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6, 7-8. 月京畿人物 시리즈 上-下
기호산림(畿湖 山林)의 종장(宗匠)
미수 허목(眉叟 許穆)선생의 은거당(恩居堂)을 찾아서 글쓴이 李 鎔 奎
찾아가는 길
서울에서 의정부-동두천-전곡을 거쳐 연천방향으로 가다가 군남면 남계리에서 임진강을 건너 왕징면 강서리로 가는 길이 있고, 또 한편으로는 군남면 진상리에서 임진강 다리를 건너 북삼리를 거쳐 왕징면 강서리 군영장으로 가는 길이 있다.
허묵의 묘는 연천군 왕장면 강서리에 위치해있다 조선중기의 대 학자이자 서예가로 자(字(는 文甫.和甫.이며 號는 미수 본관읜 양천이다 1595년 연천현감 허교의 아들로 출생하여 1615년 광해군 7년 정언응에세서 글을 배우고 1617년 부(父)가 거창현감에 임명돠자부친을 따라가서 운위(文緯)를 찾아가 스승으로 섬겼다 저서로 동사<東史><미수기언><경설><경례유찬>등이있고 전서에 능해 동방에 제 1인자란 칭찬이 자자했다한다 선새의 묘비글과 삼척의 동해척추비를 통해 그 뛰어남을 말하수 있다 허목의 석물은 독특하게 검은색이며 예술적인 세련미를 갖추고 있다.
척주 동해비
척주 동해비문
1. 陽川許氏(眉叟公)家系圖
許宣文-玄-元-正-載-純-利涉-京-遂-珙-冠-伯-絅-錦-l
l----------------------------------.l
l-愭-l-扉-.l-蓀-l-琮---確
. l l l (尙友堂)
l l . l
l l l-琛
.l l (文貞公)
l l
l l-薰--瑗-磁-橿-喬-穆-宣+羽-忄+向-溥-楨-砥-倬-雋-翼-宓-近-䓇-燦
. l l (眉叟)
. l l
l l-芝--琨-碖-浚-謙
. l l (名醫)
l l
l l-蘅--瑊-礎-潛-僩-積
. l l (領議政)
l
l-樞-菖-聃--澣-l-昫-竹+己-完-山+立-堤-鎬-源-l-集
l l-彙-열-瓆-儼.....抱川系
l 표隱
l-曄(草堂)-l-筬(岳麓)
l-篈(荷谷)
l-楚姬(蘭雪軒)
l-筠(較山
미수眉叟 허목許穆선생은 1595년(宣祖28年 ) 서울 창선방(彰善坊:南大門一帶)에서 아버지 교(喬)와 어머니 임씨(白湖 林悌의 딸)사이에 삼형제(許穆․許懿․許舒)중 맏이로 태어났다.
미수는 자신이 쓴 초상화 자찬自讚에
‘몸이 마르고 키가 크며 이마가 움푹하고 수염과 눈섭이 길며 손바닥에는 문文자 문늬, 발 바닥에는 우물 정井자 무늬가 있고 성격은 담담 화평하다’ 라고 하였다.
그래서 字를 문보文父라 하였으며, 눈섭이 길어 눈을 덮으므로 별호를 미수眉叟라 하였다고 한다. 또한 그는 미수眉叟 외에 臺嶺老人․石戶老人․東膠老人․九疇老人․東序老人․二書圃翁 등의 여러 호를 가졌다.
미수의 본관은 陽川으로 가락국의 시조인 김수로왕의 후예로서 선생의 자찬自撰 묘비명墓碑銘 음기陰記에 의하면 신라말기 양천허씨의 시조가되는 허선문許宣文은 나이 90에 고려태조를 섬겼는데, 왕건이 후백제의 견훤을 토벌할 때 많은 음식물과 식량을 대는 등 공이 많았다 하여 공암촌주(孔巖村主)로 삼고 가부徦父로 삼았다고 한다. 공암은 뒷날 양천현이 됨으로서 양천허씨陽川許氏의 근거지가 되었다. 이후 양천허씨의 후예들은 고려조에 많은 명사들이 출사해 오면서 개경을 중심으로 長湍 ․ 坡州 ․ 漣川 ․ 抱川 일대에 자리 잡고 살아왔다.
