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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남진 탐사기획 스크랩 호남가(湖南歌), 호남시(湖南詩)를 따라서 · 18
裕耕 박노철 추천 0 조회 94 13.05.03 08:09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호남 기행

 

호남가(湖南歌), 호남시(湖南詩)를 따라서 · 18

 

월출산 영암의 신령산(神靈山)

 

아무리 바빠도 바늘 허리 꿰어(매어) 못쓴다.’는 속담이 있다. 금강산도 식후경이라고 허기진 배를 채워야 발걸음이 옮겨지는 것이다.

오늘은 어디서 무얼 먹나? 그런데 혼자 돌아다니다 보면 밥 먹는 게 즐거움이라기보다 고역에 가깝다. 입에 맞는 음식이 흔치 않고, 가난한 나그네의 주머니 사정도 그렇다.

 

천리행장 부일가(千里行裝 付一柯)

여전칠엽 상운다(餘錢七葉 尙云多)

낭중계이 심심재(囊中戒爾 深深在)

사양야점 견주하(斜陽野店 見酒何)

 

천리 나그네 길을 지팡이 하나에 의지하니

남은 돈 일곱푼은 오히려 많다네

행낭 속 깊숙이 있어라 하였건만

해지는 들녘에서 주막을 봤으니 어찌하랴

 

방랑 시인 김 립 선생의 여전칠엽(餘錢七葉)이다. 삶과 죽음을 초월한 삿갓 선생의 남은 돈 일곱푼은 오히려 많다. 하지만 어디 감히 삿갓 선생을 들먹이랴. 휴대용 가스랜지에 불 붙여 찌그러진 냄비에 끓여 먹는 라면도 임금의 수랏상 부럽지 않은 한 끼 식사다. 간편한 도구로 만들어내는 고마움이요 큰 혜택이다.

 

그런데 이따금 호사를 누릴 때도 있다. 지난 해 6월 중순, 첫 여름 햇살에 보리가 익을 무렵이다. 보배로운 고을 보성 기행 중 벌교초에서 작가와의 만남을 마치고 월강(月江) 박승재(朴承宰) 벌교초 교장의 환대로 꼬막 정식을 먹었다.

조정래의 열정과 작품을 만나고, 애환 서린 민족혼을 느낄 수 있는 태백산맥 기념관과 현부자집을 들린 다음 바로 근처에 있는 태백산맥꼬막정식현부자네라는 긴 이름의 식당으로 갔다. 유리창 너머로 보이는 작은 연못에는 금잉어와 수련꽃이 별천지 선경의 풍광을 자아냈다. 마침 때맞춰 한줄기 비 지나가니 이 또한 나그네의 정취를 꽃잎처럼 날리는 꽃비다.

 

<나주 동강면 곡강저수지의 연꽃과 백로>

월강(月江) 박승재(朴承宰)

 

하늘에 달뜨면

강에도 달뜨는 거라네

강에 달이 떠있으면

하늘에 달이 있음이라네

 

달이 구름을 부르면

하늘에 흐르는 강이요

구름이 비를 뿌리면

달빛이 흐르는 강물이라네

 

삶과 죽음이 다르지 않고

인간과 자연의 구별도 없는 거라네.

달에 취하니

강에도 취하는 거라네

 

달빛 흩날려 날이 밝고

강물 휘돌아 세상이 풍요롭네

지난 밤 달 지나신 들녘에

오늘은 유유히 강물이 흐르는구려

 

정표로 월강 선생의 호를 따 시 한수를 남기고, 비 흩뿌리고 간 작은 연못의 금잉어와 수련꽃에게 작별 인사한 뒤 발길을 영암으로 향한다.

 

<꽃피는 4월에 벌교에 가면 이런 곳에서 살이 꽉찬 꼬막을 먹을 수 있다.>

영암하면 떠오르는 풍광은 단연 월출산이다. 영암은 신령스런 바위라는 말이요, 월출산은 달뜨는 산이다.

영암읍과 강진군 성전면의 경계를 이루는 월출산은 삼국시대에는 월라산(月奈山)이라 하고, 고려시대에는 월생산(月生山), 조선시대에 이르러 월출산(月出山)이라 불렀다 한다. (), 로 읽는 글자고 생()이나 출()나다, 나오다이니 달이 나오는 산, 달이 뜨는 산이다.

