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증: 1106. [역경의 열매] 정운식 (1-10) “후∼ 불면 날아갈듯 ‘메조 밥’ 아직도 못잊어
2002년 9월 27일은 내 생애에서 잊을 수 없는 날 가운데 하나다. 세계관광의 날 ‘관광진흥촉진대회’에서 최고의 영예인 ‘금탑산업훈장’을 받았기 때문이다. 우리나라 여행업계에서는 최초였고, 30여년간 여행업에 종사하면서 이 일로 금탑산업훈장을 받으리라고는 상상도 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생각해보면 이 모든 일이 하나님의 은혜가 아닐 수 없다. 1980년대만 해도 우리나라의 관광산업은 이제 막 유년기를 벗어나 성장기로 접어들던 시기였다. 시장 자체가 작다 보니 한국 여행업계는 전체 산업에서 비중이 작을 수밖에 없었다. 90년대 들어서야 여행자유화와 세계화의 물결 속에 우리 여행산업은 성장의 발판을 마련할 수 있었다. 하나님이 아니셨다면 불모지와 같은 환경 속에서 이만한 성과를 내는 일은 불가능했을 것이다. 또 여행 산업의 발전에 기여할 수 있는 기회도 없었을 것이다. 훈장 수여는 하나님이 내게 주신 축복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해 볼 수 있는 계기가 됐다.
나는 1935년 30여 가구가 모여 살던 작은 마을(경기도 화성군 고천리)에서 4남매 가운데 장남으로 태어났다. 어린 시절부터 밖으로 돌아다니는 것을 좋아해 부모님의 속을 무척이나 태웠다고 한다. 한번은 마을을 벗어나 광교산까지 놀러갔다가 길을 잃어 밤늦게 돌아와 호되게 야단을 맞은 적도 있다. 오봉산 자락 아래 펼쳐진 드넓은 산하에 나의 발끝이 닿지 않은 곳이 없었을 정도였다. 돌이켜보면 지구촌을 제집처럼 헤매고 돌아다니는 버릇이 이때부터 싹텄던 것 같다.
7살까지 우리 집은 공무원 생활을 하시며 농사도 조금 지으셨던 아버지 덕에 다소 넉넉한 형편이었다. 하지만 7살이 되던 해 아버지께서 인천시 옹진군으로 전근을 가게 되면서 고생을 하게 됐다. 옹진에서의 생활은 강조밥을 먹은 기억밖에 없다. 당시 일본이 태평양전쟁을 치르면서 국내의 모든 쌀을 공출해 갔기 때문이다. 메조로 지은 밥은 ‘후∼’하고 불면 다 날아가 버리곤 했다. 1년 후 우리 가족은 다시 화성으로 이사를 왔지만 가세는 점점 기울어져만 갔다. 어머니는 행상을 하시면 집안일을 다 챙기셨고 나는 학교에서 돌아오면 늘 땔나무를 구해오고 텃밭을 가꾸며 시간을 보내야 했다.
초등학교 시절엔 자손이 없었던 큰아버지 댁에 양자로 들어가 큰어머니와 친어머니를 함께 모시게 됐다. 큰어머니는 우리 집안에서 가장 엄한 어른이셨지만, 내게 친자식 이상의 사랑을 베푸셨다. 때론 친어머니보다 더 매섭게 매를 드시기도 했지만, 먹을 것이 귀했던 시절 항상 내게 더 많은 것을 챙겨주시기도 했다. 아마도 나는 두 어머니의 넘치는 사랑과 관심 덕에 더 밝게 성장할 수 있었던 것 같다.
초등학교 입학 때부터 고등학교 졸업식까지 나는 아버지의 보살핌을 제대로 받지 못했다. 늘 바쁘셨던 데다가 설상가상으로 한국전쟁 때 세상을 떠나셨다. 결국 대학은 자력으로 마쳤고 지금의 내가 되기까지 모든 과정은 순탄치 않았다. 하지만 나는 지금까지 단 한순간도 아버지를 원망한 적이 없다. 비록 아버지로부터 돈이나 유산 등 물질적 도움을 받지는 못했지만 도전적인 사업가로서 일생을 살아올 수 있는 정신과 의지를 물려받았기 때문이다. 이것이 아버지로부터 받은 가장 큰 유산이었다.
정리=최승욱 기자 applesu@kmib.co.kr
* [역경의 열매] 정운식 (1) "후∼ 불면 날아갈듯 '메조 밥' 아직도 못잊어
* [역경의 열매] 정운식 (2) 누나 잃은 슬픔에 전쟁까지 발발… 피난 행렬에
* [역경의 열매] 정운식 (3) 난생 처음 타보는 비행기… 잠까지 설치며 들떠
* [역경의 열매] 정운식 (4) 여행업계서 배운 발권업무 선교사 돕는데 큰 자산
* [역경의 열매] 정운식 (5) '반도호텔 220호실'… 서울항공, 작지만 믿음의 飛翔
* [역경의 열매] 정운식 (6) 서울항공의 소명 "지구촌 선교사들의 날개 돼라"
* [역경의 열매] 정운식 (7) "청년들아, 세계를 만끽하라" 유레일패스 첫 도입
* [역경의 열매] 정운식 (8) '신군부 압박' 등 한국 여행산업의 모든 것 체험
* [역경의 열매] 정운식 (9) 교회 출석 43년만의 세례… '성지순례'로 보답
* [역경의 열매] 정운식 (10·끝) 내 인생 최고의 성공은 '예수 영접'과 '이웃 섬김
◇약력 △1935년 경기도 화성 출생 △1957년 용문고등학교 졸업 △1961년 중앙대 영어영문학과 졸업 △1971년 서울항공여행사 설립 △1976년 한국항공운송대리점협회 회장 △2002년 제29회 세계관광의날 금탑산업훈장 수상 △2004년 한국문화관광정책연구원 이사 △현 서울항공여행사 회장
***[역경의 열매] 정운식 (2) 누나 잃은 슬픔에 전쟁까지 발발… 피난 행렬에
해방 후 우리나라는 보이지 않는 38선이 그어져 남과 북이 갈라진 나라가 됐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남과 북이 서로를 향해 총구를 겨누는 한국전쟁이 발발했다. 이 시기는 우리 가족에게도 비극의 세월이었다.
