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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남진 탐사기획 스크랩 호남가(湖南歌), 호남시(湖南詩)를 따라서 · 19
裕耕 박노철 추천 0 조회 175 13.05.03 08:09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호남 기행

 

호남가(湖南歌), 호남시(湖南詩)를 따라서 · 19

 

인자(泰仁/태인)하신 우리 성군(聖君)

예의 바르고 즐겁게 살아가는 예악(禮樂) 세상을 크게 (長興/장흥)일으키니

 

태인하신 우리 성군

예악을 장흥하니.‘

 

호남가는 노랫가락도 가락이려니와 그 뜻 또한 심오하다. 부르면 부를수록 맛과 멋이 정겹다.

한 잔 술에 취하지 않아도 늘어진 능수버들이 바람결에 춤을 추고, 흐르는 시냇물에는 햇살에 은비늘 드러난 물고기가 노닌다. 방금 전에 함께했던 님이 금세 그립고, 며칠 못 본 벗이 궁금하여 손전화기를 만지작거린다.

 

<신태인 역>

태인(泰仁)은 클 태자, 어질 인자이니, 지명을 의미하는 뜻풀이대로 우리 민초들을 아우르고 살려온 넉넉한 땅이요 너른 터다. 그 지평선이 있는 호남의 넉넉하고 너른 들녘을 또 동진강이 적셔준다. 그러니까 태인의 들녘에 목숨 줄을 건 민초들에게 동진강은 어미의 젖줄이다.

넉넉하고 너른 풍만한 젖가슴의 땅 태인, 그래서 눈독 들이는 도적, 침 흘리고 달려드는 도둑놈들도 많았다. 가까이는 조선의 부패관료들이었고, 멀리는 조선의 이완용 같은 매국노들과 작당한 일본의 침략전쟁광들이 그 도적, 도둑놈들이었다.

그래서 근세에 이르러 녹두장군 전봉준이 나섰다. 그리고 오늘까지도 가진 자, 국제매판자본, 사기와 공갈에 능한 위정자들을 상대로 민초인 서민과 노동자, 농민들은 한 판 사투를 처절하게 벌이지 않을 수 없다.

999개 가진 놈들이 한 개를 더 빼앗아가 1000개를 채우려 하니, 서너 개 가지고 아등바등 살아가는 우리들은 기가 막히고 코가 막히는 거 아니겠는가? 그런데 문제는 불쌍한 민초들이 빼앗기면서도 빼앗기는 줄을 모른다는 것이다. 가지고 누리는 자들이야 지 것 지키려니, 어쩔 수 없이 도적 도둑놈들이 되어 착취 수탈한다고 이해하자. 그런데 없는 자, 못 배운 자들이 사기꾼 정치인, 착취자 경제인들을 더 믿고 따른다고 하니 도무지 이해가 안 된다. 쥐새끼 명박이가 정권을 잡은 것도, 그 인간쥐가 고소영(고려대, 소망교회, 영남사람), 강부자(강남부자) 인사를 전횡한 것도 남의 탓이 아니다. 다 우리들의 무지와 패배의식, 거지근성, 식민근성에 기인한 것 아닐까 싶다. 국밥 한 그릇 퍼먹고 나도 서민이라고 하면 손뼉 쳐서 환영하고, 몇 백짜리 옷 걸치고 재래시장에 가서 값싼 물건 하나 사면 또 서민의 표상처럼 숭앙을 하니 도대체, 도무지 이해불가인 것이다.

무슨 놈의 명박이의 청계재단은 재단이 진 빚의 이자까지 물어준단 말인가? 그리고 그 이자가 장학금보다 많단 말인가? 그래서 청계(淸溪)가 두 개의 뜻을 가지고 있나보다. ‘맑고 깨끗한 시내가 아니면 못된 잡귀의 하나로 사람에게 씌워서 몹시 앓게 하는게 바로 청계(淸溪). 바로 쥐새끼 명박이의 청계재단은 그 못된 잡귀의 하나인 것이다.

 

<태인면 이웃 고을 이평면의 전봉준 유적지 장군의 고택>

그래서 전봉준 장군의 혼과 얼이 살아있는 이곳 태인에선 더욱 우리들이 정신을 차려야 한다. 전봉준 장군의 뜻, 바로 그게 이 시대가 요구하는 시대정신이다.

말이 글로벌 경제이지, 착취와 수탈이 더욱 교묘해지고 국제적이 된 거 아니겠는가? 정직과 진실은 개뿔이라는 말로 희화화 되고, 술수와 꼼수가 판을 치는 세상이다. 독립운동을 했던 후손들은 3대가 빌어먹고, 매국노의 후손들은 법의 보호를 받으며 서민을 등쳐 빼앗은 장물과 스위스와 미국 등에 숨겨놓은 불로소득으로 잘 먹고 잘 사는 세상이다.

