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0년 1월 초, <수퍼스타>를 연습하는 중에서도 우리는 장 아누이의 <도적들의 무도회>를 공연했다. 추송웅․윤복희에다, 추송웅의 딸 추상미가 데뷔(?)했다. <수퍼스타>는 국립극장 대극장에서 2월 22-28일과 3월 5-9일 올려졌고, 3월 15-17일 대구시민회관에서 선보였다. 4월 18-21일 세종 대극장에서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 제2부가 공연되었다. 여기까지가 전회(공연문화저널 제1호, 2001.10.)에 수록되었다. |
1980년의 활동을 요약하면 <도적들의 무도회> 5일, <수퍼스타> 64일,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제2부) 4일, <그대의 말일뿐>1) 16일, 연구생들의 웤샵 공연인 <엄마의 모습>2) 1일, 합계 91일이었다.
79년 8월에 나는 미국 하와이에서 돌아와 있었다.
나는 이 해 봄, Fulbright Foundation으로부터 Scholarship을 받았다. 하와이 이민을 소재로 한 드라마를 쓰기 위해서 궁리를 하던 중, 우연히 이런 장학금이 있다고 해서 응모하였는데, 기쁘게도 행운을 얻었다. 5월 말 호놀룰루에 가서 하와이대학 Center for Korean Studies의 서대숙 박사를 만났다. 이 분의 지도로 자료를 수집하기로 하였다. 그러나 내게는 또 하나의 일거리가 있었다. 곧 ITI 소피아총회(불가리아)에 참가하는 일이었다.
당시로서 공산권 국가에 들어가는 일은 쉽지 않았다. 우선 그런 나라에서는 한국에 대해 고운 시선을 보내지 않았다. 형식상으로, 어느 국가도 자국에서 열리는 총회에 회원국 대표를 거절할 수는 없었다. 우리는 기회 있을 때마다 ‘한국의 참석을 거부하지 말 것’을 환기해 왔다. 나는 scholarship을 관리하는 USIEA의 허락을 받아, 6월 초 파리로 갔다. 회의는 6월 11-17일이었으나 파리에서 Visa를 받아야했다. 동도하는 차범석, 정병호, 김문환 씨를 파리에서 만났다. 불가리아 대사관을 두 세 번 들락거렸다. 겨우 비자를 받았다.
세 시간을 비행하여, Air France는 우리를 Sophia 공항에 내려놓았다. 트랩을 내려오니 한국대표단을 담당하는 요원이 우리를 맞았다. 요원 두 사람과 통역자인 마담 Ellena Giorva. 한 사람이 패스포트와 항공권을 달래 가지고 우리를 떠났고, 우리는 나머지 사람의 뒤를 따라, 입국수속도 없이 공항 밖으로 나왔다. 승용차 2대에 우리들은 분승했다. Hotel Moscow에 도착, 방에 들어가 보니 이미 짐이 와있었다. 회의기간 1주일 내내, 보혼지 감신지 몰랐으나, 이들은 우리 옆방에서 기거하면서 우리들과 함께 살았다. 일반 참석자들은 버스를 타고 이동을 하였으나 우리들만은 특별히 승용차 2대로 움직였다.
6월 16일 아침 마지막 Session, 나는 한국에서 차기 「제3세계 연극제」 개최를 제의했다. 놀라웁게도, 만장일치로 통과되었다. 한국의 국제연극제는 이듬해에 열린 이 연극제를 기점으로 한다. 한국 ITI는 물론 한국연극계가 외국인의 주목을 받는 첫 기회였고 또한 한국연극인의 외국 연극에 대한 본격적인 관심을 가지게 되는 계기도 이것이었다.
다시 하와이로 돌아갔다. 하와이의 여름, 우리로 치면 여름의 여름일 듯 싶으나, 실은 그렇지도 않다. 햇볕이 더 따가운 것은 사실이지만 매우 건조해서, 그늘로 들어가면 시원하기 그지없다. 하와이 초기 이민에 대한 조사와 답사를 계속했다. 그러다가 나는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 제2부 공연이 걸렸다. 할 수 없이 8월 초순 귀국했다. 그러나 세종문화회관 사정으로 <바람...>공연은 연기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되었다.
여기서 <수퍼스타>3)의 준비과정에 대해서 설명할 필요를 느낀다.
79년 10월 26일 박 대통령 시해사건이 일어났다. <바람...>이 연기된 것은 차라리 다행인지도 몰랐다.
