ㅁ 해설 자아 인식과 생명 탐구의 시적 진실 --이병일 시집 『군불』 김 송 배 (시인. 한국문인협회 전 부이사장) 1. ‘나’에 대한 인지와 여과하는 성찰 현대시의 발상이나 시적 동기의 유발(motif)은 대체로 시인의 체험이 재생하는 삶의 궤적에서 그 원류를 찾는 것을 흔하게 접할 수 있다. 이는 그들이 살아온 한생에서 불망(不忘)으로 새겨져 있는 삶의 흔적이 이미지로 형상화는 시법을 다양하게 응용하고 있음을 알 수 있게 한다. 또한 시인들은 발상에서부터 주제의 투영까지 인생체험에서 창출된 정감(情感)이 포괄적으로 정립하는 양상이 현대시 창작의 핵심 테크닉으로 생성하는 중요한 매체의 역할을 담당하기 때문이다. 여기 이병일 시인이 상재한 시집 『군불』을 일별해보면 이러한 삶에서 발견한 ‘나’에 대한 인지(認知)가 바로 시와 접맥하는 모태가 되어서 자아를 인식하는 근원으로 작용하고 있음을 이해하게 된다. 이병일 시인은 <시작 노트>에서 ‘나도 사파일망정 살아 있으므로 / 글 쓰는 구실을 멈추어서는 아니 된다’는 창작의 동기에서 유추할 수 있듯이 그는 삶과 글 쓰는 일을 동일한 지향점으로 인생을 감지하고 있는 것이다. 그는 ‘이제 할 일 없는 영감이 되어 / 이곳저곳을 기웃거리다가 / 잠 못 이루는 밤이면 툇마루에 나앉아 / 하늘의 달을 올려다보게 되었다네 / 서럽고 슬펐던 일만 회상하게 하는 / 달을 바라보게 되었다네(「달」 중에서)’라는 어조에서 ‘회상’을 통한 인생 칠정(七情-喜怒哀樂 愛惡慾)에 대한 심저(心底)가 달을 바라보면서 회고(回顧)하는 노년의 자적(自適)을 읽을 수 있게 한다. 살아 온 세월 되짚어 보니 / 달빛에도 색깔이 있더구나 / 노란색 붉은색 푸르스름한 색 / 심지어는 우윳빛과 회색 같은 / 무채색도 있더구나 / 볼 때마다 / 다른 색깔이더구나 // 달무리 지는 봄밤에 뿌리는 달빛은 / 가난한 처녀의 하나뿐인 노랑 저고리처럼 / 허옇게 색이 바랬었고 / 찬 서리 내리는 새벽녘의 하현달은 / 인어의 비늘처럼 은빛으로 차가웠었지 / 가을 들판을 금빛으로 비추던 보름달이 / 당나무에 웅크린 올빼미를 향하면 / 그 모습이 검어지는 것을 나는 보았다 // 급한 일 있다는 사람을 배웅하고 돌아오던 길에서 / 나는 까닭 없이 핏빛으로 붉어지는 달을 보았다 / 소식 없는 사람을 하염없이 기다리다가 / 그 핑계가 날 버리기 위한 거짓이었음을 깨닫고 / 보게 된 그믐달 빛은 / 내 심장을 겨누고 날아드는 / 시퍼렇게 날 선 한 자루 비수였다 // 오호! 그랬었구나 / 달빛은 달이 / 그를 보는 이의 가슴속을 반사하며 / 내지르는 비명이었음을 / 이제야 알겠구나 -- 「달빛」 전문 이병일 시인은 우선 ‘달빛’에 심취하고 다변적인 변화의 양상을 관찰하면서 ‘나’를 ‘살아온 세월 되집어 보’면서 자신을 인지(認知)하는 비유법으로 작품을 풀어나가고 있어서 흥미롭다. 그는 ‘달무리 지는 봄밤에 뿌리는 달빛’에서부터 ‘찬 서리 내리는 새벽녘의 하현달’과 ‘가을 들판을 금빛으로 비추던 보름달’ 그리고 ‘거짓이었음을 깨닫고 / 보게 된 그믐달’의 형상을 통해서 ‘볼 때마다 / 다른 색깔’을 음미할 수 있다. 이러한 그의 심안(心眼)에는 다채롭게 전개된 삶에서 획득한 심경의 일단이 함축된 생사고락의 결론적인 내면의 심중(心中)이 바로 ‘오호! 