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양의 이발관 풍경
정 찬 열
북한에다녀왔다. 3주일 동안 평양을 비롯,개성,사리원,묘향산,원산, 금강산, 함흥 등을 돌아보았다. 혼자였다.
미국에 건너온 지 30년이 넘었다. 시집간 딸이 친정집 걱정하듯 밖에 나와 살다보면 고국에 관심이 많아진다. 안에서 보이지 않던 것이 밖에서 보면 잘 보이기도 한다. 고국에서 들려오는 우울한 소식들 중 상당부분이 분단으로부터 비롯된 것이었다. 남북분단이 한반도에 살고있는 사람들의 삶을 좌우하고 있다.전쟁이 일어나지 않을까 불안하고, 남북갈등이 남한 내 이념 대결을 불러일으켜 사회 전반을 옥죄는 변수가 되고 있다. 이 적폐를 해소할 길은 없는가.
이민 25년이 되던 2009년, 전남 해남 땅끝 마을에서 강원도 고성 통일전망대까지 31일간 걸어서 국토 종단을 했다. 넓은 미국 땅을 자동차로 여행하던 중 조국 땅을 내 발로 걸어보자는 생각을 하게 된 것이다. 종단 얘기를 묶어 『내 땅, 내 발로 걷는다』는 책으로 펴냈다. 남녘 종단을 끝내고 나서, 북녘 땅을 걸어 반도의 끝까지 가고 싶었다. 그렇지만 그곳은 허락 없이는 갈 수 없는 곳이었다. 문을 두드렸지만 사정이 여의치 않았다. 우선 반도를 묶고 있는 허리띠를 따라 걷기로 했다. 종단 2년 뒤인 2011년, 고성 통일전망대에서 휴전선을 따라 임진각까지 걷고, 강화도를 거쳐 연평도까지 다녀왔다. 19일이 걸렸다. 그 얘기를 『아픈 허리, 그 길을 따라』라는 책으로 묶었다.
알다시피, 북한은 남한 국적자를 제외한 모든 나라 사람에게 관광을 허용한다. 미국에서 북한을 방문하는 길은 두 가지다. 여행사를 따라 다녀오는 길. 여행 이외의 목적인 경우 북한 해외동포 위원회(이하 해동)의 승낙을 얻어 다녀오는 길이다. 나의 방문은 단순한 여행이 아니라서 해동의 승인을 받아야만 했다. 해동에 판문점에서 회령까지 걸어가고 싶다는 신청을 했다. 내가 쓴 책도 함께 보냈다. 한반도 종단을 마무리하고 싶다는 바람도 있었지만, 북한 산천을 걸으면서 주민들을 만나 여러 가지 얘기를 나누어 보고 싶었다. 그들이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가. 분단 세월 동안 관혼상제는 어떤 모습으로 달라졌고, 교육은 어떻게 시키고 있는가 등,궁금한 게 한 둘이 아니었다. 답장을 기다렸다. 될 듯싶다가도 남북관계가 엉키면 물거품이 되곤 했다.
그런데 어느 날, 해동으로부터 대답이 왔다. 여러 가지 이유로 걸어가는 것은 어렵다.자동차를 이용하여 북한의 여러 지역을 돌아보는 것이 어떠냐는 제안이었다. 걸어가는 게 원래의 취지였지만 그 전에 북한의 이곳저곳을 살펴보는 것도 의미가 있겠다고 판단했다.
2014년 10월, 3주간 북한을 방문하게 되었다. 남쪽 출신 작가가 3주간 이상 북한에 머무는 일은 분단 이후 처음이라고 했다. 북한에 간다고 하자 어떤 분이 나에게 말했다.
“그곳은 안내원을 따라 북한 정권이 허락한 지역 허락한 사람들만 만나는 거잖아요. 북한의 좋은 모습만 보여주고 그것을 선전하도록 하는 거 아니던가요.”
일리 있는 말이다. 안내원 없이 움직일 수 없는 곳이 북한이다. 그렇지만 사람 사는 일이 원리원칙 대로만 움직여지던가. 21일 동안 북한 곳곳을 돌아보는데 꼭 보여주고 싶은 것만 눈에 띄겠는가. 중요한 것은 무엇을 보았느냐 보다 어디에서 보았느냐 이고, 그 보다는 어떻게 기억하느냐가 더 중요하다. 결국 모든 것은 ‘기억’ 과 ‘해석’을 통해 재구성되기 때문이다. 본문보다 행간의 의미를 읽어내는 것이 필요하듯, 보는 사람의 ‘시선’이 관건이 되지 않을까.