10월 말이나 11월 초의 일이었을 것이다. 나와 표재순은, 그 동안 우리 극단 작업에 적극적으로 참여해주신 최창권 선생을 찾아가 뵈었다. 편곡을 부탁하기 위해서였다. 그때까지 최 선생은 <백설공주>, <프란다스의 개> 등을 비롯, 여러 작품에 아름다운 곡을 써주셨다. 충분한 사례도 드리지 못하였으나, 최 선생은 돈에 구애받지 않으시고 정말 정력적으로 도와주셨음을 지금까지도 기억하고, 감사 드리고 있다. 그런데 이 <수퍼스타>에 대해서는 최 선생이 의외로 까다로웠다. 아마도 한 달은 걸렸을 것이라고 생각되는데, 결론은, 최 선생은 이번 작품에 참여치 않는 것으로 되고 말았다.
윤복희 씨의 발의로 우리들은 김도향 씨를 만나 협조를 구했다.
본격 뮤지컬의 도전이었으나, 나는 실로 막막하였다. 아는 것이 없었다. 가지고 있는 자료란 디스크 한 장과 거기에 붙어있는 가사뿐이었다.
김도향 씨는 유다 역을 맡으면서, (적자사업이 되고 말았지만) <수퍼스타> 한국판의 음반 제작/판매권을 요구하였고, 편곡자로서 정성조(현 KBS 관현악단 지휘자)씨를 추천하였다. 씨는 당시 로얄호텔에서 자신의 11인조 악단을 지휘하고 있었다.
정 씨를 만났다. 이장호 감독의 야구 영화 주제곡으로 한창 날리던 그였으나 그지없이 나이브하고 소탈한 그는 즉각 편곡을 수락했고, 자신의 밴드가 반주를 맡겠다고 하였다. 그것이 12월 초의 일이었다.
나는 열심히 가사 번역을 하였다. 처음에는 이해되지 않던 곡이 번역작업을 하면서 수백번 듣는 동안 차츰 가슴으로 전달되어 오기 시작하였다. 처음 합창곡, 다음에 독창곡, 전체반주는 마지막 순서였다.
합창의 비중이 큰 <수퍼스타>였다. 합창지휘를 어떤 분에게 부탁드려야 하나... 누구의 소개였는지는 잊어버렸다. 종교(鐘橋)교회의 합창지휘자 김순세(金順世)장로를 만났다. 이분은, 과거에 육군군악대장을 역임한 종교음악가였다. 클래식과 현대의 음악에도 조예가 깊다는 것이 강점이었다.
‘예수 전을 하겠습니다. 도와주십쇼.’
우리는 진지하였다. 그리고 이 모든 일의 일등공신은 윤복희 씨였다. 예수 역과 헤롯왕 역에 연예인교회의 이종용 씨와 곽규석(후라이보이)장로를 섭외 하였다.
79년 11월 18일, 현대극장 뮤지컬 연기자 오디션을 실시하였다.
곽은태, 박상원, 김태식, 윤정희, 정의령, 장순욱, 이강석, 안성희, 최혜진, 양영희, 오양근, 허두례, 노진봉, 최재정, 이영훈, 임종규, 임현모, 박민철, 조철규, 박영태, 정현찬, 황혜숙, 김동호. 이상 23명,
코러스 멤버 거의가 크리스천이었는데, 이것은 김순세 장로가 각 교회의 동료/후배 지휘자들에게 출연을 종용하도록 부탁하였기 때문이었다.
12월 11일 화요일 저녁 7시, <수퍼스타>의 첫 합창연습이 시작되었다. 새로 이사 간 원효로 연습실에서였다.
안무 하정애(현 부산여대 무용학과 교수, 현대극장 초대 무용감독) 씨는 이미 11월 19일부터 무용훈련에 돌입해 있었다.
눈코 뜰 새 없는 일정의 연속이었다. 미국농아극단의 초청공연이 12월 6-8일로 예정되어 있었고, 8, 9일에는 <멀고 긴 터널>의 청주공연, 80년 1월 초에는 <도적들의 무도회>가 기다리고 있었다. 단원들은 김상렬 연출로, 틈틈이, 번갈아 가며 2개의 작품을 연습해야 했고, 기획팀은 <농아>, <터널>, <도적>에다 <수퍼>까지 겹쳐 있었다. 바쁘기는 11월도 마찬가지였다. 17일에는 제6기 아카데미생 웤샵공연 <종이 연>(장소현 원작/권재우 지도)이 있었고, 26-30일에는 일본 아동극 연출가 세키야 유키오(關矢幸雄) 씨의 아동극 Workshop이 있었다.
연습실은 아침 10시부터 밤 11시까지 붐비었고 단원들은 라면으로 끼니를 때울 만큼, 밥 먹으러 나갈 틈조차 없었다. 유난히도 추웠던 이 겨울은 이렇게 뜨겁게 시작되고 있었다.
