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시 : 2004년 3월 14일(일요일) 7시 10분 출발 *출발 장소 : 황실 예식장 건너 고수부지 *종주 코스 : 만리성재 갈림길-성황재-시루봉-운곡서원 갈림길 *참석자 명단 : 운학, 산꾸러기, 초이(1), 항아, 산까치, 앙드레 jung, 호래이, 네모, 장미, 동보, 곰바우, 공산, 김규준, 한계령, 등대지기, 바다, 방산
아침 일찍 일어나 경주시 경계 종주 2구간 산행준비를 위해 분주히 서두르다 6시 40분 아파트 경비초소 앞에서 네모님과 만나기로 했는데 2-3분 늦어진 상태라 급히 달려가니 사모님이 차에서 내려 인사를 하고 우리를 황실고수부지까지 태워주겠다고 하신다.
황실고수부지에 도착하니 7시가 다 되어 가는 시각 참석회원들이 한분 두분 모여들고 우리는 한진 렌트카와 동보님의 차에 분승하여 7시 10분 황실고수부지에서 출발 목적지를 향해 달려간다.
1구간 산행이 정상적으로 이루어졌다면 성황재로 가야 되는데 약간의 실수로 인해 오늘은 만리성재 갈림길에서부터 산행을 하다보니 권이리 저수지를 지나 무점리에서 산행을 해야되는 부담이 따르게 되고 오늘따라 앞에선 동보님은 자기 아지트라서 그런지 덕동댐을 지나면서 추령고개까지는 길도 험한데 상당히 빠른 속도로 달려가고 우리가 탄 차의 마부님은 뒤따라가기에 바쁘다.
7시 44분 감포길을 버리고 와읍 골짜기로 들어서는데 맞은편에서 오는 차가 약간의 교통 방해를 한다. 계곡을 따라 경치를 구경하면서 가다보니 7시 56분 권이리 저수지에 도착하고 우리는 무점리(?)를 향해 계속 진행하는데 나중에 알게 된 일이지만 우리의 목표지점인 무점리는 콘크리트 포장도로를 따라 가다가 우측으로 난 비포장도로로 접어들어야 하는데 앞에선 동보님이 그냥 포장도로를 따라 가는 바람에 결국 무점리가 아닌 세바시 마을에 도착한 것이다.
8시 5분 세바시(무점리로 착각)마을에 도착하여 길을 찾아보지만 뭔가가 이상하다. 지도를 들여다보지만 지형과 일치하지를 않는 것 같다. 하는 수 없이 길 아닌 길을 뚫고 능선으로 올라서니 희미한 옛길이 나오고 우리는 이 길을 따라 올라가는데 능선 곳곳에 붉은 진달래가 아름다운 자태를 자랑하고 철탑이 있는 곳에 도착한 후 잠시 휴식 다시 철탑을 지나 계속 앞에 보이는 봉우리로 올라간다.
마침 한계령님의 무전이 왔는데 자기는 혼자서 계곡을 따라 올라가고 있다고 한다. 우리는 힘들게 봉우리에 올라섰지만 아무리 보아도 지난번 지나간 길이 아니다. 여기서 동보님은 길을 찾아다니고 계곡을 따라 올라간 한계령님은 벌써 시경계 마루금을 걷고 있다고 하면서 계속 교신을 해 보지만 서로의 위치를 확인할 수가 없다. 하는 수 없이 한계령님께 고함을 지르라고 하니 고함소리는 엉뚱한 곳에서 들려온다.
겨우 어렵게 시경계 능선을 확인한 후 우리는 내리막을 한참 내려서니 철탑 조금 못 미친 곳에서 시경계 능선을 만난다. 그런데 여기서 지난번 산행 지점인 만리성재 갈림길까지는 우측길을 따라 한참 더 갔다가 되돌아와야 한다. 모두들 베낭을 두고 만리성재를 향해 진행하니 9시 25분경 만리성재 갈림길에 도착하고 정확한 길을 찾기 위해 지난번 진행했던 방향으로 이동을 해 본다.
9시 30분 만리성재 갈림길에 다시 돌아와 오늘 시경계 산행을 출발하는데 지난번 산행시 비와 짙은 운무로 인해 선두가 잠시 착각을 하고 좋은 직진길로만 바로 진행하다보니 시경계를 놓쳐 버린 것 같다.
