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권의 책으로 쓴 글입니다. 8장의 일부를 올립니다.
사고의 공유 차원에서 올립니다. 더 많은 정보는 http://cafe.daum.net/tongilre 에서 보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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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원리강론》의 이론적 한계 (1/3)
“확실히 <원리강론>은 지금까지의 한국의 신학계가 산출한 신학서 중에서 그 양에 있어서나 그 조직력에 있어서나 그 상상력과 독창성에 있어서 최고의 것으로 인정됨직한 것이다. 뿐만이 아니라 <원리강론>은 한국적인 신학을 지향하고 있는 점에서도 특이하여 여타의 시도들과 제안들에 도전하고 있으며, 방금 세계 교회의 갱신기풍과 새로움에 대한 요망을 앞지르고 있는 점 등 주시와 연구의 대상이 됨직하다.”1)
[서남동2) 전 연세대학교 교수]
통일교 교리 ‘원리강론’은 우리 사회에 상당한 영향을 미쳤다. 교리나 이론은 사람의 정신을 지배하기도 하고 정신은 사람의 행위를 지배한다는 측면에서, 깊이 몰입되면 가족도 보이지 않고, 친구도 보이지 않으며, 사회도 보이지 않는다. 통일교에 가면 사람이 완전히 ‘세뇌(Brainwashing)’ 당한다는 소문이 있기도 한데, 이는 교리를 교육받을 때 최소한 며칠에서 수십여일씩 제한된 장소에서 교육이 이뤄지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3) 통일교 초기부터 주로 교수나 학생 등 엘리트 계층이 원리강론에 매료된 경우가 많았다. 지금은 또 상황이 다르지만 80년대는 대학교수들이 조를 짜서 전국적으로 돌며 통일교 교리를 소개하기도 했다.
원리강론은 성서의 주요 내용을 문자 그대로 해석하는 것이 아니라 상당부분을 ‘비유와 상징’으로 해석하는 것이 가장 큰 특징이다. 역사적으로 성서를 해석하는 방법이 발전해왔음에도 불구하고, 보다 논리적이고 이성적인 설명을 갈구해왔던 신앙인들에게 보다 직접적인 영향을 미쳐왔다. 그러나 원리강론도 나름의 한계를 가지고 있다. 비약이 있고, 단편적이고 빈약한 가정에서 출발하기도 한다. 이 장에서는 원리강론의 이론적 한계에 대해 몇 가지 중심적인 내용을 짚어본다. 원리강론 창조론에서는 이분법의 적용에 대해서 논하고, 타락론에서는 성적 타락의 문제들을 살펴볼 것이다. 또 통일교 역사관의 문제와 통일교 신관에 관련된 부분을 중심으로 쟁점을 살펴보겠다.
이분법의 오류
원리강론에서는 땅위에 존재하는 모든 개체의 속성을 양성(+)과 음성(-)으로 구분해 설명한다. 존재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이렇게 이분법적으로 상대적 관계를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예로 인간이 남성과 여성으로 구분되고, 동물도 암컷과 수컷으로 구분되며, 식물도 암술과 수술로 구분된다는 사실을 들고 있다. 심지어 물질의 최소 입자인 원자도 양성과 음성으로 구성되기 때문에 상대적 관계로 존재한다고 한다. 또 삼라만상의 존재양상이 표리, 내외, 전후, 좌우, 상하, 고저, 강약, 억양, 장단, 광협, 동서, 남북 등과 같이 모두 상대적으로 되어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원리강론에서 주장하는 것처럼 땅위에 존재하는 것은 모두 상대적 관계로 되어 있고, 이분법적으로 구분돼 있는가. 그렇지 않다. 어떤 존재는 명확히 이분법적인 구성을 갖고 있는 것이 있는가 하면, 이러한 구분법을 적용할 수 없는 것도 있다. 예를 들어, 인간이 남성과 여성으로 구분되는 것은 이분법적으로 설명이 가능하다. 그러나 상하, 고저, 강약 등과 같은 개념은 극과 극을 대비시켜놓고 있고 양극단이 강조되어 있기 때문에 이분법적으로 구성된 것으로 착각할 수 있으나 이분법적으로 구분할 수 없는 것이다.
