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달균의 시조 일람
석야 신웅순
오후의 햇살이 산밑까지 내려 왔다. 하산하는데 몇 달이 걸렸다. 햇살이 까칠까칠하다. 낙엽이 또박 또박 지상에다 편지를 쓰고 있다. 얼마 후면 흘림체가 되어 개발새발 쓸 것이다.그 때면 글씨들은 가을 바람에 몸을 맡겨 기약 없이 먼 겨울길을 떠날 것이다.
그래서 가을은 외로운가 보다.
시인은 필자에게 「다시 가을에」라는 시를 보내왔다.
또 다시 늑대처럼 먼 길을 가야겠다
사람을 줄이고, 말수도 줄이고
이 가을, 외로움이란 얼마나 큰 스승이냐
그리고는 다음과 같은 말을 덧붙였다.
시인은 좀 외로워야 되는데, 요즘 문단은 시인을 외롭게 하지 않는 경향이 있습니다. 물론 모든것 다 끊고 혼자 있을 수는 있지만 문학축제, 출판기념회 등등이 너무 많아 사람 구실하면 살다가는 시인되기는 쉽지 않은 요즘입니다. 약간 혼자 칩거하면 누구 행사엔 가고 내 행사엔 안 온다는 서운함을 표하는 이도 있어 외로움의 바다에 빠져보기도 쉽기 않습니다.
어쨌든 사람을 줄이고, 말수도 줄이면서 외로움이란 스승에게 기대어 보는 수밖에 없겠지요.
시인에게 설명은 사족이다. 시는 분석이 아니라 느낌이다. 시인은 외로워야 시를 쓸 수 있고 배고파야 시를 쓸 수 있다는 말은 거저 하는 말이 아닌 것 같다. 살아가면서 사람과의 관계도 판이 커진다. 이 노릇을 어찌하는가. 사람 구실이 쉽지 않다.
‘외로움이 큰 스승이라는 말’은 경구 중의 경구, 평범한 기막힌 절구이다.
얼마 전 시인으로부터 한통의 전화를 받았다.
“저 이달균입니다.”
“아, 시 잘 쓰시는 분요?”
“혹 시조 잡지『시조예술』을 읽어 볼 수 있는지요.”
“예, 일부 남은 것이 있습니다. 보내드리겠습니다.”
『시조예술』은 2007년 창간호 이후 2011년에 9호로 종간된, 필자 발행의 시조예술 잡지이다. 현대시조의 자유시화의 우려에서 출발한 잡지였다. 시조의 정체성 회복과 시조의 현대적 복원에 초점을 맞춘 시조 잡지였다.
필자는 글 잘 쓰시는 이 시인을 한번도 만나지 못했다. 시집 속에서 시인의 이름을 익혔고 시를 읽으면서 시인과 가까워졌을 뿐이었다. 궁금했던, 보고 싶은 남쪽 땅 어느 시인이라는 것만 필자의 가슴 속에 남아 있었다.
시인은 이 묵은 잡지를 기억하고 있었나 보다. 놀랐다. 이 잡지는 시조가 문학과 음악이어야 한다는 현대적 복원, 음악과의 소통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어 현대시조시인들에게는 별다른 주목을 받지 못했던 잡지였다.
그런데 시인은 시조 음악에 대해 알고 싶다는 것이다. 시조창과 시조문학에 대한 문제로 십여년을 고민해왔던 잡지였다.
반가웠다. 몇 권의 책을 부쳐드렸다. 시인도 자신의 시집과 산문집을 보내왔다. 필자에겐 커다란 기쁨이요, 행운이었다.
그 성당 종지기 영감은 죽었다
말없이 종만 울리며 살다간 사람은
가슴에 무슨 말들을 여미고 살았을까
종각 옆 광목 빨래처럼 펄럭이던 한 생애
당신의 아빨 빠진 웃음도 내 유년도
한 장의 낡은 사진처럼 붙박혀 남았을 뿐
- 이달균의 「종소리」전문
먼 크리스마스 카드 같은, 이국의 성당 종소리 같은 어느 영감. 아름다운 이런 외로움도 있을까. 빨래처럼 펄럭이던 생애도 이빨 빠진 웃음도 종소리로 사라져 어디선가 이름 모를 들꽃으로나 피었을 영감, 남은 것은 자신이 살아온 한 장의 흑백 사진뿐이라니. 우리도 그렇게 남을 인생이 아닌가.
