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시절의 풍속도(風俗圖)
◎ 농촌의 1년 간 살림살이
◇ 벼농사 ;
초봄 새싹이 움튼 이후부터 푸른 산 풀이나 나뭇잎을 베어 물못자리 터에 넣고 밟아 상판을 만든 후 그 위에는 재(草木灰)를 뿌리고 양판(秧板)을 건조 시킨 후 싹을 기른 볍씨를 파종하고 물을 가두어 못자리를 관리하면서 청초(靑草)를 뜯어 본답(本畓) 마른논에 깔아 소 쟁기로 세벌 갈이 후 물을 넣어 써레로 논을 골라 하지(夏至) 전 닷새 후 닷새 중 날을 받아 품앗이 높을 얻어 일곱 치나 여덟 치 거리못줄을 띠면서 손 모내기를 하였다. 벼논 김매기는 모심은 지 20일을 전후하여 초벌매기로 벼 폭 사이사이에 잡초와 흙을 호미로 파 엎고 그 후 10여일 되면 두벌매기로 풀을 뽑으면서 흙을 고르는 일을, 애벌매기나 만 드리는 열흘간격으로 대강 대강 풀을 뽑는 작업을 하였다. 벼가 출수 하면 참새 때가 몰려들어 벼 낱알의 뜨물을 빨아먹어 치우는 피해를 주기 때문에 벼논에 새끼줄을 치서 빈 깡통을 매달아 잡아당겨 소리를 내고 곳곳에 허수아비를 새워두었으며 뛰애기를 돌려 처서 총소리 같은 굉음으로 새들을 쫓았다. 이 같은 일을 한 달 이상하여야 하기 때문에 논가 한곳에 새 막을 짓고 지붕을 덮어 소나기도 피하고 낮에는 상주하면서 새들을 쫓아냈다. 늦은 가을에 벼가 잘 익으면 낫을 갈아 벼를 베어 논에 깔아 말린 후 다발로 묶어 10다발씩 등짐으로 집에 운반하여 나락 비늘을 눌러놓고 가을 겨울 내내 덕석 위에 홀태를 올려놓고 벼를 털어 디딜방아나 물레방아로 찌어 먹으며 일부는 시장에 내다 팔고 또 일부는 멱살이나 뒤주에 보관하였으며 볏짚은 지붕을 덮고, 소먹이 또는 외양간 깔 게로 소에 밟혀 퇴비를 장만하였다. 50年代初에는 금비(金肥)가없어 퇴비나 재로 작물을 가꾸고 중반이후에 유안(硫安)과 과석이 극소량씩 배급되어 저울에 떠서 근 단위(斤單位)로 나누어 뿌리다가 이어서 요소비료. 그 후에 복합비료가 공급되기 시작하였다. 벼농사나 밭농사에 금비는 없어서 쓰지 못하지만 병충해도 거의 없었으며 간혹 벼멸구가 발생하면 석유 병을 솔잎으로 막아 거꾸로 새워 석유를 뿌리면서 며루를 털어 낸 후 논물을 빼고 새물을 갈아 넣었고 채소밭이 진딧물이 발생하면 비누 물을 뿌리다가 그 후에 화학 살충제인 BHC를 사용하다가 생산중단으로 다른 살충제로 대체하였다.
◇ 보리농사 :
늦가을 갈 까마귀 때 몰려올 무렵에 논밭보리를 갈았는데 소 쟁기로 땅을 파고는 몽근 퇴비와 종자를 뿌리고 흙을 덮으면 파종은 끝나고 월동 중에 인분(人糞)한번 뿌리고는 봄에는 독세기 풀 한번 잡아주면 관리 작업은 끝나고 초여름 단경기에 굶는 사람들 풋보리 감이 되고 망종 지나면 거두어서 비늘로 눌러두었다가 모심은 뒤에 마당에 펼쳐놓고 도리깨로 털어 내어 보릿짚은 땔감으로, 보리는 덕석에 말려서 바구미가 먹지 않도록 갈무리하여두고 조금씩 퍼내서 도구 질이나 디딜방아에 찧어말려 학독에 갈아 여름 내내 꽁보리밥만 먹고 어린이나 환자는 보리밥솥 가운데 얹은 쌀 한줌을 보리와 섞어 먹였다.