이렇게는 못살겠다. 그들 옷자락 끝도 건드릴 힘이 없는 서민들이 거리로 나선다. 그리고 촛불을 켠다. 촛불이란 게 초등학생의 여린 손바람에도 꺼지는 거 아닌가? 그런데 높은 인간들은 그 촛불만 봐도 법대로라며 눈알을 부라린다. 힘없는 우리 민초들, 노동자와 농민에게 주는 선물은 벌금폭탄이다. 방패와 곤봉, 군홧발도 부족해 물대포까지 쏘아댄다.

 

<촛불 자료사진>

 

<미디어 오늘의 자료 사진>

박지만은 왜군장교출신변절독재자 다까기 마사오(박정희)의 아들이고 박근혜는 딸이다. 지난 63(2012) 민주당 홍영표 의원이 국회 외교·통일·안보 분야 대정부 질문에서 박지만씨는 신(삼화저축은행) 명예회장이 연행되기 2시간 전에 같이 식사를 했다고 한다신삼길 회장과 박씨, 정진석 청와대 정무수석이 아주 긴밀한 관계라고 한다고 주장했다.

이에 대해 기자들이 박근혜에게 질문을 하자 본인(지만)이 친구 이상도 이하도 아니라고 했으면 그것으로 끝 아닌가요?’ 하고 고개를 꼿꼿이 쳐들었다.

오만도 이런 오만이 없다. 무엇보다도 삼화저축은행 사건은 민초들의 피땀 흘린 그러니까 코 묻은 돈과 얽혀있다. 서민들의 그 구렁이알 같이 소중한 돈을 돈푼깨나 가진 놈들이 작당을 하여 또 덜컥 집어삼킨 것이다. 한마디로 날강도짓을 한 것이다. 그 피눈물 나는 돈 사건에 대해 내 동생이 아니라고 했으니 그걸로 끝이라는 태도는 아무리 좋게 생각해도 싸이코패스 인간, 그 이하도 이상도 아니다. 아마 더 물으면 병 걸리셨어요?’ 할 것이다. ‘암이나 에이즈에 걸려 디져버려라는 악담 아니면 긴급조치 0호로 무기징역 아니면 사형이라고 을러댈 심산일지도 모른다. 유신시절 박정희가 그렇게 했으니 말이다.

이게 박근혜를 포함한 정치인, 재벌들의 속성이다. ‘민나 도르보데스라는 일본말이 유행한 적이 있다. 모두가 다 도둑놈이라는 말이다. 지금이 그 형국이다. 경찰, 검찰, 법원, 정부, 국회, 재벌, 은행 등 어떤 놈이고 도둑질에 나서지 않은 놈이 없다. 진보라고 믿었던 이정희, 이석기, 이재연, 오병윤 등을 보라. 역시 이명박근혜와 닮은꼴인 도친개친이요, 도토리 키재기다. 추하고 더럽고 믿은 것이 분하다.

 

 <노무현 대통령>

  <지금은 때가 아니다와 발가락 다이어의 모습>

그렇다면 이제 절망뿐인가?

아니다. 이렇게 세상이 혼미하고 혼탁해질수록 정신을 똑바로 차려야 한다. 전봉준 녹두장군이 따로 없다. 투쟁은 특별한 사람이 하는 게 아니다. 내 삶의 성찰, 그리고 작은 실천과 행동이 곧 투쟁이다.

그러다가도 맘이 울적하면 호남가든 뭐든 신명나는 노래 한 가락을 소리 내어 부르자.

누가 내 삶을 위로하랴? 그래서 나그네는 고단하고 팍팍한 삶을 호남가 한 가락으로 위로 위안하며 크고 어진 터 태인을 밟는다.

 

<정신 차리자. 한겨례 신문 자료사진>

호남가의 태인 땅은 언덕이라야 10m의 낮은 구릉지, 너른 들판인 화호리, 양괴리 일대에서 쌀, 보리, 고추, 양송이, 축산업 등 전통적 농축산물을 거둬들이는 농업 소도시다. 젖줄인 동진강이 들을 펼치며 서해로 흘러가고, 호남선철도와 부안, 임실을 연결하는 국도 및 지방도가 있어 교통이 편리한 곳이다.

그리고 태인은 세상 사람들에게 신태인으로 더 잘 알려져 있다. 민초들이 이용하는 기차역 이름이 신태인역이고, 도로교통이 원할치 못하던 시대에는 모든 물산이 이 곳을 통해 오고갔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신태인역은 일본의 한반도 강점과정에서 생긴 것으로 근대사의 애환이 고스란히 담겨있다. 그러니까 신태인이라는 지명보다 역명이 먼저 붙여진것이다. 일제에 의해 김제와 정읍구간의 호남선이 개통(1914)되면서 태인과 구별하여 신태인역이 문을 열었기 때문이다. 일제가 정읍평야의 쌀을 쉽게 가져가기 위해 만든, 농지수탈의 산 역사를 그대로 간직한 지명이다.