세상에 달이 뜨지 않는 산이 어디 있을까만, 월출산에 뜨는 달은 멋있고 아름답다. 산이 멋있으니 달이 아름다운 것이다.

그런데 조선시대의 인문지리서인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의 월()자가 쓰인 지명을 보면 난진아현(難珍阿縣), 일명 월량(月良)과 백제의 마돌현(馬突縣)이었던 마령폐현(馬靈廢縣), 일명 마진(馬珍) 또는 마등량(馬等良)이 있다.

난진아(難珍阿)의 월량(月良)은 진()이 월()로 된 것이고, 마돌(馬突), 마진(馬珍)은 돌()이 진()으로 되었다. ()은 음이 돌이나 한자어 석()을 표기한 것이다. 그러니까 진()이 월()이 되고 돌()이 또 진()이니 달()과 돌()의 의미가 서로 트여있음을 알 수 있다. 우리 선조들에게 글자가 없어 한자의 음을 빌어 음차(音借)했으니 한자의 뜻풀이로만 지명을 말할 수가 없다는 것이다.

또 월출산은 '달나뫼'의 순 우리말 이름의 한자식 전음으로 볼 수 있지만, ‘얼배얼바위에서 비롯되었다고 하는 이도 있다.

역시 조선시대의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에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월출산에는 세 개의 동석(動石 흔들바위)이 있다. 그 하나는 구정봉(九井峰) 아래에 있고 나머지 두 개는 도갑과 용암 아래에 있다. 구정봉에 있는 흔들바위의 높이는 1m가량 되고 둘레는 열 아름쯤 되는 큰 바위인데 서쪽은 석골(石骨)뿐인 산머리에 붙어있고, 동쪽은 끝없는 절벽에 걸려 있다. 이 동석은 한 사람이 흔들어보거나 열 사람이 흔들어보거나 마찬가지 정도로 움직인다. 이 삼동석(三動石) 때문에 이 땅에 큰 인물(大人)이 난다하여 이를 시기한 중국 사람들이 바위 세 개를 전부 떨어뜨렸는데, 놀랍게도 그 중 하나가 스스로 제자리로 올라가는 고로 그 바위를 신령한 바위(靈巖)라 하여 고을을 영암(靈巖)이라 했다.’

또 한국풍수지리의 시조이며 대가로 고려건국과 민간사상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도선국사(道詵國師)도선비기(道詵秘記)’에는 월출산 구정봉의 기운으로 장차 500년 동안 세상을 다스릴 제왕이 나온다고 했다.

월출산과 왕에 대한 설화가 또 있다.

월출산의 금릉경포대(金陵鏡布臺)는 천황봉과 향로봉에서 발원하여 2km 정도 남쪽으로 흘러내리는 계곡이다. 금릉(金陵)이라는 지명은 1172년 고려시대부터 부르던 명칭으로 중국 초나라 위왕이 이곳에 왕의 기운이 있다하여 땅 속에다 금덩이를 묻어놓고서 금릉이라 불렀다 한다. 왕의 기운이 있다는 이 계곡을 따라 올라가면 바로 스스로 제 자리로 올라온 동석이 있는 구정봉이 나타난다.

최초의 한문소설을 쓴 매월당 김시습도 월출산을 보고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남쪽 고을에 그림 같은 산이 있으니 달은 청천에서 오르지 않고 이 산에서 오르더라.’

 

(지나네 블로그에서 빌려온 사진) 

소금강산이라고도 부르는 영암의 월출산은 그렇게 남쪽 한반도에서 가장 신령스런 산이고 아름다운 산이다. 어디서 봐도 산 아래 발끝부터 산 위 머리까지 온 몸을 다 바라볼 수 있는 천하제일 미인미남의 산이다. 울퉁불퉁, 올망졸망, 아기자기, 날씬풍만, 볼록납작, 미끈촉촉, 인간과 자연의 아름다움과 특성을 모두 갖춘 산이다. 날이 청명해도, 흐려도, 비가 오고, 눈이 내려도, 운무가 흘러도, 서려도, 달이 밝아도, 구름옷 입어도, 그리고 봄, 여름, 갈 겨울, 보고 또 봐도 질리지 않는 산이다.

