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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남진 탐사기획 스크랩 호남가(湖南歌), 호남시(湖南詩)를 따라서 · 23
裕耕 박노철 추천 0 조회 52 13.05.03 08:16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호남 기행

 

호남가(湖南歌), 호남시(湖南詩)를 따라서 · 23

 

훤히 트인 언덕 고창성(高敞城)에 높이 앉아 삼라만상(森羅萬象) 펼쳐진 나주(羅州) 풍경을 바라보니

 

고창성(高敞城)에 높이 앉아

나주(羅州) 풍경(風景)을 바라보니

 

호남가의 소리대로 높이 앉을 수 있는 자격을 가진 고창성이다. 빼어난 유적으로 고인돌과 모양성(고창읍성), 선운사, 그리고 훌륭한 근대 인물로 동리 신재효, 동학혁명의 녹두장군 전봉준이 있다. 기분 나쁜 친일파 말당 서정주와 인촌 김성수도 있는 고창은 삼한시대 마한의 54개 소국 가운데 모로비리국으로 이름을 열었고 백제 때 모량부리현또는 모양현이었고 고려시대 이래 고창현이라 불렸다 한다.

 

<고인돌 박물관에서 고인돌을 옮기는 체험을 하는 우리 아이들> 

고창의 고인돌은 200012월 체코 프라하에서 유네스코 자연문화유산으로 등재 되었다. 이 고인돌은 선사시대의 무덤과 장례의식 기념물로서 당시의 건축술과 사회현상을 생생하게 보여주는 문화유적이다. 고인돌은 단순히 집권층의 노동력확보능력과 지배 권력의 힘을 보여주는 상징물만이 아니라, 균형과 조화감각이 필요한 고난도 건축기술과 조형미를 갖춘 예술작업이기도 하다.

가마니만한 애기 고인돌에서 50톤에 이르는 집채만한 크기의 탁자식, 바둑판식, 지상석곽식, 개석식 등의 고인돌이 집단을 이루고 있다. 이렇게 남방식, 북방식이 한 지역에 혼재되어 있어 학술적 가치도 크다고 하니 가히 선사 묘제박물관이라고도 할만하다. 고창(高敞)을 거꾸로 부르면 창고(倉庫)이기도 하다. 우스개지만 고창은 그렇게 문화유산의 창고이며 보고(寶庫)인 곳이다.

 

이렇게 고인돌을 많이 만들었다는 것은 사람들이 많이 모여 살았고, 모여 살았다는 것은 살기 좋은 고을이었다는 증거기도 하다. 그 선사시대부터 사람살이에 좋은 고을 고창을 찾아간다.

 

고창으로 가면서 갑자기 궁금한 게 있어서 친구에게 전화를 했다. 이런 저런 이유를 설명하고 물었다.

알티가 뭔지 알아?”

알티? 알오티시(ROTC) 약자 아닐까?”

컴퓨터 용어라니까.”

그럼 난 당연히 모르지.”

친구가 껄껄 웃고 만다. 그러면서 한마디 덧붙인다.

십알단 알티라. 그거 말야. ‘O을 먹고 튀어라아닐까? 하하하!”

그래서 전화를 끊었지만 계속 궁금증을 참을 수가 없었다. 저녁에 집에 돌아와 인터넷을 여기 저기 뒤져보고서야 비로소 알아냈다. 그러니까 RT는 리트윗(retweet)에서 RT를 취한 약어라 한다. 리트윗과 같은 뜻인데 리트윗 보다는 알티라고 한단다. 여기서 또 그러면 리트윗은 무엇이냐? 에또 그건 또 뭐냐면 소셜 트윗으로 온 내용을 다시 트윗해 보내는 것을 리트윗이라고 하는데, 즉 트윗 내용을 다시 다른 곳으로 재전송하는 것이라 한다.

그럼 소셜은 또 무어냐? 그건 또 소셜 네트워크 서비스(Social Network Service)’를 말하는데 ‘SNS’라 줄여 표시한다고 한다. 요즈음 트위터, 페이스북, 미투데이 같은 서비스를 말한다는 것이다.

그럼 또 트위터, 페이스 북, 미투데이는 무어냐?

여기서 궁금증은 그만 줄인다. 요즈음 세상살이엔 알 것도 많고, 나이 들어 만나는 난해한 수학공식들이다.

 

<모양성 축제>

그러니까 사람살기 좋은 고창성에 높이 앉아 나주 풍경을 보러 가면서 나그네를 혼란스럽게 만든 인간은 백찬홍이다. 이 인간은 소위 말하는 뉴또라이인가 뉴라이트 계열로 가스통 할배와 비슷한 개독(開毒) 목사라 한다. 그러니까 지 생각에 반하는 인간들을 모두 빨갱이라고 말하는 수구꼴통 부류에 속한다.

