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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의수세보원 강론(도올 김용옥) 스크랩 동의수세보원강론 6 (끝)
청산아 세월아 추천 0 조회 51 12.08.05 12:49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동의수세보원강론 6 
 


【 四端論 】

 

-1-

 

人稟臟理, 有四不同.

肺大而肝小者, 名曰: "太陽人." 肝大而肺小者, 名曰: "太陰人."

脾大而腎小者, 名曰: "少陽人." 腎大而脾小者, 名曰: "少陰人."

 

人趨心慾, 有四不同.

棄禮而放縱者, 名曰: "鄙人." 棄義而偸逸者, 名曰: "懦人."

棄智而飾私者, 名曰: "薄人." 棄仁而極欲者, 名曰: "貪人."

 

五臟之心, 中央之太極也. 五臟之肺脾肝腎, 四維之四象也.

中央之太極, 聖人之太極, 高出於衆人之太極也.

四維之四象, 聖人之四象, 旁通於衆人之四象也.

 

太少陰陽之臟局短長, 四不同中, 有一大同, 天理之變化也. 聖人與衆人一同也.

鄙薄貪懦之心地淸濁, 四不同中, 有萬不同, 人欲之 狹也. 聖人與衆人萬殊也.

 

인간이 품부한 장리에 네가지 다른 것이 있으니

폐가 크고 간이 작은 자를 이름하여 "태양인"이라 한다.

간이 크고 폐가 작은 자를 이름하여 "태음인"이라 한다.

비가 크고 신이 작은 자를 이름하여 "소양인"이라 한다.

신이 크고 비가 작은 자를 이름하여 "소음인"이라 한다.

 

인간의 심욕으로 나아가는 데에 있어서 네가지 다른 것이 있으니

예를 버리고 방종하는 자를 이름하여 "비인"이라 한다.

의를 버리고 투일하는 자를 이름하여 "나인"이라 한다.

지를 버리고 식사하는 자를 이름하여 "박인"이라 한다.

인을 버리고 극욕하는 자를 이름하여 "탐인"이라 한다.

 

오장 중에서 마음은 중앙의 태극이다. 오장의 폐 비 간 신은 네방향의 네모습이다.

중앙의 태극에 있어서는 성인의 태극이 중인의 태극보다 높게 나타난다.(태극에 있어서 중인과 성인의 차이가 있다. 성인이라고 해서 장기가 다른 것은 아니다)

네방향의 네모습에서 있어서는 성인의 사상이 중인의 사상과 공유되는 것이다.

 

태소음양의 장기의 국면이 길고 짧은 것은 네가지 다른 네체질을 얘기했지만 그 속에 크게 같은 것이 있으니 천리의 변화라는 것이다(그것은 움직일 수 없는 하늘의 법칙이다). 그러기 때문에 성인과 중인이 같은 것이다.

그러나 비박 탐나의 심지청탁은 네체질이 다른 중에 또 만가지로 다르니 인욕이 넓고 좁은 것이다(사람의 욕심은 천차만별이다. 그러나 인간의 마음은 무형적이래서 천차만별이고 변화무쌍하여 컨트롤하기 어려운데 장기의 문제는 네가지로 확실하게 구분이 된다). 여기서는 성인과 중인이 아주 다르다.

 

 

해설 -1-

 

臟理(장리) : 理는 동양에서는 天理를 나타내는 말이에요. 장리라는 말은 여기서 天理라는 의미가 있어요.

趨(추) : 나아간다, 뛰어간다.

旁通(방통) : 옆으로 통했다, 공유되는 것이다. 인간이나 성인이나 공유되는 것이다.

萬殊(만수) : 아주 다르다.

 

여태까지의 체질의학이라는 것은 단순하게 외형상의 분류라든지 음양상의 분류였다. 그런데 내(이제마)가 분류한 특징은 장리에 있다고 했죠. 결국 인간의 장기의 이치를 가지고서 인체의 typology를 만들었다는 것이 나의 기발한 점이다 라고 얘기한 것이 있죠. 그것이 어떻게 다르냐 하는 것은 지난 시간에 인간이라는 body를 유한한 우주로 볼 적에 그 유한한 우주에서는 "질량 불변의 법칙"과 같이 반드시 강한 데가 있으면 약한 데가 있다는 원리에 의해서 이런 大小라는 개념을 썼습니다. 사실 大小라는 개념은 사상의학에서는 실제적으로 morphologycal하게도 적용이 돼요. 권도원 선생님이 말씀한 것이지만 肝大而肺小者라고 하면 실제적으로 보통 사람들보다 간이 크다는 것이거든요. 형태적(morphology)으로도 간이 크다. 심지어는 서울 대학교 암연구소에 있는 서정선 박사에게 쥐의 장기의 대소를 가지고 쥐의 체질을 구분하여 실험을 해볼 수 없느냐는 얘기도 했습니다만 실제로 장기가 형태적으로도 차이가 있는 것 같아요. 그것은 요새 수술을 해보니까 일치가 된다고 보고 있거든요. 그런데 그것 보다는 기철학적으로 얘기를 한다면 여기서는 역시 "活性度"를 말하겠죠. 즉간이라는 장기의 activity가 강하다는 것이다. 大小라는 의미는 양측면에서 분석이 돼야 할 것이다.

 

 

【 人稟臟理∼ : 人趨心慾∼ 】

 

이 두 문장이 댓구를 이루고 있죠. 여기서 臟理하고 心慾은 이원적으로 구분되고 있습니다. 格致藁에서 心 身 物 事로 말한다면 臟理라는 것은 身에 해당되고 心慾은 心에 해당되는 것이죠. 옛날에 心이라는 문제를 잘 이해 못했는데, 역시 이제마는 臟理와 心慾을 어느 정도 이원적으로 보고 있는 패러다임이 있어요. 나는 그런 의미에서 이제마도 주자학적 패러다임을 근본적으로 벗어나지는 않았다는 생각을 하고 있어요. 鄙 懦 薄 貪人의 네가지 인간의 typology가 또 나왔는데 이것은 太陽 太陰 少陽 少陰人의 인간 구분과 다른 차원입니다. 나는 옛날에 이 鄙薄貪懦와 太陽 太陰 少陽 少陰을 연결 시킬 수 없느냐! 예를 들면 鄙人이 太陽人 계열이고 懦人이 少陰人 계열이고 薄人이 少陽人 계열이고 貪人이 太陰人 계열 아니냐 이렇게도 생각을 해봤는데 그것은 일단 단절시켜서 생각하는 것이 좋습니다. 내가 격치고를 보면서 느끼는 것은 이제마가 완전히 다르게 생각했다는 것이다. 이제마의 사상의학이라는 것은 臟理상의 구분이죠. 心慾상의 구분은 다른 것입니다. 臟理상으로 네가지 인간의 유형이 나오겠고, 心慾상으로 또 다시 네가지 유형이 나올 때 그것은 다른 typology가 될 수 있다는 얘기죠.