해방 직후인 1946년 여름, 나보다 11살 위였던 작은누님은 갓 돌이 지난 아이를 등에 업고 월남했다. 태평양전쟁이 한창이던 1943년 작은매형이 평안북도 선천으로 전근을 가게 돼 그곳에서 신혼살림을 꾸렸기 때문이다. 하지만 신혼은 오래가지 않았다. 해방 후 어느 날 작은매형은 집을 나간 뒤 돌아오지 못했다.
고향으로 돌아온 작은누님은 큰매형의 주선으로 방직공장에 취직해 점차 안정을 찾는 듯했다. 갓난아기는 외가에서 무럭무럭 자랐다. 이때부터 작은누님은 아기의 생활비는 물론 나의 학비까지 꼬박꼬박 보내왔고, 덕분에 나와 어머니는 학비 걱정에서 조금이나마 벗어날 수 있었다. 작은누님은 공장에서 힘든 시간을 보냈지만, 중학교에 다니는 나를 늘 자랑스럽게 여겼다.
어머니는 혼자 사는 딸이 측은했는지 틈만 나면 재혼을 권했다. 하지만 누님이 택한 길은 ‘한 많은 세상을 하직하고 남편에게 돌아가는 것’이었다. 전쟁으로 폐허가 된 고향은 버틸 만했지만, 누님이 떠난 고향에서는 더 이상 살기 힘들었다. 결국 나는 작은누님의 빈자리를 극복하지 못하고 고향을 떠나게 됐다.
작은누님을 여읜 슬픔이 채 아물기도 전 한국전쟁이 발발했다. 내가 기억하는 1950년 6월은 매우 무덥고 가뭄이 심했다. 늘 지나며 보던 화성이 폭음과 함께 화염에 휩싸였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하다. 포성이 온 동네를 뒤흔드는 가운데 남쪽으로 향하는 피난 행렬이 줄을 이었다. 전쟁이 끝나자마자 나는 서울로 올라왔다.
1953년 가을 상경했지만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무것도 없었다. 결국 수소문 끝에 초등학교 6학년 담임이었던 권성하 선생님을 찾아 무작정 성북동으로 갔다. 권 선생님은 초등학교 시절부터 나에게 격려와 위로를 아끼지 않으셨던 분이다. 돌이켜보면 권 선생님을 만난 것은 나의 유년기에 하나님께서 주신 가장 큰 축복 가운데 하나였다. 권 선생님이 아니었다면 지금의 나는 없었을 것이다.
권 선생님은 한국전쟁 때 교편을 놓으시고 상경해 한국전력에서 일하고 계셨다. 선생님은 홀로 상경한 나를 흔쾌히 받아주시고, 서울 용문고등학교 야간반에 입학할 수 있도록 도와주셨다. 당시 단칸방에서 네 아이들과 함께 생활하셨던 선생님이셨기에 선생님의 사랑과 배려가 지금도 눈물겹도록 감사하다.
용문고 시절은 나의 청소년기 가운데 가장 행복했던 시기였다. 비록 야간반이었지만 우수한 친구들과 함께 공부할 수 있었고, 반장도 하고 학도호국단 운영위원장 등으로 일하며 리더십도 키울 수 있었다. 특히 글쓰기 훈련과 영어 교육을 받을 수 있었던 것은 고교 시절에서 가장 감사한 부분이다. 글쓰기에 대한 관심과 훈련 덕에 나는 대학에서 영문학을 전공할 수 있었고, 미국 대외 원조 기관인 USOM에서 장학금을 받아 미국 농무성 부설 대학원에서 1년간 작문법을 배울 수 있었다. 또 지인의 소개로 경찰전문학교에서 일할 수 있는 기회를 얻었다. 나는 낮시간에 일하던 경찰전문학문학교에서 영문 서류를 정리하고 번역 등을 도우면서 이후 나의 사업에서 큰 자산이 된 영어와 친숙해질 수 있었다.
당시 나는 교회는 다니지 않았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권 선생님을 만난 것도, 용문고에 진학한 것도, 경찰전문학교에서 일하게 된 것도 모두 지금의 나를 만드시기 위한 하나님의 위대한 계획이었던 것 같다.
***[역경의 열매] 정운식 (3) 난생 처음 타보는 비행기… 잠까지 설치며 들떠
1958년 낮시간에 일하던 경찰전문학교가 인천 부평으로 이전하게 되면서 나는 일을 그만두게 됐다. 서울에서 학교를 다녀야 했기 때문에 부평까지 출퇴근할 수 없었다.
학창시절부터 나는 외교관이 되는 것을 꿈꿨지만 생활비와 학비를 스스로 마련해야 하는 현실은 꿈을 이루기에는 너무나 큰 장애물이었다. 당장 살기 위해서는 직장이 필요했고, 조금이나마 더 나은 삶을 준비하기 위해 학비를 벌어야 했다.