시조인 허문선의 18대손이 되는 조선조 명종때 좌찬성과 중종때 판서를 지낸 동애공東厓公 허자許磁(乙巳士禍때 李芑의 모함으로 洪原으로 유배된 乙巳名人)가 미수공의 증조부이며, 증조모는 양녕대군의 증손 징파수澄波守 이종엄李終嚴의 따님이다, 조부 송호공松湖公 강橿은 부친의 피화被禍로 한평생 벼슬길을 단념하고 아버지가 이루지 못한 역대사감歷代史鑑 30권을 편찬한 학자였으며, 조모는 문양공文良公 강희맹姜希孟의 현손玄孫 사용공司勇公 강복姜復의 따님으로 모재慕齋 김안국金安國의 외손녀 이다. 이는 허목의 증조부 허자가 모재의 문하생이 였던데서 연유된 것으로 짐작된다.
아버지 교(喬)는 호를 수옹壽翁 또는 유악維嶽이라 하였으며 어려서 화담 서경덕의 제자인 수암守菴 박지화朴枝花에게 사사하였으며, 효행이 지극하여 특히 그의 어머님에 대한 많은 일화를 남겼다. 벼슬은 포천현감 등 여러 고을의 수령을 지냈으며, 사후에 영의정으로 추증되었다.
미수는 삼형제의 맏이로 형제간의 우애는 물론이며, 동생 허의許懿는 어려서부터 총명하여 율律에도 능통했고, 특히 인물화를 잘 그렸다. 현재 禮山에 모셔있는 목은穆隱 이색李穡의 진영眞影을 모사模寫한바 있는 선비였으며, 막내 아우인 허서許舒는 초서草書와 예서隸書를 잘 써 사람들이 다투어 글씨를 얻어갔으며, 그림에도 재주가 있었다고 근역서화징槿域書畵徵과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문예전고文藝典故 등에 기록되어 있다.
미수는 19세에 문충공文忠公 오리梧里 이원익李元翼의 아들 완선군完善君 이의전李義傳의 딸을 부인으로 맞아 3남 2녀를 두었는데, 큰아들 훤宣+羽, 2남 함咸+羽(安峽縣監), 3남 도翿와 큰딸은 尹昇离에게, 막내딸은 內資寺直長 鄭岐胤에게 시집 보냈다.
2.眉叟 許穆선생의 出生說話
허목의 선조는 경기도 연천에 본거지를 두고 살아왔다. 허목 자신도 출생지는 서울이었지만 연천이 주 생활 근거지였다. 지금도 흔히 자식을 낳으면 태몽胎夢 이야기가 심심치 않게 이야기되며 이를 소중히 여기게 되는데, 허목 역시 태몽과 관련되는 출생설화가 전하여져 오고 있다.
그중에 한가지 설화를 소개하면,
임백호林白湖의 집안에서는 ‘외손과 나그네는 집에 재우지 말라’ 는 속설이 전하여 내려오고 있었다.
백호가 몹시 무더운 어느 여름철 한낮에 낮잠을 자고 있는데 느닷없이 청조靑鳥 한 마리가 온 집을 시원스레 한 바퀴 돌더니 안방으로 쏙 들어가는 것이었다.
꿈에서 깬 임백호는 예사롭지않은 꿈에 고개를 갸웃하였다.
“허, 이거 참 대단한 길몽인데?”
자기 집안 사람을 살펴보니 젊은 사람이 없어 아기를 낳을 사람이 없었다.
“쯧 쯧, 너무나 아깝구나, 태몽이 분명한데”
백호가 안타까워하고 있는데 갑자기 밖에서 요란스러운 말발굽 소리가 들리는게 아닌가!
“거기 누구 왔느냐?”
“네 접니다”
대답하는 소리와 함께 얼굴을 쑥 내미는데 보니까 사위였다.
“아니, 자네! 온다는 소식도 없이 어찌 왔는가?”
사위의 말은 이러하였다.
“네, 장인어른 며칠후에 과거시험이 있지 않습니까? 과거시험보러 가는 도중에 짬을 내서 잠깐 들렀습니다.”
그 때 딸은 당시의 풍습에따라 친정에 머므르고 있었다. 다시 좋은 날을 택하여 시댁에 가게 되는데 친정에서 아들을 낳아 데리고 가는 경우도있고 못낳고 가는 경우도 있었다. 백호의 딸은 아직 아이가 없는 상태였다.
