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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물포초대작가묵향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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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인화자료모음방 스크랩 ◈ 조선 시대의 명화 65매 감상
용암 추천 0 조회 17 10.02.21 20:54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 조선 시대의 명화 65매 감상

 

1.

 

작가 : 이불해(李不害)
제목 :
예장소요도(曳杖逍遙圖)
언제 : 16세기 후반
재료 : 비단에 담채
규격 : 18.6 x 13.5 cm
소장 : 국립중앙박물관

해설 :
 
이불해는 조선시대 중기의 선비화가로 알려져 있으나. 그의 신상에 대하여는 밝혀진 사실이 적다. 자(字)가 태수(太綏)라는 것과 정호음(鄭澔陰)의 시에 이르기를 삼우(三友) 즉 山水. 난죽(蘭竹). 금주(琴酒)를 잘한 인물로 전해온다. 실제로 현존하는 작품이 드물어. 그의 회화 수준이나 화풍은 예장소요도에 의존하여 왔다. 아주 작은 소품이긴 하지만. 水墨과 담청(淡靑). 필치가 간결하고 깔끔한 가작(佳作)이다. 또한 작은 화면이지만 근경의 석교(石橋)와 나무. 고사(高士)등 경물이 배치된 언덕에서 바라본 원산의 안개 처리는. 시원한 공간감을 느끼게 해준다.
언덕 위의 고사(高士) 좌우에 배치된 소략한 나무들의 표현은 안견화풍의 변모로 여겨진다. 즉. 안견의 작품으로 전해오는 <사시팔경도>에 보이는 잡목의 수지법(樹枝法)을 연상케 한다.
개활함은 안개에 싸인 원산에서. 그리고 그 표현은 남송대 화풍을 반영한 것이다.
호연지기 속에있는 지팡이를 의존한 고사 인물의 묘사는 중기에 유행하는 절파계(浙派系) 화법의 냄새도 풍긴다. 이처럼 예장소요도에는 초기부터 이어온 여러 화풍과 새로운 양식이 복합적으로 담겨 있으며. 이는 중기 회화 경향의 한 단면을 잘 말해주는 것이다. 이 작품 외에 이불해의 것으로 전칭해 오는 몇 점의 산수도들은 중기에 두드러졌던 절파계 화풍의 영향이 가미되어 있다. 
 
 
 2.
 
 
작가 : 이경윤(李慶胤)
아호 : 낙파(駱坡)·낙촌(駱村)·학록(鶴麓).
제목 : 산수인물도(山水人物圖)
언제 : 16세기 말
재료 : 족자 비단에 담채
규격 : 91.1 x 59.5cm
소장 : 국립중앙박물관

해설 :
이경윤은 성종(成宗)의 제11자인 이성군(利城君) 이관(李慣)의 종증손(從曾孫)으로 16세기 후반의 화단(畵壇)에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했던 사인(士人) 화가이다.
그는 특히 산수와 인물을 잘 그렸다고 전하며. 아우 이영윤(李英胤)과 그의 아들 이징(李澄) 역시 일가를 이루었다. 산수인물도는 동자를 거느린 두 노인이 담소하고 있는 장면을. 넓은 산수를 배경으로 그린 대경(大景)산수인물화이다.
인물을 중심으로 한 전경은 담채와 농묵으로 처리하고. 상단 전체에 넓게 펼쳐져 있는 원산과 그아래 마을은. 담묵으로 처리하여 거리감이 드러난다.
전체적으로 복잡한 느낌을 주지만. 공간이 크게 확대되어 있고. 산이나 바위는 흑백의 대비가. 현저한 면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비스듬하게 솟은 산들은 절파계 화풍을 보여주고 있다.
고담(枯淡)한 배경 묘사와 인물들의 자연스러운 자세. 암벽뒤에 그려진 학에 의하여 청정한 분위기가 감돈다.

 

 


 3.
 

작가 : 이경윤(李慶胤)
아호 : 낙파(駱坡)·낙촌(駱村)·학록(鶴麓).
제목 : 시주도(詩酒圖)
언제 : 16세기 말
재료 : 모시에 수묵
규격 : 23.3 x 22.5cm
소장 : 호림미술관

해설 :
이 시주도는 산수인물화첩의 첫면에 실려 있으며. 다른 8엽과 더불어 비록 관서(款署)나 도인(圖印)은 없지만. 이경윤이 생존해 있던 시기에 쓴 찬문(贊文)이 적혀 있고. 또 화격(畵格)이 높은 점 등으로 미루어 보아 그의 진필로 간주된다.
동자가 허리를 굻혀 받쳐 들고 있는 술 항아리를. 돈(墩)에 앉아서 바라보고 있는
학창의(鶴?衣) 차림의 선비를 묘사한 이그림에는. 간이당(簡易堂) 최립(崔?)이
1598년 겨울에 달필로 쓴. 발문과 찬시가 배경 없이 비어있는 화면의 여백을 빽빽히 채우며 적혀있다.
발문을 보면 이 시주도를 포함한 9점의 그림들이 흩어져 있다가. 성천부사(成川府使)를 지낸 유학자(儒學者) 홍준(洪遵)에 의해 수집되었다는 사실과. 그려진 인물들이 비범하고 속기(俗氣)가 없어 보여. 작가인 이경윤을 만나본 적은 없지만.
이 인물들 속에 혹시 자기도 모르게 표현된 작가 자신의 모습이 깃들어 있을지도 모른다는. 내용이 담겨 있음을 알수 있다. 인물들의 자연스런 모습과 단아한 표정도 훌륭하지만. 옷주름의 필선 또한 매우 능숙하고 유연하다.
의습선의 필치는 굵고 가는 선폭의 변화를 특징으로 하는. 오도자(吳道子)계열의 전통을 바탕으로 전개된. 남송대 마원 이래의 궐두묘(獗頭描)를 받아들여. 이를 보다 강하고 세련되게 사용하였다.
그리고 접힌주름 부분에 보이는 Z 자 모양의 전광형(電光形) 필세는 오위(吳偉)를 비롯한 후기 절파계의 화가들이 즐겨 구사하던 것으로 이 그림의 화풍상의 연원을 말해 주기도 한다.
앉아있는 선비의 오른쪽 하체 부분에 보이는 먹선의 농도가 급격히 떨어져 있어.
다소 어색한 느낌을 주기는하나. 전반적으로 높은 격조를 보이면서. 그의 다른 전칭작들을 비교 검토하는 좋은 기준이 되어 준다
 
 
 4.

작가 : 이경윤(李慶胤)
아호 : 낙파(駱坡)·낙촌(駱村)·학록(鶴麓).
제목 : 고사탁족도(高士濯足도)
언제 : 16세기 말
재료 : 화첩 비단에 담채
규격 : 27.8 x 19.1cm
소장 : 국립중앙박물관

해설 :
이경윤의 작품으로 전칭되는 산수화 중에는 소경(小景) 산수인물화 계통의 그림들이 많다.
그 중의 하나인 이 고사탁족도는 낙파연주첩(駱坡聯珠帖) 이라고 표제(表題)된 화첩에 속해 있던 것이다. 나무 아래의 물가에 앉은 선비가 술주전자를 받쳐 든 시동을 바라보며. 냇물에 발을 담그고 있는 장면을 묘사했는데. 가벼운 여행용 봇짐을 등에 메고 술 주전자를 든 동자의 모습이라든가. 앞가슴을 풀어 헤친 선비의 모양새등으로 보아 세속의 명리(名利)를 떠나. 흐린물에 발을 씻었다는 은일파 초탈의 심회를 담은것이 아니라,
먼 여행에서 돌아와 흐르는 물에 발을 담그고 쌓인먼지을 ?으며 술을 대접 받았다는 선화유사(宣和遺事)의 내용을 그린것으로 생각된다.
구도는 수하(樹下)인물도 계열의 오랜 전통을 따랐으나 토파와 냇돌. 의습선 등에는 절파풍(浙派風)이 완연하다.
단아하게 생긴 선비의 얼굴 모습은 호림(湖林)미술과과 고려대학교 박물관에 소장된 그의 산수인물도들의 소사들고 닮아 보인다.
그러나 옷주름의 필선은 그들보다 경직된 느낌을 준다.
화면의 오른편 상반부의 깁 바탕이 탈손되어 있는 등 보존상태는 좋지 않으나.
나뭇가지와 인물의 의복 등에는 담채의 색조가 비교적 곱게 남아 있으며.
전반적으로 깔끔한 분위기가 감돈다.
 
 
 
5. 
 
 
 
 
 
 
 

작가 : 이정(李楨)
아호 : 나옹(懶翁)·나재(懶齋)·나와(懶窩)·설악(雪嶽).
제목 : 산수도(山水圖)12면 중4면
언제 : 17세기 초
재료 : 화첩 종이에 수묵
규격 : 각19.1 x 23.5 cm
소장 : 국립중앙박물관

해설 :
이정은 30세의 아까운 나이에 요절한 조선 중기의 대표적 화가중의 한사람이다.
허균(許筠)이 쓴 이정애사(李楨哀?)에 의하면 그는 이배련(李陪蓮)을 할아버지로,
이숭효(李嵩孝)를 아버지로 해서 태어났으나. 일찌기 부모를 여의고 집에서 그림공부를 했다고 한다.
5살 때 승형(僧形)을 그렸으며 10세에 이미 대성하여 산수. 인물. 불화 등에 모두 능통했고. 1606년에 명사(明使)로 우리나라에 왔던 문인화가 주지번(朱之蕃)으로 부터는 천고에 최성(最盛)이고 해내(海內)에 짝이드물다"는 절찬을 받기도 하였다. 12엽 으로 이우어진 이 화첩에는 그의 이러한 천재적 면모와 기질이 잘담겨있다. 그중 4엽만이 소개되었는데, 모두 방일(放逸)한 발묵(潑墨)과 파묵(破墨)의 묘취(妙趣)가 넘치는 일품들이다. 번지듯 스며있는 담묵의 바탕에 거칠고 대담한 묵찰(墨擦)을 가하여 화면에 강한 활력을 불어넣었으며. 특히 2.3엽에 보이는 지극히 종일하고 과격한 농묵의 붓질은 마치 파격적인 일품양식의 선종화(禪宗畵)를 대하는 듯 하다.
이렇듯 대담한 성격의 묵법은 다음 <산수도)에서도 볼수 있었던 절파계의
조야(粗野)한 필묵법이 더욱 방일하게 발전된 것으로. 여기에 남송대의 선승화가(禪僧畵家) 목계(牧谿)와 옥간(玉澗)의 산수화풍과 선종인물화의 호방한 양식.
그리고 그의 천재적이고 방외인적 기질 등이 가미 되었다고 볼수 있다.
신흠(申欽)이 이정의 화풍에 대해 인공(人工)의 전륜함을 넘어 신품(神品)의 경지에 도달했다고 한 평도 이정의 묵묘 솜씨를 두고 했던 말이 아닌가 생각된다.