그가 자신의 글을 알티하면 십알단자격에 박근혜 대통령 시계까지 준다고 했다 한다. 아직 대통령 투표도 안했는데 시계라니? 그러니까 되면 준다는 말인가 보다. 물론 안 되면 말고다. 아무튼 이 백찬홍이가 정치권에 등장한 신종 삐끼(음식점, 유흥업소 따위에서 손님을 끌어들이는 자를 일컫는 속된 말)’인 셈인데, 여기서 또 십알단십자군 알바단이라는 거창한 역사적 사명을 띤 단체라 한다. 하지만 십자군은 개뿔이다. 일당 받고 빨갱이, 홍어, 개쌍도, 흉노족등 인터넷 공간에서 한반도를 갈갈이 찢어내는 극우파와 극좌파를 포함한 쓰레기 무리일 뿐이다. 십자군이고, 구원군이고, 해방군이고 간에 전쟁을 일으킨 종자들은 다 강탈자요 살육자인 것과 같다.

 

독일의 나치에게 학살당했던 유태인이 수십 년 후 나치와 같은 모습으로 팔레스타인을 탄압하고 학살하고 있다. 또 일본을 보자. 전쟁에 진 왜왕이 무릎 꿇고 사죄하고 항복한 걸 잊고, 한국을 지배한 건 경제발전을 위한 거라고 한다. 또 성노예(위안부)를 돈 벌러 온 매춘부라는 망언을 서슴지 않는다. 나아가 독도도 내 땅이라고 우기는 것을 보면 역사는 돌기도 하고 반복이 된다. 앞으로 그 어떤 이유로도 호전광(好戰狂)이 득세하도록 방치해서는 안 된다는 산 가르침들이다.

특히 남과 북이 나뉘어 첨예하게 대치한 한국에서도, 걸핏하면 전쟁운운 하는 인간, 남북상황을 대립으로 몰고 가는 그 어떤 무리도 우리는 날뛰지 못하게 막아야 한다.

일본의 주장에 호응하여 한국의 친일파, 뉴라이트, 극우파 수구꼴통 들이 일제강점을 경제발전의 은혜로, 성노예를 매춘부로 동조하면서 유관순 열사와 이봉창, 윤봉길, 안중근 의사를 테러리스트, 깡패라고 말하고 있다. 참으로 개탄스럽고 정신 번쩍 차려도 한참을 더 차릴 일이다. 그 지랄하고 자빠진 개차반 쓰레기들이 결코 발붙이지 못하도록 두 눈 부릅떠야 한다. 인간 본연 본질의 민주적 가치와 인권을 지키고 계승 발전 시켜가야 한다.

 

<두 눈 부릅 뜨고 지켜야 한다>

밀란 쿤데라는 소설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에서 이렇게 말한다.

인생이란 한번 사라지면 두 번 다시 돌아오지 않기에 한낱 그림자 같은 것이다. 그래서 산다는 것에는 아무런 무게도 없고 우리는 처음부터 죽은 것과 다름없다. 삶이 아무리 잔혹하고 아름답고 찬란하다 해도, 그 잔혹함과 아름다움과 찬란함조차도 무의미한 것이다.’

그러하기에 더 소중하다는 생존의 의미를 역설적으로 강조한 말이다. 아름답고 찬란한 삶을 지키기 위해 잔혹하게 죽은 심정으로 억압과 부조리에 저항해야 함은 당연지사다. 개구리 수영장이고 말밥이다.

 

<모양성 입구> 

이제 긴 앞글 줄이고 2012102일 둘러본 모양성(牟陽城고창읍성)의 감옥과 객사, 내아, 장청, 현청, 덤으로 척화비 등을 구경해 보기로 하자.

천원 입장료를 내고 우람하고 깊은 옹성으로 만들어진 성의 북문 공북루(拱北樓)로 들어가 맨 먼저 죄지은 놈들을 가뒀던 옥()을 만난다. 그런데 옥자리가 영 시원찮다. 인가(人家)와 가까운 곳이라, 갇힌 죄인들이 얼마나 자유가 그립고 나가고 싶어 했을 지를 가늠해본다. 하긴 이런 곳이어야 빨리 나가려고 벼라 별 수단을 부리고 온갖 짓을 다했겠다 싶었다.