당시 나는 서울의 모 대학 영문과 2년을 마치고 중앙대학교 영문과에 편입해 졸업했다. 대학생 시절 나는 학문에 대한 열정이 강해 주위에는 내가 교육자의 길을 걸을 것으로 예상하는 이들이 많았다. 하지만 미국무성 산하 해외경제협조처(USOM 혹은 USAID)에 취직하게 되면서 나는 서서히 여행업계로 다가가게 됐다. USOM에서 맡은 일이 인사처 내 여행과에서 해외 출장을 담당하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USOM은 한국전쟁으로 폐허가 된 우리나라에 경제 원조를 해주기 위해 만들어진 미국무성 산하기관이다. 내가 근무하던 여행과에는 6∼7명의 직원이 함께 일했는데, 나는 출장명령서 발급과 해외에서 이·취임하는 외국인을 비행장에서 영접하는 일을 했다.
입사 2년차인 1959년에는 태어나 처음으로 군용비행기를 타고 전남 광주로 출장을 가게 됐다. 꿈에 그리던 비행기 탑승에 들떠 전날 밤엔 뜬눈으로 보내기도 했다. 불과 한 시간여의 짧은 비행이었지만 나는 이때 내 인생의 과거와 현재를 한번에 조망하며 미래를 설계했던 것 같다. 이후 나는 여행과에서 우리나라를 오가는 모든 항공사와 거래하며 여행업계 진출의 발판을 닦게 됐다.
USOM에서 얻은 또 다른 기회는 대학원 수업이었다. 바쁜 직장생활을 하면서도 배움에 대한 갈망을 놓지 않고 있었다. 직장에서도 틈만 나면 외국인 직원들과 영어로 대화를 나누며 영어 실력을 키우고자 노력했다. 이를 눈여겨 본 상사의 추천으로 미농무성 부설 대학원에 다닐 수 있게 됐던 것이다. 학비는 USOM에서 지원받았다. 대학원에서 나는 1년간 작문법을 배울 수 있었다. USOM과 대학원에서 배운 영어 실력은 이후 여행업계에서 일하는 데 매우 큰 자산이 됐다.
USOM 시절 받은 또 하나의 축복은 1959년 아내 김경희를 만난 일이다. 처음 만났을 때 아내는 경기도 화성군의 송산초등학교에서 교사로 일하고 있었다. 당시 우리나라에는 이렇다할 식당이나 카페가 없었는데, 내가 일하던 USOM에는 커피나 도넛, 초콜릿 등 간식류와 간단한 양식을 판매하는 카페테리아가 있었다. 그래서 우리 부부는 연애 시절 자연스럽게 이곳에서 데이트를 즐기기도 했다. 직장 덕에 생계뿐 아니라 아내에게 점수도 딸 수 있었다.
아내의 가족은 독실한 감리교 집안이었다. 장모님은 여성 장로였는데, 당시 우리나라에서는 첫 여성 장로라는 이야기를 들었다. 우리는 만난 지 1년여 만에 결혼을 해 새로운 가정을 꾸렸다. 나의 권고로 교직생활을 정리한 아내는 미장원을 개업해 가계를 도왔다. 아내의 충실한 내조로 우리 가정은 차츰 자리를 잡아갔다.
나는 1960년 결혼한 이후 끊임없이 아내의 전도를 받았지만 바쁜 일상에 교회에 나갈 생각은 하지 못했다. 하지만 아내가 삶으로 보여 준 그리스도인의 모습과 기도 덕분에 나는 결혼 4년 만에 서울 이수성결교회에 다니기 시작했다. 아마도 하나님께서 독실한 기독교 가정의 장녀를 만나게 하지 않으셨다면 나는 신앙의 길을 걷지 못했을 것이다.
***[역경의 열매] 정운식 (4) 여행업계서 배운 발권업무 선교사 돕는데 큰 자산
미국무성 해외경제협조처(USOM)의 여행과장 직책은 항공사 입장에서는 막강한 권력을 가진 자리였다. 해외여행이 거의 불가능했던 1960년대 수천명의 미국인과 한국인 직원의 해외여행 항공권을 구매하는 직책이었기 때문이다.
당시 미국은 미국 정부가 구입하는 모든 물자를 자국 국적 회사에서만 구입하도록 하는 ‘바이 아메리카(Buy America)’ 정책을 시행 중이어서 여행과장이었던 나는 팬 아메리칸(Pan American) 항공이나 노스웨스트(Northwest) 항공의 항공권만 구입해야 했다. 자연스럽게 쌓게 된 항공사 관계자들과의 인연은 결국 나를 여행업계에 발을 들여놓게 만들었다.
USOM에서 근무하던 어느 날, 노스웨스트 한국 총대리점 샵항공의 백종근 사장이 사무실이 있는 서울 반도호텔의 카페로 나를 불렀다. 백 사장은 “미스터 정, 나와 함께 일해보지 않겠습니까”라고 물었다. 외교관의 꿈을 접은 뒤, 세계를 누비며 사업을 펼치는 새로운 꿈을 꾸던 나였기에 망설일 이유가 없었다. 그 자리에서 백 사장의 제안을 ‘감사하다’는 인사로 수락했다.
내게 새로운 기회를 주었던 USOM을 떠나는 일은 감정적으로 쉽지 않았다. 하지만 새로운 내일을 위해 나는 한 달 동안 그간의 업무를 정리하고 사표를 제출했다. 그리고 3번째 직장인 샵항공에서 여행업계의 첫걸음을 뗐다.
막상 여행업계에 들어와 보니 핵심은 항공업무라는 사실을 곧 깨닫게 됐다. 이를 위해 나는 샵항공에서 발권업무를 체계적으로 배우는 데 주력했다. 발권업무 교육을 위해 네덜란드 헤이그의 KLM본사를 찾았을 정도로 나는 발권업무 습득에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그리고 이때 배운 발권업무는 이후 선교사들과 선교사 가정의 여행을 돕는 데 귀중한 자산으로 활용됐다.
