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1장 부러지는 검(劍), 이어지는 검(劍)
다 쓰러져 가는 모옥(茅屋)이 서 있다. 축융곡 일대에 펼쳐진 진세는 모
옥을 중심으로 하여 구축된 것이다.
백무영은 겹겹의 진세를 파괴하며 모옥 가깝게 다가섰다.
그는 감(坎)과 곤(坤)의 위치로 접어들었는 바, 갑자기 그의 몸을 향해 거
미줄 같은 예기(銳氣)가 흘러들었다.
'살기다!'
백무영은 보이지 않는 곳에서 치솟아 오르는 강한 힘을 느꼈다.
그의 몸을 향해 조여 드는 진기는 백여덟 가닥이라는 것을 그는 예민한
감각으로 느꼈다.
'동시에 일백팔방(一百八方)을 휘감는 예기를 흘릴 수 있는 초식은 하나
뿐이다!'
백무영은 보이지 않는 곳에 숨어 있는 사람이 누구인지 쉽게 알 수 있었
다.
사실 백무영은 강호의 제반 무공에 달통해 있었다.
그는 흑도 백도의 무공 뿐 아니라, 유불속(儒佛俗)의 제반 절기, 심지어
변황의 상고절기마저 두루 익히고 있지 않던가?
이제까지의 그의 일생은 무공을 터득하는 데 대부분 쓰여졌다 하더라도
과언이 아니다.
'도(刀)다!'
백무영의 눈길은 짙은 안개 속으로 돌려졌다.
자욱한 안개 속, 형체는 없으되 삼라만상을 파멸시킬 강력한 힘이 분출되
고 있었다.
'무적백팔로도(無敵百八路刀)가 아닌, 어떠한 도초도 이러한 위력을 발휘
하지 못한다.'
백무영의 눈에서 찬 빛이 뿜어진다.
자욱하던 안개 속에서 천천히 사람의 형상이 뭉쳐지기 시작했다.
이제까지 은잠술로 몸을 감추고 있던 인물이 백무영의 망막에 모습을 나
타내는 것이다.
"노부가 숨은 곳을 알다니… 쿨룩쿨룩… 막내 철객이 당한 건 무리가 아
니야."
병색이 완연한 흑포노인이 천천히 걸어 나왔다.
노인의 가슴에는 녹이 슨 도가 안기어져 있었다.
도에는 검은 액체가 발리어져 있었다. 그것은 말라 버린 피였다.
노인은 안개 속에 은잠한 채 간간이 이 곳으로 파고든 사륵의 수하들을
무참히 도륙해 버린 것이다.
'흑야홍(黑夜紅), 오사부.'
백무영은 만감이 교차하는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과거 그는 도부(屠夫)였었다.
그는 매일 소를 잡고 돼지를 죽이며 말의 머리통을 쪼개어야만 했었다.
그의 살인감각은 그 시절에 이룩되었다 하더라도 과언이 아니다.
그는 흑야홍에게 생검(生劍)과 사검(死劍)을 터득하였기에, 그 후 절정무
사로 성장할 수 있었던 것이다.
"쿨룩쿨룩… 난 고수를 좋아하지. 하수들과 천 번 싸우느니, 고수와 한
번 싸우는 게 낫지."
흑야홍은 자주 기침 소리를 냈다.
그의 얼굴은 피골이 상접할 정도로 말랐다. 어찌나 말랐는지 뼈에 가죽을
바른 고루인형과 같았다.
그는 숨을 쉬기도 거북한 듯 여겨졌고, 이마 위에 진땀을 매달았다. 하지
만 타인을 압도하는 기세는 여전했다.
"자, 오래 끌 것 없다. 몇 초의 승부면 되겠지."
"싸우지 않겠소."
"녠녠… 겁나는가?"
"아니오."
"그럼……?"
"불공평한 승부이기에, 거절하겠소."
"불공평하다니? 뭐가 불공평하다는 거냐?"
"노인은 내공이 거의 다 상실된 나머지, 내공을 마지막으로 작렬시키는
미약을 복용했소."
"흐윽… 그, 그것을 어찌 알지?"
흑야홍의 입이 딱 벌어질 때, 백무영은 모옥을 향해 뚜벅뚜벅 다가섰다.
"저는 지금 꽤나 자제하는 중입니다. 제발 저의 살기를 폭발시키지 마십
시오. 전… 한 사람만 죽이는 것으로 이십 년의 한을 마무리짓고자 합니
다. 제발 제가 그러한 노력을 멈추게 밀어붙이지 마십시오."
그의 입가가 처연히 일그러질 때, 흑야홍은 그가 누구인지 알 수 있었다.
"이, 이 녀석… 무영이로구나."
흑야홍은 도를 내던지며 백무영 앞으로 다가섰다.
그는 백무영의 손을 꽈악 잡으며 얼굴을 눈물로 뒤덮었다.
"그러면 그렇지, 함백이 널 죽일 수 있으랴? 네놈이 건재하리라 여겼지."
"……."
백무영은 아무런 말을 할 수 없었다.
그는 흑야홍이 뭐라 말하든, 관여하지 않고 무정히 걸을 뿐이었다.
"우린 널 가르치는데 헌신했다. 네게 뭘 바라는 건 아니었지만, 네가 패
배한다 여기지 않았다. 녀석, 이렇게 살아오다니… 넌 역시 대곤륜의 아
들이다!"
흑야홍은 과거 백무영에게 진원진기를 모조리 전수해 준 이후, 병자가 되
었다.
그는 노구를 움직이지 못할 정도로 쇠약해졌으되 잠풍과 만박이 계획한
최후의 결정에 빠질 수 없기에, 광혼마백단(狂魂魔魄丹)이라는 미약을 복
용하여 마지막 한 숨의 진기를 북돋운 채 안개 속에 은잠했던 것이다.
"넌 우리 여섯 사람의 아들이야."
흑야홍은 백무영의 옷가슴에 눈물을 적셨다.
"허약해지셨군요?"
백무영은 눈물이 복받쳐 견딜 수 없을 지경이었다.
아무리 냉정한 마음을 유지하려 하더라도 허사였다.
여기 오기 전만 하더라도, 그는 여섯 사람의 수급을 잘라 버릴 작정을 한
바 있다.
그는 혈의육존이 위선자라 여기는 마음을 버리지 않았었다.