가령 상하(上下)는 높고 낮은 극단적인 속성을 대비시켜 놓고 있지만, 이분법적으로 구분하고 이 기준으로 그 특성을 설명하려고 한다면 그 극단 내에 존재하는 점과 같은 수많은 존재들의 특성을 간과할 수 있다. 또 ‘자유’와 같은 추상적인 개념이나 인간의 심리와 같이 눈에 보이지 않는 것들도 이분법으로 구분하기 어려운 변인들이다. 기쁨, 슬픔, 공포, 사랑 같은 개념들도 ‘기쁘다, 기쁘지 않다’, ‘슬프다, 슬프지 않다’, ‘무섭다, 무섭지 않다’, ‘사랑한다, 사랑하지 않는다’ 등과 같이 극단적 특성을 대비시켜놓으면 이분법적 구성을 갖는 것으로 착각할 수 있지만, 이러한 개념들은 궁극적으로 이분법으로 접근하기 어려운 개념들로 이 극단 내에 점과 같은 수많은 속성들이 존재한다.
원리강론은 하나님의 존재를 설명하는 데도 이러한 이분법적 설명을 적용한다. 원리강론은 하나의 작품을 보아서 그 작품을 만들어낸 작가에 대해 알 수 있기 때문에 이 땅위에 존재하는 피조물의 특성을 근거로 하나님의 존재를 알 수 있다고 설명한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은 출발하는 가정부터 문제점을 가지고 있다. 작품을 보아 작가를 알 수 있다는 가정이 전적으로 틀린 것은 아니다. 그러나 이러한 가정이 보다 논리적으로 타당한 것인지를 알아보기 위해 보다 많은 경우의 수를 따져볼 필요가 있다.
온화한 작품을 봐서 온화한 작가의 성품을 추정할 수 있다. 그렇다면 온화한 성품을 가진 작가는 항상 온화한 작품만을 그릴까. 작가의 작품이 온화한 것부터 공격적인 것까지 다양한 것이 있다면 작가의 성품도 온화한 것에서부터 공격적인 것까지 있다고 추정해야 할까. 공격적이지 않은 성품을 가진 작가가 공격적인 작품을 그렸다면 이것은 어떻게 설명이 가능할까. 작품을 봐서 작가에 대해 알 수 있다는 가정은 지극히 단편적이고, 여러 가지 상황에 적용해 설명하기에는 무리가 있다. 이러한 가정으로 작가의 성품을 제대로 추정할 수도 있고, 그렇지 못할 수도 있다.
이러한 한계에도 불구하고 원리강론은 이러한 가정으로 하나님의 존재를 정의한다. 하나님이 창조한 만물은 양성과 음성으로 되어있기 때문에, 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도 외적 모습과 내적 모습, 양성과 음성의 중화적 존재로 계신다고 설명한다. 어떻게 보면 그럴듯하게 보이지만, 논리적인 오류의 가능성을 가진 가정에서 출발해서 도출해 낸 결론이기 때문에 이에 대한 판단은 일단 유보하기로 한다. 대신 원리강론이 취하고 있는 가정을 검증이 가능한 상황에 적용시켜 설명하겠다. 원리강론은 하나님이 가지고 있는 창조성을 닮아 인간도 창조성을 가지고 있으며 우리가 도구를 발명할 수 있는 것도 인간이 하나님의 창조성을 닮아서라고 설명한다. 인간은 역사이래 수많은 도구를 발명했으며, 현재에도 과학의 진보는 계속돼 컴퓨터, 비행기, 자동차, 우주선 등을 발명하기에 이르렀다.