 

<숙구지에 세워진 구마모토 농장>

먼저 동진강가의 들판 마을 화호리(정읍시 태인면 화호리)로 간다. 화호리는 조선시대 감자가 생산되어 임금님에게 진상된 곳이기도 해서 지금도 남을 비방하거나 욕지거리를 할 때 봉지 터진 숙구지 감자나 먹어라라는 말이 남아있다. 그 정도로 감자가 맛있어 이북에서도 정읍은 몰라도 숙구지(宿狗地 화호리를 이르는 말)라고 하면 알았다고 했다. 일제강점기에는 일본인 지주들이 모여 살았던 곳이다.

이곳에 당시의 수탈현장이 지금까지 그대로 남아있다. 구마모토농장이 바로 그곳이다. 당시 구마모토(熊本利平)라는 왜놈이 이곳에 와서 지형을 살펴보고 농장을 세웠다고 한다.

풍수지리에 의하면 이곳이 마치 개가 자고 있는 형상이어서 사람들은 숙구지(宿狗地)라 하였다. 구마모토는 자고 있는 개가 입을 웅크리고 있는 지점에 창고를 지었다고 한다.

구마모토의 농장은 군산, 정읍, 김제일대에 3200정보, 여의도의 10배에 달하는 토지를 소유하여 당시 규모가 전국 7위였고 전라북도에서는 동양척식주식회사 다음으로 많은 토지를 소유했다고 한다. 또 그는 농장 사람들의 치료를 위해 부속병원까지 갖추는 등 농업경영의 선진성을 내세웠지만, 그에 반하여 재주는 곰이(웅본이면 구마모토 이놈이 곰인데 말이다) 돈은 왜놈이 식으로 가혹한 수탈을 했다고 한다. 웅크린 개입으로 덜컥덜컥 집어 삼켰을 것이니, 풍수지리가 꼭 미신만은 아닌 듯도 싶다. 최면에 걸린 것처럼 눈앞에서 코를 베어가도 꼼짝 못하게 하는 의식지배의 묘술이 숨어있지 않고서야 어찌 그럴 수 있을까? 그래서 구마모토의 능구렁이 같은 수법이 오늘도 난무하는 거라 여겨진다.

그렇게 숙구지(宿狗地)의 개 입쪽, 화호리 서쪽의 낮은 언덕 남쪽 비탈을 의지해 지은 구마모토농장의 건물은 이제 당산나무 그늘 아래 일제강점기 수탈현장이라는 안내판을 앞에 두고 얌전히 퇴락해가고 있다. 그 당시 어마어마했던 위세는 세월 앞에 한낱 흔적이 되고 만 것이다.

누구나 그걸 안다면, 안다면 말이다. 지 맘에 들지 않는다고, 감히 아랫것들이 건방지게 대든다고, 머리 꼿꼿이 세우고 표독스럽게 병걸리셨어요?’하고 박근혜처럼 오만방자를 떨진 못할 것이다.

아무튼 이 건물은 해방 뒤 화호병원으로 변신을 했고, 정읍, 부안 등지에서 치료를 받으러 올 정도로 꽤 유명한 근대적 병원이었다고 한다. 또 농장 사무실 겸 주택으로 사용했던 건물은 화호우체국으로 사용되었다고 한다.

일제의 치욕적인 역사도 우리 역사이고, 선대의 고통은 후대의 우리에게 반면교사의 거울이다. 슬프고 아픈, 아직도 극복하지 못해 친일매국노 후손들이 판을 치는 현실에서 이곳 태인 화호리의 일제강점기 유적은 살아있는 역사 교과서에 틀림없다.

 

<구마모토 농장 건물>

동진강으로 나간다.

어린 시절 여름날, 촌놈인 우리들은 틈만 나면 강둑으로 나갔다. 학교에 갔다 오기가 무섭게 툇마루에 가방을 던지고 약속을 정하지 않아도 우리들은 강둑으로 모였다. 벗을 옷도 많지 않지만 후다닥 벗어던짐과 동시에 풍덩 물속으로 뛰어들었다. 헤엄을 잘 치는 녀석들은 강둑 이쪽저쪽으로 오가고, 헤엄이 서툰 나 같은 녀석들은 강가 풀 틀어잡고 툼벙거렸다. 붕어나 미꾸라지, 메기 같은 물고기를 잡는 녀석도 있어서 부러웠지만, 어쨌거나 우린 잘 놀고 잘 자랐다.