 

 

【 五臟之心 】

 

五臟중에서 四臟은 肺脾肝腎으로 人稟臟理로 나간 것이고, 五臟중에서 肺脾肝腎을 뺀 心은 人趨心慾의 네가지 鄙薄貪懦로 나타난 근원의 心입니다. 五臟의 心은 중앙의 태극이고 五臟의 肺脾肝腎은 四維의 四象이다. 四象論이라는 것은 肺脾肝腎의 臟理를 말하는 것입니다. 중앙의 태극을 가지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 사상의학은 어디까지나 臟理를 중심으로 하고 心의 문제는 빠지는 것입니다. 心의 문제는 격치고에서 다루고 있는 것입니다. 옛날에 나는 이것을 혼동했었는데 요새 체계적으로 보니까 이제마에게 두 측면이 parallelism으로 가고 있다.

장리의 사상으로 말하면 성인이나 중인이 보편이다. 방통이라는 말은 같다는 얘기예요. 그런데 성인이 보통사람과 다른 이유는 뭐냐? "오로지 心이 高出이다." 이제마의 사상론에 있어서는 모든 인간의 보편이 science입니다. 그러나 心의 이론으로 가면 사상의학을 넘어서는(高出) 세계로 설정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성인의 세계입니다. 이제마에게 있어서 이런 이원론이 있어요.

 

 

【 存天理去人欲 】

 

주자학이 뭐냐? 그러면 생각하여야 할 두마디 단어가 있습니다. 그것은 天理와 人欲입니다. 주자학의 명제는 人欲을 버리고(去) 天理를 존(存)한다. "存天理去人欲"이 주자학의 대명제입니다. 예를 들면 칸트 철학에서 moral maximum이 있어요. 칸트의 정언 명령의 제1명령이 "사람을 수단으로 보지 말고 목적으로 다루라."이다. 이런 식으로 철학의 모든 것이 연역되는 대전제가 있거든요. 주자학의 가장 중요한 것은 "存天理去人欲"입니다. 그래서 천리를 존하고 인욕을 거한다고 할 때 천리는 상당히 형이상학적(metaphysical)인 것이고 인욕은 형이하학적인 것이겠죠. 그러니까 천리는 도덕적인 법칙(性)이 다 들어 있는 것이고 인욕은 인간의 마음(心)이다. 그러므로 천리는 좋은 것이고 인욕은 나쁜 것이다. 우리가 조선조의 문화를 주자학의 문화라고 하는 것은 뭐예요? "인욕을 억누르는 문화죠." 이것이 주자학의 특징이에요. 여자들의 문제에 대해서 feminist들이 조명하는 조선조의 역사는 去人欲의 문화입니다.

이제마의 기발한 점이 뭐예요? 천리를 뭐로 봤어요. 형이상학적인 것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천리를 오히려 肺脾肝腎의 장리로 본 것이죠. 천리라는 것이야말로 법칙화가 가능하다는 것이다. 그것은 science의 대상이라는 것이다. 有一大同을 오늘날의 말로 말하면 현대과학에서 쓰고 있는 uniformity of nature입니다. uniformity of nature라는 것은 무슨 얘기냐면? 뉴튼 물리학의 절대 공간론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뭐예요. 똑같은 힘의 벡터를 주어서 떨어졌을 적에 이 공간에서 했을 때와 저 공간에서 했을 때가 다르면 안되죠. 어디서든지 uniform하게 나타나는 것이 자연이라는 절대 시공의 구조입니다. 그것을 uniform하다고 규정한 것이 근대과학의 출발이거든요.

 

 

【 臟局短長 】

 

臟局의 短長의 차이는 있지만 그 不同한 중에서 움직이는 법칙은 보편적인 것이다. 聖人과 衆人이 旁通하는 것이죠. 그런데 차이가 지는 것은 뭐냐? human problem은 사실은 人欲에서 온다는 것이다. 聖人與衆人 一同也는 성인과 중인이 다 똑같은 법칙의 지배를 받는다는 얘기죠.

 

 

조선역사의 최대 학술논쟁인 四端七情論의 새로운 이해

 

 

1. 退溪의 첫 편지

 

又因士友間, 傳聞所論四端七情之說, 鄙意亦嘗自病其下語之未穩,

逮得 駁, 益知 劉 繆, 卽改之云: 四端之發純理, 故無不善;

七情之發兼氣, 故有善惡, 未知如此下語無病否?

 

요새 친구들 사이에서 사단칠정설에 관해서 주고받는 얘기들을 듣고 있는데 (정추만이라는 사람의 도해가 있습니다. 그것을 가지고 하는 논쟁) 내가 생각할 때는 천명도설의 밑에 써 놓은 말(下語)이 타당성이 없다고 생각된다. 그래서 반박을 얻게 되는 데에 이르러서 더 잘 못 됐다는 것을 알아 다시 개량을 해서 말하기를 사단의 발은 순전한 리라서 선하지 않는 것이 없고 칠정의 발은 기를 겸하고 있기 때문에 때로는 선할 수 있고 오할 수 있다. 그러니 이 말의 병폐가 있는지 없는지 봐 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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四端이라는 것은 仁義禮智를 말한 것이고 七情은 喜怒哀樂愛惡欲을 말한 것입니다. 仁義禮智는 요샛말로 하면 인간의 moral nature이고 七情이라는 것은 우리의 감정적 hall을 나타내는 sentiment입니다.

 

 

2 高峰의 첫 편지

 

蓋人心未發則謂之性, 已發則謂之情; 而性則無不善, 情則有善惡.

此乃固然之理也. 但子思 孟子所就以言之者不同,

故有四端 七情之別耳, 非七情之外復有四端也.

