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소설을 쓸려고 마음 먹은 것은, 마치 노름꾼이 가진 재산 다 노름판에서 탕진하고 마지막으로 마누라 예물 반지와 집까지 팔아서 마지막 쫑돈을 가슴에 품고 노름판에 달겨드는 마음과 비슷했다.
내 성격상, 돈을 다 잃고 노름판 뒷박에서 고리나 뜯는 짓거리는 못할테니까...
마지막 남은 쫑돈으로 담배 연기 자욱한 노름판에 뛰어든 것이다.
가슴에는 마지막 돈을 잃는다면 되찾을 수 있게 하기 위해 가슴에 식칼을 한개 품고 말이다.”
‘청수원’ 서문에서 나는 내 소설을 노름판에 비유했다.
그러나, 다시 생각해 보면, 글쓰기는 노름판이 아니었다.
아무것도 몰랐던 삼류 작가에 불과했던 나로서는 그렇게 생각 할 수 밖에 없었나 보다.
일본의 야쿠자의 본래 의미는 花鬪의 8, 9, 3 을 의미한다.
노름을 못하는 내가 알기로는 389는 끝수가 0(망통)이 되어 돈을 잃는 패를 의미한다.
메이지 유신으로 산업화 된 일본에서 하급 사무라이들이 할 일이 없어져서, 쓸모없는 존재, 즉 389 망통 즉 야쿠자가 되었다.
8을 뜻하는,‘や’ 9를 뜻하는, ‘く’ 3을 뜻하는,‘ざ’ 가 합쳐져서, 야꾸자(やくざ)가 되었다.
나는 노름판을 떠난 야꾸자가 되었다.
노름을 한 번도 해 본 적이 없는, 노름이 무엇인지도 몰랐던 엉터리 작가였다.
삶이란, 내가 써 놓았던 序文에서처럼 노름판이다. 상대의 돈을 따 먹기 위한 쟁탈전이다. 내가 싫어하는 자본주의다.
나는 로또를 한 번도 사 본적이 없고, 관심도 없었다.
어쩌면 나는 삶을 몰랐던 엉터리 노름꾼이었을 것이다.
그것을 깨달은 요즘이, 나로서는 노름판을 응시하면서 글을 쓸 수 있게 된 것도 같다.
이제, 노름판을 떠났다.
노름을 한 번도 한 적이 없는 작가가 될 수 있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