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이브에 의하면
“1908년 프랑스인 폴 펠리오(Paul Pelliot, 1878~1945)가 간쑤성 둔황의 막고굴 장경동에서 당시 장경동을 지키던 왕위안루(왕원록)에게서 구매한 7,000점의 유물 중에 섞여 있었으며, 현재 프랑스 국립도서관에 보관되어 있다. 처음에는 당나라 고승 현장 이외의 당나라 승려로 여겨지다가 당시의 일본 서본원사의 승려이자 돈황학자인 오타니 고즈이가 신라승 혜초의 것임을 밝혀내었다.
현재는 한 권의 두루마리로 된 필사본만이 남아 있는데, 책명도 저자명도 떨어져 나가 남아 있지 않으며 여러 글자가 결락되었다. 그러나 여러 불교 서적에 주석을 단 《일체경음의》에 “혜초왕오천축국전”이라는 제목 아래 여러 어휘가 설명되어 있는데, 이들 어휘와 순서가 잔본과 대체로 일치하는 바 이것이 혜초의 왕오천축국전임을 알 수 있다.(당나라 727년 경 저술)
여행 경로는
신라에서 바닷길로 인도에 다다랐다. 사대령탑(四大靈塔) 등의 모든 성적(聖蹟)을 순례하고 오천축국(五天竺國)의 각지를 두루 다녔다. 그리고 토번국(吐蕃國, 티베트)과 대불림국(大拂臨國(비잔틴제국) 등 나라도 들렸다고 한다.”
그러나 위 글에서 보듯이 다른 글에서 책 이름과 스님의 이름 “혜초왕오천축국전”을 발견했다하고, 727년에 출발지가 신라에서 바닷길로 인도에 다다랐다는 점에 금방 수긍이 가지 않는다.
그리고 인도는 물론 토번국과 지중해를 낀, 비잔틴제국도 다녀 왔다고 하므로, 유럽에서 塔克拉玛干(Taklamakan) 사막을 건너와서, 사막의 동쪽 끝, 돈황에 머물면서 쓴 글이라고 사료되는 바, 당나라 시대라고는 해도, 온 세상이 우리말을 사용하던 때이었다.
이를 테면 토번은 고지대에 ‘뜨번’ 즉, 높은 곳 또는 공중에 ‘뜨있는 나라’라는 뜻이고, 塔克拉玛干은 사막이 한반도의 1.5배에 달하는 거대한 사막이므로, 죽지 않기 위하여 어서 이 사막을 건너서, 건너편에 ‘다끄라마 칸’ 다시 말하면 ‘닫그렴아, 카는’ 염원을 담은 우리말을 사용하던 시대이었다.
앞에서 본대로 싱가포르가 新加坡 즉 백제가 부르면 ‘씽 가뻐’고, 印度(이리다오)하면, 드리고, Byzantium(비잣찌우) 제국에서도, 더 넓은 중국 땅에서도, 우리말이 통하는 세계를 보고 그는 어떤 생각이 들었을까? 그가 신라로 돌아가지 안았던 것을 보면, 중국 땅을 근거로 살던 백제인일 수도 있다고 본다. 그렇다면 “혜초왕오천축국전”을 중국말 식으로 해석하면 절대로 안된다고 본다. 혜초를 사람 이름으로 본 것은 오타니 고즈이의 잘못이라고 본다. 그러므로 그가 먼길을 ‘혜쳐 와, 오(ㅅ), 처쭈구져’라면서 고달펐던 여정을 소회하는 글이 아니었을까?
그래서, 특히 그 스님이 어디서 출발헤서 어떻게 인도(이리 다오)로 갔느냐 하는 문제는 꼭 밝혀져야 하는 아주 아주 중요한 문제이다. 더더구나 그 스님은 신라로 돌아가지도 않았다고 하니, 더욱 그 분의 출발지가 궁금하다.
부디 후학 여러분께서 직접, 그 글을 보시고 밝혀주시기를 기원합니다.
