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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목 |
사회복지개론 |
성명 |
김 혜 옥 |
(1902.6.3.~1950.9.28.)
경남 함안 출생
1) 제 1기(출생 ~ 1919) 1902. 6. 3. 경남 함안에서 부친 손종일 장로와 모친 김은수 집사의 장남으로 경남 함안군 칠원면 구성리 685에서 출생 1908. 5. 2. (7세) 부친 입신 때 7세 소아로 입신 1914. 4. 1. (13세) 칠원 공립보통학교 입학 1917. 10. 3. (16세) 맹호은 선교사에게 세례 받음 1919. 3. 24. (18세) 칠원 보통학교 졸업 1919. 4. (18세) 서울 중동학교 입학 |
2) 제 2기 (1920 ~ 1950) 1920. 4. 3. (19세) 부친 손종일장로의 독립만세 운동으로 구속, 서울 중동학교 자퇴 1921~1923. (20세~22세) 일본 동경 스가모(소압)중학교 졸업 1924. 1. 17. (23세) 정양순여사와 결혼 1924. 3. 23. (23세) 재차 도일했다가 중생하여 10월 귀국 1924. 10. 23. (23세) 칠원읍 교회 집사 피선 1925. 11. 6. (24세) 동인군 출생. 1926. 3. (25세) 경남 성경학교에 입학 부산 감만동교회 외지 전도사로 부임 1929. 3. 6. (28세) 경남 성경학교 졸업 1932. (31세) 감만동교회에서 성서조선으로 한 주간 사경회를 인도. 사경회 인도 문제로 사임. 1926 ~1932. (25세~31세) 외지 전도사로 있으면서 밀양수산, 울산 방어진, 울산 남창,부산 남창, 양산, 원동교회 개척. 1930. 9. 18. (29세) 동신군 출생. 1932.~1934 (31~33세) 부산 남부민교회 시무 1935. 4. 5. (34세) 평양 신학교 입학. 능라도교회 시무 1938. 3. 16. (37세) 평양신학교 졸업 1938. 4.~1939. (37~38세) 경남 노회 부산 지방 시찰회 순회 전도사. 부산, 양산군, 김해군, 함안군 각 교회를 순회 전도하면서 신사 참배 반대 운동을 함.신사 참배 반대 운동을 한다는 이유 때문에 순회 전도사 일을 시찰회에서 보지 못하게 함. 1939. 7. 14. (38세) 여수 애양원교회 부임. 한국인으로는 2대 목사로 부임. 1940. 9. 25. (39세) 신사 참배 거부로 여수 경찰서에 검속. 1940. 11. 17. (39세) 광주 형무소에 투옥 1943. 10. 8. (42세) 청주 보호 교도소에 감금 1945. 8. 17. (44세) 8.15 해방으로 석방 1945. 9. 10. ~10. 15. (44세) 애양원 임시 원장 겸임 1946. 3. (45세) 경남노회에서 목사 안수 받음 1948. 10. 21. (47세) 여순사건으로 동인(23세), 동신(18세) 형제 순교. 두 아들을 죽인 원수를 살려 양 아들로 삼음. 1950. 9. 13. (49세) 6.25 동란으로 공산군에게 검속 1950. 9. 28. (49세) 여수시 둔덕동 617-10(당시 과수원 골짜기)에서 순교하심. 다음과 같은 분들도 함께 순교 조상학목사 : 여수 덕양교회 지한영강도사 : 율촌 장천교회 지준철성도 : 지한영 강도사 아들(순천고 3학년 재학) 윤형숙전도사 : 여수 제일교회 허상용집사 : 여수 돌산읍 교회 황도백집사 : 여수 남면 우황리교회 곽은진집사 : 여수 남면 우황리교회 안경수성도 : 여수 남면 우황리교회 백인수성도 : 여수 남면 우황리교회 |
1993. 4. 27. 손양원목사 순교 기념관 개관 1995. 8. 15. 국가 독립 유공자로 선정 건국훈장 애족장 수상 |
2. 손양원 목사 순교 일대기
장로교 목사로서 순교한 손양원(孫良源)은 1902년 6월 3일 경남 함안군 칠원면 구성리에서 아버지 손종일(孫宗一)과 어머니 김은수 사이의 삼형제 가운데 장남으로 태어났다. 아명은 연준이고 호는 산돌이다. 남아프리카에 기독교를 전한 전도사이자 탐험가인 리빙스턴(1813∼1873)을 사모하여 자신의 호로 삼았다고 한다.
1908년부터 부모를 따라 주일학교에 다니기 시작한 산돌은 1913년 칠원공립보통학교에 입학, 3학년 때 선교사 맥레이(Macrae, F.J.L.·孟浩恩)로부터 세례를 받았다. 조회 때 동방요배(東方遙拜)를 강요당하자 우상숭배라고 거절하여 퇴학당한 적이 있었다. 이 때 선교사가 강력히 항의하여 복교되었으며, 1917년 7월 졸업하였다. 산돌은 1918년 2월 서울로 올라가 신문 배달과 만두장사를 하면서 중동중학교에 다녔는데 이때도 안국동교회를 열심히 다녔다. 1919년 3·1운동에 연루되어 아버지가 실형을 선고받고 마산형무소에 수감되자 가족들의 생계를 위해 자퇴하고 고향에 내려왔다. 1920년 봄 부친이 풀려나자 그는 1921년 일본으로 건너가 스가모(巢鴨)중학교 야간부에 입학, 졸업하였다. 1923년 귀국하여 10월 칠원읍 교회의 집사로 피선되었다. 이듬해 1월에는 정쾌조(鄭快兆)와 결혼하여 3남 2녀를 두었다.
1924년 3월 도일(渡日)했다가 성결교회의 나카다 주이치(中田 重治)목사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았다. 성결교 동양선교회의 노방전도에 큰 감화를 받고 하나님의 종으로 헌신할 것을 각오한 산돌은 매일밤 열심히 기도하던 중 성령의 뜨거운 체험을 하였다. 이때 그는 조국의 동포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일이 시급하다는 사명감을 느끼고 그 해 10월 귀국해 부산에 있던 경남 성경학원에 입학했다. 이곳에서 초량교회의 주기철(朱基徹) 목사와 친교를 맺고 그의 지도와 신앙에 감명받았다.