물론 그들이 위선자일지 모른다. 그러나 그들이 백무영을 친아들 이상으
로 사랑하고 있다는 것만은 부정하지 못할 일이었다.
아버지, 어머니와 더불어 산 기억은 없으되 육사부와 더불어 산 기억은
생생하다.
무수한 추억이 그의 가슴을 메어지게 하는 것이다.
"넌 역시 대단한 놈이야. 헛허, 옛날 널 위해 젖동냥을 하고 다닐 때부터
알았었지. 네놈은 보통 놈이 아니라는 것을……."
흑야홍의 몸은 갑자기 축 늘어졌다. 그는 긴장감을 유지하고 있었기에 이
제까지 굳강히 버텨 왔던 것이며, 긴장감이 풀어지자 몸이 축 늘어지고
마는 것이다.
백무영은 그의 몸을 안아 들었다.
과거 천하제일의 자객 소리를 들었던 흑야홍의 몸뚱이는 작은 짚단처럼
가벼웠다.
"다신 무공을 쓰지 못하시겠군요?"
"무공… 그건 중요하지 않아."
흑야홍은 그런 말을 남기며 스르르 의식을 잃었다.
백무영은 그의 몸을 안고 안개 속으로 접어들었다.
자욱한 안개 속, 한 사람이 머물러 있었다.
그는 바퀴 달린 의자에 앉아 있었다. 그는 필을 휘둘러서 한 폭의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백무영은 멀리서도 그가 만박(萬博)이라는 것을 알 수 있
었다.
'다른 사부들은 나에게 무공을 가르쳐 주었지만, 만박 사부는 내게 지혜
를 전수해 주었지. 강호에서 위기에 빠질 때마다 느낀 것은, 무공보다 중
요한 게 지혜라는 것이지.'
그는 담담한 묵향을 느꼈다.
'또 어머니의 그림을 그리시는군.'
백무영은 착잡한 표정을 지으며 이제까지 단 한 여인만 사랑했던 순수한
영혼의 소유자를 향해 다가갔다.
그가 차분히 걸음을 내디딜 때, 갑자기 만박이 입술을 떼었다.
"진세를 깨었군. 으음, 중원천하의 그 누구도 내가 포진한 진세를 깨지
못하리라 여겼었는데……."
만박은 고개를 힐끗 쳐들었다. 그의 머리카락은 새하얗게 세었으며, 얼굴
에는 주름살이 가득했다.
그러나 그의 눈빛은 전에 비해 보다 오연(傲然)해졌다고 할 수 있었다.
"훗후후… 드디어 기다리던 종말의 시각이 된 걸까?"
역시 만박이다. 그는 삶과 죽음을 조롱하고 있었다.
그는 다시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손끝이 가늘게 떨리는 것은 여전하다. 하지만 그가 그어 내는 필획에는
우주(宇宙)가 담기어 있었다.
"잠시 기다려 주겠는가? 쭈욱 그려 오던 그림을 마무리지을 동안만."
만박은 고독한 어조로 말하며 초상화를 그리는데 정신을 하나로 모았다.
'또 어머니를 그리겠지.'
백무영은 어머니를 생각한다.
어찌 여긴다면 천하에서 가장 불행한 여인일 것이며, 어찌 여긴다면 가장
행복한 여인이라 할 수 있으리라.
꽤 침묵이 흘렀다. 백무영은 느릿느릿 만박 곁으로 다가갔다.
그는 만박이 그림 안의 인물의 눈동자를 그리는 걸 보게 되었다.
화룡점정(畵龍點睛).
눈동자만 그려진다면 그림이 완성된다.
그림의 인물은 소수미랑이 아니었다.
'이럴 수가? 나란 말인가?'
그려지고 있는 인물은 백무영이었다.
죽림(竹林) 앞에서 먼 하늘을 바라보는 한 청년, 그의 눈빛은 고독하면서
도 오만하다.
얼굴이며 팔다리를 완벽히 그려 내는 사람은 많지만, 눈빛을 똑같이 그려
내는 사람은 드물다.
그 점에서 만박은 천재라 할 수 있었다. 만박이 이제까지 그려 왔던 사람
은 바로 백무영이었다.
"미련한 녀석… 미련한 녀석!"
만박은 나직이 중얼거리며 붓을 놓았다.
"다시는 그림을 그리지 못하겠지. 후후, 그리고 이젠 그릴 것도 없어."
만박은 오랜만에 백무영 쪽을 바라봤다.
그의 입술은 싯누렇게 메말랐다.
과거 그는 독공(毒功) 하나로 만천하 무사들을 공포에 질리게 한 바 있
다.
소림사에는 죄를 지어도, 천금장(千金莊)에는 죄를 짓지 말라는 말이 있
지 않았던가?
만박은 살아가며 한 명의 친구도 사귀지 않은 인물이다.
어떻게 여긴다면, 그의 성격은 백무영의 성격과 비슷하다 할 수 있었다.
"진세가 파괴된 이상, 더 이상 막을 도리가 없지. 축융곡의 여섯 귀신은
진짜 귀신이 될 수밖에. 하지만 호락호락 쓰러지진 않아. 우린 함백이라
는 자를 기다리고 있지. 모든 함정은 함백을 노리고 판 거야."
"……."
백무영은 만박이 그린 초상화만 바라봤다.
만박은 그의 기세가 대단하다 느꼈다.
그는 백무영이 가까운 곳에 서 있는 데에도 백무영의 얼굴을 알아보지
못했다.
그는 이혈대법(移穴大法)으로 백무영에게 피를 바꾸어 준 이후, 삼십 년
을 한꺼번에 늙어 버린 것이다.
"그림 안의 청년을 아는가? 훗훗, 우리 여섯 귀신은 저 녀석에게 큰 죄를
지었지."
"으음……!"
백무영은 쓴 숨을 몰아쉬었다.
"대단한 녀석이었어. 오래 살았더라면, 아마도 강호는 그의 수중에 떨어
졌을 거야."
만박의 얼굴에는 핏기가 없었는데, 갑자기 화기가 흐르기 시작했다.
백무영은 그의 눈동자가 습막에 잠기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어이해 저를 위해 우십니까? 그리도 무정하시고 괴팍하시던 분이…….'
남자의 눈물은 용의 눈물이라던가?
만박은 일생 울어 본 적이 없는 사람인데, 지금 소리 없이 흐느끼는 것이
다.