북한에 도착하여 안내원과 함께 다니다보니 혼자 움직일 수 있는 공간이 없는 게 아니었다. 지방 여행 중에도, 평양에 머무는 동안에도 하루 일정이 끝나면 혼자서 숙소 주변을 산책하곤 했다. 혼자 나다니다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어쩌나 조바심이 없지 않았지만, 주민들이 살아가는 모습을 자유롭게 보고 싶은 마음이 더 컸다.
북한 체류 7일째 되는 날이었다. 호텔 뒤쪽 골목으로 천천히 발걸음을 옮겼다. 노점상, 유치원을 지나 아파트 골목을 휘어 돌아가니 위안소(이발, 이용, 미안, 목욕) 간판이 보였다. 위안소? 몸을 위로하고 보살피는 곳이라는 말일까. 2층 건물이다. 주민들을 위한 공공장소인 모양이다. 가까이 가니 흰 유니폼을 입은 여자이발사가 이발을 하고 있는모습이 창문을 통해 보인다. 아래층이 이발소다. 머리를 한 번 쓸어보았다. 오면서 이발을 하고 왔기에 아직 때가 되지는 않았지만 평양의 동네 이발관에서 머리를 깎아보고 싶었다.
정문을 열고 들어갔다. 복도 왼쪽으로 이발소가 있다. 이발소 앞복도에 놓인 긴 나무의자에 두 사람이 앉아 차례를 기다리고 있다. Adidas 상표가 찍힌 셔츠를 입은 열댓 살 정도의 남학생, 그리고 40대 남자다. 아까 길에서도 Adidas 잠바를 입은 청년을 봤는데 이 학생도 같은 상표 옷이다. 요즈음 평양에서 Adidas가 유행인 모양이다.
이발관 문을 빠끔히 열면서 물었다.
“이발할 수 있습니까?”
“해방산려관에서 오셨습네까, 거기가 설비도 좋을 텐데….”
그냥 돌아가 주면 좋겠다는 말투다. 시설 좋은 호텔 이발관으로 가지 이런 곳으로 왔냐는 이야기다. 40대 중반쯤 보이는 아주머니다. 내 옷차림을 보고 담박 해방산 여관에 묵고 있는 여행자인 것을 알아차렸나 보다. 문이 반쯤 열린 채로 문고리를 잡고 서 있었다. 그냥 문을 닫고 돌아설 줄 알았보다.엉거주춤서있는나를보면서 잠깐 곤란한표정을 짓는다. 짤막한 몇 분이 지난 다음, 어쩔 수 없다는 표정으로 한마디 한다.
“해드려야지요, 좀 앉아 기다립세.”
복도에서 기다리라는 얘기다. 하던 이발을 끝마치고 나서 나에게 들어오라고 한다. 기다리던 두 사람을 돌아봤더니, 괜찮다며 나더러 먼저 하라고 순서를 양보한다. 문 가까운 쪽 의자에 앉았다. 같은 의자가 세 개 나란히 놓여 있다. 평범한 이발관용 나무 의자다. 오래 전 고향에서 많이도 앉아보았던 의자다.가운데 의자는 비어있고 저쪽 끝에는 손님이 앉아 있다. 그 분도 여자 이발사다.
앞 벽에는 큰 거울이 이어져 걸려 있고, 바로 내 앞 오른쪽 구석 선반 위에 나무로 짠 가구가 놓여 있다. 가구 안에는 이발 기구도 보이고, 차곡차곡 쌓여 있는 흰색 수건들도 보인다. 면도날을 세우는 넓적한 가죽 띠가 못에 걸려 길게 늘어져 있다. 가죽에 묻어 있는 손때가 세월의 흔적을 말해준다. 그리고 한 쪽 구석에 빗자루와 쓰레받
기가 놓여 있다. 고향 이발소에 온 느낌이다.