갈림길 바로 밑에는 성황당 요사채 건물 두 채가 보이고 9시 35분 갈림길에서 좌측이 아닌 직진길(약간의 오름길)을 지나 9시 40분 광산에 도착하니 작업을 중단한 채 포크레인 한 대가 멈추어 서 있다. 9시 43분 베낭을 두고 간 능선을 다시 올라서 잠시 휴식을 취한 후 철탑을 통과하니 9시 54분 우측으로 진전리 마을이 보이기 시작한다.
계속 마루금을 따르니 묘 2기가 있고 곧이어 10시 5분 뚜렷한 안부 사거리에 도착한다. 아마 이 사거리는 세바시와 진전리를 연결하는 능선 사거리 안부인 것 같다. 아마 한계령님은 좌측의 세바시 마을에서 이 길을 따라 올라온 것 같다.
10시 11분 오래된 묘 2기가 있으며 갈림길에서 오르막 직진길(좌측)로 진행하다가 10시 18분 전망 좋은 봉우리에 도착한다. 만리성재 갈림길에서 성황재 사이에서는 가장 전망이 좋은 봉우리이다.
잠깐 조망을 즐기다가 진행을 하니 10시 19분 좌측은 산사태 지역이 나오고 우측 계곡 진전리 마을 사이로 오천 가는 도로가 보이고 산 중턱 곳곳에는 무수한 철탑들이 세워져 있다. 10시 24분 큰 소나무 세 그루가 있는 묘를 지나니 10시 25분 좌측에 아담하게 잘 단장된 묘 2기가 보인다.
10시 26분 성황재 휴게소가 내려다보이는 곳을 통과하니 10시 28분 갈림길에서 우측의 좋은 길(내리막길)로 방향을 잡으니 묘 2기가 있고 곧이어 앞에 있는 낮은 봉우리로 내려서니 10시 36분 성황재 도착 직전에 철조망을 넘어서니 세바시 마을에서 동보님 차를 몰고 성황재까지 온 등대지기님과 먼저 온 한계령님이 우리를 따뜻이 맞이한다.
성황재에서 잠시 휴식을 취하고 기념촬영을 하려는데 포항서 오신 산꾼들의 무리가 봉고에서 많은 짐을 내리면서 오늘 시산제를 지낸다고 한다. 아마 시산제 때문에 많은 준비를 해 온 것 같다.
10시 44분 휴식을 마치고 다시 출발을 하니 철탑을 통과하게 되고 10시 50분 임도를 따르다 갈림길 우측 봉우리로 올라가는데 좌측으로 아담하게 꾸며진 묘가 있고 차가 다닐 수 있도록 길을 닦아 놓았다.
10시 53분 첫 봉우리에 올라서니 우측 계곡 사이 진전리 마을이 보이고 곳곳에 송전 철탑이 어지럽게 설치되어 있으며 11시 5분 첫 번째 헬기장(487m)에 도착하니 좌측으로 안동 마을이 보이고 뒤돌아보면 군부대 오름길 도로 때문에 보기 흉측하게 나 있고 우측으로는 진전리 마을이 한눈에 내려다 보이며 조망이 좋은 헬기장이다.
여기서 휴식을 취하면서 간식을 먹는데 공산님이 제사를 지내고 가지고 온 떡을 나누어 먹는데 맛이 일품이다. 다시 산행을 하기 위해 11시 11분 출발하니, 11시 16분 갈림길 우측 직진 능선길을 따르니 좌측으로 조금 우회를 한다.
11시 18분 두 번째 헬기장에 도착하게 되고 곧이어 11시 22분 세 번째 헬기장을 지나면서 계속된 내리막이 이어지고 11시 27분 안부 갈림길에서 직진을 한다. 소나무 숲길을 계속 따라 가는데 11시 33분 우측 계곡 시작점에는 산사태가 나 있으며 11시 38분 능선 안부에 도착하고 11시 40분 형체를 제대로 알 수 없는 묘를 지난다.
산행기를 적어면서 혼자 걷고 있는데 11시 45분 넘어진 고사목이 길가를 가로막고 있으며 11시 47분에서 50분 사이에는 포항방면에 연이은 산사태 지점을 통과하게 되고 11시 55분에는 경주 방면에도 산사태가 조금 나 있다.
12시 5분 줄기찬 오름짓 끝에 586봉에 올라서니 삼각점이 설치되어 있고 앞에는 오리온 목장이 우측 지나온 방향에는 진전리 양지마을과 진전 저수지가 보이고 여기서 점심식사를 하기로 한다.
