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의 오사카는 백제 속국중의 하나였다! (breaknews.com)
일본의 오사카는 백제 속국중의 하나였다!
백제의 찬란한 역사 들여다보기! / 강동민 칼럼니스트
최치원이 당나라 태사시중에게 올린 글에서 “고구려 백제가 전성기에는 강한 군대가 백만이나 되어서 남으로는 오월(吳越)을 침략하고 북으로는 유(幽), 연(燕), 제(濟), 노(魯)의 지역을 뒤흔들어서 중국의 큰 두통거리가 되었다.(高句麗 百濟 全盛之時 强兵百萬 南侵吳越 北獶幽燕濟魯 爲中國巨蠹)”라고 하였다.
최치원이 당나라의 태사시중에게 이런 말을 할 수 있었던 것은 과장이 아니라 바로 중국의 강소성, 산동성, 하북성 등지에 백제가 존재하고 있었으며, 이 지역의 태수를 임명한 기록이 중국의 역사 사료를 통해 뒷받침되기 때문에 가능했다고 본다.
백제가 고구려도 시행하지 못한 왕후(8왕과 4후를 봉함)제도를 시행하고 중국 동북, 동남방의 광활한 지역과 일본 여러 곳에 태수와 왕을 임명했다는 사료의 기록은 백제 영토 범위가 드넓은 대륙과 일본 지역에 뻗쳐 있었다는 사실이다.
백제에는 대성 팔족(大姓八族)이 있는데 사씨(沙), 연씨(燕), 협씨(劦), 해씨(解), 진씨(眞), 국씨(國), 목씨(木), 묘씨(苗)이다.(수서 권81 제46동이 백제전)
백제가 분명한 역사의 국가였기 때문에 이들 8대 성이 백제 멸망과 함께 모두 죽지 않은 이상 현재에도 그 후손이 남아 있어야 한다. 현재 대한민국에는 연燕씨가 1985년 조사에서 남한에 26가구, 104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국國씨는 1930년 국세조사 당시 평남 강서군에 담양 국씨潭陽國氏 4가구와 함남 영흥군에 풍천 국씨豊川國氏 3가구, 함남 단천군에 전주 국씨全州國氏 1가구가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1985년에는 남한에 978명이 있는 것으로 조사됐다. 진眞씨 성을 가진 사람들은 서산 진씨西山眞氏 단본으로 1930년도 국세조사에서 함북 종성군에 유일하게 한 가구가 있었다. 2015년 조사에서는 그 숫자가 파악되지 않았다. 나머지 성씨들인 사沙씨, 협刕씨, 해解씨, 목木씨, 해解씨도 거의 찾아볼 수 없다.
그런데 현재 중국에 연씨燕氏는 26만 명(중국 성 순위 258위)이 살고 있고, 국國씨는 인원수 불명이다. 사沙씨는 49만 2천 명이 살고 있고, 원류지가 산동성과 하남성 여남군이라고 한다. 해解씨는 67만 6천 명(185위)이 살고 있고, 산서성 남부 운성시 해현을 원류 분포지로 하여 산서성 임분현 평양군平陽郡에 분포되어 있다고 알려져 있다.
당시 백제에서 시행했던 왕후제도(王侯制度)는 우현왕(右賢王), 좌현왕(左賢王), 면중왕(面中王), 도한왕(都漢王), 아착왕(阿錯王), 매로왕(邁盧王), 매라왕(邁羅王), 벽중왕(辟中王), 팔중후(八中侯), 불사후(弗斯侯), 불중후(弗中侯), 면중후(面中侯) 등이 그것이다.
이들은 백제에서 임명한 왕과 제후들의 명칭인데 동양의 전통사회에서 왕과 후를 거느린다는 것은 황제국의 천자만이 가능한 일인데다 이는 고구려나 신라에서는 찾아볼 수 없고 백제의 경우에만 발견되는 특수한 제도이다.(송서 동이전. 남제서 동남이전)
백제는 여러 왕과 후를 세워 훈의(勳懿)에 보답하였으며 송. 제 시대로부터 이미 그러 하였다. 그렇다면 이는 국토는 넓고 백성은 많았다는 증거가 된다.(흠정만주원류고)
또 백제에서 임명한 태수들 중에 광양태수(廣陽太守), 광능태수(廣陵太守), 성양태수(城陽太守) 등이 있는데 광양, 광능, 성양이란 지명은 당시 한반도에는 없고 중국에 있던 지명들이다. 이것은 남북조 시대 때 백제의 영토범위가 오늘의 중국 동북지역에 국한되지 않고 동남방의 하북성, 산동성, 강소성까지 확대되었다는 것을 뜻한다.
