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운
70 년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70년' 70년 인술 접은 문창모 장로의 '축복받은 인생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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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환자들이 순서를 기다리던 의자에 잠시 앉아 본 문 장로.
지난 70년의 노정을 돌아보며 잠시 상념에 잠김다. |
"정말 억울하고 눈물나는 일이지요. 죽는 날까지
환자를 보려고 했는데 얼마나 아쉽고 억울한지 모릅니다"
의사로서의 70년 긴 여정을 마감하고 지난 3월 타계한 문창모 장로(95,
前문이비인후과 원장, 원주제일감리교회). 죽는 날까지 환자를 보는 것이 소원이었지만 그러지 못하고 은퇴하게되어 아쉬움의 눈물을 흘렸다는 이
노의(老醫)가 말하는 억울함이란 과연 어떤 느낌일까?
문 장로는 이제는 신경이 마비되어 면봉 하나 쥐기 힘든 주름진 자신의 손을
원망스럽게 쳐다보며 은퇴소감을 말했다. 강원도 원주시 학성동에 위치한 문이비인후과.
이곳에서 40년 동안 환자를 돌보던 문 장로는
얼마 전 병원문을 닫았다점점 다리와 손에 마비증세가 와서 손으로 의료기를 쥘 수가 없기 때문이다. 인천도립병원장(1946), 국립
마산폐병원장(1947), 세브란스병원장(1949), 원주기독병원장(1959) 이밖에도 해주시 초대시장(1945), 대한결핵협회
사무총장(1953), 국제대학학장(1957), 14대 국회의원(1992) 등 일일이 열거하기 힘들 정도의 많은 일들을 맡아오면서도 '하루도 환자
보는 일을 거르지 않았다'는 문 장로는 의사의 길을 천직으로 알고 지금까지 걸어왔다.
"하나님께서 나를 의사로 만들어 주셨으니 죽을 때까지 환자를 보는 것이
당연하지요." 의사가 될 수 없던 자신을 의사로 만들어 주신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아왔다는 문 장로. 1907년 평북 선천에서 태어나 유복한
가정에서 자랐다. 그는 당시 서양 종교였던 기독교를 접할 기회가 없었다. 그러나 수원농림학교(서울대학교 농과대학의 전신)를 나온 그의 아버지가
신학문을 익힐 것을 권고해 문 장로는 비로소 기독교와 만날 수 있었다.
"그때는 선생들도 모두 허리에 칼을 차고 다녔어요. 그래서 다들 왜놈 공부는
안 시킨다고 자식들을 학교에 안 보냈는데, 난 아버지 때문에 여덟 살에 학교에 입학하게 됐지요. 아마 그때 제발로 학교에 찾아간 사람은 나 밖에
없었을 겁니다." 이렇게 학교에 다니게 된 문 장로는 보통학교를 4년을 마친 후, 근처 남창교회에서 운영하는 사립학교 5학년에 들어가면서
기독교를 알게되었다.
"그때 교장선생님이 '너는 집도 잘살고 똑똑하니까 예수만 잘 믿으면 훌륭한
사람이 되겠다'고 해서 주일학교에 나갔어요. 그후에 중학교를 서울에 있는 배재로 진학하고 거기에서 교회주일학교도 인도하면서 신앙을
키워나갔습니다." 당시 문 장로는 무악재 너머에 있는 정동감리교회 한 권사님 댁에서 아이들을 모아놓고 주일학교를 시작했다.
시간이 지나면서 그가 지도하는 주일학교를 찾는 아이들은 점차 늘어났고 3년쯤
되자 아이들을 데리고 오는 어머니들의 수도 늘었다. 결국 문 장로는 이들 앞에서 주일예배까지도 인도하게 됐고 이렇게 시작한 주일예배 모임이
지금의 홍제감리교회이다.