그랬었구나 / 달빛은 달이 / 그를 보는 이의 가슴속을 반사하며 / 내지르는 비명이었음을 / 이제야 알겠구나’라는 어조(語調)로 세상 물정(物情)을 이제야 알겠다고 인지하는 그의 진솔한 진실임을 이해하게 한다. 이처럼 달의 표면이 주기적으로 변하면서 그 빛이 다른 색깔로 변하는 것은 시간성(초저녁, 한밤중, 새벽 등)과도 상관하지만 초승달, 반달, 보름달, 다시 반달, 그믐달로 변하는 양상은 심리학자들은 인간의 존재 즉 생성과 소멸에서 그 의미를 부여하기도 한다. 그는 다시 자신을 인식한 후에 ‘한창 나이에 나는 / 쌓인 눈을 아무리 쓸어 내도 / 곳곳을 파 헤쳐도 / 별 조각은커녕 / 희망을 잉태한 겨울열매 하나 / 찾아내지 못하고 헤매다가 / 길을 잃고 말았다네 // 지금의 늙은 나는 / 고기에 맛들인 초식동물들이 / 눈밭을 어슬렁거리는 것에 놀라 / 그만 길을 잃고 절망한다네(「눈밭에서 길을 잃다」 중에서)’는 어조로 무엇인가를 찾아내지 못하고 헤매다가 ‘길을 잃고 말았다’거나 ‘그만 길을 잃고 절망한다’는 방황과 절망을 체험하게 된다. 이것은 삶의 행로를 회상하면서 감지한 고행(苦行)의 한 단락으로 그가 인지한 ‘나’에 대한 인생의 성찰을 여과(濾過)하고 있는 심리적인 발현임을 알 수 있다. 그래서 그는 ‘내가 갉아먹은 조악한 잎이 / 내 탓이 아니더라도 / 자꾸만 마음이 무거워지는 것은 / 나도 모르게 쌓은 업 때문이리라(「업」 중에서)‘라는 자성(自省)의 언어와 같이 ’업‘으로 시적 상황을 변전(變轉)시키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라한 ‘업(業)’에서 생성한 절망도 그는 하나의 기원의 의지로 이를 극복하려는 의식의 흐름을 이해할 수 있는데 ‘나도 한 마리의 연약한 물고기가 되어 / 네가 드리운 그늘에서 / 자유롭게 헤엄치고 싶어진다(「굴업도」 중에서)’거나 ‘그대여! 나를 흔들어 깨워 / 시간이 헝클어지고 낯선 곳을 헤매는 / 나를 꺼내다오 / 이 넌덜머리나는 꿈으로부터 / 나를 벗어나게 해다오(「꿈」 중에서)’라고 절규하는 시법으로 그는 자아인식의 범주(範疇)를 확대하고 있어서 궁극적으로 그는 자신을 사랑하는 자애(自愛)의 인생관으로 변화시키는 시법으로 형상화하고 있는 것이다. 그의 꿈은 이러한 고뇌와 방황 그리고 절망적인 의식에서 ‘나를 꺼내다오 / 이 넌덜머리나는 꿈으로부터 / 나를 벗어나게 해다오’라고 울부짖는 우리 인간들의 생리가 잘 현현되고 있어서 독자들의 공감영역을 확산하고 있다. 이병일 시인은 ‘나’를 인식하거나 성찰하는 작품 ‘젊어 험한 일 많이 한 늙은이는 날 궂으면 삭신이 쑤시다가도 / 해 들면 멀쩡해진다 하지만 / 나는 젊어 잃은 늑골 하나 있던 자리가 / 세월이 갈수록 더욱 아리고 시리다(「기다림」 중에서)’와 같이 실제 상황이 가미된 고백적인 시법과 자신이 지향해야 할 새로운 방향을 모색하는 ‘그 자비와 사랑 속에 몸을 담그고 / 나는 체온이 그가 흘리는 피와 / 서서히 가까워지고 있음을 느낀다 / 마음이 차츰 발효되어 / 그에 동화되고 있음을 느낀다( 「溫泉浴)」 중에서)’는 그의 내면에 잠재한 성찰의식을 여과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2. ‘삶과 죽음’ 그리고 생명의 외경 이병일 시인이 가장 중시하는 생존의 형상은 삶과 죽음에서 응시(凝視)하는 생명의 외경(畏敬)이라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그는 외적(外的) 사물과의 착목(着目)에서도 우선적으로 생명성에 집착하면서 그것들의 생사를 관찰하는 습성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한 사유(思惟)의 중심에는 존귀한 생명의 시혼(詩魂)이 침잠(沈潛)해 있음을 알 수 있게 한다. 