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두 시간짜리 동그라미
이상희
커피숍 의자 아래의 바닥 전체가 둥근 모양으로 천천히 움직인다.
썬 크루즈 입구 물의 여신들 사이를 지나니, 분수대에서 물이 솟아오르는 주변이 무지개로 반겨준다. 8층 레스토랑에서 점심을 먹고 10층 커피숍으로 왔다. 얼마 전 문우들과 함께한 자리가 곳곳에서 손짓한다. 높은 곳에서 내려다보니 높이 나는 갈매기가 된 기분이다.
살아가다 보니 혼자서 즐기는 장소도 자꾸 늘어난다. 대부분 기도를 하러 다니든지 또는 공부를 위해 도서관을 찾거나, 시험을 치기 위해 가는 장소가 확장된 경우이다.
일을 하는 주부가 혼자 떠나기는 쉽지 않다. 그러나 나이가 들고 공부를 할수록, 아이들이 성장하면서 혼자 있는 시간이 필요했다. 그것도 아주 많이 말이다. 대부분이 공부와 기도 시간의 확보이다.
막내를 낳고 정신적으로 육체적으로 너무 힘들었다. 벌써 19년 전이다. 어린 것을 셋째와 함께 퇴근하는 남편에게 맡겼다. 첫째와 둘째를 데리고 무작정 정동진으로 가는 기차에 올랐다. 해돋이가 보고 싶었다. 뭔가 획기적인 변화가 필요했다.
자녀들의 성별로는 운명적으로 변화를 줄 수 없음을 막내를 낳고 알았다. 멋진 육군사관생도가 나오는 소련 영화를 보고(사관과 신사), 타이타닉 영화를 세 번이나 연거푸 보면서 펑펑 울어도 소용이 없었다. 장애물이 없는 끝없이 넓은 곳으로 가고 싶었다.
우리나라엔 사막이 없으니 바다가 사랑받는 것은 당연하다. 사막이든 바다든 아무것도 눈앞에 거칠 것이 없는 곳으로 가야만 했다. 다시 일어서는 언어를 집으로 들고 와야 네 아이들을 제대로 키울 수 있을 것 같았다.
저 아래 모래사장과 검고 길쭉한 연필심 같은 바위가 그때의 기억으로 뜨겁다. 하지만 그때 그 푸른 물을 잔뜩 머리와 가슴에 안고 집으로 갔어도 얼마나 많은 시간 안에서 울고 부르짖고 힘들어 했던가. 마음으로 삼킨 눈물이 저 푸른 바닷물 몇 말 정도는 되지 않을까. 아이들을 제대로 키우기는 그렇게도 힘들었고 뼈를 깎는 아픔이었고 지혜를 요구했다.
아이들이 어릴 때는 가장 큰 외출이 독서 안에서의 여행이었다. 한없이 귀엽고 사랑스러운 존재이지만, 제발 혼자 좀 있고 싶었지만 그 녀석들은 24시간 엄마만을 찾았다.
그나마 도서관이라도 가야지 책 한테 좀 맡길 수가 있었다. 아이들을 맡길 사람과 장소가 내 삶에는 허락되지 않은 게 아이들에게는 좋았지만 내게는 큰 고통일 때도 더러있었다. 하지만 개성이 다른 아이 키우기는 변화와 성장과 성숙의 비밀 상자를 선물로 주었다.
참 많이도 키워놓았다. 혼자 이렇게 훌쩍 와서 하루 종일 있어도 거칠게 없다. 위의 셋은 각자 날개를 달고 넓은 바다를 나는 갈매기처럼 제법 어린애티를 벗었다. 막내는 날개를 더 키우려고 비상의 준비를 앞에 두고 있다. 기도 밖에는 엄마로서 해 줄게 없다.
아이들만 날개를 다는 게 아니었다. 나도 서서히 그때는 아이들과 함께하는 시간을 배워야 하는 것처럼, 지금은 아이들을 독립시키면서 혼자 있는 시간을 조금씩 배워가는 중이다.
