둘째날(28일 수요일) ◈일정: 숙소(하늘정원) - 세연교(새섬) - 올레7구간중일부(황우지해안,선녀탕,외돌개) - 쇠소깍 - 위미동백군락지 - 이중섭미술관(이중섭거리) - 서귀포올레시장 - 추사김정희유배지 - 소인국테마파크 - 유리의성 - 제주시 노형동 (제주바다바다횟집 석식) - 아트랜드(한중문화등축제) - 집나온 북극곰 월담시인의 제주이글루(캠핑형펜션2D) ◈ 07:00 하늘정원 Out 07:30 세연교(새섬한바퀴 트레일) 08:30 황우지해안 ( 황우지12동굴-선녀탕 - 외돌개 올레길일부 트래킹) 10:00 쇠소깍 10:40 위미동백군락지( 알음알음으로 찾는곳이라 네비찍어도 찾는데 애를먹음 30분정도 허비) 11:50 이중섭 미술관(이중섭거리) 12:40 서귀포 올레시장 (시장투어) 14:30 소인국 테마파크 15:20 추사 김정희 박물관(추사체,세한도,유배지) 15:50 유리의성(마법의숲 곶자왈 갤러리) 17:20 제주시 노형동 석식(제주바다바다 횟집) 20:00 아트랜드(한중문화 등축제) 21:50 월담시인의 제주이글루(캠핑형 돔펜션)
서귀포항의 일출 세연교 제주 서귀포항과 새섬사이에 제주의 전통 떼배인 테우를 모티브로 형상화한 새연교가 2009년9월 개통되었다.새연교의 건설은 서귀포항이 호즈의 시드니나 이태리의 나폴리항 못지않는 세계적인 미항으로 도약하고자하는 소중한 의미가 있다. 새연교는 국내최초로 외줄 케이블 형식의 길이 169M,폭4~7M의 사장교로바람과 돛을 형상화한 높이45M의 주탑에 화려한 LED조명시설까지 갖추었다.새연교를 걸으며 바라보는 서귀포항을 비롯해 문섬,범섬등 서귀포 앞바다와 한라산의 풍경은 절묘한 조화를 이루고 있다. 또한 새연교를 건너 쉽게 드나들수 있는 총면적 10만 2천여㎡의 무인도인 새섬은 난대림 보호구역으로 지정된새섬의 생태를 관찰할수 있을뿐아니라 1.2Km의 산책로와 광장 ,목재테크로,자갈길,숲속산책로, 테마포토존등의 다양한 편의시설을 꾸며놓았다. 새연교는 야경으로도 유명하다<사진펌> 새섬에서 바라본 범섬 새연교와 한라산 그리고 서귀포항 황우지해안과 선녀탕 서귀포시 지명유래집에 따르면 황우지 해안은 지형이 황소가 강을 건너는 모습 같다고 해서 '황우도강'(黃牛渡江)이라는 말에서 이름이 유래됐다. 황우지 해안은 선녀탕 외에도 우도암과 선녀 바위 등 1만5천년 전 화산활동으로 만들어진 용암 기암에 오랜 시간 풍화작용으로 인한 흔적이 예술작품처럼 펼쳐져 있다. 높이 20m·둘레 10m의 돌기둥인 외돌개도 서쪽으로 걸어서 5분 안팎 거리에 있다. 외돌개는 구멍이 작고 조밀한 회색을 띠는 조면안산암으로 형성돼 있고 주변 해안도 파도의 침식으로 만들어진 절벽과 동굴이 절경을 이룬다. 고기잡이 나간 할아버지를 기다리다 못해 할머니가 바위로 변했다는 슬픈 전설이 내려온다. 고려 말 최영 장군이 황우지 해안 앞으로 보이는 범섬으로 달아난 원(元)나라 목호(牧胡)군 세력을 진압하려고 외돌개를 장수로 치장해 기를 꺾었다는 이야기도 있다. 황우지 해안과 외돌개를 잇는 구간은 이런 절경을 감상하는 데이트 코스로도 손색이 없다. '놀멍, 쉬멍'(놀면서, 쉬면서) 걸어가며 제주를 즐기는 제주올레의 7코스 시작점이기도 하다. 