동명(東明)의 후손으로 대방(帶方) 고지(故地)에 팔성이 있었다.(옥해(玉海) 권154 헌방물조)
8대 성씨가 백제의 대표 성씨인데 한반도에는 그들의 성씨를 찾아보기 어렵다.
백제인의 성씨 중에 난(難)씨가 있었는데 중국에는 ‘난씨’가 많으나 한국에는 없다.
또한 8대성 중에 ‘진’씨가 상곡에서 명망이 높다. 상곡은 하북성 동쪽에 있다.
삼국사기 백제본기에는 백제가 당나라 병사 13만과 신라 병사 5만에 의하여 의자왕이 항복하였다. 웅진이 함락되었을 때 처음에 흑치상지가 도망하여 흩어진 무리들을 모으니, 열흘 사이에 따르는 자가 3만여 명이었다. 소정방이 이들을 공격하니 흑치상지가 이들과 싸워서 승리하고, 다시 200여 성을 빼앗으니 소정방이 이길 수 없었다.
본래 흑치상지(黑齒常之)의 고향은 ‘장족 자치구와 베트남’인데 할아버지가 봉 받은 곳이 그곳이었고 그곳에서 태어나서 자랐으며, 충치를 예방하기 위해 풀뿌리를 씹는 습관 때문에 이빨이 검게 되었다고 하여 흑치라고 하였다.
중국의 서남쪽에 까지 백제가 통치하였으니 그곳에는 지금도 ‘백제허’가 남아있다.
분명한 것은 삼국지, 구당서, 당서, 삼국사기, 삼국유사, 만주원류고 등에 당시 백제의 인구가 76만호였고 200여 성이 경기도, 충청도, 전라도 지역에는 없는 것이고, 한반도 조선 초기에 인구가 10만호를 넘지 않았다는 것을 참고한다면, 중국의 요동성과 하북성, 산동성, 강소성 등의 지역에 백제가 있었다는 확실한 사실을, 사료에 의한 증거를 확보하여 우리 국사교과서에 정확하게 기록하여야 한다.
우리나라 고등학교 국사교과서 내용을 보면 “백제가 괄목할 만한 발전을 이룩하게 된 것은 4세기 후반 근초고왕 때의 일이었다.
지금의 일본 나라현 텐리(天理)시의 석상신궁(石上神宮 : 이소노가미신궁)에는 백제 근초고왕(近肖古王 : 346~375 재위)과 귀수세자(뒷날에 근수구왕, 375~384 재위)가 일본의 후왕에게 하사한 “칠지도(七支刀)”가 보존되어 있다.
칠지도의 칼 앞뒤 양면에 60여자가 금상감(金象嵌)으로 음각되어 있다.
이 내용을 번역하면 다음과 같다.
[앞면] 泰和四年五月十六日丙午正陽造百練銅七支刀以僻百兵宜供供侯王OOOO作 : 태화4년(369년) 음력 5월 16일 병오날 대낮에 무수히 거듭 담금질한 강철로 칠지도를 만들었노라. 모든 군사를 물리칠 수 있도록 후왕에게 보내 주노라 OOOO 만듦
[뒷면] 先世以來未有此刀百滋王世子奇生聖音故爲倭王旨造伝示後世 : 선대 이래로 아직 볼 수 없었던 이 칼을 백제왕 및 귀수세자는 성스러운 말씀으로 왜왕을 위해 만들어 주는 것이므로 후세에까지 잘 전해서 보존토록 하라.
식민지인 왜나라를 잘 보전할 뿐 아니라 후대에까지 전승시키면서 번창하라는 백제왕의 어명이었다.
삼국사기 472년조에는 백제의 개로왕(蓋鹵王, 455~475 재위)은 “장사여례(長史余禮)”를 ‘불사후(弗斯侯)’로 삼았다는 기록이 있다.