 

 <겨울 구정봉>

<구정봉 - 큰바위 얼굴을 그린 강철수 화백의 작품>

그래도 월출산의 봄이 제격이다. 산벚꽃 흩날리는 봄 날, 월출산 들머리에서 토종닭 도리탕을 시켜놓은 뒤 먼저 도토리묵에 막걸리 한 잔 마셔보시라. 하춘화의 영암 아리랑이 절로 나오고 흥에 취한 달이 뜨리라.

 

그렇게 신령스런 월출산을 둘러보고 나오는 길목에 석기 시대 사람들의 토굴집 유적이 있으며 지금으로부터 2천 수백여 년 전 삼한시대부터 집단 촌락이 형성되었다는 오래된 옛 마을 구림이 있다. 구림은 벚꽃이 활짝 피는 봄 4월이면 백제 제14대 근구수왕(서기375-384)때 활약한 왕인박사문화축제가 열리는 곳이다.

구림마을의 동쪽 문필봉 기슭에 자리 잡은 왕인박사유적지에는 탄생지인 성기동과 박사가 마셨다고 전해오고 있는 성천(聖泉), 박사가 공부했다는 책굴(冊堀) 후일 후학들의 배움터인 문산재(文山齋)와 양사재(養士齋) 등이 있다.

 

<왕인 박사가 공부한 책굴>

또 박사의 탄생지인 성기동 서쪽에 있는 돌정고개는 박사가 32세에 왜국으로 떠날 때 동료, 문하생들과의 작별을 아쉬워하며 정든 고향을 뒤돌아 보았다하여 돌정고개가 되었다. 그 때 박사가 배를 탔던 상대포(上臺浦)는 당시의 국제 무역항으로 신라의 학자 최치원이 당나라로 유학을 갈 때도 이곳에서 배를 타고 떠났다고 한다.

 

<상대포>

당시 왕인박사는 왜왕 응신(應神)의 초빙으로 논어 10, 천자문 1권을 가지고 가서 태자의 스승이 되었다. 그렇게 왜국에 논어와 천자문을 전한 것은 물론 기술공예의 전수, 왜국가요의 창시 등에 공헌함으로써 왜 왕실의 스승이며 정치고문, 그들을 계몽하여 문화(文化)와 사상(史上)을 일깨운 성인(聖人)으로 아스카(飛鳥)문화, 나라(奈良)문화의 원조로 불리 운다.

 

<왕인 박사 사당> 

비둘기 구() 수풀 림()’의 구림마을 이름에는 도선국사의 탄생설화가 얽혀있다. 성기동 구시바위에서 최씨 성을 가진 한 처녀가 빨래를 하다가 떠내려 온 푸른 오이를 먹고 아이를 가졌다. 처녀가 애를 낳았으니 이 아니 낭패인가? 낳은 아이는 숲속 바위에 버려졌는데 며칠 뒤 가보니 비둘기 떼가 날개로 아이를 보살피고 있었다. 바로 그 아이가 풍수도참사상의 시조로 고려 건국을 예언하고 불교 중흥을 일으킨 도선국사다. 그 후 아이가 버려진 바위는 국사암’, 그 숲은 구림(鳩林)’이 됐다. 현재는 구림마을 중심에 낭주 최씨 선조를 모시는 사당 국암사가 있는데 그 사당 마당에 국사암이 덩그마니 놓여있다.

 

<국사암>

마을 한복판쯤에 웅장하게 버티고 있는 정자 회사정은 주민 자치 조직으로 500년 넘게 이어온 동계(洞契)대동계의 집회 장소이고 3.1운동 때는 독립만세를 불렀던 역사의 현장이다. 원래 건물은 625때 소실되고 1986년 단청을 입혀 복원되었다. 회사정에서 물길을 따라 마을 안쪽으로 더 들어가면 죽정서원이다. 죽정서원 바로 왼쪽에 세워진 간죽정금성별곡을 지은 박성건이 후학을 양성하고 학문을 닦은 곳이다. 호은정, 육우당, 서호사, 동계사와 통일신라시대의 것으로 전남에서 가장 오래된 정원명 석비와 조종수 가옥이 있다.