황우지 해안은 2000년대까지만 해도 마을 주민이나 사진작가 등 소수만 찾던 잘 알려지지 않은 곳이었으나 제주올레길이 열리면서 입소문을 타고 유명해졌다. 이곳은 아름다운 절경을 자랑하지만 과거 아픈 역사도 함께 새겨져 있다. 1968년 8월 20일 남파간첩을 북한으로 복귀시키려는 북한군 753부대 14명이 제51호 간첩선으로 침투했다. 이에 황우지 해안에서 합동작전을 펼친 경찰과 군이 6시간 치열한 전투 끝에 침투한 북한군을 섬멸했다. 2005년 6월 이를 기리고 안보의식을 고취하기 위해 해안 오솔길 입구에는 '황우지 해안 전적비'가 세워졌다. 해안에는 일제 강점기 일본군이 파놓은 진지동굴도 12개가 뚫려 있다. 진지동굴은 일본군이 태평양전쟁 말기에 미군의 상륙에 대비, 폭탄을 실은 소형 어뢰정을 숨겨 두기 위해 파놓은 것이다. 동굴이 높이와 폭은 3m, 깊이는 10여m 남짓 된다. <펌 > 여름에는 국내에 몇안되는 스노쿨링의 명소 황우지해안12동굴 외돌개와 문섬 어제먹다가 남은 방어한팩과 함께 컵라면으로 아침을 때운다 바닷가에서 이렇게 먹어보는것도 나쁘지않는 그림
위미 동백군락지 조용하고 아름다운 마을 위미리는 겨울이 되면 붉은 빛으로 물이든다. 긴긴 시간동안 푸른 초록잎을 키워오던 동백나무가 붉은 꽃잎을 피워내기 시작한다. 특히 동백은 따뜻한 기후에서만 꽃을 피우기 때문에 제주도에 가장 빨리 찾아온다고한다. 무엇보다 위미의 동백은 여느 동백과는 다른 특별한 아름다움을 가지고 있다고한다. 보통 동백 하면 하얀 눈밭에 떨어진 붉은 꽃잎을 떠올리지만 위미의 동백은 겨울 제주의 가장 대표적인 풍경인 샛노란 감귤나무와 돌담길과 함께 어우러져있다. 동백나무는 수백가지가 넘는 종류가 있지만 그 중 가장 쉽게 볼수 있는 동백은 홍동백과 애기동백. 애기동백은 10월~ 12월 사이에는 겨울의 시작을 알리며 피어나는 나무로 흔히 꽃송이째 떨어지는 것으로 알려진 일반 동백나무와 달리 꽃잎이 하나씩 떨어진다고한다. 반대로 홍동백은 1~3월 사이에 겨울이 문을 닫으며 피어나는 나무로, 가장 아름답게 피어나는 순간을 간직한채 꽃망울째 바닥으로 떨어지는 가장 대표적인 동백나무이다. 위미리에는 애기동백과 홍동백 군락이 각각 따로 있다한다. 이 중 가장 먼저 알려진 곳이 지도에 '위미 동백나무 군락'으로 표시되어 있는 홍동백 군락. 이곳은 귤농사를 지으시던 '현병춘'할머니께서 바닷바람을 막기 위해 한라산에서 동백나무 씨앗을따다 심은것이 오늘날까지 보존되어 도지정 기념물로 지정된 곳이라고한다. 커다란 귤밭을 감싸 안고 있는 붉은 동백나무와 검은 돌담이 가장 제주스러운 곳.진분홍의 꽃잎이 아름다운 애기동백 군락지 역시 위미 동백나무 군락지와 아주 가까운 곳에 있다. 사람키보다 훨씬 커다란 동백나무 수십 그루가 꽃을 피우고 있는 모습이 정말 장관이다. 이곳은 도에서 관리를 받는 위미동백나무 군락지와 달리 개인 사유지이다. 네비를 치고가는데도 찾기가 만만치 않아 가급적 동네사람들에게 물어서 찾는게 시간낭비를 줄인다. 이중섭미술관 야수파적인 강한 터치로 고개를 쳐들고 있는 "황소",강한 골격을 드러내며 꼬리를 흔들고 있는 "흰소"를 그려 낸 이중섭은 6.25전쟁이 한창이던 1951년 약 1년여를 이 도시 서귀포에서 보냈다. 