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원 굴렁쇠 3기 글(한산도) 남해안을 따라 선조들의 삶 살펴보기(2003년 6월29일) 창원 굴렁쇠 기자 3기
경남 통영 한산도 제승당, 세병관을 찾아서
1. 박원영(경남 창원 토월 초등학교)
제목: 수루에 앉아서
6월29일. 설레이는 마음을 담고 배에 올랐다. 도착한 곳은 한산도. 더운 날씨에 시원한 쉴 곳을 찾아 앉은 곳이 수루였다. 몇몇의 사람에겐 생소한 말인 수료는 이순신 장군이 왜적의 침입을 살피기 위해 지은 정자이다. 수루에서 바라본 바다풍경은 더운 마음을 깨끗이 씻듯이 시원했다. 이런 좋은 풍경에서 놀고 싶은 마음이 꿀떡 같고 쉬고 싶었겠지만 나라를 지키기 위해 왜적의 침입을 막기 위해 정신 집중을 하여 왜적의 침입을 살폈던 이순신 장군의모습이 눈에 선했다. 그 때 상황으로는 즉 한산도 대첩이 일어날 즈음에는 우리가 일본에게 육지에서도 크게 패하고 있는 상황에서도 기죽지 않고 대비하였던 모습 또한 대단한 것 같다. 또한 학익진법이라는 전법으로 승리를 거둔 모습을 보면 머리로나 힘으로나 뛰어난 이순신 장군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다시 한번 이순신의 애국심을 느낄 수 있었던 기회였던 것 같다.
2.오상훈(경남 창원 토월 초등학교 6학년)
제목: 한산도 대첩
우리 굴렁쇠 기자단은 배를 타고 한산도에 갔다. 우리는 한산도 대첩과 이순신 장군을 더욱 자세히 알 수 있었다. 그리고 이순신 장군이 여러 가지로 돌아가셨을 가능성이 있다는 걸 알았다. 그리고 이순신 장군이 더 많이 위대하다는 것을 느꼈다. 또 전쟁 중에 난중일기를 쓴 게 참 대단하다.
3.조재형(경남 창원 토월 초등학교)
제목: 한산도
6월 29일 일요일 배를 타고 한산도에 갔다.이순신 장군께서 한산도에서 일본군과 싸운 것과 비슷하게 거북선 등대가 있었다. 한산도에서 조금 걸어서 수루에 갔다. 수루 앞에 있는 안내판을 보니 이순신 장군께서 어떻게 이겨는 지 알았다. 이순신 장군이 천적인 머리로 일본군들을 유인해서 전쟁을 이긴 게 아주 놀라웠다. 한산도에서 구경을 마치고 오는 길에 세병관을 갔다. 세병관은 아주 컸는데 일본 사람들이 다 없애서 한 개가 남았다. 그것은 178평에 크기에 50개의 기둥이 있었다.
아주 큰 사람들이 있었던 것 같다. 너무 제일였다.
4. 진규빈(경남 창원 토월 초등학교 6학년)
제목: 이순신장군의 전투
6월29일 굴렁쇠기자에서 먼저 배를 타고 한산도에 갔다. 한산도 수루에서 이순신 장군의 시를 보니 전투가 얼마나 힘들었는지 알 수 있었다. 전투마다 대승을 거두었지만 몸이 너무 힘들어 기절까지 했다고 한다. 전투에서 대승을 거둔 곳은 여러 곳이 있는데 명량해전, 노량해전, 한산도 대첩등이 있다. 노량해전에서는 안타깝게도 이순신 장군이 돌아가신 전투다.
한산도 대첩은 이순신 장군이 좁은 길을 택해 적은 배로 많은 왜선을 물리쳤다. 이순신 장군은 뛰어난 전략과 훈련하는 준비성 그리고 적의 정보 이기기 위한 좋은 장소를 찿았기 때문에 훌륭하다
고 본다. 이순신 장군은 우리나라를 위해 몸을 아끼지 않고 싸웠기 때문에 나는 이순신 장군을 존경한다.