"난 그 녀석을 위해 혈채(血債)를 갚아 주어야만 한다. 산다는 건 지겨운
일이지만, 그 일을 마무리지을 때까지는 버텨야만 해. 미안하네, 청년. 자
넬 죽일 수밖에 없어."
만박은 손바닥을 활짝 폈다.
누런 단환 한 알이 쥐어져 있었다.
팍-!
갑자기 단환이 부서지며, 누런 가루가 분분히 날렸다.
백무영의 콧속으로 매캐한 내음이 흘러들었다.
만박은 어깨를 으쓱거리며 그를 올려다봤다.
"자넨 너무 방심했어. 쿨룩쿨룩… 내가 무공을 알지 못한다고는 하나, 용
독술(用毒術)에 있어서는 천하에서 나를 따를 사람이 없지. 자네는 고독
(蠱毒)에 당했어."
고독은 살아 있는 독이다. 보통의 독은 화기로 태워 버릴 수 있으되, 고
독은 태워 죽일 수 없다.
"고루고 따위에 당하지 않습니다."
백무영이 무심한 듯 내던진 말에 만박의 표정이 확 달라졌다.
"고루고를 알아보다니? 으음, 누구에게서 독을 배웠느냐? 고루고는 노부
가 직접 만든 독이거늘……."
만박은 또다시 약병 하나를 꺼냈다.
이번에 꺼낸 것은 무형독(無形毒)이었다.
만박은 재빠른 솜씨로 무형독을 살포하였으며, 백무영은 눈 하나 깜짝하
지 않았다.
"투골무형지독(透骨無形之毒)도 저를 쓰러뜨리지 못합니다."
"독에 대해 모르는 게 없군. 과거 천하제일독이라는 걸 증명하기 위해 천
하구주(天下九州)를 돌며 강호의 노독물(老毒物)들을 모조리 제거한 바
있지. 한데, 그 누가 나보다 독을 잘 안단 말인가?"
"제게 독을 가르쳐 주신 분은 풍운구주(風雲九州) 귀견수(鬼見手)이십니
다."
"풍운구주 귀견수? 으으, 젊었을 때 나의 아호이거늘……!"
만박은 입을 딱 벌렸다.
백무영은 그의 바로 앞으로 다가섰다.
만박은 은연중 일곱 가지 독을 발사하였으며, 백무영은 모든 독을 회수해
버렸다.
백무영이 바로 앞에 설 때에야 만박은 그가 백무영이라는 걸 알게 되었
다.
"네녀석이었더냐?"
"접니다, 만박 나으리."
"빌어먹을 놈! 살아 있었구나."
"그렇습니다. 전 죽지 않았습니다."
"네놈의 얼굴조차 몰라보다니… 녠녠, 이젠 정녕 죽을 때가 된 것인가?"
만박의 얼굴은 붉게 충혈되었다. 그리고 그의 눈에서는 감격의 눈물이 샘
솟듯 흘러내렸다.
"이젠 망설일 이유가 없게 되었군. 훗훗, 이젠 그 녀석을 찾아갈 수밖에.
비룡, 사실 그 놈과 난 막역한 사이였었지. 난 그 놈을 좋아했지만 겉으
로는 미워하는 척했지. 놈은 너무 뛰어났거든. 모든 점에서 나를 능가했
어. 독을 쓰는 것과 그림을 그리는 것을 빼고는……."
만박의 얼굴에서 생기가 빠르게 사라져 갔다. 그리고 코와 눈자위가 자주
색으로 물들기 시작했다.
"독단을 깨무셨군요?"
백무영은 성큼 다가섰다.
"최근 들어 발견한 극독이다. 일컬어 사멸마고(死滅魔蠱). 고통 없는 죽음
을 주는 독이지. 녠녠, 네놈이 살아 있는 걸 알게 된 이상 죽음을 미룰
필요가 없지."
만박은 천천히 쓰러졌다.
백무영은 그의 몸을 부축이며 한 자 한 자 힘주어 말했다.
"돌아가실 수 없소이다."
"왜?"
"그분을 만나 뵈어야 합니다. 그분이 보고 싶어하십니다. 한 잔 차를 대
접하시겠다고……."
"누, 누가?"
"저의 어머니."
"으으, 소수미랑 말이냐? 그녀가 아직 살아 있단 말이냐?"
"그분은 백치부인으로 계셨습니다."
"백치부인… 으으, 그랬던가? 함백, 그 자 또한 네 어머니를 사랑했었단
말인가?"
만박의 입에서 피가 콸콸 쏟아져 나왔다.
백무영은 만박을 부축하는지라 옷자락을 피에 적시게 되었다.
"어머니께선 용정차(龍井茶) 한 잔을 대접하시겠다 하셨습니다."
"그, 그러나 난 살지 못해."
"독을 없앨 수 있습니다."
"방법이 없어. 네가 빙하신공(氷河神功)을 익히고 있기 전에는. 사멸마고
는 열기에 죽지 않고 한기에 죽거든."
"바로 그러하기에, 만박 나으리가 살 수 있다는 것이지요."
"네가 빙하신공마저 익혔단 말이냐?"
만박은 피를 뿜으며 의식을 잃었다.
백무영은 그의 몸을 반듯이 눕힌 다음, 제독술을 시전하기 시작했다.
그의 의술은 만박의 수준에 육박해 있다.
더욱이 그의 혈관을 타고 흐르는 피는 영혈(靈血)이 아닌가?
피가 흘러 땅을 적신다. 검에 베어져 흐르는 피는 고귀하지 못하나, 살아
남기 위해 흘리는 피는 한 방울 한 방울이 모두 고결하다.
'이제야 선혈의 의미를 알겠다.'
백무영은 산의 정봉을 올려다보았다.
한 번도 만나지 못한 아버지의 마음이 거기 있는 듯했다.
그는 늘 먼 산을 보고 지냈기에, 그리도 오연하고 광오한 마음을 갖게 되
었는지도 모르는 일이다.
자욱한 안개 속.
휙- 휘휙-!
요란한 파공성과 더불어 안개가 갈라지고 있다.
무수한 인영이 빠르게 움직이고 있었다.
일단의 무사들은 백 인(百人) 일 조(一組)를 이루고 있는 바, 몸이 이동하
는 속도가 영활하기 짝이 없었다.
무사들은 광범위하게 퍼져 나가며 축융곡 둘레를 새까맣게 포위하고 있
었다.