(1220회) 다시 往五天竺國傳; 최종
네이브에 의하면
“1908년 프랑스인 폴 펠리오(Paul Pelliot, 1878~1945)가 간쑤성 둔황의 막고굴 장경동에서 당시 장경동을 지키던 왕위안루(왕원록)에게서 구매한 7,000점의 유물 중에 섞여 있었으며, 현재 프랑스 국립도서관에 보관되어 있다. 처음에는 당나라 고승 현장 이외의 당나라 승려로 여겨지다가 당시의 일본 서본원사의 승려이자 돈황학자인 오타니 고즈이가 신라승 혜초의 것임을 밝혀내었다.
현재는 한 권의 두루마리로 된 필사본만이 남아 있는데, 책명도 저자명도 떨어져 나가 남아 있지 않으며 여러 글자가 결락되었다. 그러나 여러 불교 서적에 주석을 단 《일체경음의》에 “혜초왕오천축국전”이라는 제목 아래 여러 어휘가 설명되어 있는데, 이들 어휘와 순서가 잔본과 대체로 일치하는 바 이것이 혜초의 왕오천축국전임을 알 수 있다.(당나라 727년 경 저술)
여행 경로는
신라에서 바닷길로 인도에 다다랐다. 사대령탑(四大靈塔) 등의 모든 성적(聖蹟)을 순례하고 오천축국(五天竺國)의 각지를 두루 다녔다. 그리고 토번국(吐蕃國, 티베트)과 대불림국(大拂臨國(비잔틴제국) 등 나라도 들렸다고 한다.”
그러나 위 글에서 보듯이 다른 글에서 책 이름과 스님의 이름 “혜초왕오천축국전”을 발견했다하고, 727년에 출발지가 신라에서 바닷길로 인도에 다다랐다는 점에 금방 수긍이 가지 않는다.
그리고 인도는 물론 토번국과 지중해를 낀, 비잔틴제국도 다녀 왔다고 하므로, 유럽에서 塔克拉玛干(Taklamakan) 사막을 건너와서, 사막의 동쪽 끝, 돈황에 머물면서 쓴 글이라고 사료되는 바, 당나라 시대라고는 해도, 온 세상이 우리말을 사용하던 때이었다.
이를 테면 토번은 고지대에 ‘뜨번’ 즉, 높은 곳 또는 공중에 ‘뜨있는 나라’라는 뜻이고, 塔克拉玛干은 사막이 한반도의 1.5배에 달하는 거대한 사막이므로, 죽지 않기 위하여 어서 이 사막을 건너서, 건너편에 ‘다끄라마 칸’ 다시 말하면 ‘닫그렴아, 카는’ 염원을 담은 우리말을 사용하던 시대이었다.
앞에서 본대로 싱가포르가 新加坡 즉 백제가 부르면 ‘씽 가뻐’고, 印度(이리다오)하면, 드리고, Byzantium(비잣찌우) 제국에서도, 더 넓은 중국 땅에서도, 우리말이 통하는 세계를 보고 그는 어떤 생각이 들었을까? 그가 신라로 돌아가지 안았던 것을 보면, 중국 땅을 근거로 살던 백제인일 수도 있다고 본다. 그렇다면 “혜초왕오천축국전”을 중국말 식으로 해석하면 절대로 안된다고 본다. 혜초를 사람 이름으로 본 것은 오타니 고즈이의 잘못이라고 본다. 그러므로 그가 먼길을 ‘혜쳐 와, 오(ㅅ), 처쭈구져’라면서 고달펐던 여정을 소회하는 글이 아니었을까?
그래서, 특히 그 스님이 어디서 출발헤서 어떻게 인도(이리 다오)로 갔느냐 하는 문제는 꼭 밝혀져야 하는 아주 아주 중요한 문제이다. 더더구나 그 스님은 신라로 돌아가지도 않았다고 하니, 더욱 그 분의 출발지가 궁금하다.
부디 후학 여러분께서 직접, 그 글을 보시고 밝혀주시기를 기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