무엇이든 처음에는 쉽지 않은 법이다. 그래도 우린 모두 혼자서 날아오르는 방법을 배우고 익혀야 한다. 여럿이 또는 혼자서 저 끝없이 넓은 바다를 날아야 한다.
조금 전, 제법 커다란 갈매기 한 마리가 커피숍 창 가까이에서 자신감 있게 자신의 비상을 뽐내며 커다란 원을 그리면서 유유히 지나갔다. 여유로운 날개 짓을 가만히 보며 저렇게 씩씩한 모습으로 날기까지 얼마나 많은 시간동안 연습을 했을까. 시선에서도 날카로운 지혜가 뿜어져 나왔다. 사람으로 치면 현인의 모습 같다.
다시 되돌아 가야되는 방향이 서서히 다가온다. 올 때도 한 마리의 새가 되어 숨 가쁘게 날아왔지만, 내게 주어진 자유시간이 끝나면 왔던 길로 다시 날아가야 된다.
일상에서의 삶에서 내면의 삶에 힘이 빠지고, 낮은 곳만 날아다닐 수밖에 없으며 눈동자의 초점에서 기운이 빠져나가는 듯 자꾸만 바닥으로 나도 모르게 내려가는 게 감지되면 다시 이 자리를 찾아야겠다. 잊지 말고. 서서히 제자리로 오기까지 두 시간이 걸렸다. 가만히 의자에 앉아서 풍경의 원을 완성했다. 어쩌면 우린 수많은 동그라미를 그리면서 살아왔고 살아가는지도 모른다. 한 가지씩 일의 완성이 있을 때마다, 크고 작은 동그라미가 모여서 하루가 되고 일주일이 되고 일 년이 된다. 그러고 보면 난 오늘 몇 개의 동그라미로 하루를 채우며 사는가.
집으로 가야 하는 시간이다. 몸이 빠져나온 곳으로 되돌아가서 오늘 하루 갈매기처럼 산 시간에 동그라미를 완성하는 일이 남아있다. 삶은 선과 곡선의 그림 그리기. 하얀 새털구름이 푸른 하늘을 장식하고, 금방 다리미로 다린 듯 구김이 없는 정동진의 푸른 바다. 한 마리의 갈매기 되어 커피 향을 입에 물고 일어선다. 일상에서의 저 푸른바다와 산과 계곡과 들판을 날아야 하기에. 해변 모래사장으로 구르듯 다가가는 하트 모양으로 부서지는 포말을 뒤로하며, 날개에 힘이 빠지면 다시 불러주기를 고대하며 푸른 기운을 업고 일어서야지.
결핍의 우물
이상희
아무리 갈망해도 채워지지 않았던 시절이 있다. 잡으려 해도 손바닥으로 흘러내리는 모래알처럼. 과거에도 있었고 현재에도 존재하며 미래에도 있을 것이다.
대학 동기인 그녀는 자녀들을 잘 키워 놓았고 살림도 넉넉하다. 구제품 가게에서 옷사는 걸 좋아하는 그 아이는 헌 옷으로 집안 여기저기 넘쳐나서 놓아둘 곳이 없다.
그 옷을 씻고 다리면서 만져보는 것으로 시간 가는 줄 모른단다. 시간만 나면 그 가게로 달려가서 옷을 사면 남편 몰래 숨겨둔다. 가난했던 과거로 돌아가서 가여운 소녀를 달래주느라 그러는 것이다.
어떤 지인은 속옷에 목숨을 건다. 그것도 팬티에만 말이다. 살림은 없고 언니가 일곱이나 되었다. 속옷을 입으려고 가보면 언니들이 모두 골라 입어버렸다. 남은 게 있다면 구멍이 있거나 고무줄이 늘어난 것뿐이었다. 아니면 팬티 자체가 입을 게 없었다.