한편 부산 감만동 상애원이라는 나환자수용소 교회에서 전도사로 교역을 시작한 산돌은 '손불'이라는 별명이 붙을 정도로 열심히 집회를 인도했다고 전한다. 산돌은 "내 주소는 주님의 품속이며, 생일은 중생된 날입니다. 생일의 기쁜 잔치는 천당에 들어가는 그 날 뿐"이라고 말할 정도였다. 이후 산돌은 10여 년 밀양 수산교회, 울산 방어진교회, 남창(南倉)교회, 부산 남부민동교회, 양산 원동(院洞)교회 등을 개척 설립하였다. 그는 1935년 4월 평양 장로회신학교에 입학하여 신학공부에 열중하면서 능라도(綾羅島) 교회에서 전도사로 활동했다. 신학교에서도 산돌은 뜨거운 기도생활과 성경 읽기로 유명했다.
졸업한 다음 부산지방 시찰회 강도사로 목회자가 없는 작은 교회를 순회하며 복음을 증거했다. 이때도 그는 신사참배의 부당성을 설교하며 반대운동을 벌였다. 당시 신사참배를 결의한 경남노회는 산돌에게 목사 안수조차 해주지 않았을 뿐 아니라 나중에는 전도사 자격도 박탈하였다. 1939년 7월 15일 산돌은 신학교 동창인 김형모 목사의 추천으로 전남 여천군 율촌면 산풍리에 있는 나병환자 요양원 애양원(愛養院) 교회에 전도사로 부임하였다. 그는 이곳에서 일생을 나환자들과 함께 보내기로 결심했다. 그래서 이름도 '양원'으로 고쳤고 그의 부인도 양순(良順)으로 개명했다. 그는 버림받은 나환자들의 몸을 씻기고 상처난 손과 발을 싸매주었으며, 때로는 입으로 더러운 피고름을 빨아주기도 했다. 이처럼 언행이 일치된 산돌의 사랑에 넘친 신앙 실천은 애양원의 나환자들을 감동시켰다. 거듭되는 신사참배 강요에도 굴복하지 않던 산돌은 마침내 1940년 9월 25일 연행돼 여수경찰서에 미결수로 감금됐다. 1941년 7월 광주구치소로 이감된 산돌은 11월 광주지방법원에서 1년 6개월 형이 확정되었다. 1943년 5월 출옥될 예정이었으나 전향(轉向)해야 한다는 검사 위협에 "당신은 전향이 문제지만, 내게는 신앙이 문제"라면서 끝내 거부하였다. 결국 경성 구금소로 넘겨졌다가 1943년 10월 청주형무소로 이감되었다.
산돌은 독방에서 감식과 독감으로 고생하면서도 "빈 방 혼자 지키니 고적함을 느끼지만, 성삼위(聖三位) 함께 지내니, 네 식구 되는 구나"는 한시를 지었다. 이처럼 뜨거운 일념으로 주님을 섬겼던 그의 신앙은 오로지 감사와 자족의 충만함이었다. 그는 기도와 찬송과 암송한 성경읽기로 신앙을 굳게 지켜 '옥중성자'로 널리 알려졌다. 산돌은 감옥에서도 수감된 사람들과 간수들에게까지 전도하고 설교하는 일을 쉬지 않았다. 취조 때도 기독교의 국가관, 신관, 그리스도관, 성서관, 말세관 등을 설명하느라 조서가 무려 500여장에 달했다.
해방이 되어 1945년 8월 17일 6년 만에 출옥하자 산돌은 애양원교회에서 다시 나환자 목회에 혼신의 힘을 쏟았다. 그는 1946년 3월 경남노회에서 목사안수를 받아 새로운 목회인생을 시작했다. 그러던 중 1948년 10월 19일 여수-순천반란사건이 일어나고, 21일에는 당시 순천사범학교에 다니던 그의 큰 아들 동인(東仁)과 순천중학교에 다니던 둘째 아들 동신(東信)이 좌익에 의해 '예수쟁이' '친미주의자'라며 반동분자로 낙인찍혀 인민재판에 회부되었다. 기독교 신앙만 버린다고 약속만 하면 아들을 살려주겠다는 말에도 굴하지 않아, 마침내 그의 두 아들은 총살당했다.
10월 27일 애양원에서 산돌의 두 아들 장례식이 거행되었다. 이때 그는 '아홉 가지 감사'라는 설교를 통해 "나 같은 죄인의 혈통에서 순교의 자식을 나게 하시니 하나님께 감사, 두 아들이 함께 순교하였으니 더욱 감사, 자식들이 총살당하면서도 전도했음에 감사, 유학가려고 준비하던 아들이 더 좋은 천국에 갔으니 더욱 감사, 두 아들을 죽인 원수를 미워하지 않고 회개시켜 양자 삼고자 하는 사랑의 마음을 주셨음에 감사하다"고 말했다.
그 후 반란이 진압되고 아들 형제를 죽인 안재선도 체포되어 계엄사령부에 의해 총살당해야 할 처지에 있었다. 이 소식을 들은 산돌은 가해자의 구명을 탄원하는 운동을 적극적으로 전개하였다. 마침내 담당관들을 감복시켜 그가 출감되자 양아들로 입적하여 손재선이라는 이름까지 지어 주었다. 산돌은 양아들을 부산 고려고등성경학교에 입학시키고 그 부모까지 기독교를 믿게 만들었다. 그러나 곧 한국전쟁이 일어나 피난을 권하는 교인들에게 나환자 교인들을 버려두고 혼자 피난갈 수 없다고 거절했다.