◇ 가축 기르기 :
일년 내내 틈만 나면 풀 뜯어 소(牛)를 먹이고 퇴비 장만하는 것과 땔나무를 마련하는 것이 남자들의 일거리였다. 소 기르기는 여름에는 들풀을 뜯어 생식시키면서 낮에는 내매고 밤에는 외양간에 두었으며 겨울에는 볏짚을 작두로 몽글게 썰어 가마솥에 넣고 쌀이나 보리쌀을 씻은 구정물을 부어 콩깍지와 쌀겨 등과 혼합하여 푹 삶은 쇠죽을 쒀 주고 소에는 얼치(볏짚으로 엮은 소옷)를 입혔다. 소한 마리가 반 살림이라고 그만큼 소가 귀하고 비싸 중농이상 부잣집만 소 한 마리씩 길렀고 자제(子弟)들 대학 보낼 때 기르는 소를 내다 팔아 학자금을 마련하였으므로 대학교(大學校)를 우골탑(牛骨塔)이라고 불렀다.
◇ 길쌈하기 :
무명베 길쌈을 위하여 목화를 집집마다 재배하였는데 가을부터 밭에서 두세 번 목화송이를 따내고는 뿌리째 뽑아 밭 주변 빈터에 널어 두었다가 덜 핀 목화를 거두어들이고 줄기는 땔감으로 활용하였다.
옛날 어머니들은 목화를 씨아시로 씨를 골라내고 솜 타기 활로 목화를 부풀린 후 꼬치를 말아내 물레를 돌리면서 실을 가락 끝으로 꼬면서 뽑아 감아놓고 날틀에 실을 걸어 엿새나 일곱 새로 날아 풀을 먹여 솔로 빗으면서 불에 말리면서 도토리에 감아내는 배 매기를 한 후 배틀 에 올려 잉엣 걸이를 하여 실낱 사이사이에 북을 좌측으로 우측으로 한번 씩 넣을 때마다 보디로 내리쳐 배를 짜내고는 食口들의 몸에 맞도록 배 짜치를 요리 저리 잘라내고 붙여내는 밤샘 바느질로 옷을 지어 시집 장가가는 날이나 명절날에 새 옷을 입고는 자랑하며 뽐냈다. 겨울옷은 솜을 놓아 입거나 껴입었다.
봄에 삼(麻)씨를 심고 여름에 베어서 삼 솥에 삶아 껍질을 벗겨 저릅대는 초가지붕에 깔거나 울타리를 막기도 하고 땔감으로 부엌에 들여놓았으며, 삼 껍질은 어머니들이 여름이 다 가도록 삼삼기 작업으로 잘게 쪼게고 서로 이어 붙여 실을 만들어 물래 가락으로 꼬아서 감아 실것에 올린 후 양잿물에 앉혀 삼똥을 빼내고 씻어낸 후 실을 날아서 풀먹이고 불에 말리는 배 매기와 삼배짜기 등은 여자들 몫으로 해가 긴 여름날에도 저녁과 비 오는 날에만 길쌈 을하고 낮에는 밭 매고 밥하고 빨래하고 어린애 젖먹이여 기르는 고달픈 일들을 되풀이하였다.
◎ 50年代 우리고장 庶民 들의 의식주(衣食住)
◇ 의생활(衣生活) ;
어린이들은 대소변을 가릴만한 열 살 무렵까지 밑 터진 바지 옷에 옷이 내려가지 않도록 바지 끈을 어깨로 걸치는 띠를 달아 입었다. 서민들은 여름에는 삼베옷 겨울에는 솜 넣은 무명베 한복을 입고 내복은 없었으며 큰부자는 여름에는 모시옷 겨울에는 명주옷을 입고 신발은 집신이나 나막신 그리고 갯다(나무판자에 끈을 꿔 신도록 된 쓰리바처럼 생긴 신발의 일본말)를 신고 여름에는 맨발로 다니기도 하였다. 그 뒤 50년 중반이후부터 검정 고무신(말표 만월표)이 나오고 흰 고무신은 나들이용으로 신었다. 부자나 사무원들은 따갈 박은 구두를 신고 70년대 들어서는 구두 신이 보편화되면서 따갈이 없어졌다.