그래서 빨랫줄을 쳐다보면 온통 젖은 속옷뿐이더란다. 도저히 마른 것은 자기의 차지가 못되니 젖은 것을 그것도 세 개씩이나 입고 다녔단다. 한이 된 그녀는 입지 않아도 돈만 생기면 팬티를 사 모은다. 어린 자신에게 지금이라도 선물을 주고 또 주려고. 한 형제가 있다. 좋은 집에 아이들도 잘 키웠고 생활도 풍족하지만, 핫도그나 호떡가게를 무심히 지나가지 못한다. 금방 외식을 해 음식물이 더 들어갈 배가 없어도 그
것만은 꼭 사서 먹어야 직성이 풀린다. 어릴 때 그것을 실컷 못 먹어봐서 육십이 가까운 나이에도 그때의 소년을 안아주느라 애를 쓴다.
부모에게서 허락된 배움의 시간이 고등학교 1학년 반학기 까지다. 그 전에는 책과 무관한 나였지만, 강제로 책을 빼앗긴 시간이 있고 나서는 책에 집착했다. 용돈이 무엇인지 몰랐기에 돈이 없어도 드나 드는데 장애물이 없는 도서관이 유일한 아지트였다. 세상으로부터 안전하게 숨을 수 있고, 어디에도 물을 곳이 없었지만 속으로만 외치는 나의 질문에 모든 대답을 해주었다.
늘 사랑에 목이 말랐고 외로웠다. 친아버지의 사랑을 몰랐기에 늘 불안했으며 기댈 곳을 찾아 기웃거렸다. 우연한 기회에 성당을 알게 되었다. 그곳에서 아버지의 부족했던 자애가 조금씩 채워졌다.
삶에서 만나는 빈자리와 부족함으로 우린 늘 방황한다. 어린 시절이나 사춘기에 겪은 상처와 작아지는 사건으로 치명타를 입는다. 커서 어른이 되어서도, 힘이 약할 때 당한 그 작고 힘없는 아이를 보살펴 주어야 한다. 그때로 되돌아가서 등을 다독여주고 작고 보드라운 손을 잡아 일으켜 안아주어야 눈물을 닦으며 웃는다.
신앙대학에 등록을 했다. 올해는 손녀를 보느라 하루 종일 시간에 묶여 있어야 한다. 피곤하지만 수요일 마다 교구청으로 달려가 수업을 듣는다. 2년 과정이 끝나면 신앙 안에서 키가 훌쩍 자라있으리라 기대하면서. 대학이란 말이 좋다. 대학원으로 올라가고 싶지는 않다. 늦게라도 언제든지 저렴한 가격으로 공부하며 시간을 조절할 수 있는 방송대가 맘에 든다. 신앙대학 졸업 후에 는 방송대 가정학과에 가서 식품영양학을 전공하고 싶다.
그것 또한 채워지지 않았던 나의 동굴이었다. 결혼생활 초기에 가정학과로 세 번이나 편입을 했다. 아이들 문제로 번번이 그만 두었다. 신혼 시절의 나를 육십이 넘었지만 스스로 위로해 주면서 기회도 잡을 수 있도록 다리를 놓아야겠기에. 빈 곳은 그냥 비어만 있는 게 아니라 다른 무언가로 채워짐을 그때는 몰랐다. 내가 원하지 않은 것으로 오면 그것을 밀어 내었다. 내 것이 아닌 것처럼. 하지만 이제 문득 보이는 것은 비록 갈구한 어떤 것이 아니었다 하더라도 그것 또한 내 삶의 일부분으로 들어왔으니 손을 잡아 주어야 한다. 그럼에도 냉정히 뿌리치기만 했다.
책을 빼앗겨 보았기에 그것의 소중함을 가슴 깊이 알아채었다. 그래서 아이들에게는 책을 빼앗지 않으려고 최선을 다해 살았다. 아이들과 함께 도서관을 다니고, 서점을 가고, 책을 만지면서 그렇게 같이 성장하고 성숙해졌다. 그 결과 아이들은 잘 자라 주었고 나 또한 공부하는 기쁨을 포기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니 그때의 궁핍아 고맙다. 덕분에 배움의 기쁨을 퐁퐁퐁 노년까지 가져갈 수 있으니까. 존재했거나 지금의 사람들은 절대적으로 내가 가지지 못한 것을 적어도 하나씩은 가지고 있다. 그것만 바라본다면 우리는 자신이 고래나 코끼리 라는 것을 알지 못한 채산다. 그러나 나도 물론 남들이 가지지 못한 것이 있다는 것에 시야를 확장해야 한다. 그렇게 한다면 적어도 절망의 늪 속으로 빠지도록 자신을 허락하지 않게 된다.