6.
 춘(春)

 

하(夏)



추(秋)

 

동(冬)

 

작가 : 윤의립(尹毅立)
아호 : 월담(月談).
제목 : 춘.하.추.동경산수도(春.夏.秋.冬景山水圖)
언제 : 17세기 전반
재료 : 화첩비단에 담채
규격 : 각21.5 x 22.2 cm
소장 : 국립중앙박물관

해설 :
윤의립은 조선시대 중기의 선비화가로서. 현존하는 작품이 많지 않으며.
여기에 소개한 산수화첩으로 그의 회화를 평가해왔다.
자(字)는 지중(止仲). 호(號)는 월담(月談). 초명(初名)은 의립(義立)이었다.
산수화첩을 통해 본 윤의립의 회화는 중기 화단에서 빼놓을 수 없는 위치를 점유한다.
여기적(餘技的) 미숙함을 탈피한 화격(畵格)을 갖추고 있고. 중기 회화의 동향인
복합적인 화풍을 소화하고 있기 때문이다.
춘하추동 네 계절을 표현한 화첩은 현재 6폭이 전해온다.
두점은 파본된것 같다.
1폭은 낮은 언덕위의 두 거목(巨木)이 화면을 인상깊게 차지하였다.
그 언덕 아랫길에 봄나들이를 나선 듯 일산(日傘)을 쓴 선비와 시동이 점경인물로 등장하였다.
부채살처럼 펼쳐진 나뭇가지에 연한 태점으로 잎을 표현한.
두 그루의 거목은 느티나무를 연상케 한다.
두 거목에 언덕 아래 좌측으로 뻗은 넓은 잎의 가지 표현으로 변화를 주었다.
거목위로 보이는 원산의 능선 모습과 흐름은. 우리 주변에서 흔히 복수있는 야산을 닮았다.
2폭은 대각선으로 배치된 강 언덕의 포치는 편파구도를 따른 것인데.
세척의 배를 가까이 끌어들여 진한 먹으로 크게 묘사하였다.
그럼으로서 화면의 좌우 평형을 유지시켰고. 반면에 편파구도 양식의 균형을 깬 것이다.
3폭은 넓은 수면과 강가 풍경을 편파구도 형식으로 담았다.
근경에는 언덕과 소나무가 화면의 엑센트로 표현되었고. 그 뒤로 긴 나무 다리가 그려져 있다.
다리 위의 점경인물은. 짐을 실은 나귀와 시종. 봇짐을 긴 가지에 걸어 어깨에 멘 시종을 앞세우고. 지팡이를 짚고 가는 선비를 그려넣었다.
중경의 거암과 폭포. 그 뒤로 강안과 마을, 원산을 표현한 담묵의 시원한 부벽준법은. 하규 화풍을 가장 근접하게 반영한 것이다. 4폭은 안견파 화풍을 소화한 것이다. 즉 좌측 아래의 한림(寒林)의 수묘법(樹描法)과 언덕의 고실고실한 붓질이나. 누각 표현에서 볼수있다. 좌측 언덕과 경물의 배치는 편파구도를 새롭게 구성시켰다. 겨울 강변의 설경을 담은 이그림은. 빠른 필치의 간결함이나 담묵과 극히 절제된 담채의 차분한 표현으로. 산수화첩의 그림들중에서 가장 뛰어난 솜씨를 보여준다. 동경산수도에만 “월담?묵” 이라는 행서체 주필(朱筆)이 씌어있어 윤의립의 그림이라는 것을 확인케 해준다.

 
7. 

 



작가 : 이징(李澄)
아호 : 허주(虛舟).
제목 : 이금산수도(泥金山水圖)
언제 : 17세기
재료 : 족자 비단에 이금
규격 : 87.8 x 61.2 cm
소장 : 국립중앙박물관

해설 :
흩어진 듯 화면을 꽉 채운 각 경물들은 근경. 중경. 원경으로 이어지면서
웅장하고 퍼스펙티브하게 구성되어 있다. 대체로 화면의 무게가 오른편으로 다소 치우쳐 있어, 안견파의 편파구도적인 특징을 나타내고 있다.
안견파의 전통은 구도와 공간구성. 해조묘의 수지법. 준법과 필묵법 등에서도 완연하다. 그러나 보다 확산된 공간개념과 산들의 흩어진 모습 등은 17세기 적인 특징을 말해 준다.
 
 8.





 
작가 : 김명국(金明國)
아호 : 연담(蓮潭) 또는 취옹(醉翁)
제목 : 사시팔경도(四時八景圖) 4폭
언제 : 1662년
재료 : 화첩 비단에 이금
규격 : 각27.1 x 25.7 cm
소장 : 국립중앙박물관

해설 :
김명국은 17세기의 조선화단에서 여러 분야에 두루 뛰어났던 화원(畵員)으로.
자는 천여(天汝). 호는 연담(蓮潭) 또는 취옹(醉翁)이다.
그는 도석인물(道釋人物). 초상. 불탱(佛撑) 및 산수에 이르기 까지 다방면에 걸쳐
수작(秀作)을 남겼다.
당시 화단에 크게 유행했던 절파계(浙派系) 화풍의 가장 대표적인 화가일 뿐더러.
조선시대에 있어 흔치 않은 선종화(禪宗畵) 계통의 그림도 남기고 있다.
이그림은 이금산수(泥金山水)로 사계절을 8폭에 담은 화첩중 초춘(初春). 만춘(晩春). 초하(初夏). 만하(晩夏)의 네폭이다. 각 계절마다 두 폭씩 8폭으로 꾸미는 것은. 조선전기에 있어서는 필자 미상의 소상팔경도나. 안견 전칭의 사시팔경도가 현존되어. 일찍부터 그려졌음을 알수 있고. 중기에는 이불해의 전칭작이나.
이징의 작품이 전래되고 있으며. 후기에는 정선, 최북. 강세황. 심사정. 등에 의해
줄기차게 그려졌다. 이그림은 두폭씩 한쌍을 이루되. 각기 좌우에 치중하여 중앙을 비우는 화면 구성을 이루고 있다.
初春은 오른쪽으로 비중을 둔 그림이다. 春景에는 수면을 비교적 좁게 나타냈고
물결이 잔잔하며. 전경 에 나타난 수종은 덩굴이 감긴 노송으로 되어있다.
晩春에 이르면 버드나무가 전경에 등장하여. 우중 임을 알려주고 물살이 다소 높아져 있다. 晩夏는 야경으로 보름달이 중천에 떠 있으나. 전경의 나무들은 바람에 크게 흔들리며 사뭇 동적으로 나타나 있다.
김명국은 산수에 있어 소방한 절파계 화풍만이 아니라. 전기화단의 안견화풍도
오히려 노년기에 접어들어 그리고 있어. 사시팔경도 화첩 및 남궁연 소장 화첩들은. 그의 또 다른 면모를 알려주는 중요한 자료들 이기도 하다.
신위 가 김명국의 그림에 쓴 제발에 언급했듯이 백년안에 나오기 힘든 화가로서
17세기에서 활동이 두드러진 가장 괄목 할만한 화원 이었다.
 
 
9. 
 

작가 : 김명국(金明國)
아호 : 연담(蓮潭) 또는 취옹(醉翁)
제목 : 설경산수도(雪景山水圖)
언제 : 17세기
재료 : 족자 모시에 수묵
규격 : 101.7 x 54.9 cm
소장 : 국립중앙박물관

해설 :
김명국은 도화서(圖畵署)의 교수를 지낸 화원으로
이름이 명국(明國 또는 鳴國)으로도 알려져 있다.
그는 성격이 호방하고 술을 좋아하여. 크게 취해야만 그림을 그리는 버릇이 있어.
대부분의 그작품은 취한후에 그려진 것이라 한다.
이 그림에도 그의 특색이 잘나타나 있는데. 다른 그림들에 비하여 화면이 약간 정리된듯 하지만. 활달성은 한층 심화되어 있다. 어둠이 채 가시지 않은 겨울 새벽녘인 듯한 시각에. 사립문에 기대어 전송하는 동자와. 뒤를 돌아다보며 길을 떠나는 나귀탄 고사와. 종자의 송별장면이. 눈덮힌 설경을 배경으로 그려졌다.
중경에 그려진 넘어질 듯 솟아오른 산의 무게를 대각선상에서 받치면서.
화면의 변각구도를 보강해 주고 있는 다리와. 그 위의 기려(騎驢)인물은 패교(?橋)를 건너 설산으로 매화를 찾아 떠났다는 당나라의 시인 맹호연(孟浩然)을 연상케 하다. 언덕 과 눈 덮인 산기슭과 앙상한 나뭇가지와. 인물들의 옷주름에 가해진 힘차고 날카롭게 각진 윤곽선이라든지. 거친 묵법 등은 광태파 화풍과의 유관함을 보이면서 어둡고 차가운 설경속 화중인물의 심의(心意)를 잘 승화 시키고 있다.
 
 
10.
 

작가 : 김명국(金明國)
아호 : 연담(蓮潭) 또는 취옹(醉翁)
제목 : 탐매도(探梅圖)
언제 : 17세기 중엽
재료 : 비단에 채색
규격 : 45.7 x 31.6 cm
소장 : 국립광주박물관

해설 :
이 탐매도에는 김명국의 광태적 화풍의 특색이 잘 나타나 있다. 즉 산등성이와 암괴(岩塊)는 굵고 힘찬 필치로 대담하게 묘사 되었으며. 지팡이를 비스듬히 잡고 있는 은사(隱士)와. 그옆의 시자(侍者)의 의습선(衣褶線)들은. 분방하면서도 날렵하여 김명국 특유의 체취를 느끼게 한다. 강한 필치가 연두색 등의 연한 담채에 어울려. 더욱 강렬하게 느껴지며. 화면 전체에 서정적인 분위기가 넘치고 있다. 다만 포치(布置)가 다소 옹색한 느낌을 주는 것이 아쉽다.
 
 
 11.
 

