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기행작품
1.김지은. 공안일기을 읽고서
2.박송죽 .시간의 타임머신을 타고
3.황소지. 노신문학을 찾아서
4.김재원.예원을 찾아서
5.손무경.동방의 피사탑-호구탑 =장원작품
6.박영선.심원을 가다
7.강미자.한산하
8 이은숙. 서호에서
9조규옥.상해 항주 소주 소흥 .동방명주
狂人광인일기를 읽고서
김지은
루쉰을 만나게 된 건 계절이 한창 자신의 푸르름을 뽐낼 5월 초순 즈음이었다. 어린이 날과 겹친 석가탄신일 토요휴무 연휴를 포함한 3박4일간의 일정이었다.「아Q정전」,「광인일기」로 그의 이름과 제목 정도나 되뇔 뿐이었던 내게 먼저 구애의 손길을 보낸 건 루쉰 그로부터였다. (사)부산여성문학인회의 식구가 되고서 처음 떠나게 된 문학기행인 '노신문학을 찾아서'를 통해 중국의 상해, 항주, 소주, 소흥을 가게 된 것이다. 계기야 어찌 되었건 아직 조국의 산천도 제대로 누비지 못한 나에게 타국으로의 여행이란 설렘보다 망설임이 큰 것도 사실이었다. 게다가 직장과 가사에 대한 부담도 양팔저울에 올려두는 추처럼 내 망설임의 한 구석에서 '가지 말자'라는 쪽으로 마음을 짓누르고 있었다. 그 때 조규옥 시인이 내게 건넨 말 한마디는 교구상자의 한켠에 스펀지로 감싸놓은 핀셋으로 내 마음을 짓누르던 추를 하나씩 걷어내었다.
'물건을 두고 살까 말까 망설일 땐 그 물건은 사지 말아야 하는 것이지만 여행을 떠날까 말까 망설일 땐 그 기회는 주저없이 잡는 거에요, 지은씨
광인일기는 루쉰의 처녀작이기도 하지만 중국 최초의 현대소설로 평가받는 작품이다. 10장 남짓의 짧은 단편 소설로 내가 모(某)군 형제 중 한 명이 중병을 앓고 있어 그들을 찾았지만 한동안 앓고 지냈다던 동생은 이미 쾌유한 상태이며, 병중의 동생의 상태가 어떠했는지 그의 일기를 통해 알아가게 되는 일종의 액자구성 형태의 소설이다.
피해망상증에 시달리는 동생은 유난히 휘황찬란한 달빛을 보며 반가움을 느끼지만 나의 주변인들에 대한 불안감에 시달린다. 사람이 사람을 잡아먹는 그 불안감의 정체는 나를 둘러 싼 모든 이들- 이웃, 형제, 심지어는 길거리의 개들까지도 자신을 공격하여 죽일 지도 모른다는 생각이다. 그리고 나의 죽음의 형태는 어떠한 것이어도 상관이 없다. 내 주변인의 공격에 의한 죽음은 이전부터 경계하는 것이지만 내가 대들보에 목을 매어 죽더라도 개의치 않는다고 생각한다. 오히려 이 죽음은 그들에게 살인죄를 면할 수 있는 더없이 좋은 방법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들은 양질의 고기를 구할 수 있는 것이다.
결국 「광인일기」의 내용은 나를 취하려는 자들에 대한 경계를 통해 '식인(食人)' 문화에 대한 비판을 가한 것인데, 주변인들에 대한 적대감을 보이는 자신마저도 4천년동안 이어져온 식인 문화를 이룬 구성원임을 알고 자조석인 탄식을 쏟아내고 만다. 그리고 식인 문화에 길들여지지 않은 '진정한 사람'이 되기를 원하며 그 시작으로 '인간을 잡아먹은 일이 없는 아이가 아직 있는지 모르겠다. 아이들을 구하라…….'고 말하며 소설의 끝을 맺는다.
'식인(食人)'이라니……. 터무니없는 내용에 어리둥절하지 않을 수 없었다. 결국 열 장 남짓의 글을 이해하기 위해 더 많은 이야기들을 알아야만 했다. 내 문학기행이 관광이 아니었고, 내가 비행기를 타고 날아간 길이 결코 짧은 거리가 아니었듯 그의 글을 이해하기 위해서 내가 간 거리만큼의 역사와 문화에 대한 이해가 필요했던 것이다.
중국의 식인문화는 한나라가 건국된 기원전 206년부터 청이 멸망한 1912년까지 정사에 식인의 기록이 220여 차례나 언급되어 있다고 한다. 유교의 '복수주의(復 主意)'는 '부모의 원수와는 같은 하늘 아래 살 수 없다'는 '불구대천(不俱戴天)'과 같은 생각으로 원수를 29대 까지 갚기도 했다는 이야기나 식인 기록이 언급된 최초의 정사인 「사기(史記)」에서는 은나라 마지막 임금 주왕이 신하들을 '해(인체를 잘게 썰어 누룩과 소금에 절인 고기)' ,'포(脯:저며서 말린 고기)', '자(炙:구운고기)' 로 만들었다고 기록되어 전하기도 한다. 루쉰은 이러한 '식인문화'로 대표되는 구시대의 관습과 함께 날품팔이 '아Q'와 같은 우유부단한 인물을 등장시켜 병들어 있던 당시의 사회를 질타했다 위선에 얽매인 가치관을 작품을 통해 인식을 바꾸고자 한 것이다. 유교의 '효(孝)'가 우리사회를 지배했던 전통적인 가치관임을 생각할 때, 부모를 봉양하기 위해 자신의 넓적다리살을 바쳤다는 정성스런 효자의 이야기도 20세기에 들어선 중국의 문화에선 얼마나 극단적이었던 것이었나 하는 생각에 섬뜩하기까지 했다.
책을 읽으면서 '식인(食人) 문화'의 낯설음 대신 친숙함으로 다가온 느낌은 이 글은 '이상'의 「날개」와도 비슷하다는 것이었다. 일제의 식민지 정책이 아시아 곳곳에 퍼져있을 무렵, 의술을 통해 중국의 근대화에 일익을 담당하고자 유학했던 일본의 의학교에서 노일전쟁에서 포로로 잡은 중국인의 목을 일본 군인들이 자르고, 그 둘레를 가득 매운 동포 중국인들이 재미난 구경거리를 만난 듯 즐거워하는 모습을 환등기 사진으로 접하게 된다. 루쉰은 크나큰 정신적 충격을 받는다. 현대 의학으로 중국인의 육체적 질병을 고치는 것보다, 중국 민중의 정신적 타락과 무기력을 고치는 것이 급선무라는 자각으로 의학 공부를 포기하고 문학을 통해 민족에 복무하기로 결심하게 되는 루쉰.「광인일기」에서 정신분열증 환자가 되어 거리를 누비던 그의 흔들리는 눈동자는 3?1운동 실패로 자괴감에 빠진 젊은 청년의 모습과 똑같았다. '한번만 더 날아 보자꾸나'하고 되뇌이는 이상(李箱)의 모습. 깨어있는 삶을 살고자 다짐하는 두 사람의 모습은 책을 읽는 내내 보이지 않는 어떤 힘으로 느껴졌다.
책을 읽고, 독후감을 쓰면서 내 글의 모습은 어떠해야 할 지를 생각한다. 중국 현대 문학의 아버지 루쉰은 스스로를 '다리를 만드는 데 들어간 나무 한 조각, 돌 한 개 정도로만 여겼을 뿐 결코 미래의 모범이 될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고 한다. 대 작가의 글에 나의 시가 비길 바는 못되겠지만 적어도 공직자로써 시인으로 내 삶을 살아가는데 있어 부끄러움은 되지 않을, 그러면서도 시인 김지은의 삶의 향기가 묻어날 글을 써야겠다는 생각을 한다. 비록 그 시가 많은 이들에게 회자되진 않을지라도 무심결에 펼친 책을 들여다보다 한번쯤 싱긋 웃을 수 있는, 고개를 주억거릴 수 있는 글이 된다면 그것으로 성공 아니겠는가 하는 생각을 하며 루쉰과 함께한 시간을 마무리한다.
魯迅故居 덕수당에서 필자
시간의 타임머선을 타고 ,===부산여성문학==
--향불로 태우는 영은사의 불심<佛心>--
朴 松 竹
살아가는 인생여정이 잃어버린 자아(自我)를 찾아가는 순례의 길이라면 그 순례의 길에서 가슴이 따뜻한 사랑하는 사람들과 함께 동행 할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복된 축복과 기쁨으로 다가오는 행복일까.
어느 해 보다도 병약한 체질 때문인지 아니면 나이 탓인지 속 알이 병처럼 호되게 봄 앓이를 길게 한 탓으로 모처럼 설이며 기다리던 정신적인 개혁의 선구자인 중국의 루쉰 문학기행에 차질이 있을까 염려로운 마음으로 그 동안 병원을 들락 거렸다.