USOM에서 첫 비행기 탑승이라는 소중한 경험을 했다면, 샵항공에서는 생애 첫 해외여행이라는 잊을 수 없는 경험을 했다. 1964년 대만 국적기인 CAT(Civil Air Transport)가 새 기종을 한국노선에 투입하면서 우리나라 여행업계 관계자를 초청했다. 첫 해외여행지인 대만까지 나를 태워 준 비행기는 4개의 터보제트 엔진을 단 대형 비행기였다.
첫 비행에서는 온갖 생각이 다 들었다. “난기류에 접어들어 기내가 흔들릴 수 있다”는 기장의 안내방송에 덜컥 겁이 났던 것이다. 사고를 대비해 가입한 보험금을 계산하며 이제 4살, 2살 된 아이들이 성인이 될 때까지 교육을 무사히 마칠 수 있는지, 노모와 아내가 극심한 상처 속에 살게 되지는 않을지 등등의 생각들이 첫 비행 내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흥분과 기대감, 그리고 극심한 불안이 공존했던 첫 해외여행은 하나님의 보호 아래 무사히 마칠 수 있었다. 지금 돌이켜보면 그때 왜 그렇게 걱정하고 불안해했는지 웃음만 난다. 하나님을 믿으니 하나님께서는 감당하지 못할 시험을 주시지 않을 것이고, 또 시험이 온다 해도 하나님을 믿으면 다 이겨낼 수 있다는 사실을, 믿음이 약했던 당시의 나로서는 쉽게 떠올리지 못했던 것 같다.
60여년 전의 첫 해외여행 이후, 나는 비행거리로만 따지면 지구를 백 바퀴도 넘게 돌았던 것 같다. 여행업계에 처음 발을 들여놓았을 때, ‘세계를 누비며 많은 일을 하고 싶다’는 나의 꿈이 이렇게 이루어 질 것이라고는 상상하지 못했다. 지금 와서 과거의 수많은 사건을 떠올려보면 하나님은 늘 내가 상상하지 못했던 방법으로 내 마음의 소원들을 이루어 주셨다.
***[역경의 열매] 정운식 (5) ‘반도호텔 220호실’… 서울항공, 작지만 믿음의 飛翔
야곱은 사랑하는 라헬을 얻기 위해 14년간 삼촌 라반 밑에서 봉사했다. 야곱은 14년간 사랑하는 아내뿐 아니라 홀로 설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할 수 있었다. 하나님은 내게는 딱 절반의 시간 안에 자립할 수 있도록 해 주셨다.
1971년은 내가 노스웨스트 항공 총대리점인 샵항공에서 일한 지 꼭 7년이 되던 해였다. 당시 나는 회원 항공사의 매표 업무와 영업 총괄을 책임지고 있었다. 지난날 미국무성 해외경제협조처(USOM)에서 익힌 실무 영어가 영업을 하는 데 여간 유용하게 사용되는 것이 아니었다.
샵항공에 입사할 때만 해도 우리나라 여행사는 6∼7개에 불과했다. 하지만 몇 년 만에 20여개 업체가 더 늘어나 업체 간 경쟁은 치열해졌다. 더불어 스카우트 전쟁도 시작됐다. 내게도 몇 차례 제안이 있었고, 그중에는 대표이사 자리를 제안한 업체도 있었다. 하지만 여행업계에서 나를 받아주고 키워 준 샵항공을 떠날 수는 없었다.
다행히 당시 노스웨스트 총대리점과 국제항공수송협회(IATA) 회원 항공사의 매표 업무가 분리되면서 샵항공의 백종근 사장은 내가 총괄 관리하던 IATA 항공 대리점 업무를 떼어 내 독립시켜줬다. 그렇게 해서 ㈜서울항공여행사가 탄생했다.
창업과정은 순탄하지만은 않았다. USOM과 샵항공에서 받은 월급으로 집은 한 채 마련할 수 있었지만 창업자금까지 모을 여유는 없었다. 게다가 주식회사로 법인을 설립하기 위해서는 자본금이 500만원이 필요했다. 지금이야 500만원이 큰돈이 아닐 수 있지만, 당시로서는 쉽게 만져볼 수 없는 큰돈이었다.
그러나 기회를 놓칠 수는 없었다. 주위의 인맥을 총동원했다. 한 사람 한 사람을 찾아가 여행업계와 항공산업의 미래에 대해 설명하고 투자를 권유했다. 쉽지 않은 결정이었지만 대학교 은사이신 최민홍 박사와 ㈜새한칼라 김종양 사장, ㈜서울교통 이현국 사장 등이 투자를 결정해 주었다. 하나님의 은혜와 이분들의 도움이 없었다면 서울항공은 세상에 등장하지 못했을 것이다.
서울항공이 시작된 곳은 서울 반도호텔 220호실이었다. 132㎡(40평) 규모의 사무실에서 11명의 직원과 함께 첫 영업을 시작했다. 창업 이후 나는 밤낮을 가리지 않고 일했다. 친절한 서비스, 신속한 서비스, 정확한 서비스를 서울항공의 행동강령으로 삼았다. 대표이사라며 거드름을 피우기 전에 외국인 여행객들의 항공권을 직접 발권하고, 거래처를 찾아다니며 영업을 했다. 그 결과 서울항공은 빠르게 자리를 잡아갈 수 있었다.
하지만 열심만으로는 서울항공을 특별한 회사로 만들 수 없었다. 아이디어가 필요했는데, 하나님은 어려움에 처해 기도할 때마다 좋은 아이디어를 주셨다. 당시 네덜란드의 선교단체가 운영하는 RAPTIM이라는 법인이 네덜란드 항공사인 KLM과 계약을 맺어 선교사를 위한 특별요금을 제공하고 있었는데 이를 수소문 끝에 알게 됐다. 미국은 노스웨스트의 특별요금을 이용했다. 덕분에 한국을 찾는 선교사들은 서울항공을 통해 비교적 저렴한 가격에 미국과 유럽을 오갈 수 있었다.