그러고 보면 텅 빈 충만의 공간이 결코 비어만 있는 게 아님이 보인다. 눈에 보이지는 않더라도 자각 만이라도 할 수 있는 지혜를 청해본다. 억지라기 보다는 포근함이며 의무이고 철학이지 않을까.
달팽이를 생각하며
이 상 희
절벽과도 같은 오래된 세탁기 앞쪽에 나선형의 껍질을 가진 네가 붙어있다.
얼마 전, 우리 집 창고로 이사를 오면서, 해마다 창고 안에서 연주회를 열던 귀뚜라미들이 모두 사라졌다. 누구를 해치지도 않고 가만히 이동조차 없는 널 왜 귀뚜라미들이 경계를 하는지 모를 일이다.
넌 아마 시골 배추밭에서 살았을 거야. 싱싱한 배추 잎이 널 데려온 초록 가마 였을거야.
시골에서 가져온 배추를 창고에 보관하면서 부터 네가 보였으니, 나의 추측이 억지가 되지는 않겠지.
너와 닮은 친구들은 이 집에 살면서 많이 보았어. 대부분 마당과 골목의 담벼락에 있다가 나와 마주쳤단다. 사계절에서 이 집과 마당엔 네 친구들이 많았지만, 특히 여름 장마철에 너와 닮은 친구들을 많이 만났다. 머리에는 2쌍의 더듬이가 있고 큰 더듬이의 끝에는 귀여운 눈이 반짝이고 있었지. 또렷한 머리와 편평한 발로 신축성 있게 움직이는 너의 유연한 발의 모습도 보고 싶다. 먹이를 먹는 모습과 창고 안을 탐색하는 모습 그리고 껍질 속으로 숨는 모습도 궁금해.
나무도 아니고, 바닥도 아닌 장소에서 넌 꼭 수직의 벽 같은 곳에 있다. 그것도 집과 함께 말이다. 하기야 바닥에 있으면 무엇이건 네가 밟히기 쉬우니, 너의 생존전략 이라면 할 말이 없단다. 그렇지만 나의 소견으로는 참 딱하기도 한 것이 사실이다.
그래, 알아. 너만의 모습과 개성과 방법과 생각으로는 최선의 선택이라는 걸. 하지만 빨래를 세탁기에 넣고 꺼낼 때마다 이해하기가 쉽지만은 않다. 널 떼어내어서 다른 곳으로 옮기고 싶거든. 아니, 미안해.
비록 나의 색안경으로는 널 모두 이해하지 못하지만, 너의 언어로 들어보면 뭐, 여기일 수밖에 없는 이유와 사정과 생각들이 있으리라 짐작한다.
너무 매끄럽지 않을까. 시끄럽기도 할 텐데. 쇠판이라서 더 추울지도 모르잖아. 주변에 먹을 것도 모두 치웠거든. 어둡고 주변 정리도 제대로 안된 그런 곳에 무슨 이유로 정착하려 맘먹은 걸까.
오늘 부터는 돌보는 대상이 하나 더 늘어났음에 널 위해 나만이 할 수 있는 일이 몇 가지 생겨버렸다. 싱싱한 채소와 과일을 늘 창고 안에 챙겨주면서 너의 주변 청결에도 신경을 써야하겠지. 습도 유지를 위해서는 가끔 씩 분무기로 물을 뿌려주는 것도 잊지 않을게. 그리고 일정한 온도 유지를 위해서 늘 관심을 가져야 할 거야. 세탁기를 돌릴 때마다 너에게 많이 미안할 테지. 네가 민감하게 스트레스를 받을까봐 말이다.
이럴 땐 너의 언어를 배우고 싶다. 조근 조근 얘기를 들어보며 왜 그곳이어야만 하는지 알아듣고 싶다. 가족과 그리고 살았던 곳과 존재 이유와 앞으로의 계획까지도.
