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회록(懺悔錄)
윤동주
파란 녹이 낀 구리 거울 속에
내 얼굴이 남아 있는 것은
어느 왕조(王朝)의 유물(遺物)이기에
이다지도 욕될까
나는 나의 참회(懺悔)의 글을 한 줄에 줄이자
만(滿) 이십사 년 일 개월을
무슨 기쁨을 바라 살아 왔던가
내일이나 모레나 그 어느 즐거운 날에
나는 또 한 줄의 참회록을 써야 한다.
- 그 때 그 젊은 나이에
왜 그런 부끄런 고백(告白)을 했던가
밤이면 밤마다 나의 거울을
손바닥을 발바닥으로 닦아 보자
그러면 어느 운석(隕石) 밑으로 홀로 걸어가는
슬픈 사람의 뒷모양이
거울 속에 나타나온다.
(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1948)
♣작품해설
이 시는 암울한 시대에 욕된 삶을 사는 자신을 성찰하고 참회하는 작품으로, 자문(自問)
하는 형식 속에 지식인의 양심적 자세를 담고 있다. 24세(1942.1.24.)에 썼다고 알려져 있
는 이 작품은 냉철하고 객관적인 입장에서 자기 자신을 동양적 윤리관에 입각하여 철저히
분석, 해체한 점에서 그의 깊은 정신을 엿볼 수 있게 해 준다.
시적 화자는 ‘파란 녹이 낀 구리 거울’이라는 매체를 통하여 그 속에서 ‘왕조의 유물’과
‘내 얼굴’을 발견한다. 이 ‘거울’은 그 자체가 ‘나’이면서 나를 비춰 주는 거울로, 그는 거
울을 통해 과거의 삶을 성찰하고 참회할 뿐 아니라, ‘그 어느 즐거운 날’인 미래에 비추어
현재의 부끄러움을 깨닫는다. 그러므로 이 시에서의 거울은 단순히 내면적 자아 성찰의 도
구가 아니라, 역사 인식의 매개물이요 미래 전망의 창구(窓口)가 되는 것이다.
녹이 낀 구리 거울 속에 비춰진 자신의 얼굴을 들여다보던 화자는 조국의 잘못된 역사를
발견하고 자신에 대해 욕됨을 느낀다. 그리하여 그는 아무런 기쁨 없이 살아가고 있는 자신
의 삶에 대해 참회의 글을 쓰는 한편, 조국 광복이 된 ‘그 어느 즐거운 날’에 또다시 써야
할 참회록을 생각한다. 미래에 쓸 참회록이란, 식민지라는 잘못된 역사를 바로잡기 위한 자
기 노력도 없이 현실의 고통만을 토로한 앞의 참회록을 쓴, 자신의 행위에 대한 반성의 글
이다.
그러므로 이 시의 주제는 투철한 역사의식을 동반한 끊임없는 자아 성찰이다. ‘밤이면 밤
마다 나의 거울을 / 손으로 발바닥으로 닦아 보자’는 구절은 바로 이러한 자아 성찰의 자세
가 극명히 나타난 것으로, 온몸을 바쳐 자신ㅇ르 꾸준히 되돌아보겠단는 의지가 내포되어 있
다. 그렇게 하여 절망과 암흑의 ‘운석 밑으로 홀로 걸어가는 / 슬픈 사람’인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게 된 화자는, 마침내 욕된 역사에 대한 책임 의식과 철저한 자기 참회의 실존적 자아
성찰을 통해 조국과 민족을 위한 삶의 좌표를 설정하는 것이다.
‘운석’은 별똥별을 일컫는 것으로 흔히 죽음을 연상하게 된다는 점에서 이 구절에 담겨 있
는 화자의 자기 인식은 매우 우울하고 비극적이라 할 수 있는 한편, 이 시가 일본으로 건너
가기 직전에 쓴 작품이라는 점을 고려한다면, 자신의 운명을 예견하고 있다는 점에서 대단히
감동적이다. 그는 일본에서 독립운동을 하다가 체포되어 2년 형을 선고받고 복역하던 중 조
국 독립을 6개월 앞두고 옥사했기 때문이다.
[작가소개]
윤동주(尹東柱)
1917년 북간도 명동촌(明東村) 출생
1925년 명동소학교 입학
1929년 송몽규(宋夢奎) 등과 문예지 『새 명동』발간
1932년 용정(龍井)의 은진중학교 입학
1935년 평양 숭실중학교로 전학
1936년 숭실중학 폐교 후 용정 광명학원 중학부 4학년에 전입
1938년 연희전문학교 문과 입학
1939년 산문 「달을 쏘다」를 『조선일보』에 동요 「산울림」을 『소년』지에 각각 발표
1942년 일본 릿쿄(立敎)대학 영문과 입학, 가을에 도시샤(同志社)대학 영문과로 전학
1943년 송몽규와 함께 독립운동 혐의로 일본 경찰에 체포
1945년 2월 16일 큐슈(九州) 후쿠오카(福岡) 형무소에서 옥사
시집 :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유고시집, 1948), 『별을 헤는 밤』(1977),
『윤동주 시집』(1984), 『윤동주자필시고전집』(199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