今若以爲四端發於理而無不善, 七情發於氣而有善惡, 則是理與氣, 判而爲兩物也

 

대저 인간의 마음이 아직 발현되지 않았을 때 그것을 성이라고 하고 그것이 발현되면 정이라고 하는 것이다. 발현되지 않은 성에 있어서는 무불선이고 정에 있어서는 선오이다. 그러니 이것은 원래가 그런 것 아니냐. 단지 자사와 맹자가 그것이 나아가는 바를 가지고서 말하는 것이 부동하다. 그러므로 사단 칠정의 구별이 있을 뿐이지 칠정 이외의 또 다시 사단이 있다는 말은 아니다. 그런데 선생이 지금 고쳐 가지고 말하기를 사단은 리에서 발해서 무불선하고 七情은 기에서 발해서 유선오라고 한다면 이것은 리와 기가 완전히 나뉘어져 두물이 되어 버린다(이렇게 되면 리기이원론이 되는 것이죠. 리라는 것은 인간의 도덕적인 moral nature를 말한 것이고 기라는 것은 인간의 정감의 세계가 되는 것이죠).

 

측은지심도 측은한 마음이 드러난 것 아니예요. 발현되어 나타난 것이기 때문에 仁之端이라고 했죠. 端이라는 것을 빙산으로 본다면 tip입니다. 첨단할 때 단입니다. 仁의 端으로 나타나는 것이 측은지심이라는 것이죠. 그러니까 사단이라는 것은 仁義禮智예요. 사단이라는 것은 단이고 단이라는 것은 측은지심 수오지심 사양지심 시비지심이죠. 사단칠정논쟁에서 사단이라는 것이 인의예지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다. 사단이라는 것은 인의예지가 표출된 감정이죠. 그러니까 기고봉은 사단이라고 해도 그것은 이미 발현된 것이다. 그러니 未發의 性으로 볼 수는 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사단이라도 칠정외로 따로 있을 필요가 없는 것이죠. 그래서 사단과 칠정을 하나로 묶어 보자는 것이죠. 그러나 사단과 칠정을 하나의 칠정이라는 차원에서 묶으면 사단이라는 현상을 나타내고 있는 도덕성이 정에 소속되어 버린다. 인간은 감정의 노예가 되기 때문에 문제가 되는 것인데 그 감정에다가 인간의 도덕성을 맡겨 버릴 수 없다는 것이 이퇴계의 입장입니다. 이제마는 天理는 공통이고 人欲이 다르다고 봅니다. 인간의 질병의 문제가 대두되는 가장 근본적인 것은 장리의 문제라기 보다는 전부 心慾의 문제거든요.

 

브로노브스키의 중요한 얘기 중의 하나는 "인간이라는 것은 언어의 노예다." 라고 한다. 개를 보면 병의 발생률이 우리보다 적은 것은 인간과 같은 언어를 가지고 있지 아니하기 때문에 실연을 해도 대단하게 실연을 하거나 옆에서 놀던 개가 돌아갔다고 해서 나를 배반할 수 있느냐 하고 고민하는 것은 없다. 병의 발생이 기생충이나 식생활로 인한 것은 있지만 개가 암에 걸리는 것은 별로 없거든요. 감정의 범위가 일정하죠. 그런데 인간은 네가 나를 버리고 갔느냐 하며 고민하고 그러다 보면 병이 되는 것이죠. 인간에게 있어서 최대의 문제는 칠정을 어떻게 컨트롤하느냐 하는 문제인데 이것이 조선조 유학의 최대의 문제였습니다. 이 문제를 medicine과 관련지어서 같이 생각해야 됩니다. 기고봉이 얘기하는 것은 인간의 문제를 칠정의 입장에서 일원화시키자 이원적으로 도덕성을 따로 볼 수 없다는 얘기예요. 그리고 컨트롤하는 것은 결국 정을 컨트롤 해야되지 않느냐 이퇴계는 인간에게는 도덕적인 본성이 있으므로 그 도덕적인 본성의 당위성에 의해서 선한 행동을 해야 한다는 당위적인 입장이 강한 것이고 기고봉은 그럴 필요가 없이 인간에게 발현되는 감정만 컨트롤 하면 건강해질 수 있다는 얘기다.

 

蓋性之乍發, 氣不用事, 本然之善得以直遂者, 正孟子所謂四端者也.

此固純是天理所發. 然非能出於七情之外也, 乃七情中發而中節者之苗脈也.

 

만약 성이 갑자기 발할 때 기가 간섭을 하지 않고 인간이 본래 가지고 있는 선함이 곧 바로 발현되는 것이 맹자가 말한 사단인데(기가 간섭이 된 것이 없이 인간이 가지고 있던 moral nature가 곧 바로 발현되는 것이 사단인데) 이것은 분명히 순전히 천리의 소발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칠정의 밖으로 나가는 것은 아니다. 이것은 결국 칠정중에서 발하되 그 발한 것이 제대로 절도에 맞아 떨어질 적에 그러한 식으로 발현되는 묘맥이 소위 말해서 우리가 도덕이라고 하는 것이다(상가라는 상황에서 깔깔대고 웃을 수는 없죠. 그것은 하나의 상황 즉 절(節)이 있다. 그 절에 맞게 슬프게 발현이 되야죠. 어떠한 상황 상황에 감정이 알맞게 발현되면 그것이 도덕이다).

 

夫理, 氣之主宰也; 氣, 理之材料也.

二者固有分矣, 而其在事物也, 則固混淪不可分開.

但理弱氣强, 理無朕氣無跡, 故其流行發見之際, 不能無過不及之差.

此所以七情之發或善或惡, 而性之本體或有所不能全也.

然其善者乃天命之本然, 惡者乃氣稟之過不及也,

則所謂四端七情者, 初非有二義也.