불완전한 삶, 불완전한 죽음 / 그 완전한 잔해가 여기 있다 / 위엄 있게 치장하고 / 사계절을 완전하게 살아가는 소나무의 발치를 / 불완전한 주검이 어지럽히고 있다 // 하지만 그들의 삶을 위한 몸부림은 / 얼마나 처절했던가 / 미약한 햇빛에 굶주려 / 키는 한 뼘 남짓밖에 못자라고 / 줄기는 나무젓가락만큼이나 가늘었다 // 이를 견디고 / 어미를 닮으려 기를 쓰고 살았다 / 그 짧은 생애 동안 손톱만한 꽃도 피웠지만 / 한 톨의 열매도 맺지 못하고 / 겨울의 냉혹한 칼날에 허무하게 / 무너진 삶 / 낙화 낙엽의 형식도 빼앗기고 마감한 생애 / 참으로 불완전한 삶이고 죽음이었다 // 그들은 한 서려 눕지도 못하고 / 쌓인 눈 위로 솟아 선채로 풍화되어 간다 / 늦가을에 싹터 짧게 살다가 간 / 해바라기 몇 포기의 잔해가 여기에 있다 --「殘骸」 전문 이병일 시인은 ‘해바라기 몇 포기의 잔해’에서 고귀한 생명력의 심각성을 개탄하고 있다. 그것은 ‘불완전한 삶, 불완전한 죽음’이며 ‘삶을 위한 몸부림’이고 ‘냉혹한 칼날에 허무하게 / 무너진 삶’이라는 비극적인 생멸(生滅)을 시적으로 형상화하고 있는 것이다. 그는 다시 ‘그 짧은 생애 동안 손톱만한 꽃도 피웠지만 / 한 톨의 열매도 맺지 못’하는 안타까움이 생존의 냉엄(冷嚴)함에 미혹(迷惑)되고 있다. 이러한 시적인 비유는 참으로 차원 높은 은유적인 창출의 테크닉으로써 좋은 시창작법이라고 할 수 있다. 일찍이 유명한 정신분석학자 프로이트는 ‘모든 유기체는 자기 나름의 방식으로 죽기를 바란다. 여기에서 생명체는 일종의 첩경(捷徑)에 의해 자신의 삶의 목표를 빨리 달성하게 해줄지도 모를 사건에 대해 가장 정력적으로 대항한다는 역설적인 상황이 생긴다’는 논지로 삶의 목표와 생명체의 순화적인 순리를 말해주고 있다. 어찌 보면 생사의 순리는 작품 「신과 태양」 중에서와 같이 ‘움직일 수 없는 생명들은 / 태양의 높이에 따라 / 잎을 달고 떨구어 삶을 조절해야 하고 / 몸을 움직이는 생명들은 / 태양이 뜨고 저무는 것에 따라 / 일하고 잠들어야 한다‘는 어조와 같이 인간들은 짧은 한 생애에서 긍정하고 수용해야 하는 하나의 도정(道程)으로 받아들여야할 것이다. 지난해 가을 / 생명을 품은 열매를 수확하던 / 농부들은 그 풍요로움을 반겼지만 / 나는 그것을 무덤덤하게 지나쳤다 / 그러나 피 배어 붉어진 나뭇잎이 / 추락하는 것을 보고는 / 세월의 덧없음을 한탄했다 // 이제 봄이 되어 / 새 생명이 움트고 / 현란하게 꽃이 피는데도 / 이를 반기지 못함은 왜일까 / 삼월, 봄의 시작점에서 / 숲속에 들어와 / 힘들고 무거운 투쟁을 준비하는 / 생명들을 보고 나는 절망한다 --「봄」 중에서 또한 이병일 시인은 가을과 봄이라는 시간성에서 ‘붉어진 나뭇잎이 / 추락하는 것을 보고는 / 세월의 덧없음을 한탄했다’거나 ‘숲속에 들어와 / 힘들고 무거운 투쟁을 준비하는 / 생명들을 보고 나는 절망한다’는 상황에서는 ‘한탄’과 ‘절망’ 그리고 ‘세월의 덧없음’이 계절적으로 분화(分化)하는 생명체에서 진하게 감응(感應)하고 있다. 