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동중학교(外東中學校)와 남녀공학(男女共學)
(작성 중입니다)
지금의 외동중학교(外東中學校)는 남녀공학(男女共學)이다. 그러나 필자가 1학년으로 입학한 1955학년도에도 남녀공학으로 출발하였다. 물론 1955년도 이전에는 여학생을 모집하지도 않았고, 상급학년에는 여학생이 한 사람도 없었다. 전쟁이 금방 끝난 시기여서 경황이 없기도 했지만, 당시까지만 해도 고루한 남존여비(男尊女卑)사상이 온존하고 있었던 시절이라 여학생을 모집하지 않았다. 그때까지도 "여자는 소학교(초등학교)에서 '언문(한글)'만 깨우치고, 살림살이 배워서 시집가면 된다"는 사고가 팽배해 있었기 때문이다. 때문에 당시의 외동읍(外東邑) 지역에서 여학생들이 중학교 이상의 교육을 받기 위해서는 경주시내에 있는 경주여중(慶州女中)이나 근화여중(菫花女中)으로 진학하는 길밖에 없었다. 그러나 외동읍 지역의 여학생들로서는 거리가 너무 멀었고, 통학수단이 여의치 않아 그만큼 진학이 어려웠다. 지금과 같은 무궁화열차나 정기노선 버스가 없었고, 일본제(日本製) ‘미카’ 증기기관차(蒸氣機關車)가 헐떡거리며 끌고 다니는 '곱배'(유게 또는 무게화차)뿐이었기 때문에 여학생들의 열차통학(列車通學)은 위험부담이 많아 학부형들과 여학생들이 진학자체를 포기하기 일쑤였다.
1970년대의 통학열차
- 기관차는 증기 기관차에서 디젤 기관차로 바뀌었지만, 학생들이 타는 차량은 난간도 없는 무게화차(곱배)를 기관차 앞쪽에까지 연결하여 운행하였고, 그것도 모자라 기관차에까지 개미떼 같이 매달려 다녔다. 이때까지도 사진에서와 같이 기차사정이 너무 열악하여 여학생들은 기차 통학이 실제로 불가능했다. 더욱이 1950년대 외동읍 지역의 동해남부선 통학 열차는 증기기관차가 끄는 유게화차 (곱배)였기 때문에 더욱 그랬다 -
이후 휴전이 되고 더 이상 전쟁이 없을 것이라는 확신이 섰을때 당시의 사립 외동중학교(外東中學校)에서는 지역 유지들의 건의를 받아들여 1956학년도부터 최초로 여학생을 모집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여학생은 당시의 입실국민학교(入室國民學校) 출신 여학생 5명이 겨우 진학했을 뿐이다. 처음이라서 홍보가 잘되지 않아서인지, 그때까지도 주민들이 여학생의 상급학교 진학을 탐탁치 않게 여겼던 때문인지는 모르나 그만큼 지원자가 없었다. 겨우 5명이 한 학급뿐인 1학년에 남녀혼성으로 편성되기는 했으나, 그나마 1학기가 지난 후에는 3명인가로 줄어들더니 2학년이 되었을 때는 한사람도 남지 않았다. 짓궂은 머슴애들 틈바구니에서 견뎌낼 수 없어 당시의 경주읍내 근화여중으로 전학을 갔었기 때문이다. 수업시간이면 복도(複道) 쪽의 맨 앞쪽 책상에서부터 한 줄로 앉아 다소곳이 얼굴들을 숙이고 선생님의 설명을 듣고, 쉬는 시간이면 도망치듯 뛰어나가 교사(校舍) 모퉁이 어딘가에서 자기들끼리 소곤거리는 것이 일과였다.