교회를 지키던 산돌은 1950년 9월 13일 공산군에 체포되어 여수경찰서에 구치되었다가, 전세가 불리해 후퇴하던 이들에 의해 28일 새벽 여수 근처 미평과수원에서 총살당했다. 두 손바닥에 총탄이 지나간 흔적이 있어, 죽는 순간에도 기도했었음이 밝혀졌다. 10월 13일 오종덕 목사에 의해 장례식이 진행되었고, 애양원 뒤쪽 바닷가 동도섬에 산돌과 그의 두 아들의 무덤이 만들어졌다. 그리고 1993년 4월 이곳에 손양원 목사 순교기념관이 준공되었다. 한편 안용준(安瑢濬) 목사가 쓴 '사랑의 원자탄'(1949)이라는 산돌의 일대기가 출판되었으며, 훗날 이 책은 '씨앗은 죽어서'라는 이름으로 영어와 독일어 등으로 번역돼 해외에 소개되었다. 그리고 그의 일생은 홍형린 장로의 기획, 신양흥업 제작으로 1966년 6월 영화화되어 많은 사람들에게 큰 감명을 주었다.
산돌은 경건한 신앙인으로 평생 동안 기도의 삶을 살았으며, 항상 찬송하고 감사하는 모범을 보였다. 나아가 그는 소외된 이웃인 나환자들의 등불이자 친구였으며, 자신의 아들을 죽인 청년을 양자로 삼았을 정도로 경이로운 인물이다. 산돌은 '네 이웃을 사랑하라' '원수를 사랑하라'는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몸소 실천한 '초인적인 사랑의 사도'였으며, 무신론자에 반대하여 자신의 신앙을 철저하게 지켜 결국 목숨을 바친 위대한 순교자였다.
3. 애양원에서의 손양원
가. 여수 애양원
* 1909년 4월 3일 몸을 돌보지 않고 선교 활동에 전념하던 오웬 선교사는 급성 폐렴으로 순교하고 만다. 당시 오웬의 폐렴을 치료하기 위해 목포에서 활동 중이던 포사이드는 급히 광주로 오게 된다. 포사이드는 광주로 오던 중 남평 부근에서 길가에 버려진 여자 한센병 환자를 발견하게 된다. 포사이드 선교사가 길에 쓰러진 나환자를 치료한데에서 애양원의 설립 동기가 된다.
* 1911년 4월 25일 당시 전라도 광주군 효천면 봉선리에서 우월순 선교사에 의해 광주 나병원이 된다. 한국 최초의 나병원인 광주나병원은 1925년 현 여수시 율촌면 신풍리 1번지에 터를 마련하고, 1928년 한센병자 600여 명이 옮겨와 지금의 애양원을 이루게 되었다. 이어 1936년 여수 애양원으로 명칭을 바꾸면서 여수 애양원 시대를 열게 된다.
* 애양원 환자와 선교사, 의사의 신앙적 터전이었던 애양원교회는 대한예수교장로회(통합) 여수노회 소속 교회로서 애양원의 부속 전도실로 출발하였다. 애양원 교회의 제2대 담임목사인 손양원 목사는 1939년 7월 14일 부임하여 목회를 시작했으며, 1939년 일제에 항거한 ‘원탁회 사건’으로 손양원 목사와 장로들이 검거되어 옥고를 치르기도 하였다.
* 성산교회는 미국 남장로교 한국 선교회 소속 선교사들의 선교 활동으로 시작되었다. 벨 목사와 오웨 목사가 파송되었고, 그들의 목회로 1904년 12월 25일 성탄절 예배를 드림으로 선교가 시작되었다. 1916년 찾아드는 한센병 환자가 나날이 늘어나 1924년에는 560명에 달하게 된다. 그 후부터 광주 한센병자촌을 1928년 현재 애양원으로 이주하게 된다.
* 1935년 당시 원장인 윌슨 박사가 본원의 이름을 환우들에게 현상공모 하여 “애양원”이라는 이름이 채택되었다. 교회도 애양원교회로 불렀다. 그러다가 1982년 2월 28일 본원의 어린아이를 보호하자는 취지에서 교회 이름을 성산교회로 바꾸었고 현재까지 성산교회로 불리고 있다.
1909년 광주광역시에 설립된 나병환자의 요양소.
설립 당시 R.M.윌슨은 광주 제중원장직을 맡고 있었는데, 그가 10여 명의 나병환자를 모아 수용하였다. 이것이 한국 최초의 나병원인 광주나병원의 시작이었다. 애양원 한센병자 수용소는 미국남장로 교회 선교회의 전도 사업의 일부분으로 1909년 광주 양림에서 시작했으나 1925년, 이곳으로 이전 확장되었다. 1936년에는 명칭을 여수애양원으로 바꾸었다. 병원에 신학원을 설치하였는데, 일제의 강제 추방령 이후에는 선교사 보이어가 원장직을 맡아 이어갔다.
애양원의 애양원교회는 대한예수교장로회(통합) 여수노회 소속 교회로서 애양원의 부속 전도실로 출발하였다. 1939년에는 일제에 항거한 순천노회의 ‘원탁회사건’으로 손양원 목사와 장로들이 검거되었다. 1950년 6·25전쟁 때에는 목사 손양원이 애양원의 환자들과 함께 하다가 순교하였다. 1955년에는 한성신학교를 설립하였으나 곧 중단되었다. 이후에는 미국교회의 지원을 받아 나병환자 외에도 일반 환자도 진료하였다.
나. 애양원에서의 손양원 : 한센병자의 영원한 벗
손 목사는 신학교를 졸업한 후 36세의 젊은 나이로 이곳에 와서 순교할 때까지 목회를 하셨는데 그는 환우들과 함께 음식을 먹었으며 잠자리도 같이할 만큼, 사랑을 말로써가 아니라, 몸과 마음을 다하여 실천하면서 살아간 목자였다.