다시 이병일 시인에게서 흡인(吸引)할 수 있는 시적 전개는 병실에 대한 회상이다. 병실은 병을 치료하는 곳이기도 하지만 끝내 치유하지 못한 환자는 죽음으로 떠나가는 곳이기도 하다. 그는 이러한 실재(實在) 실생활(real life)에서 입원하여 목도하거나 겪은 생생한 체엄이 형상화하고 있는 것이다. 나는 이곳 알콜 병동에서 / 그때의 풍뎅이들을 다시 본다 / 나도 목이 비틀린 풍뎅이가 되어서 / 병원 복도를 쉬임없이 쓸어대는 / 풍뎅이들을 본다--중략--스스로 되돌려 놓을 수 없는 모가지 / 비틀리던 시간보다 더 많은 날들을 / 이 병동에서 복도를 쓸어야 한다 / 우리 알코올 의존증 환자들은 --「목 비틀린 풍뎅이들」 중에서 병실의 제법 커다란 창문 / 열 수 없는 창이다 / 밖을 볼 수는 있지만 / 우리를 내보일 수는 없다 / 전등을 켜 놓아도 병실은 / 극장의 객석같이 어둡고 / 창밖은 조명 켜진 무대처럼 환하기 때문이다--중략--기수를 낮추고 공항으로 나는 여객기를 보면 / 우리는 생의 종착지를 떠올리게 된다 / 우리의 영혼을 싣고 이륙하는 / 이름 지어지지 않은 비행선과 / 어떤 삶이 기다리는지 모를 / 은하의 수많은 별 중 하나를 상상하게 된다 --「窓」 중에서 아마도 그는 ‘알코올 병동’에서 ‘알코올 의존증 화자들’의 재활치료중인 상황이 설정된 것을 보면 실제 상황인 것 같아 보인다. 거기에서 전개되는 애절한 현실들이 은유적이거나 직유의 방식으로 적나라하게 표출되고 있다. 그는 어쩔 수 없이 ‘나도 목이 비틀린 풍뎅이가 되어’서 그들과 동고동락해야 하고 때로는 창 밖에서 ‘기수를 낮추고 공항으로 나는 여객기를 보면 / 우리는 생의 종착지를 떠올리게 된다’는 절망적인 심사(心思)도 절감하게 한다. 그는 ‘아 늙어 병 깊은 내가 / 이 한숨 가득한 병실에서 / 저 아기 햇님 한 톨의 열매도 맺지 못하고 / 숨 거두는 것을 지켜보아야 하는가(「가을에 싹튼 해바라기」 중에서)’는 어조에서는 해바라기의 죽음을 의인법으로 처리하는 시법이 잘 응용되고 있다. 또한 작품 「夜窓」 중에서도 ‘아! 밤을 보지 못하게 막아서면서 / 꿈속같이 어지러운 불빛만 반사하는 / 병실의 유리창이여 / 죽음을 연습하는 늙은이들의 잠꼬대를 가두고 / 눈을 부라리는 자폐의 夜窓이여’라는 절절한 고뇌의 언어를 현현하고 있는 것이다. 일찍이 프랑스의 소설가 앙드레 말로는 ‘내가 죽는 방법을 생각하는 것은 죽기 위해서 아니라 살기 위해서다.’라고 생사(生死) 혹은 생명에 대한 사유가 우리들 인간 내면에는 항상 잠재해 있어서 이는 작품 ‘창’과 ‘해바라기’ 그리고 ‘야창’에서 절실하게 투영되고 있음을 이해하게 된다. 3. 영혼과 무와 교감하는 불성과의 화해 이병일 시인이 과거, 현재, 미래의 생(生)에 대하여 심도(深度)있게 천착(穿鑿)하는 시적 주체는 영혼과의 교감을 시도하는 특성을 엿보게 한다. 그는 작품 「고독」 중에서 ‘영혼은 언제나 혼자인 것 / 누구도 같이 할 수 없는 필연 / 설사 피를 나눈 가족이라 할지라도 / 자신 밖에는 설명할 수 없다’라고 항상 혼자인 자신이 곧 영혼과의 동체(同體)임을 적시하고 있다. 