5.구경석(경남 창원 토월 초등학교 6학년)
제목: 이순신 장군과 당파싸움
오늘은 한산도에 한산도 대첩과 당파싸움에 대해 배우러 갔다. 나는 평소에는 당파싸움에 대해 안 좋게 생각했다. 왜냐하면 임진왜란 때 이순신, 유성룡, 곽재우등 큰 공을 세운 사람들이 당파싸움으로 인해 벼슬을 받기는커녕 오히려 쫓겨나고 요즘도 당파싸움과 같이 당끼리의 싸움이 나서 나라가 안 좋아진다고 한다. 하지만 오늘 배움으로써 조금 생각이 바뀌였다. 당파싸움이상 하면 물론 안 좋지만 자신의 의견을 말하고 서로 좋은 의견을 내고 결정을 냄으로써 민주적으로 해결하게 되지만 만약 한사람 혼자 독재적으로 한다면 당파싸움을 하는 것보다 더 안 좋을 수도 있다. 오늘 배움으로써 당파싸움에 대한 내 생각이 변한 것 같다.
6.김성희(경남 창원 상남 초등학교 6학년)
제목: '한산도'에서
6월29일 우리 굴렁쇠 기자들은 이순신 장군님이 큰 승리를 한 한산도에 배를 타고 제승당으로 갔다. 제승등에는 여러 건물이 있었는데 특히 수루라는 곳은 촉석루와 비슷해다.
우리는 수루에서 이순신 장군님이 지은 시를 읽으면서 우리가 수루에 와서 느낀점을 우리도 시로 지어 보았다. 한산도의 풍경을 다른 섬보다 훨씬 크고 유물이 많은 아름다운 곳 인 것 같다. 제승당의 근처에 있는 바닷가에는 모두 갯벌로 되어 있었다. 그리고 바다물도 상류 처럼 깨끗했다. 또 제승당과 바닷가는 정말 잘 어울려 멋있었다. 우리는 갈 시간이 다되니까 정말 아쉬워 오던 길을 다시 되돌아보았다. 그 외 우리는 제승당에 대해 배우고 당파싸움에서도 배웠다. 우리는 정말 재밌게 놀고 열심히 배웠다.
7.이민규(경남 창원 토월 초등학교 6학년)
제목: 이순신 장군
6월29일 우리 굴렁쇠 기자단은 새로운 친구와 함께 한산도에 갔다. 아침 일찍 일어나 2시간 정도 걸려 통영에 도착한 뒤 배를 타고 한산도에 도착하였다. 우리가 간 곳은 여러 곳이였지만 나는 수루가 가장 기억에 남았다. 이순신 장군이 자주 올라가 시도 짓고 생각했다는 곳, 나는 이순신장군이 수루에 올라 무슨 생각을 했을지 궁금하였다. 굴렁쇠 아저씨의 말에 따르면 이순신장군은 임진왜란때 병에 걸리고 많이 아팠다고 한다. 임진왜란이 무척 힘든 전쟁이었다고 하니 이순신 장군의 고생이 알만도 하다. 그러니 아마 이순신 장군은 전쟁에 대해 생각을 하고 깊은 시름에 잠겼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수루에 오르자 즐거운 생각 밖에 들지 않았다. 사회적 분위기가 이순신 장군과 나의 생각을 이렇게 만들었을까? 일생 내내 고생만 한 이순신 장군이 한편으로는 불쌍하기도 하다. 자신을 희생하여 나라를 구한 이순신 장군, 정말 존경스럽다.
8.박지윤(경남 창원 토월 초등하교 6학년)
"아! 이제 출발한다."
임진왜란 하면 생각나는 영웅 이순신. 이순신 장군께서 학익진 전법으로서 일본군을 물리친 한산도를 가기위해 배를 탔다. 오랜만에 타는 배라 그런지 신기하기도 하고 낯설기도 했다.
책에서 많이 들어본 이름 한산도 섬이라곤 하지만 우리가 살고 있는 육지와 비슷할 줄 알았는데생각했던 것과는 많이 달랐다 가는 곳마다 나무가 솟아 잇고 사방이 바다에다가 집은 보이지도 않았고, 우리 창원에서는 볼 수 잇는 고층 건물은 찿아 볼 수도 없었다.