<도적들의 무도회>는 기대했던 성과를 거두지는 못했다. 당시의 여건으로서는 역시 기획자체가 무리였던 것 같았다. 나는 정월공연을 몇 번 시도하였는데, 거의 성공한 예가 없었다. 1972년 1월 실험극장 때, <씨라노 드 벨쥬락>을 시도하였었다. 극장이 없던 시절이라 비 시즌임을 알면서도 명동 국립극장에서 공연을 강행했었다. 연 4회 정도는 공연을 해야하지 않겠느냐--하고 덤벼보았지만 무리였던 것이다. 78년 1월, <나비처럼 자유롭게>를 시도했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추운 새벽 거리를 풀 통을 들고 포스터를 붙이는 등 젊은 단원들이 애썼지만 소용없었다. 이번에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안타까워할 시간이 없었다. JCS의 대작이 한달 앞에 다가와 있었다. 크리스천 관객을 동원하기로 우리들은 계획을 잡았다. 단원들이 조를 짜서 서울의 주요 교회를 방문하였다. 연예인교회 하영조 목사, 안동교회의 유경재 목사... 연줄을 찾아 사방을 돌아다녔지만 교회는 좀처럼 움직이지 않았다. 나중의 일이지만, JCS의 막이 오른 후, 극장에 오신 강원용 목사께 이 말씀을 드렸다.
‘당연하지. 목사들이 왜 극장구경 가라고 하겠나? 극장 갈 돈이 있으면 헌금이나 하라고 할 것인데. 더구나 예수 찬양하는 작품 아냐? 예수를 찬양하는 건 당연한 일 아니야? 예수 죽일 놈이다--하는 공연을 한다면 또 모르지. 뭐, 예수를 욕해? 그러면 야단나지.’ 또, 미국에 가서 JCS를 본 한 발 앞선, 대부분 목사들은 이 작품의 모티브를 좋지 않게 평가하였다. 예수님이 수퍼스타라고? 이런 불경스런 일이 있을 수나 있단 말인가... 미국에서도 JCS 공연중지 피켓을 들고 많은 크리스천들이 극장 앞에서 데모를 하였다. 한국에서도 곧 반대시위가 있을 것이라고 하는 소문이 나돌았다.
그렇다면 큰일이다.
우리들은 김준곤 목사가 주도하는 정동의 대학생선교본부를 찾아갔다. 작품의 진의를 알리고 싶으니, 이곳 강당에서 Recital을 하게 해주십시오--하고 간청하였다. 그리하여 2월 15일, 주요 뮤직 넘버를 뽑아 시연회를 가졌다. 이 행사는 최소한 반 JCS에 대한 완충역할은 했다고 생각된다.
1월부터 매주 목요일 저녁, 우리들은 주요 교회의 목사를 초청하여 말씀을 들었다. 은근히, 교인들에게 추천해 주십쇼 하는 뜻도 있었지만, 관계자의 근 80%가 크리스천인지라, 참가자들을 격려할 필요가 있었다. 연습이 시작될 때, 연습이 끝날 때, 지휘자인 김순세 장로는 기도를 하였다.
개막시간이 왔다. 모두가 극도로 긴장하고 있었다. 밴드와는 1주일간 입을 맞췄다. 관계자 전원이 손에 손을 잡고 무대에 둥그렇게 모여 섰다. 하영조 목사가 기도해주셨다. 사람들이 웃겠지만, 나는 뜨거운 눈물을 흘렸다. 우리들의 열성과 성의가 부디 아름다운 무대창조로 이어지기를 진심으로 빌었다.
개막공연이 끝나고 평안도 족발 집에 모였을 때, 추송웅이 한마디했다.
‘와 자꾸 기도만 하능교, 난 원불교 신자락고!.’
여러 가지 문제가 드러났지만, 가장 큰 문제는 금관악기와 사람 목소리의 언밸런스였다. 가사가 들리지 않았던 것이다. 무대 위에 8개의 마이크를 매어 달았지만 소용없었다. 그 시절만 해도 우리나라에는 PA-System이 보급되어 있지 않았다. 정성조 밴드는 전원 금관악기였다. (정성조가 한 두 군데서 Clarinet를 불기는 하였던가?) 강렬한 Rock bit는 1천 5백 석의 국립극장을 빵빵 울렸지만, 덕분에! 노래의 가사는 전혀 들리지 않았다. 공연이 끝나자, 관객들마다 귀를 어루만졌다.