그러나 ‘친구들과 어울려 술 마실 때에도 / 나는 외롭다 / 알코올이 뇌장을 흩어놓은 다음 / 재조립하는 것을 즐길 뿐이다’라는 어조에서 그는 고독한 영혼과 교감하고 있다. 자신의 영혼 교감은 고독 속에서 행해지고 친구와의 음주 자리에서도 자신의 진실된 실체를 ‘재조립’하는 특성을 알 수 있다. 그는 다시 ‘전생에 나의 무엇이라도 되었었던가 / 내가 잊은 언약이라도 있었던 것일까 / 창문에 그림자만 드리울 뿐 / 속내를 드러내지 않는 영혼 하나 / 누가 기억할 수 있으랴(「창밖의 수양버들」 중에서)라는 고뇌가 엄습(掩襲)하면서 숨겨진 영혼에 대한 위무(慰撫)를 보내고 있다. 요사 아궁이에 군불 지피는 행자 한 분 / 무엇을 가슴 속에서 꺼내어 태우려 하는지 / 쉽게 불붙지 않는 덜 마른 장작 틈으로 / 힘주어 숨을 붙어 넣는다 / 푸우 푸우 푸우우- // 지금은 하얗게 잔해만 남은 / 한창나이 때의 푸르렀던 꿈인가 / 아니면 열여덟 여린 젖가슴 위로 손을 끌어다 얹어 주던 소녀 / 그 아린 기억을 태우려 하는가 // 불법에 영혼 맡기려 입산한 지 오래건만 / 세속 인연 못 끊어 쌓여만 가는 업 / 사파와 이어진 머리칼도 밀지 아니하고 / 수계도 못한 행자승이 / 요사 아궁이에 군불을 넣는다 // 늙은 가슴을 열고 카르마를 꺼내어 태운다 / 낮은 굴뚝으로 뿜어져 나와 흩어지는 검은 연기 / 아직도 못 다 지운 한인가 쌓은 업의 잔영인가 / 하늘 한구석에 수묵화인 양 머물다가 / 자취도 남기지 않고 사라지는구나 -- 「군불」 전문 그는 이러한 영혼과의 절대적인 통섭(通涉) 을 위해서 가슴 깊이 묻어두었던 불성(佛性)과 접맥(接脈)하게 된다. 요사채에 군불 지피는 수계도 못한 행자승’에서부터 ‘불법에 영혼 맡기려 입산한 지 오래’된 시적 화자(話者)인 자신이 ‘늙은 가슴을 열고 카르마를 꺼내어 태’우면서 영혼을 불러오고 있다. 이 카르마(karma)는 전생에 지은 소행 때문에 현생에서 받는 응보(應報)를 말하는데 이를 불태우고 있어서 불심으로 속죄하는 정황(situation)이 명민(明敏)하게 현시되고 있는 것이다. 여기에서 이병일 시인은 궁극적으로 추구하거나 갈망하는 주제는 아직도 못다 지운 업의 잔영이 군불의 검은 연기로 ‘하늘 한구석에 수묵화인 양 머물다가 / 자취도 남기지 않고 사라지’고 남아있지 않은 무(無)이거나 공(空)의 세계를 구사하고 있으며 이 시집의 표제시가 된다. 어디에서부터 울려오는가 / 저 은은한 종소리는 / 아득히 먼 수미산에서 시작하여 / 예토의 온갖 풍진과 아우성을 / 걷어가는 여음 / 태양을 사파로 인도하여 / 생명을 일깨우는 범종소리는 / 어떻게 흐트러진 영혼 가득한 / 이곳까지 찾아왔을까 / 멀고도 험한 이 속세를 헤치고 오면서 / 붉게 노랗게 물든 나뭇잎 모아 / 꽃이불을 만들어 / 추위에 떠는 미물들 겨울 나게 덮어 주고는 / 버선 신은 듯 걸어와 / 병실의 창문을 두드린다 / 아직도 미몽 속을 헤매는 중독자들 영혼을 / 다시 한 번 깨우려하는 저 범종소리 / 깨워도 깨워도 눈 못 뜨는 중생을 / 가엾이 여겨 짓는 / 부처님의 한숨인가 보다 -- 「梵鐘 소리」 전문 이 ‘범종 소리’도 앞의 ‘군불’과 함께 지난해 4월, 월간 ’『문학저널』 지에 신인상으로 등단한 작품들이다. 마침 필자가 심사를 했기에 더욱 정감이 배가되는 작품들이다. 