그렇지만, 넌 언제나 침묵하고 있다. 네 친구들도 그랬던 것처럼. 앞으로도 절대 침묵으로 살겠지. 하지만 걱정하지 마. 널 떼어서 내가 원하는 곳으로 옮길 생각은 없으니까. 그러니까 원하면 여기서 쭉 살아도 좋다는 뜻이야.
너는 알에서 부화하여 성장하며 성체가 되기까지 여러 번의 탈피 과정을 거친다는데 어떤 모습으로 바뀔까. 짧은 촉수로는 후각 기능을 하며 먹이와 환경을 탐색 한다는데 여기가 맘에드니? 혹시 내년 봄에는 창고를 벗어나 마당으로 나가는 것은 아닐까. 탄산 칼슘으로 이루어진 단단하고 견고한 껍질은 너의 주요 보호 수단이며, 탈수를 방지하고 포식자로부터 너를 보호하겠지. 그리고 껍질이 성장하면서 당분간은 너도 계속 커지겠지. 지금은 낮이라서 숨어있는 거니? 껍질 속에 숨어있다가 밤이 되면 활동을 시작하겠구나.
지금, 집 속으로 들어가 숨어있는 너의 모습처럼. 나도 숱한 장면 안으로 숨어들며 산단다.
내 집과 장소와 여건 그리고 계절과 필요에 의해서 입는 의복과. 때로는 여행 이라는 명목으로도. 그리고 읽고 있는 책 속으로도 말이야. 산책을 하거나, 현재 하고 있는 공부 속으로도 감쪽같이 몸을 감추기도 한단다. 사람들은 늘 의식을 하든 그렇지 않던지 상황에 맞추어서 숨을 수 있기에 계속 성장과 성숙으로 나아갈 수 있단다. 찻집과 커피향기나 도서관으로도 숨어들 수 있기에 안정감과 중용의 마음으로 숱하게 뒤흔드는 삶의 회오리 바람으로 부터 거뜬히 버틸 수 있단다.
하긴 뭐, 사람들도 별반 다를 게 없을지도 몰라. 누구나 사연 없는 사람도 없고, 대부분 깊이 들여다보지 않으면 그 사람을 제대로 모두 이해하기는 힘들지.
나 또한 마찬가지 일거야. 어느 누가 나의 모든 영역에서 이해할 수 있겠니. 다른 사람들의 시선으로는 내게 일어나는 삶의 사건들과 기쁨과 방향성이, 그리고 얘기들이 도무지 엉터리 같기도 할거야. 이상한 행동으로 보이기도 하고, 그들 마음대로 해석해 놓고서도 마치 그게 해답인 것처럼 믿기도 할 테지. 오해의 숲으로 끌고 들어가 마치 거인이거나, 또는 난쟁이나 괴물의 그룹으로 밀어 넣기도 하겠지.
하지만 어쩌겠니. 난 최선을 다하고, 옳다고 생각하는 일에 매진하며 삶을 한 술 한 술 넘길 때마다 나름 정성을 기울인단다. 모든 지혜를 짜내어 선택하지만 내가 너를 생각하며 의아해하는 것처럼, 나 또한 그런 시선도 받고 사는 게 당연할지도.
어느 누구도 나를 제대로 알기는 어렵단다. 나 자신도 가끔 씩은 나를 잃어버리기도 하니까.
그렇지만 나답게 있는 그대로의 나로 살아가기를 원한단다. 이 세상에 나라는 존재는 하나뿐인 귀한 생명체 이니까. 누구의 삶을 흉내 내어서도 안되고 대신 살아줄 수도 없으며 내가 소중한 만큼 타인의 삶 또한 그지없이 존귀하기에. 너는 너 자체로. 나는 나 자체로 서로 이해할 수는 없지만 서로 사랑할 수는 있을 거야. 내가 이렇게 너를 인정은 해야 하며, 너의 삶을 방해하지 않은 것처럼. 때로는 가만히 두는 게 더 큰 사랑일 수도 있다는 걸 너로 말미암아 깨닫는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