 

대저 리라는 것은 기의 주재라고 하는 것이고, 기라는 것은 리의 재료이다. 이 둘은 원래 리기의 분별이 있다. 그러나 사물에 있어서는 실제로 하나로 얽혀 있어 나눌 수가 없는 것이다. 그러나 리가 약하고 기가 강하다든지 리가 조짐이 없는데 기가 흔적이 있다든지 하는 그런 상황이 있기 때문에 그것이 흘러가다가 발현되어 나타날 때에는 과불급이 없을 수는 없다(과불급이 인간에게 있어서 병을 일으키는 것이죠. 칠정의 과불급 상태가 인간의 질병 상태입니다). 그래서 칠정의 발은 혹선하고 혹오한다. 그것은 성의 본체가 온전하게 다할 수는 없는 것이라고 하는 말이 있을 수가 있으나 그때에 우리가 말하는 선이라고 하는 것은 천명의 본래의 모습이요. 오라고 말하는 것은 기품의 과불급을 말하는 것 뿐이니 사단칠정이 처음부터 두 뜻이 있는 것은 아니다(본래 그러한 모습이 선이고 기가 발현될 적에 너무 지나치거나 불급이 되면 오가 된다. 이제마의 병리론에 가면 바로 기품의 과불급의 문제를 가지고 장리에 나타난 현상을 설명하고 있는 것이다. 이제마의 사상의학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희로애락의 과불급이 장기에 미치는 영향을 가지고 인체를 나누었다. 소위 사단칠정론하고 동의수세보원은 하나의 패러다임 속에서 나온 것입니다).

 

學者須知理之不外於氣, 而氣之無過不及自然發見者乃理之本體然也.

而用其力焉, 則庶乎其不差矣.

 

학자들이 반드시 리가 기밖에 따로 있지 않다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혹자는 저의 기철학을 가리켜서 너는 기고봉의 입장에 더 가깝지 않느냐고 말하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기고봉하고 나는 또 달라요. 그러나 기고봉은 기일원론적인 입장에서 문제를 처리하고 있어요). 그러한 기가 너무 지나치거나 모자라든지 하는 것이 없이 스스로 그러한 데로 발현되면 그것이 바로 리의 본래 그 모습이다(리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기일원이고 기가 과불급이 없이 자연스럽게 발현되는 것이야말로 리의 본체다).

성철 스님이 도를 닦는 다는 것은 잡념을 없애고 언어의 노예가 되는 언어에서 인간을 해방시킨다는 것이 불교의 명제 아닙니까? 언어가 단절된 상태에서 기가 인간 그대로 flow한다. 불교 이론도 medical science를 가지고 얘기가 되는 것이다. 이러한 퍼펙트한 Healthy State를 열반이라고 하죠.

 

 

3. 퇴계의 첫 대답

 

夫四端情也, 七情亦情也, 均是情也.

何以有四七之異名耶? 來喩所謂"所就以言之者不同"是也.

蓋理之與氣, 本相須而以爲體, 相待以爲用, 故未有無理之氣, 亦未有無氣之理.

然而所就而言之不同, 則亦不容無別.

從古聖賢有論及二者, 何嘗必滾合爲一物而不分別言之耶?

 

네 말대로 사단도 정이다. 칠정 또한 정이다. 둘 다 정이다. 왜 사단칠정의 이명이 인간세에 나타나 있느냐(감정과 이성이라는 말들이 왜 있느냐)? 편지에서 말씀하신 바 말을 하고자 할 때 그 말의 근거가 되는 그룬트가 문제이다. 대저 리의 기와 더불어 본래 서로 필요로 해서 한 몸이 되는 것이고 서로 기다려서 용이 된다. 그러므로 리가 없는 기가 있을 수 없고 또한 기가 없는 리도 있을 수 없다. 그러나 그룬트의 부동함을 말한다면 또한 구분이 없을 수가 없는 것이니 옛날 성현으로부터 이 두가지를 논급을 해 왔는데 하필 지금 와서 두리뭉실 혼합하여 한물로 만들고 나누어서 말할 필요가 없다고 당신은 말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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來喩(래유) : 편지.

所就以言之者 : 말을 하고자 할 때 그 말의 근거가 되는 것, 그룬트.

 

至於後世程 張諸子之出, 然後不得已而有氣質之性之論, 亦非求多而立異也.

所指而言者, 在乎稟生之後, 則又不得以本然之性混稱之也.

故愚嘗妄以爲情之有四端 七情之分, 猶性之有本性 氣稟之異也.

然則其於性也, 旣可以理 氣分言之; 至於情, 獨不可以理 氣分言之乎?

 

후세에 정 장의 제자가 나오는 데에 이르러서 연후에 부득이 기질지성의 논쟁이 있게 되었다(부득이해서 논쟁이 있게 되었다는 말은 기질지성의 론과 본연지성의 이원론이 생겨나게 되었다). 또한 많은 것을 구해서 다른 학설을 세우기 위한 것만은 아니다. 그들이 지적하고자 하는 것은 그들이 가리켜서 말하는 바의 것은 생명을 품부받고 난 후에는 본연지성을 가지고서 혼칭하는 것이 불가능하다. 그러므로 정에는 사단과 칠정의 분별을 가지고 성에 있어서는 본성과 기품의 다름이 있다고 나는 일찍이 생각했다. 그렇다면 성에 있어서도 본연지성과 기질지성이라는 리와 기를 가지고 분언을 할 수 있다면 왜 정에 이르러서 유독 리와 기를 가지고 분언할 수 없겠는가(성에 있어서도 기질지성과 본연지성의 차이를 둔다면 발현되어 있는 정에 있어서도 사단과 칠정의 리와 기의 분언은 가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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程 張諸子之出 : 신유학이라는 패러다임을 주자이전에 만들어간 사람들입니다. 氣質之性이라는 말하고 대비되는 말이 本然之性입니다. 本然之性이라는 말은 원래 인간이 가지고 있는 도덕적인 moral nature를 말한 것이고 氣質之性은 인간이 후천적으로 습득되어지는 완전히 일치시켜서 봐야 된다는 입장이거든요. 그런데 이제마는 이러한 면을 불철저하게 사고하고 있어요.

 

惻隱 羞惡 辭讓 是非, 何從而發乎? 發於仁 義 禮 智之性焉爾.

喜 怒 哀 樂 愛 惡 欲, 何從而發乎? 外物觸其形而動於中, 緣境而出焉爾.

 

측은지심 수오지심 사양지심 시비지심은 어디로부터 발현되는 것인가? 그것은 인 의 예 지의 성으로부터 발현되는 것이다. 희 로 애 락 애 오 욕이라는 것은 어디로부터 발현되는 것인가? 그것은 외부의 사물이 나의 몸을 촉발시켜서 내 마음속에서 동하게 되면 연경을 따라서 나타나게 되는 것이다.