원리강론의 설명대로라면 하나님이 하나님의 형상을 본 따 인간을 창조하셨으며, 인간도 하나님의 창조성을 닮아 인간세계에 필요한 수많은 도구를 만들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인간세계를 통해 하나님의 존재를 알 수 있듯이, 인간이 만든 도구를 통해 인간의 존재를 추정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결론에 이른다. 그렇다면 인간이 만들어 낸 수많은 도구로 인간의 모습이 추정 가능한가. 인간이 만든 도로, 주택, 빌딩, 컴퓨터, 전화기, 비행기 등의 도구로 인간의 어떤 모습을 추정할 수 있을까. 도로나 주택을 보고 인간의 존재를 떠 올릴 수 있을까.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최근 개발된 인간을 닮은 로봇 같은 경우에는 인간의 모습을 하고 있다. 그러나 이것은 어디까지나 의도적으로 인간의 모습을 본 뜬 것에 불과하다.
따라서 인간이 만든 도구를 통해 인간의 존재나 모습을 추정하기 어렵듯이, 피조세계의 모습을 통해 하나님의 존재를 파악하기에는 다소 무리가 있는 설명으로 보인다. 이러한 설명의 한계는 가정이 너무 단편적이고 빈약한 수준에서 출발했기 때문이다. 또 창조자와 피조물사이의 관계가 지나치게 밀접한 관계가 있을 것이라는 인식에서 출발한 것도 무리가 있어 보인다. 인간과 인간이 만들어낸 도구는 그 차원이 근본적으로 다르다. 아무리 비싼 발명품이라고 하더라도 인간의 가치와는 근본적으로 비교할 수 없는 것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어떻게 구체적으로 규정할 수는 없지만 만약 신이 있다면 인간의 특성과 비교의 대상에 놓일 수 있는 존재가 아니라 그 특성상 인간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존재일 가능성이 크다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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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서남동(1970). 통일교회 <원리강론>의 비판적 연구. 《기독교사상》1970년 5월호.
2) 전라남도 신안 출생. 36년 전주 신흥중학교를 졸업, 일본에 건너가 도시샤대학에 입학하고부터 신학순례가 시작되었다. 41년 신학부를 졸업하고 귀국, 43~52년 대구지방 교회에서 목사로 시무하고, 한국신학대학(한신대의 전신) 교수가 되었다. 57년 캐나다 이매뉴얼신학대학원을 졸업, 61년 연세대학교 신학과 교수에 취임했다.
75년 6월 유신독재하에서 야기된 이른바 ‘학원사태’로 해직되고, 이듬해 3ㆍ1 민주구국선언에 서명하여 함석헌, 김대중 등과 함께 긴급조치 제9호 위반으로 구속, 시련을 겪었다. 이 과정에서 동료교수인 안병무, 서광선, 주재용 등과 ‘민중신학’을 탄생시켰다. 이것은 제3세계 신학의 모델로 널리 소개되어 한국의 수출신학 제1호가 되었다. 네이버 백과사전 http://100.naver.com
3) 물론 출퇴근 등 다양한 형태의 교육이 존재한다.
첫댓글 글 잘 읽었습니다. 글의 내용을 인용해 가면서 논평을 좀 하고 싶은데, 혹시 마우스 드래그 금지를 해제한 버젼으로 글을 하나 띄어 주시면 안 될까요? 일일이 타이핑하기가 불가능해서요.
그리고, 가능하다면, 글을 쓰신 분에 대한 소개도 좀 부탁드립니다.
글 잘 보았습니다. 좋은 자료네요. 저도 현재 통일교회에 대해서 논문을 쓰고 있습니다만, 참고자료로써 인용하고 싶군요.
인용하시려면, 원저자와 원글 쓴 연도를 아셔야 할텐데요. 퍼오신 분께 제가 여쭈어 보았는데, 아직 답이 없으시네요. 자신의 논문을 빛내기 위해서는, 확실하고 검증된 문헌을 참고하셔야 합니다.