관객은 들었다. 81년 8월 숭의음악당에서의 앙코르공연까지 4천명이 모자라는 10만 명이 이것을 보았다. 청소년극장 프로그램은 81년 10월 중순까지 근 20만 명의 학생들을 동원하였다. 표재순의 ‘두고 보쇼, 터질 거요’ 하던 말이 생각났다.
첫 번째 <수퍼스타>의 출연자들 가운데는 장차 뮤지컬을 하겠다고 마음먹은 사람은 드물었다. 교회 성가대 출신들로서, 예수전(傳)에 출연하는 것으로 그들은 만족하였다. 이 공연을 끌고 가기 위해서는 뮤지컬 지망생을 고정출연자로 확보하는 일이 시급했다. 그래서 제1기 뮤지컬 연기자를 모집하였다. 출연자 중의 겨우 5명이 여기에 응했다. 주현상, 장운혜, 주혜란, 황정임, 최경근이었다.
그래서 5월부터 시작된 청소년극장 무대에는 오리지널 프로덕션에 출연했던 사람과 우리 연구생 출신 배우들이 반반 섞여 막을 올렸다. HADA(현대 연극 아카데미=Hyundai Academy for Dramatic Arts)는 정규 커리큘럼에 현대무용이 있었으며, 우리는 이 코스에 특별한 비중을 두고 있었으므로, 새 보충자들은 오리지널 멤버 못잖은 춤 실력을 갖추고 있었다. 나는 안무자에게, 연극인을 위한 1시간 짜리 몸풀기 연습 프로그램을 부탁하였었다. 우리들은 초중고 시절, 운동장에서 국민체조를 하였것다. 현대는, 뮤지컬공연이 아니더라도, 반드시 무용으로 몸을 풀고 연습에 들어갔다. 공연 1시간 전에 출연자 전체가 무대에 모여 몸을 풀었다. 나이 많은 출연자라고 해서 예외가 없었고, 또 분위기가 있는지라, 게스트 출연자라도 이 룰을 따랐다. 입단 3, 4년이 되는 단원들은 누구라도 이 몸풀기를 리드할 수 있었다. 그것을 바라보는 나는 언제나 느긋하였고, 출연자들은 몸을 움직이면서 차분하게 공연준비를 할 수 있었다.
4월의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 제2부와 10월 대한민국연극제 출품작 <그대의 말일뿐> 기간을 빼고는 <수퍼스타>로 날이 밝고, 어두웠다.
80년 8월 29-31일, 우리는 세종대강당에서 <수퍼스타> 네 번째의 막을 올렸는데, 3일간 5회 공연에 19,625명의 관객이 몰렸다. 세종 대강당은 3천 9백 석 가량인데 이것은 매회 평균 3,925석으로, 결국 매진에다가 서서 보는 관객이 있었다는 뜻이다. 9월 초하루, 결산을 하고 나니, 우리에게 한푼의 빚도 남아있지 않음을 알았다. 그리고 이것은 나의 유일무이한 경험이다. 빚이 없다는 것 말이다. 나는 아직 갚을 빚이 있겠지 하면서, 계속, 잊어버렸을지도 모르는 빚을 찾았다. 정말... 없었다.
손에는 1천2백 여 만원이 남아 있었다. 그렇다. 연습장을 마련하자. 공연장도.
새 주소, 서대문구 대현동 90-60. 새 전화번호, 362-6740.
추석 다음 날인 1980년 9월 24일에 성미 급한 우리들은 입주를 완료하였다.
신촌 이대 입구에 자리잡은 이 장소는 60 여 평 짜리 두 층에 각각 연습실과 극장을 두었다. 20여 평의 사무실, 40 여 평의 연습실이 3층에 있었고, 4층에도 역시 20 여 평 넓이의 소품/의상 창고와, 40여 평의 극장이 마련되었다. 극장, 이름하여 「현대 101 스튜디오」, 이곳에 100명만은 좀 무엇하니 한 사람이 더 들어오게 하자는 뜻이었다.
9월 26일에는 세종홀에서 「청소년극장 협의회」의 모임을 가졌다. 참석자는 시내 주요 고등학교 교장 선생님 열 세 분, 엄규백, 홍소자, 정우현, 김명숙, 박지수, 김정애, 최옥려, 정광순, 남정진, 이철경, 최태호, 정희경, 김낙승, 그리고 이 분야에 후원을 해주시던 이진순, 전광용, 한운사, 최종률, 여러분이었다.
12월 14일, 이듬해의 Sound of Music 공연을 앞두고 제2기 뮤지컬 연기자를 공모하였다. 이혜영, 이경희, 조성희, 김미혜, 서인옥, 전정숙, 이선희, 최인선, 김재현, 이명호, 이정란, 장보규, 유종기, 이상 13명.
