닛산자동차 관계자가 한국 업체의 핸들을 만져 보고 있다. | |
일본 가나가와(神奈川)현 아쓰기(厚木)시에 자리 잡은 ‘닛산 테크니컬 센터’. 일본 방위성보다 더 들어가기 어렵다는 이곳에서 지난 6월 17일 한국 자동차 부품업체들의 자동차 부품 전시 상담회가 열렸다.
한국업체들의 부품 전시 상담회는 닛산자동차가 문을 연 이래 처음이다. 그만큼 한국 부품업체들로선 기회이자 도전의 시간이었다. 이곳은 닛산의 구매조달본부와 R&D(연구개발)센터, 디자인센터 등이 몰려 있어 ‘닛산의 두뇌’로 불린다.
외부 전문가들에게 노출되면 이곳 사정이 한눈에 파악될 우려가 있다는 우려 때문에 출입도 엄격하게 통제된다. 이곳에서 외부인은 인터넷도 사용할 수 없다. 1층 전시장으로 들어서자 곳곳에 한국인이 몰려 있었다. 한국에서 참가한 69개 업체는 한국 최고의 업체들이다.
1년 전부터 전시 상담회를 준비하면서 닛산이 사전에 부품업체를 선별해 최종적으로 선발된 업체들이다. 닛산 관계자들이 대거 몰려든 대성전기는 핸들에 부착하는 차세대 지능형 스위치를 주력 제품으로 내놓았다. 최근 전자 제어판의 기능이 복잡해지면서 운전자가 조작해야 하는 스위치 숫자가 늘어나는 가운데 이 회사는 핸들을 잡은 손의 엄지손가락 하나로 조작하는 ‘스티어링 햅틱 스위치’를 개발했다.
코오롱도 큰 주목을 받았다. 코오롱은 일본과 비슷한 수준의 제품을 10% 이상 싼 가격에 납품할 수 있다는 장점을 내세워 도요타자동차 납품을 준비하는 데 이어 이번에는 닛산의 문을 두드린 것이다. 폴리에스테르 원단을 불소로 처리한 코오롱 제품은 기능이나 내구성 등이 일본 제품보다 뛰어나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주단조 분야의 동양피스톤은 독자적 설계 변경으로 엔진을 10% 가볍게 하고 소음도 줄인 제품을 선보여 닛산 관계자들의 주목을 받았다. 평화정공과 광진상공은 도어 시스템의 소재를 철에서 플라스틱으로 변경해 무게를 40% 경감한 제품을 내놓아 폭발적 관심을 끌었다. 이들 회사는 이미 미국·중국·브라질 등에 부품을 수출하고 있다.
닛산 관계자는 “닛산이 힘을 쏟고 있는 전기자동차는 경량화가 필수”라며 “플라스틱 도어 시스템은 큰 관심을 불러일으키고 있다”고 말했다.
KOTRA 조환익 사장 “닛산 사상 최초”
이번 행사를 준비한 KOTRA의 조환익 사장은 “닛산이 한국 부품업체들에 전시 상담회를 열도록 해준 것은 처음”이라며 ”한국 업체들의 기술력이 인정 받으면서 전시회를 요청하는 일본 완성차 메이커가 계속 늘어나고 있다”고 말했다. 한국 부품업체들은 지난해 9월 처음으로 도요타자동차의 본고장인 나고야(名古屋)에서 부품 전시회를 열었다.
조 사장은 “현재 일부 업체가 도요타와 부품 구매 계약을 진행 중”이라며 “스즈키, 다이하쓰와도 전시회를 협의 중”이라고 밝혔다. 닛산테크니컬센터의 나카자와 가즈유키(中澤和之) 구매부장은 “지난해부터 한국 8개 업체와 계약하는 등 해외 부품 조달 비율을 크게 늘리고 있고, 앞으로도 한국에서 수입을 늘릴 계획”이라고 말했다.
이어 “한국 업체가 품질과 가격뿐 아니라 전기자동차 등에 쓸 수 있는 첨단 부품을 개발하는 데도 힘을 더 기울여줬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이날 한국 자동차 부품 전시 상담회에는 닛산 본사와 자동차 부품 납품업체 등에서 1000여 명이 참가했다. 일본 자동차 메이커들이 한국 부품에 관심을 보이는 것은 두 가지 이유 때문이다.