 

조선조 유학자들이 논쟁했던 가장 핵심적인 문제는 마음이라는 것이 도덕적 자발성이 있느냐 없느냐 하는 문제입니다. 감정이라는 것은 인간이라는 동물에게서 나타나는 현상이다. 어떤 의미에 있어서 조선유학자들이 말하는 칠정이라는 것은 동물과 공통되는 언어입니다. 희로애락은 개에게도 있죠. 화날 때는 월월하고 좋아할 때는 꼬리치고 자기 자식들을 보호하는 것이 있잖습니까? 그런 것은 칠정의 세계이고 그것을 넘어서는 언어를 어떻게 확보하느냐 하는 문제입니다. 그 넘어서는 언어를 브로노프스키는 "science"라 하고 이퇴계는 "도덕"이라고 합니다. 생물적인 언어를 넘어서는 언어를 기고봉은 칠정의 레벨에서 다 환원시켜 해결하자는 것이다. 인간의 도덕성이니 science니 주장하지만 결국은 그것은 헛거다.

 

이제마는 장리는 성인과 방통이라고 했죠. 장리는 차이가 없다는 것이다. 그것은 보편적 법칙에 의해서 지배를 받는다는 얘기죠. 그런데 이퇴계라는 사람은 그러한 기고봉의 논리에 승복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퇴계가 주장하고자 하는 것은 인간다움이라는 그룬트를 범동물적인 본능적 세계에서 벗어나 따로 확보할려는 노력이에요. 이 논쟁이 조선조의 가장 핵심적인 것입니다. 나는 우리가 여태까지 동물적 언어라고 보아 왔던 부분이 사실은 이성적인 brain science가 대상으로 하는 것보다 더 치밀하고 조직적이다. 이제마는 역시 기고봉이 얘기하고 있는 입장을 철저화시켜 나온 사람이죠. 그것을 형이상학적인 구조가 아니라 장리의 구조로 환원시켜 장리의 구조속에서 보자. 장리상의 희로애락의 문제가 앞으로 어떻게 나타나냐 하는 것을 논의해 들어갈 것입니다. 유감스럽게도 도덕적 문제에 가면 이제마는 또 다시 중앙지태극이라는 심을 따로 설정했다는 얘기다. 여기에 이원적 구조가 있고 결국 퇴계적 패러다임을 또 탈피하지 않고 있다는 얘기다. 이 문제에 있어서 이제마가 철저성이 없고 애매하다.

 

 

【 과학과 인간 】

 

과학(science)은 뭐냐?

 

과학이라는 말은 일본 사람들이 science를 번역하기 위해서 지금부터 100년전에 만들어 놓은 신조어예요. 科學이라는 말은 중국의 고전이나 동양어에 원래 없었다고 저는 알고 있어요. 일본 사람들이 말 하나 번역하는데 얼마나 애를 썼는지 여러분이 아셔야 돼요. 지금 freedom이라는 말을 일본 사람들이 自由라는 말로 번역할 때까지 고민한 것을 보면 제일 처음에는 自放이라고도 했다가 放縱이라고도 했다가 自由라는 말로 했어요. 우리가 쓰는 말 하나하나가 예사롭게 아무 것도 아닌 것처럼 써 버리는데 그 점 하나 우리가 생각해 두어야 할 문제입니다. 일본 사람들이 science를 과학이라고 번역을 했어요. science라는 말은 라틴어의 scientia인데 앎이라는 말이고 요즘의 말로는 知識입니다. science가 뭐냐 라는 물음을 물으면 知識이 되니까 科學은 知識입니다.

 

서양 사람들이 쓰는 말 중에 working definition이 참 좋다고 보는데 우리는 그저 정의(definition) 하나 딱 내려놓으면 요지부동이 되잖아요. 정의에 의해서 흑백이 싹 가려져요. 미국 사람들이 working definition이라는 말을 쓰거든요. 말하자면 어떤 일을 해 나가기 위해서 잠정적으로 내리는 definition이죠. 그러니까 그 사람들은 absolute definition이라는 말은 별로 쓰지 않아요. 오늘 이 강의를 하기 위해서 일단 내려지는 working definition은 과학은 뭐냐? 그것은 science이고 scientia이고 앎이고 知識이다. 그러니까 과학은 지식이다는 working definition을 내릴 수 있잖아요.

여기 많은 분이 계신데 어제 밤에 꿈을 꾸어 알고 있는 것도 있을 것입니다. 그런 앎도 과학이냐! 여기서 말하는 지식이라는 것은 뭔가? "이것은 인류의 오랜 경험이다." 이것도 working definition입니다. 인류의 오랜 경험을 재정리한 것을 우리가 가지고 있는 지식이다. 이렇게 일단 working definition을 내려놓자. 해가 동쪽에서 아침마다 뜨니까 해는 동쪽에서 뜨는 것이다 라는 지식이 하나의 지식으로 되어 있는 것이니까 인류의 오랜 경험을 재정리한 것이 지식이다. 이 경험은 누구의 경험이냐? "인류(사람)이다." 과학이라는 것은 뭐냐라는 질문을 해서 어원적으로 들어가 보면 사람이 뭐냐 라는 질문 없이 과학이 뭐냐 라는 질문에 답변할 수가 없잖아요. 지금은 과학이라고 하면 사람과는 관계가 없는 것으로 여긴다. 요즘에 쓰는 과학화란 개념이 바뀌어야 한다는 생각입니다.

 

뇌 과학사(Brain Science)를 쓴 매크레인이 최근에 발표한 것을 보면 인간의 머리는 3중구조라는 것이 대강 받아들여지는 것 같아요. 제일 안에 있는 구조가 파충류 두뇌이고 그 다음에 있는 것이 포유동물이고 제일 바깥쪽이 신피질(neocortex)이 됩니다. 사람이 호모사피엔스가 되는 것은 코(안경)와 이마가 직각인데 이것이 직각이 안되면 사람이 아니죠. 이 각도가 제로이면 곤충입니다. 이 각도가 서서히 올라가면서 고등동물이 되잖아요. 인류학적으로 따지면 호모일렉투스, 호모사피엔스는 뇌 크기입니다. 사람하고 제일 가깝다는 유인원인 원숭이가 400cc 전후라고 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사람은 1400∼1500cc 정도로 약 3배입니다. Lewismanfood는 사람이 사람되는 데가 이 커진 뇌의 활동에서 모두 나온 것이라고 단적으로 얘기하죠.

