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용실에서 무심코 들춰본 조선일보 기억해뒀다가 닷컴가서 퍼왔지요~
이제 신문도 좀 봐야겠슴당..
엘리트 코스 밟고 올라온 '왕자' 발레리노 이원국과 '공주' 해금 솔리스트 강은일
힘들었던 '홀로서기'의 끝에서기적처럼 함께 서다
'왕자와 공주의 만남'. 현역 최고령 발레리노 이원국(李元國·43)과 해금 솔리스트 강은일(姜垠一·43)의 만남을
두고 팬들이 빗댄 말이다. 두 동갑내기가 손을 잡은 건 해금 곡조로 만든 발레 공연을 선보이기 위해서다.
■왕자와 공주
1993년 '호두까기 인형'에서 왕자로 데뷔한 이원국은 10년 이상 최고를 지켜온 발레리노다.
■왕자와 공주
1993년 '호두까기 인형'에서 왕자로 데뷔한 이원국은 10년 이상 최고를 지켜온 발레리노다.
유니버설 발레단 주역, 루마니아 국립발레단 객원, 러시아 키로프발레단 객원 주역 등 국내 외
유명 발레단을 두루 거쳤다.
1996년부터 2004년 말까지 국립발레단 수석 무용수를 지냈다. 지젤, 백조의 호수 등 거의
1996년부터 2004년 말까지 국립발레단 수석 무용수를 지냈다. 지젤, 백조의 호수 등 거의
모든 공연에서 그는 늘 주인공이었다. 실제 왕자 역할도 수없이 했다. 수많은 팬들도 따라다녔다.
그는 공연뿐 아니라 현실에서도 '왕자'와 같은 대우를 받았다. 그런데 2004년 말 국립발레단을
그는 공연뿐 아니라 현실에서도 '왕자'와 같은 대우를 받았다. 그런데 2004년 말 국립발레단을
떠나 독립을 선언한 뒤 사정이 바뀌었다. 작은 그의 발레단은 알아주는 이도 없었고 부르는 곳도 없었다.
졸지에 굶게 생겼다.
이원국은 "사람 사귀는 것에도 소극적이었다"고 말했다. 공연을 따내기 위해 심사위원들
이원국은 "사람 사귀는 것에도 소극적이었다"고 말했다. 공연을 따내기 위해 심사위원들
앞에 섰을 때도 '발레에 대해 제대로 모르는 사람들한테 고개를 숙일 필요가 있나'하는
생각에 거들먹거리기도 했다고 한다.
그는 "왕자병이었던 것 같다"고 했다. 인맥이나 경제적 후원, 어느 것도 뒷받침되지 못하자 궁지에 몰렸다.
그는 "왕자병이었던 것 같다"고 했다. 인맥이나 경제적 후원, 어느 것도 뒷받침되지 못하자 궁지에 몰렸다.
"'이러다 죽겠다'는 생각에 안간힘을 썼어요. 밑져도 좋으니 공연하겠다고 닥치는 대로 찾아가 사정했죠."
그는 해마다 70회 이상 무대에 올랐다. 작년까지 2년 동안은 매주 월요일 대학로 소극장에서 해설이
그는 해마다 70회 이상 무대에 올랐다. 작년까지 2년 동안은 매주 월요일 대학로 소극장에서 해설이
곁들어진 발레공연을 열었다. 최근에는'노원 이원국 발레단'을 꾸려 발레를 지역에 뿌리내리도록
하는 일을 시작했다.
강은일도 엘리트 코스를 밟았다. 국립국악고, 한양대 음대 졸업 후 KBS 국악관현악단에 들어갈 때까지
강은일도 엘리트 코스를 밟았다. 국립국악고, 한양대 음대 졸업 후 KBS 국악관현악단에 들어갈 때까지
탄탄대로였다. 그는 "대학 졸업 후 동기 중 유일하게 관현악 단원으로 뽑힌 데다 결혼까지
해 남 부러울 게 없었다"고 말했다.
미모에 실력까지 갖춘 그를 주위에선 공주처럼 떠받들었다. 하지만 시련은 한순간에 몰려왔다.
미모에 실력까지 갖춘 그를 주위에선 공주처럼 떠받들었다. 하지만 시련은 한순간에 몰려왔다.
IMF 금융위기로 남편은 직장을 잃었고 경기도립국악단 수석연주자로 자리를 옮긴 뒤
원래 있던 곳으로 돌아오지 못하게 됐다.
국악관현악단을 떠난 강은일을 불러주는 곳은 단 한 군데도 없었다.
국악관현악단을 떠난 강은일을 불러주는 곳은 단 한 군데도 없었다.
"조직을 떠나면 아무것도 아니라는 걸 깨달았어요. 절박함이 밀려왔어요.
" 당시만 해도 해금을 독주하는 솔리스트라는 직업의 개념이 거의 없던 때였다.
그는 문학인들 모임, 종교행사, 홍대앞 클럽, 라이브 카페 등을 찾아갔다.
그는 문학인들 모임, 종교행사, 홍대앞 클럽, 라이브 카페 등을 찾아갔다.
