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 2022-09-10)
< 달빛 아래서 >
문하 정영인
추석 특별임시귀성열차는 용산역에서 밤에 떠난다. 수많은 귀성객을 비집고 밤열차에 올라탄다. 객차가 아니라 화물 곡간차다. 다들 열차 바닥에 신문지를 깔고 그나마 다행이라는 생각이 든다. 고향 찾아 가족들을 만난다는 기쁨에 선물 보따리와 생각들을 끌어안는다. 열차는 하도 낡아서 나무 바닥이 듬성듬성 구멍이 뚫려있다. 열차는 덜거덕덜거덕 남으로 달린다. 구멍 밑으로 선로가 획획 지난다. 열어젖힌 곡간차 문으로 달빛만 쏟아져 들어 왔다.
두서너 시간 지나서야 나를 평탁역에 짐 내리듯이 내려놓는다. 밖은 칠흑 같은 어둠이지만, 추석 전날 보름달만 교교하게 비친다. 여기서 서쪽으로 먼 사십 리 신작로길을 가야 우리 동네가 보인다. 버스나 택시가 있을 턱이 없다. 여기서부터 나는 걸어가야 한다. 다행이 같은 방향으로 가는 밤길 친구들이 너댓명이나 된다. 한참을 걸어가니 소총다리가 나온다. 다리 밑으로는 갯물이 드나든다. 우리 고장에서 가장 긴 다리다. 어머니는 내가 말썽을 피우면 ‘너는 소총다리 밑에서 주서 왔으니 소총다리에다 갖다 버린다’고 했다. 그런 말을 들으면 나는 겁이 버럭 났다. ’다리 밑에서 주서 왔다‘라는 진짜 의미를 알 때는 먼훗날이다.
소총다리 근처는 너른 벌판이다. 아마 평탁군에서 가장 넓은 논이 펼쳐져 있다. 같이 가던 동행이 한 둘 자기 동네를 찾아 빠진다. 오성면 면소재지에 다다를 때는 나 혼자먼 터벅터벅 신작로길을 걸어기야만 한다. 아버지는 오성면 면사무소에서 오랫동안 면서기를 했다. 한문 잘 쓰셔서 호적계를 오랫동안 보셨다.
달빛 아래서 신작로는 하얗게 빛났고 달빛은 나를 도닥거려 준다. 공동묘지 옆을 지날 때는 여우가 컹컹 우는 것 같다. 머리칼이 쭈뼛 서고 무서움이 온몸을 휩싼다. 혼지 노래를 부른다. 노랫소리가 내 귀에 감싸도록 크게 부른다.
오랫동안 걸어가니 관두머리에 이른다. 여기서부터 내가 다니던 국민학교 학구다. 동네를 지날 때마다 같은 반 친구들이 생각난다. 관두머리 고개를 내려가면 오른쪽엔 숲말이다. 왼쪽 산등성이를 넘으면 내가 태어나고 자란 작은밤바위이다. 바위와 밤나무가 많아서 그리 지었다 한다. 그 앞 동네가 큰밤바위이다. 작은 밤바위는 나의 유년시절의 추억이 오롯이 담긴, 깊은 마음속에 자리 잡고 있는 잊지 못하는 고향이다. 아버지가 숟가락 몇 벌만 가지고 분가하여 우리 일가를 이룬 곳이다. 우리 육남매가 자란 곳이다. 또, 알토란같은 육남매를 남겨 두고 어머니가 저 세상으로 일찍 가신 곳이다. 어머니의 임종은 나와 누님뿐이었다. 아버지는 면사무소에, 형들 셋은 서울에서 공부했다. 신작로길을 따라 고향 선산으로 나가던 어머니의 상여가 눈앞에 아롱거린다.
지금 내 고향은 얼마나 변했을까? 지척이건만 유년시절의 꿈이 깨질까봐 겁이 나서 여태 가보지 못한다.
숲말에는 초등학교 부랄친구기 있는 곳이다. 방학이 되면 서로의 집을 오고가며 사귀던 친구. 국민학교 졸업 후, 나는 인천으로 그 친구는 고향 중학교로 진학을 한다. 방학 때마다 만나면 그 친구는 대처로 진학하지 못한 것을 비관을 했다. 농사짓던 그 친구는 친구들과 바닷가로 해수욕을 갔다가 불귀의 객이 되고 만다.