과학을 얘기할 때 독일어의 Wi enschaft를 씁니다. Wi en은 앎이고 schaft는 기계의 軸이니까 Wi en에 중점을 두느냐 schaft에 중점을 두느냐에 따라서 과학을 보는 눈이 달라집니다. Wi en에 중점을 두면 相對論으로 흐를 것이고 schaft에 중점을 두면 客觀論으로 흘러 어떻게 보면 방법론적인 얘기가 될 것이다. Wi en을 대표하는 학자가 있다면 토마스 쿤의『과학혁명의 구조』라는 책입니다. 최근에 가장 Wi en 쪽에서 문제가 되는 사람은 리차드 로티(Rorty)일 거예요. 구라파 사람들이 철학에서는 미국 것을 앝잡아 봐서 소개를 안하는데 로티의 책은 모조리 독일어로 번역이 되어 있어요. schaft 쪽을 보면 객관론적인 것이니까 칼 포파, 포페리언(Popperian) 등이 있어요. 과학론만 하더라도 객관론이냐 주관론이냐 이 싸움이에요. 과학을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서 Wien에 중점을 두느냐 schaft에 중점을 두느냐에 따라서 Kuhnian Popperian으로 갈라집니다.

"작금 거론되고 있는 포스트 모더니즘은 한 마디로 상대주의와 객관주의를 넘어서 보자는 시도라고 말할 수 있다." 포스트 모던에 관한 책이 많이 나오죠. 윤평중 박사가 쓴 책도 있습니다. Postmodern을 내가 생각할 적에 상대론과 객관론을 넘어 보자는 것이라고 얘기할 수 있다.

 

"그러나 필자가 강조하고 싶은 점은 과학의 역사성이다." 歷史性과 時代性은 어떻게 보면 동의어 같은 얘기가 되겠지만 조금 다르죠. History라고 그러느냐 독일어로 Geschichte라고 그러느냐 조금 다르잖아요. History는 관조하는 것이고 Geschiate를 영어로 말하면 happening이죠. History라는 말은 멀리 떨어져서 보는 입장에서 나왔다면 Geschiate는 사건(happening, event)으로 굉장히 다릅니다. 과학의 역사성은 너무 어렵게 생각하지 마시고 이렇게 생각하시면 되잖아요.

 

사과가 떨어진다. 이것은 물체의 낙하운동인데 희랍 사람들은 사과가 땅에 떨어진다는 것을 어떻게 얘기했어요. 희랍시대 때에 원소는 몇 개입니까? 土 水 火 空氣가 희랍시대 때의 四元素이죠. 지금은 원소가 42개이고 전이상태까지 포함하면 103개가 되지만 그때는 4개밖에 없었어요. 그러니까 사과는 흙이라는 원소로 되어 있고, 모든 원소는 자기 고향으로 갈려고 하는 의지가 있다 고 봤거든요. 흙은 고향이 땅이므로 사과는 땅으로 떨어집니다. 이것을 요즘에 열역학적으로 봤을 적엔 의미가 있습니다. 열역학 제2법칙의 열역학 안정성으로 보면 과학적으로도 논할 수 있으나 어떻든 그때 사람들은 그렇게 봤어요. 아리스토텔레스가 언제 사람입니까? B.C 3세기이죠. 아이작 뉴톤은 언제입니까? 17세기이죠. 이 사이가 몇 년입니까? 2000년간 서구 사회를 지배해 왔던 물체 낙하운동의 첨단이론이 물체는 흙으로 되어 있고 흙이라는 원소는 땅으로 갈려는 의지가 있으니까 땅으로 떨어진다. 이것이 2000년간을 지배해요. 17세기까지 첨단 과학이론이에요. 그런데 요즘에는 싹 잊어버리고 있잖아요.

 

 

이러다가는 과학 만담가가 되겠다

 

브로노브스키(Jacob Bronowski)가 쓴『인간등정의 발자취』라는 책은 꼭 한번 읽어 보세요. 내 아우가 여기 앉아 있지만 이 사람 비슷한 사람되지 않나 이런 생각이 들어요. 원래 통계학자이고 수학자인데 안하는 것이 없어요. BBC방송국의 프로그램 제작도 하여 세계적으로 베스트 셀러가 되기도 하고 시도 굉장히 잘 씁니다. 이 사람이 쓴『The ascent of Man』(인간등정의 발자취)는 1975년에 나오는데 세계적으로 베스트 셀러가 1년간 유지됐다는 책인데, 이 사람이 책을 만드느라고 너무 고생하다가 그 다음 해에 죽었어요. 제가 동경에 있을 적에 BBC방송에서 자기 책을 가지고 설명하는 것을 봤습니다.

 

한달전에 방송국에서 현 과학기술처 장관하고 아침시간에 1시간 정도 대담을 했어요. 그것을 하고 나서 얼마지나 또 방송국에서 전화가 왔어요. 요전에 아주 잘 봤습니다. 그것을 보니까 뭘 하시고 싶은 말이 많으신 것 같은데 라디오지만 시간을 드릴테니 하고 싶은 소리를 3∼4분씩 매일 해 주셨으면 어떻겠습니까 1주일에 한번씩 녹음하고 가시면 됩니다. 내 생각으로는 정년퇴직도 했고 대중 매체를 통해서 과학이라는 것에 대한 소개를 하는 것이 좋겠다 싶어 했어요. 그런데 PD가 그저 쉽게만 얘기 해달라는 거예요. 이번 것은 너무 어렵습니다. 그렇게 학자 이름을 자꾸만 쓰시면 안됩니다. 나도 쉽게 얘기할려고 꽤 고심해서 원고를 써 가느라고 다른 일을 못할 정도인데 PD가 공부를 안하고 자기가 알아들을 수 있게만 얘기해 달라는 거예요. 지금 우리나라의 병폐가 여기에 있습니다. 내가 아주 쉽게 얘기하느라고 하는데 요즘에는 아주 신경이 쓰여요. 그만 두어야지 이러다가는 과학 만담가가 되겠다. 신문에서 떠드는 것도 말이 안됩니다. 과학이라면 그저 신기한 것으로 국민들을 선동만 했지 실질적으로 과학의 본질이 뭐라는 것은 전혀 얘기를 안 해줍니다. 과학 그러면 내일 모레 달나라 가는 것이고, 지금 PD같이 그냥 자기들이 알아듣는 것이 과학으로 그것 이상은 하지 말라는 것이다.