일본군이 지나가는 길목을 막기위해 이순신 장군은 한산도에 머무르고 있었다고 한다. 이미 일본군과 싸워 두 번이나 이기셨다고는 하지만 일본보다 매우 불리한 조건에서 일본과 싸우는 게 아주 힘들거라고 생각하고 힘들어 하셨을 것 같다. 게다가 나라 안에 돌고 있는 전염병 때문에 육체적으로도 고생을 하셨다고도 한다.
당파싸움이 한창인 때에 일본인들이 쳐들어오고 그때 당시 동인이었던 이순신 장군은 나라가 일본에 의해 무너질까봐 걱정을 하고 당파싸음으로 인해 피해를 입을까봐 많은 걱정을 했을 것 같다.
이순신 장군이 수군의 장군으로서 승리를 거둔 한산도 . 그런 한산도에서 이순신 장군에 대해 더 알 수 있었다. 알수록 이순신 장군의 위대함을 느낄 수가 있었다.
9.송수향(경남 창원 토월 초등학교 6학년)
제목: 한산도
아침 일찍부터 서둘러 굴렁쇠 친구들과 함께 배를 타고 말로만 듣던 한산도에 갔다.
물론 가족들과 낚시를 하러 몇 번 가보았지만 오늘처럼 이렇게 체계적으로 가본 적은 처음이다.
가자말자 나를 반긴 것은 짭쪼름한 바다냄새와 새파랗게 물든 나무들이었다. 박정희 대통령때 이곳을 넓혔는데 정말 넓고 컸다. 특히 수루라는 곳은 제일 인상적이었는데 간판처럼 걸린 이순신 장군의 시는 그 당시 분위기와 상황을 짐작할 수 있었다. 한번도 진 적이 없었던 이순신장군의 위대함과 대단함은 아무리 적군이라도 인정했었기에 우리 후손들도 그 점을 생각하고 느낄 수 있는것 같다고 생각한다. 아직은 이순신 장군의 훌륭함을 다 알지 못했지만 짐작은 하였다. 현명하고 지혜롭고 탁월한 기술을 누구보다도 잘 사용한 분이란 것을 말이다. 작년에 '현충사' 라는 곳에서난중일기를 보기까지도 임진왜란에 대해 관심조차 가지지 않았던 나인데 오늘 한산도에 왔을 땐 우리 선조들의 존경스러움을 새삼 느겼다.
10.정지원(경남 창원 토월 초등학교 6학년)
제목: 몰랐던 '당파싸움' 의 실체
6월29일 화창한 일요일 우리 창원굴렁쇠기자단은 잠깐간식을 먹으러 바닷가로 모였다.서 로 싸온 도시락을 사이좋게 나눠 먹고 '당파싸움'에 대한토론을 시작했다. 자료에 나와 있는 당파싸움을 읽어보았다. 난 지금까지 서로 모함해서 죽이고 귀양 보내는 짓이나 하는' 당파싸움'은 멍청한 사람들만 하는 거라고 생각했는데 자료에는 오히려 서로 의견을 말하는 '이념 정당'이 되어 나라가 발전이 된다고 나와 있었다. 지금까지 내가 몰랐던 '당파싸움'의 뒷면이 있었다니.... 하지만 너무 심한 '당파싸움'으로 가서 서로를 죽이는 것은 좋지 않다고 생각한다. 요즘 우리나라의 국회의원들이나 다른 높은 사람들은 서로 사이좋게 의견을 말해서 옛날 사람들의 심한 '당파싸움'으로
가지 않았으면 좋겠다.
창원 3기기자글(경남 남해,하동) 창원 어린 기자 3기 글(2003년 7월 20일)
1.김성희(경남 창원 상남 초등학교 6학년)]
2003년 7월 20일 창원 굴렁쇠 기자 3기는 두 시간 동안 차를 타고 남해에 도착했다. 임진조국전쟁이야기를 하면서 거제 포로수용소에서 전쟁 포로에 대해 배웠다. 오늘은 전쟁 포로에 대해 차 안에서 토론하였다. 전쟁이 일어나면 많은 사람들이 다치고 ,굶주려 죽기도 하고 가족들이 헤어지기도 한다. 얼마 전에 일어났던 이라크 전쟁에서도 힘이 약한 어린이나 여자들이 가장 피해를 많이 당했다. 전쟁에서 승리한 미국은 과연 마음이 편했을까 싶다.