휴식시간마다 자기들끼리 얘기꽃을 피우던 여학생들
그 때만해도 중학생 1학년에 불과한 여학생이라도 수치심(羞恥心)이 너무 많았고, 정신연령(精神年齡)이 성숙하여 같은 국민학교(國民學校) 같은 반 졸업생이라도 남학생들과는 서로 아는 척도 않고, 묻는 말에 대답도 하지 않고 지내던 처지였다. 수업시간(授業時間)이면 언제나 왼쪽 머리결의 '머리핀'을 뽑아 단발머리가 왼쪽 얼굴을 가리게 하고, 책상(冊床)에 엎드리다시피 하여 수업을 받는 것이 그만큼 힘들기도 했을 것이다. 짓궂은 머슴애들이 한시도 눈을 떼지 않고 그녀들의 발그스름한 왼쪽 얼굴을 생채기가 날 정도로 뜯어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당시에는 남학생(男學生)의 경우 1학년이라 해도 당년 나이로 열일곱 살이나 되는 동급생(同級生)이 여럿 있어서 이들이 여학생(女學生)들을 대하는 '묘한 태도'에 불안감(不安感)을 느껴 학교를 그만두거나 전학을 간 것으로 안다. 턱밑에 거무스레한 수염이 돋아나고, 여드름이 자욱한 '덩치'들이 여차하면 자신들을 어떻게 해버릴 것 같은 불안(不安)에다 의도적으로 자기와의 '스캔들'을 조작(造作)하여 그녀들을 수시로 괴롭히는 개구쟁이들 때문에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중퇴(中退)를 하고 여자중학교로 옮겨 갈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 시절 단정하기 이를 데 없던 여학생들
새하얀 ‘카라’를 두른 곤색 ‘세라복’ 윗도리와 단정하게 졸라맨 허리밴드에 가랑이 끝을 '짝단추'로 동여채운 바지를 입고, 짧은 단발머리 차림이었던 여자 동창생(同窓生)들의 예쁜 모습들이 지금도 제법 뚜렷하게 그려지기도 한다. 그러나 그녀들의 이름은 한 사람도 기억에 남아있지 않다. 무슨 '화자'인가하는 여학생의 이름이 희미하게 남아있기는 하지만 이도 정확하지 않다. 동그스름한 얼굴에 언제나 얼굴에 홍조를 띠고 있어 제일 예쁜 학생이었다. 그녀도 이제는 60대 후반에 접어들었을 것이다. 2007년 4월 12일 외동읍 입실리 소재 입실시장 어느 음식점에서 열린 제7회 동기회에 참석하여 확인한 결과 마지막까지 남아 있던 여자애들은 '박화자' '이해연' '권순연'이라고 했지만, 그녀들은 모두 입실초등학교 출신이고, 필자는 영지초등학교 출신으로 그녀들과 초등학교를 같이 다니지 않아 누가 누구인지는 정확히 가늠이 되질 않았다.
당시 외동중학교 여학생들이 착용했던 '세라복'
(당시에는 모든 학교행사에 면장, 지서장, 우체국장, 농협조합장, 수리조합장, 역장, 인근 군부대장이 참석하여 기념사진을 촬영하곤 했었다)
어쩌다 복도(複道)에서 마주치기라도 하면 온 얼굴이 홍당무가 되어 다소곳이 머리를 조아리며 스쳐지나가던 앳된 모습들이 어찌나 예뻤던지 그 옆얼굴을 훔쳐보려고 다투어 기웃거리던 개구쟁이 남자동창(男子同窓)들의 모습이 그녀들의 진곤색 '세라복' 등판에 클로즈업되기도 한다. 필자는 키가 그리 크지 않아 앞쪽 그녀들의 옆줄에 앉았기 때문에 매일 같이 그녀들의 노트를 넘겨다보거나 옆얼굴을 훔쳐보곤 했었는데, 그 때문인지 3년 동안 우등상(優等賞) 한 번 타보지 못하는 불운(不運)을 겪기도 했었다.