12월 23-26일, 이 해 마지막 <수퍼스타>.
80년 11월 초에 진흥원 안에 「제5회 제3세계연극제 및 회의」4) 사무국이 설치되었다. 진흥원장 송지영 선생이 전두환 대통령에게 건의한 까닭에 이 연극제는 성사되었으며, 이래서 명년 3월에 개최한다는 골격이 짜여졌다.
대회장에 여석기 ITI 한국본부 위원장, 집행위원장에 김정옥 한국연극협회 이사장, 나는 ITI 부위원장으로서, 사무총장에 선임되었다.
12월 1일자로 ITI 모든 회원국에 초청장이 발송되었다. 그러나 두 나라에서 문제가 되었다. 중국은 우리 초청장을 묵살하였고, 소련은 우리 문서를 국교가 없다는 이유로 반송한 것이었다.
짧은 준비기간이었고 초청조건도 빈약하였다. 개막 열흘쯤 전에야 그런 대로, 그리 볼 상 사납지 않게 참가작품이 정해졌다.5) 또 유명한 연극인이 대거 참가하였다.
폴란드 평론가로서 미국 SUNY 교수이며, 저서 「셰익스피어, 우리의 동시대인」으로 유명한 Jan Kott, THEATER, An Introduction의 저자 (김윤철교수가 ꡔ연극개론ꡕ이란 이름으로 번역하였음) Oscar Brocket교수, 하와이대학의 동양연극학자 James Brandon교수, 이란의 연극학자 Chelkowski, 폴란드의 극작가이며 Jerzy Sito(극작분과위원장), 유고슬라비아의 연극평론가 Peter Salem (당시 세계연극평론가협회=AICT 회장), 남미 콜럼비아 대학의 석학 Buenaventura교수, 스리 랑카의 Gunawardana교수, 프랑스 렌느 문화원장 Chérif Khaznadar(현재 프랑스 세계문화의 집 원장), 영국 ITI 위원장 Michel Julian(작고), LaMama의 Ellen Stewart여사, Filipino American PETAL 대표 Cecil Guidote여사 등등, 실로 기대하지 않았던 세계적인 연극인-교수들이었다.
이 연극제의 반응은 즉각 나타났다. 이 해 5월 말-6월 초에 열린 ITI 마드리드 총회에서, 마지막 한 자리를 놓고 3차의 투표를 거쳐 간신히 라고는 하지만, 한국은 집행위원국으로 선출되었던 것이다. 이때의 대표단이 김정옥, 유덕형, 이동진(시인-작가, 외교관으로 당시 로마대사관 근무), 김문환, 김의경이었다.
새해 벽두, 「101 스튜디오」에서 제8기 아카데미 웤샵공연 2편6)의 막이 올려졌다. 1월 13일 저녁에는 후원회원을 위한 특별공연으로 <등신과 머저리>가 상연되었다. 후원회는 전년도에 창립되었는데, 초대 후원회장에는 극작가 한운사 선생, 발기위원으로 이헌조(후에 LG 회장 역임), 김경동(서울대 교수, 사회학), 임종철(서울대 교수, 경제학), 정희경(당시 이화여고 교장) 등 여러분이었다.
3월 16-29일, 셰익스피어 걸작시리즈 (1) <햄릿>7) 공연, 역시 「101 스튜디오」에서.
「제1회 직장인 연극서클」이 조직된 것은 역시 이 해 초.
‘여유 없는 회사 생활을 하면서 쌓인 스트레스를 연극으로 풀자’ 이러한 모토로 직장인 연극서클을 만들었다. 참가자들 가운데는 옛날에 연극을 해보았던 사람들, 관심이 있었어도 연극을 접해 볼 수 없었던 사람들, 여러 부류의 30대 회사원들이 모여 연극작업을 해 보는 것이다. 학교 교사, 은행원, 모 회사 선전부 직원, 출판사 사원 등 그야말로 다양한 직업들이 모였다. 김호태 지도로 첫 작품은 <엄마의 모습>8)이었다.
이들의 열성은 보통이 아니었다. 저녁 7시면 모여서 통행금지 시간이 다 되어서야 연습을 끝냈다. 직장인이라 주머니 사정은 괜찮아서, 자신들이 포스터를 만들고 프로그램을 제작했다. 표도 팔았다. 1기생은, 최근에 알았지만, 지금도 가끔 모인고 있다는 것이다. 박정순은 이것이 계기가 되어 은행을 때려치우고 이제는 직업배우가 되어있다. 2회의 한보경도 같은 케이스로, 공연이 끝나자 연구생으로 들어왔으며, 몇 년 단원생활을 하다가, 김상렬과 결혼하였다. 이 서클은 상당기간 존속했으나, 차츰 호응이 시들해져서 중도에 해체되었다.