그러나 다행히 열이 입술로 터져 입에 물집이 생겨 간간히 피가 묻어나기도 하였지만 시인 박미정씨의 애뜻한 사랑이 담긴 약으로 치유 받고 마치 초등학교시절에 소풍을 떠나던 들던 기분으로 우정과 함께 심화되고, 자연과 함께 동화되면서 마음을 씻으며 비우며 마주선 자연과 하나로 결합되어 순수로 되돌아가는 나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었다.
이 또한 정말 얼마 만에 만끽하여보는 개방된 나만의 자유인가.
팔년이란 긴 세월 동안 뇌경색으로 식물인간이나 다름 없었던 남편의 손과 발이 되어 철창 없는 감옥이나 다름없었던 갇힌 생활에서 아픔과 고통으로 곰삭으며 바보가 되어가며 죽지 못하여 살아가던 그 세월의 강을 거슬러 지금 나는 어디쯤 와서 그이의 곁으로 갈 차비를 챙기고 있을까.
사별<死別>하여 3년 동안 참으로 그이의 빈자리가 그렇게 소중한지 미처 몰랐던 사실을 깨닫으며 그이의 흔적에 눌러 스스로 혼자 갇혀 밥 한 술을 입에 넣어도 목이 메이는 미안한 자리였는데 이렇게 동료문인들의 덕분에 열린 자유의 날개를 달고 광활한 대지를 밟으며 영혼의 심호흡을 할 수 있다는 것이 생명존재의 경이로움이며 살아 있기에 나에게 주어진 축복의 감동이라 그저 감사할 뿐 이였다.
중국과 우리나라는 비행기를 타면 2시간 정도의 가까운 이웃나라다. 정말 국경 없는 하늘아래 세계는 한 지붕 밑에 한 가족이라는 말이 실감나게 하는 이번 여행 이였다
언어가 다르고 사고가 다르고 생긴 모습도 조금씩 다르지만 왠지 다양성 속에 단일성을 이루며 살아가는 삶의 모습들이 우리와 하나도 다르지 않는 인간의 냄새가 물씬 나는 삶의 풍경을 뜨겁게 내 마음 속의 오목렌즈에 수채화로 그려 담았다.
나는 마치 타임머선을 타고 과거로 되돌아가 몇 천 년 전의 중국이라는 문화의 도서관 속에서 고전이라는 책장을 한 장 한 장 읽는 것처럼 눈길 가는 곳마다 발길이 닿는 곳마다 만나는 사물마다 감동과 감격으로 감탄사를 연발해야 하는 대륙의 거친 야망과 야성의 기질을 읽으면서 불교가 중국 문화에 끼친 영향의 비중이 크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이 처럼 신앙이란 인간의 복된 삶을 지탱하게 하는 버팀목이 되는 것 같다..
개인이나 나라마다 믿고 신뢰하는 종교관은 조금씩 다를지 모르지만 생면존재의 원뿌리는 삶이 길이 되고 진리 되고 생명이 되어야하는 절대자의 주권 안에 초자연적인 영원성이 존재하고 있기 때문이며, 그 삶의 원뿌리는 향유하는 생명의 법칙 안에 공존과 공생의 원칙이 성립되고 그 원칙 속에 사랑은 신앙에 있어서 생명이며 출발의 시발점이 되어야 한다는 생각을 하여 본다.
왜냐면 우리는 육체의 건강을 위하여서는 여러 가지 음식을 골고루 먹어야 하듯이 매마르기 쉬운 영혼을 위하여서는 종합비타민이나 다름없는 초월적이고 아가페적인 사랑으로 영혼을 살찌우며 또 실천하며 살아가야 한다는 것이 신앙 안에 내재된 교리일 것이다.
나는 신비의 베일 속에 쌓여있는 중국 문화의 혁신적인 종교이기도한 불교가 이러한 사랑의 정신이 발로가 되었기 때문에 진흙 속에서 피어나는 연꽃처럼 아름다운 문화를 만들고 있구나 하는 생각을 영은사의 화려하고 웅장한 불상들을 보면서 더더욱 짙게 느낄 수 있었다.
백화사, 소림사, 영은사는 중국의 3대 사찰 중에 하나이다. 그 중에 영은사는 항주의 서쪽에 위치하고 있는 비래봉을 마주하고 있다. 비래봉에는 10~14 세기경에 만들어진 석불 330개가 전시되어 있고 동진시대에 인도의 승려 혜리에 의하여 지어졌다 하며 선종 10대 때에 사찰 중에 하나라고 한다.
대웅전의 높이는 33,6미터의 뛰어난 건축물이고, 보전 안에는 24,8미터의 여래불상이 이 있다. 그리고 대전 앞에는 송대에 건축된 8각 9층의 석탑이 있다.
천왕전에는 운림선사<云林禪寺>라고 Tm여진 편액이 걸려 있는데, 이것은 청대의 강희<康熙> 호아제의 자필로 알려져 있다. 강희 황제가 남쪽지방을 순찰하던 중 항주에 들려서 북고봉에 올랐는데 구름이 자욱하고 안개가 덮인 것을 보고 영은사 라는 이름으로 짓게 되었다 한다.
영은사의 볼거리 중에 하나는 유명한 비래봉이다. 이 비래봉은 석회암으로 이루어진 209미터 봉우리는 인도에서 날아왔다는 설과 함께 헤리가 갔다 왔다 해서 이름을 비래봉 이라 붙였다 한다.
암벽상에는 오, 송, 원에 이르는 석각 조상이 330개가 새겨져 있고 그 중에 미륵좌상은 얼굴이 개성적이라 독특하게 보였다.
타불 행자목은 깍아서 만든 것으로 항상 불교를 보호하면서 석가모니를 마주보는 불상이라 한다. 이 위타불을 마주보는 곳이 대웅전인데 못은 전혀 사용하지 않고 24개의 행자목을 끼워서 만든 석가여래 좌상이 모셔져 있었다.
그리고 과거에는 나쁜 일만 일삼던 나한상들이 석가모니를 만나서 회개하고 새롭게 태어났다는데 이 나한상들이 순동으로 500개나 만들어졌는데 제각기 다른 표정들이라 보기만 보아도 웃음을 자아내게 했다.
우리나라에서는 사원의 경내의 불상 앞에서나 향불을 피워 두는데 이 곳 영은사는 발길 닿는 곳마다 다발로 묶여진 향에 불을 댕겨서 저마다의 소원을 빌고 있는 모습들이 특이하게 보였다.
나는 한 시간을 넘게 소유되는 사찰의 경내를 돌아보면서 기도란 인간이 어떤 형식이던 간에 자기의 소원을 생활 속에서 건져 올려 신<神>에게 바쳐지는 서사시<徐事詩>라는 생각을 문득해 보았다.
3박 4일의 짧은 여정 속에 많은 중국 문화에 대한 실상<實像>들을 뜨겁게 마음에 담아 오면서 못내 아픔의 여운으로 남는 것은 이국땅인 상해에서 임시정부까지 만들고 애민 애족에 불타며 목숨을 초개와 같이 버린 윤봉길 열사와 모든 애국선열들이 지금 이 지구상에서 유일하게 치욕적인 분단국가로 남아있는 후손들의 과오를 어떻게 받아 드리고 있을까? 하는 생각과 함께 아버지 북에 묻고 어머니 남에 묻고 살 추린 바람 속에 70 평생의 흰머리를 이고 아버지의 묘소 한번 찾아보지 못하는 이 불효녀식의 불효을 용서 할 수 있을까? 그리고 어쩌면 받아 놓은 날처럼 이 지상을 떠나야만 할 그 동안 꿈에도 그리던 고향인 이북 땅을 한번이라도 밟아 볼 수 있을까? 비행기는 국경 없는 하늘에 흰 구름으로 펼쳐져 있는 운애<雲涯>의 강을 미끄러지듯이 나르고 향수에 젖은 내 마음은 원한의 가랑비만 오락가락 내리게 한다.
노신(魯迅)문학을 찾아서
黃 小 芝
부산여성문학인회는 2006년도 문학기행으로 ‘노신문학을 찾아서’ 중국 상해, 소주, 항주, 소흥에 갔었다. 나는 상해 임시정부청사와 홍구공원의 윤봉길의사 기념관 및 노신기념관에 관한 것을 쓰기로 했다.
상해 임시정부청사
북한 김정일위원장이 동양에서 제일 높다는 동방명주(東方明珠) 탑에 올라 상해 시내를 둘러보고 ‘천지개벽’이라고 말했다 한다. 그만큼 상해는 하루가 다르게 높은 건물이 많이 들어서, 어제까지는 상상할 수도 없었던 별천지로 변하고 있다는 표현이었다.