1960년대의 외동중학교 여학생들(가사 수업)
칠판을 쳐다봐야 하는데 그녀들의 옆모습만 쳐다보느라 수학(數學)이나 '물상(物象)'의 기초과정을 제대로 익히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돌이켜보면 드라마 '주몽'의 여자 주인공 '소서노'의 말이 아니더라도 정말 '한심한 놈'이 아니었나 생각된다. 특히 '박화자'를 집중적으로 쳐다본 것으로 기억된다. 어쨌든 외동중학교(外東中學校)의 최초 남녀공학(男女共學)은 그렇게 시작되었다가 또 그렇게 매듭을 지었다. 그리고 그때 그 여학생들은 '중중퇴(中中退)'라는 꼬리표를 달고, 썰렁한 목재교실(木材敎室)에 까까머리 머슴애들만 잔뜩 남겨놓고 그렇게 떠나고 말았다.
수학여행중인 외동중학교 여중생들(1965)
어쨌든 외동중학교(外東中學校)의 최초 남녀공학(男女共學)은 겨우 1년만에 제7회 남자 졸업생들 중 '덩치'들과 개구장이들이 망쳐 놓은 셈이다. 제7회 졸업생을 대표하여 학교당국(學校當局)과 그녀들에게 정중한 사과를 드린다. 그러나 필자는 '덩치'도 아니었고, 개구장이도 아니었다. 너무나 숫기가 없어 그냥 마음속으로만 그녀들을 좋아했을 뿐이었다. 정확히 말하면 '짝사랑'이었을 것이다. 그 '짝사랑'이 도가 지나쳤는지 수학(數學) 공식과 물상(物象)공식조차 암기하지 못하도록 한 것 같았다. 그리고 그녀들이 떠나버린 2학년부터 정신을 차리고 보니 모든 것이 너무 늦어 있었다. 그러나 2-3학년 동안 머리를 싸 메고, 분투(奮鬪)한 결과 졸업식(卒業式)에서는 당시의 경우 그렇게 쉽지 않은 경주경찰서장(慶州警察署長)의 표창을 혼자서 수상하기도 했었다. 동창 여학생(女學生)들이 떠나지 않았으면 어림도 없는 결과였다. 이 점에서 여자 동창(同窓)들이 외동중학교(外東中學校)를 떠난 것이 필자에게는 어쩌면 전화위복(轉禍爲福)이 됐다고 볼 수도 있다. 동창 여학생들에게는 미안한 말이지만 말이다.
1960년대의 외동중학교 여학생들(서울 수학여행)
이후 외동중학교(外東中學校)에서는 필자가 졸업한 2년 후인 1960학년도부터인가 본격적인 남녀공학(男女共學)이 재개되어 오늘에 이른 것으로 알고 있다.
1960년대의 외동중학교 여학생들
|
첫댓글 제가 12회 즉 입학을 1960년에 했지요. 11회는 여학생이 12명으로 알고 있습니다. 이들은 교장 실을 개조하여 그곳에서 공부를 하였고 12회는 34명인데 남자와 같이 냠녀 공학이었지요. 자연 한반은 홀에비 반이었구요. 그 후로 계속 남녀 공학이 진행되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여기 있는 여학생들은 14아니면 15회 정도가 될 것 같네요. 11.12.13.회는 줄 무늬있는 세라 복을 입었어요
지금도 11회생들은 동기회를 매년 하고 있읍니다,역장딸 전말순,박향춘,김판수,이영숙, 더이상 기억이 잘 안나는데, 공부 잘하고 얌전한 남학생들만 골라서 합반하여 교무실 옆교실에 편성하여 여학생들을 보호하는데 치중 하다보니 다른반 학생들은 얼굴조차 기억을 못합니다,나는 그때 키가 작아서 가까이 가 보지도 못헸지요,더군다나 일학년 마치고 2학년때 신라중으로 전학을 갔으니 더더욱 가물가물 하지요,그래도 동기회는 외중동기회로 나갑니다,고향 친구들이 고스란히 거기 다 있으니까,5년전에 동기회때 그때너를 짝사랑 했다고 했드니 아직도 유효하다고 하니까 매우 기분 좋튼데요,ㅎㅎㅎㅎㅎ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