애양원에 부임한 손 목사의 하루는 한센병자들과 함께 하는 생활 이외에는 없었다. 당시 애양원에 있는 분들 중에는 병에서 완쾌된 상태의 분들도 많았지만 그 동안 심한 병마와 투병 과정에서 눈을 잃어버린 사람, 손이 꼬부라진 사람, 걸음걸이가 부자유한 사람, 얼굴이 알아볼 수 없을 형태로 일그러진 분들이 많았다. 그들은 부모 형제가 없는 고아들도 아니었다. 그러나 이 세상 어디에서도 그들을 따스한 사랑으로 감싸주면서 인간다운 대접을 해 주는 곳이 없었기 때문에 이 곳 애양원에서 일생을 보내려는 분들이 많았다.
설사 그들이 자유롭게 밖에 나간다 할지라도 나가는 그 순간부터 만나는 사람들이 자신을 피해 다니기가 일쑤였고, 차를 탄다거나 사람이 모이는 장소인 식당, 다방, 극장, 목욕탕이나 이발소에 간다는 것은 상상도 못하는 일이었다. 아무도 그들을 사람으로 대접해 주지 않았고 심지어는 가족들에게까지도 철저하게 외면된 삶을 사는 분들이 대부분이었다.
손 목사는 그들에게 있어서 신체적인 병을 치료해 주는 의사 못지 않은 희망의 상징이었다. 그들이 비록 육체는 말할 수 없을 정도로 일그러졌지만, 그들의 영혼은 찬송과 감사와 기도의 옷을 입혀서 아름다운 성도로 만들어야 한다는 결심이 손 목사에게는 힘이 되어 주었다.
당시 애양원에는 병으로부터 완치된 상태에 있는 분들과 함께 병이 악성으로 진행되고 있는 분들이 많았다. 그 중에서도 14호실은 애양원 전체에서 가장 상태가 심한 중환자들이 모여 있는 병실이었다. 14호 중환자실에는 같은 환우들도 가기를 꺼리는 곳인데 손 목사는 그 곳에 들어가서 중환자의 얼굴을 어루만지며 안아 주면서 기도를 해 주었다.
"당시 우리가 살고 있던 애양원에 딸린 병실로 쓴 가옥은 모두 17호실로 되어 있는데 1호실부터 10호실까지는 비교적 건강한 사람들이 지내고 있었고, 11호실부터 13호실은 경환자실, 14호실은 중환자실로 되어 있었습니다. 이 중환자실에 거주하는 몇 명은 차마 눈뜨고 볼 수 없을 만큼 흉악한 모습으로 병마와 싸우고 있었습니다. 이들의 상처를 한 번 치료하려면 간호원 둘이 매달려도 두 세 시간이 소요되었습니다.
온 방안에 진물과 핏자국, 땀들이 엉겨 붙어 도저히 그냥 들어갈 수 없음으로 상처를 보려면 방바닥에 신문지 세 장 정도를 깔고 들어가야 했습니다. 그래서 신문을 깔고 들어가려고 하면 그 환우들이 목침을 던지면서 같은 환자끼리 차별을 한다 하여 화를 내곤 했습니다. 이러한 방을 손 목사님은 서슴지 않고 들어가서 맨손으로 방바닥을 치우고 그 곳에 앉아서 그 흉한 환자의 목을 껴안고 이마를 대고 기도를 해 주었습니다. 그리고 기도 후에 그 곳에서 음식을 나누어 먹기도 했습니다.”
이러한 손 목사를 누구나 할 것 없이 사랑하게 되었다. 따라서 모든 교인들이 손 목사님을 너무나 좋아하고 따르니까 그것을 시기해서 손 목사를 지독스럽게 미워하고 헐뜯는 부인이 한 명 생겼다. 그 부인은 폐병 환자였는데 손 목사는 새벽 기도를 드린 후, 자기를 가장 미워하는 그 부인의 집에 매일 들러서 그의 머리에 안수 기도를 해주었고, 좋은 음식이 생기면 그 집에 가지고 가서 그를 대접했다. 이러한 손 목사님의 모습을 교인들이 보고 "목사님을 그렇게도 미워하는데 무엇 하러 가느냐?"고 묻자, 손 목사는 "사랑으로 녹여 내야 합니다."라고 대답했다고 한다. 결국 손 목사는 그러한 사람들을 사랑으로 녹여 낸 사랑의 목회자였다.
그리하여 세상에서 버림받아 의지할 곳 없이 외로이 지내던 한센병자들이 이와 같은 언행이 일치된 사랑이 넘친 신앙 지도를 받으면서 소망으로 살고, 기쁨으로 넘치는 찬송을 부르는 신앙의 소유자들로 변화되게 되었다. 손 목사는 그들의 신앙의 아버지가 된 것이다.
그는 8·15해방과 함께 감옥에서 나오자 곧장 이 사랑의 보금자리인 애양원 교회를 다시 찾았고 그리하여 교우들의 신앙은 더욱 불타오르게 되었다.
다. 여순 사건
1948년 10월 19일, 당시 제주 폭동사태를 진압하기 위해 여수에 집결했던 군인들 중 공산주의 사상에 물든 남로당 계열의 군인 일부가 반란을 일으켜 무고한 양민을 학살하는 반란군이 된 것이다. 이 세력에 동조했던 반란군들은 불과 4시간 만에 여수 시내의 경찰서와 각 파출소, 군청, 역 등 주요 기관을 장악할 정도로 기세가 등등했다.
순천까지도 반란군에 의해서 점령되면서 두 도시는 삽시간에 무법천지가 되고 공산 폭도들의 세상이 되어 버렸다. 반란군들은 그 동안의 불만 세력과 자익 추종 세력을 한데 묶어 인민 위원회를 만들어 자기들에게 동조하지 않는 사람이나 단체는 무조건 잡아 죽이는 천인공노할 민족 대학살의 광란극을 벌였다.
어제까지는 친구였던 사람들을 원수로 만들었고, 이웃이 적이 되어 고발하고 보복하는 인민재판이 열리는가 하면 계속해서 인민 대회를 열어 공포의 분위기를 고조시켰다.
라. 두 아들의 죽음 & 원수를 사랑한 손양원
1948년 10월 20일, 동인이와 동신이는 여수 중학교에 다니고 있었다. 이 곳에 공산당들의 반란 사건이 일어난 것이다.