그러나 우리의 임시정부청사는 비좁은 골목에 옛날식 건물로 남아 있었다. 일본에 나라를 강점당했던 불우한 시기, 이곳이 우리의 유일한 합법 임시정부 청사였다. 3.1운동 후 조국의 광복을 위해 1919년 4월 11일 각 도의 대의원들이 모여 임시정부를 조직하였던 것이다. 1910년의 상해는 일제의 힘이 미치지 않는 조계지(租界地)로 우리의 임시정부가 일제의 부당함과, 한국독립의 정당성을 세계에 널리 알릴 수 있는 곳이었다. 이곳에서 군사학교 설립을 추진하고, 국내외에 독립공채를 발행하고 사료편찬위원회가 있어 민족사상을 고취시켰다. 모두들 숙연한 마음으로 임시정부에서 일하던 분들의 사진이며 회의실 책상과 김구선생의 침실을 둘러보았다. 이곳에서 한국인이 살아있다는 기개를 보여준 이봉창의사와 윤봉길의사의 의거(義擧)정신이 싹텄을 것이다. 韓國獨立運動之血史가 고스란히 숨 쉬고 있는 곳이기도 했다. 빼앗긴 나라를 찾으려고 얼마나 많은 독립투사들이 목숨을 내어 놓고 일본 경찰들의 무서운 눈초리와 맞서서 피와 땀을 흘리셨을까? 그 분들의 혼령이 깃들어 있는 이곳을 죄송한 마음으로 발소리를 죽이며 둘러보았다.
홍구공원(魯迅공원)
이 공원은 면적이 넓고 나무가 많았다. 본래는 홍구공원(虹口公園)이었으나 지금은 노신공원이라고 부른다. 이곳에는 윤봉길의사 기념관이 있고, 노신의 묘와 노신기념관이 있고 공원 옆에는 노신이 말년을 보낸 집이 있었다.
나는 홍구공원에 세 번 왔다. 그러나 두 번은 문학을 사랑하는 사람으로서, 관광객을 따라 노신문학관을 관람하지 않고 그냥 지나쳤다는 것이 얼마나 부끄러운 일이었는지 오늘 비로소 깨닫게 되었다.
윤봉길의사 기념관
윤봉길의사(1908-1932)는 호가 매헌(梅軒)이다. 충남 예산에서 태어났으며 소학교에 입학했으나 3.1운동의 불길을 보고 식민지 노예교육은 받지 않겠다고 자퇴하고 독학으로 공부하다 1930년 상해로 망명하셨다. 기념관은 아담한 한옥 2층으로 지어졌다. 윤의사의 활동내용을 시대 순으로 전시되어있었고 폭탄투척 장면도 잘 전시되어 있었다. 선생은 집을 떠날 때 ‘丈夫出家生不還’이란 글귀를 남기셨다. 살아서 돌아오지 않겠다는 굳은 의지가 묻어있는 글귀였다. 윤의사는 김구선생의 지도를 받아 1931년 한인애국단에 가입하였고, 1932년 4월 29일 일본천황의 생일축하 및 상해사변 전승기념식을 거행하는 홍구공원에 들어가 본부석에 폭탄을 던져 상해일본거류민단 단장 카와바타와 일본군 상해파견군 사령관을 살해하고 몇 사람에게 중상을 입혔다. 현장에서 체포되었고 일본으로 압송되어 카나자와 형무소에서 12월 19일 사형을 당하셨다. 윤의사께선 조국이 얼어붙은 엄동설한의 처지에 있을 때, 나라와 민족을 위해 한 송이 매화꽃으로 아름답게 순국하신 것이다. 유해는 13년 만에 발굴하여 1946년 한국 효창공원에 모셨다.
노신(魯迅)생가
노신의 고향은 소흥(紹興)이다. 본명은 주수인(周樹人 1881.9.25-1936. 10.19)이고 자는 예재(豫才)이다. 이곳 공원 옆의 생가는 소박하고 조촐했다. 고향 소흥의 민간주택을 모방한 건물로 지붕이 검은 기와와 흰 벽으로 되어 있었다. 접견실과 식탁, 침실이 있고 서재에는 10년 동안 사용했던 책상이 놓여 있었다. 재떨이, 찻잔과 스탠드와 펜이 있었다. 비교적 밝은 3층 방은 아들 침실이었다. 49세에 낳은 아들(주혜영)을 끔직히 사랑하셨다고 한다. 벽에는 어린 아들의 사진이 걸려있었다. 56세에 폐결핵으로 돌아가셨는데 그 때 아들은 7세였다고 한다. 시계가 5시 59분에 멈추어 있었다. 1936년 10월 19일 새벽 5시 59분에 돌아가신 것이었다.
노신기념관
노신 기념관은 북경, 상해, 소흥, 하문 등 4곳에 있다고 한다. 기념관 일층입구에는 거대한 검은 돌로 다듬은 노신의 전신상(全身像)이 우리를 압도했다. 계단 위의 2층에는 6개의 주제(主題)로 그의 작품과 사상이 시대별로 대형 액자에 전시되어있었다.
*1902년 22세 때 일본유학(의학공부), *1909.8월 귀국. 항주, 소주에서 교편생활, *복건성 하문에 감, *1927년 10월 13일 상해 도착-내산서점에 많이 드나 듬. *중국민권보장동문회의 5인 초상, *1936. 10월 19일 폐결핵으로 사망 할 때까지의 내용이었다. 다른 방에는 <阿Q정전>의 작품내용을 TV로 상영하고 있었다.
노신은 아버지가 폐결핵으로 돌아가시자 서양의학을 배우기 위해 국비 장학생으로 일본에 갔다. ‘당시 학교에서는 세균학 강의에 영상을 사용했는데 시간이 남을 땐 아름다운 경치나 시사에 관한 것도 보여 주었다. 마침 러일전쟁 때여서 시사에 관한 것이 많았는데 한 번은 러시아를 위해 스파이 노릇을 했다는 이유로 일본군에 체포되어 참수 당하는 동포와 그것을 에워싸고 구경하고 있는 많은 동포들을 보았다. 모두 당당한 체격을 가지고 있었지만 무덤덤한 얼굴로 구경만하고 있었다. 그 때 나는 대체로 무지한 국민은 체격이 아무리 훌륭하고 건장해도 바보 같은 구경꾼 밖에 되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우선 가장 필요한 것은 그들의 정신을 변화시키는 것이며 그렇게 하려면 문필생활이 가장 적당한 수단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에 의학공부를 그만 두고 중국으로 돌아왔다.’ 고 그는 <눌함(?喊)>의 자서에 자세히 썼다. 병든 인간의 육체를 치료하기위해 의학공부를 하고 있던 노신은 건강한 육신을 가지고도 인간 노릇을 제대로 하지 못하고 있는 그들을 보고 큰 충격을 받았으며, 자기가 해야 할 일은 인간의 정신을 개조하는 것, 그것이 급선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노신은 2천년 이상 중국을 윤리, 사상적으로 구속해 오던 유교의 봉건 사회적 권위는 새로운 민주 중국의 앞길을 방해하는 것으로 생각했다. 억압적인 도덕이 ‘사람이 사람을 먹도록’ 만드는 것이라고 암시하고 이것을 미친 사람의 입을 통해 대담하게 말한 내용이 <광인일기>이다.
‘나는 병든 사회의 수많은 불행한 사람들로부터 소재를 찾았다. 질병과 고통을 조명하는 것은 치료의 필요성을 환기하려는데 있다’고 하였다. 그의 작품에는 전근대적 병든 사회의 여러 가지 측면을 파헤친 것이 많았다. 그는 현실의 보수적 관습을 통렬하게 비판, 공격하였다. 당연히 해야 할 일인데도 앞장서지는 않고 누가 나서서 행동해야 따라하는, 나약하고 무기력한 중국인들, 아무리 수모를 당해도 자각하기는커녕 비굴하게 체념하고 사는, 그들의 단점을 적나라하게 비판하고 폭로하며 문제점을 파헤쳐 정신개조의 기치를 내 걸었던 것이다. 노신은 중국의 정신을 바꾸는데, 큰 역할을 한, 행동하는 지식인이요, 작가였다.
<阿Q正傳>은 날품팔이 阿Q라는 노동자 주인공으로 봉건적 중국사회가 만들어 내는 민족적 비극을 풍자하여 전형화한 것이다. 독자들은 자기 자신 속에 숨어있는 ‘阿Q 기질’에 충격을 받았고 이 작품은 전국적으로 명성을 얻게 되었다. 이 작품으로 노신은 작가로서의 지위를 확립하는 계기가 되었고, 종전의 문어체에서 구어체를 쓴 신문학의 승리를 이루었다.