오래 전 일이지만 아직도 생각나는 이달균과 개인적인 일이 있다. 후배들과 볼 일이 있어 외출했다가 우연히 길거리에서 이달균을 만났다. 어디를 가려는 참인데 이왕 만났으니 다 같이 자신을 따라가잔다. 일행들을 모두 이끌고 간 곳이 강가 모래밭이었다.
어리둥절해하는 우리에게 새 발자국을 보여주러 왔다는 이달균에 대해서 그날 이후 모든 일에매우 관대해져버렸다. 누군가가 기다리고 있는 듯이 앞뒤 없이 앞만 보며 빠르게 달려온 이유가갑자기 보고 싶은 강가의 새 발자국이었다니, 어쨌든 날씨는 화창했고 인적 없이 쓸쓸한 영화 장면 같은 가을 풍경 속을 가로세로 어린아이처럼 시시덕거리며 보냈다.
- 김혜연의 ‘시인 이달균 내 친구’일절
일 없이 새발자국을 보러 가다니. 필자도 일 없이 새 발자국 같은 그런 시인을 만나보고 싶다. 기다리면 새 발자국처럼 만날 수 있을까.
아름다운 이 시인에게 필자의 「그 사람」시가 화답은 될 수 있을까. 가당찮지만 동병상련 같은 시였으면 좋겠다.
가을이 지났는데도
그 사람은 오지 않았습니다.
가을꽃 이름 외우느라 길을 잃었나 봅니다.
- 필자의 「그 사람」전문
이 참에 딸의 남자 친구에게 산국이 어떤 꽃이고 구절초, 쑥부쟁이가 어떤 꽃인지 물어보아야겠다. 대답을 못하면 물릴 생각이다. 아니면 그 꽃을 직접 따오라고 하던지. 늘 듣는 새소리이지만 그 새의 이름을 어찌 알며, 늘 보는 꽃이건만 그 꽃의 이름을 우리는 어찌 아는가.
시인은 1987년 『지평』과 시집『남해행』을 출간하면서 문단활동을 시작했으며 1995『시조시학』신인상으로 시조 창작을 병행하기 시작했다. 시집으로 『문자의 파편』,『북행열차를 타고』,『말뚝이 가라사대』, 6인시집『갈잎 흔드는 여섯 악장 칸타타』등이 있다. 중앙시조 대상을 받은 바 있다.
시인에게는 또 하나의 빈자리가 있다. 그는 영화 마니아이기도 하다. 낯선 곳으로 길을 떠나는, 때로는 헤매다 길을 잃어도 좋은, 무채색 일상을 걸어나오는 그런 빈자리가 있다. 그는『영화, 포장마차에서의 즐거운 수다』영화 에세이를 펴내기도 했다.
금요일은 필자가 시민대학으로 ‘시조 창작, 그 풍류와 멋’을 강의하러 가는 날이다. 오늘은 이달균 시인의 시조를 갖고 학생들과 공부해야겠다. 시인은 사람들을 깜짝 놀라게하는 와락 안겨드는 애인 같은 그런 시를 쓴다. 어쩌면 그리 쓸 수 있을까.
시인은 필자에게 ‘단수 정격 시조에 대한 저의 생각은선생님의 생각과 별반 다르지 않으리라 생각합니다.’ 이런 말을 덧붙이면서 시조 몇 수를 보내왔다. 가을하늘, 가을 호수 같이 맑고 깨끗한 영혼을 가진 시들이다.
오늘도 한 사람과 등지고 왔습니다
슬픔을 나눠지라던 소명을 거역하고
냉정히 등만 보인 채 돌아온 내가 미워집니다
- 이달균의 「등(背)」
그래도 나는 쓰네 손가락을 구부려
떠나는 노래들을 부르고 불러 모아
저무는 가내공업 같은 내 영혼의 한 줄 시
- 이달균의 「저무는 가내공업 같은 내 영혼의 한 줄 시 」
어느 교수로부터 전화 한통이 걸려왔다. 혹 연구실에 혈압계가 있느냐고. 날씨가 추워져서 그런지 손혈압계로 한 번 재보고 싶다고 했다. 어머니가 가신지 십년도 넘었다. 어머니에게 재어드렸던 혈압계는 어디 있는지 알 수 없다고 했다. 그러냐고 했다. 추운 날은 반드시 목도리를 하고 다니시라고 신신당부했다.