동인이와 동신이는 학교 안에서도 기독교 학생으로 기회 있는 대로 학생들에게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였다. 반란 사건이 일어나자 공산주의를 지지하는 학생들이 동인이를 반동으로 끌고 갔다. 동신이는 따라 갔다.
반란군에 가담한 공산주의 학생들이 예수를 버리고 함께 협력하라 할 때, 동인이는 그렇게 할 수 없다고 강력히 반대하였다.
그들은 동인이를 총살하려 했다. 동신이가 나서며 형을 살려 주고 자기를 총살하라고 했다. 결국 동신이를 밀치고 동인이에게 총을 쏘았다. 동신을 뛰어가 소리쳤다. “왜 무죄한 자의 피를 흘립니까. 여러분의 죄를 어찌할려고 이러십니까. 이제라도 회개하고 예수를 믿으세요”하고 부르짖었다. 폭도들은 동신이마저 총을 쏘았다.
두 형제는 피어나지 못한 꽃봉오리로 순교의 반열에 들어선 것이었다. 이 사실을 알게 된 손목사는 그들을 죽인 원수들을 미워하기보다 영혼을 불쌍히 여기는 마음을 가졌다.
26일 어느 정도 반란군이 진압되었고 27일, 애양원 성도들이 보는 앞에서 장례식이 치러졌고 지금의 애양원 동산에 묻히게 되었다. 장례식 끝부분에 손목사는 이러한 고백을 했다.
"여러분, 내 어찌 긴 말의 답사를 드리리요. 내가 아들들의 순교를 접하고 느낀 몇 가지 은혜로운 감사의 조건을 이야기함으로 대신할까 합니다.
첫째, 나 같은 죄인의 혈통에서 순교의 자식들을 나오게 하였으니 하나님께 감사합니다.
둘째, 허다한 많은 성도들 중에 어찌 이런 보배들을 주께서 하필 내게 주셨는지 그 점 또한 주께 감사합니다.
셋째, 3남 3녀 중에서 가장 아름다운 두 아들 장자와 차자를 바치게 된 나의 축복을 하나님께 감사합니다.
넷째, 한 아들의 순교도 귀하다 하거늘 하물며 두 아들의 순교이리요. 하나님 감사합니다.
다섯째, 예수 믿다가 누워 죽는 것도 큰 복이라 하거늘 하물며 전도하다 총살 순교 당함이리요. 하나님 감사합니다.
여섯째, 미국 유학 가려고 준비하던 내 아들, 미국보다 더 좋은 천국 갔으니 내 마음 안심되어 하나님 감사합니다.
일곱째, 나의 사랑하는 두 아들을 총살한 원수를 회개 시켜 내 아들로 삼고자 하는 사랑의 마음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합니다.
여덟째, 내 두 아들의 순교로 말미암아 무수한 천국의 아들들 이 생길 것이 믿어지니 우리 아버지 하나님께 감사합니다.
아홉째, 이 같은 역경 중에서 이상 여덟 가지 진리와 하나님의 사랑을 찾는 기쁜 마음, 여유 있는 믿음 주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 감사 감사합니다.
끝으로 나에게 분수에 넘치는 과분한 큰 복을 내려 주신 하나님께 모든 영광을 돌립니다. 이 일들이 옛날 내 아버지, 어머니가 새벽마다 부르짖던 수십 년간의 눈물로 이루어진 기도의 결정이요, 나의 사랑하는 한센병자 형제 자매들이 23년간 나와 내 가족을 위해 기도해 준 그 성의의 열매로 믿어 의심치 않으며 여러분께도 감사드립니다."
여수, 순천 반란이 진압된 후 정세는 바뀌었고 동인, 동신 형제를 죽인 자들 중의 하나인 ‘안재선’이라는 학생도 체포되어 총살을 당하게 되었다. 그 소식을 들은 손 목사는 계엄 사령관에게 찾아가서 “나의 죽은 아들들은 결코 자기들 때문에 친구가 죽는 것을 원치 않습니다. 그 애들은 친구의 죄 때문에 이미 죽었습니다. 만일 이 학생을 죽인다면 그것은 동인, 동신 형제의 죽음을 값없이 만드는 것입니다.” 라고 하면서 그 학생의 석방을 간청하였다. 그리하여 그의 간청은 받아들여지게 되었고 손 목사는 그 학생을 손재선이라 하여 자신의 아들로 삼았다. 그도 손목사의 놀라운 사랑에 감동되어 양부로 따르게 되었고, 회개하고 교회 출석을 하게 되었다. 전도자가 되기 위하여 부산 고려 고등 성경학교에 입학까지 하였고 성경을 공부하였다.
4. 손양원의 배경
가. 가정적 배경 - 그는 우선 전통적인 유교 가정에서 자란 분이다. 그렇기 때문에 어릴 때부터 한문 서당에 다녀(물론 보통학교도 다녔음), 한문에 아주 능했던 사람이었다. 그래서 그의 편지나 글 가운데 7언 구로 된 한자 시들이 굉장히 많이 있다. 한문을 배우고, 전통적인 유교 교육을 받았기 때문에 무엇보다도 부모에 대한 효성이 아주 지극했다. 그가 애양원에 들어가서 거의 얼굴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심각한 한센병 환우 노인들에게 기쁨을 주려고 경로잔치를 시작한 것도 자기 부모님을 생각해서였다고 한다.
그의 부친을 향한 애정을 확인할 수 있는 대목이 하나 있다. 그는 옥중서신에서 부모의 백수, 즉 흰머리의 원인은 "소자 탓"이라고 말했다. 뿐만 아니라 "모친의 기일을 당한 나의 추억"이라는 제목으로 부인에게 쓴 편지에서 어머님의 은공자애를 추억해 마지않는다고 하면서 자녀들에게 이러이러하게 가르쳐 달라고 부인에게 부탁한 부분이 있다.