이 범종도 사찰에서 중요한 불전사물(佛殿四物-법고, 운판, 목어, 범종) 중의 하나인데 천상과 지옥의 중생을 제도하기 위해서 타종(打鐘)하는 불교의식의 하나이다. 그가 발성하는 ‘저 은은한 종소리는 / 아득히 먼 수미산에서 시작하여 / 예토의 온갖 풍진과 아우성을 / 걷어가는 여음’은 과히 시인의 청각이 아니면 구사하기 어려운 대목으로 안온하면서도 중생들의 생명을 일깨우고 있어서 공감의 폭이 광대하게 유로(流路)하고 있는 것이다. 그는 흐드러진 영혼이 가득한 이곳까지 찾아온 범종소리가 병실 창문을 두드리고 있음에 저어하고 있다. ‘아직도 미몽 속을 헤매는 중독자들 영혼’을 다시 한번 깨우지만 ‘깨워도 눈 못 뜨는 중생을 /가엾이 여겨 짓는 / 부처님의 한숨’으로 경종을 울려주고 있다. 이밖에도 작품 「화장」 중에서 ‘한 가닥 연기로 서서히 승화되는 육신 / 칠십 몇 해 쌓여 / 영혼이 못 다 짊어진 카르마는 / 하늘 한구석을 어지럽히다 / 부처님이 보낸 구름 속으로 빨려 든다 // 눈에 보이던 삶이 / 무로 돌아가는 의식이 끝난다’는 화장 의식에서 ‘영혼이 못 다 짊어진 카르마가’ 부처님의 구원으로 구름속으로 사라지지만 ‘눈에 보이던 삶이 / 무로 돌아가’는 결론에서 시정신 곧 인간정신을 읽을 수 있어서 공감이 배가하고 있다. 그는 이 작품 상황 도입에서 ‘엊그제 내가 죽었다고 한다’라고 메시지를 먼저 전해 줌으로써 ‘내가’라는 화자는 바로 시인 자신임을 이해하게 된다. 또한 작품 「겨울 나그네」 중에서도 ‘영혼이 벗어 놓은 육신 / 풍화되어 空으로 돌아감은 / 숨 멈춘 자리와 무관하거늘 / 무엇 때문에 산을 오르려 하는가’라는 어조로 육신이 풍화로 돌아가고 결국 ‘空’이라는 인생 대명제가 발현되고 있는 것이다. 4. 겨울 이미지의 서정적 탐색 이병일 시인은 서정시인이다. 그가 천성적으로 간직한 심성이나 정서 또는 사유의 지향점이 자연친화적인 서정에 몰두하는 습관을 소유하고 있다. 그는 특히 계절적인 시간성과 동행하는 자연의 변화를 감도(感度) 높게 탐색하고 있다. 그는 봄, 여름, 가을, 겨울 사계절에서 접할 수 있는 만유(萬有)의 자연 정경(情景)에서 감득(感得)하는 이미지가 서정시의 원류로 작용하면서 잔잔한 분위기의 시법을 취택하고 있다. 그는 우선 작품 「입춘」에서 ‘산그늘에는 잔설 하얀데 / 시냇가 둔덕 양지 녘에서 / 성급하게 내어 미는 아기 손들 / 아직은 오므린 손가락 펴지 못한다 // 천사 닮은 어느 소녀가 / 지난 가을 묻어 둔 소망 한 줌이 / 눈부신 햇빛 실어 나르는 훈풍에 / 움텄나 보다 // 혹 꽃샘추위 찾을지 모르니 / 그 곁에 불씨 묻어 둔 질화로 하나 / 가져다 엎어 놓아야겠다 / 시려 오므린 손 펴 줘야겠다’는 봄의 전령이 한해의 문을 여는 ‘입춘’에서부터 펼쳐질 새 희망의 소망들이 발현되고 있다. 그러나 이병일 시인은 한해 중에서 겨울을 사랑하는가보다. 작품으로 형상화한 이미지들은 겨울을 소재한 것들에게 시선이 집중되는 것은 왼일일까. 그는 초겨울에서부터 눈, 겨울 민들레, 호수, 겨울에 핀 백일홍 등등 많은 소재를 겨울 환경에서 취택하는 특징을 엿보게 한다. 