노신은 우유부단한 태도로 방관자적인 중국 국민들에게 ‘비수’와 ‘투창’ 같은 평론의 성격을 띤 수필로서 그들의 혼을 일깨워 살아있는 인간이 되게 만들었다. 그는 펜에 뜨거운 피를 적셔 잠자는 중국민의 혼을 일깨우고, 인간의 존엄성을 되찾게 해주었다. 그의 죽음을 듣고 학생과 시민 조문객이 일만 명이나 모여들었고 당시 그의 관을 덮은 것은 ‘民族魂’이라는 검정 글씨가 쓰여 진 흰 천으로 상하이 시민대표가 증정한 것이었다.
모택동은 “노신이야말로 孔子보다 모택동 자기보다 더 위대한 사상가”라고 말했다 한다.
효심으로 만든 아름다운 정원
-예원을 찾아서- 김재원
예원으로 가는 길목
온통 붉은 바탕의 흰 글씨
미로 같이 복잡한 상가로 이어진다
아! 상해의 예원
잠시 넋 놓고
대한항공 cf 영상
문자를 인식하며 정원으로 들어선다
예원은
졸정원과 더불어 소주의
아름다운 4대 정원으로 사천년 동안
상해의 정신적 문화적 지주라고 한다
예원은
상해출신 관료 반윤단이
노후의 부모를 기쁘게 해드리기 위한 효심으로
고뇌의 깊은 구도 18년이란 긴 시간
세월의 풍파를 겪으며
고향인 상해의 도심에
태호석으로 석가산을 만들고
10개의 인공 호수와
30개의 누각을 지어
한정된 공간이 무한한 넓이의
자연을 느낄 수 있도록
대 저댁을 세웠다고 한다
연못을 끼고 오솔길 걸어 가듯
하나하나 조각된 색돌 밟으며
누각에 선다
용매스럽고 날카로운 벽화의 잡상
신기하고 오묘한 구멍 뚫린 괴석돌
처마선위 회색 빛 뿜어내는 용머리
오싹함을 느끼게 한다
건물과 건물을 이어주는 벽 원형 문 지나
또 다른 문 호리병 문 속으로 들어간다
반윤단 그대 효심의 흔적들은
아름다운 순서로
아름다운 자연이 되어
수 많은 발길들 맞이하고 있으니
잠 자는 듯
흐름 잃은 연못 가
나는 효심으로 기쁘게 해드릴
부모님 떠나고 없음에
애잔한 가슴 으로
뒤 돌아 선다
동방의 피사탑-호구사탑
손무경
호구사탑은 오나라 왕 합려의 묘역으로 기울어진 게 특징이다.
이탈리아의 피사탑과 함께 동방의 피사탑으로 불리워진다. 현존하는 중국 최고의 벽돌탑으로 961년 (송의 건륭 2년)에 완성되었다.
호구라는 이름은 오왕 합려의 장례식 3일째 되는 날에 마을 사람들이 보니 하얀 호랑이가 웅크리고 앉아서 왕의 무덤을 지켰다는 전설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호구사탑은 1000년의 역사와 47.2m의 높이의 돌탑으로 7층8각 탑이다. 400년 전부터 지반 침하로 기울어지기 시작하여 비바람, 벼락, 풍화작용 등으로 여러 번 무너질 뻔 하였지만 무너지지 않고 오른쪽으로 15도 정도 기울어지기만 하였다. 탑의 군데군데 세월에 찢긴 혹독한 잔상인 까만 색이 눈에 성큼 들어온다. 옛부터 사람들은 탑은 귀신을 ?i아낸다고 생각을 하였다. 그래서인지 절이 있는 곳엔 언제나 탑이 있었다. 오늘날 상해를 대표하는 것이 동방명주이고 항주를 대표하는 것이 미인탑이라면 소주의 상징적인 탑은 호구사탑이다.
호구산 안에는 감감천, 시검석, 석침돌베개, 천인석, 제삼천, 검지, 칠상팔하, 호구사탑 등이 있다. 호구산은 앞산에서 뒷산까지 등산을 하면 30분 정도가 소요된다. 호구산 입구 왼쪽에는 감감천이 있다. 하루는 봉사이며 절에서 허드렛 일과 물 긷는 일을 하고 있던 감감 스님이 일을 끝내고 쉬고 있는데 우연히 두 사람의 이야기를 듣게 되었다. 호구산이 바다 속에서 솟아 올라왔다고 하는 것이었다. 그 소리를 듣고 감감 스님이 깜짝 놀라 미끄러져서 넘어졌다. 넘어진 자리를 만져 보니 이끼가 돋아 있었다. 감감스님이 생각하기를 이끼는 습한 곳에서 사니까 혹시 이곳을 파보면 물이 나오지 않을까 하는 생각으로 땅을 팠다. 이런 스님의 모습을 지켜보던 두 사람 중 한 사내가 여기서 물이 나오면 내가 개구리로 변해서 평생 이 산을 지키겠다고 비웃었다. 그러자 그 사내의 말이 끝나자마자 개구리로 변하여 말을 함부로 해서는 안 된다는 교훈을 남겼다고 한다. 감감천을 따라 조금만 올라가니 양 옆 길엔 빈약한 꽃들이 디스플레이 되어 있다. 마치 공동묘역에 꽂혀 있는 조화 같이 스산함이 감돌았다. 호구산에 도착했을 때는 이슬비가 질척질척 내리고 있어서 파랗게 이끼 낀 돌들이 매우 미끄러웠다. 일행은 넘어져서 다칠세라 서로 서로의 손을 잡아 주면서 조심스럽게 산을 올라 갔다. 입구 오른쪽에는 시검석이 있다. 오왕 합려가 천하의 명검을 시험해 보기 위해 시험삼아 검을 돌 위에 내리쳤는데 돌이 둘로 쩍 갈라졌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시검석 앞을 지나서 얕으막한 언덕길을 오르니 태아의 성별을 감별하기 임산부가 위해 돌을 던졌다는 석침돌베개가 보였다. 돌맹이를 던져서 돌이 석침 위에 떨어지면 아들이고 땅으로 떨어지면 딸이라는 것이었다. 예나 지금이나 태아의 성별에 대한 관심은 국민적 관심을 뛰어 넘어 세대를 초월한다는 생각마저 든다.
2500년전 오나라의 왕 합려는 전쟁을 하다가 죽었다. 아들 부차는 아버지의 원수를 갚기 위해 국력을 강화하고 풍수가 좋은 해영산에 아버지의 묘역을 조성하여 흥망성쇠를 기원하였다. 호구검지라는 연못을 만들어 아버지 합려를 매장하고 금은 보화와 함께 3000여개의 보검을 매장했다. 묘역조성에 부역을 한 노동자는 1000명에 달했다. 부차는 일을 다 마치고 돌아가려는 노동자들을 묘역조성에 대한 비밀을 누설할까봐 돌 위에 앉혀 놓고 모두 죽여 버렸다고 한다. 천인석이라는 이름 속엔 설이 분분하다. 천명의 사람피로 물든 돌, 천명이 목숨을 건 돌, 천명이 돌 위에 앉아서 스님의 설법을 들었던 돌이라는 설 등등. 일행은 천인석 앞에서 프랑카드를 걸고 역사적인 단체 기념촬영을 하였다.
한글을 보고 한국 관광객들은 부산에서 왔느냐며 반가움을 표시했고 자청해서 촬영도
해주었다. 우리 일행은 대부분 중년의 아줌마들이다. 호구산의 전설만큼 몸의 여러기관들도 오랜 세월을 견디느라 약해졌나보다. 유적지에 도착하자마자 유적지를 다른 곳으로 옮길 때마다 빠짐없이 화장실을 들러야 했다. 누군가가 나타나지 않아서 화장실을 가보면 역시 그녀들은 그곳에 있었다. 세월은 어쩔수가 없나보다. 천년전 진시황은 녹슬지 않는 명검과 금은보화가 많이 매장되어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오나라를 습격하여 합려가 매장되어 있는 검지를 파헤쳤다. 검지는 겹겹이 쌓인 수십 개의 문과 비밀스럽게 지어져 진시황은 어렵게 검지의 모든 문들을 부수고 마지막 문 한 개를 남겨 놓았다. 마지막 문을 부수려 하는데 흰색 호랑이 한 마리가 웅크리고 앉아서 합려의 무덤을 지키는 바람에 실패하였다. 후일 사람들은 이때 진시황이 합려의 무덤을 파헤치면서 제대로 원상복구를 하지 않아 탑에 물이 들어가 그대부터 탑이 기울어지게 된 것이 아닐까 하는 추측들을 한다. 손권 역시 명검에 대한 욕심으로 검지를 파헤쳤으나 한 개의 검도 찾아내지 못했다고 전한다. 검지 아래편에는 소동파가 즐겨 마셨다는 샘 제삼천이 보인다. 아직도 수심은 연초록빛을 띄고 있다. 제삼천을 지나 가파른 계단을 한참 올라가니 부차와 서씨가 놀던 칠상팔하가 있다. 숨이 턱에까지 차오른다. 칠상팔하는 7번 올라가고 8번 내려가는 우물이라는 뜻으로 부차의 여인 서씨가 화장발이 잘 받았나 안 받았나를 보기 위해 수시로 이 우물에 자신의 얼굴을 비춰 보았다고 한다. 위에 올라가서 우물 속을 들여다보니 고소공포증이 있는 나는 아득해지고 아찔했다. 가히 엽기적인 서씨라는 생각이든다. 한 나라 왕의 사랑을 받는다는 것은 그 나름대로의 담대함도 필요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해보면서......