오늘의 최고 요리는 뭐니뭐니 해도 장미 누님이 준비해온 도야지 수육이 우리의 입맛을 돋울 것 같다. 산봉우리에서 참쇠주에 도야지 수육이라... 그 누구라도 군침이 돌지 않을 사람이 있으리요. 주거니 받거니, 돌아가는 술잔에는 정이 넘쳐 흐르고, 모두들 진수성찬에 포식을 하게되니 40여분간에 걸친 식사시간이 언제 지나갔는지...
12시 48분 식사 자리를 갈무리 하고 다시 출발을 하는데 갑자기 동보님과 항아님이 선두로 치고 나간다. 평탄한 길이 한동안 이어지다가 잠시 오르막을 올라서니 620봉이며 13시 정각이다.
그런데 먼저 간 동보님은 보이질 않고 항아님만 기다리고 있다. 정상에는 오래된 묘가 있고 모두들 여기서 기념촬영을 하고 한동안 주위 조망을 구경하다가 출발하는데도 동보님이 나타나질 않는다.
오리온 목장쪽으로는 진행하는 사람이 보이질 않는데 그럼 어디로 갔단 말인가. 갑자기 동보님이 또 한건(?)을 한 것 같은 불길한 예감이 든다. 그 불길한 예감은 사실로 나타나고 만다.
혹시나 싶어 무전을 하니 계속해서 오르막을 오르고 있는데 목장은 전혀 보이질 않는다고 한다. 결국은 620봉에서 직진을 하여 추령쪽으로 가고 있는 것이 아닌가. 그 길은 추령을 거쳐 토함산으로 이어지는 형남기맥(?)인 것이다. 여기서 직진이 아닌 우측으로 꺾어서 오리온 목장쪽으로 진행을 해야 하는데, 오늘 또 알바를 하게 된 것이다.
호래이 산행대장님은 동보님이 올때까지 기다렸다 동행을 하기로 하고 우리는 오리온 목장을 향해 출발하니 좌측에는 황룡계곡과 토함산이 잘 보이며 오리온 목장과 동대산 등이 전면에 보인다. 한동안 소나무 숲 내리막 길을 내려오는데 13시 21분 참봉월성김공호제지묘, 배서인 능성구씨의 합장묘라는 비석이 보이고 계속된 내리막을 내려서면 13시 28분 임도 사거리에 도착하게 된다.
조금 전 동보님과 호래이 산행대장님이 만나서 우리 뒤를 따라오고 있다는 무전 연락이 오고 임도에서 직진하여 봉우리를 올라가다보면 봉우리 좌측으로 우회길이 있고 13시 35분 습지에는 물이 조금 흘러나오고 있다. 13시 40분 트래버스가 끝나면서 뒤따라오는 동보님을 만나게 된다.
이제 길은 북서쪽에서 북쪽으로 휘어지며 산불이 난 흔적이 간간히 보이고, 1분 후 다시 좌측으로 우회(북서쪽)되다가 13시 48분 오리온 목장에 도착하게 된다. 오리온 목장에서 우측 오천읍을 내려다 보면서 10여분간 휴식을 취한다.
다시 억새가 무성한 목장 오름길을 따라 올라가면 폐비닐 하우스가 나오고 624봉에 도착하면 좌측으로는 보문호와 현대호텔, 소금강산 등이 보이며 안강의 일부 지역과 오천읍도 보인다.
624봉을 출발하여 내리막길을 돌아 내려가면 폐막사 갈림길에는 2시 25분 도착하니 길은 남동에서 북동으로 바뀌어 진행하게 되고 조금 더 진행하는데 4-5명의 무리가 사냥개를 데리고 사냥을 나왔다가 나무 그늘 밑에서 휴식을 취하고 있다. 마침 저 사나운 사냥개를 바라보면서 얼핏 떠오르는 단어가 하나 있다.
“兎死狗烹”
본래 춘추시대 월나라의 재상 범려가 한 말로 전해지는 토사구팽은 그 후 격언으로 전해오다가 한신이 형장의 이슬로 사라질 때 남긴 유명한 이야기로 초의 항우를 무찌르고 천하를 통일 한 유방은 한나라에서 가장 공로가 많은 한신을 처음에는 공로를 인정하여 초왕의 자리에 봉한다.
하지만 유방의 입장에서는 항우가 사라진 뒤에 한군의 총사령관이었던 한신의 힘이 두려워지고 한신의 힘이 황제를 능가할 정도라 유방은 결국 한신을 제거하려는 음모를 꾸미기 시작하며 그 때 마침 항우의 부하이면서 유방을 괴롭혔던 종리매라는 장수가 옛 친구였던 한신에게 의탁하고 있었는데, 이를 빌미로 유방은 한신에게 종리매를 체포해서 데려오라고 명령을 내리게 된다.