찬바람이 기러기를 데려오는지 / 기러기가 찬바람을 앞세워 밀고 오는지 / 알 수는 없지만 / 찬바람에 낙엽 흩어져 굴러다니면 / 님과 헤어져 소식 기다리는 사람은 / 그리움으로 가슴을 떨게 된다 // 멀리서 들리는 개 짖는 소리에 / 사립문 열어 동구 밖을 살피고 / 뒤처져 날아드는 기러기 울음에도 / 서산에 기우는 하현달 올려 보며 / 눈시울 적신다 // 화로를 덥히던 불씨 같던 국화마저 / 철 제치고 내린 눈 속에 묻히면 / 기다리는 사람도 눈 속에 갇힌 채 / 꽃잎 시들어 죽어 가는 국화가 된다 / 지질시대의 琥珀 속 모기가 된다 // 아무것도 싹 틔우지 못하는 황량한 가슴은 / 얼어 굳은 그리움을 씨눈처럼 숨기고 / 자꾸만 길어지는 겨울밤을 지새운다 / 언젠가 훈풍 불어와 / 호박 속 잠든 모기를 깨울 때까지 -- 「초겨울」 전문 이병일 시인은 초겨울 어느 날 ‘찬바람에 낙엽 흩어져 굴러다니’는 어느 지점에서 개짓는 소리와 기러기 울음을 들으며 ‘서산에 기우는 하현달 올려 보며 / 눈시울 적’시면서 그리움에 젖어 있다. 이러한 정경은 그가 정서적으로 지향하는 서정성이 이 겨울 이미지에서 내포하는 정점을 이해하게 된다. 그는 ‘봄여름에 품었던 꿈’과 ‘칼바람에 맞서(이상 「단풍」 중에서)’는 가을 단풍의 아쉬움들이 이제 기다림이라는 명제 아래 그리움을 형상화하고 있다. 그는 이렇게 그리움과 기다림으로 ‘자꾸만 길어지는 겨울밤을 지새’우는 안타까운 형상이 초겨울의 이미지이다. 불 시린 겨울밤에 / 어디서 날아들었을까 / 가로등을 둘러싸고 날갯짓하는 / 수많은 흰 나비들 / 꽃도 잎도 떨어져 / 앉아 쉴 나뭇가지 찾지 못하고 / 가로등 감싸고 맴돌며 / 몸을 덥히고 있다 / 꿀 찾아 꽃밭 누비던 꿈 / 어디에 버렸는가 / 이 찬바람 거센 거리에서 / 유랑하는 무리들 // 굶주린 박쥐도 탐내지 않는 / 너희의 야윈 날개 / 그들은 식욕을 잃고 / 무너져가는 스레트집 처마에 매달려 / 너희의 운명을 방기해 버린다 // 맴돌다가 등불에 몸이 닿아 / 이슬로 사라지든지 / 땅에 내려 앉아 서로 껴안고 / 한 旬이라도 목숨을 보전하든지 / 그것은 온전히 나비 / 너희의 몫이다 -- 「눈」 전문 한편 그는 겨울밤에도 흩날리는 눈을 보면서 시각적인 이미지에서 나비라는 사유속의 곤충을 대입시키는 시법을 보여주고 있다. 곧 ‘눈=나비’라는 등식으로 해법을 탐색하고 있는데 펄펄 ‘수많은 흰 나비들’이 ‘가로등을 둘러싸고 날개짓’을 하는 형상에서 그의 사유는 ‘운명’이라는 또 다른 서정적인 자아를 지각하게 된다. 일찍이 이어령 교수는 ‘침묵 속에 내리는 눈발은 우리에게 탄생 이전과 죽음 이후에 그 [無]의 세계, 비존재의 세계를 눈짓한다’고 어느 글에서 말했듯이 눈이 나비가 될 때 우리는 무의 세계를 방황하는 우리 인간들의 애절한 모습들이 형상화하고 있음을 엿보게 한다. 이병일 시인은 ‘옷을 벗고 찬바람에 떨고 있는 / 겨울나무들 마른 몸 일으켜 / 늦가을 비에 젖은 옷 벗어 햇볕에 말리고 / 포근한 이불로 고친다 / 여름 내내 그 그늘에서 놀던 생명들을 덮어 / 따뜻한 사랑으로 보듬어 재운다 / 가려운 곳 긁어 주던 친구들과 / 살을 파먹고 피를 빨던 악동 가리지 않고 / 자신의 깃을 뽑아 보시하는 나무들(「겨울 숲에서」 중에서)’라거나 ‘싸늘한 달빛 등에 업고 / 먹이 찾아 구만리 날아온 / 쇠기러기, 청둥오리 무리 / 얼마나 시장할까 / 허기져 호숫가 갈대밭에 / 모여 웅크리고 있구나(「겨울 호수」 중에서)라는 등의 어조와 같이 그는 오감(五感)을 모두 동원해서 이미지를 투영하는 특성을 예감하게 한다. 