감옥에 한 달여 있고선 인간의 한계에 이르렀다고 곧 죽는 소리를 누가 했던가? 이상득이던가? 최시중이던가? 벌써 헷갈린다.

하지만 억울한 사람도 많았으리라, 지금은 텅 빈 옥이지만 측은지심으로 한 번 더 눈길을 준다.

 

<앞으로 저런 옥에 갇힐 쥐닭무리를 알고 있다>

아무튼 고창읍성은 평산성(平山城) 형태로 산성(山城)이 주는 시원한 조망과 평지성(平地城)이 주는 아기자기함까지를 모두 맛볼 수 있는 국내 유일의 읍성이라고 한다.

매표소에서 구입한 관람권에는 이 성은 단종 원년(1453)에 왜침을 막기 위하여 전라도민들이 유비무한의 슬기로 축성한 자연석 성곽이다. 일명 모양성이라고도 하는 이 성은 나주진관의 입암산성과 연계되어 호남 내륙을 방어하는 전초기지로 만들어진 읍성이다.

196541일 사적 제 145호로 지정된 이 성의 둘레는 1,684m, 높이 4~6m, 면적은 165,858로 동, , 북문과 3개소의 옹성(甕城) 6개소의 치성(雉城)을 비롯하여 성밖의 해자(垓子) 등 전략적 요충시설이 두루 갖추어져 있다.

성내에는 동헌(東軒), 객사(客舍) 22동의 조선시대 관아(官衙) 건물이 있었으나 병화(兵火) 등으로 소진(消盡)된 것을 1976년부터 복원해 오고 있다.

윤달에는 돌을 머리에 이고 성곽을 3회 돌면 무병장수하고 극락승천 한다는 전설이 있어 지금도 부녀자들의 답성 (踏城) 풍속이 남아있다.’고 적혀 있었다.

 

<객사 모양지관>

이어 느긋하게 탑돌이 하는 처녀들의 인물상이 있는 연못을 지나 객사와 동헌 내아, 장청, 현청을 지나 대원군 시절의 척화비까지 둘러보았다.

척화비(斥和碑)1871(고종8)대원군의 명령에 의해 이듬해인 1872년 고창현감 이동석(李東奭)의 주도 하에 모양성 내의 공북루 오른편에 세워졌다.

비 앞면에 洋夷侵犯 非戰則和 主和賣國 戒我萬年子孫 丙寅作 辛未立’, 뒷면에 上之九年 壬申五月 日 行縣監 李東奭 奉敎立이라 음각되어 있고 비의 크기는 107×39×22cm이다.

서양 오랑캐가 침범하는데 싸우지 않는 것은 곧 화친(和親)을 하자는 것이고 화친을 하는 것은 나라를 파는 것임을 온 백성에게 경계한다.’는 내용인데, 이를테면 돌로 만든 오늘 날의 알림판인 셈이다.

 

<척화비>

또 한 군데 기억해야 할 장소가 있다. 모양성 북치광장(北稚廣場)이 그곳이다. 이곳은 고창 읍내가 한 눈에 내려다보이는 곳으로 삼일절독립만세 터다. 1919321, 김승옥, 오동균, 김창규 등의 주도하에 고창청년 회원, 고창보통학교학생 2백여 명이 이곳, 읍성 북치광장에 모여 대한독립 만세를 불렀다. 이어 시가지로 진출 고창교(高敞橋)를 기점으로 양쪽 천변에 길게 늘어서서 힘차게 만세 시위를 계속했는데, 당시 왜인 니시야마사진사가 시위대 사이를 누비며 사진을 찍다가 군중들에게 빰싸다귀를 맞고 걸음아 날 살려라 했다 한다.

그 뒤 1926610일 당시 순종황제의 인산일(因山日)에도 모양성 북치 광장에서 봉도식(奉悼式)을 마친 고창고보생과 고창보통학교 생도 2백여 명이 북치 광장과 서북치 광장으로 나뉘어 독립만세를 외쳤다. 이때의 주요 인물은 고보 2학년 학생회장 강석영(康錫榮)1백여 명, 고창보통학교 학생회장 조관승(曺觀承, 고창읍 월암리 거주, 6학년, 23), 부회장 엄동섭(嚴東燮, 고창읍 읍내리, 5학년, 18), 김소자(金小者, 고창읍 읍내리, 17) 1, 2학년생 백 여 명 등 총 2백여 명이었다 한다.

 

<북치광장 만세운동 기념비>

또 더 한 군데 중국에서 시집온 시원한 맹종죽이 우거진 대숲이다. 한 낮에도 어두컴컴한 그곳에서 잠시 바람소릴 들으며 존재의 가벼움과 무거움을 들여다보자.