국회의원 시절에도 새벽 5시부터 환자
진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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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창모 장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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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 장로가 이곳 원주로 내려온 것은 지난 1957년의 일이다. 미 감리교
선교회와 캐나다 선교부가 40만 달러라는 거액의 자금을 지원하기로 해 원주에 대형병원을 짓기로 하면서 초대원장으로 문 장로가 내정된
것.
당시 원주는 전쟁의 폐허 속에서 복구되지 않은 낙후된 땅이었다. 더구나
인구도 얼마 되지 않는 원주에 2만 달러가 소요됐던 세브란스보다 스무 배나 많은 액수를 들여서 큰 병원을 짓겠다는 계획에 대해 문 장로는
반대했다.
"당시에는 솔직히 원주에 내려가기 싫었어요. 한참 부와 명성을 쌓고 있던
때에 원주로 내려가라니 가고 싶은 마음이 있을리 없죠. 하지만 하나님께서 시키시는 일이라고 생각하면서 억지로 내려가게 된 겁니다." 지금은
원주기독병원으로 인해 연세대학교 의과대학이 들어서고 병원도 우리나라에서 손에 꼽을 정도로 좋은 시설과 의료진을 갖췄지만 당시에는 건물만 크고
별로 쓸모도 없었다는 것이다
. "환자라고 해봐야 목사님들이 데려 오는 무료환자들이 대부분이었지요. 또,
의사들도 원주까지 오려고 하지를 않았어요. 그래서 당시 내 월급이 8만원이었는데 12만원 주고 외과과장을 초빙해 온 적도 있었습니다. 그런
상황이었으니 병원을 운영하기가 무척이나 어려웠지요" 문 장로가 말하는 초창기 원주기독병원의 상황이다. 그렇게 원주기독병원을 맡아 운영하던 문
장로는 1962년, 국회의원 선거에서 낙선한 후 기독병원장을 그만두고 원주에 개인병원을 세웠다
그의 문이비인후과는 다른 어떤 병원보다도 이른 시간인 아침 6시면 진료를
시작하는 것으로 유명하다. 아침 일찍 출근하거나 등교하느라 진료를 받을 시간이 없는 사람들을 위한 문 장로의 따뜻한 배려다. 이른 아침이라
간호사가 없을 때는 문 장로는 손수 진찰을 하고 약을 조제하기도 했다. 그에게는 환자가 다른 어떤 것보다도 우선이다. 환자가 돈이 없으면 무료로
진찰해 주는 것은 물론 간혹 딱한 환자들에게는 여비까지 주어 보내기도 했다
. "난 정말 먹지도 않고 자지도 않으면서 환자를 봤습니다. 진찰하면서 돈을
받지도 않고 오히려 어떤 때는 내가 돈을 줘가면서 환자를 봤지요" 의사면허는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기 때문에 다른 외적인 상황들은 자신이 환자를
보는데 아무런 이유가 안되다는 사람.
이런 문 장로이기에 그의 병원에는 비록 최신식 의료기기가 없어도 수십 년 된
단골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다. 이런 그의 외곬 의사정신은 그가 지난 14대 국회의원(통일국민당 전국구 1번)으로 있던 시절 그의 일과에서도
찾아 볼 수 있다. "그 때는 아침 5시부터 환자를 봤습니다. 조반 먹고 아침 10시까지 국회에 출석하러 서울로 올라갔어요. 그리고 오전에
국회가 끝나고 나면 다시 원주로 내려와서 환자를 보다가 회의가 있는 오후에는 다시 서울로 올라가고 그랬습니다
" 일흔을 훨씬 넘긴 노인이 이렇게 4년 동안 단 한 차례의 결석도 없이
서울과 원주를 하루 두 차례씩 오가며 국회에 출석해 의정활동을 하고 또, 의사로서의 직분 또한 충실히 감당해 왔다는 사실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또 그는 의약분업으로 인해 의사들이 파업했던 지난해에도 새벽 5시부터 병원문을 열고 환자들을 돌봐 병원을 찾아 애타게 헤매던 환자들을
보듬었다.