효행가운데서 가장 기본적인 것이 무엇이냐 하면 "혼정신성", 즉 저녁때 부모님 자리를 펴드리고, 신 새벽에 나와서 살피라는 것이다. 그리고 더 극진한 효는 부모님께 새벽에 옷 입을 때 추울 테니까 그것을 자기가 껴입거나 품속에 넣어 따뜻하게 해서 어른들이 춥지 않게 입히는 것이다. 이 혼정신성을 철저히 하도록 하라고 그의 자녀, 동인, 동신, 동희에게 부탁한 부분들이 있다. 바로 이 효행이야말로 "인자지도", 즉 사람의 도리를 다하는 것이라고 그는 얘기하고 있다.
그가 자녀들에게 보낸 편지에 이런 말이 있다. "선, 즉 착한 선도 하나님께서 허락하셔야 되는 것이니, 선을 행할 수 있을 때 대소를 불문하고 행하라" 이 말은 부모님에게 효행을 하고 싶어도 때가 있으니 놓치지 말라는 얘기이다.
나. 신앙적 배경 - 손양원목사님이 두 아들을 잃고도 하나님께 감사할 수 있었던 배경, 그리고 자신을 순교의 제물로 드릴 수 있었던 배경에는 자신의 신앙뿐 아니라 그가 오랫동안 시무했던 여수 "애양원" 즉 한센병자들의 요양소에서 생사고락을 같이하던 천여명의 성도들의 기도와 협력이 어우러져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의 아버님이 되시는 손종일 장로님의 돌아가실 때까지의 기도와 그의 부인의 끝없는 기도 또한 그 배경이 되었습니다.
5. 한국 교회에 미친 영향
가. 성장지상주의의 한국교회에 내실에 찬 순교정신을 심었다.
한국교회는 그동안 성장을 최대의 목표로 삼고 달려왔다. 그 결과 세계에서 가장 큰 맘모스교회가 우리 한국에 있으며 각 교단별로 세계적인 교회들이 우리 한국 내에 있다. 우리 한국교회는 이렇게 성장했다. 그러나 90년대에 들어서 한국교회의 성장이 멈췄고 오히려 마이너스 성장이라는 자가진단 속에서 역기능적 교회를 건강한 교회로 만들어야 한다는 자성의 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진정한 교회성장은 성숙이다. 성숙은 곧 정신이어야 한다. 영혼이 잘되는 것 그것이 성숙이다. 그런데 한국교회는 그동안 성숙보다는 교회의 외모적 성장에만 포커스를 맞추어 왔다. 얼마나 성숙한 교회냐? 얼마나 건강한 교회냐? 보다는 얼마나 성장한 교회냐? 교세가 얼마나 되느냐?에만 관심이 많았던 것이 사실이다. 물론 지금 여기서 성숙을 강조한다고 해서 성장을 무시하는 것은 아니다. 문제는 성장과 성숙이 균형을 이루어 함께 가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손양원목사의 순교정신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이러한 성숙의 영양분을 공급해줄 좋은 신앙유산이요 정신적 지주이다. 그래서 많은 목회자들의 사표가 되어 그분의 정신을 이어받기 위해 그분의 신앙순결, 용서와 사랑, 목양일념, 그리고 순교 앞에서 무릎을 꿇고 있다. 그분의 생애 앞에서 무릎을 꿇지 않을 자가 누구이겠는가?
1년6개월의 형을 살고 난 후 서기가 그를 석방해 주기 위해서 검사에게 이제 그의 신사참배 거부에 대한 생각이 많이 누그러졌다고 변호해줄 때 그는 그 즉시 그 말을 시정하여 신사참배 거부의 의지를 확실히 밝혔던 신앙 순결자였으며 정통신앙의 수호자였다. 자기의 두 아들이 순교를 당하자 오히려 감사의 조건 10가지를 내세워 하나님께 감사헌금을 드렸다는 일화는 목사님들의 설교 중에 한번쯤은 예화로 사용되어졌을 감사의 신앙, 그리고 아들을 죽인 안재선이가 잡혔다는 말을 듣고 그의 영혼이 불쌍해서 어쩌나? 불쌍해서 어쩌나?를 연발했던 그분의 숭고한 영혼사랑, 그리고 아들을 죽인 원수를 자기의 아들로 삼는 용서와 사랑, 6.25 당시 성도들이 목사님을 피난 가도록 그토록 요청했건만 양들을 두고 자기만 떠날 수 없다고 하면서 기필코 양들 곁에서 함께 있다가 결국 순교 당하신 그분의 생애 앞에서 무릎을 꿇지 않을 수가 있던가? 그리고 그분을 본받고 싶어하지 않을 목회자가 누구이겠는가?
실제로 애양원을 찾는 순례 객들이 1년이면 3,4만 명(손동희권사의 증언은 4만여명, 애양원교회는 3만여명), 매월 수천 명에 이르는 순례 객들은 손목사의 순교기념관, 그리고 동도섬에 위치한 3부자의 묘지 앞에서 신앙의 옷깃을 여미고 간다. 그들이 남기고 간 방명록의 통계(이광일, 손양원목사의 생애와 사상)에 의하면 믿음의 도전을 받았다는 사람이 45%, 순교신앙 및 손양원목사를 본받겠다는 사람이 50%, 참사랑의 진리를 깨달았다는 사람이 3%, 기타가 2%이다. 특별히 그 중에는 불신자가 이곳에 왔다가 예수를 믿겠다는 사람도 있다. 이렇게 볼 때 손양원목사의 신행일치 순교신앙이 한국교회의 신앙적 성숙에 얼마나 큰 지주역할을 하고 있는가를 알 수 있다.
나. 모범적 전도자로서 한국교회 성장에 일익을 담당했다.
그는 자기의 신앙을 지키는 것, 그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그는 자기 자신이 하나님의 말씀대로 사는 것, 그래서 신사참배를 거부하고, 안재선을 용서하는 등의 개인적 신앙과 경건생활뿐만 아니라 복음전도에 자기의 일생을 바쳤다.