숲말을 지나면 지그만 고개에 올라선다. 작은 밤바위와 큰밤바위 입구다. 왼쪽에 지그만 리키타나무 숲이 있다. 우리는 이곳을 ‘칠사라고개(七死里-)’라 불렀다. 1.4후퇴 후, 퇴각하던 인민군들이 끌고 가던 소위 반동분자들을 따발총으로 죽인 곳이다. 8명이 끌려갔는데 간신히 1명만 산다. 옆 사람이 총에 맞이 피를 튀기며 쓰러질 때 같이 넘어져 피투성이이가 된 채 하룻밤을 지새웠다. 죽은 줄 알았던 가족들은 피투성이가 된 그를 보고 귀신이 아닌가 했다. 그 사람은 하룻밤 사이에 검은 머리가 모두 하얗게 쇠었다.
이젠 두 고게만 넘으면 우리 동네이다. 한 고개 넘어 마루턱에 서니 멀리 두 번째 고개턱에서 깜부기불 같은 호롱불이 보인다. 나를 기다라는 어머니다. 오른쪽으로 첫째 어머니 산소가 가뭇가뭇하다. '넷째야, 이제 오니?‘ 한다. 호롱불을 든 분은 둘째 어머니다. 아버지는 어린 자식들 때문에 재혼을 한다. 아이들 못 나아 소박맞은 둘째 어머니와……. 둘째 어머니는 석녀(石女)였다.
고개턱 고목나무 밑에서 기다리는 어머니를 만난다. 고목나무 밑에는 너른 쉼터다. 특이에게 이 고목나무는 느티나무가 아니라 엄나무이다. 여기 내 동네는 ‘황금리(黃金里)다. 정씨(鄭氏) 집성촌이다. 황가 성을 가진 사람이 들어오면 불같이 부자가 되어서 동네 이름이 그렇다고 한다. 그래서 우리 동네는 황가 성을 가진 사람은 들어오지 못했다. 안중이 1리이고 황금리가 2리쯤 된다. 지금은 상전벽해(桑田碧海)가 된 평택시의 평택항 근처다.
국민학교 시절, 방학이 되면 애향단이 아침에 체조하고, 청소히고, 놀이를 하던 곳이다. 오징어가이셍, 네모가이셍, 말뚝박기, 댕구치기, 무궁화꽃이 피었습니다 등, 지금으로 말하면 오겜(오징어게임)을 하던 곳이다. 비리비리했던 나는 늘 깍두기 신세였다. 지금도 그렇지만…. 그 때 그 놀이가 이제 세계적인 게임이 되었으니, 세상은 변하고 또 변한다. 미국 캘리포니아주에서는 9월 17일을‘오징어게임’날로 정한다.
그 이튿날, 나는 내가 해먹을 쌀과 반찬을 메고 배가 터지는 만원 버스에 오른다. 부모님께서는 내가 탄 버스가 모퉁이를 돌아 안 보일 때까지 눈바라기를 하고 계신다. 짐을 뒤척이면서 평탁역에서 경부선을 타고 영등포역에서 내린다. 다시 경인선을 갈아타고 동인천역에서 내린다. 짐을 낑낑 메고 철길 따라 가면 전도관 밑 숭의동 109번지에 이른다. 철길 옆 자취방에 다다른다. 지금으로 말하면 도원역 근처다. 그전에는 황굴고개라고도 한다.
이렇게 나는 용산역에서 추석 임시특별귀성열차를 타고서 고향에서 추석을 쇠고 온다. 이제나 저제나 귀성객은 붐비게 마련이다. 귀소본능(歸巢本能)이라 했던가?. 추석의 참된 의미는 달빛 아래서 가족끼리 오순도순 만나는 것이리라. 올 추석 달이 가장 큰 달이 뜬다.
내개 먹을 쌀은 입쌀이다. 부모님은 깡보리밥을 먹을망정……. 지금 세 분 다 안 계시다. 내가 이젠 그 나이가 되었으니 말이다.
첫댓글 감사합니다.
이 좋은 글, 조금만 신경쓰시면 더욱 빛이 날텐데요.
죄송합니다.
고맙습니다.
제 글 읽어주셔서 ᆢᆢ
노력하고, 좋은 명절 되세요.
넘 오랜만이군요.
즐건 나날이 되시길 빕니다.
나이가 드니 아픈 곳이 고개를 듭니다.
고맙습니다.
건행을 빕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