부차한테 시집 온 서씨는 꽤나 미인이었던 모양이다. 서씨는 중국의 4대 미인 중에 들어간다. 중국 사람들은 소주 항주에서 미인이 많이 난다고 한다. 소주 항주의 기후는 습윤한데 기후가 습윤한 곳에서 미인이 많이 나는 것을 보면 미인이 되는데는 기후조건도 필수적인 게 아니냐며 너스레를 떤다. 이번 중국문학기행에서 만난 우리들의 가이드는 자상하고 매우 친절했다. 중국의 문화에 대해서도 박식했고 그때그때 필요한 정보를 잘 안내해 주었다. 버스 안에서 마이크를 잡고 가이드는 ‘ 큰소리로 따라 해보세요. 간단한 것이니까 알아두시면 중국을 여행할 때나 이번 여행기간에 조금은 도움이 되실거에요,.
* 안녕하십니까?- 니하오마
* 안녕히 계십시오. - 짜이젠
* 얼마입니까? -또어 싸워지엔
* 빨랑카 -찬조금
* 식사하셨습니까? - 쯔 빨로마
* 수고하셨습니다. - 신 코라
* 감사합니다. -쎄쎄
차가운 생수 주십시오. -쉐이 삥쉐이
여러 가지 말 중에서도 빨랑카(찬조금)는 잘 안 잊어버릴 것 같다. 김순자 부회장님을 포함하여 마음이 따뜻한 몇 분이 중국에 가서 맛있는 것 사먹으라고 우리들에게 빨랑카를 주셨기 때문이다. 너무나 알뜰하게 빨랑카를 써서 빨랑카 결산보고를 할 때 우리는 배꼽을 쥐고 웃었다. 나를 포함해서 공짜 돈을 너무 좋아하는 것 같다. 이렇게 물욕에 눈이 어두우면 안 되는데......
중국문학기행 즉석백일장 원고
<장원 작품>
서호 유람선에서-
-서태후를 생각하며-
-손무경-
삶보다 더 절실한
그리움
등에지고
서태후
도적질한
서호에 앉아보니
쪽배도
사랑도 아닌
-중국 문학기행 3일째-
애정의 정원 「심원」을 가다
박 영선
『혹한을 무릅쓰고 2천여 리를 거쳐 20여 년 동안 소식을 전하지 못하던 고향으로 나는 돌아왔다. 계절은 한겨울 고향이 가까워옴에 따라 날씨도 흐리고 차디찬 바람이 선창에 불어와 우 소리를 냈다. 배 사이로 바라보면 회황색 하늘 아래 외로운 듯한 마을들이 여기저기에 누워있고 아무런 활기도 없었다. 끊임없이 내 마음에 비애가 인다』
노신이 그의 작품에서 표현했던 그「고향」땅에 왔다. 작품 속의 계절 그 때와는 달리 지금은 무척 더운 날씨다. 한참을 여기저기 돌아보고 나오니 더욱 후덥지근하다. 도로변 가게 안에 모여 있는 동네 사람들조차 활기 없어 보인다.
노신의 발자취를 돌아보는 대장정은 이곳 소흥에 있는 그의 생가 방문을 끝으로 막을 내린다. 이제는 조금 가벼운 마음으로 소흥 동남쪽에 자리 잡고 있는 심원(沈園)이라는 정원으로 갈 것이다.
그런데 우리 일행을 당황하게 만든 일이 생겨버렸다. 갑자기 H선생님이 보이지 않는다. 몸이 불편하여 어딘가에서 쉬고 계신 것일까? 화장실에? 아니면, 기념관 관람 중에 우리 일행을 놓치고 뒤늦게 우리를 찾아 헤매고 계시는지도 모른다. 혹시, 대기하고 있는 버스로 먼저 가서 기다리고 계시지는 않을까? 가이드는 가이드대로 우리는 우리들대로 이런저런 추측을 하면서 어찌해야 할지 몰랐다. 정 교수님께선 이럴 줄 알았으면 젊은 한사람을 대동케 했어야 하는 것을 .......하며 내내 걱정이셨다. 몇몇은 오던 길을 되돌아 가보곤 하였지만 H선생님은 보이지 않았다. 내가 제대로 곁에 있어드리지 못한 것이 마음에 걸려 애가 탔다.
김해 공항 출발지에서부터 이곳 중국 관광지 까지 줄곧 옆 자리에 앉게 된 인연으로 이 것 저것 간식거리를 챙겨주시며 좋은 얘기도 많이 해 주셨는데....죄스러운 마음에 안절부절 별 뾰족한 수도 떠오르지 않아 남 몰래 애를 태울 뿐이었다.
H선생님을 생각하다보니 문득 어젯밤 호텔에서 짐을 내릴 때 잠시 발생했던 가방 분실 소동이 떠올랐다. 호텔 안내원이 바퀴가 부착된 여행 가방을 2인 1실의 방 마다 두 개씩 챙겨 넣어 주어야 되는데, S시인의 가방 한 개가 행방불명되었던 것이다. 분실되었으면 어쩌나 가슴 졸이며 확인해보니, 어느 방에 가방이 세 개나 들어가 있었던 것이다. 이번 문제도 가방 해프닝처럼, 잘 해결되었으면 하는 마음으로, H선생님이 전용버스에 먼저 가서 기다리고 계실 것이라 믿으며, 버스가 있는 쪽으로 모두들 발걸음을 옮겼다.
제법 먼 거리에도 불구하고, 버스와 인파사이로 낯익은 자태와 옷 빛깔이 얼핏 눈에 띄었다. 맞다, H선생님이다! 누군가 외쳤다. 우리들은 모두 환호하였다. H선생님은 노신의 생가와 기념관을 관람한 후 먼저 와서 우리를 기다리고 계셨던 모양이다. 다행이었다. 가슴 한번 쓸어내리며 그 안도감의 소중함을 안고 다음 목적지인 심원으로 출발한다.
심원에 가려면 쪽배를 타야한다. 배를 타기위해 강어귀로 향했다.
그런데, 강인가 했더니 웬걸, 물이 흐르고는 있지만 기대와 달리 하천 수준이다. 하천 입구에는 사공들이 손님을 기다리며 배를 띄워놓고 있었다. 배는 카누모양의 길고 좁다란 통로로 되어있어 네 사람씩 짝을 지어 타야 했다. 낡은 배의 균형을 생각해서 몸무게가 가벼운 사람과 무게가 나가는 사람을 고루 섞어 타자고 누군가 제안했다. 하지만 좁은 나루터라 그렇게 할 여유가 없어서 서 있는 순서대로 오르게 되었다. 정교수님을 비롯한 세 사람이 탄 배가 선두로 떠나고, 두 번째 배에는 나와 L, P, J 세 명의 시인이 같은 배에 올랐다
두 명씩 마주보고 앉았다. 타고 보니 네 사람 모두의 몸무게가 만만치 않았다. 행여 배가 기울어질까봐 서로 노심초사 하며 가긴 가는데 모양새가 어쩐지 위태위태하다. 자칫 잘못 움직이면 기울어질 것 같아 불안하다. 굳어진 표정들을 서로 바라보니 우습기도 한데, 뱃사공은 놀랍게도 우리들과는 달리 여유 있는 표정으로 손이 아닌 발로 노를 젓고 있엇다. 다리 밑을 지날 때는 사공이 우리에게 머리를 수그리라는 싸인을 보내왔다. 허리를 꼿꼿이 세워 앉으면 머리를 부딪칠 정도로 낮은 다리였다. 퀴퀴한 냄새가 코끝으로 밀려든다. 고개를 숙인 채 다리 아래를 한참 지나오자 몸의 균형이 제법 잡히는듯하여 지나간 방향으로 유유히 얼굴을 들어 보니, 초록빛 나무 잎새들이 늘어뜨려진 모습과 문우들이 타고 뒤따라오는 쪽배 사이로 아취형 다리가 보였다. 그 배경이 그런대로 제법 운취가 있어 사진기 셧터를 몇 번 눌러대었다. 웬만큼 배타기에 익숙해지려 할 즈음 어느새 도착 되었다고 한다. 조금 더 타봤으면 하는 아쉬움을 뒤로 하고 항구(?)에 내렸다
날씨가 정말 무덥다. 쪽배에서 내리자, 눈앞에 심원 입구가 보인다.