이 밖에도 그는 자연경관 중에서도 꽃에 관한 서정적 시각을 멈추지 못하는데 살펴보면 대체로 다음과 같이 현현되고 있다. -<민들레 꽃> 누가 꺼져가는 불씨를 / 입으로 불어 살려 놓았는가 / 아직 다 녹지 않은 들 판 여기저기에서 / 노오랗게 타오르는 불꽃 -<흰 영산홍> 님을 유혹하던 살결은 / 하얗게 탈색되어 수심 가득하고 / 얼굴 적신 물방울 / 빗물인지 눈물인지 모르겠다 -<질경이>나는 자갈 박힌 신작로에 누워 / 바람과 비와 햇볕 속에 원망을 묻고 / 시간에 불 구하고 존재한다 -<해바라기>해거름에 하고 싶은 놀이 많은 아이들 / 울 밑에 모여 앉아 긴 날을 소망하듯 / 못 이룰 기도에 힘을 쏟지만 / 개화 못하고 스러질 삶이 안타깝다 -<둥굴레꽃> 왜일까? / 기다리는 임이 아니 와서 인가 / 들어야 할 임이 없어서 인가 / 도 무지 연주할 기미가 없다 -<백목련>환하게 하얗게 웃어 / 중생의 가슴속을 씻어 내고 / 흰 도화지 한 장씩을 깔아 준 다 / 이 봄에는 / 무엇이든 그릴 수 있도록 그는 이처럼 꽃에 대한 사유는 ‘꽃이 시들어 버리면 그냥 내버리는 사람이 많다. 그러나 우주를 사색하는 삶은 꽃이 시들 떼 비로소 꽃의 아름다움을 본다’는 이어령 교수의 말이 정감으로 다가오지만 ‘짧은 생으로 / 세상이 짠지 매운지 간만 보고 / 속절없이 가는 봄꽃들 / 몇 날 동안 보는 사람 / 가슴 저리게 하고는 / 태워 날리는 소지처럼 / 허망하게 흩어지는구나(「꽃이 지는구나」 중에서)’라는 봄꽃의 애환은 바로 ‘허망’이라는 우리 민요의 화무십일홍(花無十日紅)을 연상하게 하여 주목하게 된다. 그러나 우리 시인들의 서정적 자연 친화의 작품들은 꽃에 관한 정서를 그냥 시들게 버려두지 않는 습성이 확고하게 자리 잡고 있음을 간파(看破)할 수 있는 것이다. 5. 結語-생명, 영혼 그 서정적 자아 이병일 시집 『군불』 읽기를 마무리한다. 대체로 그는 나를 인식하면서 존재에 대한 성찰이 그의 뇌리에 충만해 있으며 이를 통해서 삶과 죽음이라는 생명에의 외경이 그의 사유 전체에서 의식의 흐름을 이해할 수 있으며 또한 이러한 존재와 생명의 간극에서 생성하는 그의 중요한 한 시점(視點)의 요체(要諦)인 영혼과의 교감이 그가 지향하는 인생관 또는 가치관의 정립이 되고 있음을 간과(看過)할 수 없을 것이다. 아마도 이러한 사유의 발현과 시창작을 통해서 탐구하면서 화해하고 해소하려는 그의 욕구는 그가 입원 재활치료 했던 다사랑 중앙병원에서 절절한 인생적인 고뇌를 체험하고 사찰에서 명상을 통해서 순환된 사유의 결정(結晶)이 오늘을 있게 한 것이 아닌가 생각되기도 한다. 그는 한편으로는 서정적 자아의 탐색을 위해서 자연의 섭리를 순응하는 계절적인 이미지를 다양하게 응시하면서 작품을 창작하는 좋은 사유의 원류를 읽을 수 있어서 앞으로 이병일 시학을 정리하는 절대적인 계기가 될 것으로 확신하게 된다. 그러나 불란서 시인 볼테르의 말대로 시는 영혼의 음악이다. 보다 더 위대하고 다감(多感)한 영혼들의 음악이라는 언지를 깊이 새겨야 한다. 또한 보들레르도 기쁨이든 슬픔이든 시는 항상 그 자체 속에서 이상을 좇는 신과 같은 성격을 가지고 있다는 말처럼 일상적인 정서에서 발흥하는 희비(喜悲)의 이미지들이 명시(名詩)의 대좌(臺座)에서 우리들을 맞이하게 될 것이다. 시집 출간을 진심으로 축하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