이런 처지에 사위가 왔으니, ‘이 귀한 꿈을 사위가 훔쳐 가면 안되는데 라고 생각하며 어서 사위가 갔으며 좋으련만!’
그런데 반갑지 않은 눈치를 역력히 줘도 눈치없는 사위는 도무지 자리에서 일어 설 생각을 하지 않는 것이다.
“자네, 과거길은 넉넉한가? 급한 걸음을 하면 제대로 실력을 발휘할 수가 없을텐데 말이네, 미리미리 여유를 갖는 게 좋으이” 이렇게 말을 던져도 사위는 천하태평이었다.
“아무 걱정 마십시오. 넉넉하게 날을 잡아 출발했으니까요”
그러는 참에 갑자기 소낙이가 세차게 몰아쳤다. 장대비가 쏟아지는 판에 사위를 내몰 수는 없었다.
마음속으로는 애가 달았지만 겉으로는 표현할 수도 없는 처지였다. 그러나 석양녘이 되자 하늘도 무심치 않았는지 빗줄기가 조금 가늘어졌다. 마음이 급해진 백호는 웃는 얼굴로 사위를 독촉하며 말했다.
“여보게 썩 일어서게나! 날이 개지 않았는가? 활짝 갰으니 서울로 과거보러 가는 사람이 머뭇거리면 되겠는가? 얼른 일어서게나”
그런데 장인의 속셈을 모르는 사위는 이렇게 딴청을 부리는 것이었다.
“장인어른 시간이 넉넉하다니까요. 걱정 안하셔도 됩니다.”
“아니야, 쉬더라도 서울에 도착해서 여유있게 쉬어야지, 혹시 길을 가다가 변이라도 생기면 어떡하겠는가? 안그런가?”
그 말에도 사위는 끄떡 없었다.
“아이고 , 장인어른, 오랜만에 처가에 왔는데 어떻게 그냥 갑니까? 하룻밤이라도 아내랑 오순도순 이야기 하며 묵교 가야지요”
그렇게 까지 말하는데 더는 야박하게 가라고 등을 떠밀 수는 없었다.
임백호는 사위를 그대로 돌려보내는 것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다음 방법을 강구하였다.
‘그래 청조靑鳥가 큰방으로 들어왔으니까 큰 방에 만 안 재우면 되겠지, 작은 방에서 자면 꿈하고는 상관 없을 거야’
그래서 장인은 작은 방으로 사위의 등을 밀며 말하였다.
“자, 그럼 이 방에서 편히 쉬게”
그런데 사위가 고개를 흔드는 것이었다.
“장인어른 싫습니다. 모처럼 왔는데 작은방에서 재우실람니까? 저는 큰 방에서 잘랍니다.”
사위는 또 부득부득 큰방에서 자겠다고 우기는 것이었다.
‘허, 거참 곤란한걸!’
그러나 사위의 기분이 상하도록 푸대접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할 수 없구먼, 이 꿈을 사위에게 주는 수 밖에!’
임백호는 허탈하게 웃으며 사위에게 말 하였다.
“그러게, 큰 방에서 자게. 편히 잘 자게나”
“하하, 고맙습니다. 장인어른”
사위가 큰 방에서 하룻밤을 묵고 떠난 후에 딸에게 태기가 있었다.
그후 배가 부른 채 딸은 시댁으로 돌아갔는데, 얼마 후에 외손자를 낳았다고 보러 오라는 전갈이왔다.
‘어허, 대체 어떻게 생긴 인물일꼬! 정망 궁금하고나’
장인은 기대가 커서 발이 땅에 닿지도 않는 것 같았다.
그런데 장인과 반대로 딸과 사위는 걱정이 태산같았다. 태어난 아들의 생김새가 너무나 희한하기 때문이었다. 사람의 꼴이 아니었던 것이다. 얼마후 딸이 남편에게 귀속말로 “여보 이렇게 하면 어떨까요?” 하고 의논끝에 마침 같은 또래의 하인의 아이를 장인에게 데려다가 보여드렸다.