"출연료는커녕 공연만 하게 해 달라고 부탁했어요. 맥주 한 잔으로 때우는 경우도 많았죠.
그렇게 3~4년 이상 고생했죠. 찾는 곳이 조금씩 늘기 시작했죠."
그는 후배들과 프로젝트 그룹을 꾸렸다. 가야금, 태평소, 기타, 베이스, 퍼커션 등 국악과 양악을
그는 후배들과 프로젝트 그룹을 꾸렸다. 가야금, 태평소, 기타, 베이스, 퍼커션 등 국악과 양악을
가리지 않은 크로스오버였다. 해금에 무언가를 더해 새로운 것을 만든다는 뜻에서 '해금 플러스'라고 불렀다.
추구하는 음악의 방향을 뜻했던 말이 지금은 팀 이름으로 자리잡았다.
추구하는 음악의 방향을 뜻했던 말이 지금은 팀 이름으로 자리잡았다.
강은일의 해금 플러스는 곡을 새롭게 만들어 2004년 첫 음반(오래된 미래)을 냈다.
2만장 이상이 팔릴 정도로 호응이 컸다.
2007년에 낸 두 번째 앨범(미래의 기억)도 마찬가지였다.
2007년에 낸 두 번째 앨범(미래의 기억)도 마찬가지였다.
강은일의 해금 연주곡이 인기를 끌면서 배우겠다는 사람들이 갑자기 늘어났다. 해금 열풍을 이끈 강은일은
대중과 소통하는 국악계 스타로 떠올랐다.
- ▲ 꽃과 나비가 어우러진 한폭의 그림 같다. 발레리노 이원국과 해금 솔리스트 강은일은 어떤 작품을 그려낼까. 둘은“상상을 뛰어넘는 공연을 선보이겠다”고 했다. 이준헌 객원기자 heon@chosun.com
◆늦깎이
둘 다 입문(入門)이 꽤 늦은 것도 공통점이다. 이원국은 스무살 때 발레를 처음 접했다.
둘 다 입문(入門)이 꽤 늦은 것도 공통점이다. 이원국은 스무살 때 발레를 처음 접했다.
발레리노로서 꽃을 피웠어야 할 나이에 걸음마를 시작한 것이다. 남자가 발레를 배운다는 건
당시엔 더욱 드문 일이었다.
무용콩쿠르에서 입상해 병역특례를 받았다는 신문기사를 읽은 어머니가
무용콩쿠르에서 입상해 병역특례를 받았다는 신문기사를 읽은 어머니가
"지금까지 인생 허비했으니 이거라도 한번 해봐라"고 권했고,
이원국은 '지금까지 속만 썩였으니 효도하는 셈치고 해보자'고 마음먹은 것이다.
이원국은 중학교 때부터 밖으로 나돌았고 고등학교도 5년씩이나 다니다 쉬고 있었다.
이원국은 중학교 때부터 밖으로 나돌았고 고등학교도 5년씩이나 다니다 쉬고 있었다.
"중1 때 여자 선생님께 이상한 편지를 썼다는 누명을 쓴 뒤 세상이 싫어져 방황했어요.
가출도 밥 먹듯 했고 지겨울 정도로 실컷 놀아봤죠."
무용을 배우겠다며 무턱대고 찾아간 곳이 발레 학원이었다.
무용을 배우겠다며 무턱대고 찾아간 곳이 발레 학원이었다.
당시 학원에서 배우던 50여명은 모두 여학생이었다. "창피해서 고개를 들 수 없더군요.
제대로 된 복장도 없어서 여성용 거들을 입고 배우기도 했어요."
발레리노 동작을 가르쳐줄 이도 없어서 이원국은 처음부터 여성 동작만 배웠다.
발레리노 동작을 가르쳐줄 이도 없어서 이원국은 처음부터 여성 동작만 배웠다.
어머니를 뺀 모든 가족과 친구들에게 발레를 배운다는 사실을 숨겼다.
6개월 뒤 '바로 이것이다'라는 느낌이 왔고 아버지에게 고백했다.
신문기자 출신인 아버지는 뜻밖에도 "직업에 귀천은 없다.
신문기자 출신인 아버지는 뜻밖에도 "직업에 귀천은 없다.
네가 이걸로 10년만 열심히 해봐라. 밥이라도 먹고 살 수 있을 정도는 되지 않겠느냐"며 격려했다.
이원국은 고교 3학년으로 복학했고 중앙대 무용과에 입학했다.
강은일의 어릴 적 꿈은 발레리나였다. 보수적인 아버지가 반대했다.
강은일의 어릴 적 꿈은 발레리나였다. 보수적인 아버지가 반대했다.
부모님은 피아노를 시켰다. 피아노를 배우던 집에서 개에 물린 후 접었다.
이후 아버지 친구 권유로 바이올린을 배우기 시작했다.
누군가에 떠밀려 배우는 악기가 즐거울 리 없었다. 중학교에 입학한 이후엔 연극에 빠졌다.
누군가에 떠밀려 배우는 악기가 즐거울 리 없었다. 중학교에 입학한 이후엔 연극에 빠졌다.
