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인생 최고의 여행
이재영
대학교 전자과를 나온 내가 처음 비행기를 타고 해외로 나간 건 1979년 초, 만 스물일곱 살 때였다.
방위 산업체 연구소 과장으로, 말레이시아에서 열리는 국제 방산 전시회 참관 차였다. 국방과학연구소(ADD) 주선으로 예비역 준장을 비롯해 국내 방산 업체에서 온 30여 명이 경유지 홍콩에서 일박하며 산꼭대기 해양 공원 물개 쇼도 구경했다.
말레이시아 수도 쿠알라룸푸르에서 2박 3일간 머물며, 전투기, 전차, 자주포, 무선장비 등 외국산 최첨단 장비를 구경했다.
우리나라는 그때 36문 다연장 로켓포 국산화에 성공했지만, 전시장에는 국산 소총 등 일부 장비만 선보이고 있었다.
여유 시간에 도심의 화려한 이슬람교 사원과 교외의 석회암 동굴 및 전갈을 키우는 관광지도 둘러봤다. 홍콩 호텔에 묵을 때 룸메이트였던 모 중소기업체 40대 사장님이 내게 120불짜리 주석으로 만든 금속제품을 선물로 사줬다. 내가 양말 빨 때 함께 빨아드렸던 보답인 것 같다.
밤에 중심가의 제일 큰 건물이라는 ‘암팡 파크’에 들렀는데, 조그만 백화점 수준으로 별로 볼 것도 없었다.
귀국길에 나 혼자 일본의 수도 도쿄에 들렀다. 민수용 소형무전기를 중동에 다량 수출하는 KD라는 회사와 기술 관련 협의를 위해서였는데, 택시 운전석이 반대쪽에 있어 놀랐다.
회사가 가정집 같은 큰 공장이었고, 사장 사모님이 녹차와 함께 반으로 썬 딸기를 넣은 우유를 내놓았다. 처음 먹어보는데 어찌나 맛있던지, 금세 다 먹어 치우자 웃으며 한 그릇 더 갖다줬다.
밤에 유명한 우에노 공원에 나가봤는데, 밤거리 여기저기 몰려서서 담배 피우는 불량 청소년들이 눈에 띄었다. 왠지 일본의 장래가 밝아 보이지 않아서 은근히 기뻤다.
미국에는 대여섯 번 단기 출장을 갔고, 맨 처음은 라스베이거스에서 열리는 국제 전자제품 박람회(CES)였다.
LA 공항에 내려 오퍼상인 재미교포 Lee의 마중을 받았는데, 비행기 표가 동나서 택시를 대절해 서부영화에서나 보던 삭막한 사막을 서너 시간 달렸다.
유명한 ‘씨저스 팰리스 호텔’은 밖에서 구경만 했고, 싸구려 호텔에 묵었다.
전시장에서는 각 부스를 돌아다니며 내 명함을 주고 카탈로그 받아 모으기에 바빴다. 양이 많아서 항공 화물로 부쳤더니, 귀국 한 달이나 지나서 받았다.
밤에 Lee의 안내로 극장에서 연극 구경을 했는데, 머리 위로 비행기가 날며 기관총을 쏘고, 무대의 큰 신전 기둥이 무너져 내리며 먼지를 자욱이 날렸다.
Lee가 “엔터테인먼트”라고 했는데, 기획 작품이라는 뜻 같았다.
디트로이트 자동차 전시회에 미래 자동차로 AI 무인 자동차가 소개됐었는데, 꼭 40년이 지난 지금에야 실현되었다.
동행한 직원과 함께 호텔 꼭대기 라운지에서 식사하다가 창 바깥 풍경이 달라져서 엄청나게 놀랐다. 통째로 회전하는 스카이라운지였다.
처음 수출한 가정용 무선전화기 코드레스폰에 “click click sound”라는 문제가 생겼다는 전통문을 받고, 개발과장인 나는 수출과장과 함께 급히 LA로 날아갔다.
미국인 바이어(buyer)가 면담 중에 수출과장에게 “Don’t play the game (장난치지 마)”라며 막말을 했지만, 엔지니어인 나에게는 웃으며 친절히 대해줬다.
진열된 대여섯 대의 문제 제품에서 간간이 “끄릭 끄릭”하는 소리가 들렸다.
난감한 심정으로 뚜껑을 열고 자세히 살펴본 결과, 미국과 한국의 공간 전파 잡음 레벨이 달라서 ‘스켈치(squelch)’라는 기능에 이상이 생긴 것이었다.
그 자리에서 인두로 회로의 저항값을 바꿔 때워서 모두 고쳤다.
울상으로 지켜보던 수출과장 얼굴에 화색이 돌았고, 이제는 큰소리 내어 협상에 임했다.
귀국 후 영어 잘하는 대리를 출장 보내, LA 현지 교포들 도움으로 일주일간 5천여 대 전부 수리해서 해결했다.
뉴욕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에 올라가서 미국의 위대함을 실감했다. 1931년에 102층 건물을 짓다니!