백호는 “어디보자” “이런, 쯧쯧. 걸출한 놈이 태어날 줄알았는데, 못쓸 인물이로구나. 보기 싫으니 어서 데리고 나가거라”
너무나 실망한 장인 어른이 딱하여 사위는 진짜 자식을 다시 안고 가서 사실을 말씀 드렸다. 장인은 그때야 흡족한 듯 함박웃음을 지으며 “오, 그러면 그렇지! 이놈, 이거 한 인물 하겠구나” 하였다.
그 아이가 바로 조선조 중기의 대학자요, 전서체篆書體의 대가이며, 남인南人의 영수領袖가 된 미수 허목許穆이었다.
3. 모신 스승들과 學統
1). 眉叟가 모신 스승들
미수는 부친의 영향을 많이 받고 자랐다. 아버지 허교(許喬)는 일찍부터 수암 박지화(守菴 朴枝華)의 문인이다. 박지화는 화담 서경덕(花潭 徐敬德)의 제자로서 스승의 도가적 성향을 가장 잘 이어온 인물인데, 특히 주역을 화담으로부터 직접 배웠다. 당시 사상계의 조류였던 儒․佛․仙 삼교에 박통했으며, 예에도 매우 밝았고. 특히 기(氣)수학에 있어서는 당대의 제1인자였다.
이러한 주변의 여건으로 보아 허목에게는 화담 서경덕의 박학한 전통을 크게 받았을 것으로 미루어 짐작케 된다.
또한 허목은 외조부인 임 백호의 영향을 받아 산수유람을 즐기고 세상으로부터 벗어나려는 산림으로서의 자질이 생겼을 것으로 보인다.
注:
『白湖 林悌(1549-1587)는 어려서부터 지나치게 자유분방하여 스승이 따로 없다가 20세가 넘어서 어느 겨울날 호서를 거쳐 서울로 가는 길에 우연히 지은 시(詩)가 成運에게 전해진 것이 계기가 되어 그를 스승으로 모시게 되었으며 그로부터 3년간 중용中庸을 800번이나 읽었다는 일화는 유명하다.
백호는 교속敎束에 얽매이기 보다는 창루娼樓(창기)와 주사酒肆(술집)를 배회하며 살다가, 23세에 어머니를 여의고 창루와 주사에서 버서나 현실세계로 뛰어든 그의 눈에는 부조리(不條理)와 당쟁(黨爭)만이 가득 찼다.
1576년 28세 때 속리산에서 대곡大谷 성운成運(1479-1579:자신의 형이 乙巳士禍로 화를 입자 속리산에 은거하였으며, 토정 李芝菡, 화담 徐敬德, 남명 曺植등과 知己로서 交遊했다)을 하직하고, 생원시와 진사시에 연속 합격하고 이듬해 알성시에 급제한 뒤 병마사․예조정랑․홍문관지제교를 지낸 그의 눈에는 서로 헐뜻고 비방하고 질시하면서 편당을 지어 공명을 탈취하려는 속물들의 비열한 몰골들이 그의 호방한 성격에 용납되지 않았다.
벼슬에 대한 선망과 매력, 흥미와 관심은 차차 멀어져가고 환멸과 절망과 울분과 실의가 가슴 속에 사무쳤다. 그러기를 10년간의 벼슬살이는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벼슬에 환멸을 느껴 유람하였는데 가는 곳 마다 숱한 일화를 남겼다.
서도병마사로 임명되어 임지로 부임하는 길에 황진이黃眞伊의 무덤을 찾아가 시조한 수를 짓고 제사를 지냈다가 임지에 부임하기도 전에 파직당한 이야기는 유명한 일화이다.
성운이 세상을 등진 이래 知己가 끊어지고 이리저리 방황하다 고향인 회진리에서 39세로 졸했다. 백호는 운명하기전 여러 아들에게 “천하의 여러나라가 제왕을 일컫지 않은 나라가 없었는데, 오직 우리나라만은 끝내 제왕을 일컫지 못하였으니, 이같이 못난 나라에 태어나서 죽는 것이 무엇이 아깝겠느냐! 너희들은 조금도 슬퍼할 것이 없느니라” 고 한뒤 “내가 죽거든 곡哭을 하지 말라” 는 유언을 남겼으며 그의 아들 임기 역시 도가의 한 사람이었다.』
이와 같이 외조와 아버지로부터 도가적인 영향을 적지 않게 받았을 것으로 여겨지는 허목은 21세 되던 해에 명종-선조간의 대 문장가이며 뛰어난 인격자인 총산 정언옹(葱山 鄭彦顒)을 뵙고 그 문하생이 되었다. 진주목사와 대사성을 역임하고 시문과 효행이 높았던 송천 양응정(松川 梁應鼎:1519-? 선조때 8대문장가의 한사람)은 총산 정언옹을 일컬어 1000년이 지난다 해도 이렇듯 훌륭한 분은 다시 태어나지 못할 것 이라고 예찬을 했는데 허목은 이렇듯 훌륭한 스승으로부터 예기(禮記)․단궁편(檀弓篇)을 배운바 있다.