"의약분업은 문제가 있는 정책입니다. 의사가 병 봐주고 처방을 내주면 환자는
다시 약국에 가서 약을 사야되는데 이러면서 환자들의 경제적인 부담은 더 커지잖아요? 하지만 반대하는건 좋은데 환자는 봐가면서 싸움을 하든가
해야지. 환자들이 무슨 죄가 있다고 환자도 안보면서 싸움을 해요? 죽을 생명을 살려놓는 사람이 의사인데 생명을 취급하는 사람이 환자를 버려두고
싸움을 한다는 것은 아무리 명분이 좋아도 옳지 못합니다.
" 원주와 지역 기독교 발전에 큰 몫 감당
문 장로는 강원도 벽촌에 불과했던 원주가 지금의 원주시로 발전하기까지 자신의
노력이 곳곳에 배어있음을 큰 자랑으로 여긴다. 문 장로는 기독병원을 설립하는 현장에 등짐을 지면서 함께 했고 의과대학과 연세대학교 분교를
설립하는 일에도 참여해서 지금의 원주시가 발전할 수 있는 토대를 조성해왔다. 뿐만 아니라 그는 원주시 기독교의 발전에도 아주 큰 몫을
담당했다.
당시 교회라고는 세 곳밖에 없던 원주에서 기독장로회를 조직해서 교회설립을
적극 도운 것이다. "그땐 교회가 제일감리교회, 제일장로교회 제일성결교회 이렇게 밖에 없었어요. 원주는 완전히 빈 벌판이었지요. 그런데 내가
기독교장로연합회를 조직해서 장로님들 17명하고 전도하고 봉사하면서 교회를 창립하고 그랬어요.
지금은 원주에 교회가 한 400개도 넘을 겁니다." 그의 얘기 속에는 마치
'원주'라는 자식을 길러내 어 성장시킨 아버지의 뿌듯함이 담겨있는 듯 했다. 문 장로는 또, 우리나라에 '크리스마스 씰'을 발행한 장본인이기도
하다.
본래 우리나라 최초의 크리스마스 씰은 캐나다 감리교선교사였던 셔우드
홀(Sherwood Hall)박사가 1932년에 선보였다. 그 당시 문 장로는 홀 박사가 원장으로 있던 해주 구세병원에서 일을 하고 있었다.
'폐병'으로만 불리우던 결핵을 퇴치 기금 조성을 위한 크리스마스 씰 발행에 그는 7인 위원 중 한사람으로 참여했다.
"그때는 사람들이 씰이 뭔지를 몰랐어요. 관심도 없었고... 그래서 평양에
있는 광성이나 숭실 같은 학교에 씰을 가지고 가서 학생들에게 팔고 그랬던 기억이나요. 그때 돈으로 60원어치 가량 팔았으니까 많이 팔았지 뭐."
하지만 어렵게 발행되던 크리스마스 씰은 홀 박사가 일본에 의해 스파이로 몰려 우리나라에서 쫓겨나면서 중지되고 말았다. 그렇게 중단된 크리스마스
씰이 지금의 모습으로 다시 발행되기 시작한 것은 문 장로가 세브란스병원 원장으로 있던 1953년의 일이다.
문 장로는 당시 보건부 장관이었던 최창순 씨와 대한결핵협회를 조직하고
크리스마스 씰을 재발행하기 시작했다. 문 장로에 의해 다시 시작된 크리스마스 씰은 꾸준히 성장했고 우리나라 결핵퇴치에 큰 공헌을 해왔다. 그는
또, 혼란한 시기에 큰 병원 두 곳의 원장직을 연이어 맡으면서 어려움에 처한 병원을 되살리는 한편, 직원들에게 신앙인으로서의 본을
보였다.
해방 직후인 1946년, 인천 도립병원에는 의사들과 직원들이 환자를 돌보지
않고 방만한 분위기가 만연해있었다. 맡긴 일을 제대로 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으며 병원 꼴은 말이 아니었다. 그러나 문 장로는 원장 취임 후
3개월 동안 아침마다 기도회를 가지면서 모든 일에 솔선수범하는 한편, 사랑으로 직원들을 다스리며 병원을 정상화시켜 놓았다.