극단을 따라다니며 연극을 보고 배웠다. 그곳에서 만난 선배 언니가 국립국악고 재학생이었다.
언니가 들고 다니던 대금이라는 악기도 무척 신기했다.
언니가 들고 다니던 대금이라는 악기도 무척 신기했다.
국악고에서 연기도 배울 수 있다는 말에 지원했다. 부모님 반대에는 "특채이니 떨어질 수도 있고
그냥 한번 넣어보는 것"이라고 설득했고, 덜컥 합격했다.
학교를 처음 찾은 날 강은일은 국악과 떨리는 만남을 경험했다. "처음에는 너무 무서웠어요.
학교를 처음 찾은 날 강은일은 국악과 떨리는 만남을 경험했다. "처음에는 너무 무서웠어요.
곳곳에서 귀신 소리 같은 것이 흘러나오더군요. 한편으로는 호기심이 생겼어요.
나는 왜 한국사람이면서 우리 악기를 모르고 자랐나."
가야금을 하고 싶었지만 성적 때문에 밀렸다. 무용에 지원하자 키가 작아서 안 된다고 했다.
가야금을 하고 싶었지만 성적 때문에 밀렸다. 무용에 지원하자 키가 작아서 안 된다고 했다.
결국 선생님이 권한 악기가 해금이었다. "해금이나 해라." 당시 해금은 변방 악기였고
아무나 할 수 있는 것으로 여겨지던 때였다.
강은일은 이를 악물었다. '이 악기를 내가 세상에 널리 알리겠다. 모두를 깜짝 놀라게 하겠다.
강은일은 이를 악물었다. '이 악기를 내가 세상에 널리 알리겠다. 모두를 깜짝 놀라게 하겠다.
' 남들보다 늦게 시작한 약점을 몸으로 때울 수밖에 없었다. 매일 새벽부터 자정까지 해금에만 매달렸다.
◆이원국+강은일=?
둘은 어떻게 만났을까. 팬들이 다리를 놓아줬다.
◆이원국+강은일=?
둘은 어떻게 만났을까. 팬들이 다리를 놓아줬다.
강은일 팬인 부두완 서울시의원이 "이원국 공연을 꼭 한 번 보라"고 권했고,
최진용 노원문화예술회관 관장은 이원국에게 강은일의 연주를 추천했다.
강은일은 "대학로 공연을 보러 갈 때 '소극장에서 과연 발레가 될까' 생각했는데
강은일은 "대학로 공연을 보러 갈 때 '소극장에서 과연 발레가 될까' 생각했는데
비 오는 날 객석에 꽉 찬 관객을 보고 놀랐다"며 "공연 내내 이 장면엔 이런 음악을,
여기는 내 곡 이것을 쓰면 더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고 말했다.
이원국은 "해금 플러스를 통해 해금이라는 악기를 처음으로 가까이서 실제로 봤고,
이원국은 "해금 플러스를 통해 해금이라는 악기를 처음으로 가까이서 실제로 봤고,
서양의 다른 악기로는 표현할 수 없는 소리를 들으면서 이런 곡에 맞춰 춤을 추고 싶다는
생각이 단박에 들었다"고 말했다.
정작 해금과 만날 발레는 어떤 모습일까. 강은일이 지금까지 낸 앨범의 곡들을 기초로
정작 해금과 만날 발레는 어떤 모습일까. 강은일이 지금까지 낸 앨범의 곡들을 기초로
발레 작품을 새로 만드는 방안과, 곡도 모두 새로 작곡하는 안을 놓고 협의 중이다.
이원국은 "발레리노들이 해금 연주자를 번쩍 들어올리면, 공중에서 해금 연주를
이원국은 "발레리노들이 해금 연주자를 번쩍 들어올리면, 공중에서 해금 연주를
이어가는 식의 다양한 레퍼토리를 준비 중"이라며 "지금까지는 볼 수 없었던
실험적인 공연을 만나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강은일은 "서양의 고상한 문화로서 우리에겐 구름 위의 무언가처럼 여겨졌던 발레와,
옛날 저잣거리에서 누구나 거리낌없이 연주하던 해금의 만남은
하늘과 땅의 만남처럼 기적과도 같다"고 말했다.
이들의 공동 작업은 어떤 성과를 낳게 될까. 둘은 "이원국 더하기 강은일은 곧 엄청난 폭발"이라
이들의 공동 작업은 어떤 성과를 낳게 될까. 둘은 "이원국 더하기 강은일은 곧 엄청난 폭발"이라
말했다. 각자의 영역에서 끊임없는 도전과 실험을 해왔던 이들이 엄청난 에너지를 뿜어낼 것이란 설명이다.
반도체와 김연아 예를 들면서도 이들은 자신들의 새로운 시도를 징검다리에 비유했다.
반도체와 김연아 예를 들면서도 이들은 자신들의 새로운 시도를 징검다리에 비유했다.
지금 빛을 보지 못하더라도 후배들의 디딤돌 역할을 하고 싶다는 것이다.
"이원국 더하기 강은일은 '징검다리'입니다. 한국을 대표하는 공연이 된다면야 더할 나위 없겠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