서귀포시 서귀동 512-1 번지의 한평 반 정도의 방을 세내어 일본인 아내와 두 아들과 함께 머물며 지금까지 그의 대표작으로 꼽히는 대부분의 그림들을 그려냈다. 때였기에 뛰어난 그림들을 그릴수 있었고, 그러한 중요성 때문에 서귀포시에서는 그가 살던 집을 매입하여 복원하고 이중섭 기념관을 지었다. 그리고 그가 아침 저녁 거닐던 그 집 앞 거리를 "이중섭 거리"로 지정하였다. 초가 뒷편으로 생전에 그렸던 그림들이 전시되어 있는 '이중섭미술관'이 있다. 이중섭 화가의 작품들은 가나아트센터 대표 이호재씨가 서귀포시에 기증한 것으로 이중섭 원화 작품 8점과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근현대화가의 작품 52점 등 모두 60점의 작품이 소장되어 있다. 이중섭거리 서귀포 매일올래시장 제주시에 동문시장이 있다면 서귀포엔 올래꾼과 관광객그리고 시도민이 즐겨찾는 명소이자 먹거리의장인 매일 올래시장이 있다. 서귀포 올레시장은 서귀포시에서 가장 큰 시장이며 1960년대 초반 자연발생적으로 생긴 재래시장으로 60여년 전통으로 서귀포 경제에 큰 밑받침이 되고있는 시장이다. 2001년 120m를 시작으로 현재 총620m에 달하는 아케이트상가를 설치하여 서귀포서민 경제에 중추적인 역할을 담당하고 있으며 시장내부가 王자형으로 형성되어있어 쇼핑하기가 편리하다. 이곳 주차장은 1시간 무료주차시스템을 도입하여 고객에 최대한 편의를 제공하고 있으며, 시장에서 물건을 구입한 고객의 편의를 위해서 무료로 원하는 장소로 배달하는 택배시스템을 갖추고 있다. 또한 미래의 잠재고객인 청소년들을 위한 야외 공연장 및 분수대가 있는 공원을 갖추고 있다. 소인국 테마파크{미니어쳐} 안덕면 서광사거리 근처 2만여 평의 부지에 자리에 잡은 소인국테마파크. 이곳에는 불국사, 피사의 탑, 자금성, 샤크래퀘르 등 엄선된 세계 각 국의 유명건축물의 미니어쳐 100여 점이 전시돼 볼거리를 제공하고 있다. 이와 함께 제주 돌 문화와 민속문화 체험학습장과 미니RC카 경기장, 전통가마터, 공룡화석 등을 준비하고 있어 다양한 문화와 체험 관광지로서 손색이 없다. 사방에 펼쳐져 있는 제주의 아름다운 들판과 멋진 기생화산들은 이곳의 운치를 한껏 더한다. 크지않은 공간임에도 불구하고 이토록 넓은 공원을 조성할 수 있는 까닭은 공간활용을 최대한 고려한 조형물 배치 그리고 조경에 심혈을 기울였기 때문이다. 코너마다 독특하게 만들어진 전시장과 문화공간으로 이루어진 공원 관람의 참맛은 모든것을 경험해 볼 수 있는 여러가지의 체험 현장이기 때문이다. 세한도 김정희 선생의 추사체 추사 김정희 제주유배지 추사유배지 대정에 새겨진 추사의 흔적 [개설] 지적하였다가 충군형을 받고 유배된 이래 조선 왕조 동안 총 60여 명이 유배되었다. 특히 1840년(헌종 6) 대정현에 마지막으로 유배된 추사(秋史) 김정희(金正喜)는 8년 3개월 동안 유배 생활을 하면서 제주 사회에 많은 영향을 끼치게 된다. 특히 대정에는 조선 시대의 대표적인 문장가이자 서예가인 김정희의 유배 생활과 관련된 흔적이 많이 남아 있다.