마산 결핵요양소의 경우는 더욱 심했다. 왜정 때부터 일하고 있던 병원
직원들과 해방 후 새로 들어온 직원들 사이에 세력다툼이 벌어져 병원이 문을 닫을 상황까지 번지게 된 것이다. 신변을 위협하는 직원들의 협박에도
불구하고 문 장로는 경찰서에 갇혀있던 직원들을 인계 받아 강당에 모여 함께 예배를 드리면서 그들에게 화해하고 함께 일할 것을 눈물로 호소했다.
"사람들이 처음에는 나를 안 믿었어요. 그런데 내가 울면서 폐병환자들을
진료하고 누워있는 사람들 똥까지 닦아주고 직접 밥상 들고 다니면서 밥 먹이고 그랬더니 직원들이 차츰 나를 믿더라구요." 직원들은 매일 눈물
흘리며 기도하고 직접 환자들 밥상을 들고 다니는 원장을 신뢰하기 시작했다. 그러는사이 그들 속에 있던 앙금이 점차 가시고 마산 결핵 요양소도
안정을 찾았다.
"난 놀고 먹는 것이 제일 우스운 일이라고 생각해요" 문 장로를 찾는
발길들이 최근 들어 부쩍 늘었다. 물론 이전에도 많은 매스컴에서 문 장로를 소개한 적이 있지만 최근 은퇴했다는 소식이 전해지면서 공중파
방송에서는 물론 교계, 지역언론 등 수많은 곳에서 앞다투어 그를 취재하고 있다. 그것은 물론 70년이 넘는 오랜 세월 하나의 직업을 천직으로
알고 살아온 그의 삶이 누구에게나 가치 있게 여겨지는 탓도 있겠지만 '한국의 슈바이처'라 불리우며 인술(仁術)을 펼쳐온 그의 삶 근간을 차지하는
'신앙'이 빛나고 있기 때문이다.
아흔을 훌쩍 넘긴 문 장로는 손과 다리에 오는 마비 증상을 제외하고는 지극히
건강했다. 예순도 안되는 것처럼 느껴질 정도의 정정한 목소리와 또렷한 정신력은 그의 표현대로 '죽을 때까지 도구로 사용하시기 위한 하나님의 큰
축복'이었다. "돈? 많이 벌었죠. 그런데 돈 벌면 바로 어려운 교회에 가져다주고 어려운 사람들 도와주고 하다보니까 지금은 하나도 없어요.
그런데 요즘 다시 생각해보면 조금 아깝기도 해." 라며 큰 소리로 웃는 문
장로. 그는 자신의 은퇴 이후의 생활은 아직 계획 중이라고 했다. 다만 놀고 먹는 것이 제일 우습다고 생각하기에 남을 도울 수 있는 일을 하면서
여생을 보내려고 한다. 문 장로는 몇 해전 자서전을 하나 출간했다. 자서전의 제목은 '천리마 꼬리에 붙은 쉬파리'. 이 우스꽝스러운 제목에 대해
문 장로는 "천리마 꼬리에 붙은 쉬파리가 힘들이지 않고 천리를 날 수 있는 것처럼 나 역시 나를 지켜주시는 하나님께서 이끌어주셔서 지금 여기까지
올 수 있었다"고 고백한다.
70년 긴 세월동안 하나님께서 주신 사명을 감당해왔으니 이젠 좀 쉴 때가
되었을 법도 하지만 그는 여기서 주저앉아 땀이나 닦는 여유를 누리려하지 않는다. '하나님께서 시키신 일을 그만둔 것이 너무나 억울하고 눈물나도록
아쉬운 일'이라는 문창모 장로. 하늘이 내린 천직으로 알고 살아온 의사로서의 그의 일생은 '축복 받은 삶' 바로 그것이다
(newsnjo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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