작가 : 김명국(金明國)
아호 : 연담(蓮潭) 또는 취옹(醉翁)
제목 : 달마도(達磨圖)
언제 : 17세기 중엽
재료 : 족자 종이에 수묵
규격 : 83 x 58.2 cm
소장 : 국립중앙박물관

해설 :
김명국은 절파풍(浙派風)의 화가로 유명하지만, 선종화(禪宗畵)에서도.
훌륭한 작품을 많이 남겼다. 그 중에서도 이 달마도는 조선시대의 선종화를 대표하는 걸작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원래 이그림은 일본에서 유전하던 것인데, 8.15해방 후에 구입해 왔다. 따라서 작품의 제작시기는 그가 통신사의 수행화원으로 도일했던 1637년과 1643년의 어느 해일 것으로 추정된다. 김세렴(金世濂)의 해사록(海?錄)에 의하면 그는 사행(使行)기간 동안 일본인들의 그림 요청이 매우 심해서 이에 응하느라 밤잠조차 제대로 자지 못하는 경우가 만았다고 한다. 남인 도인으로서 6세기 경 중국에 건너가 선종의 시조가 되었다는 보리달마(菩리達磨)의 모습은 선종화의 중요 화제(畵題)로서 즐겨 다루어지던 것이다.
여기서는 두포(頭布)를 쓴 달마의 상반신만을 묘사했는데, 9년 동안의 면벽좌선으로 고양된 그의 내면세계가 대담하고 힘찬 몇번의 붓질로 잘 포착되어 있다.
옷 주름에 나타난 극도로 생략된 감필 북자국의 굵고 가는 선폭의 결과모양은
화면에 강렬한 인상을 부여해 주며. 재빠른 필선의 속도에서는 작가의 활기찬 움직임이 느껴진다. 이렇듯 일기(逸氣) 넘치는 화풍은 오대의 석각(石恪)양식에 그 맥을 대고 있지만. 호방하고 방일(放逸)했던 그의 기질과도 상통되는 바 크다.
 
 
 12.
 
 

작가 : 김명국(金明國)
아호 : 연담(蓮潭) 또는 취옹(醉翁)
제목 : 달마절로도강(達磨折蘆渡江)
언제 : 17세기 중엽
재료 : 족자 종이에 수묵
규격 : 97.6 x 48.2 cm
소장 : 국립중앙박물관

해설 :
달마의 초상이나 행적은 선종화에서 즐겨 다루던 소재 였는데. 이 그림도 그의 행적중의 하나를 묘사한 것이다. 6세기 초 중국에 건너간 달마가. 양(梁) 나라 무제(武帝)에게 최초로 설법하였지만 깨닫지 못했기 때문에. 갈대잎을 꺾어 타고 양자강을 건너 위(魏) 나라로 갔다는 전설을 담고 있다. 한 줄기 갈대에 몸을 싣고 서 있는 달마의 얼굴은. 튀어나온 광대뼈와 매부리코. 치켜 올라간 눈매로 매우 강하면서도. 이국적인 인상을 풍긴다. 담묵으로 비교적 섬세하게 묘사된 얼굴에 비해. 의복부분은 죽죽 그어댄 활달한 농묵의 필선으로 간략하게 표현되었다. 추춤거리는 곳이없는 빠른속도의 감필묘(減筆描)는. 김명국의 세련된 기교를 말해준다. 이 같이 대담한 필선은 예리한 눈매와 더불어 달마의 농축된 선기(禪氣)를 성공적으로 표출시키고 있다. 전체적으로 왼쪽으로 진전하는 듯한 인상이면서도 옷자락의 끝단이 윈쪽으로 날리게 처리한 것은 필선 자체의 추상적 리듬에 치우쳐 사실적인 묘사에 위배된 부분이다.
 
 
 13.
 

작가 : 이명욱(李明郁)
아호 : 악치(중국맹영광(孟永光)의 호)
제목 : 어초문답도(漁樵問答圖)
언제 : 17세기 후반
재료 : 족자 종이에 담채
규격 : 173.2 x 94.3 cm
소장 : 간송미물관

해설 :
이명욱은 숙종(肅宗)의 총애를 받아 “이명욱과 續?舟筆意” 라고 새긴 도인(圖印)을 특사(特賜)받은 바 있는 화원으로 도화서(圖畵署)의 교수를 지냈으며.
한시각(韓時覺)의 사위로도 잘 알려져 있다. 현존하는 그의 작품은 매우 희귀하여 이 어초문답도 가 거의 유일한 진작이지만. 이 한점만으로도 그의 절륜했던 기량을 충분히 엿볼수 있다. 이 그림은 생활영위의 장소는 달라도 모두 자연을 벗삼아 지내고 있다는 점에서 공통점을 지니고 있는. 나무꾼과 어부의 대화 장면을 그린 것으로. 소동파(蘇東坡)의 어초한화(漁樵閑話)에 화인(畵因)을 두고 있다.
무성한 갈대숲 사이길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인간과 자연과의 친화관계를. 상징하고 있는듯한 두 사람의 정다운 대화를. 정교한 원체풍(院體風) 과 뛰어난 필력으로 묘출해 놓았는데. 서로 약간 비껴선 자세에서 몸의 방향을 달리하며 마주보게 한 인물의 배치는 기본적으로 인물화의 고식(古式) 구성법을 따라고 있다.
그러나 대각선이 교차되는 화면의 핵심지점에 인물의 얼굴을 포치한 빈틈없이 짜여진 구도라든지. 눈에 잡힐듯이 거의 완벽하게 묘사된 두사람의 동작과 표정에는 그의 탁월한 재주가 넘쳐난다. 그리고 안면에 밀도를 더해 주고. 바람에 나부끼는 옷자락을 다룬 힘차고 날카로운 붓질은 그림에 활력을 불어 넣는 구실을 하고 있다. 어느 한 구석도 허술하게 다루어진 데가 없는 그의 재능을 새삼 실감케 해주는 걸작이다.
 
 
 14.
 

작가 : 한시각(韓時覺)
아호 : 설탄(雪灘).
제목 : 북새선은도(北塞宣恩圖)부분
언제 : 17세기 후반
재료 : 두루마리 비단에 채색
규격 : 57.9 x 674.1 cm
소장 : 국립중앙박물관

해설 :
한시각은 통정(通政)을 지낸 화원 한선국(韓善國)의 아들로 태어나. 그역시 화원으로 도화서의 교수를 지냈다. 1655년에 통신사의 수행화원으로 일본에 다녀온 바 있는 그는. 인물화를 잘 그렸던 이명욱(李明郁)의 장인 이기도 하다.
종래까지 한시각은 조선 중기의 회화사에서 김명국 처럼 감필법의 선종화를 즐겨 그렸다는 점으로 주목을 받아 왔다. 그러나 그가 선종화뿐 아니라 꼼꼼하게 그리는 기록화에서도. 재능이 있었음을 1978년의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미공개회화 특별전에 나왔던. 이 그림을 통하여 알게 되었다. 이그림은 함경도 길주(吉州)에서 특별히 실시되었던. 문무양과도회시(文武兩科都會試)의 장면과. 이 양시(兩試)에 관련된 모든 기록을 담은. 7미터에 가까운 장권(長卷)으로 이루어져 있다.
과거시험장면은 문과 와 무과로 나누어 그렸는데, 무과시의 광경이 먼저 다루어 졌다. 과시장(科試場)의 전경을 한 화면에 효율적으로 담기 위하여. 다른 기록화들과 마찬가지로. 높은 각도에서 내려다보는 식으로 그리는. 부감법(俯瞰法)을 사용하였다. 성내의 연병장 여기저기에 흩어져 있는 군기와 천막들. 붉은 조복(朝服)을 입은 단상의 시험관들. 인물 형상을 한 과녁을 향해 활시위를 당기며. 말을 모는 무사들, 그리고 차례를 기다리며 이를 관전하는 응시자들이 열띤 과장(科場)의 분위기를 잘 전해준다.
인물과 건물. 나무들 모두 섬세한 필치로 정밀하게 묘사되었고. 특히 먹과 청록으로 그려진 근경과. 배경 산의 표면에는 16세기 우리나라에서만 유행했던. 단선점준(短線點?) 이 구사되어 있어. 전대의 전통이 계승되었음을 알수있다. 문과시는 두개의 작은 다리가 설치된. 개울 건너편의 구조를 달리하는. 또다른 성안에서 실시되고 있다. 무과 시험장의 건물들이 오른쪽을 향하여 그려진데반해. 여기서는 대부분 정면을 향해 있으며. 성내에도 민가들이 더 많이 그려져 있다. 응시자들의 정렬된 모습이나. 능선이 완만한 뒷산의 평탄한 배열이. 무과시의 장면에 비해 정적인 느낌을 준다. 전반적으로 과장의 분위기를 충실히 전달하면서도 비교적 높은 격조를 보이고 있다.
 
 
 
15.
 
작가 : 작가미상
제목 :
미원계회도(薇垣契會圖)
언제 : 1540년경
재료 : 족자 비단에 수묵
규격 : 93 x 61cm
소장 : 서울 이원기

해설 :
 
미원 즉 사간원(司諫院)의 계회를 그린 이 그림은.
지금까지 알려진 국내 현존의 문인계회도 중 가장 오래된 것이다. 번중(蕃仲) 성세창(成世昌)의 찬시가 적혀 있고. 또 좌목(座目)에는 당시의 행대사간(行大司諫) 유인숙(柳仁淑). 행사간(行司諫) 홍춘경(洪春卿). 전사간(前司諫) 이명규(李名珪), 행헌납(行獻納) 나세찬(羅世纘). 전정언(前正言) 이황(李滉). 수정언(守正言) 김 ? . 수정언(守正言) 이영현(李英賢) 등의 이름과 직함이 보여 전현직의 사간원 관리들끼리의 모임임을 확인할수 있다. 근경에 쌍송이 서있는 언덕이 있고. 그밑 넓직한 지면에서 의관을 정제한 선비들이 계회를 열고 있는 모습이 작게 상징적으로 묘사 되어있다. 그들 옆에는 큰탁자 위에 술동이들이 놓여있어 자연을 벗삼아 호연지기를 펴던 당시의 선비들 분위기를 나타내고 있다. 인물과 모임이 이렇게 작게 표현된 반면에 산수는 화면을 그득 메우듯 크게 그려져 있다.
편파(偏頗)구도. 단선점준(短線點?). 확대된 공간. 수지법(樹枝法)등 모든 요소들이 16세기 전반기 안견파의 전통을 반영하고 있다. 사실상 이러한 형태의 안견파 화풍이 당시에는 이미 고전양식이 되어 계회도를 비롯한 기록적 성격의 그림들에서 자주 다루어졌다. 이원기(李元基) 소장의 <하관계회도>, 국립박물관소장의 연방동년일시조사계회도(蓮榜同年一時曹司契會圖). 고화비고(古畵備考)에 실려있는 소세양(蘇世讓) 찬(贊)의 산수도 등은 이 계회도와 상통하는 대표적인 예들이다.

 

 

 

 16.