산의 중턱 부위, 자색 장포를 휘어 감은 미청년이 옥골선(玉骨扇)을 든
채 회심의 미소를 짓고 있었다.
"그렇잖아도 그 놈의 존재가 눈에 가시였는데, 차라리 잘 된 일이다."
그는 축융곡 쪽을 바라보며 사이한 웃음을 흘렸다. 그의 가문은 너무나도
오랫동안 해상(海上)을 떠돌았다. 그의 아버지는 할복자살을 하면서까지
그에게 대륙무림의 정복을 명하지 않았던가? 드디어 그 꿈이 이룩될 날
이 다가선 것이다.
"냉혈살흔 놈마저 제거해 버린다면… 훗훗, 천하에 나의 적수는 천마왕야
하나만 남게 되는 것이다."
그는 사륵(邪勒)이었다.
그는 오래 전부터 축융곡 근처에 머물러 있었다.
그는 정체를 감추고 대세의 추이를 살펴보는 가운데, 백도인들이 한자리
에 모이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사륵의 눈빛은 독랄하기 그지없다. 그는 백도인들이 모여들 경우, 천라지
망(天羅地網)을 펼쳐서 한꺼번에 일망타진할 작정을 한 것이다.
"천마왕야 하나 정도야 쉽게 제거할 수 있겠지. 훗훗, 이 곳에서 이기기
만 한다면… 흑도 백도의 전 무사를 내 마음대로 호령할 수 있지 않겠는
가?"
그는 느긋하게 웃으며 한 곳을 바라봤다.
철차(鐵車) 한 대가 뒤쪽에 서 있었다.
철차 안에는 머리카락이 긴 노인이 머물러 있었다.
노인의 두 팔은 은마삭(銀魔索)에 제압당한 상태. 하되 그는 쉬지않고 손
을 놀려 대며 나무를 목도(木刀)로 깎고 있었다.
그가 깎는 것은 한 여인의 얼굴이었다.
그의 목도술은 신의 경지에 도달해 있었다.
"후후… 천하제일인이 된 후, 제일 먼저 할 일은 노괴의 목을 자르는 일
이지."
"……."
노인은 사륵의 말을 듣는 둥 마는 둥했다.
사륵은 그의 무반응이 역겨운 듯 가래침을 뱉어 냈다.
가래침은 노인의 얼굴에 달라붙었다.
노인은 힐끗 고개를 쳐들었으며 누런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초조해하는구나, 사륵!"
"초조해하다니? 승리가 눈앞에 있거늘……."
"날 속일 순 없어. 난 너무나도 오랫동안 널 다스려 왔던 사람이 아니더
냐? 네놈 머리 속에 어떠한 생각이 오고 가는지 손바닥을 보듯 빤히 알
고 있다."
"난 누구도 겁내지 않아."
"후후… 너는 너무 성급했다. 솔직히 네녀석이 조금만 더 참아 냈더라면,
난 모든 세력기반을 네게 전했을 것이다. 넌 마각을 너무나도 일찍 노출
시켰어."
"다 죽게 된 처지에 잔소리는!"
"사륵, 충고하건대 이 순간 무림에서 물러나라. 영웅은 물러날 때를 알아
야 한다. 자칫하다가는 너를 추종하는 가신(家臣)들을 모조리 죽음의 구
렁텅이에 빠뜨리고 네 자신마저 패망하게 된다."
"난 물러나지 않아."
사륵의 눈빛은 자색의 섬전과 같았다.
노인은 그의 눈빛을 물끄러미 보다가 고개를 저었다.
"신풍뇌전공(神風雷電功) 따위로 천하를 얻으려 하다니!"
"누구도 신풍뇌전결을 막지 못해!"
"천만에, 너의 무공은 강호에서 서열 십위 밖이다."
"난 제일 강하다."
"넌 냉혈살흔의 반도 되지 못해."
"그 놈은 나를 만나는 찰나, 죽는다."
"후후… 그를 질투하는군?"
"그를 질투하다니? 녠녠, 그런 애송이를 질투할 리가 있나?"
사륵은 애써 고개를 저었다.
노인은 비웃는 눈빛을 던지다가, 다시 목도로 여인의 얼굴을 깎기 시작했
다.
'그 녀석은 역시 난 놈이다. 아아, 그 녀석이 살아 돌아온다면 그 녀석으
로 인해 내가 꺾이리라 여겼었지. 결국 그 녀석은 돌아오고 말았다.'
조금만 더 깎으면 여인의 얼굴이 완성된다.
여인의 얼굴을 조각한 지 이미 수백 번째다.
다른 사람은 모르되 그는 조각을 하며 한 가지 검결을 터득하고 있었다.
그것은 마녀혈(魔女血)이라는 검으로, 그의 최후 심득이 담긴 검이다.
'다시는 이 얼굴을 깎지 않으리. 이번에 깎는 조각이 마지막 조각이다.'
그는 주름진 손으로 나무를 깎았으며, 저녁 노을이 단풍보다 짙게 붉어지
고 있었다. 그리고 흰 깃털 같은 눈발이 뿌려지기 시작했다.
"무림계에 군림한다는 건 즐거운 일이지. 하나, 괴로운 일도 많은 법이야.
늘 누군가 나를 죽이지 않을까 겁을 내어야만 하며, 일상의 즐거움을 느
낄 수 없지. 후후, 사륵! 네녀석은 강호를 정복한다 하더라도 후회하게
될 것이다."
"닥쳐! 이젠 누구도 널 두려워하지 않아!"
사륵은 치를 떨며 손을 쳐들었다.
그의 손에서 장력이 일어날 듯한데, 노인은 전혀 두려워하지 않았다.
"네가 날 죽인다면 후인은 네가 날 겁내어 독으로 쓰러뜨리고 나서 죽였
다고 기록할 것이다. 그렇다면 너는 패권을 훔친 도적으로 기록되리라."
"나는 널 두려워하지 않아!"
"훗훗… 훗훗……!"
노인의 입술 사이에서 메마른 웃음소리가 흘러 나왔고, 사륵은 감히 손을
쓰지 못한 채 주먹을 불끈 거머쥐었다.
눈이 분분히 날리기 시작한다.
숲은 희게 물들기 시작하였으며, 그 사이 무수한 무사들이 사륵 근처로
새까맣게 모여들었다.
