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탐험사 100장면 - 북동 항로를 찾다 얼음 바다를 이겨낸 빌렘 바렌츠와 아돌프 에리크 노르덴시욀드(1878~1879년)
인기멤버
hanjy9713
2024.03.13. 23:07조회 0
댓글 0URL 복사
세계 탐험사 100장면
북동 항로를 찾다
얼음 바다를 이겨낸 빌렘 바렌츠와 아돌프 에리크 노르덴시욀드(1878~1879년)
요약 북동 항로를 찾아 나선 빌렘 바렌츠는 스피츠베르겐 섬을 발견하고 바렌츠 해 일대를 밝혔으나 노바야젬라 섬의 얼음 바다 앞에서 항로 개척을 포기한다. 바렌츠가 통과 못한 노바야젬라 섬을 1879년 아돌프 에리크 노르덴시욀드가 뚫고 280년 만에 북동 항로 탐험사에 종지부를 찍었다.
요약 북동 항로를 찾아 나선 빌렘 바렌츠는 스피츠베르겐 섬을 발견하고 바렌츠 해 일대를 밝혔으나 노바야젬라 섬의 얼음 바다 앞에서 항로 개척을 포기한다. 바렌츠가 통과 못한 노바야젬라 섬을 1879년 아돌프 에리크 노르덴시욀드가 뚫고 280년 만에 북동 항로 탐험사에 종지부를 찍었다.
아돌프 에리크 노르덴시욀드(1832~1901)
1492년 배를 타고 인도로 가려던 콜럼버스는 뜻밖에 장애물(신대륙)을 만나, 그가 목적지로 삼았던 인도에는 가보지도 못했다. 1498년 가마가 인도 항로를 개척했지만, 그것은 아프리카 남쪽을 빙 돌아 가는 엄청난 거리였다.
1521년에는 마젤란이 남아메리카를 돌아 필리핀까지 갔지만, 그 뱃길은 가마가 갔던 인도 항로보다 더 멀었다. 자연히 유럽 사람들은 아시아에 이르는 더 가까운 길-북극해를 지나는 뱃길-을 찾게 되었다.
유럽에서 북극해를 거쳐 아시아에 이르는 길은 북서 항로와 북동 항로 두 갈래이다. 북서 항로는 유럽에서 북아메리카 대륙 북쪽을 지나 서쪽으로 태평양(베링 해협)까지 가는 것이고, 북동 항로는 유럽에서 유라시아 대륙(주로 시베리아) 북쪽을 지나 동쪽으로 태평양(베링 해협)까지 가는 길이다.
유럽 사람들이 이 두 항로를 개척하러 나선 시기는 북서 항로 쪽이 조금 앞선다. 1497년 잉글랜드 왕 헨리 7세가 존 캐벗에게 북서 항로를 찾으라고 명한 것이 시초이다. 그뒤 자크 카르티에(1534년) 마틴 프로비셔(1576년) 프랜시스 드레이크(1578년) 존 데이비스(1585년)가 대서양, 혹은 태평양 쪽에서 북극해를 지나는 뱃길을 찾다가 모두 실패했다.
북동 항로를 찾아 나선 초기 인물로는 네덜란드인 빌렘 바렌츠(1594년)가 대표적이며, 그뒤로 헨리 허드슨(1607년) 세묜 데즈네프(1648년) 등이 있다.
빌렘 바렌츠는 자기가 지난 뱃길을 정확하게 해도에 기입하고 기상학 자료들을 수집해 남김으로써 초기 북극 탐험가들 가운데 가장 중요한 인물로 꼽힌다. 비록 북동 항로를 개척하지는 못했지만 스피츠베르겐(지금의 스발바르 군도에 있음) 섬을 발견했으며, 세 차례 항해를 통해 바렌츠해 일대를 자세히 밝혔다.
네덜란드 상인들로부터 인도로 가는 북동 항로를 찾아 달라는 부탁을 받은 바렌츠는 1594년 노르웨이 북부를 돌아, 러시아 북서쪽 끝 무르만스크 앞바다를 거쳐 동쪽으로 나아갔다. 그는 시베리아 북쪽에서 노바야젬랴 섬까지 갔으나 바다가 얼어붙어 더 전진하지 못했다. 이듬해에도 똑같은 뱃길을 잡아 항해했으나 역시 노바야젬랴를 넘지 못했다.