 

 

기하학적 개념에서 물리학적 개념으로 바꾸었다

 

아이작 뉴튼이 정립해 놓은 운동 방정식은 F=ma입니다. F는 힘이고 m은 질량이고 a는 가속도입니다. 이 방정식에 맞는 운동계를 뉴튼의 역학이라고 합니다. 이곳이 완전히 방음장치가 잘 된 10Km 상공을 시속 600km로 달리는 점보기안에서 여러분이 강의를 듣고 계신다고 생각할 수 있죠. 그런데 속도의 변화가 오면 몸에 힘을 느끼잖아요. 가속도라는 것은 속도의 변화이니까 빠르게 변화하면 빨라지는 가속도이고 느리게 변화하면 느려지는 가속도로 플러스와 마이너스가 다 적용됩니다. 속도의 변화에다가 무게를 곱한 것이 뉴튼의 힘의 개념이에요. 레오나르도 다빈치, 갈릴레오, 코페르니쿠스 등은 기하학적인 차원에서 머물죠. 천체를 보고 어떻게 작도를 하면 가장 간단한 작도 속으로 모든 천체의 움직임이 들어 가느냐를 본 사람이죠.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도 사실은 천동설로 작도하는 것보다는 지동설로 작도하는 것이 훨씬 간단 명료하게 되니까 지동설이 나온 겁니다. 그 사람들은 기하학적인 영역에서 머물렀는데 뉴튼이 기하학적 개념에서 물리학적으로 바꾸었다는 것이 뉴튼의 위대한 점입니다. 중력이라는 힘의 개념을 세워 놓고 힘을 수식으로 정식화해서 적용을 시켜보니까 모든 천체운동이 일목요연하게 풀리는 거죠.

 

4세기부터 14세기까지가 중세기 암흑기죠. 그리고 15세기가 르네상스이고 16세기가 종교개혁이고 17세기가 과학혁명입니다. 이런 역사적인 맥락에서 과학혁명이라는 것을 봐야지 과학혁명이 뚝 떨어진 것은 아닙니다. 4세기부터 14세기까지의 서구 사회에 있어서 종교의 횡포라는 것은 새삼 얘기할 필요 없잖아요. 엊그제 신문에 났어요. 우리나라에서 1년에 교회를 통해서 들어가는 헌금의 액수가 10조원이랍니다. 거기에 1/10만 쓰면 우리나라의 보건사회부의 1년 예산이래요.

 

다음 번에 소광섭 교수가 오신다고 하는데 그분은 우리나라에서는 상대성 원리의 최첨단 이론가입니다. 서울대학교 물리학교수이고 스티븐 호킹 밑에서 1년간 연구한 분입니다. 상대성 이론에서 보면 중력이라는 것은 천체와 천체 사이를 잇는 시공면의 최단 거리입니다. 이미 절대공간이 있어 그 안에 지구가 들어가 있고 태양이 들어가 있고 우리도 들어가 있는 것이 뉴튼의 3차원의 물리학인데 상대성 원리가 되면 공간이 없어요. 천체가 있기 때문에 그 사이에 공간이 생기는 것이죠. 오늘 강조하고 싶은 점은 뉴튼을 4차원의 시공면에서 보면 천체와 천체, 물건과 물건 사이를 잇는 최단 거리가 중력이에요.

 

롤스토(Holmes Rolstone)은 작년에 제가 미국에 가서 하루 동안 지내봤습니다. 신학 철학 과학을 두루 섭렵했어요. 이 사람이『과학과 종교』라는 책을 썼습니다. 뭐라고 그랬냐면 롤스톤은 "과학혁명을 설명의 혁명"이라고 말하고 있어요. 같은 사과가 떨어지는 현상을 놓고 희랍시대에는 이렇게 설명하고 뉴튼은 이렇게 설명하고 아인슈타인은 이렇게 설명하니 과학혁명은 설명의 혁명이다. 아주 정곡을 찌르는 말 아니예요.

 

[일단 만유인력과 그에 따르는 운동방정식이 수학적으로 정립된 이후의 영국사회는 완전히 일변할 수밖에 없었다. 지금까지 매사에 간섭하던 신의 힘은 뉴튼의 운동방정식과 만유인력의 수학적 정식화를 통해서 기계적인 힘으로 탈바꿈할 수밖에 없었다. 신은 시계를 만들 때까지만 필요한 존재요 그 이후는 필요 없는 존재가 되어버리고 만 것이다. 소위 기계론적인 세계관이 확립되기에 이른다.] 이 얘기는 17세기 과학혁명에 대한 결론과 같은 말이다. 알렉산더 포프라는 시인은 뉴튼보다 30세쯤 젊은 사람인데 뉴튼이 죽고 난 다음에 뉴튼의 묘비를 썼는데 거기에 알렉산더 포프의 시가 있어요. 제일 첫 줄이 "하나님이 뉴튼 있으라 하시니 이 세상에 빛이 있었다." 성경을 보면 "하나님이 빛이 있으라 하시니 이 세상에 빛이 있었다."에서 앞의 빛이 뉴튼으로 둔갑을 한 것인데 이것은 포프가 만든 것이 아니고 그 당시 런던 시내의 아이들이 고무줄 넘기를 하면서 부르던 동요래요. 그 당시의 런던의 영국 사회에서 뉴튼의 영향력이라는 것이 어는 정도였는지 생각해 보세요.

 

그 당시는 하나님을 몽크(신부, 목사)가 콘트롤 하는데 교회에다가 돈을 바치면 죄를 면해줍니다. 면죄부를 팔아먹는 데까지 갔으니 요즘 세상과 같죠. 교회에 헌금 많이 하면 구원 간다. 저도 어느 교회의 장로예요. 장로가 이런 소리하면 안되는데 나는 이 소리는 하고 싶어요. 성철 스님이 돌아가셨을 때 김수환 추기경은 弔電을 보냈는데 내가 속해 있는 신교는 어느 교단치고 조전을 보냈다는 것을 신문에서 못 봤어요. 이웃이 죽어도 문상가는 것이 기독교의 사랑인데, 나는 성철 스님이 어떤 분인지 모르지만 신문지상에 보면 참 신선하지 않아요. 돌아가셨는데 거기에 애도의 뜻도 펴지 못하는 맹꽁이들, 이것이 한국의 종교의 실상입니다. 나는 거기서 밥 안 얻어먹으니 이런 소리를 저 같은 사람은 할 수 있어요. 그런데 목사님들이나 신학대학 교수들은 이런 소리하면 쫑겨나니 하고 싶어도 못해요. 루터가 95개의 계단을 무릎을 꿇고 올라가다가 승복을 벗어제치고 뛰어 내려오면서 종교개혁을 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우리나라의 신교 목사들이 다시 주워 입죠.