창업 당시에는 미처 깨닫지 못했지만 서울항공은 이후 한국을 찾는 선교사들의 발이 되었고, 국내 여행업계로는 최초로 성지순례 크루즈를 시작해 부흥회와 예배 등 다양한 프로그램이 동반된 성지순례 코스를 개발하기도 했다. 돌이켜보면 하나님께서는 단순히 나의 부와 명예를 위해 서울항공을 세우신 것이 아니라 선교사들과 성도들을 섬기도록 이 회사를 세우셨음을 지금에 와서야 깨닫게 된다.
***[역경의 열매] 정운식 (6) 서울항공의 소명 “지구촌 선교사들의 날개 돼라”
서울항공은 창업부터 항공 업무에 특화된 회사이기도 했지만, 선교사 시장에 특화된 여행사이기도 하다. 회사가 선교사들을 섬길 수 있는 기회를 얻기도 했지만, 어쩌면 한국 복음화를 위해 이 땅을 찾은 선교사들이 서울항공을 키워줬다고도 말할 수 있다.
당시 한국에는 많은 선교사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기 위해 서울을 비롯 전국 방방곡곡에서 활동하고 있었다. 가톨릭 계통으로는 메리놀 신부회와 수녀회, 콜롬반 신부회와 수녀회가 각각 활동했다. 개신교에서는 장로교와 감리교, 침례교 등 다수의 선교회가 전국에서 선교활동에 전념하고 있었다.
우리나라가 유례없이 빠른 속도로 복음화되고 교회가 성장했을 뿐 아니라, 전 세계에 선교사를 파송할 수 있게 된 것은 한국전쟁 이후 수많은 선교사들이 뿌린 눈물과 땀의 씨앗들 덕분임을 누구나 알고 있다. 수많은 선교사가 한국을 찾았고 또 한국을 떠났기 때문에 서울항공은 이들의 발이 되기 위해 동분서주했다. 수소문 끝에 네덜란드 항공사 KLM이 선교사를 위해 제공하는 특별요금을 발견, 한국에서 제공한 것을 시작으로 여러 항공사의 선교사 특별요금을 찾아다녔다. 그리고 각 선교회와의 인연을 유지하게 위해 부단히 노력했다.
그렇게 바쁜 나날을 보내던 중, 하루는 신부복을 입은 고객 한 분이 직원과 이야기를 나누다가 화가 난 얼굴로 회사를 나가는 모습을 우연히 보게 됐다. 나는 직감적으로 무언가 잘못됐다는 것을 깨닫고 무조건 따라 나섰다. 하지만 이미 그분은 엘리베이터를 타고 1층으로 내려간 뒤였다. 허겁지겁 계단을 통해 1층 현관 밖으로 뛰어 나가 무조건 사과부터 했다. 이 고객은 콜롬반 신부회의 재무담당 신부였는데 직원의 실수로 예약이 잘못된 것 같았다. 회사의 큰 거래선이 떨어져 나갈 위기에 처했던 것이다. 사건 당일 신부의 마음을 돌리지 못해 몇 차례나 다시 찾아가 용서를 구한 끝에 콜롬반 신부회의 여행 업무를 계속 이어갈 수 있었다.
선교사들의 여행 업무를 도우면서 귀중한 사람들도 많이 만났다. 그 가운데 한 분이 침례교 선교회 대표였던 보즈만 목사다. 언젠가 나는 심한 몸살이 나서 집에서 쉬고 있는데 뜻하지 않게 보즈만 목사가 문병을 와 기도를 해 주었다. 보즈만 목사는 유창한 우리말로 “정 집사님, 빨리 쾌유하시기를 하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며 위로와 격려를 전했다. 선교단체의 대표인 외국인 목회자가 여행사 사장을 직접 찾아와 기도해 주었다는 사실에 나는 큰 감동을 받았다.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어떻게 전하며 살아가야 하는지 나는 보즈만 목사의 방문과 기도를 통해 깨달을 수 있었다.
메리놀 신부회의 재무담당 오닐 신부와는 의형제를 맺기도 했다. 오닐 신부는 한국어를 조금 했지만, 우리는 늘 영어로 대화했다. 오닐 신부는 내가 영어 발음을 실수한 것을 가지고 10년 가까이 농담을 할 정도로 가깝게 지냈다. 때로는 형처럼, 때로는 성직자처럼 나에게 위로와 깨달음을 준 오닐 신부가 나는 늘 그립다.
국내에 들어온 선교사들의 여행 업무를 도맡아 하면서 서울항공은 한국 여행업계에서 착실히 기반을 다져나갔다. 한편으로는 주한 외국계 회사들과 외국인 투자기업들로도 거래선을 확대해 새로운 시장을 개척하기 위해 고군분투했다. 늘 그렇듯 하나님은 내게 도전할 과제와 섬겨야 할 대상을 동시에 주셨다. 일을 할 당시에는 하나님의 계획을 알 수 없었지만, 돌이켜보면 지금의 나를 만들고 사용하시기 위해 항상 좋은 사람들을 붙여 주셨던 것 같다.
***[역경의 열매] 정운식 (7) “청년들아, 세계를 만끽하라” 유레일패스 첫 도입
1978년은 여행업계 종사자에게는 잊을 수 없는 해다. 그해 11월 라디오 뉴스를 듣다가 나는 내 귀를 의심했다. 귀에 익은 아나운서의 목소리에서 낯선 뉴스가 흘러나왔기 때문이다.