송나라 시대의 심씨 성을 가진 사람이 만든 개인 정원이라고 가이드는 설명한다. 그러고 보니 중국에는 개인정원이 참 많은 것 같다. 우리가 어제까지 둘러본 일정 속에도 졸정원, 예원이 있었는데, 모두 개인정원이 아니던가. 화려하고 규모가 큰 그런 정원에 비하면 이곳 심원은 관광객들의 발길이 그다지 많지는 않은듯해 보였다.
심원에는 육유(陸遊 1125-1200)의 고사가 유명하다.
유명 애국시인 육유와 사촌 여동생의 사랑 이야기가 담겨있는 곳이다. 금나라에 대해 철저한 저항을 주장한 우국시인이었던 육유는 남송이 중국의 중심부라 할 중원일대를 금나라에 잃고 난 그 시점에 태어났다. 그는 자신의 비분강개를 시에 담으며 살았다. 어려서부터 금나라를 물리치고 중원을 찾겠다는 포부가 가득했으나 1163년에 군사를 이끌고 북벌에 나섰으나 실패하는 바람에 면직되었다. 면직된 후인 1170년에는 사천과 섬서성에 가서 항금운동에 참가하기도 했으며. 애국충정은 죽을 때 까지 조금도 식을 줄 몰랐다. 중국인들이나 육유의 시를 읽어본 이들은 이런 애국시인으로서의 육유도 좋아하지만 일찍 헤어진 부인에 대한 슬픈 사랑을 지닌 인간으로서의 육유를 더욱 좋아하는지도 모른다.
육유는 스무 살 때 문학을 사랑하는 사촌 여동생 당완(塘婉)과 결혼을 하였으나 오랜 세월이 지나도록 자식을 두지 못했다. 봉건사상이 심하던 때라 자식이 없는 것을 불효중의 하나로 여기던 시기였다. 육유의 어머니는 그런 며느리를 미워하며 헤어지라고 하였다. 육유는 그 아내를 진심으로 사랑하였지만 며느리를 싫어하는 어머니의 성화에 어쩔 수 없이 마음이 아팠지만 아내 당완과 헤어질 수밖에 없었다.
그들이 헤어진 지 5년이 되던 해, 심원에서는 음력 3월 초 하루부터 4월 여드레날 까지 정원의 문을 개방하여 모든 사람들이 구경할 수 있게 하였다 정원을 개방한지도 어언 5년쯤에 우적사 근처에 있는 심원에 놀러온 당완과 육유는 극적으로 다시 만나게 된다. 10년만의 재회였다. 하고 싶은 말은 가슴 속에 수없이 많았으나 둘은 이미 새로운 가정을 꾸미고 있었기에 만나서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처지가 못 되었다. 안타깝게도 이야기 한번 나눠보지 못하고 돌아서야만 했다.
육유는 사천왕씨 부인을 얻어 살았고, 당완은 조씨 성을 가진 신랑을 맞이하여 살고 있었다. 정원에서 재회한 이후 당완은 집으로 돌아가 남편에게 사실을 자초지종 털어놓았다. 도량이 넓은 남편은 집으로 육유를 초대하게 하여 술과 음식으로 융숭한 대접을 하면서 이야기를 나누도록 하었다. 짧은 해후와 이별이었다. 이토록 애틋한 사랑이야기가 담겨있는 심원은 그 이후로 애정의 정원으로 부르게 되었다.
애정의 정원에 들어서면 키를 훨씬 넘는 돌비석이 우리를 반긴다. 시경(詩境)이라는 글자가 새겨져있으며, 비석 위로 푸른 담쟁이 넝쿨 잎이 드리워져 있어 한층 정감을 더해준다. 정원은 동원, 남원, 고적원, 이렇게 세 부분으로 나뉜다. 안으로 조금 돌아서 들어가니 물위에 나무로 지어진 건축물이 있는데 <問梅籃>이라는 현판이 먼저 눈에 띄었다. 고적 정원에서 제일 많이 심어진 나무가 매화라고 하며 육유가 특별히 매화꽃을 좋아하여 160여 편이나 시를 지었다고 한다.
조금 더 들어가니 1400년의 역사를 가진 <육조정>이란 우물이 있었다. 1985년도에 물밑에서 깨어진 도자기가 발견되었는데, 그 조각을 맞추어 감정한 결과 우물은 육조 시대 때 만들어졌다는 것으로 판명 되었다고 한다. 육조정의 특색이라면 지붕 중앙부분을 하늘이 보이도록 뚫어 놓은데 있다. 물을 길어 올릴 때 사용하는 긴 막대기가 지붕에 부딪쳐 건물이 파괴되는 것을 막기 위한 것이었다.
1987년에 지은 亭池遺적(정지유적)이란 현판이 있는 정자를 지나고, 또 그 당시 민족 모순을 고독스러운 학에 비유했다는 <고학헌>이란 현판이 걸린 정자를 지나면서 느끼는 것은 정원을 지으면서 어떻게 하면 더 예쁘게 지을까를 고심했던 흔적이 엿보인다고 가이드는 설명을 덧붙였다.
심원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이 있다면 바로 시가 새겨져있는 돌비석을 빼어 놓을 수 없다. 비석 가장자리에는 팔손이나무가 마치 병정처럼 양쪽에 심어져 있다. 병풍처럼 펼쳐져 넓다랗게 세워져 있는 돌 벽 왼쪽은 어머니의 핍박으로 서로 헤어질 수밖에 없었던 육유 자신의 그 고통스런 심정을 글로 표현하였고, 오른쪽 부분에는 그러한 처지의 여자의 마음을 표현해놓았다. 육유는 딸 두 명과 아들 일곱을 두었다. 첫 번 부인은 그 일이 있은 후 심리적인 압박에 못이겨 나이 서른에 일찍 세상을 떠났다고 한다. 육유는 그녀를 이 정원에서 재회하게 된 그때 느낀 슬픔을「?頭鳳(차두봉)」이라는 유명한 시로 표현했다.
부드러운 손길로 황동주 따라 줄 때
성안에 봄이 오고 담장 위의 버들들도 한껏 푸르렀지
무정할손 봄바람아 기쁜 정(情)도 엷어졌네
우리 서로 헤어져 쓸쓸한 생활
몇 년을 보냈는지
틀렸다! 틀렸다! 틀렸다!
봄이야 그 봄이나 사람은 여위고
연지 섞인 눈물이 손수건을 적시네
복숭아꽃 지고 쓸쓸한 연못가
그때 그 맹세 변함없건만
내 아픈 맘을 적어 보낼 길 없네
말자! 말자! 말자!
시를 읽은 당완은「차두봉에 부쳐」라는 시로 화답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숨을 거두었다.
일찍 헤어진 부인에 대한 슬픔과 애절함이 담긴 사랑의 시 차두봉은 지금까지도 많은 사람들로부터 사랑받고 있으며 이 비극적인 이야기는 800여년의 역사를 간직한 채 전해내려 오고 있다고 한다. 육유는 그 뒤에도 수차례 심원에 와서 추억을 되새기며 시를 써 왔으며 만년에 까지 죽은 아내를 그리워하며 팔십 평생을 사는 동안 많은 작품를 남겼다.
이렇듯 애틋한 사랑의 정원 심원에서 소흥의 일정을 마무리한다. 상해로 돌아 가야할, 현지시각은 오후2시 30분, 3시간이 걸려야 갈 수 있다. 버스에 오르자마자, 약속이나 한 듯 피곤이라는 바이러스에 일제히 감염되어 버렸다. 이제 쪽배가 아닌 차 안에서 밀려오는 졸음에 몸들을 맡긴 채 노를 젓기 시작한다. 지난 밤 충분히 숙면을 취한 덕분인지 잠이 오지 않던 나는 왔던 길의 차창 밖 풍경을 여유있게 바라보았다. 조상의 유골을 모셔놓는다는 별장식 주택이 보인다. 옥탑방과 그 지붕 위에 날카롭게 꽂혀있는 피뢰침이 시야에서 사라졌다 나타났다를 반복할 뿐, 광활하게 뻗은 길로 버스는 달리고 또 달린다. 무료하리만치 일직선 이다.
