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동 체화정은 예안 이씨 체화정 문중에서 관리하는 조선시대의 별서 정원으로, 체화정 등이 자리한 일대는 낙동간의 지류인 풍산천이 복동에서 남서로 흘러내려가, 낙동강으로 합류하면서 풍산들이 넓게 펼쳐지는 지점에 자리잡아, 계곡이 시작하는 초입의 서쪽에 동향으로 세워졌으며, 모퉁이를 돌아 체화정 뒷산의 남쪽 기슭으로는 풍산읍이 자리하고 있다.
예안 이씨는 전의 이씨에서 분적한 집안으로, 실질적으로 예안 이씨가 풍산 일대에 세거하게 되는 것은 15세 사직공 李弼幹(안동파의 파시조)의 맏아들 생진공 이영(李英)이 기묘사화 후 낙향하여 동생들인 참봉공 이전(李筌, 1486-1529), 생원공 이훈(李薰)과 함께 풍산으로 이거하여, 각각 백파, 중파, 계파의 입향조가 된다. 이후 이들 삼형제의 자손은 상리와 하리 일대에 세거하며 많은 학자와 인물을 배출하였다. 이 가운데 체화당과 관련이 깊은 중파 이전(李筌)의 차남 이홍인(李洪仁, 1525-1594)은 임진왜란때 순국한 충신으로 충효당파의 시조가 되었고, 이후 이홍인의 7세손인 이민적(李敏迪, 1702-1763)에 이르러 형인 이민정과의 우애를 위해 지은 것으로, 이민정의 아들인 이한오(李漢俉, 1719-1793)는 이곳에서 노부모를 극진히 모셔 효자로 널리 알려졌다.
체화정은 임진왜란 때의 충신이자 충효당의 당주인 이홍인의 7세손 만포 이민적이 1761년 지은 것으로, 그 건립의 시기와 내용이 「체화정기」와 「체화정중건기」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체화정기」의 간기는 ‘上之三十七辛巳十月’으로 되어 있는데, 이는 영조 37년 신사년, 즉 1761년에 해당한다. 또, 「체화정 중건기」는 辛亥年 閏五月
上旬에 후손 이회춘이 쓴 것으로, 1971년으로 보이며, 「체화정 중수기」의 경우, 檀紀四三三三年 庚辰仲秋 즉 2000년에 기록된 것으로, 1999년 6월부터 11월에 걸쳐 행해진 서까래 이상 지붕부의 해체수리의 공사를 가리키는 것으로 보이는데, 1971년의 중건기는 重建이라는 단어를 사용하고 있으므로, 공사 규모를 짐작해보면, 「중건기」에 따르면, 체화정은 선조인 이민적이 지은 것으로, 200년의 세월 동안 유지되어왔으나 근래 황폐하게 되어 시집간 딸들이 돈을 모으고 8대손인 李明植에게 일을 맡겨 辛亥(1971)년 4월 공사를 시작하여, ‘기울어진 것은 괴고 이지러진 것은 보수하고 기와를 바꾸고 벽을 단장하여 그 完美함을 회복’하였다고 적고 있다.
체화정에는 두 개의 편액이 있는데, ‘체화정’은 류정원(柳正源, 1703-1761)의 글씨로, 류정원은 영조대 안동 출신의 대학자로 벼슬이 대사간에 이르렀다. ‘담락재’는 단원 김홍도의 글씨로 1786년(丙午 夏)에 쓴 것이다. 김홍도는 40세가 되던 1784년에 안동의 안기역 찰방이 되어 2년 5개월간 근무하였는데, 이 편액은 김홍도가 안동에 머무는 동안 쓴 것으로 보인다. 棣華라는 이름은 『시경』 「小雅」‘常棣’에 나오는 ‘常棣之華 鄂不韡韡 凡今之人 莫如
兄弟’에서 따온 것으로, 산앵두나무의 꽃(棣華)처럼 아름다운 형제간의 우애를 상징하는 뜻으로 지은 것이다. 이민적이 그의 형 이민정과의 우애로운 생활을 위해 지은 정자의 이름에 어울린다. 또 湛樂이라는 이름 역시 『시경』에도 등장하는 말로, 현제간의 우애를 표현하는 어귀로 주로 사용된다.
