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담 ┃ 한국연극의 원형을 찾는 사람들 I: 원영오(연출가, 극단 노뜰 대표)
“창작의 자유를 향해 도시를 떠난 후용리 연극사람”
대담: 허순자(연극평론가, 청운대 교수)
일자: 2005년 11월 12일
장소: 카페 張, 대학로
사진: 박다린
(「공연문화저널」의 대담시리즈 요청은 예기치 않은 일이었다. 충분히 생각하고, 준비할 시간마저도 생략된 주문은 더욱 난감했다. 그러나 이미 많은 관심과 연구의 대상이 되어온 중견 예술가들과 달리 자기 철학과 생각을 갖고 나름대로 의미 있는 작업들을 생산하고 있는 젊은 연극인들에 대해서 우리 연극은 의외로 소홀하고 있다는 생각은 이 여정의 결정적 동인이 되었다. 그리고 처음 떠올린 이가 바로 원영오 였다. 도시 대신 오지(?)를 택해 소리 소문 없이 크고 작은 일을 벌이며, 국내ㆍ외 교류에 정진하고, 자기만의 연극미학 생산에 골몰하는 그를 먼저 떠올림은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그리고 일상에 대한 사유를 전제로 한 그의 연극 만들기, 그 출발은 무엇이며, 인간성을 바탕한 연극철학으로 농촌과 도시, 국경을 잇는 그의 작업세계를 들여다보기로 한 것은 모종의 확신 때문이었다. 그리고 자그마한 체구, 동그란 안경알 속 심연을 기리는 눈 빛, 조용한 목소리, 열정의 말로 일러준 까까머리 후용리 청년의 준용한 삶과 연극은 그 확신을 거스르지 않았던 것이다. 어느 토요일 오후 도시에서의 만남은 말이다. )
허: 한국연극에서 극단 노뜰의 존재감은 2000년대 초반 우리에게 다소 갑작스런 현상으로 다가오지 않았나 합니다. 2002년 1월 국립극장의 특별기획프로그램(“컬처로드 2002 - 해외로 진출하는 신진 예술인 3부작”, 별오름극장)으로 오른 〈동방의 햄릿〉이 본격적인 국내활동의 신호탄이 됐다고 기억하거든요. 먼저 해외작업으로 기반을 다진 후 리턴한 예외적인 극단사를 간직한 노뜰의 초기 활동은 많은 이들에게 잘 알려져 있지 않습니다. 1993년 극단 설립이후, 즉 노뜰 역사의 초기 작업에 대한 얘기로 대담의 실마리를 풀어봤으면 합니다.
원: ‘93년도 창단 이전에도 연극을 했었지만, 그때 만 해도 연극 자체가 내 삶의 미래와 크게 연관이 있을 것이라는 생각을 하지 못한 채 1-2년 정도의 세월을 보냈습니다. 그러다가 ‘94년도에 아비뇽훼스티벌 웍샵에 참가를 하게 됐지요. ’인(IN)'에서 전체 프로그램으로 열린 큰 웍샵이었는데, 그때 연극적인 많은 영향과 자극을 받게 됐고요. 그 이후로 한국사회에서 ’극단이 과연 어떻게 생존할 수 있는가?‘에 대한 고민이 저에게 아주 크더라고요. 그래서 ’연극작업으로서의 어떤 생존의 방법이 있는가?‘ 하는 문제, 그리고 그와 관련된 작품과 시장에 대한 생각들을 하게 됐지요.