23세 되던 해에는 부친인 의정공을 따라 임지인 거창으로 갔는데 여기서 서애 유성룡(西厓 柳成龍)과 동강 김우옹(東岡 金宇顒)의 천거로 동몽교관과 선공감주부 등의 벼슬을 지낸 이름 높은 모계 문위(茅溪 文緯: 1555-1632:거창출신으로 曺植․吳健․鄭逑의 門人이다)선생을 찾아뵙고 그 문하에 출입하며 학문을 닦았다. 모계 또한 선생을 중히 여겨 여타의 젊은이와 달리 대하였다. 그 후 모계의 추천으로 종형인 관설공 허후(觀雪公 許厚)와 함께 성주로 가서 한강 정구(寒岡 鄭逑: 1543-1620)선생을 스승으로 섬겼다.
한강선생은 덕계 오건(德溪 吳健: 1521-1574: 본관 咸陽, 曺植․李滉․金麟厚의 門人)에게 역학(易學)을 배운 분으로 과거에는 뜻을 두지 않고 退溪․南冥․大谷 등 삼현(三賢)에게 수학 하였다. 후에 백매원(百梅園)을 만들어 제자를 가르치는데 힘씀으로서 그 명성이 경향각처에 자자하였다.
한강은 심학과 예학에 밝을 뿐만 아니라 그 학문 폭이 넓어 歷史․地誌․文學․醫學 등에 관한 많은 저서를 남겼다. 그러면서도 그의 학문은 매우 실용적이었다. 이와 같은 한강의 학풍은 미수 허목에게 깊은 영향을 끼쳐 미수의 사고(思考)를 더욱 현실에 밀착시키고 학문적 시야를 넓혀 주었다. 이러한 한강은 사후에 후학들에 의해 천곡서원(川谷書院)에 정주(程伊川과 朱子)와 같이 모셔졌고, 성주 사람들은 동강서원(東岡書院)을 세워 한강(寒岡)을 배향하였다.
허목은 훌륭한 스승이 계시다고 하면 천리를 불사하고 찾아가기를 서슴치 않았는데 모계 문위, 한강 정구 그리고 한강의 조카사위인 여헌 장현광(旅軒 張顯光)선생을 찾은 것도 이러한 일정에서 비롯된 것이다.
2). 기호 남인학파의 종장(宗匠)이된 미수(眉叟)
미수는 한강을 섬긴지 3년 되는 26세 때 한강이 타계하자 상복을 입고 애사(哀詞)를 지어 바쳤다. 허목이 스승인 한강이 돌아가심을 남달리 애통해 하신 것은 한강이 문하에 많은 제자 중에서도 허목에 대하여 특별히 촉망의 눈길을 주었기 때문이다. 허목은 한강의 많은 문도 중에서 제일 나이어린 문도로서 한강의 학통을 근기지방으로 가져와 근기학파(近畿學派)를 형성하여 영남학파를 형성한 서애(西厓)와 학봉(鶴峯)이 이룩한 영남의 퇴계의 후학과 더불어 근기지방의 퇴계학의 계승자로서 큰 학맥을 형성하였다.
허목은 위로는 퇴계의 학을 한강으로부터 이어받아 아래로는 성호 이익(星湖 李瀷)의 학문으로 발전시켜 영남의 성리학과 근기(近畿) 실학의 가교적 역할을 하게 되었다. 이는 퇴계의 학을 정구로부터 이어받은 미수에게 사숙한 성호가 성호학파를 이룬 점으로도 알 수 있다.