맨해튼 센트럴파크의 카네기홀에 딸린 서점에서 ‘cosmos’라는 책이 우연히 눈에 띄어 샀는데, 나중에 국내에서 번역된 ‘코스모스’를 보고서야 저자 칼 세이건이 아주 유명한 천문학자라는 걸 알았다.
한번은 시카고에서 뉴욕행 국내선 비행기를 탔는데, 기내에 배인 담배 연기가 양말에서 나는 고린내 수준이라 한참 동안 숨을 제대로 못 쉰 적도 있다.
내가 부장일 때, 지금 사용되는 스마트폰의 전신인 셀룰러폰이라는 벽돌만 한 휴대형 전화기를 미국 M 사에서 시판했다.
마침 그 통신 시스템을 설계했던 벨연구소(Bell Lab) 기술자 몇 명이 나와 차린 ‘Fone Tek’이라는 개발 전문회사가 있어, 거금을 주고 기술제휴를 맺어 공동개발에 착수했다.
벨연구소가 있는 뉴저지주 ‘버나드 빌’의 이층집을 전세 내어, 연구원 여러 명과 함께 장기 출장을 나갔다.
차 없이는 한 발짝도 움직일 수 없어 나도 현지에서 운전면허를 땄는데, 필기시험은 달랑 영어로 된 객관식 20문제로 만점 받았더니 미국인이 엄지척을 해줬다. 실기는 우리의 ‘일렬 주차’인 parallel park (병렬 주차)가 역시 어려웠고, 주행을 매우 꼼꼼하게 봐서 두 번 만에 합격했다. 좌우로 너무 많이 두리번거린다고.
그때 한국은 토요일 오전 근무 반공일이었는데, 미국은 주 5일 근무였다.
주말엔 차 몰고 다운타운에 나가 드럼세탁기가 돌아가는 빨래방에 세탁물 넣고, 근처 마트에서 장을 보고, 레스토랑 옆 작은 스탠드바에도 들렀다.
마을 사람들이 여러 테이블에서 얘기 나누고, 서너 명이 연주하는 무대 앞 플로어에 나가 춤도 췄다. 그들의 평소 주말 모습이었다.
큰 생수통에 담긴 싸구려 포도주를 사 와서, 장난삼아 어깨에 멘 채 손잡이로 기울여, 컵에 따라서 먹던 기억이 난다. 그때 주방엔 간편한 식기세척기가 있었다.
뉴욕 시내까지 버스로 두 시간이라 몇 번 갔는데, 뉴욕 변두리 아파트가 시커멓게 불에 탄 모습이 많이 보였다.
나중에 들으니 빈민들이 보험금 타려고 일부러 불낸 거라고 했다.
직원들이 단체로 나이아가라 폭포에 가자는 걸, 나는 다음에 아내와 함께 가겠다며 사양했는데, 아직도 가지 못했다.
나는 6개월 후에 귀국했고, 직원들은 계속 교대로 나갔는데, 근 2년 만에 차량형과 휴대형 두 모델을 경쟁사인 S 전자에 앞서 시중에 출시했다.
그러고는, 마흔 살에 대기업을 떠나 작은 제조업체를 차렸고, 겨우 몇십 명 먹여 살리느라고 내 집도 날려 먹고, 환갑 지나서까지 고생고생하며 험한 길을 걸어왔다.
국내 여행은 고교 동창 6명의 부부 친목 모임으로, 오십 중반부터 매년 여름에 열두 명이 2박 3일간, 등산도 하고 맛있는 것도 사 먹으며, 여기저기 십여 년간 돌아다녔다.
은퇴 후 그 숱한 여행이 모두 희미한 과거의 사진첩에 묻히고, 노년에 글이나 쓰며 조용히 지내렸더니, 세월과 함께 닳아빠진 몸은 대장암 수술을 빌미로 내게 안식을 요구했다.
비행기 처음 타본 지 꼭 41년 만이었다.
수술이 잘되고 1년간 항암치료도 제대로 받아서, 만 69세가 된 작년 봄에 아내와 함께 천릿길 진주에 내려갔다.
결혼 5년 차인 둘째 아들 부부가 효도한다고 모시고 가서, 다니던 초·중·고등학교를 둘러보고, 진주성 촉석루에도 들러 어릴 적 추억을 되살렸다.
아내와 초등학교 5·6학년 한 반이었고, 대학교도 부산에서 같은 학교를 나와서 졸업하자마자 결혼했다. 간호과를 나온 아내는 보건교사로 근무했고, 장남의 외동딸인 손녀는 중학교 2학년이 되었다.
본적지 고향인 하동 화개장터 옆 지리산 자락 영당 부락에 들러, 105세 되신 숙모님과 사촌 형님 부부도 뵈었다.
문중 재실 근처 작설차 밭으로 둘러싸인 부모님 묘소에 성묘했는데, 어머님 먼저 모신 후 40여 년 전에 심은 좌우 동백나무에 붉은 꽃송이가 만발해있다.
가져간 하얀 꽃 치자나무를 봉분 옆 잔디밭에 심었다. 여기가 우리 부부가 오랜 여행을 끝내고 돌아와 영면할 장소임을 표시한 것이다.
이번 여행이 내 인생 최고의 여행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