2002년 3월 20일 ‘아끼히토 일왕’이 “제50대 간무왕의 생모는 백제 무령왕의 직계 후손이다. 내 몸에도 한국인의 피가 흐르고 있다.”라고 기자회견을 하며 밝혔다.(뉴스위크 : 2002. 3. 20일자 한국어판)
백제의 속국 중 하나였던 ‘오사카’는 지금도 백제(百濟 : 구다라<日>)라고 부르는 지명이 많은데, 오사까시의 공립학교인 ‘남백제(南百濟)초등학교’를 비롯하여 철도역인 ‘백제역’과 시내버스 정류장인 ‘백제’와 ‘백제다리(교)’ 그리고 백제인 왕족의 신주를 제사 모시는 큰 사당인 ‘백제신사’ 등 백제와 관련된 흔적들이 너무 많이 남아있다.
뿐만 아니라 동경 쪽과 규슈 쪽의 백제도 수없이 많다.
백제는 중앙아시아로부터 중국의 서남쪽을 비롯하여 동남쪽과 동북쪽까지 더하여 일본까지 광대한 지역을 지배한 대제국이었다. 앞으로 많은 학자들이 더욱더 연구하여 빛나는 백제의 역사를 밝혀주시길 바란다. hanminjock1944@hanmail.net
*필자/강동민. 한민족문화연구원 이사장.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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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남아시아 전체가 백제의 무대였습니다.
베트남,태국,말레이시아,인도네시아, 필리핀,일본열도등등에 많은 문명을 전파했는데...
나중에 현지인놈들이 해상무역상인에서 무력을 동반한 해상무역상인세력인 왜구가 되어서 돌아옵니다.
백제 22담로는 정화함대(신대륙발견)로 이어지고,
그리고, 임진왜란(내전,반란)으로 이어지는데...
백제허를 중국어로 읽으면 '다이쯔쉬' 그런데 그 곳 주민들은 자신들의 마을 이름을 '대백제' 또는 '대박제' 라고 부른다.
백제 22담로중 하나인 광서 장족자치구(계림)에 위치한 "백제허"의 흔적
“백제는 원래 5部 37郡 200城 76만호로 구성되어 있었다.”라고 기록되어 있으며, “백제의 5도독부 가운데 하나인 동명도독부는 요동의 개원에 있었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당시 백제에서 시행했던 왕후제도(王侯制度)는 우현왕(右賢王), 좌현왕(左賢王), 면중왕(面中王), 도한왕(都漢王), 아착왕(阿錯王), 매로왕(邁盧王), 매라왕(邁羅王), 벽중왕(辟中王), 팔중후(八中侯), 불사후(弗斯侯), 불중후(弗中侯), 면중후(面中侯) 등이 그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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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는 여러 왕과 제후를 두는 황제국 입니다,
76만호면 (1호당 8명~10명 살았다 치면) 백제인구는 700만명 정도로 추정할수 있습니다
700만명이 한반도 전라도/충청도에서 모여 살았다는걸 믿지는 않겠죠.
통계청이 추정하는 한반도 조선초기 인구는 500만명입니다.
그럼 400년전 고려초기는 300만명도 안되야 하는거죠.(인구자연증가율 고려시)
최치원이 당나라 태사시중에게 올린 글에서 “고구려 백제가 전성기에는 강한 군대가 백만이나 되어서 남으로는 오월(吳越)을 침략하고 북으로는 유(幽), 연(燕), 제(濟), 노(魯)의 지역을 뒤흔들어서 중국의 큰 두통거리가 되었다.(高句麗 百濟 全盛之時 强兵百萬 南侵吳越 北獶幽燕濟魯 爲中國巨蠹)”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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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한(총인구수 5천만명) 병력수는 60만명 입니다,
북한(총인구수 2.8천만명) 병력수는 100만명 입니다,
북한기준으로 본다면 고구려+백제 총인구는 2천만명~2천5백만명은 되어야 합니다,
통계청이 추정하는 조선초기 총인구는 5백만명 입니다.
고구려/백제/신라가 한반도에 있을수는 없습니다.
근데..이런식이면...일본도 다 지배했었네!!~로 전부 언제나 영원히 지들 땅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는지요...
점령 침탈 지배가 문제가 아니라..그 지역 사람들의 의식이 모든 것을 결정할 것이라고 보는데요....
모르면 가르쳐야하는게 아니라.....스스로 찾고 선택해서 동화되고 싶어져야..
백제 22담로는 무역기구 입니다.
침략기구가 아니라...
조차지+대사관 기능입니다.
문명전파 및 지역의 특산물 수출입하는 기능이라고 보시면 됩니다.
직접 통치하는 지배라는 개념보다는
제후국 정도로 보시면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