이번 공부에서도 임진조국전쟁때 열 두살 나이로 일본에 끌려가 가족을 그리워하다 끝내 가족에게 돌아오지 못한 하동 사람 여대남 이야기도 들었다. 이라크와 미국이 싸웠을때는 남의 나라라고 그려니했는데 ,우리나라 사람이고 우리가족이 전쟁으로 헤어진다고 생각하니 너무 가슴이 아프고 전쟁이 무섭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나라가 겪은 6,25 전쟁, 신미양요 병인양요 들도 마찬가지 것이다. 그런데 임진조국전쟁은 7년동안 전쟁을 치뤄으니 많은 사람들이 오랫동안 고통받고 많은 문화재를 잃어버렸다. 전쟁을 일으킨 일본은 나쁘다. 그러나 우리나라는 아직 통일되지 못하
고 남북으로 나눠어져 있어 언제 전쟁이 일어날지 모른다. 이번 기회를 통해 전쟁을 다시 알게 되었고 평화로운 나라가 되기 위해 어떻게 해야 할까하는 생각을 가져 보았다.
2.송수향(경남 창원 토월 초등학교 6학년)
제목: 포로로 잡혀간 사람들
굴렁쇠 기자단은 '하동'을 중심으로 한 곳을 많이 견학하였다. 그중에서도 나는 일본에 포로로 끌려간 사람들이 가장 기억이 남는다. 물론 그 때의 전쟁을 겪어 보지못 해 그 사람들의고통이나 아픔을 모두 느끼진 못했지만 그 때의 처절했던 상황은 정말 가슴 아프게 느껴진다. 7년동안 전쟁인 임진조국전쟁 동안 끌려간 포로는 10∼20만명. 그 어마어마한 숫자의 포로들이 끌려가 한 일는 대부분 보잘 것 없는 천한 노예일 이었다고 한다. 가족과 헤어지고 고향과 떨어지는 일보다 더 잔인한 일이 있을 수 있을까? 그 일을 겪은 대표적 인물은 여대남이 있다. 널리 사람들에게 알려져 잇지 않아 아직은 생소할 수도 있지만 슬픈 소설만큼의 눈물나는 이야기를 가지고 있다. 12살 나이에 포로로 끌려가 일본에서 일생을 마감하였다고 하는데 일본에서 얼마나 가족들 그리워했을까?
지금 우리생활에 비하면 여대남의 삶은 정말 참혹했던 것 같다. 이런 일을 막기 위해선 전쟁이란 단어를 없애고 단어가 없어진만큼의우리 행동도 없애야 할 것이다. 또한 외국과는 외교하되 간단한 싸움조차 일어나지 않아야 할 것이며 세계가 가난, 질병의 공포에서 벗어 날 수 있도록 노력해야 될 것이다.
3,박원영(경남 창원 토월 초등학교 6학년)
제목: 전쟁뒤의 피해 그리고 문화유산
전쟁이 끝 난 뒤 남은 건 무엇일까? 승리자의기쁨 피해자의분노? 하지만 전쟁 뒤의 피해와 고통이 아닐까? 7월 20일 모든 일정은 마친 뒤 전쟁 뒤의 피해에 대해 토론하였다. 우리 나라에서 일어난 전쟁 중 7년 동안이나 길었던 임진조국전쟁 뒤의 피해를 예를 들어보면 사람들이 죽고 다치고 가족들과 헤어지고 그리고 문화유산이 파손되었다. 임진조국전쟁을 거치면서 우리나라 문화재 70% 정도가 불타거나 일본사람들이 빼앗아 갔다고 한다. 오늘 갔다온 하동 쌍계사도 임진조국전쟁때 불타버렸다고 한다. 얼마 전에 이라크 전쟁때에도 몇 달 을 전쟁으로 오랜 역사를 자랑하는 이라크 문화재들이 없어졌다. 전쟁이 나면 많은 사람들이 죽거나 다치지만, 문화유산들도 많이 파손되거나 사라진다. 전쟁은 어쨌든 일어나지 말아야 할 것이다.