김한신(金漢藎)이며, 아버지 김노경(金魯敬)은 예조 판서를 비롯하여 이조·공조·형조·병조의 판서를 두루 지낼 정도로 막강한 권세를 누렸다. 김정희 역시 1809년(순조 9) 생원이 되고, 1819년(순조 19) 문과에 급제하여 세자시강원 설서(世子侍講院說書)·충청우도 암행어사·성균관 대사성(成均館大司成)·이조 참판 등을 역임하였다. 그러나 정적이였던 안동 김씨 세력의 탄핵을 받아 1840년(헌종 6) 윤상도(尹尙度)의 옥사에 연루되어 대정현에 유배되었다. 김정희의 유배 노정을 살펴보면, 충청도 천안, 전라도 완주를 거쳐 해남에서 화북포로 하여 제주도에 들어온 후 대정현으로 들어갔다. 김정희는 처음 대정현 안성리 포교 송계순의 집에서 유배 생활을 하다가 다시 강도순의 집[오늘날의 서귀포 김정희 유배지]으로 옮겼다. 이후 식수 문제로 인해 다시 창천리로 옮겨 거처하였다. 추사는 이후 섬이라는 고립성과 한양에서 가장 먼 곳인 제주도에서 가족과 친지, 친구 등 지인들과 격리되어 8년 3개월이라는 긴 시간을 외로운 생활하게 된다. 1848년(헌종 14) 유배가 풀려 복귀하였으나 1851년(철종 2) 헌종의 묘천(廟遷) 문제로 다시 함경도 북청으로 귀양을 갔다가 이듬해 풀려났다. 이 시기는 안동 김씨의 세도정치가 성행하던 때라 정계에는 복귀하지 못하였고, 아버지의 묘소가 있는 과천에서 일흔한 살의 나이로 생을 마쳤다.
경우나 관료를 제외하고는 완전히 차단되어 지루한 생활이 반복된다. 추사 역시 위리안치형으로 집 주위에 가시나무가 둘러쳐 있어 외부와 단절된 생활을 해야만 했다. 그러나 이는 형식적일 뿐, 타 지역으로의 이동은 제한이 있었으나 대정현 내에서는 이동이 가능하였다. 이에 추사는 대정향교 현판에 글을 쓰고 산책을 하는 등, 지루하지만 여유로운 유배 생활을 하였다. 추사는 시·서·화에서 조선 최고라고 알려져 있다. 특히 대정현 유배 생활은 그의 삶에 있어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하는 시기였다고 볼 수 있다. 추사는 예로부터 전해지는 여러 서체를 익히고, 그에 대한 연구를 바탕으로 독창적인 추사체를 대정현 유배 생활 중에 완성하였다. 또한 유배인 추사는 쉬지 않고 붓을 잡아 그리고 쓰는 일에 매진하였다. 유배 중에 그린 「세한도(歲寒圖)」[국보 제180호]는 김정희의 최고 걸작이자 우리나라 문인화의 최고봉이라 평가받는다. 추사는 1844년(헌종 10) 나이 쉰아홉에 수제자인 역관 이상적(李尙迪)에게 「세한도」를 그려 주면서 “날이 차가워진 연휴에야 소나무와 잣나무가 뒤늦게 시드는 것을 알게 된다.”는 공자의 글을 발문에 적어 자신의 심정을 간접적이나마 토로하였다. 추사가 유배 생활 중 남긴 51제 81수의 시와 가족과 친구들에게 보낸 많은 서신이 현재까지도 전해지고 있다. 추사의 글을 살펴보면, 추사가 유배지 제주를 자신이 궁극적으로 속해야 할 공간으로 보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유배라는 절망과 외로움 속에서 일단 유배지의 현실을 그대로 수용하면서 새로운 생활에 적응하는 태도를 세울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현실을 수용하는 성격과 태도는 추사가 8년 3개월이라는 기나긴 세월을 유배지에서 보내면서 유배지에서 많은 업적을 쌓을 수 있게 하였다. 추사는 예술 활동뿐만 아니라 교육자로써도 제주도에 많은 영향을 끼치게 된다. 제자가 삼천 명에 이른다고 할 정도로 교육 활동에 힘쓴 추사의 제자로는 흥선대원군을 비롯하여 이상적·강위·허련 등이 있으며, 대정현 유배 중 강기석·강도순·강사공·김구오·김여추·김좌겸·박계첨·이시형·이한우·홍석우 등이 그로부터 학문을 전수받았다. 또한 민규호의 기록에 따르면, 추사가 제주에 온 뒤 글을 배우려고 찾아온 자가 대단히 많았고, 두어 달 동안에 인문이 크게 열려서 탐라의 황폐한 문화를 개척한 것은 추사로부터 시작된 것이라고 적고 있는 등 추사는 19세기 제주 사회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