 
 
 
작가 : 작가미상
제목 : 하관계회도(夏官契會圖)및 부분
언제 : 1541년경
재료 : 족자 비단에 수묵
규격 : 97 x 59cm
소장 : 서울 이원기

해설 :
 
이 하관계회도는 병조(兵曹)에 근무했던 전.현직(前現職) 낭관(郎官)들의 계회를 그린 것으로. 성세창(成世昌)의 찬시가 있어 1541년 가을의 작품임을 알수있다.
성세창은 이보다 1년 앞서서는 미원계회도에도 찬시를 썼음을 알수 있는데 박락(剝落)이 심하여 완전한 판독이 어렵다. 이현보(李賢輔)의 아들로 이 계회의 일원이었던 이중량(李仲樑)의 후손에게 전해오는 하연선조유적(賀淵先祖遺蹟)에는
이 시문(詩文)이 대부분 판독되어 있고 이 계회의 좌목(座目)도 그대로 적혀있다.
참석자들은 행정랑(行政郞) 이약해(李若海). 정랑(正郞) 조언수(趙彦秀). 전정랑(前正郞) 정언각(鄭彦慤). 정랑 황박(黃博). 전정랑 나윤명(羅允明). 행좌랑(行佐郞) 윤부(尹釜). 전좌랑(前佐郞) 이중량(李仲樑). 좌랑(佐郞) 이영성(李永成). 수좌랑(守佐郞) 윤우(尹雨). 전좌랑 이영현(李英賢). 좌랑 이천계(李天啓) 등 11명이다. 이러한 계회도는 늘 화원이나 직업화가가 그리되 참석자수만큼 그려서 나누어 가지고 대대손손 내려가면서 기념하게 되어있었다. 그러므로 똑 같은 계회도가 또 나올 가능성을 배제할수 없다.
이 그림 은 앞의 미원계회도와 구도나 화풍이 대체로 비슷한 안견화의 작품이지만 동일인의 솜씨로는 볼수 없다. 여전히 계회의 장면은 작고 상징적으로 표현되어 있는 반면에 산수는 크고 중요하게 그려져 있어 당시의 자연애(自然愛)도는 자연중심적인 풍조를 엿볼수 있다.
 
 
 
17.

 
 

작가 : 작가미상
제목 : 독서당계회도(讀書堂契會圖)및 부분
언제 : 1531년경
재료 : 족자 비단에 담채
규격 : 91.5 x 62.3cm
소장 : 일본개인

해설 :
 
이 계회도는 독서당에서 사가(賜暇) 독서하였던 장옥(張玉). 홍서주(洪敍疇). 허자(許磁). 임백령(林百齡). 송인수(宋麟壽). 송순(宋純). 주세붕(周世鵬)등 12명의
사대부들의 계회 장면을 그린 것으로 1531년경의 작품이다. 현재까지 알려진 현존의 계회도 중에서는 가장 연대가 올라가는 귀중한 작품으로. 조선 초기에 유행했던 계축(契軸)의 면모를 잘 보여준다.
이 시대의 계축은 이 작품에서 볼수 있듯이 상단에 계회도의 명칭을 전서체(篆書체)로 쓰고 중단에는 참석계원들의 성명. 위계. 관직. 등제년(登第年)등 인적사항을 적은 좌목(座目)을 마련하는 것이 상례였다. 또한 조선 초기의 계회도들은 이 작품에서도 보듯이 안견파(安堅派) 화풍을 따라 산수를 크게 그리고 계회의 장면은 작게 묘사하여 고전적인 거비파적(巨碑派的)경향을 강하게 보여준다. 이계회도가 그려진 곳은 중종 10년에 지어옮긴 두모포(頭毛浦) 남안의 호당(湖堂)과
그주변의 실경(實景)이라고 볼수있다.
근경. 중경. 후경의 3단으로 이루어진 구성이 16세기 전반기의 다른 작품들과 마찬가지이나. 다만 이 작품에서는 대체로 대칭구도를 이루고 있고. 경물들이 옆으로 길게 확산되어 있으며. 그에 따른 공간이 보다 시원스럽게 건개되는 점이 눈에 띠는 차이라 할수 있다. 주산과 언덕들을 묘사함에 있어서 단선점준(短線點?)을 주로 쓰면서 먹이 묻은 부분과 묻지 않은 부분이 이루는 흑백의 대조를 두드러지게 표현한점도 주목을 요한다.계회는 한강(漢江)에 떠있는 배 안에서 이루어지고 있는데. 계원들이 모두 의관(衣冠)을 정제하고 있고. 또 그옆에 따르는 작은 배에는 별도의 술동이가 실려있는 것이 눈길을 끈다.
 
 
 
18.



 

작가 : 작가미상
제목 : 독서당계회도(讀書堂契會圖)및 부분
언제 : 1570년경
재료 : 족자 비단에 담채
규격 : 102 x 57.5cm
소장 : 서울대학교 박물관

해설 :
 
이계회도는 명종(明宗). 선조(宣祖) 연간에 사가(賜暇) 독서하였던 문사 들의 모임을 기념하여 제작한 것이다. 참여인물은 윤근수(尹根壽). 정유일(鄭維一). 정철(鄭澈). 구봉령(具鳳齡). 이이(李珥). 이해수(李海壽). 신응시(辛應時). 홍성민(洪聖民). 유성룡(柳成龍)등 9명으로 모두 당대의 명현들이다. 이중 세상을 가장 일찍 떠난 정유일의 경우로 보아 1570년 전후인 선조연간 초기에 제작되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이 계회도는 앞서 중종 때에 그려진 것과 기본적인 골격은 같은 양식인데.
그림의 내용과 구도가 바뀌었다. 즉. 한강변의 넓은 공간을 화면에 담았는데.
여기서는 독서당과 주변의 송림을 중심으로 강안의 경치만 포착하여 가깝게 끌어들였다. 구도 역시 수평식에서 강변 언덕의 능선이 왼쪽 상단에서 오른쪽 아래로 사선으로 흘렀다. 동호(東湖)의 독서당에 초점이 맞추어진 이 산수도는 초기 화풍을 반영한 것이지만 사생적(寫生的)인 분위기가 잘 살아 있다.
특히 조선시대 후기 겸재(謙齋) 정선(鄭敾)의 경외명승첩(京外名勝帖)등 한강변의 명승을 그린 진경(眞景)산수화의 부감식 구도법과 근사하여 주목된다. 이러한 산수 중심의 조선시대 전반기 계회도 양식은 후기에 오면 거의 나타나지 않는다. 대체로 후기의 시사회(詩社會). 기로회도(耆老會圖)등 기념하는 행사장면이 주된 화재로 등장하는 것이 특징이다. 계회장면보다 주변의 풍경을 확산하여 다룬 전기의 계회도 양식은 마치 외경(外景)에 신경 쓰느라 인물을 작게 다룬 추보적인 사진촬영법을 연상케 한다.
 
 
 
19..



 

작가 : 작가미상
제목 : 호조낭관계회도(戶曺郎官契會圖)및 부분
언제 : 1550년경
재료 : 족자 비단에 담채
규격 : 121 x 59 cm
소장 : 국립중앙 박물관

해설 :
 
이계회도의 제목이 적힌 상단부가 현재는 남아있지 않으나. 좌목(座目)을 검토한 결과 호조(戶曹)의 정랑(正郞)이나 좌랑(佐郞)을 지낸 관리들이 1550년경에 모인 계회임을 확인할수 있었다. 참석자들은 안홍(安鴻). 이지신(李之信). 강욱(姜昱). 신희복(愼希復). 유강(兪絳). 김익(金瀷). 신여집(申汝輯)등 일곱명으로 되어 있으나. 그림에는 한사람이 더 그려져 있다. 그림중 맨끝중앙에 가장 크게 그려져 있는 인물은 계원이 아닌 특별 초대손님일 것으로 믿어진다.
이계회도는 1550년경을 전후하여 일어난 계회도상의 큰 변화들을 말해 준다.
우선 계회가 야외가 아닌 옥내에서 열리고 있다. 전에없이 계회장면이 배경을 이룬 산수와 대등한 정도로 크고 중요하게 표현 되어있다. 대개 1550년 이후의 조선 중기의 계회도들은 거의 옥내에서의 모임을 산수를 배경으로 하되 크고 중요하게 묘사하거나. 산수의 비중을 줄이고 계회장면의 비중을 크게 다루는 것이 상례로 되는데. 이계회도는 이러한 변화를 나타내기 시작하고 있다. 또한 배경을 이룬 산수의 표현에 있어서도 안견파 화풍의 일변도를 벗어나 남송(南宋) 원체화적(院體畵的)인 양식을 가미하고 있어서 또한 주목을 끈다. 이처럼 이 계회도는 1550년경에 나타나기 시작한 계회도의 형식상의 변화와 화풍상의 변화를 함께 말해주는 주요한 작품이다.
 
 
20.

작가 : 작가미상
제목 : 연지계회도(蓮池契會圖)
언제 : 1550년경
재료 : 족자 비단에 담채
규격 : 94 x 59 cm
소장 : 국립중앙 박물관

해설 :
 
이계회도는 상단의 제목과 하단의 좌목(座目)이 모두 잘려 나갔고. 중단의 그림만 남아 있어 어떤 계회를 그린 것인지 확실치 않다. 연지(蓮池)를 끼고 있는 정자에서 계회가 열리고 있어. 연지계회도(蓮池契會圖)라 명명하였다. 작가가 누구인지는 알 수 없으나. 화풍상으로 보아 <호조낭관계도>를 그린 사람과 동일인 임이 틀림없다. 계회도는 선비화가들은 그리지 않고. 언제나 화원 아니면 직업화가가 그리는 것이 상례였기 때문에. 이 그림도 그러한 사람의 작품으로 볼수 있다.
계원들의 표정을 읽을수 있을 정도로 인물이 크게 묘사되어 있으며. 계회 장소도 주변의 산수와 대등하게 다루어져 있다.
계원들의 자유로운 분위기가 눈에 띄고. 중경(中景)의 안개속에 솟아오른 지붕들과 대밭이 눈길을 끈다. 이 대밭의 모습은 어딘지 이수문(李秀文)의 묵죽(墨竹) 화첩중의 제1엽에 보이는 대밭을 연상시켜 준다. 또한 근경의 연못의 모습이 대단히 시적(詩的)인 분위기를 자아낸다. 16세기 중엽에 생긴 계회도의 큰 변화를 보여준다.
 
21.