"좋아, 하루 안에 강호를 정복하겠다. 그 다음, 노괴의 질긴 목을 잘라 주
겠다. 푸하하하……!"
사륵은 앙천대소를 터뜨리며 표기를 쳐들었다.
삼각소기(三角小旗)가 흔들리는 찰나, 일대에 모여든 무사들이 포효 소리
를 내며 사방으로 흩어져 나가기 시작했다.
축융곡의 진세가 뒤흔들리기 시작한다.
광풍이 치솟아 오르다 못해 거대한 회오리바람으로 변화된다.
우르릉-!
절벽이 무너져 버릴 듯 소리를 내며 뒤흔들린다.
축융곡 깊은 곳, 백무영은 흑포자락을 펄럭거리면서 모옥을 향해 다가서
고 있었다.
모옥 앞에는 세 사람이 머물러 있었다.
묘수환랑(妙手幻娘) 음아후(陰娥后)가 초췌한 표정으로 서 있고, 대환선사
(大幻禪師)가 그를 보며 내공을 끌어올리고 있었다.
마지막 사람은 고동색 장포를 걸치고 있는 청수한 인상의 초로인(初老
人).
그는 허리가 끊어진 검을 매만지면서 먼 산을 보고 있었다.
'잠풍 나으리, 드디어 보게 되는구료.'
백무영은 격정에 사로잡히기 시작했다.
다른 사람은 모르되 잠풍만은 용서하지 않을 작정이었다. 다른 다섯 사람
은 잠풍의 지시에 따라 백비룡을 제거했던 것이다.
'잠풍 나으리, 그대가 나의 일생을 망치고 나의 어머니를 이십 년 간 치
욕 속에 살게 한 장본인이오.'
할 말이 너무나도 많으면 차라리 말이 나오지 않는 것인지, 백무영은 어
떤 말도 할 수 없었다.
그가 모옥 안으로 접어들 때, 묘수환랑이 앞으로 미끄러져 들었다.
"세 관문을 어찌 통과했는지 모르되, 이 곳은 통과할 수 없다."
묘수환랑은 은밀절학(隱密絶學) 가운데 나찰초혼무(羅刹招魂舞)를 시전하
고자 했다.
그녀의 몸이 무수한 분신으로 흐트러지고자 할 때, 그리고 대환선사가 장
력을 발휘하며 묘수환랑의 공격과 더불어 음양합벽진(陰陽合壁陣)을 펼치
고자 할 때였다.
"너… 너는?"
부러진 검을 매만지고 있던 잠풍이 벌떡 일어섰다.
"무영, 너로구나!"
잠풍의 호통 소리로 인해 묘수환랑과 대환선사는 기절초풍 놀라며 공세
를 멈췄다.
"무영이라니?"
"오오… 그, 그렇군. 바로… 무영이로구나, 네, 네가 돌아왔구나."
세 사람은 거의 동시에 백무영을 확인했다.
백무영은 구태여 자신의 정체를 감출 마음이 없기에, 죽립을 천천히 벗었
다.
"그렇소이다. 저올시다. 무영이 돌아왔소이다."
"녀석, 이렇게 돌아오다니… 네가 죽었다고 여기고 함백과 더불어 동귀어
진할 작정으로 이 곳에 육혈관문(六血關門)을 설치하고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묘수환랑은 눈물을 주룩 흘렸다. 그녀는 백무영 가깝게 다가서며 백무영
의 두 손을 꼬옥 움켜쥐었다.
일순, 그녀는 백무영의 손이 아주 차갑다 느꼈다.
"왜 그러느냐? 어디 다쳤느냐?"
묘수환랑은 백무영의 기도가 범상치 않다는데 흠칫 놀라며, 백무영의 전
신을 또다시 살펴봤다.
"비켜 주시오."
백무영의 얼굴은 이끼낀 돌덩어리처럼 굳었다.
"비키라니? 네가 달라졌구나? 무슨 일이냐?"
"비켜 주십시오. 잠풍, 저 위선자 하나를 제거하는 것으로 모든 일을 마
무리짓고자 하는 저의 마음을 변화하게 하지 마십시오."
"으으… 이, 이제 보니……?"
묘수환랑의 얼굴빛이 새까매졌다.
그녀는 백무영의 몸에서 뿜어지는 가공스러운 살기에 휘어 감기며 뒤로
세 걸음을 미끄러져 나갔다.
그녀는 만년빙굴에 빠진 듯한 한기를 이기기 위해 혼신공력을 써야만 했
다.
과거에는 백무영이 그녀의 상대가 되지 못하였으되, 지금은 사정이 판이
하게 달랐다.
백무영은 삼 성 공력만으로도 그녀를 간단히 제압할 수 있는 수준으로
올라선 것이다.
"넌… 모든 걸 알고 있구나?"
묘수환랑의 입술이 파랗게 질렸다.
백무영은 응답도 부정도 하지 않고 천천히 걸어갔다.
묘수환랑은 선천강기의 벽이 밀려듬을 느꼈다.
그녀는 내공을 사용해 강기를 흩트리고자 하였으나 허사였다.
쿵- 쿵-!
그녀는 두 걸음 물러났으며, 그녀의 발이 딛어진 곳은 한 자 깊이의 족인
(足印)이 찍혔다.
"무영, 결국 알고 말았구나……."
묘수환랑은 괴로운 표정을 지으며 백무영을 바라봤다.
백무영의 시선은 한 곳에 집중되어 있었다. 그는 잠풍을 보고 있었다.
잠풍은 백비룡의 사형이 되는 인물이다.
다른 사람과는 달리 백비룡과는 각별히 잘 알고 있던 입장이 아니던가?
백비룡은 그를 존경하고 있었기에, 극천단 위에서 감히 저항하지 않고 얻
어맞아 주었던 것이다.
"죽이겠소!"
백무영은 상처받은 야수처럼 거친 호흡 소리를 흘렸다.
잠풍은 만면에 자애스러운 미소를 짓고 있었다.
"네 모습이 과거 비룡과 같구나. 난 널 믿고 있었다. 넌 잠룡이었지. 그래
서 너의 어깨에 중원의 운명을 걸었던 것이다. 결국 넌 돌아와 주었구
나."
"감히 아버지의 이름을 입에 담지 마시오, 나으리."
"무영, 변명은 하지 않겠다."
잠풍은 손바닥을 들어 머릿결을 빗어 넘겼다. 그의 머리카락도 완전히 세
어 버린 상태였다.