거울 위쪽에 밀레의 〈만종〉이나 〈이삭 줍는 사람들〉 같은 그림 한 폭이 걸려 있다면, 그리고 “세월이 그대를 속이더라도/ 슬퍼하거나 노하지 말라…”는 푸쉬킨의 시 한 편이 걸려 있다면, 영락없이 옛날 우리 동네 이발관 풍경이겠다 싶어진다. 푸쉬킨의 시를 생각하면 떠오르는 일이 하나 있다. 열여섯 봄이었을까. 중학을 졸업한 다음 진학을 못하고 시골에서 농사를 지으며 살아가던 때였다. 비 온 다음날 고추밭을 일구러 합수통을 지고 황토 언덕을 뒤뚱뒤뚱 올라가다가 미끄러져 넘어졌다. 합수통은 박살이 나고 온몸에 똥물을 뒤집어썼다. 다음날, 이발소에 갔더니 그 시가 걸려 있었다. “…어려운 날 참고 견디면/ 즐거운 날 오리니/ 마음은 미래에 사는 것 현실은 슬픈 것” 푸쉬킨의 시를 또박또박 읽고 또읽었다.“참고견디면나한테도좋은날이올랑가…?”살아가면서 힘들고 어려울 때면 그 시를 읊조리곤 했다.
미국에 살다가 이따금 한국에 들어가면 이발소를 찾기가 어려웠다.대부분 목욕탕에서 이발도 함께하도록 되어있지만,옛날 추억이 깃든 이발소에 들르고 싶었다. 어느 해, 한국에 갔을 때 이발소 표지가 빙글빙글 돌아가는 어느 업소에 들어갔더니 바지를 벗으라며 파자마를 내주는 게 아닌가. 의아해했더니 오히려 나를 이상한 눈으로 바라보기에 그냥 돌아 나온적이있었다. 그런데 평양에 와서 내가 그리던 이발소에 앉아 이발을 하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다.
“기계로 할까요, 가위로 할까요?”
“가위로 해주세요.”
익숙한 솜씨로 머리를 자르기 시작한다. 잘 보이는 곳에 “영웅, 전쟁로병, 영예군인, 교원, 과학자, 제대군관들은 우선 봉사합니다”라는 글씨가 붙어있다. 저런 분들에게는 특별한 대우를 하는 모양이다.
저만치 구석에 나무판자가 세워져있다. 어린 아이를 이발시킬 때 의자 위에 걸치는 판자다. 판자가 반들반들 윤이 난다. 오래된 기억하나가 되살아난다. 내가 초등학교 2학년 때쯤 일이다. 아버지의 손을 잡고 이발소에 갔다. 이발사는 어른 의자 위에 나무판자를 얹은 다음, 키가 작고 어린 나를 그 위에 앉혔다. 머리를 깎던 아저씨가 얌
전히 앉아 있는 나에게 지나가는 말로 한마디 하셨다.
“야, 이 녀석 참 잘 생겼다. 이 머리에다 사각모를 턱 씌워 놓으면 정말 멋지겠다.넌꼭그렇게 될 거야.그때 이 아저씨 생각해야한다. 응!”
이발사 아저씨가 어린 꼬마 기분 좋으라고 한 그 말은 날아가지 않고 내 머릿속에 남았다. 이발소에 오는 다른 아이들에게도 아저씨는 같은 말을 했을지도 모른다. 그때만 해도 대학생은 시골에서 선망의 대상이었고, 누가 대학을 졸업한다는 것은 그 지방의 사건이 되는 시절이었으니까.
대학 졸업식장에 사각모자를 쓴 모습은 내 인생에 있어서 반드시 거쳐야 할 과정으로 머리에 각인되었다. 중학을 졸업하고 집안 형편 때문에 지게를 지고 농사를 짓다가 스물한 살 나이에 고등학교를 가겠다고 작정한 것도, 구비구비 돌아 서른 살이 넘어 마침내 대학을 졸업하게 된 것도, 어릴적 이발소아저씨가 내게 해주었던 말 한마디
가 적지 않은 영향을 주었던 것 같다.
바람결에 툭 떨어진 씨앗 하나가 땅에 묻혀 큰 나무로 자라듯이, 누군가 툭 던진 한마디 말이 가슴에 묻혀 한사람의 운명을 바꿀 수 있다는 생각이 든다. 나는 오늘 어떤 말을 했을까. 상대방을 위로 하고 힘을 북돋아주기는 커녕,행여 누군가의 마음에 상처를 주지나 않았을까.
“선생님, 어디에서 왔수까?”
“미국 캘리포니아에서 왔습니다.”
“….”
“아주머니, 이발 솜씨가 보통이 아니십니다.”
“칭찬해주니 고맙습네.”
자연스럽게 머리를 다듬어 나가는 아주머니의 이발 솜씨가 훌륭했다. 내가 사는 미국 오렌지카운티에 기능 올림픽 금메달을 딴 분이 운영하는 ‘금메달’이발관이 있는데, 그 분 못지않게 솜씨가 좋았다.
“아주머니,간판에‘미안’이라는말이있던데그게무슨의미입니까?”