작가 : 이암(李巖)
제목 : 모견도(母犬圖)
언제 : 16세기 전반
재료 : 족자 종이에 담채
규격 : 73.2 x 42.4 cm
소장 : 국립중앙 박물관

해설 :
 
이암은 정5품의 두성령(杜城令)에 제수되었던 세종(世宗)의 현손으로. 그당시에도 영모(翎毛)에 가장 뛰어난 인물로 손꼽혔다. 그는 매그림과 초상화에도 능통했던 것으로 기록에 남아 있으나. 지금까지 그의 화명(畵名)을 대변해온 것은 이 모견도 이다. 안개에 가려 윗부분이 수평으로 절단된 듯한 느낌을 주는. 한그루의 나무를 화면 상단부에 일산(日傘)처럼 배치하고. 그 아래에 어미개와 어미의 젖가슴을 파고드는 새끼 강아지들의 정겨운 한때를 담아놓았다. 성글고 거친 붓자국을 남기며 분방하게 처리된 배경의 나무는. 짙은 먹으로 도색하듯 곱고. 편평하게 훈염(暈染)하여 오려 놓은 듯한 느낌을 주는 개의 간결한 형태에 양감을 부여하고. 또 개를 그림의 핵심으로 돋보이게 한다.
그리고 개의 목걸이에 칠해진 붉은 색은. 화면에 액선트를 주면서 오른편 상단의 나뭇가지 밑에 찍혀있는 이암(李巖) 이라는 주문(朱文)의 향로형인(香爐形印)과 정중(靜仲) 이라는 백문방인(白文方印)이 동일색조로 시선을 유도하여 오행감(奧行感)을 조성하고. 묘사법의 심한 대조로 분리될 듯한 배경과의 관계를 연결시켜 준다. 이러한 구성과 더불어 이 작품을 보다 가치있게 해주는 것은 눈가에 하얀 테두리를 남긴 개의 순진무구한 표정. 새끼강아지들의 귀엽고 천진스런 동작들을 성공적으로 묘사한 한국적 정취가 물씬배인 온화하고 평화로운 분위기의 표출이라 하겠다. 이암이 개그림을 통하여 이룩했던 회화 세계는 그의 창의력의 발로이기도 하지만. 당시 화단의 독창적 성장을 말해 주는 것이기도 하다. 
 
 
 
22..

작가 : 이암(李巖)
제목 : 화조구자도(花鳥拘子圖)
언제 : 16세기 전반
재료 : 족자 종이에 채색
규격 : 85.6 x 45 cm
소장 : 호암미술관

해설 :
 
이암은 개나 고양이와 같은 작은 동물들의 순진무구한 모습과. 아름다운 화조의 배경이 한데 어루러져 자아내는. 평화스럽고도 정감어린 분위기의 묘출을 통하여. 조선시대 영모화의 한국적 전통수립에 중추적 역활을 했다. 이 화조구자도는 그의 이러한 명성과 회화 세계의 특색을 잘 엿보여주는 수작중의 하나이다.
백도화(白桃花) 향기 그윽한 어느 포근한 봄날의 정경을. 꽃내음 맡으며 굽어진 가지위에 앉아있는 한쌍의 새. 꽃을향해 날아드는 호랑나비와 꿀벌. 그리고 나무밑에서 제각기 한가로운 시간을 보내고 있는. 세마리의 강아지들을 통해서 엮어놓았다. 구성도 짜임새 있지만. 가는 묵선으로 윤곽을 두르고. 그 안을 고운 설채로 메운 구륵전채(鉤勒?彩)와. 수묵몰골(水墨沒骨)의 조화로운 대비 또한 훌륭하다. 그리고 강아지 들의 때묻지 않은 천진난만함을 강조하기 위해. 특이한 훈염(暈染)으로 형태와 빛깔을 나타냈으며. 주변의 바위에는 16세기 우리나라에서만 유행했던 단선점준(短線點?)을 구사하여 화면의 정취를 한층 돋구어 놓았다. 일본의 화가 타니분?오 도 고화비고(古畵備考)에 유조선화풍(有朝鮮畵風) 이라고 특기해 놓았던 이암의 이러한 회화세계는 뒤에 김식(金埴)과 변상벽(卞相璧) 등에게도 계승되어 조선시대 영모화풍의 근간을 이루었다.
특히 묵훈(墨暈)의 음영법으로 다루어진 강아지의 귀여운 모습은 17세기 전반경에 할동한 일본의 화가 소오겐의 개그림 들에 적지않은 영향을 미쳤던 것으로 생각된다. 일본에서 한동안 그를 자기네 나라의 화가로 잘못 알고 있었고. 또 그의 그림들이 일본에 더 많이 전래되었던 사실 등은 그의 화풍이 일본 화단에 미쳤을 영향관계를 추정하는데 도움을 준다.
 
 
 
23.
가지와 벌

 

 
수박과 들쥐


 
산차조기와 사마귀


 
오이와 개구리

 
 
작가 : 신사임당(申師任堂)
당호 : 사임당(師任堂).시임당(媤任堂)·임사재(妊思齊)
제목 : 초충도(草蟲圖) 8폭중 4폭
언제 : 16세기 전반
재료 : 종이에 채색
규격 : 각폭33.2 x 28.5 cm
소장 : 국립중앙박물관

해설 :
 
신사임당은 현모양처로서 후세에 크게 존경받는 한국의 대표적인 어머니상을 보여준다. 높은 인품과 함께 시. 서. 화 에 두루능해 가정교육의 사표(師表)로 국문학사 측면에서뿐만 아니라. 회화사에 있어서도 간과할수 없는 확고한 위치를 점한다. 그러나 호(號)만이 알려져 있을뿐 조선시대의 모든 여인이 그러하듯 이름은 없다. 조선 성리학(性理學)의 거유(巨儒) 이이(李珥)의 율곡집(栗谷集)에 의하면.
사임당은 7세 때부터 안견의 그림을 방(倣)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이밖에 여러 사람들의 문집(文集)에서 그녀의 그림에 대한 기사들을 찾아볼수 있다. 신 사임당이 즐겨 그린 그림은 산수. 화조. 어(漁). 포도. 매(梅). 난(蘭). 화훼초충(花卉草蟲)등 여러 분야에 두루 미친다.
다방면의 소재에 모두 뛰어났으나. 그중에서 그녀의 성가(聲價)를 높인 것은 포도와 초충도로 생각된다. 이 초충도들은 원래 초충도 8첩에 신사임당의 방손(傍孫)인 신경(申暻)의 발문(跋文). 오세창(吳世昌)의 발문과 함께 10폭으로 꾸며져 있다. 이 발문에 의해 전래사유를 분명히 알수있다. 일찍이 종실 출신 이양원(李陽元)이 소장하던 것을 그의 후손이 신경에게 팔았다. 그후 200년가량 지나 이용희(李用熙)교수가 소장케 되어. 이를 오세창에게 보이자 1946년에 발문을 쓴 것이다. 이 작품은 현재 국립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초충도 병풍을 순서대로 열거하면
 
1)수박과 들쥐,
2)가지와 벌,
3)오이와 개구리,
4)양귀비와 도마뱀.
5)맨드라미와 쇠똥구리.
 6)산나리와 매미.
7)어승이와 개구리.
8)산차조기와 사마귀 등이다.
 
작품명을 정하는데 있어 그림에서 살필수 있듯이. 식물도 한 가지가 아닌 두가지 이상이며. 곤충도 두 가지 이상씩이어서. 화면을 차지하는 비중에 의거하여 명명하였다. 이 일련의 그림들은 삼각형이나 원형의 안정된 구도로 그려져 섬세하고 정확한 표현 그리고 선명한 채색에 이르기까지 뛰어난 수작임을 두루보여 준다.
그림에 따라서는 등장된 곤충류의 형태나 포치에 있어 장식성으로 인해 소재 사이의 연결이 어색하게 보이는 점도 없지 않다. 소재가 단순해짐을 우려해서인지 도판에서 보이는 것처럼 수박이 중심이나 그 옆의 패랭이를 가미한다거나 맨드라미와 들국화 등 크기에 의해서 비중을 알수 있게끔 함께 나타냈고. 곤충들도 여러가지 각기 다른 동작을 함께 그려서 변화와 다채로움을 보여준다.
하단에서 4분의1쯤 되는 지점에. 태점(笞點)을 농담 이중으로 꼼꼼히 찍어.
지면과의 경계를 나타낸것도 개성적인 화면처리에 들 것이다. 여성 특유의 청초함이 그대로 배어나오는 듯한 독특한 분위기에서. 장식적인 화면구성이 엿보이긴 하지만. 뛰어난 묘사력과 색채감각을 보여준다.
 
 
24.

작가 : 이정근(李正根)
아호 : 심수(心水)
제목 : 미법산수도(米法山水圖)
언제 : 16세기 후반
재료 : 두루마리 종이에 수묵
규격 : 23.4 x 119.4 cm
소장 : 국립중앙박물관

해설 :
이정근의 호는 심수(心水)이고 벼슬은 정6품 사과(司果)를 지냈다. 그의 집안은 부친 이명수(李明修) 이래로 대대로 화원(畵員)벼슬을 이어갔는데. 이명수의 두 아들 정근(正根). 정식(正植)과 사위 유성업(柳成業) 그리고 정식의 아들 수형(壽亨). 손자 홍규(泓?). 증손 기룡(起龍). 고손 형정(衡精)등이 모두 화원이었다.
그의 화풍에 대하여 윤두서(尹斗緖)의 화단(畵斷)에 “안견을 조(祖)로 삼았고.
필법이 섬교하고 능히 멀고 아득한 것을 표현할수 있어서. 가이 이불해 보다 앞섰다고 할 만하다” 고 적혀있는데 이러한 화풍의 작품으로 설경산수도를 들수있다.
이와는 전혀 다른 양식으로 제작된 이 미법산수도는 옆으로 긴 화면안에 오른쪽 하단. 즉 근경을 농묵으로 처리하고. 담묵의 원경에 이르기 까지 완만한 대각선을 이루며 전체적으로 조용하고 차분한 느낌을 준다. 원산 윗 부분에 미불의 모옥(茅屋)에 비내리는 것을 감상하는 그림의 뜻을 방(倣)하여 남창(南窓)을 위하여 비에 대한 이야기를 하면서 마음으로 이야기함을 그렸다. 는 내용의 제발(提拔)이 있다. 길고 완만하게 대각선을 이루면서 멀어지는 구성. 촘촘한 미점(米點)의 사용. 담담하게 변화되는 묵법등에서 명대(明代) 미법산수의 영향이 엿보이고 있어. 원대(元代) 초기의 비법산수를 토대로 한국화된 15세기 말의 최숙창(崔叔昌)등의 미법산수와는 차이를 드러낸다. 남종화(南宗畵) 지류인 미법산수가 16세기 화원에 의하여 제작된 것이 특이 주목된다. 
 
25.

