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금 원년(가경嘉慶 6년) 신유(辛酉)년 10월 27일 경오(庚午)일, 날씨 맑음 -
수도(京城)에서 출발, 고양(高陽)에서 유숙
황제의 나라는 사방의 모든 나라가 모여드는 곳이다.
그러나 지금 이곳,
황제의 나라는 오랑캐가 중국 땅을 차지하면서
선왕의 법과 문물제도가 대부분 사라진 듯하다.
그러니 장엄한 궁궐과 각 관리들의 료미, 동산,
성곽의 놀라운 규모와 그 부유함을 상상하기란 불가능하다.
직접 보지 않고서는 천하의 광대함을 알 수 없는 법이다.
오늘날은 바닷가의 외진 나라 등과의 왕래가
지경 밖을 벗어날 수 없는 한계를 갖고 있다.
옛 사람들이 주(朱), 노(魯), 제(齊), 송(宋), 정(鄭)나라 등
어느 곳이나 자유로이 왕래했던 때와 대조된다.
이러한 시대에 살고 있다 보니
‘나도 도읍의 번성함을 직접 가서 마음껏 보고 싶다’ 는
생각은 가지고 있었는데 기회를 얻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던 차에 올 가을, 당숙부인 참판공(參判公)이
동지겸진주사(冬至兼陣奏使)의 부사로 임명되어
사신행차를 간다기에 마침내 기회가 왔다 싶어 따라가겠다고 했다.
다행히 당숙부가 흔쾌히 승낙을 해주었다.
친족 동생인 치형(稚馨)과 서유직(徐有稷)은 이웃에서 살았는데
평소에도 정분이 두터워 많은 시간을 함께 보내면서 시를 짓고,
술을 마시며 유람을 즐겼다.
이번 행차에도 동행하자고 하였다.
또한 나는 본래 몸이 약해서 병에 잘 걸리는데도
이번 행차가 길이 멀고,
힘들다는 것에 개의치 않았다.
오히려 유람에 대한 기대가 점점 부풀어갔다.
마침내 떠나는 날,
집에서 아침 식사를 하고 채비를 마친 다음
집안의 사당으로 가서 하직 인사를 올렸다.
가까운 친척들에게도 인사를 마친 다음
돈의문(敦義門)을 거쳐 나왔다.
묘시(卯時), 표문에 절을 하자 사각(巳刻)에
세 사신이 표문과 자문을 받들고,
모든 관리들은 반열을 지어 나갔다.
모화관(慕華錧)에 이르니 눈앞에 장막들이
구름처럼 펼쳐져 있고,
그 사이로 사람들과 말들이 꽉 들어차있었다.
친구인 화숙(和淑)과 이치헌(李致憲)도 자기 형을 따라
동행하게 되었다.
나는 서장관(書壯官)과 장막 안에 들어가 몇 마디 대화를 나누었다.
조사, 대조하는 일이 끝나고서야
세 사신이 차례로 길을 떠났는데 이미 날이 어둑어둑해지고 있었다.
배웅 나온 수도의 친지들과 작별 하고
형님에게 하직 인사를 올릴 때에는 서글픈 생각이 들어
발길이 쉽게 떨어지지가 않았다.
한참 동안 머뭇거린 끝에 말에 올랐다.
그리고 치형이 댄 운에 차운하여 시 2수를 지었다.
저녁에 벽제관(碧蹄錧)에 이르렀다.
세 사신이 탄 가마 뒤를 군관과 역원들이 나뉘어서 따랐는데
모두 철릭을 입고 날쌘 말을 타고 있었다.
군졸들은 나팔을 불며 길을 인도하였고
가마가 멈춰 설 때 화포 3방을 쏘았다.
용만(龍湾)까지는 모두 이와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