1596년 세 번째 항해에 나선 바렌츠는 이번에는 노르웨이 북부에서 동쪽으로 돌지 않고 그대로 북쪽으로 올라가다가 스피츠베르겐 섬을 발견했다. 이 섬의 해안을 따라 올라가니 당연히 얼음덩어리들이 북쪽을 가로막고 있었다.
그가 방향을 바꾸어 동쪽으로 항해하니 노바야젬랴 섬이 나타났다. 바렌츠는 1,2차 항해에서 동쪽으로 더 가지 못했던 점을 생각해 노바야젬랴 섬의 북쪽을 돌아 동쪽으로 가려고 생각했다. 그러자 다른 배를 이끌던 얀 라이프 선장은 그 말에 따르지 않고 노바야젬랴의 남쪽을 돌았다.
섬의 북쪽을 돈 바렌츠는 엄청난 얼음덩어리들에 갇혀 옴쭉달싹 못하게 되었다. 바렌츠 일행은 얼음밖에 없는 노바야젬랴 섬에 상륙해, 바다에 떠다니는 나무를 주워다 오두막을 지었다. 식량은 배에서 날라왔고, 북극여우를 사냥해 고기를 보충했다. 물은 얼음을 녹여서 해결했다.
1596년 겨울을 북위 75도가 넘는 곳에서 오두막살이를 한 바렌츠 일행은 세상에서 가장 혹독한 추위를 겪었다. 난로 앞에 바짝 다가앉아 있어도 등에 서리가 하얗게 덮일 정도였다. 그들은 돌을 달구어 등을 녹이면서 정말 용케도 2명만 빼고 살아 남았다.
봄이 왔으나 배는 오래 전에 부서져 항해할 수가 없었다. 그들은 구명보트 2척을 타고 섬을 탈출했다. 보트는 얼음 바다에서 죽을 고비를 몇 차례 넘기며 남쪽으로 내려가다가 폭풍을 만났다. 그들은 또다시 한 얼음 섬으로 보트를 끌어올렸다. 그렇잖아도 영양 부족으로 쇠약해진 바렌츠는 노바야젬랴를 떠난 지 한 주일 만에 이름 없는 얼음 섬에서 눈을 감고 말았다.
폭풍을 피한 나머지 선원들은 식량을 바다에 잃고 몇 주일을 추위와 굶주림과 괴혈병에 시달리다 러시아 어부들을 만나 식량을 구했다. 그뒤로 그들은 1,000km 가까운 거리를 노를 저어 무르만스크 근처 콜라 반도에 있는 한 대피소에 이르렀다.
그들이 노바야젬랴에서 콜라 반도까지 노를 저어간 1,000km 바다는 오늘날 지구상에서 드레이크 해로와 더불어 제일 혹독하다고 알려진 바렌츠 해이다. 웬만큼 큰 배가 아니면, 물보라가 공중에서 얼어서 배에 달라붙은 얼음 무게에 눌려 뒤집히기 일쑤다. 잘못하여 바다에 떨어진 사람은 아무리 빨리 끌어올려도 대부분 얼어 죽는다.
비수처럼 날카로운 바람이 살갗을 찢는 이 잔인한 바다에서 얼음물 파도를 뒤집어쓰며 1,000km나 노를 저은 것은, 1916년 어니스트 섀클턴이 남극해에서 1,300km를 노를 저어 간 것과 함께 역사상 가장 처절한 투쟁이라고 일컫는다.
북동 항로는 바렌츠가 죽은 뒤 280여 년이 지난 1879년 스웨덴 지리학자이자 탐험가인 아돌프 에리크 노르덴시욀드가 처음 개척했다.
노르덴시욀드가 북동 항로를 찾아 추크치 해에 이르렀을 때 러시아 북부에 사는 추크치족이 그들을 방문했다.