세상이 바뀌었습니다. 한권의 책으로 출판하기 위한 목적으로 쓴 것이 사실이고, 내용은 이미 다 완성된 상태입니다. 다만 이것이 오프라인에서 책으로 나올 수 있을지는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언젠가 책으로 나오길 바랍니다. 지금까지 생각으로는 인터넷상에서 책 내용의 대부분을 오픈할 것을 정한 상태입니다. 만약 내용을 인용하고 싶으시다면 인터넷상의 이름인 아이디(OhmyGod)와 인터넷주소(http://cafe.daum.net/tongilre)를 명기해 주시기 바랍니다. 주석으로 달린 내용을 제외한 가치판단은 OhmyGod이 한 것임을 밝힙니다. 논문의 성과가 있길 바랍니다.
카페에 올린 자료를 하나의 책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방문해보시면 아시겠지만 지극히 단순한 메뉴로 되어있습니다. 누구든지 와서 읽으라는 것이지요. 인터넷상에 떠있는 책이라고 생각합니다.
Thats it님, 제 말씀은 인터넷 상의 문헌이라고 해서 인용이 안 된다는 말씀이 아니라, 학계에서 인정할 수 있는 신빙성을 갖춘 문헌이라야 논문의 신뢰도가 높아진다는 말씀이었습니다. 예를 들어, 사과에 대해 평생 동안 연구한 사람이 쓴 사과에 대한 논문과 사과 한 번 먹어보고 쓴 글의 인용가치가 같다고는 생각할 수 없겠지요. 그래서, 제가 처음에 원저자인 OhmyGod이라는 분이 어떤 분이냐고 여쭈어 본 것이고요. OhmyGod은 ID일 뿐이지 원저자의 신뢰성을 알 수 있는 어떠한 척도도 아니지 않습니까?
저도 "통일교 비판"이라는 주제에 대해서는 상당히 흥미가 많습니다. 남들이 어떻게 생각하느냐도 아주 중요하기 때문이지요. 하지만, 제대로 알고 이야기하는 글이라야 재미가 있지, 1초만에 반론을 제기할 수 있는 글은 읽기가 싫어집니다. 제가 첫번째 글만 논평하고, 다음 글부터 논평을 안 한 또 다른 이유를 솔직히 말씀드리자면, "재미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물론, 통일교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이 읽으면 나름대로 "그렇구나" 할 수도 있습니다만, 너무 뻔한 사실에 대하여 잘못 이해하고 있는 글을 보면 솔직히 말씀드려서 화가 납니다. 주제에 대해 관심이 별로 없거나, 결론을 미리 내려놓고 접근하는 경우가 그렇습니다.
한가지만 여쭈어보겠습니다. 글의 제목이 "원리강론의 이론적 한계"입니다. 님이 "원리강론의 이론적 한계"를 찾게 된 동기가 무엇인가요? 왜 이론적 한계를 찾으려고 노력하셨나요? 원리강론으로부터 진리를 얻으려고 열심히 노력하다 보니 이론적 한계를 찾으신 건가요? 그렇다고 보기에는 원리강론에 대한 이해도가 너무나 낮습니다. 어느 정도는 미리 결론을 내리고 접근하신 건데, 왜 그런 결론을 미리 내리셨는지 먼저 여쭙고 싶네요.
제 말씀은 "님이 원리강론을 비판한 것이 잘못되었다."는 것이 절대 아닙니다. 새롭고 유쾌한 시도라고 봅니다. 다만, "왜 미리 결론을 정해놓고 비판했느냐?"에 대하여서는 교인의 입장으로서가 아니라, 공부하는 사람의 입장으로서 매우 화가 납니다. 그리고, 책으로까지 낼 계획이라고 이야기하면서, 아직 원저자가 어떤 사람인지에 대하여서도 당당하게 이야기하고 있지 않는 것도 말이지요.