농작 업을 할 때 비가 올 경우 짚으로 짠 우장(雨裝)을 짊어지고 대삿갓을 썼으며 60년대 무렵부터 비료 마대를 옷으로 개조하여 입고 밀대 갓을 쓰고 들일을 하였다. 나들이나 장에 갈 때는 한복에 두루마기를 입고 중절모자를 썼다.
◇ 식생활(食生活) :
5,60年代에는 곡식이 너무 부족하여 배곯은 세월이었다.
굶는 사람들이 하도 많기 때문에 어른들을 만나면 '진지 잡수셨어요'라고 인사하고 동무(친구)나 손아랫사람을 만나며 '밥 먹었니'하는 것이 인사였다. 봄철 춘궁기(春窮期)에는 빈민(貧民)은 소나무 생키를 벗겨먹고 칡뿌리 캐먹기 풋보리를 베어 쪄서 먹고 누꽈 개떡(쌀겨에 사카린과 물을 혼합 반죽하여 익힌 음식)이나 뜨물개떡(보리쌀을 확독에 갈아 나오는 뜨물을 여러 날 모아 밑에 가라앉은 뜨물을 삼배헝겊으로 짜서 찐 음식) 망종이 지나면 그나마 보리죽이나 보리밥을 먹을 수 있고 남의 품팔이라도 하게 되면 식구 한두 사람은 데리고 가서 밥을 얻어먹었고 겨울철에는 노는 날이 많으니 밥 적게 먹기 무 밥 해먹기 죽 쒀먹기 등으로 배를 채웠는데 죽 쑨 날은 어른도 한 그릇 어린애도 한 그릇이라고 숭늉그릇이나 양판 그릇 등 큰 그릇에 담아 배불리 먹을 수 있었다. 가을 추수한 벼는 홀태 밑에서 곱 거리 장리 샛거리 갚고 나면 겨우 몇 달 식량을 충당하고는 또 샛거리 빚을 얻은 집이 많았다. 뉘집 제삿날이면 사랑방 꾼 들이 잘 기억하였다가 제사음식 얻어먹기 놀이로 한두 사람이 대표로 가서 빈 바구니를 제삿방에 던져 넣으면서 단자왔소 하고 소리지르면 제사집 주인은 음식을 골고루 성의껏 바구니에 담아주면 사랑방에 가져와서 모두 둘러앉아 출출한 배를 달랬다.
그 무렵에는 얻어 먹으로 다니는 사람들이 많아 하루에도 수명(數名)이 각 가정을 방문하여 동냥 좀 주쇼 하면서 구걸하면 수수쌀이나 보리 등 곡식을 한 보새기씩 짊어지고 다니는 자루에 담아주고 어떤 집은 줄 것이 없다고 그냥 보내기도 한다. 문둥이가 끼니때 와서 밥 좀 주쇼 하면 먹던 밥에 반찬이나 국물을 부어 사립문 쪽에 가져다주면 그곳에 쪼그리고 앉아서 먹고는 그릇은 그곳에 두고 간 뒤 그 그릇은 삶아 사용한다.
음력 정월 보름날이면 거지 아닌 동네 사람들도 떡이나 찰밥 얻으려 다녔다.
고기를 먹을 수 있는 날은 명절날, 조상 제삿날, 가족생일 그리고 올게십리날(추석 전에 햇곡식으로 지내는 추수감사 행사)이 돌아와야 기르는 닭을 잡거나 돼지고기를 사다가 조상님께 제사지내고 먹어 볼 수 있었다.