뉴스에 따르면 이날 오전 미국 로스앤젤레스를 떠나 김포공항으로 돌아온 여객기에서 100만번째 외국 여행객이 국내에 입국했다고 한다. 이 100만번째 입국객은 미국 캘리포니아 세크라멘토시의 한 선교단체 소속 여성 관광객이었다고 한다.
우리나라 관광여행업계로서는 역사적인 순간이었다. 우리나라는 당시 100만명의 관광객을 유치한 39번째 나라였으며 아시아 지역에서는 홍콩과 태국, 말레이시아, 싱가포르, 대만과 일본에 이어 7번째였다. 이후 여행산업은 성장세를 이어가 1988년 200만명, 1991년 300만명, 1998년 400만명, 2000년 500만명을 돌파했다. 정부도 이때부터 관광산업 육성에 힘을 쏟기 시작했다. 개정된 관광진흥법은 여행업을 허가제에서 등록제로 변경해 진입장벽을 낮추었다. 박정희 대통령은 관광산업이 청정 산업이자 부가가치가 높은 산업임을 인식해 청와대에 관광담당 특별보좌관을 두고 관광정책을 직접 챙겼다. 경주 보문관광단지와 설악산 관광숙박단지, 제주 중문관광단지 개발이 추진된 것도 이 무렵이었다.
서울항공도 여행산업의 발전과 더불어 중흥기를 맞았다. 이 시기 우리 회사의 도전적 과제는 ‘유레일패스’를 도입한 것이었다. 1970년대는 해외여행 시장이 제한적이어서 여행사 입장에서는 항공권 판매에만 열을 올렸다. 하지만 1980년대 초 해외여행이 단계적으로 자유화되면서 우리 국민들의 여행 패턴도 변화하게 됐다.
나는 이 같은 변화의 물결을 타고 학생 시장을 파고들기로 했다. 이미 서구의 많은 대학생들은 배낭여행이라는 형식의 자유여행을 통해 유럽의 거리들을 누비고 있었고, 우리나라 학생들도 곧 이 대열에 합류할 것이라는 예상에서였다.
해외여행과 외국 경험이 아직 부족했던 당시 우리 대학생들에게는 무엇보다 편리한 여행 방법이 필요했다. 대학생들의 불편을 해소키 위해 나는 1979년 유레일패스를 도입했다. 처음 유레일패스를 들여와 홍보를 시작했을 때 우리 회사는 여행업계에서 비웃음을 샀다. 하지만 나의 예상대로 유레일패스 시장은 급성장했다. 제2, 제3의 배낭여행 시대를 맞으며 유레일패스는 매년 판매율이 급증해 1996년에는 하루 매출액이 15억원에 달하기도 했다.
학생들의 자유여행을 전문으로 취급하는 자회사 ‘에주투어(Edu Tour)’는 이 같은 흐름에 발맞추기 위해 1989년 태어났다. 나는 지금도 에주투어의 설립을 내 일생에서 가장 잘한 일 가운데 하나로 꼽는다. 우리나라의 미래를 책임질 대학생들이 선진국들을 돌아보며 진취적 기상을 품을 수 있도록 하는데 미약하나마 힘을 보탤 수 있었기 때문이다. 에주투어는 설립 이후 유레일패스뿐 아니라 세계 각국의 철도 패스를 국내에서 구입할 수 있도록 도왔고, 수백 차례의 ‘토요배낭여행 설명회’를 개최해 학생들의 여행 공포증을 덜어주었다고 자부한다.
솔직히 말하면 사업이 급성장하던 시기에 나는 신앙생활을 그리 열심히 하지 못했다. 아내의 전도로 1964년부터 신앙생활을 시작했지만, 일년에 절반 가까이를 해외에서 보내던 시절 내게 교회는 가깝고도 먼 존재였다. 내가 하나님이었다면 이렇게 축복했음에도 미지근한 신앙생활을 하는 신도에게 화가 났을 것 같다. 하지만 하나님은 이런 나를 끝까지 버리지 않으시고 내가 미처 깨닫지 못하던 방법으로 사용하셨다.
***[역경의 열매] 정운식 (8) ‘신군부 압박’ 등 한국 여행산업의 모든 것 체험
하나님의 은혜로 나는 우리나라 여행산업의 태동과 성장과정, 절정기를 모두 경험할 수 있었다. 그 가운데에는 감격스런 역사적 장면들도 많았다. 그 가운데 하나가 대한항공(KAL)의 파리 첫 취항이었다.
1975년 미국에서 제작한 최신형 비행기 DC-10기를 타고 파리로 향했다. 대한항공이 파리에 처음 취항하면서 미국산 최신 비행기를 도입했고 첫 비행에 여행산업 관계자들을 초청했기 때문이다. 샵항공에 근무할 때 이미 네덜란드 헤이그이 KLM 본사를 방문한 적이 있기에 첫 유럽방문은 아니었다. 하지만 국적기를 타고 파리를 방문한다는 것은 개인적으로도 큰 영광이었다.
대한항공의 파리 취항은 서울항공에도 큰 기회였다. 유럽 시장을 개척할 수 있는 신호탄이었기 때문이다. 최신형 비행기를 타고 파리로 가는 동안에도 나는 훗날 우리나라 최초로 유레일 패스 한국총판이 될 것이라는 것은 상상하지 못했다.
당시 파리행 비행기에는 고(故) 조중훈 한진그룹 회장과 7∼8명의 여행사 관계자, 다수의 연기자와 시립무용단, 사물놀이팀, 언론인이 동행했다. 비행시간 내내 우리는 희극배우들의 재치 있는 입담과 여러 예술인들의 재주를 보고 들으며 흥겨운 시간을 보냈다. 하지만 비행기 창문으로 파리 오를리(ORLY) 국제공항의 활주로가 보이자 비행기 안은 온통 “대한민국 만세”를 연창하는 소리로 가득했다. 감격에 찬 일부 승객들은 눈물을 흘리기도 했다. 국적기가 파리에 첫 기착한 것이다.