인생길도 곧은길로만 뻗쳐 있다면 얼마나 지루한 삶일까? 때때로 곡선의 길을 헤쳐나가는 삶이야말로 변화에 따른 긴장감과 도전과, 스릴이 있어 우리가 살아있다는 것을 느끼게 되는 것이 아닐까. 이제는 힘겨운 삶도 울퉁불퉁한 삶도 진정으로 껴안을 수 있을 것 같다. 바로 질러가는 직선의 삶이 더 좋은 삶이리라는 생각을 버리게 한다. 한국 땅, 그 중에도 특히 산이 많아 비탈지고 복잡한 도시 부산에 살면서 미처 느끼지 못했던 발견이다. 이번 문학기행에서 중국의 소설가 노신의 발자취를 접하면서. 거기다 예견하지 못했던 순간순간 느꼈던 사소한 깨달음들 까지 마음속 배낭에 추스려 넣는다. 내일이면 활기찬 항구도시 부산, 내 고향으로 가는 날이다.(끝)
(노신 문학을 찾아서 기행문)
소주의 한산사<寒山寺>
강 미 자
첫날 상해의 일정을 모두 마치고 늦은 시간에 소주로 이동을 해서 현지시간 밤 12시가 훨씬 넘어서야 호텔에 도착했다 곧 방 배정을 받아 여정을 풀었지만 자는 둥 마는 둥 5시30분에 모닝콜 6시30분에 식사 7시30분에 출발, 흐린 날씨에 이슬비가 내리는 사이로 호구 탑에 이어 한산사 관람을 위해 이동했다.
소주의 한산사는 그 규모는 크지 않은 작은 사찰이지만 1,500년의 역사를
지닌 고찰로서 당 태종의 정간 연간<627-649>에 시승(詩僧)인 한산스님과
습득(拾得)스님이 여기에 오시어 석장(지팡이)을 세우고 머물렀다고 하여 후에 이곳에 온 희천 선사가 가람을 짓고 <寒山寺> 라고 불렀다고 하며 이 절은 여러 번 불에 탔지만 그때마다 복원되었고 이름은 그대로 이란다.
짙은 향 연기를 온 몸으로 받으며 중국 특징인 검은 기와를 얹은 황색 담장을 끼고 돌아 들어가는 길에 그 유명한 “풍교야박(楓橋夜泊)” 시비가 눈길을
끌었다.
이 시는 <장계> 라는 시인이 과거에서 네 번이나 낙방을 하고 이 사찰로 들어와 계속 수신하던 중 이 시를 썼다고 전해지는데 이후 <장계>는 과거에 급제를 하면서 시 “풍교야박”은 유명해졌고 또 이 시 때문에 한산사는 오늘날까지 유명세를 지니고 있다고 했다.
(시의 배경)
『일찍이 시계가 없었던 아주 옛날, 이 한산사 에서 알리는 범종 소리에 이곳 풍교 마을은 새벽이 열리고 고깃배가 바다로 나가며 하루가 시작되었다고 전해진다.』계속 낙방을 하며 실의에 차있던 나그네의 설은 심정을 이 시에서 볼 수 있다 <원문이지만 실제 시비에는 초서가 많았음>
< 楓較 夜泊 >
月落烏啼霜滿天江楓
漁水對愁眠姑蘇城外寒
山寺夜半鐘聲到客船
< 풍교 야박 >
달은 지고 까마귀는 우는데 하늘 가득 서리 가 내리네
풍교 에는 고깃배 등불을 마주하여 시름 속에 자고
고소성 밖 한산사 에는 한 밤중에 종소리가 객선 에 이르네
한산 스님과 습득 스님은 아주 절친하게 지낸 것이 유래가 되어 대웅전 뒷
편에 한습전<寒拾殿> 이라는 건물이 세웠는데 한산과 습득의 우정을 기리며
그 이름 한자씩을 따서 붙인 것으로 한산과 습득의 대형 전신상이 조금은
익살스럽게 표현되어 한산 스님은 손에 꽃병을 받쳐 올리는 듯, 습득스님은 연꽃을 한산 스님이 든 꽃병에 꽂으려는 듯한 동적인 모습을 목상으로 묘사한 이것은 평화와 화목을 상징하는 것으로는 이곳 소주에서는 대표적인 것으로 한산스님의 꽃병은 평화를, 습득스님의 연꽃은 화목을 의미한다고 하여 결혼을 앞둔 예비 부부나 또는 결혼한 신혼 부부들이 와서 가정의 화목과 평화를 빌며 간다고 했다.
또 이곳 소주에는 시가지 전체에 수로를 파서 항상 많은 물이 끊이지 않고 흐르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었는데 이것은 많은 사찰들에서 피우는 향( 중국에는 부처님께 소원을 빌 때 향을 한두 개비를 꽂는 것이 아니라 한 주먹 씩 대량으로 꽂고 향불을 피움)에서 화재의 위험이 있어 만약의 화재에 대비해서 수로를 파 두었다고 했다.
그리고 뒤편으로 “칠층팔각탑”과 “보명보탑” 두 개의 탑이 있는데 특히 보명보탑은 2층으로 올라가 맞은편에 동전을 던지고 소원을 빌면 소원 성취가 된다고 했다.
온통 향 연기로 자욱한 한산사를 뒤로하며 일행은 다음 관광지를 향해서
버스에 올랐다.
서호에서
-소동파에게
이은숙
그대
무슨 인연으로 이제도록
내 마음에 살아
바람으로 떠도는지
피 속에 떠도는 시를 향한
불치병
저 너머 세상에 살아도
그 붉은 피 나를 향해 당기고 있는 것을
우리는 같은 족속
당신 보던 달을 따서
뭉친 어혈 풀어 내어
시 한 수 잉태 하리
상해 항주 소주 소흥 . 동방명주까지
- 중국 문학기행 노신을 찾아서 -
조규옥
2006년 5월 5일(금) 부산김해공항 국제선 1층 약국 앞 집결을 시작으로 우리의 여행은 시작되었다. 대한항공 KE875편 비행기는 김해공항을 출발해서 불과 2시간 만인 9시 30분 중국 상해에 도착 했다. 공항에서 기다리고 있는 버스를 타고 대한민국임시정부 청사를 향하는 동안 확 트인 도로와 잘 가꾸어 놓은 가로수를 보며 이제까지 내가 생각하고 있던 중국과 많이 다른 것 같아 의아했다. 버스가 달리는 동안 가이드 설명처럼 하루가 다르게 급속도로 변하고 있는 중국의 발전상을 알 수 있었다.
첫날 <부산-상해-소주>
홍구 공원에 들러 매정 윤봉길의사 기념관을 둘러보고 난 후 노신선생의 기념관에 들러 생전에 써두었던 저서와 그 분의 발자취를 한 눈에 보면서 대단한 힘을 가진 작가임을 알 수 있었다.
노신선생의 생가를 찾아가 노신선생이 살았던 방을 보았는데 그 방은 이집에서 제일 양지바르고 통풍이 잘되는 곳으로 노신선생의 부모님이 그곳을 쓰게 했다는 이야기를 들으며 큰일을 하는 데는 어려서부터 부모의 세심한 배려와 격려가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다음에는 상해의 자랑거리중의 하나인 예원으로 갔다. 예원은 명나라 때의 건축물이며 개인정원이라는 것이다. 반윤단이 부모님께 효도하는 마음으로 지은 정원(유열노친의 뜻)이라고 하는데 부모님을 기쁘게 해드리기 위해서 18년이라는 기간 동안 만든 정원이지만 부모님이 돌아가신 뒤에야 완공이 되었다고 한다. 부모님을 위해 이렇게 거대한 공원을 만들어내는 그 효심을 보면서 가슴이 뭉클했다.
여행 첫날인 오늘의 마지막 일정으로 황포강 유람선을 타러 가는데 비가 조금 내렸다. 퇴근시간이 겹쳐져서 그런지 이곳 상해도 복잡하게 자동차가 엉키어 있기도 했다. 비가 오는데도 자전거를 타고 다니는 사람이 너무 많아 신기하게 느껴질 정도였다. 매연도 줄이고 자신의 건강도 지키고 좋은 점이 많겠지만 그들도 자동차의 편리함과 안락한 단맛에 한 번 빠지면 그 자전거를 버리지 않을까하는 의문을 던져본다.