 

<맹종죽>

나오면서 동리(桐里) 신재효(申在孝1812~1884) 고택을 둘러본다. 동리는 조선 말엽 고창에서 태어난 독보적인 판소리 연구가이며 작가다. 자는 백원(百源), 호는 동리 외에 호장(戶長)이 더 있다.

 

<신재효 고택에서 노래공부하는 학생들> 

<동리 신재효 선생 고택>

이어 네비에 의존하여 녹두장군 전봉준(1854~1895) 생가로 간다. 고즈넉한 장군의 생가 뒤로 서해안 고속도로가 잇대어 있어 시절의 무상함이 느껴진다. ‘여기가 조선 혁명의 심장이었구나.’ 생각하면서, 지금까지 고창이 장군의 고향이었다는 걸 몰랐던 것에 대해 깊은 사과를 드렸다.

 

<녹두장군 전봉준 생가>

장군의 자()는 명숙(明淑)이고 천안전씨(天安全氏)며 이곳 전북 고창읍 죽림리 당촌에서 출생했다.

어릴 적부터 체구가 작아서 녹두(綠豆)란 별호를 가졌다. 하지만 그는 누구보다도 큰 이상과 이념으로 봉건전제에 짓밟히고 있는 민권을 찾고, 열강의 틈바구니에서 위기에 처한 민족을 구하려 민중을 이끈 위대한 불세출의 영웅이었다. 무명의 동학접주(東學接主)로 출발했지만 민족의 선각자요 불요불굴의 의지력과 탁월한 영도력을 지닌 인물이었다.

첫 고부의 정월 봉기 후 안핵사 이용태가 역졸을 거느리고 와 동학교도들을 역도로 몰았지만, 이에 좌절하지 않고 무장의 대접주 손화중을 움직여 마침내 고부의 삼월 봉기로 전라도를 장악하였다. 이후 집강소를 설치 자주적 정치를 실행했다. 이해 621(양력 723) 일본군이 궁성에 침입하여 고종 임금을 연금하자, 삼례에서 구월봉기를 일으켜 서울로 진격하다가 1023일 공주 우금치에서 15일의 혈전 끝에 패하고 후퇴하였다. 1127일 태인 전투를 끝으로 농민군을 해산시켰다.

갑오혁명 시 삼남지방의 각지에서 많은 동학접주들이 봉기하였으나 전봉준처럼 호남의 5천 대군을 거느리고 일사불란의 전열로 일본군에 최후까지 혈전을 벌인 영도인물은 없었다.

그렇게 농민군을 해산한 전봉준은 수행인 몇과 1129일 정읍 입암산성으로 들어갔다. 때마침 일본군 모리오(三尾) 부대와 이규태의 관군이 천원에서 추격해 온다는 정보가 있어 30일 다시 백양사로 옮겨 은신할 때다. 김개남(金開南)이 태인군 산내면 종성리(현 정읍시 산내면 종성리)에 은신해 있다는 소식을 듣고 수행원들과 함께 태인으로 가던 중 121일 저녁 순창군 쌍치면 피노리에 이르러 옛 부하 김경천을 찾았다.

그러나 김경천은 전봉준을 맞이해 놓고 전주감영 퇴교(退校퇴역장교)로 이웃에 살고 있는 한신현에게 밀고를 했다. 1894122(1228) 그렇게 해서 전봉준은 검거되고 말았다.

전봉준은 순창을 거쳐 담양의 일본군에게 인계되었고, 나주, 전주를 경유 1218일에 서울에 도착하였다.

이 때 전봉준이 가마를 타고 가는 모습은 검거 당시 담을 넘다가 미리 잠복해 있던 현상금에 눈이 먼 피노리의 주민에게 몽둥이로 맞아 다리가 부러진 때문이라 했다.

그 뒤 관아에 전봉준을 밀고했던 한신현은 금천군수에 제수되었으며, 상금은 한신현 1천냥, 김영철 300, 정창욱 200, 마을사람 9200냥 그리고 200냥은 피노리 빈민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족제비도 낯짝이 있다고 했다. 밀고자 김경천은 세상의 눈총과 보복이 무서워 마을을 떠나 숨어 살았다고 한다. 그리고 현재에 이르러서도 순창과 정읍 주민들은 김경천이 정읍인이니, 고부인이니 떠넘기며 김경천을 공처럼 차고 있다 한다. 죽어서도 갈 곳 없는 부평초 신세이니, 의로운 자를 밀고하면 천벌을 받는 법이다.