허목은 숙종조 초 정치적으로는 청남(淸南)의 영수였으며, 학문적으로는 근기지방의 기호남인의 종장(宗匠)으로서 眉叟 許穆-星湖 李瀷- 順庵 安鼎福․鹿庵 權哲身- 茶山 丁若鏞으로 이어져 근기남인학파(畿湖南人學派)가 형성되어 조선조 후기의 실학사상 발전에 밑거름이 되었다. 특히 성호 이익과 그의 조카인 혜환재 이용휴(惠寰齋 李用休1708~1782)와 이용휴의 아들인 금대 이가환(錦帶 李家煥1742~1801)을 거쳐 다산 정약용(茶山 丁若鏞1762~1836)에 이르는 국학분야의 큰 축을 이루었다.
3) 眉叟와 交遊한 文人들
허목은 평생의 지기(知己)로 용주 조경(龍州 趙絅:1586-1669)을 외우(畏友)로 삼았다. 허목은 9년 연상의 조경을 20대에 만난 이후 평생을 교우관계를 지속하면서 절친하게 지냈다. 조경은 본관이 한양으로 세종조에 우상을 역임한 좌명공신 조연(趙涓)의 7대손으로 광해군 4년에 사마시에 합격하여 벼슬은 재상의 지위에 이른 사람이다. 마음가짐이 곧고 결백했으며, 명산 대택을 유람하기를 좋아 했다. 미수는 23세 때 거창에서 조경을 만나 일생을 외우로서 지내면서 서로 간에는 편지로서 또는 대화로서 많은 충고가 있었다고 記言 별집에 적고 있다.
허목과 조경은 서로 의기투합하여 서로의 우의를 돈독히 하면서 반계 유형원(磻溪 柳馨遠:1622-1673)과도 친교가 지냈으며, 이와 같은 인연으로 반계의 스승이며 고모부가 되며 허봉(許篈)의 외손자인 동명 김세렴(東溟 金世濂;1593-1646)의 유문(遺文)의 서문(序文)을 허목에게 청했고 허목 또한 유형원에게 서신을 보내는 등 교분을 가졌다.
허목의 학통을 이은 성호의 집안과는 선대부터 세교가 있었는데 성호의 조부 이지안(李志安:1601-1657)은 미수와 도의지교를 맺은 사이였고 부친인 매산梅山 이하진李夏鎭(1628-1682)은 허목과 같은 청남에 속해 뜻을 같이 했으며 그의 종형인 이원진이 편찬한 황려세고(黃驪世藁)의 서문을 써주기도 하였다.
허목과 교분이 있었던 창강 조속(滄江 趙涑:1596-1668)은 유일로 진선(進善)과 장령(掌令)에 이르렀다. 조속은 인조반정에 공을 세웠으나 훈명(勳名)을 극력 사양한 인물이다. 천성이 부귀와 권세를 기피했으며, 산수화에 능했고 학문도 깊어 세인의 존경을 받았던 조속은 미수가 71세 때 조경과 함께 3인이 손영초당(蓀嶺草堂)에 모여 봄놀이를 하였다고 기록되어있어 미수는 초당파(超黨派的)인 친분을 유지했음을 알 수 있다.
이밖에 미수는 불승(佛僧)들과도 교유했다는 대목이 기언에서 찾을 수 있으며, 이외에 모아(毛兒)의 승(僧) 신욱(信旭)과 운게사(雲溪寺)의 법윤(法潤), 백운사의 노승 등에게 시문을 지어 주는 등 그들과 관계를 맺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정응대사 와 미수는 지기(知己)였음을 밝히고 있으며, 사문난적으로 몰린 윤휴와도 학문적으로 많은 논의를 했으며, 기인으로 알려진 강백무(姜伯茂), 그리고 이색의 6세손 만각 이정호(晩覺 李挺豪), 종형인 관설공 허후(許厚), 종실인 완양군 정이 이명웅(完陽君 廷而 李命雄), 평생지기인 조경 등이 있는데, 이들을 자신의 인품과 비교하기를 돈행(敦行)과 사심(師心)은 이정호먼 못하고, 일을 처리함은 설웅 허후만 못하고, 과단성은 이명웅만 못하고, 청렴과 결백은 용주 조경만 못하다 라고 겸양지심(謙讓之心)을 내 비치고 있다.