구림에는 또 조선시대의 멋들어지며 풋풋한 사랑 얘기도 있다.

 

묏버들 가려 꺾어 보내노라 님의 손에/자시는 창밖에 심어 두고 보소서/밤비에 새 잎 곧 나거든 날인가도 여기소서.’

 

조선 선조 함경도 경성의 명기였던 홍랑은 구림 마을 출신 고죽 최경창에게 묏버들 가려 꺾어라는 시로 사랑 고백을 했다.

 

말없이 마주보며 유란(幽蘭)을 주노라/오늘 하늘 끝으로 떠나고 나면 언제 돌아오랴/ 함관령의 옛 노래를 부르지 마라/ 지금까지도 비구름에 청산이 어둡나니.’

 

홍랑과의 사랑이 빌미가 되어 파직까지 당했지만 고죽 역시 그렇게 홍랑에게 주는 사랑의 시(情詩)’를 남겼다. 신분을 넘어 뜨거운 사랑을 했던 두 사람의 애절한 사랑은 세월을 건너뛰어 구림마을에 고죽시비와 홍랑가비로 남아있다.

구림마을은 말 그대로 지붕 없는 자연사, 건축, 도기, 역사, 문화박물관이고 고대와 현대가 어우러진 유적의 현장이다.

낙동강에 정형화된 하회마을이 있다면 영산강에는 자유분방한 구림마을이 있는 것이다.

 

구림 마을을 떠나 이번엔 영산호 쪽을 향해 간다. 구림에서 학산면쪽으로 4km쯤 가면 서호면 화송리 화소(華松里 化所)가 나온다. 이곳에 있는 구고사(九皐祠)에 들려 김해 김씨 사군파 김완(金完, 1577~1635) 장군을 만난다. 장군의 자는 자구(子具), 시호는 양무(襄武).

장군은 어머니(천안 전씨)가 바다를 품에 안는 태몽을 꾸어 후일 몽해(夢海)마을이 된 영암군 서호면 구음평(九音坪)마을에서 태어났다. 화소에서 1.5km쯤 건너편으로 바라보이는 구음평은 태몽 때문에 그렇게 꿈바다, 굼바대등으로도 불렸는데, 지금은 들판이지만 예전에는 마을 앞까지 푸른 바닷물이 넘실대던 곳이었다.

구고사가 있는 화소(化所)마을은 풍수지리를 갖다 대지 않아도 천하의 길지 터다. 장군이 학성군(鶴城君)으로 책봉 된 것은 우연이 아니다. 이곳 화소 마을은 금학포란지형(金鶴包卵地形)으로 마치 금학(金鶴)이 알을 품고 있는 것처럼 마을 앞에 높이 3m, 너비 33.3(10)의 동그란 알섬 7개가 5m 거리에 옹기종기 놓여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1973년 경지 정리를 하면서 다 없애 버리고 이제 한 개가 남아있으니, 먹고 살기에 급급한 인간의 무지와 탐욕이 얼마나 무서운지 아쉽기만 한 일이고 후손으로써 장군께 부끄럽기만 하다.

 

<구고사>

장군의 아버지 김극조(15341591)가 무과에 급제해 만호를 거쳐 광양현감을 지낼 때다. 김극조는 왜구의 침략을 예견하고 군인을 모병해 훈련을 시켰는데, 왜란이 있기 전 1590년에 이성 현감으로 임지를 옮기게 되었다. 그런데 이게 화를 불렀다.

그의 후임으로 광양 현감이 된 한덕수는 정치 모리배였다. 당시 정여립(鄭汝立, 1546~1589)의 모반사건으로 동인의 이발 일당이 숙청당하자, 출세의 기회를 노리던 한덕수는 이때다 싶었다. 한덕수는 서인에게 붙어 김극조가 이발 형제와 더불어 난을 일으키기 위해 광양 현감 시절 군사조련을 한 거라고 거짓 고변을 했다. 김극조는 조정에 체포되어 모진 고문을 당했고 얼마 뒤 사실과 다름이 밝혀졌지만 출옥전인 1591312일 그만 옥사하고 말았다.

