이트 문명인을 따라 기원전 사라센 제국을 세우며, 기원후 400년대에 페르시아 제국을
건설하게 되는 것이다.
사라센이라는 말이 사라선맹 지구에 머물던 아라비아 상인들이 세력을 키운 곳이었기 때문에 나오는 말이다.
이라크 바빌론 문명은 페니키아인 [잉글랜드 앙골계>훗날 기원후 [ad] 330년대 아틸라 훈족의
동로마 제국 [이스탄불]과 서로마 제국 북부지방 침공으로 서로마 제국으로 게르만족과 함께 밀려 들어갔다가
게르만족의 권력 쟁탈전에 밀려 북아프리카를 거쳐 무어족을 따라 잉글랜드로 들어가
무어[모아]족과 융합하여 앵글족화 됨]이 멸망시키고 신 바빌론을 세워 비단길 무역이 단절된다.
청해성 청해호 원류 종족/ 해족과 감숙성 돈황지구, 내몽고 서부 사라선맹 지구인들이
아라비아 사라센인과 함께 거병하여 이라크 바빌론 문명을 무너뜨리고, BC 668년
신 바빌론 문명을 세운 페니키아 문명을 멸망시키고 힛타이트 문명을 세운 후, 아프리카로 진출하여
상이집트를 점령하자 본토인들이 하이집트로 달아나 이집트 문명이 남북으로 양분된다.
앙골지다(사투리: 옹골지다)란 말이 여기에서 나왔다.[앙골족이 적은 병력으로 일당백으로 싸우자 붙은 이름]
bc 550년 상이집트까지 진출했던
힛타이트 문명[후리인(구리인/구려인), 아무르인[아모르인/감숙성 흑하 압수인>
훗날 흑룡강성 흑룡강으로 몽고에 밀려남), 모압인(감숙성 흑하 압수지류인)]인에 의해
아프리카가 알려지게 된다.[bc 700년경 춘추시대부터 진출]
힛타이트 문명인이 상이집트에서 혈통이 희석되는 것을 막기 위해 동양으로 돌아가자,
사라센인들에게 바턴 터치하고 이들이 이집트를 점령하고 bc 525년 시리아 서북부 파르티아 지방에서
아케메네스 제국을 세우게 되며 bc 334년 알렉산더에게 멸망당한다.
그리스 마케도니아 알렉산더의 셀레우코스 왕조는 이렇게 태어나게 된다.
알렉산더의 점령으로 비단길 무역이 다시 단절되자, 대월지가 거병하여 셀레우코스 왕조를 무너뜨리고
비단길 무역을 다시 회복한다.
고려 말, 조선 초에 거란족에 이어 생여진 [건주여진], 숙여진 [란주여진]이 몽골을 식민지배했다가
징기즈칸의 손자인 뭉케 (징기즈칸의 4남인 툴루이의 장남),
쿠빌라이 [몽고 5대 황제이자 원나라 초대 황제 세조/툴루이의 차남] 등에게 대대적인 토벌을 받고
동만주 동북삼성[요녕성, 길림성, 흑룡강성] 등으로 밀려나게 되는데 반도로까지
거란족과 여진족이 피신해 들어온다.
거란황가 10여만도 피해 들어오고 숙여진족은 야인족화 되어 함경도 지방을 중심으로 살아갈 때
알려진 지도로 판단된다.
마지막으로 이성계, 최영 등의 고려말, 조선의 토벌로 연해주에서 쿠릴열도를 통해 홋가이도를 거쳐
일본 동경으로 들어간다.
숙여진은 고구려, 발해 망인계를 동경에서 동북지방으로 밀어내고 전국을 통일한 후
임진왜란, 정유재란을 일으켜 보복하게 되며, 숙여진족인 덕천가강 [도쿠가와 이에야스 ]때
직전신장 [오다 노부나가]과 교토 [경도] 에도막부 풍신수길 [도요토미 히데요시]을 누르고,
고구려 ,발해 망인계를 동북지방[후쿠시마 원전 터진 지방]으로 밀어내며 관원전투[세키 가하라 전투] 승리로
전국을 다시 재 통일한 후, 나라, 경도 [교토] 백제인을 동경으로 끌고가서 에에도(江江戶/강강호)시대를
개막하게 되며, 에에도막부 제1대 쇼군 [장군]이 된다.
흑룡강성으로 달아난 건주여진 [생여진]은 다시 요녕성으로 서진하여 누루하치 때
금나라 [완안 아골타/1115년]를 이어 요녕성 무순시(푸순시) 신빈에서 조명, 예허 연합군을 물리치고
1618년 후금을 건국한후 심양(선양)에서 청으로 개칭하며 1624년 권력을 장악한 홍타이지(청태종) 때
한윤을 앞세워 정묘호란 (1627)과 병자호란 (1636)을 일으키고 건주여진족 대부분을 이끌고 북경으로
들어가기 위해 조선인 60여만 명을 끌어가 심양에 여진족 대군이 대기하고 있는 것으로 위장하며
북경(베이징)을 점령하면서 본격적인 청나라를 이어간다.
모택동 [마오저둥]은 동북삼성[요녕성, 길림성, 흑룡강성]에서 거병하여 북조를 장악하며,
남조의 중화민국 총통 장개석[장제스]을 대만으로 몰아내고 중국을 통일한다.
[산시성 출신인 시진핑 (습근평)의 태자당파는 4억의 동북삼성을 기반으로 한다.].
서양인은 아프리카 사하라 사막 남쪽은 쓸모없는 죽음의 땅으로 인식하여
아프리카 지도를 그릴 수가 없었다.
그런데 혼리강리 역대 국도 지도는 아프리카를 자세히 그리고 있다.
금, 은, 청동, 유황 등을 캐서 비단길을 통해 중원에 내다팔기 위해 진출했던 것이 분명하다.
피라미드는 별의 좌표를 보고 천문 역활도 하면서 하늘 숭배 의식인 제천단 역활도 하여
무사 안녕을 빌었으며, 길을 잃지 않기 위해 봉화 역활도 했을 것으로 판단된다.
혼리 강리 지도에 아프리카 나일강의 발원지까지 진출하여 "달의 산"이라고 이름 지은 것을 보면
경제적 목적을 위해 진출했다는 것이 제대로 드러나는 대목이다.
"달의 산"이라는 이름은 당연히 최초 기원이 "아사달"에서 나오 것이 분명하고,
훗날 다양한 종족으로 분화하면서 달달족[達達族>타타르족]이 가장 늦게까지 사용하던 이름이었다.
[아프리카 지도 좌측 최 남단 네 개의 산과 나일강 발원지인 두 줄기의 강이 "달의 산"임]
유일하게 인도와 아프리카 지도까지 정확하게 그리고 있다는 점에서
비단길 무역과 초원의 길 무역을 통해 알게 되면서 물류가 생산되는 원석 채굴 지역까지
그려진 것을 보면 경제적, 상업적 목적을 위하여 진출하였고, 실크로드 상업무역 세력에 의해
알려진 기억을 토대로 완성된 지도였음을 알 수가 있다.
북방 지역에 강줄기 지도에 대해 자세히 그린 것을 보면 실크로드 상업 무역로를 토대로
그려진 지도라는 것을 다시 한번 증명해주고 있다.
[모압인 중 일부가 모아인으로 분화하고 서로마 제국 영토 안에서 무어인으로 분화했다가
북아프리카를 거쳐 잉글랜드로 뒤따라 들어간 앙골족과 융합하여 앵글족이 탄생하는 것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