1980년대 초 생명의 위협 속에 맡은 직책을 포기했던 일도 있었다. 당시 신군부가 집권하면서 언론통폐합과 함께 여행업 통폐합도 실시됐다. 당시 나는 한국항공운송대리점협회 회장직을 연임 중이었는데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국보위)의 호출을 받고 삼청동 사무실에 불려갔다.
지금 생각해도 손발이 떨리는 일이었다. 옆구리에 권총을 찬 국보위 소속 중령은 내게 한국항공운송대리점협회 회장직을 포기한다는 내용의 각서를 쓰게 했다. 당시 여행업계에는 국내여행을 담당하는 국제여행알선업협회와 해외여행을 맡은 한국항공운송대리점협회가 각각의 역할을 맡고 있었는데, 신군부는 두 협회를 폐지하고 한국관광협회 안에 새로운 위원회로 통합시키려 했기 때문이다. 포기각서를 쓰고 나오는 길에 나는 속으로 많은 눈물을 흘려야 했다. 이제 막 한국 여행산업이 성장하려는 시점인데 내게 주어진 사명을 강제로 빼앗긴 것 같아 참으로 서러웠다. 하지만 미래를 기약하며 삼청동을 터벅터벅 걸어나올 수밖에 없었다.
1988년 대한민국 제2의 민간 항공사 아시아나항공이 창립된 것도 여행업계 종사자에게는 남다른 감격이었다. 1970년대부터 세계를 오가며 선진국일수록 다수의 항공사가 서로 선의의 경쟁을 하며 차별화된 서비스를 자국민에게 제공하는 모습을 부러워했었다. 우리나라도 하루빨리 발전해 여러 항공사들이 다양한 서비스를 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지만 이렇게 빨리 이루어지리라고는 상상하지 못했다. 지금 한국의 하늘을 수놓는 여러 항공사의 비행기들을 보면 하나님이 우리나라를 얼마나 사랑하셨는지, 또 우리나라에게 얼마나 큰 축복을 주셨는지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역사의 현장에 서 있을 수 있다는 것, 한 나라의 산업이 어떻게 시작돼 어떻게 발전하는지 눈으로 직접 볼 수 있었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특별한 축복이었다. 그리고 그 축복을 이렇게 글로 기록해 나눌 수 있다는 사실도 감사하지 않을 수 없는 일이다.
***[역경의 열매] 정운식 (9) 교회 출석 43년만의 세례… ‘성지순례’로 보답
부끄러운 이야기지만 나는 교회에 나가기 시작한 지 43년 만에 세례를 받았다. 여행업계에 발을 들여놓고, 서울항공을 창업하면서 끊임없는 하나님의 인도하심과 축복을 받았지만, 믿음보다는 일이 우선이었던 것이 사실이었다. 요즘은 ‘사업에만 매진하던 때 하나님이 나를 데려가셨다면 정말 큰일 날 뻔했다’고 아내와 농담을 주고받곤 한다. 부족했던 신앙을 생각하면 부끄러운 생각이 든다.
나는 2007년 7월 23일 서울 동작동 이수성결교회 임병우 목사의 집례로 세례를 받았다. 1960년 결혼 이후 4년 동안 이어진 아내의 기도와 전도 덕에 교회를 다니기 시작했지만 바쁘다는 핑계로 ‘선데이 크리스천’에도 못 미치는 그저 형식적인 신앙생활을 해 왔다. 다만, 우리나라 교계를 상대로 회사를 운영하다보니 자연스럽게 목회자와 교인들의 삶을 흉내 내려 노력은 했다.
세례에 앞서 나는 2007년 6월 성지순례 크루즈 여행 도중 예수를 진심으로 영접했다. 성지를 향하던 배 위에서 예수께서 나의 많은 죄를 위해 죽으시고 부활하셨다는 사실을 마음으로 깊이 받아들이게 됐던 것이다. 이날 나는 예수를 구주로 영접하고, 예수 안에서 진실로 거듭났다. 이로부터 한 달 뒤 세례를 받았다. 주님의 은혜와 사랑이 가슴 깊이 다가왔다.
사실 내가 진정한 믿음을 가지게 것은 새로운 사업 아이템 때문이었다. 2000년대 중반, 크루즈 여행이 여행업계의 새로운 화두로 떠올랐었다. 20세기에는 미국 동남부 연안 카리브해가 쿠르즈 여행의 주요 코스였으나 21세기에는 호화유람선이 전 세계를 누비며 항공여행이나 철도여행의 빈 자리를 채웠기 때문이다. 항상 새로운 사업 아이템을 찾아왔기 때문에 나는 크루즈 아이디어를 놓칠 수 없었다. 사업초기부터 선교사 시장과 깊은 관계를 맺어 왔고, 또 교계에서 많은 일을 해 왔기 때문에 회사는 크루즈 여행상품으로 성지순례를 기획했다.
그렇게 출발한 것이 2007년 6월 극동방송과 함께 한 성지순례 크루즈였다. 550명이 탑승할 수 있는 1만2000톤 규모의 배에서 450명의 성도가 기독교 성지를 순례했다. 나는 이 대규모 성지순례에 ‘사도 바울의 발자취를 따라서’라는 이름을 붙였다.