유람선 출항시간에 맞추기 위해 경보대회 하듯이 뛰고 걸으며 바쁘게 가는데 일행들은 누구 한 사람 뒤처지는 사람이 없다. 혹시 자기 때문에 다른 일행들에게 피해가 갈까봐 안내자의 통제에 잘 따르고 다른 사람을 배려하는 마음이 우리회원들은 역시 문화인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가 유람선에 오르자마자 배는 서서히 황포강 선착장을 출발하였다. 우리나라에서는 보기 드문 강가의 화려한 스카이라인은 사방이 온통 반짝이는 불빛으로 폭죽을 터트리고 있는 듯 했다. 유람선 2층으로 올라가 보니 가수가 노래를 부르고 관광객들과 인터뷰를 하였다. 어디서나 음악은 사람과 사람사이를 가깝게 하는 구실을 한다고 느꼈으며 나도 모르게 흥겨워 어깨가 들썩여졌다. 항포강을 둘러싼 포동과 포서의 경치구경으로 유람선은 화려한 춤을 추고 있었다. 구경을 마친 후 하루의 피로를 풀기위해 우리 일행은 모두 발맛사지를 하러 갔다. 난생 처음 받아보는 발맛사지라 다소 신기하기도 하였지만 어찌나 시원한지 피로가 싹 가시는 것 같았으며 기회가 된다면 자주 받아보고 싶었다.
둘째날<소주-항주>
지난밤의 시원한 발 맛사지 때문인지 거뜬하게 이른 아침에 기상을 했다. 웃는 얼굴로 아침을 시작한 우리 일행은 중국의 4대 정원중의 하나인 졸정원으로 향했다. 왕헌신이 십여년동안 지은 정원인데 동부, 중부, 서부로 나누어지었으며 중국세계문화유산중의 하나로 꼽히고 있는 정원이었다.
한산사에 들러 1500여년의 역사에 감탄하고 한산스님이 창건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호구산은 높이가 34미터의 낮은 산이었으며, 2500여년전 오나라 왕갑려의 무덤이 보존 된곳으로 호구탑을 동방의 피사탑이라고 부른다고 가이드는 설명했다.
그 다음 우리일행은 영은사로 갔다. 신영기의 영과 숨을 은이라는 영은사는 700여년의 역사를 가지고 326년 인도의 혜리스님이 창건 했으며 제웅전안에 앉은키가 19.6미터나 되는 석가모니 불상으로 유명하며, 중국의 10명찰중의 하나라고 한다.
중국인들의 기도하는 모습을 볼 수 있었는데 사찰 어디서나 많은 촛불과 향을 피우고 여기저기에 서서 기도를 올리고 있었다.
오늘도 저녁에는 발맛사지를 받으러 갔다. 그곳은 어제와는 다르게 여자들이 맛사지를 했다. 남자에 비해 힘이 약하기는 했지만 나름대로 열심이어서 팁으로 3,000원을 단체로 주고 오늘 하루의 피로도 싹 풀고 돌아왔다.
이번 여행에 참가한 일행 전체가 함께 모이는 저녁파티에 삼페인으로 축배를 들고 각자의 탈랜트를 자랑하며 즐기는 동안 그 동안의 피로는 모두 달아나고 다시 여행의 첫날로 돌아간 기분이다. 여행에는 다양한 형태의 여행이 있지만 한 가지 주제를 정해서 떠나는 여행이야 말로 정말 실속 있고 알찬 여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노신이라는 작가를 찾아왔다는 것에 뿌듯함을 느낀다.
셋째날 <항주-수흥-상해>.
지난밤의 즐거운 파티도 있었고 상쾌해야 할 아침이 부산한 것은 여행을 하는 동안 일정을 기록하고 있는 윤샘, 그리고 여행을 하는 동안 사진을 책임져야 하는 나는 한가롭고 여유있는 여행을 하기 보다는 일의 연속처럼 긴장되어 있었으므로 오늘 아침은 부산스럽고 피곤이 밀려왔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이고 호텔의 맛있는 조식 덕택에 거뜬히 힘을 내고 서호(西湖)로 향했다.
서호(西湖))는 항주쪽으로 자리잡은 자연호수다. 2200년전 선당강 해변으로 연결되었다가 지질변화 때문에 산이 가로막혀서 형성된 호수로 중국 10대 명소중의 3번째로 유명한 서호(西湖)는 3개의 섬으로 되어있다. 그곳에서 배를 타고 서호(西湖)에서 즉석 시작품을 쓰기도 했다.
다음은 노신박물관을 찾아갔다. 그곳에서 노신선생의 생가와 삼미저옥 등을 둘러보고 심원으로 들어왔다. 그곳에는 심씨가문의 정원이 있었고 애정(愛情)의 정원에서 비극적인 사랑이야기도 들었다. 그리고는 수로를 타고 오르내리는 쪽배를 타기도 했다.
이번 여행의 마지막 일정으로 동방명주탑에 오르기 위해 줄을 섰다.
동방명주는 1991년 7월에 착공하여 1994년 10월에 완공하였다. 동방명주탑은 상해의 월스트리트라 할 수 있는 푸동루쟈쭈웨이 금융구에 위치하고 있는 방송 수신탑으로써 총 높이가 468미터로 아시아에서 첫 번째, 세계에서는 세 번째로 높다고 한다. 중국의 펄 TV를 운영하는 미디어 그룹인 동방명주 그룹이 소유하고 있으며 높이 263미터와 350미터에는 관광 전망대가 있다. 350미터 전망대에는 귀빈실이 따로 있고 일반 관광객들은 263미터 전망대를 이용하게 되어 있다. 동방명주탑 내부에 있는 고속 엘리베이터를 타니 10초만에 전망대에 도착하여 상해 전경을 감상할 수 있었는데 탑 주변의 초고층 빌딩들과 황포강을 바쁘게 오가는 선박들은 중국 거대도시 상해의 발전하는 모습을 상징하고 있었다.
이렇듯 높이가 468미터라는 거대함으로, 아시아의 가장 높은 키를 키워 세계의 세 번째임을 과시하고 있는 듯한 동방명주탑 앞에 도착했을 때 크고 작은 구 11개로 형성되어 있었다. 가이드의 자상한 설명에 귀를 기울이고 있는 데 한쪽에서 사진부터 찍고 탑을 오르는 것이 좋겠다고 하여 우리는 저마다 멋진 포즈를 취하고 섰다.
가이드에게 카메라를 맞기고 포즈를 취하는데 가이드가 더 멋진 포즈로 광장바닥에 주저앉아 다리를 벌리고 반은 드러누워 카메라 초점을 맞추고 있다. 그 모습에 우리는 저절로 웃음이 터져 동방명주 꼭대기까지 웃음소리가 들리게 크게 웃었다. 그렇게 즐거운 모습으로 사진을 찍고 엘리베이터 앞에서 줄을 섰다. 아래로 보이는 상점들이 우리일행을 반기는 듯 우리나라의 기업이 운영하는 낯익은 우리나라 회사간판이 번쩍이고 있었다. 외국에 나가보면 모두가 애국자가 된다더니 세계의 유명한 기업들과 대등한 경쟁을 하는 우리기업의 자랑스러움이 가슴 찡하게 했다.
그것도 잠시, 가이드는 우리의 시선을 한 곳으로 모으기 위해 애교스런 목소리로 설명하기 시작했다. “총 높이가 468미터라는 동방명주탑을 10초 만에 전망대에 오른다.” 라는 설명을 들으면서 설마 했었다. 그러나 그것이 사실이란 것을 알기까지 10초밖에 걸리지 않았다는 것이다. 눈 깜빡임을 열 번도 못하고 올라온 것이다. 높이 올라왔으니 볼 것도 많을 터 우리들은 출구 바닥에 2라고 쓰인 곳에서 30분 뒤에 만나기로 하고 각자 자유시간을 가졌다.
유리벽으로 둘러싸인 곳에서 밖을 내다보며 걷는데 도착하던 첫 날 밤에 탓 던 황포강 유람선이 오늘 밤에도 동방명주 주위를 돌고 있었다.
동방명주 탑위에서
황포강
포동과 포서사이를 지나간다.
화려한 불빛이 따라 지나간다.
외탄의 야경을 조명삼아
유람선 선상에서 들리는
유명가수의 노래가
어느새 귀에 익어 들리는 밤
황포강을 따라
앨범 속에 남겨질
한 장의 사진을 찍고 있다.
이번 문학기행에서 얻은 점은 중국의 거대함과 발전하고 있는 모습으로 중국의 미래를 볼 수 있었으며, 중국인의 생각을 변화시키고 일깨우기 위해 노력한 노신선생을 찾아와 그의 문학세계를 볼 수 있었다는 것이 참으로 감사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된다. 나를 비우기 위해 떠났던 여행에서 내안에 노신의 문학세계를 가득 담고 돌아오는 비행기 안에서는 감사의 기도가 절로 나왔다.
-중국문학기행 즉석 백일장 차상-
서호에서
조규옥
사십원을 지불하고
서호유람선 선창가에 서 있는 사내
수양버들 안개 쓸어내는 소리에
몸을 적시고 있다
달려오는 물살을 밀치며
호수를 빠져나오다
수영금지, 낚서금지, 소변금지
몸이 젖어버렸다
사내는 서호에 갖히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