노르덴시욀드는 북동 항로를 통과하기에 앞서 1875년과 1876년 두 차례 예비 항해를 했는데, 이 때는 바렌츠의 한이 서린 노바야젬랴 섬을 지나 카라 해 연안에 있는 예니세이 강 어귀까지 진출했다. 그는 1878년 7월 21일 증기선 베가호를 타고 노르웨이 최북단 트롬쇠 항을 출발해 동쪽으로 나아갔으나 9월 말 베링 해협 근처에서 배가 얼어붙는 바람에 그곳에서 겨울을 났다.
1879년 7월 18일 날씨가 풀리자 다시 항해에 나선 노르덴시욀드는, 7월 20일 알래스카의 클래런스 항에 도착함으로써 280년이 넘는 북동 항로 탐험사에 종지부를 찍었다.
목적지로 삼았던 인도에는 가보지도 못했다. 1498년 가마가 인도 항로를 개척했지만, 그것은 아프리카 남쪽을 빙 돌아 가는 엄청난 거리였다.
1521년에는 마젤란이 남아메리카를 돌아 필리핀까지 갔지만, 그 뱃길은 가마가 갔던 인도 항로보다 더 멀었다. 자연히 유럽 사람들은 아시아에 이르는 더 가까운 길-북극해를 지나는 뱃길-을 찾게 되었다.
유럽에서 북극해를 거쳐 아시아에 이르는 길은 북서 항로와 북동 항로 두 갈래이다. 북서 항로는 유럽에서 북아메리카 대륙 북쪽을 지나 서쪽으로 태평양(베링 해협)까지 가는 것이고, 북동 항로는 유럽에서 유라시아 대륙(주로 시베리아) 북쪽을 지나 동쪽으로 태평양(베링 해협)까지 가는 길이다.
유럽 사람들이 이 두 항로를 개척하러 나선 시기는 북서 항로 쪽이 조금 앞선다. 1497년 잉글랜드 왕 헨리 7세가 존 캐벗에게 북서 항로를 찾으라고 명한 것이 시초이다. 그뒤 자크 카르티에(1534년) 마틴 프로비셔(1576년) 프랜시스 드레이크(1578년) 존 데이비스(1585년)가 대서양, 혹은 태평양 쪽에서 북극해를 지나는 뱃길을 찾다가 모두 실패했다.
북동 항로를 찾아 나선 초기 인물로는 네덜란드인 빌렘 바렌츠(1594년)가 대표적이며, 그뒤로 헨리 허드슨(1607년) 세묜 데즈네프(1648년) 등이 있다.
빌렘 바렌츠는 자기가 지난 뱃길을 정확하게 해도에 기입하고 기상학 자료들을 수집해 남김으로써 초기 북극 탐험가들 가운데 가장 중요한 인물로 꼽힌다. 비록 북동 항로를 개척하지는 못했지만 스피츠베르겐(지금의 스발바르 군도에 있음) 섬을 발견했으며, 세 차례 항해를 통해 바렌츠해 일대를 자세히 밝혔다.
네덜란드 상인들로부터 인도로 가는 북동 항로를 찾아 달라는 부탁을 받은 바렌츠는 1594년 노르웨이 북부를 돌아, 러시아 북서쪽 끝 무르만스크 앞바다를 거쳐 동쪽으로 나아갔다. 그는 시베리아 북쪽에서 노바야젬랴 섬까지 갔으나 바다가 얼어붙어 더 전진하지 못했다. 이듬해에도 똑같은 뱃길을 잡아 항해했으나 역시 노바야젬랴를 넘지 못했다.
1596년 세 번째 항해에 나선 바렌츠는 이번에는 노르웨이 북부에서 동쪽으로 돌지 않고 그대로 북쪽으로 올라가다가 스피츠베르겐 섬을 발견했다. 이 섬의 해안을 따라 올라가니 당연히 얼음덩어리들이 북쪽을 가로막고 있었다.
그가 방향을 바꾸어 동쪽으로 항해하니 노바야젬랴 섬이 나타났다. 바렌츠는 1,2차 항해에서 동쪽으로 더 가지 못했던 점을 생각해 노바야젬랴 섬의 북쪽을 돌아 동쪽으로 가려고 생각했다. 그러자 다른 배를 이끌던 얀 라이프 선장은 그 말에 따르지 않고 노바야젬랴의 남쪽을 돌았다.