첫째는 글로벌 경영에 따른 비용 절감 노력이다. 일본에는 자동차 부품업체들이 전국적으로 성업 중이다. 두메산골인 후쿠이(福井)현에서도 자동차 부품 산업이 크게 발달해 있을 정도다. 일본 전국이 온통 기술의 경연장이라고 해도 좋을 만한 기업 환경이 일본을 부품 강국으로 만들었다.
그러나 글로벌 경영을 하면서 사정이 달라지고 있다. 일본 부품업체들은 고성능 부품을 만들지만 인건비 때문에 제품 가격도 비싸다. 그래서 일본 완성차 업체들은 조금이라도 비용을 절감하는 경영 체제가 필요해졌다. 한국 부품업체들에 눈을 돌린 것도 배경이 같다.
현대·기아자동차와 르노삼성, GM대우가 지금까지 성장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한국의 자동차 부품 산업이 나름대로 경쟁력을 갖췄기 때문이라고 일본 자동차 업체들이 판단하고 있는 것이다. 한국 업체들은 무엇보다 가격 경쟁력이 높다. 부품 성능은 큰 차이가 없고 가격이 20~30% 정도 싸다면 마다할 이유가 없는 것이다.
일본 자동차 메이커들은 한국 부품을 사용함으로써 일본 부품업체들에 가격 인하 압력을 가하는 효과도 거두게 된다. 장인정신을 바탕으로 지금도 수공업에 가까운 방식으로 부품을 만드는 일본 부품업체들은 인건비 비중이 높다. 반면 한국 업체들은 현대차 등 국내 완성차 업계의 혹독한 원가 절감 노력에 단련돼 있다.
성능이 일정 수준을 뛰어넘어야 하는 것은 기본이고 가격 경쟁력도 반드시 갖춰야 살아남을 수 있는 제조 능력을 갖추고 있는 것이다. 한국 자동차 부품에는 그러나 한계가 있다. 닛산테크니컬센터의 나카자와 구매부장은 “품질과 가격에서는 더 이상 바랄 게 없지만 새로운 부품 개발은 큰 과제가 되고 있다”고 지적했다.
전기자동차의 경우 차량을 경량화하는 것은 물론이고 성능을 높이고 고객 편의 장치를 추가하려면 획기적으로 새로운 부품이 필요하다는 얘기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한다면 “독창적 부품을 만들어 오라”는 주문인 것이다.
닛산 서플라이 체인 전면 재검토
닛산은 앞으로 기존 차량의 조달 비용을 해마다 5%씩, 신차는 30%의 비용 삭감을 목표로 하는 ‘모노즈쿠리(제조업) 개혁’을 추진 중이다. 부품 종류나 재료비의 삭감 등을 토대로 부품의 해외 현지화를 가속화하게 된다. 닛산은 이를 위해 부품 공급처와 공동으로 국내 공급망의 전면적 재검토를 하고 있다.
1차 벤더와 협력해 2, 3차 벤더까지 부품 공급망을 거슬러 올라가 공급 과정에서의 낭비를 철저히 없애나갈 예정이다. 한편으로는 한국·일본·중국을 하나의 부품 조달권으로 묶어 이 지역에서 가장 효율적인 조달 구조를 구축하려고 나섰다. 이런 조달망 정비는 일본 내에서는 100만 대 생산을 유지하는 데 필수적이다.
닛산의 지난해 국내 생산량은 2007년도의 80%인 102만 대를 기록했다. 글로벌 생산 체제를 확대한다 해도 일정 규모의 국내 생산 규모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안정적이고 경제적인 부품 조달 체제 구축이 필요해진 것이다. 이런 구상은 주력 차량 마치(March)의 생산을 종료하는 등 일본 내 생산차의 비용 경쟁력이 상대적으로 저하되면서 나오고 있다.
달러당 90엔 수준의 엔화 강세 기조가 장기화하면서 부품 조달 비용의 삭감이 절실해지고 있다. 올 초 도요타의 세계적 리콜 사태를 계기로 품질 경쟁력의 업그레이드가 절실해진 것도 조달망 정비의 배경이 되고 있다. 이런 측면에서 가격과 품질이 적합한 한국 부품의 매력이 커지고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