그후 초왕의 자리에서 회음의 제후로 강등을 시키자 고민을 하던 한신은 결국 부하들의 만류를 뿌리치고 의심스러우면서도 자결한 종리매의 머리를 들고 유방에게 갔는데, 유방은 곧바로 한신을 포박하여 처형을 시키게 되는데 바로 이때 한신은 자신의 심정을 이렇게 말합니다.
"과연 사람의 말과 같구나. 교활한 토끼가 죽으니 좋은 개는 삶겨지고, 높이 날던 새가 사라지니 좋은 활도 저장되고, 적국이 깨어지니 지략있는 신하도 죽는구나! 천하가 이미 정해졌으니 나도 진실로 삶겨짐이 당연하구나! "
아마 저 사냥개도 언젠가는 한신의 신세가 될 것을 생각하니... 14시 36분 쓰러진 움막에 도착하여보니 이곳 목장도 폐쇄된 지가 꽤 오래되었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을 것 같다. 움막에서 우회전하여 목장길을 따라가니 14시 49분 목장이 끝나고 근처 작은 봉우리에는 쌍분의 묘지가 보인다.
오솔길을 따라 한동안 평탄하게 진행하니 구상나무 군락이 계속 이어지고 능선에 올라서니 15시 4분 잠시 휴식을 취하면서 간식을 나누어 먹는다. 여기서 선발대와 후발대로 나누어 산행을 하기로 한다. 선발대는 성황재에 주차해 놓은 차를 가지고 와야하기 때문에 동보님, 한계령님, 항아님, 네모님 네분이 먼저 출발을 하고 다른 분들은 뒤에서 쉬엄쉬엄 따라가기로 한다.
15시 21분 계곡을 잠시 따라가다 평탄한 오름길을 올라서니 15시 27분 양쪽으로 급경사 소나무 지대가 나오고 안부를 지나 임도를 향해 가고 있는데 15시 30분 노루라는 놈이 인기척을 듣고 놀라 달아난다. 조금전 사냥하는 사람들을 만났다면 저 노루의 신세도...
곧이어 임도에 도착하게 된다. 임도를 지나 다시 500고지의 봉우리를 오르다 만난 복수초의 아름다움에 모두들 한동안 쳐다보다 급경사 오르막길을 올라서니 15시 42분 봉우리 정상에는 갈림길이 나오고 우측길로 접어들면 북쪽으로 진행을 하게 되고 좌측으로 서쪽 계곡 건너에는 목장이 보이고 15시 51분 갈림길 직진 봉우리 정상에서는 까마귀가 흉측하게 울고 있으며 이곳에도 산불 흔적이 보인다.
시경계 길은 좌측 내리막길로 이어지며 15시 55분 계곡 사이로 오천읍과 동해바다가 한눈에 들어오고 15시 57분 안부에 도착하니 우측 계곡쪽으로 하산길이 있지만 시경계는 직진 임도길을 따라 올라야 한다. 중간 중간 콘크리트로 만든 경계 표지 말뚝이 세워져 있으며 좌측으로는 덕동댐이 보인다.
선발대는 16시 3분경 시루봉 정상에 도착했다는 연락이 오고 곧이어 앙드레정 고문님이 길이 헷갈린다며 연락이 왔다. 16시 6분 임도를 따르다가 임도를 버리고 우측 봉우리로 올라가니 16시 10분, 10여분간 휴식을 취하고 있는데 고문님이 올라오신다.
길을 잘못알고 임도를 계속따라가다가 이상해서 돌아왔다고 하신다. 16시 25분 평지에 묘1기(503m)가 나오고 묘 우측에는 오천으로 내려가는 하산길이 있다. 곧이어 갈림길이 나오고 우측으로 진행을 하니 시루봉이 앞에 보이고 길은 우측으로 트래버스 하게 되어 있지만 우리는 바로 시루봉을 향해 치고 올라가니, 16시 35분 드디어 시루봉 정상에 도착한 것이다.
정상에는 실제 높이가 525m이지만 강원산업에서 세운 스테인레스 정상비에는 503.4m로 표시되어 있고 삼각점이 설치되어 있다. 북쪽으로는 강동의 벽산아파트가 보이고 안개댐도 보이며 우측으로는 오천읍이 내려다 보인다.