“‘미안’을 모르시다니요. 고거 얼굴을 곱게 해드린다는 말입네다.”
답변이 아주 간단하다. 구체적으로 묻지는 못했지만 마사지를 하거나 피부를 곱게 해준다는 뜻으로 해석을 했다.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다보니 어느새 이발이 끝났다.
“면도하셔야지요.”
머리를 다 잘랐기에 습관처럼 일어서려고 하자, 면도를 해야 한다며 다시 앉힌다. 미국에서 이발관은 머리를 자르면 그걸로 끝이다.면도까지 해주는 곳도 있긴 하지만 그렇지 않는 곳도 많다. 의자를 뒤로 젖혀 눕힌 다음, 솔에 비누거품을 묻혀 턱과 얼굴에 흠뻑 바른다. 그리고 나서 이발사가 가죽 띠에 면도날을 세운다. “쓱싹 쓰윽 싹, 쓱싹 뜨윽싹,” 참 오랜만에 들어보는 부드러운 소리다. 언제부터 저 소리를 듣지 못했을까. 아마 일회용 면도기가 나오면서부터였을것이다.
옛날 우리 동네에서는 따뜻한 물수건을 비누칠 한 얼굴 위에 덮어 살갗을 촉촉하게 한 다음 차근차근 면도를 해주었는데, 이쪽에서는 그런 절차는 없는가보다. 그러고 보니 물을 데우는 화덕을 보지 못했다. 면도 솜씨도 보통이 아니다.
“선생님, 염색하셔야겠네요.”
“왜요?”
“젊어 보이지 않습네까?”
“해주시겠습니까?”
“오늘은 준비가 안 되어 있습네, 다음에 오시면 해드리겠습네다.”
일요일과공휴일은문을열고,대신월요일에문을닫는단다.문여는 날을 택하여 오면 언제든지 염색을 해주겠다고 한다. 이발이 끝나고 값을 물었다.
“일 없습네다. 오랜만에 조국에 오신 손님인데 돈을 받다니요.”
돈을 주려고 했지만 극구 사양을 한다.
다음날, 일정이 끝나고 나서 안내원이 제방에 들어간 사이 다시 이발관에 들렀다 .염색약은 북한산 천연염료제품이다.염색을 마친 다음, 20분 정도 앉아있으라고 한다. 머리를 감겨주는 순서다. 세면장 전등이 희미하다. 따뜻한 물이 나오지 않는 모양이다. 시멘트로 만든 물 저장 탱크에서 찬물을 퍼서 사용한다. 플라스틱 세수 대야가 몇 개 보인다.
“물이 차워서 미안합네다.”
“아닙니다. 괜찮습니다.”
괜찮다 해도 ‘미안타’는 말을 여러 번 되풀이한다. 해방산 호텔 이발관에서 하지 않고 이곳에 왔냐고 물었던 이유를 알 성싶다. 10월 중순이니 겨울이 시작될 무렵이지만 견딜 수 없을 만큼 물이 차지는 않았다. 이번에도 요금을 받지 않는다. 조국에 오신 손님, 이라는 말이 가슴에 남았다.
골목 입구 노점상에서 과일을 사려고 하는데 달러는 받지 않는다고 한다. 북한 돈만 받아야 한단다. 사정을 얘기했더니 못이긴 척 받아준다. 바나나와 사과 등을 좀 사들고 이발소에 다시 들렸다. 뭐하러 이런건 가져왔냐면서도반갑게 받아준다.그러면서 아쉬운듯 인사말을 건넨다.
“다음에 또 오~옵세.”
다음에 또 올 수 있을까. 내생애 처음, 어쩌면 다시 경험할 수 없는, 특별한 이발이었다. 잊혀져가는 추억들이 북녘 땅에 그대로 남아있었다.
다음 날이던가. 안내원이 지나가는 말로 물었다.
“선생님, 이발하셨네요. 해방산려관 이발 솜씨가 괜찮지요?”
“….”
《미주중앙일보》 신춘문예 시 등단(1999년), 계간 『문학의식』 평론 등단(2015
년)
산문집 『쌍코뺑이를 아시나요』, 『내 땅, 내 발로 걷는다』, 『아픈 허리, 그 길을
따라』, 『산티아고 순례길 따라 2000리』, 『북녘에서 21일』
시집 『길 위에 펄럭이는 길』
제4회 해외 풀꽃문학상, 제7회 미주가톨릭문학상 수상
현, 『문학세계』 발행인 겸 편집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