제3세계연극제가 진행되는 동안 한편으로 뮤지컬 <사운드 오브 뮤직>9)의 연습이 시작되고 있었다.
윤복희 씨의 연기력은 더욱 발전하였고, 이 작품은 아주 아름답게 형상화되었다. 1막 끝의 김영자 수녀원장의 솔로는 완벽하여 보는 이들의 심금을 울렸으며, 특히 교회 정면의 스테인드 글래스 그려진 예수 상이 장엄하게 조명되면서, 웨딩 드레스의 윤복희와 흰 해군제복 차림의 유인촌이 무대중앙을 가로지르며 퇴장하는 모습은 압권이었다. 객석에서는 이 장면에서 우뢰와 같은 박수가 터져 나오곤 하였다.
그러나 흥행성적은 말이 아니었다. 그 때 돈으로 3천만 원의 적자를 보았던 것이다. 다만 우리는 마리아 언더스터디를 맡았던 이혜영을 건졌다. 이혜영은 뒤에 이어진 청소년극장 공연10)에서 배역을 아주 잘 소화해 내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나는 ITI 마드리드 총회 참석을 위해 출국하고 있었다. 비행기에 올라서 내내 빚 걱정을 하였고, 이것을 아내에게 맡기고 떠나는 나는 정말 무책임하다고 느꼈다. 다만 앞에서 잠깐 언급했지만, 마드리드 총회에서 한국이 집행위원국으로 선출되었다는 기쁨이 내게 커다란 위안이었다.
그 때는 외국 나들이가 쉽지 않았다. 그래서 한번 나가면 대개 세계일주를 해서 미국을 들렀다. 요즘보다 항공료도 비싸서, 일주 요금이 1백80만 원 정도의 대금이 들었다. 이번에도 뉴욕 행이었다. 그곳에서 유학중인 조병진(현 청주대 연극학과 교수), 최치림(현 중앙대 연극학과 교수), 그리고 진흥원의 지원으로 그곳에서 수학 중이던 김상렬을 만났다. 조병진, 김상렬과 함께 <에비타>를 보았다. 그 자리에서 나는 결심하였다.
‘야, 금년 말 작품은 <에비타>야. 상렬 씨가 연출 맡아 줘.’
이 말을 들은 상렬의 기뻐하던 표정을 잊을 수가 없다. 내가 귀국한 후 상렬은 <에비타>를 네 번이나 보았고, 실황 음악 테이프를 사서는 이어폰을 귀에 꽂고 살았다 했다.
내가 서울에 없는 동안에도 제2기 직장인연극서클은 이어졌다. 양재성 지도로 <철부지들Fantastiks>11)가 올려졌다. 그리고 내가 돌아왔을 때는 권재우 지도로 제9기 HADA 웤샵이 준비중이었다. 구히서 번역의 <맹물로 움직이는 기관차>12)로서, David Mammet의 한국 소개 첫 케이스였다.
9월 1일자로 한국일보․일간스포츠사 후원 <에비타> 공연이 결정되었다. 이 날은 극단의 창단일이다. 우리는 먹자골목의 한 집에서 축배를 들었다. 그 전전 날, <수퍼스타>가 숭의음악당에서 3일 5회의 공연을 가졌다. 김상렬은 아직도 뉴욕에 있었다. 그 다음 날, 제3기 뮤지컬 연구생 겸 <에비타> 출연자 오디션이 있었다. 설도윤, 조성희, 김명희, 김유권, 한창호, 오덕인, 맹희숙, 박규천, 이상근, 이원순, 이희정, 양영화 등 12명.
9월 3-5일, 제3기 직장인 연극서클의 웤샵공연은 이영주 지도의 <그리고 리어든 양은 조금씩 마시기 시작했다>였다.
10월 21-11월 4일, 우리는 불행한 공연을 했다. <결혼중매>13)를 드라마센타에서 한 공연이었다. ‘불행’하다는 것은 물론 나의 편견일는지 모른다. 연습 첫날, 연출자는 1964년에 그가 국립극단에서 연출했던 때의 대본을 들고 왔다. 15년 전의, 누우렇게 낡고, 언젠가 모르게 부서져버릴는지 모를 그 대본은 왕년에 자신의 정열을 쏟아 부었던, 그에게는 말할 수 없이 귀중한 자료였을 것이다. 그러나, 15년 전의 대본을 가지고 연출을 시작하다니! 이 첫날의 기억은 나를 위축시켰다. 예술가는 과거로 돌아가지 않는다는 패기와 탐구정신은 어디로 갔단 말인가?