시루봉에서 내려서면 사거리에서 좌측길로 진행하게 되며 17시 2분 웅덩이(돌리네? 현상)가 나오고 묘 1기가 있다. 곧이어 묘 3기가 나오고 안부에 도착하니 17시 9분 좌측에는 리기다소나무가 군락을 이루고 있으며 17시 10분 평해한씨 묘 1기와 김해김씨 묘 2기가 나오고 계속된 오름길 이후 봉우리 우측 소나무 숲길로 우회하니 17시 16분 삼거리 갈림길에 도착한다. 이것으로 7시간 35분간의 경주시 경계 종주 2구간 산행을 마치는 순간이다.
벌써 선발대인 동보님은 차를 가질러 가고 있다고 하며 한계령님과 항아님은 후발대와 합류하여 왼쪽길로 하산을 하니 오늘 시경계 산행은 여기서 끝을 맺게 되고 다음 구간은 오른쪽 길로 계속 진행하면 된다.
임도를 따라 내려오니 산중턱에 네모님 혼자서 기다리고 있다가 합류를 하고 사라 마을에서 차가 오기를 기다리지만 많은 시간이 걸릴 것 같아 청수골을 따라 계속 내려오니 운곡서원에 도착하게 된다. 이곳 운곡서원은 우리 시조 할아버지를 비롯하여 두분의 할아버지를 더 배향하고 있는 곳이다.
운곡서원(雲谷書院)
경주시 강동면 왕신저수지 동쪽 청수골에 위치한 운곡서원은 고려 공신 안동 권씨의 시조 태사 권행, 죽림 권산해, 귀봉 권덕린을 제향하는 곳이다. 조선 정조 9년(1785) 후손들이 이곳에 추원사를 세우고 권산해■권덕린을 배향해 오다가 고종5년(1868) 서원 철폐령에 의해 헐리었다.
그 뒤 광무 7년(1903)에 단을 만들어 제향하다가 1976년 신라 밀곡사터로 추정되는 곳에 안동권씨 문중에서 중건하였다. 본당 (정면5칸, 홑처마 팔작지붕)과 경덕사(정면5칸, 측면2칸, 겹처마, 맛배지붕)가 있다.
권행은 본래 신라의 김씨로 고창군수로 있으면서 신라의 국운이 다함을 보고, 태조 왕건에게 귀의한 뒤 견훤을 격파하고 고려를 세우는데 큰 공을 세웠다. 태조가 '권행은 기미를 잘 알아 권도를 썼으니 권(權)에 능하다.' 하며, 권씨로 성을 내리고 태사벼슬을 제수하니, 곧 안동 권씨의 시조가 되었다.
권산해는 권행의 후손으로 종부사첨정으로 있다가 단종이 귀양가자 벼슬에서 물러났고, 그 뒤 세조가 여러 번 불렀으나 나아가지 아니하였다. 성삼문 등이 단종 복위를 꾀하다가 탄로가 나 잡히자 투신 자살하였다. 정조13년(1789) 관작이 복위되고, 같은 왕 15년 이조참판에 추증되고, 정려가 내려졌다. 영월 장릉의 충신단과 동학사의 숙모전에 배향되었다.
권덕린은 권행의 후손으로 회재 이언적의 문하에서 수업하고, 명종 8년(1553) 25세에 문과에 급제하였다. 예조정랑, 병조정랑 등을 역임하였고, 이언적이 유배지에서 죽자 그를 위해 옥산서원을 창건하였다. 선조6년(1573) 45세에 돌아가자 운천서원에 제향하였는데, 뒤에 이곳으로 옮겨 배향하고 있다.
그리고 운곡서원 앞에 있는 은행나무는 죽림 권산해의 후손인 권종락이, 단종 때의 권산해의 억울함을 달래주기 위해, 서울을 왕래할 때 순흥에 있는 큰 은행나무의 가지를 꺽어다 심은 것이라 전하며 이곳 부근에는 와편이 다수 산재하며, 근간에 '密谷寺'名 기와편이 수습된 바 있어 신라시대의 '밀곡사'로 추정된다. 1976년 권씨문중에서 이곳에 운곡서원을 복원하면서 절터의 일부석재를 서원축대 등에 이용하였다.
벌써 주위는 땅거미가 내리기 시작하고 운곡서원 주차장에서 한참을 기다리니 어둠을 뚫고 우리를 태울 두 대의 차량이 불을 밝힌채 힘차게 달려오니 모두들 박수로 환영하고 차에 올라타니 약 12시간에 걸친 시경계 2구간 산행은 이것으로 종지부를 찍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