4. 은거당(恩居堂)과 광복후의 북한 예술동맹(藝術同盟)
경기도 연천군 왕징면 강서리는 나지막한 산으로 오밀조밀 이루어진 경기 북단의 산골이다. 농토는 비옥하여 그런대로 살기좋은 고장이다.
매지울을 지나 산재고개를 넘어 고잔하리로 가면 잠경대 앞을 흐르는 임진강은 매우 수려한 경관을 이루고 있다. 강가 단애(斷崖)를 이룬 석벽에는 봄이면 철죽이 만발고 부엉이가 살고 있으며 갖은 기화요초가 무성하며 석청(石淸)이 있는 그야말로 아름다운 경관을 이루고 있다.
일본의 만행이 한참이던 1940년대에는 구녕장 미수공산소 옆 낮으막 한 구녕장 뒷산에는 이곳에도 어김없이 일본신사(日本神社)가 지어져서 일본군에 끌려가는 청년들의 입영(入營)행사가 아니면 일황(日皇)의 생일인 천장절(天長節) 그리고 제2차 세계대전인 소위 대동아전쟁 기념식이 열리는 12월 8일 등 무슨 행사 때가 되면 이곳 신사(神社)에 모여 당시 왕징면장인 이OO․ 윤OO씨와 왕징공립국민학교 일본인 ‘모리야쓰 오리노스게’교장의 연설과 만세 삼창으로 식을 마쳐야 했다.
어린 나의 생각에는 이것이 당연히 해야 하는 행사였고 필연적인 행사라고 생각했었다.
그러나 1945년 8월 15일 광복과 더불어 이런 행사가 하나의 허구적 행사로 판명되었다. 해방 이후 어지러운 속에 이곳은 당시 38이북인 관계로 소련군이 들어왔고 이어서 북한 정권이 수립됨에 따라 공산치하에서 신음하게 되었다.
왕징국민학교도 왕진인민학교로 변하여 교장으로 일정시대의 면장을 지낸 이OO 면장의 아들인 연희전문학교 출신 이OO이 취임하였다. 이OO 교장은 공산주의를 위해 태어난 사람같이 우리 어린 가슴에도 느껴 젔다. 그는 항상 온정신이 공산주의 밖에는 모르고 항상 신바람이 나서 공산주의와 스타린․레닌․김일성 밖에는 모르는 것 같이 보였다.
미수공의 위패와 영정을 모셔놓은 은거당은 일정 때도 신사를 짓기 전에는 은거당 영당 앞을 지나는 길에는 머리숙여 목례를 하고 지나도록 학교에서 배웠다. 그러나 이곳에 살던 종손 허혁씨 일가가 서울로 떠나고 난 뒤에 은거당 강당과 재실에는 북한 예술동맹이 들어앉아 매일같이 쿵덩 대면서 연극연습장이 되어 버렸다.
나는 어린 마음에도 미수는 위대한 분이었다고 배웠고 그렇게 느꼈는데 조용하고 엄숙해야 할 이 집에 예술동맹이 들어와서 매일같이 딴따라 패거리가 쿵덩 대면서 시끄럽게 하는 것이 매우 못마땅하게 느껴졌다. 그 후 나도 역시 우리의 고향인 양주군 남면 신산리로 월남하여 1년 남짓 초등학교를 마치고 서울로 왔기에 그 이후의 사정은 알 수 없으나 지금의 은거당 터를 가보면 6. 25 한국동란으로 모든 것이 초토화 되어 은거당 터는 물론이며, 은거당 앞에 상징처럼 서있던 천년은 됨직한 큰 향나무도 간데없고, 옆에 있던 학교터 는 물론이며 모두가 논과 밭으로 변해 버렸으며, 구녕장터에는 최전선을 지키는 국군 초병만이 초롱초롱한 눈빛으로 검문에 열중하고 있다. 지금이라도 은거당을 복원하여 미수 허목선생의 얼이라도 되새기게 되었으면 하는 아쉬움을 남기게 된다.
글을 쓰다 보니 야은 길재선생의 시 한구가 생각나서 적어본다
오백년 도읍지를 필마로 돌아드니
산천은 의구한데 인걸은 간 곳 없네
어즈버 태평 년 월이 꿈이런가 하노라
첫댓글 미수 선생에 대하여 성헌 님이 정리하셔서 고맙습니다. 친구분이신 허찬 선생님이 반가와 하시겠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