그때 김완의 나이 15(1591)였다. 김완이 억울하게 죽은 아버지의 시신을 모시고 몽해에서 4km거리의 서호면 엄길리에 이르렀을 때다. 갑자기 호랑이가 앞길을 가로막았다. 김완은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고 두 눈을 부릅뜨고 큰 소리로 길을 비키라고 꾸짖는데 호랑이가 무언가를 호소하는 듯 애처로운 표정을 지었다. 이상하다 생각하고 자세히 살피니 호랑이의 목에 사람의 뼈(비녀라고도 한다)가 걸려있었다.

김완은 주저하지 않고 호랑이의 입을 벌린 뒤 뼈를 꺼내주었다. 그러자 호랑이는 고개를 숙여 감사의 뜻을 표하더니 김완의 옷자락을 물고 잡아당겼다. 그렇게 호랑이를 따라 북쪽으로 20여리 매월리에 이르러 주룡진(注龍津)이 내려다 보는 산에 올랐다. 한 곳에 이르자 호랑이가 앞발로 땅을 후벼 파는 것이었다.김완이 사방을 둘러보며 지형을 살펴보니 참으로 좋은 명당 터여서, 주저없이 그곳에 아버지를 모셨다.

오늘날 이 묘터를 갈용음수(葛茸飮水)터라고 부른다고 한다. 근래에 이 묘의 대리석 비석에 낀 바위 옷이 저절로 벗겨지며 본래의 흰빛이 되는걸 보고 후손들은 가문(家門)에 길조가 있을 징조라며 좋아했다고 한다.

아무튼 그렇게 아버지를 모신 김완은 원수를 갚기 위해 나섰다. 아버지를 모함한 불공대천(不共戴天)의 원수 모리배 한덕수에 대해 복수할 것을 맹세하고 책과 붓 대신 칼과 활을 들었다.

이듬해인 1592년 임진왜란이 터졌다. 16세의 김완은 기다렸다는 듯이 의병으로 참전하여 선봉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여러 전투에서 혁혁한 무공을 세워 용맹과 지략의 출중함이 널리 알려졌다. 무정부 상태와 다름없는 상황에 내몰려 사지에 내몰리고 도탄에 빠진 백성들이었기에 김완은 더욱 빛나는 별과 같은 존재였다.

1597년 정유재란이라 부르는 왜의 2차 침략이 있었다. 무대책, 무능력의 조선을 공기놀이하듯 가지고 놀던 명나라와 왜국의 밀약과 간계가 깨지면서 잠시 소강상태에 빠졌던 전쟁이 다시 터진 것이다.

늠름하고 당당한 젊은이로 성장한 21세의 김완은 다시 분연히 일어나 칼과 활을 들었다.

남원의 진사 조경남, 정사달과 함께 거병하여 남원 등지에서 크게 공을 세우고 이듬해 남원에 있는 전라병사 이광악 막하로 들어갔다. 원수는 외나무다리에서 만난다 했던가? 김완의 부친에 대한 무고죄로 유배 중이던 한덕수가 왜란으로 인하여 왕의 사면(赦免)을 받더니, 도원수 권율의 군관이 되어 이광악의 군중으로 군병을 검열하러 왔다.

아버지의 원수를 한시도 잊지 않고 있던 김완은 하늘이 준 기회로 여겼다. 김완은 한덕수를 척살하려는 계획을 세웠다. 그러나 김완의 사정을 잘 아는 이첨지가 이 같은 비밀을 한덕수에게 누설시키는 바람에 복수는 수포로 돌아가고 말았다.

무과에 급제하여 검모포 만호로 재임하던 김완은 160428세 때에 고향에 돌아와 늦었지만 부친 묘에서 3년의 시묘살이를 했다.

그리고 시묘가 끝나자 다시 아버지 원수를 갚기로 작정했다. 권력에 기생하는 간신들은 언제나 마른자리만 찾아다니며 간신배 노릇을 하는 법이다.