12일간 이어진 크루즈 여행에서는 매일 아침과 저녁 예배가 이어졌고, 선상에서의 부흥회도 수차례 열렸다. 또 어린이합창단의 공연과 성도 간 교제의 시간이 항해의 순간순간을 아름답고 은혜롭게 채워갔다. 사실 크루즈 성지순례를 기획할 때만 해도 내가 성지순례를 통해 큰 은혜를 받으리라고는 기대하지 않았다. 그만큼 믿음이 성장하지 못했고, 바쁘다는 핑계로 믿음생활을 제대로 하지 못해 은혜에 대한 기대감도 적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내가 전혀 예상하지 못한 때에 나를 찾아 오셨다. 아니 늘 나와 함께 계셨지만, 성지를 향하는 배 위에서 하나님의 임재를 강하게 느끼게 하셨다.
성경에 등장하는 밧모섬과 크레타섬, 아시아의 일곱 교회와 사도 바울이 전도여행을 다니던 주요 도시 등을 차례로 방문했다. 성지에서 나는 2000년 전 예수께서 우리를 위해 얼마나 큰 사랑을 베푸셨는지, 그리고 얼마나 큰 희생을 치르셔야 했는지를 절절히 깨달을 수 있었다. 또 제자들이 고통 받고 탄압 받았던 장소에서 그리스도인으로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깊이 고민하게 됐다. 기업가로 참가했던 성지순례에서 나는 그리스도인으로 온전히 다시 태어났던 것이다.
***[역경의 열매] 정운식 (10·끝) 내 인생 최고의 성공은 ‘예수 영접’과 ‘이웃 섬김
2007년 6월과 7월은 내 인생에서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일이 일어난 시기다. 6월에는 성지순례 선상에서 예수를 나의 구주로 영접한 ‘사건’이 발생했고, 7월에는 세례를 통해 새로운 사람으로 거듭나는 ‘사건’이 발생했기 때문이다. 2007년 7월 이후 나는 많이 바뀌었고, 내 인생은 성공 중심의 삶에서 나눔 중심의 삶으로 변화하게 됐다.
나는 50여명의 여행업계 종사자들과 함께 만든 TNT클럽(Travel & Tourism Club)과 함께 나누는 삶을 실천하려 노력해 왔다. TNT클럽의 정기모임에서는 관광전문가 특강, 세미나 개최, 뉴스레터 발행 등의 행사를 진행하지만, 클럽의 가장 중요한 목적은 나눔과 봉사다.
2007년 만들어진 TNT클럽은 첫해 지체장애인들이 함께 생활하고 있는 서울 은평천사원에 200만원 상당의 지원금과 도서 의류를 전달하며 나눔 사역을 시작했다. 2008년부터는 처남이 네팔에서 운영하고 있는 고아원 ‘어린이집’을 후원하고 있다. 지금은 이때 만난 네팔 아이들에게 개인적으로 장학금을 보내고 있다. TNT클럽은 이외에도 경북 문경 신망애육원 등 보육시설과 미자립교회 등에 지원금과 도서를 보내왔다.
복음을 몸과 마음으로 받아들이고 나서 변화된 것은 삶의 방향만이 아니었다. 가족에 대한 사랑도 더 커졌고, 특히 아내에 대한 고마움을 새롭게 깨닫게 됐다. 나는 늘 아내와 두 아들과 손자·손녀들을 마음 깊이 사랑했다. 하지만 믿음의 눈을 뜨고 나니 이렇게 아름다운 가정을 이루게 해주신 하나님의 축복에 더 감사하게 됐고, 가족에 대한 사랑도 더 깊어지게 됐다.
이런 변화를 통해 나는 2010년 아내와 금혼식을 올렸다. 그리고 마치 신혼부부처럼 예복을 입고 사진도 찍었다. 아내는 이날 처음 결혼식을 했던 때처럼 환하게 웃어주었다. 나와 아내는 1960년 12월 3일 결혼했고 아내는 50년이 넘는 세월동안 나를 위해 기도해주었다. 아내의 기도가 없었다면 아마 지금의 나는 없었을 것이다. 아내가 오랫동안 건강이 좋지 않아 고생하고 있는데, 하루빨리 건강을 되찾았으면 좋겠다. 금혼식 당일 나는 부쩍 수척해진 아내의 손을 잡고 마음으로 많은 눈물을 흘렸다.
두 아들이 반듯하게 자라준 것 역시 하나님께 감사하지 않을 수 없는 일이다. 나는 두 아들에게 나의 못 이룬 꿈을 투사하거나 강요하지 않았다. 나의 꿈보다 중요한 것이 두 아들의 꿈이었기 때문이다. 2011년 장성한 두 아들이 보내온 편지는 자식농사를 망치지 않았다는 확신을 갖게 해 주었다. 큰아들은 내가 아이들을 양육할 때 강조했던 ‘중용’의 정신을 늘 가슴에 품고 살겠다고 편지에 적었다. 또 ‘칭찬보다 비판의 소리에 더 귀 기울이라’던 나의 조언이 자신의 삶에서 가장 큰 기준이라고 말해 주었다. 둘째 아들은 나를 ‘개방적 사고의 아빠’ ‘국제적 감각의 아버지’ ‘강인한 추진력의 아버님’으로 기억하고 있었다. 내가 늘 추구해 온 삶의 가치들이 두 아들에게 잘 전달된 것 같아 감사했다.
나는 이제 여든을 바라보고 있다. 재벌에 비할 바는 아니지만, 무일푼에서 시작한 내게는 과분하다 싶을 만큼 재물도 얻었고, 업계 최초로 금탑산업훈장을 수상하는 영예도 얻었다. 하지만 예수를 영접하고 난 이후 내게 가장 중요한 것은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삶을 사는 것이 되었다. 이제 남은 시간도 그리스도를 위해, 그리스도인답게 살아가고 싶다. 언젠가 하나님 앞에 섰을 때 사업가 정운식이 아닌 참된 그리스도인으로 평가받았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