섬의 북쪽을 돈 바렌츠는 엄청난 얼음덩어리들에 갇혀 옴쭉달싹 못하게 되었다. 바렌츠 일행은 얼음밖에 없는 노바야젬랴 섬에 상륙해, 바다에 떠다니는 나무를 주워다 오두막을 지었다. 식량은 배에서 날라왔고, 북극여우를 사냥해 고기를 보충했다. 물은 얼음을 녹여서 해결했다.
1596년 겨울을 북위 75도가 넘는 곳에서 오두막살이를 한 바렌츠 일행은 세상에서 가장 혹독한 추위를 겪었다. 난로 앞에 바짝 다가앉아 있어도 등에 서리가 하얗게 덮일 정도였다. 그들은 돌을 달구어 등을 녹이면서 정말 용케도 2명만 빼고 살아 남았다.
봄이 왔으나 배는 오래 전에 부서져 항해할 수가 없었다. 그들은 구명보트 2척을 타고 섬을 탈출했다. 보트는 얼음 바다에서 죽을 고비를 몇 차례 넘기며 남쪽으로 내려가다가 폭풍을 만났다. 그들은 또다시 한 얼음 섬으로 보트를 끌어올렸다. 그렇잖아도 영양 부족으로 쇠약해진 바렌츠는 노바야젬랴를 떠난 지 한 주일 만에 이름 없는 얼음 섬에서 눈을 감고 말았다.
폭풍을 피한 나머지 선원들은 식량을 바다에 잃고 몇 주일을 추위와 굶주림과 괴혈병에 시달리다 러시아 어부들을 만나 식량을 구했다. 그뒤로 그들은 1,000km 가까운 거리를 노를 저어 무르만스크 근처 콜라 반도에 있는 한 대피소에 이르렀다.
그들이 노바야젬랴에서 콜라 반도까지 노를 저어간 1,000km 바다는 오늘날 지구상에서 드레이크 해로와 더불어 제일 혹독하다고 알려진 바렌츠 해이다. 웬만큼 큰 배가 아니면, 물보라가 공중에서 얼어서 배에 달라붙은 얼음 무게에 눌려 뒤집히기 일쑤다. 잘못하여 바다에 떨어진 사람은 아무리 빨리 끌어올려도 대부분 얼어 죽는다.
비수처럼 날카로운 바람이 살갗을 찢는 이 잔인한 바다에서 얼음물 파도를 뒤집어쓰며 1,000km나 노를 저은 것은, 1916년 어니스트 섀클턴이 남극해에서 1,300km를 노를 저어 간 것과 함께 역사상 가장 처절한 투쟁이라고 일컫는다.
북동 항로는 바렌츠가 죽은 뒤 280여 년이 지난 1879년 스웨덴 지리학자이자 탐험가인 아돌프 에리크 노르덴시욀드가 처음 개척했다.
노르덴시욀드가 북동 항로를 찾아 추크치 해에 이르렀을 때 러시아 북부에 사는 추크치족이 그들을 방문했다.
노르덴시욀드는 북동 항로를 통과하기에 앞서 1875년과 1876년 두 차례 예비 항해를 했는데, 이 때는 바렌츠의 한이 서린 노바야젬랴 섬을 지나 카라 해 연안에 있는 예니세이 강 어귀까지 진출했다. 그는 1878년 7월 21일 증기선 베가호를 타고 노르웨이 최북단 트롬쇠 항을 출발해 동쪽으로 나아갔으나 9월 말 베링 해협 근처에서 배가 얼어붙는 바람에 그곳에서 겨울을 났다.
1879년 7월 18일 날씨가 풀리자 다시 항해에 나선 노르덴시욀드는, 7월 20일 알래스카의 클래런스 항에 도착함으로써 280년이 넘는 북동 항로 탐험사에 종지부를 찍었다.
▼ 그 뒤 기록은 * 1920년 / 로알 아문센 북동 항로 두 번째로 통과 [네이버 지식백과] 북동 항로를 찾다 - 얼음 바다를 이겨낸 빌렘 바렌츠와 아돌프 에리크 노르덴시욀드(1878~1879년) (세계 탐험사 100장면, 2002.7.18., 이병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