오늘 날 친일파에서 친미파로, 변절자에서 독재자로, 국민의 고혈을 짜고 강탈한 돈으로 호의호식하는 이명박, 박근혜 일당과 그들에 빌붙어 있지도 않은 방울을 딸랑 거리는 현대판 환관들인 김황식을 비롯한 정부의 관리들, 이한구, 홍사덕 같은 정치 모리배, 정준길 같은 사기와 공갈에 능숙한 검찰 나부랭이들을 보면 그때나 지금이나 도친개친이다. 수백 년 세월에 한 치도 틀리지 않는 악순환의 역사요, 되풀이다. 그래도 조금 더 나은 쓰레기가 있을 것 아니냐?고 한다면 이번엔 도토리 키재기라고 답할 뿐이다. 그게 예나 지금이나 별반 다를 게 없는 간신과 모리배들의 세태다.

아무튼 권력에 눈이 먼 간신모리배 한덕수는 다시 지문이 닳아져라 아부의 손바닥을 부비고, 이 사람 저 사람 눈치를 보느라 뒤룩뒤룩 눈알을 굴리며 조정에 빌붙어 벼슬을 살고 있었다.

1605년 김완이 29세 되던 해다. 넘실대는 푸른 바닷물을 품에 안은 꿈을 꾸고 김완을 낳았던 천안 전씨가 돌아가셨다. 그동안 어머니의 심기를 어지럽히지 않으려 은인자중하던 김완은 다시 복수 계획을 세웠다.

그 해 무신년 10월 아우 우()에게 말하기를 우리 형제가 한덕수를 불공대천의 원수로 삼은 것은 오래전이나 오늘까지 복수를 늦춘 것은 오직 노모께서 계셨기 때문이다. 이제 노모께서 돌아가시고 안 계시니 다시 무엇을 더 기다리겠느냐? 이제 반드시 부친의 원수를 갚을 것이다.’

1607년 경술년 831세의 김완은 활을 들고 도보로 영암을 출발, 천리길 한양으로 갔다. 그러나 아우 우는 갑자기 병이나 중도에 돌아오고 김완은 나흘만에 한양에 도착했다.

한양성으로 들어간 김완은 기회를 엿보며 한덕수를 기다렸다. 마침내 궁에서 거들먹거리며 나오는 한덕수를 발견했다. 당시 명례방(明禮坊 지금의 명동)근처 수표교(水標橋)밑에 몸을 숨기고 한덕수를 향해 시위를 힘껏 당겨 회심의 화살을 날렸다. 백발백중의 실력, 복수의 화살에 맞은 한덕수는 비명과 함께 말 아래로 굴러 떨어졌다.

그런데 이게 왠일인가? 숨통이 끊어진 줄 알았던 한덕수가 뜻밖에도 네발로 기어 쥐새끼처럼 시궁창으로 숨는 것이다. 그리고 하인의 부축을 받고 어디론가 사라졌다. 원래 나쁜 놈일수록 명줄이 긴가 보다. 하늘이 무심하다는 말도 이런 때에 적합한 표현인 것이다.

뒤늦게 안 사실이지만 이날 한덕수가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던 것은 신변에 위협을 느낀 나머지 몸에 방패를 두르고 다녔기 때문이었다.

사이코패스, 남의 아픔은 모르고 자기 아픔만 아는 사이코패스 인간들의 원조격이 바로 이 한덕수 같은 놈들이다. 그러니까 요즈음 내가 사과했으니 됐다고 강변하는 박근혜류()의 중조쯤 되는 인물인 것이다.

박정희 유신 시절 날조된 인혁당 사건으로 구금되어 대법원 선고 다음 날 사형이 집행된 분들의 주검의 흔적을 보라. 손톱 발톱이 다 빠지고 등은 시커멓게 타고, 발뒤꿈치는 함몰되었다고 한다. 인간으로서 감히 상상할 수 없는 모질고 독한 고문의 흔적인 것이다. 그런데 애비인 박정희가 시킨 그 일을 나 몰라라 하는 그놈 딸인 박근혜의 말을 들어보면 기가차서 말문이 막힌다. 심장이 뛰고 숨이 찬다. 어쩔 수 없는 역사의 희생이었으니, 역사에 맡기자는 것이다. 자기가 지금까지 했던 말들이 사과이니 그대로 받아들이라는 것이다. 적반하장도 유분수라는 말도 이때를 위해 만들어놓은 말이다.