기호품으로 담배를 빼놓을 수 없는 대 남자는 열 대 여섯살이되면 어른 몰래 피우는 놈도 있었고 가정에서 남모르게 (전매품으로 단속하였음)재배하여 잎을 따 말려서 써럽초로 만들어 두고두고 담뱃대에 넣어 피우거나 신문지에 말아 피우고 꽁초는 죽석 밑에 버렸다가 담배가 떨어지고 없으면 죽석 밑을 뒤지거나 주어서 말아 피웠다. 그 뒤에 봉초와 양절 권연 담배가 판매되었다..
◇ 주생활(住生活) :
10여坪의 초가집에 5-6명이 거주하는 가옥 형태가 대부분이고 매년 늦가을이면 집이기(지붕 이엉작업)를 하는 대 미리 새끼를 꼬고 마람과 용 마람을 엮어 놓은 다음 火일을 피하여 날을 받아 집 일줄 아는 높을 얻어 이엉작업을 하고 그 날은 찰밥을 먹었다.
부엌(정재)은 음식을 만드는 공간으로 주요 구조는 무쇠 솥을 걸어놓은 아궁이 2개 정도와 음식 그릇을 씻는 구시(통나무를 파서 만든 물통)와 씻은 그릇을 엎어놓은 살강(대 조각을 엮어 펴놓은 구조)과 땔나무를 저장해두는 나뭇청으로 되어있다. 아궁이는 음식을 익힐 뿐만 아니라 방을 데우는 역할을 한다. 집집마다 아궁이 한곳에 조왕神 자리를 마련하여 두고 아침새벽 일찍 물을 길러다가 보새기의 전날 바친 물은 굴뚝에 붓고 그 그릇에 새물을 떠놓은 뒤에 밥을 짖고 반찬을 마련하였다.
방(房)은 전 가족이 먹고 자는 공간으로 부모와 어린 자녀 등이 한방을 共用하고 시렁과 횃대가 있어 시렁 위에는 이불과 농짝을 얹어 두고 횃대에는 잠잘 때 벗어둔 옷이나 갈아입을 옷 또는 수건을 걸어놓았다. 방바닥은 맨 흙에 위에 종이를 덮고 죽피방석을 깔아 아침저녁으로 쓸고 닦았으며 어린애가 자다가 오줌을 누어도 흙 밑으로 스며들어버려 항시 꼬독 꼬독하였다. 벽은 새멘 종이나 창호지를 발라 흙을 가리고 곳곳에 못을 박아 호롱불 등잔과 일상용구들을 걸어 두었다.
변소는 몸체 집에서 좀 떨어진 곳에 있으며 대게는 부침가래 변소(큰돌 두 게를 띄어 놓아 그 돌 위에 양발을 얹어 쪼그리고 앉아 용변을 보고 부칠 가래로 재를 파서 덮고 뒤쪽으로 쳐내는 구조) 또는 분항 변소(땅을 파서 큰 오가리를 묻고 그 위에 나무 판자 두 개를 걸쳐 용변을 보는 구조)이고 뒤처리를 위해서 볏짚 검불을 깔 망태에 담아 걸어 두었다.
◎5, 60년대 풍속
그 무렵에는 조혼(早婚)에 신부 집 마당에서 치르는 구식 결혼제도(舊式 結婚制度)였다.
총각(總角)은 20세 전후. 처녀(處女)는 18세 전후에 결혼하였으며 신랑이 사모관대(紗帽冠帶)를 갖추어 가마나 택시 타고 신부 집으로 가서 결혼식(婚禮式)을 지내고는 삼일 만에 신부 대리고 신랑 집에 와서 시부모나 일가친척에 인사하고 잔치를 벌인다.