4.김호원(경남 창원 토월 초등학교 6학년)
제목: 임진조국 전쟁이 우리에게 준 피해
굴렁쇠 기자들은 이번에는 임진조국전쟁에 대해 공부하였다. 견학을 다니면서 이 임진조국전쟁에서 우리나라가 엄청난 피해를 봤다는 걸 알게 되었다. 임진조국전쟁에서 우리나라의 약 15만명의 백성들이 포로가 되어 일봄으로 끌려갔고 우리나라의문화재도 일본인들이 들고가서 일본 문화재다 되었다. 이 전쟁으로 인해 일본도 피해를 봤지만 우리나라의 힘 없는 여자들이나 아이들은 굶거나, 다쳐 죽는 사람들이 많이 생겼다. 나는 이런 전쟁이 다시는 일어나지 않았으면 좋겠다.
5.정상원(경남 창원 토월 초등학교 6학년)
제목: 임진조국전쟁이 남긴 상처
전쟁으로 가족을 잃고 슬퍼하면서 서로 그리워하는 안타까운 상황은 옛날이나 지금도 있다. 임진조국전쟁도 그랬다. 임진조국전쟁이 끝나고 나서 수많은 이산가족이 생겼고 곧 아기를 낳을 아내를 잃어버려 자살한 사람도 많았다. 일본으로 끌려간 사람은 고향을 그리워했다. 일본은 너무하다. 우리나라 문화재를 그렇게 많이 가져갔으면서 포로라는 신분으로 사람을 그렇게 많이 데리고가다니. 실제로 고향을 그리워한 한국 도공이 도자기에 한글을 새겨 넣어 고향에 가고 싶은 마음을 표현했다. 전쟁은 참혹하다. 수많은 이산가족을 만들고도 부족해 사람을 죽인다. 앞으로 전쟁이 없어 졌으면 좋겠다.
6.정지원(경남 창원 토월 초등학교 6학년)
제목: 하동 쌍계사
햇살이 따사롭다가 갑자기 비가 오다가 다시 햇빛이 비치는 변덕스러운 날 우리 창원 굴렁쇠 기자단은 남해 노량으로 갔다가 중간에 섬진강에 들려서 논 뒤 지리산에 있는 쌍계사 갔다. 쌍계사에들어가며 먼저 본 것은 아주 커다란 문과 17cm정도의 문턱이였다. 그 문턱에 대해 지윤이가 호기심이 났는지 왜 절의 문턱에는 다 문턱이 있는지 물어봤다. 굴렁쇠 아저씨는 그 이유는 그 문턱으로 인해 이 세계를 속세와 부처님의 세계로 나눈 다는 것이었다. 별로 눈여겨보지 않았던 문턱에도 그런 뜻이 있었다. 우리는 계단을 더 올라가 두 번째 문에는 부처님의 세계로 데려다 주는 동자들이 있었다. 동자들에게 인사를 하고 다시 세 번째 문으로 들어갔다. 거기에는 무섭게 눈을 부릅뜨고 있는 사천왕이 있었다. 왠지 무서웠기 때문에 나는 눈치를 보며 인사를 했다. 굴렁쇠 아저씨
가 말하길 사천왕은 동서남북과 사계절을 뜻한다고 했다. 사천왕이 있는 문을 나오자 무지 커다란 절집이 보였다.(와 돈 많겠다.) 우리는 왼쪽으로 가서 계단을 통해 대웅전으로 갔다. 거기에는부처님께서 위엄있는 모습으로 정좌를 하고 앉아 계셨다. 우리는 모두 일제히 절을하고 밖으로 나왔다. 다들 즐겁게 수다를 떨면서 여자끼리, 남자끼리, 끼리끼리 뭉쳐 산을 내려갔다. 나와 상원이는 글쓰기 선생님과 같이 내려갔다. 그런데 선생님께서 내려가다가 우리에게 이 절이 다른 절과다른 점이 뭐냐고 문제를 내셨다. 우리가 몰라서 답을 못하고 있자, 글쓰기 선생님께서 말씀하시길 이절은 석등이참 많다고 하였다. 이렇게 석등이 많은 절은 처음이라 하셨지만 나는 그렇게 많은 절을 다녀보지는 않았고, 그나마 다녀왔던 절의 석등의 수(대충 잡아서) 도 잘 몰라서 석등이많은 줄은 잘 모르겠다. 어쨌든 지금까지 다녀왔던 절들중에서 기억이 가장 많이 남는 절이었다.