두 사람 사이는 점점 더 가까워졌다.
대환선사는 백무영의 몸에서 뿜어지는 살기가 지독하다는 데 착잡한 표
정을 짓다가는 백무영의 등에 대고 일 장을 가했다.
"무영, 너무 비정하구나."
그의 쌍장에서 무적금강력(無敵金剛力)이 토해지며 백무영의 등판을 후려
갈겼다.
쾅-!
소리와 함께 백무영의 신체가 흔들렸다.
그러나, 더 멀리 퉁기어 나간 쪽은 오히려 대환선사 쪽이었다.
그는 막강한 반탄력을 이기지 못하고 칠 장이나 퉁기어 올랐으며, 그의
손바닥은 불붙은 기름뭉치를 만진 듯 부풀어올랐다.
"막대한 반탄력… 오오, 이것은 곤륜의 무상층층공(無常層層功)이 아니
냐? 네 아버지도 익히지 못했던 곤륜의 최후절학이거늘……."
대환선사는 칠 장 높은 곳까지 퉁기어진 후에야 겨우 몸의 자세를 바로
잡을 수 있었다.
그가 떨어져 내릴 때, 백무영은 잠풍 바로 앞으로 다가섰다.
"오랜만이외다, 잠풍 나으리."
"그렇군. 오랜만이구나."
잠풍은 의연한 자세로 앉아 있었다. 그는 만박보다도 오히려 오만해 보였
다.
그는 엄숙한 표정을 유지하며 엄숙히 말했다.
"난 변명할 말이 없다. 물론 변명을 한다 하더라도, 너는 들어 주지 않겠
지만……."
"진정한 결투를 바라신다면 기회를 드리겠소이다. 단, 나는 육사부에게서
배운 절기를 하나도 쓰지 않을 것이오."
"훗훗… 무공에 자신이 있군?"
"어느 정도."
"좋아. 남아 대장부의 기백이 그 정도는 되어야지. 후후, 너의 도전을 정
중히 받아들이겠다."
"어느 정도."
잠풍은 여유만만히 말하며 단검(短劍)을 쳐들었다.
그것은 백비룡의 애검(愛劍)이다. 그것은 극천단 위에서 부러졌으며, 누구
도 끊어진 부위를 잇지 못하는 상황이었다.
"이것을 네게 주겠다."
단검은 백무영에게 내던져졌다.
백무영은 검자루를 움켜쥐며 격한 눈빛을 던졌다.
'이것이다. 내가 잇고자 하였으나 잇지 못했던…….'
그가 검을 매만지며 착잡한 시선을 던질 때, 도처에서 폭음이 터져 나왔
다.
요란한 폭발음과 더불어 축융곡을 보호하던 진세가 와르르 붕괴되었으며,
축융곡을 포위하고 있던 대명무문의 무사들이 일제히 난입하기 시작했다.
수천 무사들이 환호성을 지르며 쳐들어오는데, 우두머리에 선 사람은 종
대선생과 개방 칠지신개였다. 그들이 진세를 쉽게 파괴할 수 있게 된 것
은, 백무영이 안으로 접어들며 가공한 내공의 힘으로 진의 팔개축(八個
軸)을 모두 붕괴시켰기 때문이었다.
모옥 앞, 네 사람은 수천 무사가 다가서는 데에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
다. 수천 무사는 모옥 일대를 겹겹이 포위하기 시작하는 바, 잠풍은 느릿
느릿 손을 쳐들며 이렇게 말했다.
"제자들아!"
순간, 모옥 뒤쪽에서 이백여 명의 백포(白袍), 백건무사(白巾武士)들이 모
습을 드러냈다.
깡마르고 초췌한 인상들. 그들은 잠풍이 친히 기른 위사들로, 이제까지
축융곡 외부 지역을 엄밀히 지키고 있었던 상태였다.
백의인들이 모여들 때, 잠풍은 품에서 금색 영패를 꺼내 땅에 던졌다.
그것은 관산검맹의 맹주 지위를 나타내는 영부였다.
이어 잠풍은 또 하나의 영패를 던지는 바, 그것은 곤륜파 장문인의 지위
를 나타내는 운룡옥결(雲龍玉訣)이었다.
"내가 죽는다 하더라도 복수를 생각해서는 아니 된다."
"맹주님! 크으… 백도를 위해 희생하신 맹주님이 오해 가운데 돌아가실
수야……."
"속하들, 맹주님과 더불어 죽겠습니다."
흰 옷을 걸친 무사들은 잠풍과 더불어 암중 활약해 온 무사들로, 관산검
맹의 기둥들이라 할 수 있다.
백무영은 과거 잠풍의 거처에서 그들을 한 번 본 바 있다.
"난 쉽게 지지 않아. 이길 자신이 있다. 푸핫핫! 백비룡을 꺾은 내가 왜
지겠느냐?"
잠풍은 광폭히 소리치며 철검 한 자루를 제자에게서 건네 받아 번쩍 쳐
들었다.
그는 곤륜파 비전 일양검법(一陽劍法)에서 발전시킨 잠룡구절(潛龍九絶)
의 수식을 시전하기 시작하였으며, 일대에 살벌한 경기가 흐르기 시작했
다.
"저기 있는 녀석은 백도를 망치려 했던 백비룡의 아들이다. 푸핫핫! 내가
저 따위 애송이에게 질 순 없다. 백비룡은 오만한 놈이었지. 그 놈은 절
대자 행세를 하였으며, 스스로 무적대협(無敵大俠)이라 행세했다."
잠풍의 목소리에는 사자후 신공이 실리어 있는지라, 축융곡으로 모여들던
사람들은 하나도 빠짐없이 잠풍의 호통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무적대협이 백비룡 대협이었던가? 오오, 그는 바로 잠풍의 사제이거늘…
…?"
"이럴 수가? 잠풍이 바로 백비룡을 제거한 장본인이란 말인가? 그렇다면
종대선생이 주장해 온 사실은 모조리 사실로 밝혀진 것이다."
모여들던 무사들이 흥분하기 시작했다.
많은 무사들은 이제까지도 잠풍의 결백을 믿고 있었는데, 잠풍의 사자후
로 인해 사실이 밝혀진 것이다.
가장 놀라운 사실은, 냉혈살흔이 바로 무적대협의 아들이라는 사실이었
다.