원저자가 어떤 사람이냐는 것은, "어떤 웹사이트를 운영하는 사람이다. 이 내용으로 책을 쓰고자 하는 사람이다." 이런 것이 아니라, "원리에 대해 왜 관심이 생겼다. 원리를 이러한 방법으로 어느 정도 연구했다."와 같은 신뢰도와 연관된 사항입니다. 굳이 전문가라고 주장하지 않더라도, 자신이 누구인지에 대해 솔직히만 말씀해 주시면, 한번 읽어보고 논평해 드릴 용의는 있습니다.
spiderman님 많은 오해가 있으시군요. 인용에 관련해 쓴 것은 님께 드린 말씀이 아닙니다. T2-392님께 드린 말씀입니다. 그분이 가치가 있다고 판단되면 넷상에서의 문헌이지만 참고할 것이고 아니어도 그뿐입니다. 다만 의문을 가지셨기에 말씀을 드린 것입니다. 오해없으시길 바랍니다. 1초만에 반론을 제기할 수 있다구요? 대단하십니다. 님께서 반론을 하신것에 대해 제가 재반론하지 않았지요. 언젠가 할 것입니다. 님의 의견을 전적으로 받아들이기 때문에 바로 말씀 안드린 것이 아닙니다. 글이 재미가 없어서 읽기 싫으시다구요? 그것은 님의 선택입니다. 궁금한 사람은 읽을 것이고, 님이 재미없다고 다른 사람들까지
재미없다고 생각하시는 건 님께서 잘못 판단하신겁니다. 그리고 남들 재미있으라고 쓴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과 그의 말씀을 다뤘다고 하는 경서입니다. 글의 내용을 읽어보셔서 아시겠지만, 재미를 위해 이 글을 썼다고 생각하십니까? 미리 결론을 정해놓고 비판했다구요? 그렇게 보이십니까? 통일교에 관련된 많은 책들이 있습니다. 통일교의 주장을 전적으로 받아들이는 서적들이 있지요. 주로 성화출판사에서 나온 책들입니다. 그 반대편에는 여러 통일교 이탈자들이 쓴 책들을 비롯해서 비판서적들이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통일교를 인정조차 하지 않으려는 성격을 가지고 있지요. 대부분이 그 양 극단에 있습니다.
네, 무슨 말씀인지 알았습니다. 지금 막 표현을 부드럽게 수정하려고 하던 중에 들어오셔서 답글을 다시네요. 지금 대화를 걸고 있으니 공공장소에서 싸우지 말고 대화로 해결합시다.
간혹 제3자에 의한 출판물도 있습니다. 보시면 아시겠지만 저는 이탈자들이 쓴 책은 보지도 않았습니다. 그것이 진실이라고 할지라도, 깊은 감정의 문제가 녹아있을 수 있기 때문이죠. 여러가지 이유로 궁금한 것이 있었기 때문에 중간적 입장에서 접근을 해보고 싶었습니다. 통일교를 양 극단 중간 어느 정도에서 논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누구인지 말하면 솔직하게 논평해주시겠다구요? 제가 누구인지와 논평하는 것과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기본적으로 흥미를 느끼시지 않는 분이신데 논평을 하시겠다고 해도 제가 말리고 싶습니다.
님도 저를 모르고 저도 님을 모릅니다. 실명을 밝히지 않고 아이디를 쓰는 것이 도덕적으로 혹은 법적으로 문제가 있는 것입니까? 누가 뭐라고 말씀을 하셔도 어떤 이해관계를 떠났습니다. 제 양심을 제외하고 어떤 것도 고려하지 않았습니다. 제가 쓴 글이 오프라인상에서 나오거나 아니면 다른 기회로 제 존재가 나타날 수 있겠지요. 그것을 피하고 싶지 않습니다. 무엇이 두려워 그것을 피하겠습니까? 가능하면 예의를 지키고 지금도 그것을 지키려고 많이 노력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평하시는 분들, 본질적인 문제에 대해서 언급하시는 분들이 하나도 없습니다.