작가 : 이흥효(李興孝)
제목 : 설경산수도(雪景山水圖)
언제 : 16세기 후반
재료 : 화첩 비단에 수묵
규격 : 29.3 x 24.9 cm
소장 : 국립중앙박물관

해설 :
이흥효는 이상좌(李上佐)의 아들이며 그의형 이숭효(李嵩孝)가 일찍죽은 탓인지
당대에 더 화명을 떨친듯 하다. 그는 명종(明宗)의 어용(御容)까지 그려 군직(軍職)을 받기도 했으며. 양송당(養松堂) 김제(金?)의 필법을 좋아했다고 전한다.
이그림은 6폭가운데 맨 마지막 엽으로. 안견파 화풍 영향을 여실히 들어내고 있다. 편파구도계(偏頗構圖系)의 전통을 반영하듯. 화면의 중심이 왼쪽으로 치우쳐 있는 이그림은. 조선 초기의 사시팔경도 에서 찾아볼수 있는 구도와 공간감의 여운이 남아 있다. 근경의 소나무와 뒷편 언덕위에 늘어서 있는 침엽수가. 모두 세찬 바람으로 왼편으로 기울고 있는 반면. 성곽위의 깃발은 오른쪽을 향해 나부끼고 있어 어색한 느낌을 주는데. 이런 유형의 작품이 정형화 되어가는 면모를 엿보게 한다. 주산에 가해진 단선점준(短線點?)은 16세기 전반의 액선트를 가한 듯한 예리한 필치에 비해. 굵고 길며 뭉툭하게 변하여 훨씬 부드러운 느낌을 자아낸다. 이 작품에 보이는 전반적인 구도나 주산의 형태. 공간감 등은 이정근(李正根)의 <설경산수도>와도 연관지어 볼수 있다. 
 
26.


작가 : 작가미상
제목 : 풍악도(風岳圖)
언제 : 16세기 후반
재료 : 비단에 담채
규격 : 27.5 x 34 cm
소장 : 한국 개인

해설 :
이 작품은 국립중앙박물관 소장의 전(전) 안견(안견)의 사시팔경도(사시팔경도)가운데 만도(만동) 부분을 변형시켜 재구성한 듯하며. 그보다 경물들사이의 거리가 가까워 짐으로 인해 공간감이 줄어든 것이 차이점이라 하겠다.
이러한 구성 내용은 이흥효(이흥효)의 <설경산수도> 와도 비슷하다. 그러나 상단부의 산 표면에 단선점준이 훨씬 날카롭게 구사된 점이라든지 근경의 나지막한
둔덕 표면에 피마준을 연상케 하는 필치가 보이는 점 등은 이흥효의 작품과는
다른 면모라 하겠다. 그리고 근경의 소나무를 비롯하여 전반적으로 이흥효의
<설경산수도>에 비하여 필치가 예리하고 섬세한 느낌을 준다. 15세기 이래의 안견파 화풍을 계승하여 여기에 새로운 요소들을 가미하여 전개되었던 16세기 산수화풍의 일면을 잘 보여 준다.
 
 
27.

작가 : 함윤덕(咸允德)
제목 : 기려도(騎驢圖)
언제 : 16세기 후반
재료 : 비단에 담채
규격 : 15.6 x 19.2 cm
소장 : 국립중앙박물관

해설 :
함윤덕은 16세기에 활약했던 화가로. 윤두서(尹斗緖)의 기졸(記拙)에. 그의 그림에 대한 짤막한 평이 남아 있을뿐, 출신 배경이나 행적등이 전혀 알려져 있지않다. 유작 또한 이 기려도 한점이 유일하게 전해온다. 이그림은 유력(遊歷) 중의 기려고사(高士)를 그린 것으로. 긴여행에 지친 듯 다리를 저는 나귀와. 피어오르는 시흥(詩興)에 잠긴 선비의 단아한 모습이 대조를 보이며. 화의(畵意)의 핵심으로 부각 되어있다.
이와 같이 독립된 주제의 기려인물은. 시객(詩客)으로서의 두보(杜甫)와 소식(蘇軾)의 고아한 풍취를. 염두에 두고 그리는 경우가 많다. 짙고 옅은 먹빛으로 화면의 분위기를 조성한 다음. 촛점을 이루는 인물과 나귀엔는 붉은 색과 갈색을 베풀어 강조했으나. 지금은 거의 탈색되어 묵색이 주조를 이룬다. 구성은 강희안(姜希顔)의 <고사관수도>에서 전형화되었던 소경(小景)산수인물화의 구도를 계승하며. 배경에 암벽과 덩굴나무의 부분만을 배치하는등 인물중심으로 간결하게 짜놓았다.
암벽에 보이는 길고 날카롭게 빠진 부벽준(斧劈?) 모양의 준찰(?擦)이라든지.
그옆 공간을 메우고 있는 자생덩굴과 나무잎의 양태 등은. 남송의 마하파(馬夏派)에서 명대의 절파(浙派)로 이어지는. 일련의 특색들을 반영하고 있는데. 화면의 맨 앞에 바위의 일부를 포치하여 전경의 공간을 한정시킨 것은 원말(元末) 이후에 나타나는 경향이다. 인물의 의문(衣紋)또한 마원(馬遠)이래의 전통을 받아들여 겨드랑이와 옷자락 부분을 방사선 모양으로 퍼지게 하였다.
러나 시필(始筆) 부분의 노봉(露鋒)이 누에 머리처럼 더욱 두드러지면서 짧고 힘차게 삐친 주름의 필선은 중국에서 찾아보기 힘든 당시의 한국적 특징이라 하겠다. 비록 편폭(片幅)에 불과한 소품이지만. 필치도 유연하고 화면 전반에
아운(雅韻)이 감도는 가작이다.
 
 
28.

작가 : 이숭효(李崇孝)
제목 : 귀어도(歸漁圖)
언제 : 16세기 후반
재료 : 모시에 수묵
규격 : 21.2 x 15.6 cm
소장 : 국립중앙박물관

해설 :
이숭효의 자(字)는 백달(伯達)이며. 화원 이상좌(李上佐)의 아들로. 그의 동생 이흥효(李興孝). 그의 아들 이정(李楨)등이 모두 화원이었다. 이숭효는 일찍세상을 떠났기 때문에 그의 작품은 매우 드물어 현재까지 알려진 작품은 이 귀어도가 유일한 것이다. 대각선으로 이어진 비탈길을 한 늙은 어부가. 잡은 고기를 왼손에 들고. 오른쪽 어깨에는 낚싯대를 걸머메고 돌아오는 모습이다. 주변의 자연공간은 갈대잎으로 간결히 설명되고 있고. 낚시꾼의 초연한 모습이
이 그림의 주제가 되고 있다. 이와 같이 산수화에서 근경의 인물부분만이 크게 강조되어. 어부도(漁夫圖). 고사탁족도(高士濯足圖). 관폭도(觀瀑圖). 등의 모습으로 나타나는 것이. 조선중기 절파(浙派) 화풍의 한 가지 특징이기도 하다.
갈대잎의 활달하고 조방(粗放)한 필치나. 굵고 가는 거침없는 옷주름의 묘사 또한. 절파 화풍의 전형을 보여주는 것으로. 특히 이 작품에서는 어부의 비척거리는 걸음거리와. 달관을 한 듯한 표정이 생기있게 묘사되어 있다. 올이 굵은 모시에 그렸기 때문에. 붓길이 매끄럽지 않은 대신에. 끊긴듯 이어지는 여운은 더 잘 살아나고 있다. 
 
29.
 
작가 : 강희안(姜希顔)
아호 : 인재(仁齋)
제목 : 고사관수도(高士觀水圖)
언제 : 15세기 중엽
재료 : 종이에 수묵
규격 : 23.4 x 15.7cm
소장 : 국립중앙박물관

해설 :
강희안은 집현전직제학(集賢殿直提學)과 인수부윤(仁壽府尹)등을 지낸 조선초기의 가장 대표적인 선비화가로 시.서.화에 모두 뛰어났다. 인재(仁齋)라는 백문방인(白文方印)이 하나 찍혀있는 이그림은 비록 소품이긴 하지만. 그의 명성을 실감케해주는 빼어난 작품이다. 공수(拱手)의 자세로 바위 위에 턱을 괸채 잔잔한 수면을 바라보며 명상에 잠겨있는 고사(高士)의 모습이 덩굴풀 드리워진 암벽아래서 화면의 초점을 이루고 있다. 화의(畵意)의 핵심을 이루는 고사의 초탈한 자태는 무상한 세상사를 피해 자연속에서 심성을 양성하고자 했던 당시의 선비들의 고아한 풍모를 보는듯 하다.
화중 인물의 배경을 덩굴풀이 매어달린 암벽으로 막아 놓은 구도는 남송 이래의
수묵나한도(水墨羅漢圖)나 백의관음도 등의 도석인물화(道釋人物畵)계통에서 즐겨 채택했던 것이며. 쇄찰(刷擦)에 가까운 농묵의 뭇질로 대담하고 종일하게 구사된 묵법 또한 그러하다. 그리고 서예적 필획이 느껴지는 옷주름선의 힘찬 필치는 남송대 양해(梁楷)의 절려묘(折?描)와 마원(馬遠)의 궐두묘(獗頭描)을 연상케 한다.
이러한 구도와 강렬한 필묵법이 명대의 오위(吳偉)와 장노(張路)등에 의해 받아들여져 후기절파계(後期浙派系) 소경산수인물화의 근간을 이루게 되는데. 이 그림은 이미 고려시대에 전래되어 형성되었던 전대의 전통을 계승한 것으로 믿어진다. 그리고 고사의 깊은 정관(靜觀)의 경지를 활달하고 창윤(蒼潤)한 묵기(墨氣)로 승화시킨 이 그림의 화풍은 조선 중기의 절파계 소경산수인물화에 큰 영향을 미쳤다.

 


30.
 
작가 : 강희안(姜希顔)
아호 : 인재(仁齋)
제목 : 산수도(山水圖)
언제 : 15세기 중엽
재료 : 족자비단에 담채
규격 : 96.5 x 52.5 cm
소장 : 도교국립박물관

해설 :
이그림은 근경으로 부터 중경을 거쳐 후경의 주산(主山)으로 시선을 유도하는 깊이감. 근경과 중경의 경물(景物)들이 이루는 x 자형의 구성. 유기적인 연결을 염두에 둔 구도등이 매우 돋보이는 그림으로 산이나 바위의 묘사에서 보이는 필묵법(筆墨法)과 준법(?法). 안개에 쌓인 중경의 마을 표현. 수지법등(樹枝法)등에는 안견파 화풍의 접촉이 약간씩 감지된다. 고사관수도 와는 차이가 많이나는 작품이지만 근경의 큰수목은 그의동생 강희맹(姜希孟)의 독조도(獨釣圖)에 보이는 고목(枯木)들과도 형태상 비슷하여 주목된다. 조선초기 산수화의 또다른 일면을 엿보게 한다. 
 
 
31.