아무튼 사이코패스 중조인 한덕수는 그 뒤로도 자신의 방비를 철저히 하였기에 김완은 끝내 복수를 할 수 없었고 평생의 한으로 여기며 살아야 했다.

그건 그렇고 김완의 무공과 용맹성을 하나만 더 얘기해 보기로 하겠다.

정유재란 때 경상좌방어사 고언백 군막에 있던 김완은 자친(慈親) 천안 전씨를 뵙기 위하여 고향으로 향했다. 그러나 구례 섬진강에서 적들에게 길이 막혀 나아가지 못하고 있던 중이다.

우마차에 짐을 싣고 가는 농민들을 살상하고 약탈한 뒤 본거지로 돌아가는 수십 명의 왜적과 마주쳤다. 중과부적이라, 어떻게 싸울까? 왜적의 뒤를 밟고 있을 적에 급보를 듣고 달려온 남원의 진사 조경남과 정사달을 만났다.

김완 일행은 20여명으로 늘어났지만, 그래도 수적으로 열세라, 정면대결을 못하고 왜적의 뒤를 추격하며 대방(帶方 남원의 옛 명칭)의 궁장현에 이르렀다. 그곳은 길이 협착하고 험준했다.

마침내 공격의 기회를 잡은 것이다. 그러나 아뿔싸! 눈치를 챈 왜적은 재빨리 험한 곳을 지나가 버렸다.

닭 ?던 개 지붕 쳐다보는 격으로 습격의 기회를 놓치니, 아군의 사기는 땅에 떨어졌다. 두려움에 젖어 왜적과 목숨을 걸고 싸우겠다고 나선 사람은 겨우 여섯뿐이었다. 더욱이 활을 가진 사람은 김완, 조경남, 정사달, 박언양 등 4명뿐이었고 남은 사람들은 다만 몽둥이를 가지고 있었을 뿐이었다.

그러자 이번엔 아군을 얕잡아 본 왜적이 뒤돌아서서 공격을 해왔다.

이때에 김완의 무술 솜씨는 실로 놀라움, 눈부심 그 자체였다. 적과 접전하여 선봉으로 공격해 온 5명의 적을 단칼에 사살하였다. 그리고 벌떼처럼 달려드는 적을 조경남 등과 함께 한발의 실수도 없이 활로 쓰러뜨렸다.

하지만 왜적도 만만치 않았다. 대장으로 보이는 왜적이 단병(短兵)으로 무섭게 공격해 오는 바람에 정사달이 발을 다치고 박언량의 활이 부러졌다. 또 조경남이 팔에 부상을 입자 꽁무니를 보이던 왜적들이 다시 죽기 살기로 달려들었다.

위기에 빠진 조경남을 공격하는 왜적을 김완은 한발의 화살로 쓰러뜨린 뒤, 화살이 떨어진 활을 버리고 몽둥이를 들었다.

호랑이를 쫓을 때처럼 크게 소리를 지르며 박언양, 박필남과 함께 왜적의 한가운데로 들어가 몽둥이를 휘둘러 20여명을 참살하였다. 그리고 포로로 잡힌 고한부 등 몇 사람을 구출했는데, 이때 살아남은 왜적들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도망을 쳤다.

이로부터 며칠 뒤 곡성에 주둔한 왜적이 요천을 침범하였다는 소식을 들었다. 이번에도 김완은 조경남, 박언양과 함께 출전하여 적의 머리를 모두 베어 돌아왔다.

또 얼마 안 되어 구례에 주둔한 적 200여명이 산동에 진을 치고 인명살상과 재물약탈을 한다는 전갈을 받았다. 김완은 이번에도 조경남과 함께 10여명의 군사와 함께 적을 급습하여 56명의 머리를 베었다. 왜적은 10여명 밖에 되지 않는 아군의 전력을 헤아리지 못하고 김완의 이름만으로 사시나무 떨듯 벌벌 떨며 도망치기에 급급하였다.

엄청난 대승을 거둔 김완은 다시 조경남과 작별하고 한 명의 하인만을 거느린 채 남원을 떠나 고향인 영암을 향했다.

그러다 이번에도 남원 황산 장치(獐峙)에서 약탈할 곳을 물색하며 몰려다니는 왜적을 만났다.