아침이 춥다.
늦가을 어르신들은 ‘저무는 가내공업같은 영혼의 한 줄 시’ 같은 생각이 든다.
이달균 시인의 시조를 읽으면서 필자는 훌쩍 컸다. 그리고 행복했다. 필자도 그런 시조를 쓰고 싶다. 학문의 길에서 벗어나 이젠 시조 창작에 전념하고 싶다.
<고시조 감상>
양사언의 ‘태산이 높다하되’(1)
태산이 높다하되 하늘아래 뫼이로다
오르고 또 오르면 못 오를 리 없건마는
사람이 제 아니 오르고 뫼를 높다 하더라
태산이 높다고는 하지만 결국 하늘 아래 산이로다. 오르고 또 오르면 못 오를 리가 없는데 사람들은 오르지도 않고서 산을 높다고 하더라. ‘동창이 밝았느냐’와 함께 너무나 잘 알려진 국민 시조이다. 노력만 하면 안되는 일이 없다는 격언 같은 시조로 양사언의 ‘태산이 높대하되’는 노력의 대명사가 되었다.
그의 출생담이 『금계필담』에 전해오고 있다.
양사언 아버지가 영광군수로 부임하는 길이었다. 텅빈 객사에서 12살 가량의 딸아이만이홀로 집을 지키고 있었다.
“ 여기서 점심을 먹으려하니 너는 빨리 가서 네 부모를 데려오너라”
“ 제 부모님은 모를 심고 계시니 불러올 수 없습니다. 제가 점심을 준비할 것이오니 사람은 몇명쯤이며 말은 몇필이나 되옵니까? ”
“ 네가 능히 점심을 준비할 수 있겠는가?”
“ 할 수 있사옵니다.”
사람과 말의 숫자를 말해준대로 딸아이는 일사천리로 순식 간에 밥상을 차려냈다.
공이 사람과 말의 식비를 후한 가격으로 쳐주었으나 딸은 원 가격 외에는 조금도 받지 않았다.
양공은 감탄했다.
“ 이 부채는 내가 너를 예로서 맞겠다는 패물이다.”
딸아이는 상자에 붉은 보자기를 펴들고 나와 두 손으로 부채를 받았다.
“ 부채 하나 주는데 어찌하여 이같이 공경을 다하느냐?.”
“ 결혼하는 패물이라면 물건이 비록 작다해도 어찌 공경하지 않으리이까? ”
얼마 지나지 않아 공의 아내가 상처했다. 임기를 마치고 공은 고향에서 홀아비로 살아가고 있었는데 하루는 누가 뵙기를 청했다.
“ 공께서는 영광 군수로 부임하시는 길에 어린 딸에게 부채를 주신 적이 계십니까?”“ 그런 일이 있었다.”
“ 그 아이가 제 딸입니다. 지금은 이미 시집갈 때가 지났으나 다른 곳에는 맹세코 시집을 가지 않았습니다. 공께 패물을 받았다고 하기에 이제와 말씀을 드립니다.”
공은 크게 기뻐하여 아내로 맞이했다. 몇 년 후 아들을 낳았는데 그가 바로 양사언이었다.
양사언이 회양군수 때 금강산 만폭동 바위에 ‘봉래풍악원화동천(蓬萊楓嶽元化洞天)’ 8자를 새겼다. 평자는 ‘ 최치원의 쌍계석문(雙溪石門) 글씨가 이에 못 미친다’고 말하였다. 지금도 그 글씨가 남아 있다. 문장에 능하고 글씨를 잘 썼으며 특히 초서와 큰 글씨를 잘 썼다. 안평대군 · 김구 · 한호 등과 함께 조선 전기의 4대 서예가이다. 한시는 작위성이 없고 자연스러웠으며 천의무봉이라는 평판을 받았다. 그는 격암 남사고에게 역술을 배워 1583년 여진란, 1592년 임진왜란, 1607년 누루하치난을 정확히 예언하기도 했다.
봉래 양사언은 40년 간 관직에 있으면서 전혀 부정이 없었고 유족에게는 한푼도 재산을 남기지 않았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