첫 공연을 앞두고 21일 아침부터 무대연습이 시작되었다. 몰로이 부인이 나오는 첫 장면. 그는 이 간단한 장면을 열 번 스무 번을 반복하며 연기자를 주눅들게 하고 있었다. 무대연습이란 ‘흐름’을 잡는 것이지, 새삼 새로운 연기연습을 하는 것은 아니다. 그런데도 그 장면을 가지고 낮 12시를 넘기고 있다니. 연습대관료마저 징수한 무대연습이었다. 연극이 좋지 않으니 관객이 올 리 없다. 보름동안 19회 공연에 3천명이다. 평균 관객 1회당 170여 명이었다. 덕분에 나는 서승현씨에게 아직도 출연료를 드리지 못했다. 언젠가는 반드시 갚을 것이다.
오승명에게 나는
‘미안하다. 우선... (나중에 갚아주겠다)’라고 하면서 돈 봉투를 손에 쥐어주었다. 그는 큰 눈을 더 크게 뜨면서 내 손을 탁 쳤다. ‘그러면 안 돼지’ 하는 뜻이었다. 그는 실험극장 시절 무명의 시골청년으로서 내 앞에 나타났었다. 내 딴에는 친밀하다고 느껴오던 사이여서, 양해를 구하고 싶었던 것인데, 그의 이러한 반응은 내게 충격이었다. 이러니 <결혼중매>가 내게는 악몽 같은 공연이었을 수밖에.
<에비타>가 막을 여는 12월 초까지의 활동은 생략하겠다.14)
12월 24일 <에비타>15)의 막이 올랐다. 크리스마스 이브여서 통행금지시간이 없어졌고, 우리는 밤 8시에 막을 올렸다. 첫 회 공연은 거의 만원이었고, 공연이 끝나고 우리들은 「수원갈비」집에서 불고기를 먹었다. 120여 명이 들끓었고, 밥값이 무려 1백20만 원이었다.
그러나 이 공연의 실현은 무척이나 어려웠다. 미국의 Florida에서 열심히 교회봉사를 하던 조영남 씨를 섭외 하는 데는 의외로 쉽게 이루어졌다. 아마도 수년간의 미국생활에서 그는 고국에 돌아오고 싶어 근질근질하였을 것이다. 어쩌면 나는 그에게 귀국의 빌미를 마련해주었는지도 모른다. 그가 귀국하고서 다시 출국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가 귀국하는 날, 일간스포츠 기자가 공항에서 그를 기다렸다.
‘조영남 씨, 어떻게 오셨습니까?’
‘현대극장에서 상연할 <에비타>에 출연하기 위해서죠.’「무슨 역이죠?」
‘체 게바라 역이에요.’
이튿날 아침, 일간스포츠에는 대문짝만한 기사가 실렸다. 우리로서는 선전 만점이었다. 그러나 아차, 그 날 아침부터 문화공보부, 중정, 청와대에서 연락이 오기 시작하였다.
‘체 게바라라뇨?’
‘쿠바에서 공산혁명을 이끈 사람이 라죠?’
‘이런 작품을 공연하는 저의가 무어요?’
난리가 났다. 우리에게도, 한국일보 측에도 협박과 위협이 가해지기 시작했다. 당연히 공연은 불가였다. 이 공연에 강력하게 문제를 제기한 사람은 청와대 비서실의 허 모 씨와 당시 KBS사장 이 모 씨였다 한다. 이 분들은, ‘이 작품이 페론 대령의 군부에 의한 정권 탈취를 그린 것으로, 81년 당시의 한국상황을 빗댄 것이 아닌가’라는 견해를 가졌던 것으로 판단된다.
옥신각신하는 가운데 공연일자는 다가오고 있었다. 신문사 덕분에 심하게 발길질을 한 것은 아니었던 것 같다. 12월 20일 경, 당국은 「공연불가」 판정을 내릴 찰나였다. 그런데 이미 입장권이 1만여 장이 팔려 있었다. 정부로서는 이 점이 걸렸던 것 같다. 이걸 중지하면 정부 쪽에 유리하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을까...? 그래서, 우선 ‘하라’ 해 놓고, 허 모 씨는 첫 공연을 보고 돌아갔다.
7회 공연에 2만2백 명이니까 3,895석의 세종 대강당의 Capacity에서 평균 2,886명이 들었다는 것인데, 이것은 매회 1천 석의 빈자리가 있었다는 뜻이다. 그러나 동시에 그것은 74%의 동원율이 아닌가?