7.오상훈(경남 창원 토월 초등학교 6학년)
제목: 거북선
굴렁쇠 기자단에서 남해에 가서 임진조국전쟁에 대하여 공부하였다. 이순신 장군은 거북이를 보고 거북선을 만들었을까 궁금하다. 거북선 모형선을 보니 철저하게 전쟁에 준비된 배였다. 나는 그것을 보고 감탄하였다. 옛날에 이런 배를 만들 수 있다는 게 신기하였다. 안에는 대포로 무장되어 있고 배 위에는 못을 박아서 적군이 못 올라오게 하였다. 이것을 보고 나는 궁금한 게 있었다.
그것은 거북선을 만들 때 몇 명이 만들었을까? 라고 생각되었다. 내 짐작에는 거북선을 만들 때 한 50명 정도 될 것 같다.난 생각할 수록 이순신 장군과 거북선을 만든 사람들이 대단하다고 생각한다. 임진조국전쟁에 대해 많이 알았다.
8.이민규(경남 창원 토월 초등학교 6학년)
제목; 임진조국 전쟁
이제 거의 임진조국전쟁에 대한 주제로 끝이 나고 있다. 오늘은 임진조국전쟁과 함께 끝난 노량해전에 대해 배웠는데 오늘은 거의 임진왜란이 끝난 뒤의 대한 이야기를 많이했다. 오늘은 여러 곳을 가고 토론을 하였지만 나는 임진조국전쟁 뒤 포로가 되거나 이산가족이 생겼다는 이야기가 가장 기억이 남았다. 자신들이 원하지 않은 전쟁 때문에 피해를 보다니 안타깝다. 전쟁이 일어나면가장 큰 피해자는 국민인 것 같다. 하지만 임진조국전쟁이 끝나자무사한 사람들은 높은 사람들뿐인 것 같다. 자기들 전쟁이 일어나도록 가장 큰 영향을 미쳤으면서 가장 먼저 도망갔던 사람들은 참 야비하다.
9.박지윤(경남 창원 토월 초등학교 6학년)
제목: 전쟁이라는 것
돌아오는 길에 에어콘이 시원하게 나오는 차 안에서 여자선생님 이이야기 하였다.
'오늘은 아마도 본 게 제일 없는 것 같아."
그 말은 틀린 게 아닌 것 같다. 하지만 나는 오늘이 제일 느낀 게 많은 날이다. 남해에 있는 이락사. 그리고 충렬사, 하동 섬진강, 쌍계사를 다녀온 뒤 선생님께서 전쟁 중의 고통, 전쟁이 끝난 뒤에 대해 말씀해 주셨다. 먼저 말씀하신 건 '전쟁 중의 민간인이었다. 전쟁 중에 가장 피해를 많이입은 사람은 '민간인'이라고 한다. 생각해 보면 나도 민간인데 전쟁의 두려움과 고통 속에서의 추위, 배고픔, 전염병까지 생각 해 보니까 왠지 '전쟁' 이라는 낱말이다르게 느껴졌다. 전쟁으로 인해 피해를 입은 문화재에 대해서도 말했다. 문화재의 70%가 일본군에 의해 파괴되고 불탔으며 여러 가지 소중한 문화재들이 일본으로 넘어갔다고 한다. 얼마나 파괴되고 불 탄 문화재가 많았는지 새삼 느꼈다. 나는 오늘 하루의 생각으로 인해 ''전쟁' 이란 것을 새롭게 느꼈다. 전쟁이란 건 단순히 무섭고 두려운 것이 아니라 공포영화보다 훨씬 공포스러운 아니, 공포 그 자체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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