바울이 아그립바왕이나 베스도, 벨릭스 총독 앞에서 심문하는 그들에게 오히려 "나와 같이 되기를 원하노라"하면서 전도했던 것처럼 손목사도 그랬다. 천황폐하를 신으로 받아드리지 않고 신사참배를 거절하는 이유를 설명하면서 하나님만이 유일신이요 예수만이 속죄주인 것을 전하는 전도의 기회로 삼았다. 물론 그러한 증언이 자기의 재판에 불리하게 작용되어진다는 사실을 앎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안위보다 심문하는 검사를 전도하고자 하는 뜨거운 영혼구원의 열정 때문이었다. 그가 1년6개월의 형을 선고 받고 난 후 항고를 한 적이 있는데 그 후 그는 아버지에게 보낸 편지에서 이렇게 고백한다. "내가 항고한 것은 재판이 잘못되었거나 1년6개월 감옥살이하는 것이 싫어서 불평의 감정을 나타내거나 벌을 면해보려는 의도 때문이 아니라 오히려 한 번 더 재판을 받게 되면 재판정에 가서 기독교 진리를 더 당당하게 얘기할 수 있는 기회를 얻을 수 있으므로 항고한 것이니 아버지, '저 놈이 감옥살이하기가 싫으니까 구차스런 항고까지 했다'고 생각하지 말아주세요"하며 그는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복음을 전하는 전도자였다. 그의 전도는 옥중에서도 그치지 않음으로 인하여 결국 독방으로 옮겨지기까지 했다.
그는 1926년 3월 경남성경학교에 입학한 후 부산 감만동교회 교회의 외지전도사로 부임한 이래 밀양수산, 울산방어진, 울산남창, 부산감만동, 부산남부민, 양산원동교회등을 개척하였다. 또한 그는 이미 1938년 9월 9일 저녁 8시에 평양 서문 밖 교회에서 예수교 장로회 총회 27회 회의 중에 결의되어진 신사참배를 반대운동을 한다는 이유로 시찰회에서 순회전도비를 지불하지 않고 결국 그를 면직시켰음에도 불구하고 양산, 김해, 함안지역을 다니면서 전도를 쉬지 않았다.
이러한 손목사의 삶을 계승하기 위하여 애양원교회는 계속 전도에 힘을 쏟아왔는데 그들은 거의 모두가 건강치 못하여 "가지 못하거든 보내는 선교사가 되자"라는 마음으로 자신들의 소중한 물질을 쏟아서 지금까지 33개의 교회를 개척하기에 이르렀다(이광일, 손양원목사의 생애와 사상). 그리고 성서암송반 식구들 소수가 헌신하며 출발했던 모임이 '떨기나무 선교회'를 거쳐 지금은 교외적인 '손양원목사 순교 기념 선교회'로 발전되어 교회개척 및 해외선교, 북한선교에 앞장을 서고 있다.
다. 민족정신과 희생정신의 간접 전도로 교회성장을 도모했다.
현대 그리스도인이 전도하는데 있어서 약점이 있다면 그것은 불신자들의 모범이 되지 못한다는 가슴 아픈 현실이다. 신자는 불신자에게 있어서 걸어 다니는 성서라는 말이 있듯이 신자는 불신자들에게 아름다운 본이 되어야 하는데 그렇지 못한 것이 아쉽다. 특별히 현대에 들어와서는 직접전도의 효과가 많이 약화되어간다는 점에서 바라볼 때 손목사의 사랑과 용서의 삶은 많은 불신자들까지도 감명을 받는 것이 사실이다.
손목사는 직접전도자로서 엑기스적인 복음을 전했을 뿐만 아니라 병원선교, 나환자 보호 등을 통한 간접전도도 병행하였다. 그는 소싯적 일본에 건너가 동양선교회에서 하는 노방 전도에 동참하여 북을 메고 거리를 돌아다니는 열성적 전도자였으며, 감옥에서, 교회에서, 부흥회에서 그는 유일신 하나님, 속죄 주 예수 그리스도의 엑기스적 복음을 전하며 회개를 강조하였지만 그는 직접전도만을 고집하지 않았다.
그는 민족주의자였다. 그는 일찍이 아버지 손종일장로의 3.1만세운동 가담으로 인하여 서울중동학교에서 퇴학을 당하는 뼈아픈 경험을 갖고 있었다. 그는 이러한 경력을 가지고 나라를 잃은 동족들의 곁에서 함께 아파하고 저항하면서 현실속의 민족애적 정신을 고수하였다. 예수님이 성육신하시어 우리 인류의 친구로 오셨던 것처럼 손목사는 고결한 경건주의자로서 은둔해있지 아니하고 민족주의자로서 동족들과 함께 고통을 겪었다.
당시 1919년의 3.1운동이 조국의 광복을 이루지 못한데 대해 1920년대의 한국교회는 타계주의 신앙을 강조하기 시작했다. 길선주, 김익두, 이용도목사 등이 새 하늘과 새 땅을 강조하면서 '예수 믿고 천국 간다'는 내세지향적 신앙으로 나가게 되었다. 1930년, 40년대까지 일제의 압제 밑에서의 박해와 50년대의 6.25사변으로 인한 민족적 혼란 등으로 더욱더 이러한 타계주의적 신앙은 한국교회에 팽배했다.
이러한 때에 손목사는 소위 하늘나라의 영광과 이 땅의 생활자체를 분리하지 않고 하나로 융합하려는 일원론적인 하나님나라 관을 갖고 있었다. 그래서 그의 "기독교신앙"이라는 글에서 "현재를 업신여기고 장래의 광명을 안전(眼前)에 보는 소망, 이것도 신앙은 아니다"라고 하면서 현실속의 민족애적 정신을 강조하였다.
그리고 애양원에서는 매년 한차례씩 경노잔치를 벌인다(손동희, 나의 아버지 손양원목사). 이 잔치는 손목사가 애양원에 온 이후부터 시작된 것이다. 한국교회가 92년 말 통계에 의하면 기독교 인구가 13,700,000명, 천주교는 3,500,000명으로 집계되었다. 개신교와 천주교를 합하면 우리나라 4천3백만 인구 가운데 기독교 신자는 무려 17,200,000명이 된다. 이 수치는 전국민의 40%에 이르는 수치이다. 이렇게 기독교가 발전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한국교회가 소홀히 한 부분이 있다면 그것은 대사회적인 프로그램, 즉 사회에 대한 관심도와 공헌도에 있어서는 상대적으로 부족했음을 우리는 솔직히 자인해야 한다. 그런데 손목사는 벌써부터 대사회적인 관심을 갖고 경노잔치를 베풀어 어른을 공경함으로 간접전도의 계기를 만들었다.