좋습니다. 대화 신청을 안 받으시네요. 여기다 적겠습니다. 여러번 말씀드립니다만, 일단 님의 중간자적인 접근법 자체에는 경의를 표합니다. 그래서, 칭찬의 말씀을 여러번 드렸고요. 하지만, 핫이슈에 대하여서는, 중간자적인 접근법이라는 것 자체가 매우 애매해서, 동기를 부여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즉, 님이 어떤 동기로 왜 이 문제를 다루시는지에 대한 내용을 먼저 알아야 그에 대한 올바른 논평이 나올 거라는 겁니다. 그에 대한 이야기가 없이, 무조건 "비판"한다라고 하면, 통일교인들이 그에 대해 비판하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제게 왜 님을 비판하냐고요?저는 통일교인이기 때문입니다. 저는 님께 묻습니다. 님은 왜 비판하시나요
아까도 말씀드렸듯이 실명을 안 가르쳐 준다고 탓하는 것이 아닙니다. 제가 님의 실명을 알아서 뭐합니까? 님이 왜 이 문제에 접근하고 있고, 그 동기가 무언지를 알아야, 대화가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무조건 "통일교 비판"이라는 책을 내어 놓는다면, 그 안에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는지 누가 알겠습니까? 님이 본질적인 동기에 대한 이야기를 하셔야 본질적인 이야기가 나올 것입니다. 원글 쓰신 분이 그 이야기를 안 하시는데, 본질적인 이야기를 어떻게 하겠습니까?
계속 말씀드립니다만, 저는 님의 접근법이 매우 신선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더 많은 것을 알고 싶고, 도움을 드리고 싶습니다. 하지만, 지금처럼 원리강론의 표상 부분만 보고 비판하신다면, 도움을 드릴 수도 없고, 저도 님의 표상 부분만 보고 비판할 수밖에 없습니다. 핫이슈에 대하여 논한다는 것이 원래 그렇게 힘든 일입니다. 자신을 그만큼 오픈해야 하니까요. 책까지 쓰려 하신다면, 더 오픈하셔야 할 것입니다. 대화신청을 다시한번 해 보겠습니다. 저는 싸움이 아니라 대화를 원합니다. 안 받으시면, 오늘의 대화는 이것으로 접겠습니다.
여러가지 이유로 관심의 대상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통일교를 비판하기보다는 의문을 해소하기 위한 시도였고, 무조건 비판은 아님을 말씀드립니다. 나름대로 균형감을 잡으려고 노력했습니다. 맹목적 비판은 아닙니다. 그것은 이탈자들이 한 것이죠.
근래 보기 드문 접근법이라서 더 자세한 것을 알고자 그와 같은 말씀을 드린 것입니다. 그리고, 직접적인 교류와 도움을 드리기 위해 대화신청을 했는데 여전히 안 받으시네요. 님이 무조건적이라거나 접근법 자체가 잘못되었다는 말씀은 안 드립니다. 다만, 아직 많이 부족하시다는 말씀은 솔직하게 드리겠습니다. 그리고, 정말 책까지 내고자 하신다면, 조금 더 오픈하시라는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그럼, 오늘은 이만 나가보겠습니다.
가능하면 원리강론 말고 통일교에서 나오는 다른 이론 서적을 보실것을 추천합니다. 위에서 님이 비판 하시는 내용은 책의 근본 내용을 비판 하는 것이 아니라 설명을 쉽게 하기 위해서 비유로 사용한 부분을 비판 하고 있습니다. 비유라는 것이 원래 완벽히 일치 할 수는 없는 것이니까 이를 비판 한다면 올바른 비판이 나오기 힘들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좀더 심도 있게 이론적으로 접근 하기 위해서 다른 책을 읽어 보실 것을 추천합니다.) 추가로 다른 종교를 연구하면서 중간적인 입장에서 접근 한다는 것 자체가 올바른 연구가 되지 않을 것 같습니다.
맞습니다. 객관적인 삼자 입장이 아니라, 직접적인 주체자의 입장에서 해결하려는 것이 연구자의 올바른 자세라고 생각합니다.
제가 하고 싶은 말씀이었습니다.^^ 지금, Thats it님의 오해를 풀어 드리려다가 제가 책을 한 권 쓰게 될 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