작가 : 강희맹(姜希孟)
아호 : 국오(菊塢), 사숙재(私淑齋), 운송거사(雲松居士),
제목 : 독조도(獨釣圖)
언제 : 15세기 중엽
재료 : 족자비단에 담채
규격 : 96.5 x 52.5 cm
소장 : 도교국립박물관

해설 :
강희맹은 조선시대 초기 선비화가로서. 역시 세종조(世宗祖)연간에 화단(畵壇)을 선도한 인재(仁齋) 강희안(姜希顔)의 동생이다. 자(字)는 경순(景醇). 호(號)는 국오(菊塢), 사숙재(私淑齋), 운송거사(雲松居士), 무위자(無爲子), 만송강(萬松岡)등을 사용하였다. 세종 29년 문과에 급제하여 벼슬은 찬성(贊成)에 이르렀고 진산군(晉山君)에 봉해졌다. 서. 화에 조예가 깊었고 특히 송(松). 죽(竹)을 잘 그린 것으로 전해온다. 만년에는 도화서(圖畵署)의 장인 제조(提調)까지 중임하였고. 성종(成宗) 14년에 화원인 서문보(徐文寶)를 9품으로 천거하기도 하였다.
그런데 현존하는 작품이 거의 없다시피 하며. 여기에 소개한 그림이 유일하게 알려져 있다. 이 그림은 우측상단의 오언시(五言詩) 내용으로 보아 춘경(春景)을 묘사한 그림으로 강안의 말라죽은 교목(喬木) 두 그루를 중심으로 갈대숲. 강위의 배와 인물. 대안(對岸)의 모래언덕등 강가의 근경만을 화려하게 담았는데. 뛰어난 묘사력으로. 쌀쌀한 기운이 채 가시지 않은 봄의 스산한 분위기를 잘 표현하였다.
강가 갈대숲 아래 배를 정박한 고사는 낚싯대를 걷어올린채 노에 기대어 대안을 응시하며 상념에 잠겨있다. 이런 점경(點景) 인물의 고사는 선비들의 은일사상을 반영한 소재라 할수있다.
능란한 수묵 구사의 경물 처리는 선비화가의 여기적(餘技的) 표현을 벗어난 수준급이며. 조선시대 초기의 회화에서 돋보이는 가작(佳作)의 면모를 잦추었다.
화풍은 초기 양식을 반영하고 있으며 복합적인 양상을 띠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먹의 농담변화와 번지는 효과를 이용한 나무의 입체적 표현 및 갈대숲과 대안의 모래언덕과 인물묘사 등 빠른 붓질의 대범한 수법. 그리고 전체적으로 진한 수묵의 괴량감(怪量感)은 선종화적(禪宗畵的) 표현을 연상시킨다. 그려면서도 근경만을 압축시킨 화면구성은 남송 원체풍(院體風)이며. 언덕에 비스듬히 선 두 묘목의 날카롭게 뻗은 가지 끝의 표현은 원대 이간(李?)의 화풍과 근사하다.

 


 
32.
 
작가 : 이상좌(李上佐)
아호 : 학포(學圃)
제목 : 어가한면도(漁暇閑眠圖)
언제 : 15세기 말
재료 : 비단에 담채
규격 : 18.7 x 15.4 cm
소장 : 국립중앙박물관

해설 :
이상좌는 본래 미천한 출신이었는데. 그림솜씨와 재능을 인정받아 중종(中宗)연간에. 도화서(圖畵署)의 화원(畵員)으로 발탁되었다고 전해온다. 자(字)는 공우(公祐). 호(號)는 학포(學圃)이다. 그의 전칭작품 어가한면도는. 소나무와 잡목이 서있는 강안(江岸) 근처의 그늘아래. 배위에서 낚시를 드리우고 그와는 관계없이 돌아앉아 낮잠에 빠진 어옹(漁翁)을 표현한 소품(小品)이다. 한가로운 장면에 첨가해서 창공을 오르는 두 마리의 물새도 그려 넣었다. 이작품의 구도는 근경의 소나무와 멀리 산허리가 대각선으로 교차되어 x자형을 취하였다. 언덕의 소나무와 삼각형 잎의 수목묘법(樹木描法). 원산의 단면처리. 언덕의 주름. 인물표현에 이르기까지 송하보월도(松下步月圖)와 마찬가지로 마원계(馬遠系)양식을 반영하고 있다.


 

33.
 
작가 : 이상좌(李上佐)
아호 : 학포(學圃)
제목 : 송하보월도(松下步月圖)
언제 : 15세기말~16세기전반
재료 : 족자비단에 담채
규격 : 82.3 x 190.6 cm
소장 : 국립중앙박물관

해설 :
이상좌는 그림을 잘그려 자신의 신상에 영예를 얻었으며. 그것은 후손들에게 까지 화업(畵業)으로 계승되었다. 확실하게 그의 작품으로 현존하는 것이 없어 그의 회화세계의 윤곽을 파악하기 어렵다. 전해오는 기록으로는 산수. 인물을 잘 그렸다는데. 인물초상에 더욱 뛰어났던 듯하다. 공제(恭齊) 윤두서(尹斗緖)의 화평(畵評)에 의하면. 이상좌는 안견의 정수를 터득하였는데. 안견의 조밀하면서 시원한 조화에는 미치지 못했다. 고 하였다.
그런데 실제 이상좌의 전칭 산수화는 남송시대의 원체 화풍인 마원의 그림에 근사하다. 그 예가 여기에 소개한 <송하보월도>와 앞의 <어가한면도> 이다. 그 가운데 대작(大作)인 <송하보월도>가 널리 알려져 있고. 그것에 의해서 이상좌의 산수화풍이 이해되었다. 또한 그 작품의 양식을 통해서 조선시대 초기 화단에 파급된 남송 원체화풍을 설명하여 왔다. 바람이 부는 달밤의 정경을 담은 이그림은 보존상태가 좋지못한 편이다.
좌측에 경사가 급한 언덕비탈에 진한 먹으로 그려졌고. 그어두운 비탈에서 우측상단 대각선으로 자란 소나무가 화면의 중심을 차지하였다. 우측비탈 아래로 시동을 데리고 소나무의 기관(奇觀)을 응시하는 고사(高士)가 왜소하게 묘사되었다. 그 후경으로 낮게 원경산(遠景山)의 능선이 희미하게 보인다. 달은 화면의 맨꼭대기 약간 좌측에 동전만한 크기로 표현되었다. 가지가 꺾여 아래로 굴절된 소나무 묘법(描法)과 덩쿨표현. 언덕의 단면과 원산(遠山)의 간결한 처리. 인물묘사법등 전형적인 남송시대 마원류 의 화풍이다. 그래서 중국 그림이 아닐까 하는 의문도 제기된 바가 있었다. 특히 소나무의 심하게 과장된 표현은 우리의 감성과는 거리가 있는데. 이상좌나 그 밖의 우리나라 화가의 작품이라고 하더라도 우리의 정서로 소화하지 않은 마원 화풍을 충실히 답습한 예일 것이다.


 

34.

 
작가 : 이상좌(李上佐)
아호 : 학포(學圃)
제목 : 주유도(舟遊圖)
언제 : 16세기 중엽
재료 : 족자비단에 설채
규격 : 86.5 x 155 cm
소장 : 일본개인

해설 :
이 작품과 <월하방우도>가 쌍폭을 이루고. 모두 동일인의 필치임에는 틀림없으나
이상좌의 진작(眞作)이라는 근거는 없다. 특히 그는 <송하보월도>를 비롯해 남송대 마하파(馬夏派) 화풍의 대표격으로 믿어지고 있는데 그 화풍과 전혀 무관한 이 그림이 그이 작품으로 일본에서 전칭(傳稱)되고 있는 것은 흥미롭다. 그러나 연대적으로는 그의 전칭에 별 무리가 없다. 이 주유도는 근경(近景)에 쌍송(雙松)이 엇비껴 서있는 언덕과. 송음하(松陰下)에서 배를탄 채 낚시를 드리운 조사(釣士)를 묘사하고. 넓은 강 건너편의 후경(後景)에 산들과 토파(土坡)를 표현하고 있다. 이 작품의 준법과 점묘법은 원대(元代) 성무(盛懋)의 화풍을 연상시켜 주지만. 그보다는 일본에서 활약했던 이수문(李秀文)의 화풍과 보다 관계가 깊어 보인다.
 즉 이 작품의 배경에 보이는 산들과 이수문의 묵죽화에 보이는 언덕의 묘사를 비교하면. 가늘고 섬세한 일종의 피마준(披麻?)과 호초점(胡椒點)이 놀랍도록 유사함을 알수 있다. 이 점은 이수문이 조선시대의 한국인이었음을 재확인 시켜주며.
또한 이작품의 화풍은 원대 남종화를 바탕으로 발전된. 조선 초기 회화의 전통을 계승한 것임을 말해준다. 
 
 
35.
이장손(李長孫)산수화




 
최숙창(崔叔昌)산수화




 
서문보(徐文寶)산수화.



 
 

작가 : 이장손(李長孫),최숙창(崔叔昌).서문보(徐文寶)
제목 : 산수도(山水圖)
언제 : 15세기 후반
재료 : 비단에 담채
규격 : 각각 60.1 x 39.6cm
소장 : 일본 야마도문화관

해설 :
이장손(李長孫), 최숙창(崔叔昌). 서문보(徐文寶)는 성종(成宗) 연간에 활동하였던 도화서(圖畵署)출신의 화가들이다. 그들의 행적을 확인할 수 있는 기록으로는
성현(成俔)의 용재총화(?齋叢話)에 이장손, 오신손(誤信孫). 진사산(秦四山). 김효남(金孝南). 최숙창. 석령(石齡) 등이 글래에 유명한데 그들의 화역(畵域)을 논할수 없다. 는 것이 있다. 또한 서문보가 선종 14년에 당시 도화서의 제조(提調)인 강희맹(姜希孟)의 천거로 9품의 체아직(遞兒職)에 올랐던 화원이었음은 <성종실록>에 게재되어 있는 기록을 통해 알수 있다. 작품마다 내용이 약간씩 다를 뿐 같은 소재에 비숫 한 구도법과 필세이다. 전경은 수면과 강안(江岸)의 풍경을, 후경은 안개가 짙게 깔린 원산의 모습을 담았는데 수평식 구도로 안배하였다.
이 작품들에서 특기할 사실은 안개위로 솟아 있는 산봉우리와 언덕의 표현에 미법산수(米法山水)를 구사한 점이다. 미점준(米點?)은 중국 북송대의 선비화가 미불(米?)과 그의 아들인 미우인(米友仁)에 의해서 즐겨 사용된 기법으로 남종문인화풍(南宗文人畵風)의 한 주요 양식이다. 그래서 여기의 여섯 그림은 15세기 후반 조선시대 초기 화단에 수용된 미법산수 즉 남종화의 한 지류를 밝혀 주는 중요한 회화사료(繪畵史料)이다. 그런데 이 그림들에 구사된 미법과 전체적인 화풍은 원(元)나라 초기 고극공(高克恭) 등의 형식화된 양식에 가깝다. 여기에 소개한 여섯점의 산수도는 필묵법과 담채가 능숙하며. 조선초기 산수화의 한 계보를 알려주는 중요한 작품들이다.
 