그 당시(當時)는 부모(父母)에게 효도(孝道)하고 형제(兄弟)간에 우애(友愛)하며 벗(친구)간에는 신의(信義)를 지키는 것이 인간(人間)의 가장 으뜸 되는 덕목(德目)이라는 것을 잘 알아 누구나 반드시 실행(實行)하도록 노력하면서도 신(神)이 아닌 인간으로 미신(迷信)을 저버릴 수 없었던지 가족 중 환자가 발생하면 무당이나 당골래를 불러다가 쌀을 차려두고 물동이에 바가지를 엎어 두드리며 북방조왕 푸닥거리를 밤새도록 외쳐대거나,
집수리를 잘못하여 귀신이 씌었다고 여겨 집을 고친 곳에서 도치를 짜구로 두드리면서 경문을 외우는 동전잽이를 하거나, 환자 머리 위에 바가지를 씌우고 마당가운데 앉힌 뒤 칼로 바가지를 두드리며 잡귀는 썩 물러가라 헛쐐 헛쐐를 거듭 외치고 곡식을 던지면서 마지막에는 칼을 던지고는 잡귀가 나갔다 고하면 거짓말 같이 병이 낳는 수가 있었다.
산모(産母)가 어린애를 출생하면 사립문에 금(禁)줄을 두르고 일곱 이래까지는 방안 윗목에 볏짚 휘애기를 한줌을 묶어놓고 그 옆에 물 한 대접을 두고는 매일 새벽에 우물물을 길러다가 새물로 갈아 바쳤다.
부모가 돌아가서면 정성껏 장례를 지낸 뒤 영오를 마련하여 두고 삼년상 기간 동안 매끼니 때마다 밥과 국을 올리고 삭망일(朔望日)에는 상복(喪服)에 두건(頭巾)을 쓰고 망인(亡人)의 명복(冥福)을 비는 뜻으로 아이고 아이고하며 곡(哭)을 하였다.
눈병(眼疾)이 나면 3색 헝겊에 눈곱을 닦아 고샅 길가에 있는 산 나무에 달아두고 길가는 사람이 보면 병이 그 사람에게 옮기면서 자기는 낳고 퇘퇘하면서 침을 뱉으면 옮기지 않는다고 믿었다.
가랫대가 서면 3거리 고샅길에다가 새금팔(깨진 그릇조각)로 솟을 걸고 볶은 콩을 얹어 놓으면 지나가다 멋모르고 차버린 사람에게 옮기고 환자는 낳는다고 믿었다.
어린이 놀이로 사내(남자)는 여름에는 팽이치기, 자치기, 재기차기, 씨름하기, 땅따먹기, 공차기, 도롱태 굴리기, 봉사놀이, 숨바꼭질과 겨울에는 연날리기 썰매타기 논두렁 불 지르기 등을 즐겼고 여자아이는 비사치기, 고무줄넘기, 삔 따먹기, 공놀이, 인형 각시 만들기 등의 놀이를 하면서 자랐다.
1950- 60년대 무렵에는 소를 먹이고 열댓 마지기 농사를 짖는 집은 머슴(일꾼)을 두었고 부잣집은 머슴 두세 명과 식모를 두기도 하였다. 머슴들이 하는 일은 겨울에는 땔감 나무하기 짚일(마람엮어 집이고, 덕석엮고, 새끼 꼬고, 맷방석 절고, 집신 삼고 집 소쿠리 만들고 하는 일들)과 소 관리하는 일(소죽 쑤고 소 퇴비내고 소 얼치(덮게) 입히고 벗기는 일과 소 구르마에 나락 실어다 물방앗간에서 찧어 오는 일)을 하고 봄여름에는 풀 뜯어다 논에 깔고 쟁기질하여 모심고 풀 메는 등 농사 짖는 일. 가을에는 추수하고 보리 심는 일들을 하였다. 동지 쇠고는 머슴들을 들이고 내보냈으며 새경(일년간의 품삵)은 담사리는 밥만 먹이고 작은 머슴은 벼 6-7섬. 상머슴은 벼 10섬 내외씩을 후불제로 주었다.
첫댓글 글을 정자로 해주세요 나이가드니 노환으로 글이 잘보이지 않습니다 ㅎㅎㅎ 미안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