하지만, 그 반대로 의롭지 않은 자를 외면하여, 그들이 의로운 자들을 핍박 하게 하는 것도 의롭지 않은 명박인 법이다. 탄압과 거짓에 맞서 진실을 밝히는 것은 의로움이다.

 

<옛 부하의 배신으로 다리가 부러진 채 잡혀가는 녹두장군> 

그렇게 일본영사관 감방에 수감된 전봉준은 다음해 29, 11, 19, 37, 10일 등 5차에 걸쳐 일본 영사의 심문을 받고 1895330일 손화중, 최경선 등과 함께 최후를 마쳤다. 그의 나이 41세였다

하지만 녹두장군의 천추의 한이 담긴 유시(遺詩) 한 수가 남아 이제 우리들 가슴에서 억겁을 살아갈 것이다.

 

時來川地皆同力(시래천지개동력)

때가오니 천하가 모두 힘을 같이 했건만

運去英雄不自謨(운거영웅불자모)

운이 다하여 영웅도 스스로 할 바를 모를 내라

愛民正義我無失(애민정의아무실)

백성을 사랑하는 정의 일뿐 나에게는 과실이 없나니

爲國丹心誰有知(위국단심수유지)

나라를 위하는 오직 한마음 뉘 아는 이 있을까

 

그 뒤로 장군의 떠남을 슬퍼하는 노래가 유행했는데 장군의 생가에 새겨진 노래비가 이것이다.

 

<가슴에 살아가는 파랑새야 녹두새야>

새야 새야 파랑새야

전주, 고부 녹두새야

어서 바삐 날아가라

댓잎 솔잎 다르다고

봄철인 줄 알지 마라

백설이 휘날리면 먹을 것 없다.

 

새야 새야 녹두새야

웃녘 새야 아랫녘 새야

전주, 고부 녹두새야

함박 쪽박 딱딱 후여

 

새야새야 녹두새야

녹두밭에 앉지마라

녹두꽃이 떨어지면

청포장수 울고간다.

 

여기서 녹두는 전봉준 장군이며 청포장수는 바로 우리들 민초들이다.

 

<뚜라 조각공원> 

장군의 생가 바로 옆에 뚜라조각공원이 있었다. 뚜라는 이탈리아어로 조각을 뜻하는 스쿨뚜라(sculpture의 이태리식 표현)’에서 따왔다 한다,

이 뚜라 조각공원의 주인은 홍익대학교 미술대학 조소과를 나온 젊은 조각가 김용태, 이소훈 부부라 한다. 농경, 유교 등 한국사회의 남성 우월주의에 강한 거부감을 느낀 김용태는 독자적이고 주체적인 길을 찾던 중 2000년에 고향인 이곳 죽림리 당촌마을에 들어와 지역민과 함께 미술 활동을 공유하며 뚜라를 건립했다 한다.

총면적 4,000로 잔디밭에 있는 조각들을 감상할 수 있는 산책로와 부부의 조각 작품을 전시한 조각 갤러리, 그리고 미술 교육을 위한 작업장과 가마가 있다.

잔디밭과 풀밭 곳곳의 크고 작은 조형물들은 철재, 석재, 흙 등 다양한 소재며, 해학과 풍자가 흐르는 작품도 있는데, 대개는 고뇌하는 인물 군상들이다.

또 이곳 뚜라조각 갤러리에서는 고창군이 의뢰해 제작한 고창 고인돌 축소 모형, 고창읍성 답성놀이 여인상, 전봉준 장군 흉상 등의 문화 상품을 전시, 판매하고 있다. 어린이와 일반인을 대상으로 한 토기 굽기 등의 미술 체험 프로그램도 운영한다.

당일 나그네가 방문했을 때, 아이들 몇이 그네를 타며 놀고 있었다. 사진 찍어도 되느냐니까, 활짝 웃으며 손가락 두 개를 편다.

그런데 입장료는? 그건 입구에 마련된 통에 관람객이 원하는 만큼 넣으면 된다. 흰구름 나그네는 입장료를 미처 챙기지 못했기에 여기에 안내하는 것으로 대신한다.

 

<모양성의 내아>

고인돌 마을이 전봉준 생가와 지척이다.

지는 해가 너무 아름답다. 두서너 뼘쯤 소나무 가지에 걸린 붉은 해를 보며 서둘러 고인돌 공원을 다녀온다.

 

<바둑판식 고인돌> 

선사시대부터 사람살기에 좋은 터 고창성에서 나주 풍경을 바라보며 나그네는 멀고도 가까운 길을 떠나며 아쉬운 작별 인사를 한다.

안녕히 다시 만나요.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의 역사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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