연극 주체자로서 작품을 잘 만드는 것도 중요하지만 담론에 대한 것, 즉 ’과연 어떤 담론을 담을 수 있는가?‘ 하는 것이 저희 내부에서는 가장 큰 고민이었습니다. 그래서 ‘연극의 원형이란 무엇인가?’ 등을 단원들과 고민하게 됐고, 많은 연구를 통해 나름대로 돌파구를 찾게 된 것이지요. 태생적으로 실험적인 작업을 좋아하고, 사물을 보는 관점에서도 그랬던 저나 저의 초기 단원들은 생존의 한가지 방법론으로서 직접 관객을 찾아다니는 것에 동의하게 됐습니다. 관객을 찾아다니면 실험적인 작업을 할 수 있으리란 생각에서였지요. 그로토프스키나 바르바 같은 선구자들이 그랬고, 일본의 텐트극단들이 그랬던 것처럼 말입니다. 그 시기에 여러 가지 작품들을 많이 시도해봤지요. 제가 희곡에 재능이 있지 않았기 때문에 그 즈음 한국연극에서 있었던 작품들을 패러디 해보거나 시(詩)를 텍스트화, 즉 공연화 하는 작업 또는 그런 과정에 대한 시도들이었습니다. 그러다가 ‘96년도에 양정웅씨가 쓰고 제가 연출했던 〈봉천내! 봉천내!〉라는 작업을 함께 하게 됐지요. 양정웅씨와는 이미 ’95년도에 스페인에서 함께 작업을 한 적이 있었거든요. 그 텍스트가 워낙 실험적이기도 했지만, 작품이 의외로 잘돼서 그것을 계기로 본격적으로 해외시장, 아니 해외관객을 만나보자는 생각을 하게됐습니다. 새로운 관객을 계속 만나는 것을 즐겨했고, 또 한국에서는 실험연극 자체가 젊은 연극학도들의 ’치기‘ 정도로 받아들여지는 경향이 너무 많아서요. 하지만 실험적인 작업은 저희에게는 거대담론이라는 명제가 있었거든요. 그때를 계기로 해외관객들을 찾아다니는 작업을 시작하게 됐습니다. 그래서 ’97년도 극단 식구들을 다 데리고 프랑스로 떠났지요. 현지에서 스튜디오를 얻어 생활을 하며, 훼스티벌을 접촉하고, 방문하는 과정을 거쳤습니다. 그때 모나코훼스티벌에서 초청을 받아 처음 공연을 하게 됐고요. 그 때만 해도 해외 공연을 한다는 것이 정말 어려운 시절이었거든요. 물론 대형 극단들이야 정부차원에서 지원도 받고 했지만, 저희는 갖고 있는 것 다 털어서 떠난 경우였지요. 현지에서 4개월 정도 그곳에서 머물면서 사람들도 만나고, 훼스티벌들도 찾아다니고, 직접 기획도 하면서 많은 경험을 하게 됐지요. 그것을 계기로 저나 동료들의 연극과 세상을 보는 눈이 커지고, 세계를 보는 시각을 크게 가져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됐고요. 그러나 재정상 현지에서 더 이상 머물 수 없어서 다시 한국에 돌아와 그때부터 본격적으로 해외공연을 어떻게 진행할 것인가를 연구하고, 자료를 찾고 하면서 시작을 하게 됐습니다.
그러다가 ‘98년도에 북촌창우극장 재 개관 기념으로 마련된 ‘셰익스피어 상설무대’의 일환으로 〈햄릿〉을 처음 올리게 됐습니다. 초연 후 지속적으로 다듬기 작업을 하면서 그 작품을 발전시키는 가운데 일본도 다녀오고 하다가 ’99년도에 일본 토가훼스티벌에 초청을 받게 됐지요. 당시의 〈햄릿〉은 지금의 〈동방의 햄릿〉과 장면이 같은 것도 있지만 컨셉이 다른 것이었거든요. 그때는 세기말이었기 때문에 어두웠고, 보다 희망적인 메시지를 담은 후자와는 그런 면에서 달랐지요. 토가훼스티발을 계기로 일본에서 공연할 수 있는 기회를 자주 갖게 됐던 것 같고, 또 다양한 분들을 만나고, 도움도 받으면서 일본과는 지금까지도 수월하게 교류를 해오고 있고요. 〈햄릿〉외에도 〈맥베드〉, 로르까의 〈피의 결혼〉, 창작 작품 등 매우 실험적이요, 전위적인 작업을 했지요.