전술한 李象辰의 「체화정기」에 따르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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且惠叔之伯氏。嗜客而好羣居。有孟公投轄之風焉。自夫惠叔之搆是亭。伯氏甚宜之。風朝月夕。未嘗不在於是亭。而客未嘗不隨。
이혜숙(이민적을 가리키는 것으로 추정함)의 백형(이민정)이 손님을 좋아하고 벗을 좋아하여 손님을 만류하는 습성이 있는데, 이헤숙이 이 정자를 세우자 백형이 매우 좋아하여 아침저녁으로 정자에 거처하고 빈객도 찾아온다.
使是亭而置之嵁巖窈泉之間。選勝則有餘。而朋舊過從。必不如今者之數。伯氏之心。悒悒焉亦不肯朝夕矣。其於名亭之義。
만약 이 정자가궁벽한 산골에 있다면 경치 선택은 딜 것이나 친붕들의 모임이 반드시 오늘과 같지 않을 것이며, 백형의 마음도 쾌하지 못하여 조석으로 와 있지 않을 것이니, 정자 이름(체화)의 뜻에 어긋나지 않겠는가?
不以左乎。不寧是也。亭之位直邨之西。疎簷短籬羅列於几席之前者。大抵皆宗人之居。
그뿐 아니라 정자의 자리가 마을(주거지인 풍천강 동편기슭) 서쪽에 있어 성긴 처마와 짧은 울장이 궤석의 앞에 나열했는데, 모두 종인이거처하는 곳이다.
而其初兄弟也。兄弟其初一人也。朝舂暮炊。雨鉏雪鎌之狀。一擧目而可以盡之。則君子仁親之思。其有不藹然而生乎。
종족이 모여 살더라도 처음은 형제에게 비롯된 것이요, 형제도 처음은 한 사람에서 시작된 것이다. 방아 찧고 밥 짓고 추수하는 모습을 한번 눈에 돌려다 볼 수 있다면, 군자가 친족을 사랑하는 생각이 자연히 나오지 않든가?
乃惠叔之所取不在彼而在此。君何知惠叔之淺也。於是疑者乃解。遂幷記其答問之語。以爲棣華亭記。
이혜숙이 취하는 바가 저기에 있지 않고 여기에 있으니, 그대가 어찌 이혜숙을 이리 천박한 자로 아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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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도 체화정은 경승을 좇아 은일자적하기 위해 지은 것이 아니라, 형제, 친우, 빈객, 친족과의 교류와 화합을 위해 지은 공동체 시설이고, 그에 합당한 자리를 택한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체화정은 연지와 관리사 등으로 이루어진 원림으로, 나지막한 산과 암벽을 병풍으로 삼고 정면의 풍산천을 바라보면서 남동향을 하고 있다. 경북지역 누정건축은 강계 연변형, 모정형, 지변형, 상정형으로 분류되는데, 체화정은 예가 가장 적은 지변형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리고 체화정은 풍산천의 물을 끌어와 연지를 조성했으며, 입수부에 우물을 설치하여 우물의 물이 연못으로 흘러들도록 했다. 연지는 장방형으로 1700년대 조성된 것으로 추정되며, ‘체화지(棣華池)’ 혹은 ‘삼층도지(三層島池)’ 라 불린다. 연지 내에는 원형의 섬 3개가 조성되어 있는데, 천원지방설 또는 음양론이 관련되어 상징적인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이 3개의 섬은 삼신산(三神山)인 방장(方丈), 봉래(蓬萊), 영주(瀛洲)를 상징한다. 옛사람들은 삼신산을 생사의 굴레에서 벗어나 원천적인 자유를 누리며 영생하는 신선들의 거처로 믿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