생활을 마치고 남은 여생을 보냈던 경기도 과천으로 크게 나눌 수 있다. 이들 지역에서는 모두 추사와 관련하여 다양한 사업들을 추진하면서 조선 시대 최고의 문장가이자 서예가인 추사의 뜻을 기리고 있다. 제주특별자치도 대정읍에서는 추사가 대정현에 유배되어 살았던 강도순의 집을 1984년 강도순의 증손의 고증에 따라 복원하여 사적 487호인 서귀포 김정희 유배지를 조성하였다. 이곳에는 「세한도」 사본을 비롯하여 추사 김정희가 대정향교 동재 현의 글씨로 써 주었다는 의문당 현판, 그리고 기증받은 추사 김정희와 친인척의 관련 유물들이 전시되어 있다. 또한 대정에서는 2001년부터 매년 마을 주민들을 중심으로 추사문화예술제를 개최하고 있다. 예술제에서는 추사서예대전을 비롯하여 추사 선생 유배 행렬 재현, 대정고을 역사 사진전 등 다양한 행사를 통해 많은 사람들이 추사의 대정 유배에 대해 쉽게 접할 수 있도록 하고 있다. 그리고 제주대학교 스토리텔링 연구개발센터에서는 “제주 유배문화의 녹색 관광자원화를 위한 스토리텔링 콘텐츠 개발 사업”의 일환으로 추사 유배길을 비롯한 추사 김정희 스토리텔링 콘텐츠를 개발하고 있다. 특히 추사 유배길은 “제주 유배문화의 녹색 관광자원화를 위한 스토리텔링 콘텐츠 개발 사업”의 1차년도 과제로 추사 김정희가 8년 3개월 동안 유배 생활을 중심으로 이루어졌던 대정을 중심으로 스토리텔링이 이루어져 지역의 공간을 역사 인물 스토리텔링의 매체로 활용하였다. 추사유배길은 “추사에게 길을 묻다”라는 주제로 기획되어 추사 김정희의 유배지를 중심으로 대정읍과 안덕면에 걸쳐 만들어졌다. 제주 관광의 한 트렌드가 된 올레길과 같이 추사 유배길 또한 3코스로 구분되어 있는데 ‘집념의 길’이라 명명된 1코스는 서귀포 김정희 유배지를 시작하여 송죽사터, 첫 번째 유배지 터, 드레물, 동계 정온 유허비, 한남 의숙 터, 정난주 마리아 묘, 남문지 못, 단산, 세미물, 대정향교, 서귀포 김정희 유배지로 순환된다. ‘인연의 길’이라 명명된 2코스는 서귀포 김정희 유배지를 시작으로, 수월이 못, 제주옹기박물관, 곶자왈 지대, 서광승마장, 오설록으로 이어지며, ‘사색의 길’인 3코스는 대정향교를 시작으로 완당인보, 산방산, 추사아호, 안덕 계곡으로 이어진다. 추사 김정희와 관련한 유배길은 기존의 산발적으로 존재했던 추사 관련 이야기들을 체계적으로 경험할 수 있는 것이 가장 큰 장점이다. 서귀포 김정희 유배지로 한정되어 있던 공간을 대정읍 일대로 확장하여 지역 홍보와 발전에 많은 효과를 거둘수 있을 것으로 기대되고 있다. 이와 같이 추사 김정희와 관련한 다양한 사업들이 추진되면서 추사 김정희의 대정 유배 생활에 대한 연구가 활발히 진행됨과 동시에 많은 관광객을 유치하는 콘텐츠로 활용되어 김정희의 대정 유배가 재해석되고 있으며, 많은 사람들이 방문할 수 있는 지역으로 서귀포시가 변화하고 있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Ⅱ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