세상물정을 모르는 나는 아마도 이쯤에서 문제가 끝난 것으로 알았고, 이제 빚을 좀 갚나보다 하고 생각했다.
그러나 1월 4일 아침, 문공부 담당 주사로부터 전화가 왔다.
‘김 형, <에비타> 이것으로 중지해 주세요. 지방공연은 안 됩니다. 아침 출근 전에 똥누고 있는데 (모처로부터) 전화가 왔어요. 아이쿠 소리가 나도 모르게 나왔어요. 힘이 쫙 빠지는데... 일어날 수가 없더라고요. 난 「공연 가」를 결재한 사람인데, 김 형 그대로 나가면 나도 죽고, 김 형도 좋을 것은 없을 거예요.’
처음에는 공갈이려니 하고, 나는 해댔다.
‘우리는 중지 못합니다. 알아서 하세요.’
‘김 형, 잘 생각해 보세요. 이거 거짓말 아니에요. 좋을 것 없다니까 요.’
그의 목소리는 죽어 있었다. 그 자신이 죽는다는데, 난 어쩌면 좋은가?
극단에 나가 간부회의를 소집했다. 모두 말이 없었다. 젊은이들은 하자고 했다. 난 며칠을 방황했다. 광주 공연이 추진 중이었고 부산 대구에서도 하자고 한다. 모처럼의 기회를 부당하게 포기 당해야 하나? 옛날 신명순의 한강 인도교 폭파사건을 다룬 작품 <증인>이 생각났다. 문공부와의 2번째 악연이 일어나고 있었다.
1월 20일, 나는 그를 전화로 불러냈다.
‘우리, 공연 접을 게요.’
변명이 아니라, 나는 그가 죽는다는 데에 마음이 약해졌다. 그러나 우리가 공연을 중지하지 않았다면 그가 죽었을까? 그랬다면 내가 죽었을까? ... 알 수 없다.
이 공연엔 화제도 많았다. 조영남 씨의 뮤지컬 첫 출연은 단연 화제였다. 이경애의 발견은 특별한 것이었다. 에비타를 맡은 이경애는 서울예고에서 발레를 했고 이화여대에서 성악을 공부했다. 미모에다 좋은 신체조건을 갖추었다. 나는 그에게 많은 신경을 썼다. 재능이 있었고, 한편으로 연기 초보자였다. 쫑파티 날, 에비타의 더블이었던 김성녀 씨는 마침내 울음을 터뜨렸다.
‘김 선생님은 이경애만 편애하시고...’
나는 얼른 손수건을 내밀었다. 김성녀 씨에게 미안한 것은 사실이지만, 연기 초보자를 어떻게 하란 말인가? 김성녀 씨는 이미 원숙의 단계로 가고 있는 훌륭한 연기자였다. 그 다음에도 무슨 일이 있어 나는 두 번째의 손수건을 제공했는데, 세 번째에는 반드시 손수건 3장을 내게 선물하기로 약속하였다.
나는 MBC 라디오 초기에 이봉조 씨와 인연이 있었다. 현미의 <밤 안개>를 그 때 녹음하여 히트하기 시작했었다. 내가 잘해주어서였는지, 어느 날 공개방송 녹화가 끝나고 그는 내게 「봉투」를 내밀었다. 나는 무슨 거머리를 손에 잡은 듯, 뿌리쳤다. 그는 상당히 무안해 하였지만, 나를 더욱 좋아하게 되었던 듯 싶다. 그래서 <에비타> 악보를 들고 찾아갔다. 그 때 그는 KBS 악단장이었다.
‘그래, 내 해 줄 게.’
KBS의 후원을 추진하고 있었다. 사장이 외유중이라, 귀국 즉시 사장 결재를 받아, 반주 해주꼬마, 이렇게 되었었다.
그런데, 그 사장이 캐나다에서 있었던 「방송 광고상」 시상식에 참석하고 귀국 길에 뉴욕에 들러, 문제의 <에비타>를 보고 돌아왔다. 그의 책상에 <에비타> 후원서류가 놓였다. 그는 서류를 집어던졌다. 이렇게 되자 이봉조 씨는 당황하였다. 그러나 그는 역시 의리의 사나이였다.
‘의경 씨, 걱정 마. 내 해 주께.’
2일간의 강행군 끝에 이 난곡을 KBS악단이 녹음해 주었다. 아니, 이봉조악단이었다. 그의 도움이 없었던들, <에비타> 공연은 불가능했을 것이다.
<이 글은 2002년 공연문화저널 2호에 실린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