하지만 동진강도 이제 옛말을 한다. 하구인 백산에 갑문이 만들어지면서 사리에 올라오던 조수가 막히자 모래밭이 없어지고 뻘밭이 남았다. 그 흔하던 물고기며, 값비싼 뱀장어까지 자취를 감추었다.

그것뿐인가? 아이들까지 사라졌다. 물반 고기반의 맑은 물도, 멱 감던 아이들도 이젠 볼 수가 없다.

 

<동진강> 

신태인 전통시장에 들려본다. 일제강점기에는 호남지방에서 곡물 거래량이 가장 많았던 곳으로 1917년에 5일장이 되었다 하니 백년이 내일 모레다.

그러나 옛 모습은 이제 찾아볼 길이 없다. 20081230일 시장 현대화사업을 통해 재 단장되었고, 200923일에 음식단지가 조성되었다. 장날은 달마다 3, 8일 그렇게 5일씩 더하면 된다.

 

<신태인 전통시장 자료사진>

신태인역(新泰仁驛)의 주소는 정읍시 신태인읍 신태인리다. 태인면사무소에서는 7.5킬로미터 정도 떨어진 곳이다. 400미터 거리에 신태인버스터미널이 있다.

정읍시내에서 태인면은 전주시로 가는 방향이고 신태인읍은 김제시내로 향하는 방향이다.

태인면 소재지 중심부에 있는 보물 제289호 피향정(披香亭)은 자연을 벗 삼아 쉼터로 사용하고자 지은 호남의 으뜸가는 정자 건축물이다. 통일신라 헌강왕(857861) 때 태인(泰仁) 현감 최치원(崔致遠)이 풍월을 읊고 산책하던 연못가(蓮池)에 처음으로 세웠다 한다. 현재의 건물은 조선 숙종 42(1715)에 현감 유근이 전라관찰사와 호조에 부탁하고 정부의 보조를 받아 부안 변산에서 재목을 베어와 세웠다 한다. 그 뒤 철종 7(1856)에 현감 이승경이 인부 2,692, 장인(토공, 목공) 577, 엽전 1,600량을 들여서 동량은 그대로 두고 모두 갈았다 한다. 피향정의 규모는 높이 약 4(120cm)의 화강암 동자기둥 위에 28개의 기둥을 세운 정면 5, 측면 5칸이다. 그런데 기둥이 30개여야 하는데 중앙의 2개를 세우지 않고 28개로 한 것은 우주의 별자리 28(宿)을 따른 것이라 한다. 이곳에서 매년 피향정문화축제가 열린다. 또 가까운 역으로 감곡역과 초강역이 있는데 사실 태인면 소재지에서는 신태인역보다 초강역이 더 가깝다.

 

<피향정> 

신태인에서 서쪽으로 동진강을 건너면 이평면이다. 이곳에 사적 제293호 정읍 전봉준 유적(예전 명칭은 전봉준선생고택지였는데 2011728일 고시에 의해 변경되었다.)이 있다. 나중에 고부를 찾을 때 소개하고자 한다.

이평은 예전에 동진강을 타고 이곳까지 배가 들어온다고 해서 '배들이', ‘배들평야였다. 그런데 일제가 배()와 들()을 한자어로 이평(梨坪)이라 바꾸어 버렸다.

드넓은 평야가 끝없이 펼쳐진 배가 들어오는 배들평야얼마나 좋은 말인가? 그러고 보니 아직도 일본놈이 우리 곁에서 눈알 부라리고 있다.

지금은 때가 아니다더니 뜬금없이 독도를 방문한 눈 째진 그놈이 그래서 고개 뻣뻣한 일왕에게 내 목 쳐주쇼! 하고 납작 고개 굽혀 인사했을까? 오사카산 쥐새끼라고 하더니 서동요나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처럼 말이 씨가 되는 게 인생사임에 틀림없다.

 

 <결코 잊지말자>

 <두 눈 부릅뜨자>

  <이 치욕을 또 맞을 건가? 인혁당 가족의 통곡 소리 들리지 않는가?>

, ! 인생사 허망타. 세월이 유수이고, 화살이다. 아침 해에 안개 스러짐이다. 어쩌다 이리 세월이 흘렀단 말인가?

나그네가 어릴 적 자란 곳이 동진강이 흘러가는 바로 저 건너 김제 만경들녘에 자리한 죽산면이다. 그래서인지 지금도 마음이 답답할 때 너른 평야를 보면 탁 풀린다. 그러나 김제 만경들녘은 호남가의 뒤에 나오는 지명이니 오늘은 그저 이곳 배들평에서 실컷 어릴 적 향수와 추억을 대신한다.

그런 다음 예악(禮樂)을 장흥(長興)하는 크으고 기일게 흥한다는 장흥을 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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