"저분이 바로 무적대협의 아들! 오오, 그렇다면 가히 백도의 맹주감이다."
"냉혈살흔이야말로 진정한 대협호(大俠豪)시다. 아아, 개방주께서 저분이
바로 신비낭객이라고 하셨는데… 이제야 그 말이 맞다는 걸 알겠다."
"냉혈살흔은 이제 백도의 맹주시다."
"우우우… 잠풍을 죽여라!"
군중심리란 묘한 것이다.
냉혈살흔 백무영은 수많은 사람들의 부르짖음 가운데 백도맹주감으로 인
정받게 되었다.
"푸핫핫… 난 누구도 겁내지 않아. 내가 비록 백도를 장악했다가 좌절하
기는 하였지만, 곧바로 대세를 장악할 자신이 있다. 난 애송이 따위에게
대권을 넘길 수 없다."
잠풍은 앙천대소를 터뜨리며 철검을 휘둘러 대기 시작했다.
웅휘한 검기가 일어나기 시작한다.
백무영의 가슴으로 은하수(銀河水) 같은 검세가 들이닥친다.
"……!"
백무영은 우뚝 선 채 검세를 고스란히 맞았으며, 일순 그의 옷자락이 베
어져 검은 나비처럼 펄펄 날아올랐다.
"으으, 왜 피하지 않지?"
잠풍의 얼굴이 희게 물들었다.
백무영은 그를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놀랍게도 그의 눈은 흰빛으로 반짝거리고 있는 바, 그 이유는 눈썹 끝에
이슬이 맺혔기 때문이었다.
"바보자식, 울다니… 난 네게 울면 안 된다고 가르쳤다."
잠풍은 전음입밀로 말하며 다시 일 검을 시전했다.
이번에는 백무영의 옆구리로 검이 다가섰다.
"날 베라, 나를 베고 백도맹주로 올라서라. 지금은 분열된 백도를 하나로
뭉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이다."
잠풍은 쉬지 않고 삼 검을 시전했다.
얼핏 보면 그의 검세 아래 백무영의 몸이 난도질되는 듯 하였으되, 사실
은 달랐다. 그의 검세는 옷자락만 베어 낼 뿐이다.
"날 베란 말이다. 바보자식! 네 아버지 마냥 멍청하게 당하지 말란 말이
다!"
잠풍의 눈썹에도 이슬방울이 맺히고 있었다.
두 사람은 싸우는 듯하고 있으나, 사실은 싸우는 게 아니었다.
잠풍은 백무영에게 영광을 주며 스러질 작정을 한 것이다.
"어이해 일부러 지고자 하십니까? 그렇게 함으로써 제 아버님을 오해하
여 베고, 절 납치한 죄가 풀린다 여기십니까?"
"나, 나로선 어쩔 수 없는 선택이다. 무영, 부디 날 베어라, 마도세력이
하나로 뭉치고 있는 이상, 백도는 한시빨리 단합되어야 한다. 모든 백도
인이 보고 있는 곳에서 날 베라."
"크으!"
백무영은 처절한 신음 소리를 내며 부러진 검을 쳐들었다.
잠풍은 그제야 미소를 지었다.
그는 잠권을 형성시켜 나가면서 바짝 다가섰다.
"마음이 흔들릴 필요는 없어. 영웅은 무정해야 한다."
잠풍은 전음으로 말하며 점점 다가섰다.
백무영은 긴 검을 쳐들며 부르짖듯 소리쳤다.
"아버지의 영혼이시여! 제가 이렇게 하는 걸 용서해 주셔야만 합니다!"
그는 검을 쥔 채 떠올랐다.
잠풍이 쳐내던 검세는 찰나적으로 무산되고 말았다.
한 마리 용이 떠오른다. 용의 그림자가 십 장 허공까지 치솟아 오르는 가
운데, 일진광풍이 일어났다.
"무영, 너의 무공이 이 정도라니… 아아, 널 기른 게 자랑스럽다. 이젠 안
심하고 네게 곤륜을 맡길 수 있겠구나."
잠풍은 검세에 휘말려 떠오르며 눈물로 뺨을 뜨겁게 적셨다.
"우우우……!"
천룡신후(天龍神吼)랄까?
축융곡 전체가 백무영의 부르짖음 소리에 뒤흔들리고, 모든 무사는 음파
의 충격을 이기지 못하고 고막을 쥔 채 휘청거리기 시작했다.
백무영은 점점 더 높이 치솟아 올랐으며, 장소(長嘯)는 더욱더 위력적으
로 화해 갔다.
콰르르르릉-!
우레치는 소리와 함께 모옥이 붕괴되었으며, 백 장 안에 있던 모든 무사
들은 입에서 피를 한 모금씩 토하며 몸을 휘청거렸다.
"크으! 가공한 내공이다."
"으으, 무적대협의 경지를 두 배 이상 능가한다."
"냉혈살흔의 무공은 고금제일(古今第一)이다."
모든 무사는 사색이 되었으며, 백무영은 장소를 토하며 삼십여 장까지 치
솟아 올랐다가는 단검(斷劍)을 끌어안은 채 잠풍 앞으로 표표히 떨어져
내렸다.
그는 이십 년의 한을 장소에 모조리 실어 날리어 버리듯, 떨어져 내릴 때
의 표정은 차라리 홀가분하다 할 수 있었다.
잠풍은 가공한 내공이 실린 장소로 인해 내공이 흐트러진 나머지, 쥐고
있던 검을 떨어뜨리고 말았다. 그는 고막이 터지는 듯한 고통으로 인해
괴로워해야 마땅한데, 그의 표정은 웃는 표정이었다.
"네가… 자랑스럽다!"
"……."
백무영은 고독한 눈빛을 던지며 다가섰다.
그는 아무 말도 없이 잠풍 앞으로 다가섰으며, 천천히 손을 내밀어 부러
진 검의 검극(劍極) 부분을 쥐었다.
"과거 이런 말씀을 하셨지요? 제가 끊어진 검을 잇는다면, 제게 모든 사
실을 말씀해 주시기로……."
"그, 그랬었지."
"이제 검을 잇겠습니다. 그러니 만인이 보는 앞에서 과거 신풍도 무사들
이 혈겁을 조작하여 아버님을 공적으로 만들고, 백가문과 곤륜파 사이를
이간질한 일이며, 이십 년 간 위선자 행세를 하며 백도를 암중에 통솔해
가며 연환마교를 견제해 나갔던 사실을 모조리 말씀해 주십시오."