 
36.







작가 : 이수문(李秀文)
제목 : 묵죽(墨竹)10폭중 4폭
언제 : 15세기 후반
재료 : 화첩종이에 수묵
규격 : 각각30.4 x 44.5cm
소장 : 일본개인

해설 :
이 화첩은 모두 열 폭으로 되어 있으며. 여러가지 다른 상황이나 환경에 놓여 있는 다양한 모습의 대나무를 묘사하고 있다. 이 화첩이 발견됨으로서. 이 그림의 화가인 이수문이 조선시대의 한국인이 었음이 확실히 밝혀지게 되었다.
이수문은 일본에서 이주문(李周文)이라고도 불리어져. 상국사(相國寺)의 선승화가(禪僧畵家)로 1423년에 일본 사절단의 일원으로 내조(來朝)했다가 이듬해에  아간 슈우분과 그 이름이 같으나. 실은 별개의 인물이다. 그러나 두 사람 모두 조선초기의 회화를 일본화단(畵壇)에 전하고 영향을 미치는데 기여했다는 점에서 공통점을 지니고 있다.
이 화첩의 끝 작품에는 영락갑진이십유이세차 어일본국래도북양사(永樂甲辰二十有二歲次 於日本國來渡北陽寫), 수문(秀文) 이라는 관기가 있어, 이수문이 1424년에 일본에 내도(來渡)한후 그렸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이 관지의 해석에는 약간의 차이가 있을수 있다. 즉 일본국에 내도 하여 북양에서 그리다. 라고 일본 학자들은 해석하고 있으나 이동주(李東柱) 박사는 일본국으로부터 북양에 내도하여 그리다. 로 읽고 있다. 전자와 같이 읽을 경우 북양은 일본에 있는 지명으로 볼수 있고. 또 이 그림의 제작도 일본 땅에서 이루어 졌다고 볼수 있다.
그러나 후자와 같이 해석 할 경우. 이 작품은 일본을 다녀온후 우리나라의 북양이라고 하는 어느 곳에서 제작된 것으로 볼수 있을 것이다. 문맥으로는 후자가 더 그럴 듯하나. 일본에서는 이수문이 일본에 정착하여 소오가파(曾我派)의 개조가 되었던 인물로 믿어지고 있어 그러한 사정과 잘 부되지 않고 있다.
어쨌던 이러한 문제점에도 불구하고 이 관기는 이수문이 15세기 초에 활동했던 한국인이며. 일본에 건너가 그곳에 영향을 미쳤던 인물임을 분명히 해준다. 1424년에는 중국인은 누구도 일본에 입국할수 없었다는 정치적 상황과 더불어,
화풍이 조선 초기의 특징을 잘 보여주고 있다는 점에서 주목된다. 이 화첩의 대나무들은 한결같이 줄기가 지극히 간늘고 반면에 잎은크고 길어서 중국의 묵죽과 큰 대조를 보인다. 또한 제1엽의 바위 묘사에는 곽희파의 영향이 감지되고 언덕의 표현 중에는 일종의 피마준(披麻?)비슷한 준법이 보이고 있어 흥미롭다.


 

 
37.


 
 
작가 : 이수문(李秀文)
제목 : 향산구로도(香山九老圖) 6 첩한쌍
언제 : 15세기 후반
재료 : 종이에 수묵
규격 : 각각145.5 x 312.6cm
소장 : 일본 하라다 기념관

해설 :
향산구로도는 그냥 <구로도>라고 불리기도 하는데, 당(唐)의 백거이(白居易)의 구로회(九老會)를 그린것이다. 향산은 중국에 여러곳이 있으나, 백거이와 관련된산은. 하남성(河南省) 낙양현(洛陽懸) 용문산(龍門山)의 동쪽에 있다. 백거이는 이곳에 석루(石樓)를 짓고. 향산거사(香山居士)라고 불렀으며. 세상사람들이 이산을 백향산(白香山)이라고 칭했다고 한다. 백거이의 구로회 회원은. 호고(胡?). 길민(吉旼). 정거(鄭據). 유진(劉眞). 노진(盧眞). 장혼(張渾). 적겸모(狄兼謨). 노정(盧貞). 백거이의 9명으로. 이들은 모두 연치가 높고 벼슬을 하지 않았던 인물들이다.
백거이의 <구로도시서>에 의하면 회창(會昌) 5년 3월에 호. 길. 정. 유. 노. 장의 6현과 백거이가 모였었는데. 그해 여름에 적겸모 와 노정이 고향에 돌아와
이 모임에 참석했으므로 그 성씨와 연치를 쓰고 그 형모(形貌)를 그리게 했다고 한다. 이렇게 해서 <구로회>가 되고 또 이때 그린 그림을 <구로도> 라고 했다고 한다. 이수문이 그린 이 <향산구로도>도 바로 이러한 백거이의 구로회를 그린 것임은 물론이다.
6첩으로 되어있는 한쌍의 병풍을 함께 잇대어 놓고 보면. 좌우가 대칭을 이루도록 구도가 짜여져 있다. 각 병풍의 양쪽. 즉 첫번째 병풍의 제1폭과 둘째 병풍의 제6폭에. 각기 큰 나무를 배치하여 좌우대칭을 이루게 하면서. 그 사이의 산을 배경으로 한 공간에. 노인들과 따르는 시동들을 그려 넣었다.
지팡이를 짚은 노인들은 서로 담소하기도 하고 주변을 바라보기도 하면서. 자유로운 모습들을 보여준다. 인물들은 기(氣)가 들어가 있고. 의습선(衣褶線)은 다소 투박하지만. 변화가 있으며 때때로 음영법(陰影法)의 구사가 엿보인다. 배경을 이루는 산들의 모습은. 이수문의 악양루도(岳陽樓圖)와 대단히 흡사하여. 거의 같은 시기에 이루어진 작품일 것으로 믿어진다. 15세기 조선 초기의 인물화와 산수화의 잊혀진 한 부분을. 이 작품을 통해 되찾는 느낌이다.

 

 


 

38.
 
작가 : 이수문(李秀文)
제목 : 악양루도((岳陽樓圖)
언제 : 15세기 후반
재료 : 족자 종이에 수묵
규격 : 102.3 x 44.7cm
소장 : 일본 개인

해설 :
이수문은 묵죽만이 아니라 산수화. 인물화. 화조(花鳥)등도 그렸는데.
작품이 모두 일본에만 남아 있다. 이그림은 이수문이 난긴 산수화 중의 하나로.
중국 호남성(湖南省) 악양현성(岳陽懸城)의 서문루(西門樓)인. 악양루를 그린것이다. 악양루는 동정호(洞庭湖)를 정면에 두고 있어. 경치가 아름답기로 유명하여. 등왕각(?王閣)과 함께 자주 그려졌으며. 특히 당대(唐代)의 시성(詩聖) 두보(杜甫)가 악양루에 올라 시를 지은후. 더욱 유명해 지기도 했다한다. 나지막하고 헐벗은 원경의 산을 배경으로, 중경에 악양루가 서 있고 근경에는 고목(枯木)과 무너져 내릴 듯한 초가지붕들이 그려져 있다.
이러한 고목과 옥우법(屋宇法)은 조선시대 우리나라의 회화에서 자주 볼수 있는 특징이다. 또한 근경의 언덕 묘사에 보이는 일종의 피마준(披麻?)처럼 보이는 가는선들은 묵죽화첩 중의 언덕묘사에도 공통적으로 엿보인다. 배경의 산들이 보여주는 형태나 그 묘사법은 매우 특이하다. 이 작품은 이수문의 <향산구로도>와 함께 조선 초기 산수화의 또다른 일면을 보여준다는 의미에서 뜻이 크다.
 

39.
 
작가 : 문청(文淸)
제목 : 누각산수도(樓閣山水圖)
언제 : 15세기 후반
재료 : 종이에 담채
규격 : 31.5 x 42.7cm
소장 : 국립중앙박물관

해설 :
문청은 일본에서 분세이" 라고 불리어지며 이수문과 마찬가지로 일본에 건너가 활동한 조선초기의 화가로 믿어지며. 그는 교오도의 대덕사(大德寺)와 관계가 깊었던 것으로 보아. 승려화가(僧侶畵家)가 아닐까 추측되며. 그는 산수와 함께 인물화에 뛰어났는데. 그의 작품들은 철저하게 한국적인 것들과. 일본적으로 변모된 것들로 대별된다.
일본에 있는 산수도 쌍폭(煙寺暮鐘)과 (洞庭秋月)은 이 누각산수도가 전자에 속하는 것으로 아마도 일본에 건너가기전에 그려진 작품들일 것으로 믿어진다.
이산수화들은 한결같이 안견파(安堅派) 화풍의 특징들을 보여준다. 규칙화된 산등성이 단선점준(短線點?)으 시원형(始源形)으로 볼수있는 선묘(線描) 묵법과 수지법(樹枝法) 들뜬 점법(點法) 누각의 모습과 애매한 토대등이 한국적인 특성을 솔직히 드러내 보인다. 이 누각산수도는 그 구도가 한쪽 구석에 치우친 점이 특이하다.
 

 

40.

 
 
작가 : 석경(石敬)
제목 : 운룡도(雲龍圖)
언제 : 15세기 중엽- 16세기 전반
재료 : 종이에 담채
규격 : 24.9 x 19.7cm
소장 : 국립중앙박물관

해설 :
석경은 안견(安堅)의 제자로 알려져 있으며. 인물과 묵죽. 그리고 산수를 잘 그렸다. 대담한 발묵법(潑墨法)으로 처리한 운무를 배경으로. 여의주를 거머쥐고 조화를 부리는 뿔이난 규룡(叫龍)을 그린 운룡도(雲龍圖)는. 출렁이는 물결 묘사와 어울려. 세찬 기세를 보여준다.
청(靑) 색조의 담채로 바탕을 처리한 데 비해 눈. 코. 입 등에만 주홍의 액선트를 가한 점이라든지. 농묵 의 점을 찍어 눈동자를 마무리한 수법은 매우 돋보인다. 대체로 용은 구름을 일으켜 비를 내리게 하는 조화를 부린다 하여. 가뭄 때에는 용그림을 그려 놓고. 기우제를 지냈다는 기록들을 찾아볼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용도로 사용되었던 것들은 주로 공필법(工筆法)으로 그려졌으리라 추측되며. 발묵 위주의 운룡도는 선종과 관련하여 남송이래로 많이 그려진 듯하다. 고씨화보(顧氏畵譜)에 실려 있는 송대 진용(陳容)의 <구룡도>에서 이러한 유형을 찾아볼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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