내가 바로 김완이다. 다 덤벼라. 용서치 않겠다!”

김완은 강가의 넓적한 바위 위에서 왜적과 마주했다.

왜적들은 김완이라는 이름에 흠칫 놀랬지만, 하인 하나뿐인 단기 필마인걸 보고 가소롭게 여기고 달려들었다.

이때의 김완의 모습은 장판교에 우뚝 선 삼국지에 나오는 촉나라의 장비와 같았다할까? 김완은 달려드는 적을 맞아 혼자서 십 수 명의 머리를 베었다.

대게 잘된 일에 과장이 따르기 마련이지만 일찍이 이런 무용담은 흔치 않다. 김완의 칼날에 쓰러진 왜적의 피로 바위가 벌겋게 물들었는데 그로부터 사람들은 이 바위 이름을 혈암(血巖)이라 불렀다. 또 김완은 의지할 곳 없는 민초들의 가슴에 빛나는 별 영용(英勇)한 이름으로 남겨졌다.

김완 장군은 그렇게 힘이 장사요, 지혜가 출중한 문무를 겸한 분이었고, 더하여 효자였다.

그렇게 양 왜란 때 무공을 세운 김완 장군은 인조 2(1624) 이괄의 난을 평정했고 학성군에 봉해졌다. 그리고 황해도 병마절도사를 지내던 중 59세에 세상을 떠났는데 인조 13(1635)이었다.

그 뒤로 병조판서를 추증 받았고, 영암 서호면 학송리 화소 마을 구고사에 장군의 영정과 위패를 모셨다.

 

<구례에 있는 김완 전승 유허비각> 

구고사의 김완 장군 곁에 꽤 오래 머물렀다.

나그네는 이제 서둘러 영산호로 향한다. 제방을 쌓아 강을 막고 바다를 막아 호수가 된 영산호는 우리 삶을 윤택하게 하는 산전벽해일까? 아님 자연과 환경을 헝클어뜨린 막개발의 재앙일까? 좀 더 세월이 흘러야 깨닫게 되겠지만 옛 것, 예전 모습이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리는 세상의 변화에 아쉬움이 너무 크다. ‘산천은 의구한데 인걸은 간데없네가 아니라 산천이고 인걸이고 싸잡아 사라져버리고 폐기처분 되는 게 이 세대의 자화상인 것이다. 한마디로 소모품 인생이요, 땡처리 삶인 것이다.

그래도 한 번 밖에 없는 인생, 소중하고 행복하고 힘내서 살자. 내딛는 발에 힘을 주어 큰 길에서 샛길로 접어든다. 강철수 화백을 만나러 가는 것이다.

 

<영산 미술관>

너른 영산호를 내려다보는 곳에 서양화가 강철수의 영산미술관이 있다. 나무와 새, , 그리고 4마리의 견공과 함께 살며 그림을 그리고 있는 강철수 화백은 누가 뭐래도 서양화의 기법에 한국적인 삶, 인간 본연의 서정과 동심을 담아내는 우리 시대 최고의 화가이다.

내면의 화려함을 위해 외면의 소박함을 그리는 강 화백과 함께 막걸리 한 잔을 나누었다면 영산미술관을 찾은 분은 큰 횡재를 한 셈이다. 강 화백의 영산 미술관에서 좋은 그림에 흠뻑 취한 다음, 해마다 고막이 터지는 시끄러운 쇼로 돈을 벌겠다는 F1 자동차 경주장에 이르러 영암 기행을 마친다.

 

<F1대회 한겨레 자료 사진 - 경기 구경은 못해봐서 ㅋ >

고산의 아침 안개 영암을 둘러있다

신령스런 영암의 월출산을 둘러 싼 안개, 그 아래에는 고대와 현대가 어우러진 복잡한 세상이다. 눈앞의 옳고 그름도 의견이 분분한데 만년, 천년의 역사와 세월의 흐름을 무삼 구별하랴? 어제가 오늘이고 오늘이 내일인 것을.

그래도 두 눈을 부릅뜨자. 호남가를 소리 내어 부른다. 태인(泰仁)하신 우리 성군(聖君)이 기다리고 계시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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