그는 또한 나환자의 친구가 되어 가족들보다도 나환자들 곁에서 시간을 더 많이 보냄으로 그의 자녀들은 아버지의 사랑을 그리워하는 허전함을 억눌려야 하는 안타까움을 머금고 자랐다. 특별히 그는 나병원 14호실(중환자실)에 있기를 즐겨 하였으며 그들과 함께 음식을 나누어 먹고, 심지어는 나병의 환부에 사람의 침이 약이 된다고 하여 입으로 피고름을 빨아내는 일도 마다하지 않았다(손동희, 나의 아버지 손양원목사). "손목사님, 저러다가 정말 우리처럼 문둥병에 걸리시는 건 아닐까?"하고 염려들 하였지만 그럴 때마다 손목사는 "차라리 내가 나병에 걸렸으면 오죽 좋겠나..."하면서 오히려 성육신적 정신으로 그들의 친구가 되기를 원했던 사랑의 성자이었다.
라. 그의 수용정신은 한국교회의 갈등에 화해를 심었다.
손목사는 신사참배를 거부하는 신앙적 순결을 지킴으로 인하여 6년간의 옥고를 치렀다. 그리고 그와 함께한 하나님이 숨겨놓은 7천의 의인들이 있었다(왕상19:18). 그런데 문제는 해방이후 지난날의 변절자들을 어떻게 대하느냐의 문제가 대두되었다. 그때 재건파가 탄생되었는데 그들은 지난날 신사 참배한 교회나 목사, 성도들을 용납하지 않고 마귀 당이라고 몰아세우며 정죄했다. 그러므로 해방이후 교회가 심한 갈등에 휩싸였다.
그러나 손목사는 수용주의의 입장에 섰다. 진리를 거절하는 이단은 수용할 수 없어도 일시적으로 배도한 후 회개하고 돌아오는 형제는 받아야 하는 것이 교회사적 교훈이요 성경의 진리이다. 탕자를 받아드렸던 아버지의 심정으로 아들을 죽인 원수를 양자로 삼아 보살핀 사건은 그의 이러한 입장을 충분히 대변하고 있다.
몇 년 전, 지금은 고인이 되었지만 탬플턴상을 수상한 한경직목사가 수상소감을 말할 때 "나는 신사 참배자입니다. 나는 용서 받지 못할 신사 참배자입니다"라고 고백했는데 만약에 해방 후 한경직목사와 같은 분을 '순결'이라는 이름으로 처단했다면 한국의 성자라고 불리우는 그런 분이 탄생할 수 있었겠는가?
-> 손양원목사의생애는그의개인생애로서끝난것이아니라한국교회성숙의정신적푯대요, 교회성장의 밑거름이었다. 그리고 그는 이원론적인 생각 속에서 쉽게 선과 악을 흑백의 논리로 단정 지어 배척하는 한국교회의 전도방법에 경종을 울림과 동시에 자기 자신에 있어서는 그토록 철저한 신앙적 순결을 고수했던 경건자였다. 또한 교권장악과 교회의 순결이라는 미명아래 분열을 너무나 쉽게 여기는 오늘의 우리 한국교회에 큰 교훈을 던져주고 있다. 오늘의 한국교회 부흥은 바로 이 손양원목사와 같은 순교자의 피를 먹고 이루어졌다.
손양원 순교기념관 모습 |
순교자비 |
초기 애양병원의 모습 |
애양원 역사박물관 |
한국 근대문화유산으로 등재되어있다. |
애양원 교회 종 |
애양원 학교 |
포싸이트 원장 |
최홍종 목사 |
뒤로 보이는 마을이 한센병 완치 자활촌 |
순교자 기념비 |
새롭게 조성된 유적지 |
7. 공식 홈페이지 http://www.aeyangwon.org/ 애양원과 손양원 목사
2012 여수세계박람회를 기점으로 여수 기독교총연합회에서 처치스테이를 통해 교회의 교육관 등을 숙소로 내 놓으면서 순교유적지를 대대적으로 보수공사해서 공원으로 단장했으며 홈페이지도 새롭게 개통했다.
8. 관련 도서 및 자료
탄생 110주년 기념 옥중서신집‘사랑의성자 손양원 옥중서신집’ |
예울마루에서 열린 뮤지컬 ‘손양원’포스터(박재훈 창작 오페라) |
극단파도소리 손양원 목사의 삶을 그린 창작극 ‘용서를 넘어선 사랑’ |
역사 소설가인 유현종 작가가 쓴 <소설 손양원 사랑과 용서> |
<하얀 불꽃>, 손양원 목사님의 일생을 다큐멘터리 형식으로 따라가며 창작을 가미한 전기동화 |
손양원 목사 순교 유적 공원 준공 예배(성산교회) 2012.5. |
9. 참고문헌 및 인터넷사이트
차종순 애양원과 손양원 목사 / 여수애양원 성산교회 / 2005
손동희 나의 아버지 손양원 목사 / 아가페 / 1994
김명준 손양원 목사의 생애와 사상에 관한 연구 / 안양대학교 신학대학원 / 1998
http://www.aeyangwon.org/ 애양원과 손양원 목사 홈페이지
http://cafe.daum.net/operasohn 오페라 ‘손양원’ 공식 카페
http://cafe.daum.net/forgivepasslove 용서를넘어선사랑(극단 파도소리)
http://cafe.daum.net/PilgrimsWay 기독교 성지순례(국내성지순례 여행정보)
애양원교회 영화CD 사랑의 사도 손양원(영어자막 포함) / 글로리아TV프로덕션 / 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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