그 때만해도 저희는 원주 시내의 허름한 곳에서 작업을 하고 있었는데 ‘98ㆍ’99년 경, 그로토프스키의 ‘연극실험실’과 같은 걸 한번 만들어보자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우리 작업에서 원형을 찾아보자는 뜻이었지요. 그러다가 좋은 작업을 하기 위해서는 일단 도시가 아니어야 한다는 생각을 하게됐고요. 연극의 선구자들, 예컨대 스즈키, 그로토프스키, 바르바 등도 도시를 떠나 작업에 몰입했던 경우였고요. 이미 ‘95년도에 스페인에서 돌아올 때부터 원주에 남겠다는 생각을 했던 터이지만 그런데 대해서 좀 더 자료들을 찾고, 연구를 하고 그랬습니다. 같이 있었던 양정웅씨 같은 경우는 ’연극은 도시에서 이루어진다‘라는 생각을 갖고 있었기에 서울에서 작업을 하겠다는 입장이었고요. 그러다가 2000년도에는 더욱 더 시골로 들어가야겠다는 생각이 확고해져, 결국 지금의 폐교를 찾게 된 것이지요.
허: ‘97년도 프랑스 쁘와뜨에(Poitoir)에서 하신 현지 스튜디오 작업과정에 대해 좀 더 구체적으로 말씀해주셨으면 합니다.
원: 현지의 지인을 통해서 소개받은 그 동네의 허름한 옛날 가죽공장에서 숙식과 작업을 함께 한 거였지요. 그곳에서 단원들과 작업을 계획하기도 하고, 거리극과 극장 공연을 하며, 그곳의 예술가들과 만나곤 했습니다. 작업을 하다가 축제 시즌이 되면 아비뇽, 샬롬, 리용 등을 방문해 많은 것들을 보고, 사람들을 만나고, 배우는 기회들을 가졌지요. 그 해 8월에 모나코 초청공연을 했고, 경제적으로 '파산'을 한 후 귀국을 했지요.
무엇보다도 그곳으로 떠난 큰 이유 중 하나는 현지에서의 작업은 과연 어떻게 이루어지는 가에 대한 궁금증이었습니다. 그곳에서는 어떤 작품이 올려지며, 해외시장의 유통구조는 무엇이며, 투어공연은 어떻게 하는 가 등에 대한 의문들에서 말입니다. 당시 한국연극에서는 해외 투어공연에 대한 정보를 얻기가 매우 어려웠기 때문에 직접 간 거였지요.
허: 노뜰의 초기는 해외공연의 화려한 조명이 다소 부담스러울 수 있었던 경우라고 하겠습니다. 이를테면, 아비뇽에서의 〈동방의 햄릿〉에 대해 “셰익스피어 비극의 놀라운 전환”이라고 했던 앙리 레핀스라든가, “연극이 살아있는 현실이고 전 세계 신화에 대한 탐구요, 마음의 심연 속에 있는 것의 끝없는 생성이라고 보는 사람이라면 이 공연을 보면 좋을 것”이라고 한 「라 마르세이에즈」의 평 같은 말입니다. 그간 모나코, 아비뇽, 토가 외에도 쁘와티에. 베이징, 홍콩, 타이뻬이, 애들레이드, 돗토리, 쿄토, 싱가폴 등 다수의 해외공연 및 해외연극인들과의 교류 작업을 해오셨지요. 그건 본지 4호에서 언급하신 (”해외공연을 위한 제언“) 바처럼 이미 초기에 ”10년 후를 계획하신“ 결과라고 여겨지는데 그와 관련된 말씀을 좀 나눠주시지요.
원: 그간 저희 작업에 대해 해외공연과 관련된 것이 많이 얘기 돼왔습니다. 그러나 앞서 말씀드린 대로 우리가 해외공연을 해온 것은 일종의 ‘생존법’이었습니다. 그것은 단지 경제적인 문제에서가 아니라 그만큼 애정을 가진 관객과 만남으로서의 성장이라는 뜻에서입니다. 작품을 통해 만나는 사람들이 그간의 세월만큼 축적이 됨으로써 이룬 성장은 곧 우리의 생존방법이었던 거지요. 그러나 2001-2002년 해외에서 공연한 것에 대한 시선들은 부담스러웠던 게 사실이었습니다. 그곳에서 공연한 것은 시장성과는 관계가 없으며, 우리는 그저 다만 시골에서 공연하는 것과 다름없다는 생각이었는데 말이지요.
--이하 생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