백무영은 그렇게 말하며 검의 끊어진 부분을 맞닿게 했다.
그의 두 손은 불수(佛手)처럼 금빛으로 달아올랐다.
"하압!"
기합 소리가 떨치어지는 가운데, 검의 끊어진 부위가 뜨겁게 달아올랐다.
그 어떠한 힘으로도 잇지 못했던 검의 끊어진 부위가 용암처럼 녹아들기
시작했다.
백무영이 손을 떼었을 때, 두 자루 검은 하나의 검으로 화한 상태였다.
"이 검은 대의검(大義劍)! 당금 강호계에서 이 검을 가질 자격이 있는 사
람은 오직 한 분입니다."
백무영은 어딘지 모르게 슬퍼 보이는 눈빛을 던졌다.
그는 검을 쥔 채 잠풍을 바라봤다.
모든 사람이 그의 행동을 주시하고 있는데, 그는 뜻밖에도 잠풍을 향해
천천히 무릎을 꿇는 것이 아닌가?
"이 검은 백도맹주만이 가질 수 있는 검입니다. 저의 어머니를 대신해,
이 검을 잠풍 맹주께 바치겠습니다."
"녀, 녀석! 무슨 짓이냐? 이 검은 네 것이다."
잠풍은 기겁을 하며 고개를 젓는 바, 백무영은 그가 검을 받아야만 몸을
일으키겠다는 자세였다.
그는 속으로 이렇게 말하고 있었다.
'아버님은 제가 이렇게 하는 걸 바라셨을 겁니다. 전 아버님이 짓고 계시
던 미소의 의미를 이제 알겠습니다.'
복수란 피를 부른다. 그리고 누군가 복수의 윤회를 끊어 버리지 않는 한,
피의 윤회는 거듭되는 것이다.
백무영은 대의를 위하여 자신의 원한을 깨끗이 씻고자 생각한 것이다.
그는 막강한 무사, 무공만 따진다면 혈의육존을 단 일 검에 베어 버릴 수
있다.
하나, 무림계를 생각하는 협의지심은 잠풍에 비해 뒤진다 할 수 있었다.
백무영의 진짜 원수는 신풍도 쪽 무사들이라 할 수 있었다.
"이 검은… 백부님의 검입니다."
백무영은 오랜만에 검을 쳐들었다.
"네, 네가 나를 백부라 불렀느냐?"
잠풍의 얼굴은 눈물에 흥건히 젖고 있었다.
"아버님의 사형이시니, 제겐 백부님이 되시지요."
"네 손에 죽고자 했는데, 네 손에 죽으려 했는데……."
"무림을 이끄실 분은 백부뿐이십니다. 제게 짐을 지우지 마십시오."
"녀석, 강호맹주 지위가 싫단 말이냐?"
"싫습니다. 전 이번 일만 마무리지어지면 무림을 떠날 작정입니다."
두 사람의 대화는 중인을 감복시키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이제까지 두 사람 모두 백도인들에게 심한 오해를 받아 온 처지이다. 그
러나 오늘 일로 인해 모든 오해는 봄바람에 눈이 녹듯 사라져 버리고 만
것이다.
모든 사람은 절을 하고 있었다. 그들은 잠풍과 백무영의 충렬심에 감복한
나머지, 자발적으로 무릎을 꿇고 있는 것이다.
특히 감격해 하는 사람은 곤륜의 원로이며, 대명무문의 창건자인 종대선
생이었다.
"풍아(風兒), 넌 역시 강호의 준마였다. 아아, 이십 년 넘게 널 오해하고
죽이고자 하였거늘… 넌 모든 걸 알고 있으면서도 변명조차 하지 않았구
나. 너는 비룡 그 녀석을 능가하는 강호의 기둥이다."
풍아란 잠풍의 아명이다.
종대선생과 잠풍은 이십 년 간 반목해 왔는 바, 모든 오해가 한순간에 풀
어지고 만 것이다.
"검을 쥐십시오, 백부. 그래야 제가 일어설 수 있습니다."
"그래, 그래… 네 말대로 하마."
잠풍은 부끄러움도 잊고 눈물을 쉬지 않고 흘렸다.
그는 감격에 겨운 표정을 지은 채 검을 건네 받았다.
그리고 모든 사람은 일제히 환호성을 터뜨렸다.
백도인의 사기가 오늘처럼 고조된 적은 없었다. 백도인은 한마음으로 뭉
친 것이다.
"아저씨가 무림을 이끄셔야 제가 편히 지낼 수 있을 겁니다. 사실 전 이
기주의자이지요. 아저씨가 세상 사는 요령을 너무 철저히 가르쳐 주신 탓
에 이렇게 된 겁니다."
"녀석… 한데, 너의 어머니는 건재하더냐?"
잠풍은 그렇게 물으며 스르르 의식을 잃었다.
그는 지극히 탈진한 상태였다. 이제까지 버틴 것만 하더라도 천행이라 할
수 있다.
백무영은 쓰러지는 그를 부축하였으며, 그 때 종대선생이 바로 곁으로 다
가섰다.
"무영, 풍아는 내게 맡기고 어서 가 보게."
"어, 어디로 가란 말씀이십니까?"
"여기 오기 전, 약빙이 울며 떠나갔네. 아마도 자네를 심각히 오해한 듯
하네. 조속히 찾지 않으면, 다시는 만나지 못하게 될지도 몰라. 그럼 삼대
(三代)에 걸쳐 별리(別離)의 비극이 벌어지는 거야. 그런 비극은 다신 없
어야 해."
"삼대의 비극이라니요? 마치 제게 후사라도 있듯이 말씀하시는군요?"
"자네에게 아들이 있다는 걸 아직 모르는군."
종대선생의 한 마디는 일생일대의 충격이었다.
"아, 아들이라니요?"
"몽룡(夢龍)이라 하지. 약빙이 나은 씩씩한 아들이야."
"냉약빙이 제 아들을 낳았다고요?"
백무영은 멍해지고 말았다.
종대선생의 뒷말은 귀에 들어 오지도 않았다.
이 곳은 자신이 맡겠으니 어서 그녀 곁으로 가 보라는 말이며, 냉약빙이
자네를 사랑한다는 말이며…….
'내게 아들이 있다니, 내게 아들이……!'
첫댓글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