 

[17세기의 영국에서 개화되었던 과학혁명이 18세기에 접어들면서 그 무대가 영국 아닌 구라파의 대륙으로 옮겨간다. 흔히 우리는 18세기를 계몽주의시대 또는 산업혁명의 시대라고 부르고 있다. 계몽주의라면 우리는 프랑스의 백과사전파를 연상하게되고 산업혁명이라면 영국의 방직산업을 연상하게 된다. 이와 같은 역사적 흐름속에서 18세기에 인간의 사고구조에 또 하나의 새로운 개념이 등장하는 것을 보게 된다. 바로 진보라는 개념이다. 인류의 역사에 있어서 동서양을 막론하고 진보라는 개념의 역사가 불과 2백년도 못 된다는 사실에 우리는 주목할 필요가 있다.] 뉴튼에 홀려서 영국은 뉴튼으로 정지가 되어요. 그런데 뉴튼의 물리학은 불란서 독일로 와서 발달 해요. 아주 아이러니컬한 것이죠.

 

 

동양에는 progress라는 개념은 없고 있다면 progression이 있다

 

진보라는 개념은 김용옥 박사 때문에 얻은 지식인데 김용옥 박사가 1972년에 대만에서 공부를 하고 있었는데 그 때에 참 귀한 분하고 만났어요. 석사논문의 지도교수로 方東美입니다. 대만 대학의 철학과 선생들 보고 임어당이 굉장한 분이죠 했더니 임어당은 저널리스트지 학자가 아닙니다. 方東美 교수에 대해서 그때 들은 소리입니다만 장개석 정권이 대만으로 도망갈 적에 모택동이가 무릎을 치면서 내가 놓친 것이 두개 있다. 하나는 대만에 있는 고궁 박물관이고 하나는 方東美를 못 잡아 둔 것이 천추의 한이다. 이분 하고 1시간 대화를 나누었어요. 동양에는 progress라는 개념이 있습니까? 方東美 교수의 말입니다." 동양에는 progress라는 개념은 없고 있다면 progression이 있다." 사전을 찾아보시면 progress는 進步이고 progression은 進行이다.

 

서구 사회에서도 진보라는 개념은 18세기 이후에 생겨요. 그전에는 진보라는 개념은 인류의 머리에 없어요. 이 지구상에 사는 총 인류의 80∼90%가 자기가 태어난 데에서 300마일 밖을 나가 보지 못하고 죽는다는 거예요. 옛날 사람은 50세만 넘으면 죽을 준비하는데 60살쯤에 살아온 과거를 회상해 보면 머리 속에 남는 것은 아무 것도 없고 남는다면 전염병이 와서 손자들이 죽어 버렸다든지 난리가 나서 온 동네가 휩쓸렸다든지 이런 끔직끔직한 사건만 기억이 되지 좋은 기억은 없다. 그러니 찾는 것은 요순시대이고 기독교의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동산, 복지죠. 자꾸 옛날만 그리워하지 미래에 대한 비전이 전혀 없거든요. 이것은 18세기에는 계몽주의가 되고 산업혁명이 일어납니다. 뉴튼의 패러다임과 진보가 결부되면서 여기서 나오는 것이 "과학만능주의"라고 보시면 됩니다.

 

뉴튼의 기본적인 세계관이 왜 우리 머리속에 꽉 박히는가 하면 뉴튼은 우리의 감각세계를 논해요. 우리가 눈으로 보고 만질 수 있는 3차원의 공간에 대한 역학이거든요. 그러니까 우리의 일상 용어가 바로 뉴튼의 물리학에서 쓰는 언어와 같아요. 언어가 같으니까 우리 머리속에 쏙 들어오죠. 그러나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원리나 불확정성의 원리는 우리의 오관으로 감지된 세계를 넘어서는 세계를 논합니다. 1광년만 해도 거리가 얼마입니까 불확정성의 원리에서는 10-8cm, 10-12cm이하 단위이니까 우리 감각을 넘어서죠. 하이젠베르그가 쓴『부분과 전체』라는 책이 있습니다. 이 책을 보시면 이런 얘기가 재미있게 쓰여있습니다.

 

 

물질과학시대와 생명과학시대

 

1905년에 아인슈타인이 특수상대성이론을 발표하고, 1912년에 일반상대성이론을 발표하고, 1927년에 하이젠버그의 불확정성원리가 나오고, 1945년에 원자탄이 히로시마에 투하된다. 이는 物質科學時代에 해당합니다. 1952년에 왓슨과 크릭에 의해서 DNA의 이중나선구조가 나오고, 1965년에 모노의 {우연과 필연}이 나오고, 1977년에 일리아 프리고진의 비가역열역학은 물리학에서 생명현상까지 다루고 있죠. 1984년에 나온 {혼돈으로부터 질서}라는 책을 읽어보세요. 1981년에 로저 스페리의 brain science가 나옵니다. 요즘에 문제가 되는 것은 chaos 패러다임입니다. 여기는 生命科學時代라고 볼 수 있습니다.

 

物質科學의 시대를 자꾸만 연구해 오다가 1938년에 오토 한이 물질을 구성하고 있는 기본 물질이 뭐냐 하는 것을 규명하다가 핵분열 반응을 발견하죠. 이것이 원자탄으로 둔갑을 합니다. 내 연령이 해방전에 일본 사람들에게 군대에 뽑혀 갈 연령입니다. 나보다 1살 더 많은 분은 싱가포르나 말레지아에서 돌아가신 분이 많을 거예요. 저는 아슬아슬하게 일본군대에 끌려가기 직전에 해방이 되어 안 끌려간 세대입니다. 그리고 해방이 된 뒤에 교회 목사님들이 말하기를 "하나님께서 유황불로 벌을 주셔서 우리를 해방시키니 하나님 만세!"

 

1970년초에 일본에 교환 교수로 1년 있으면서 하이젠버그의 {부분과 전체}라는 책을 읽었는데 거기에 1945년 8월 7일 아침에 하이젠버그와 폰 바이쯔재커(지금 독일 대통령의 형님)의 대화가 나누어집니다. 책을 통해서 여러 가지 만남의 세계가 있는데 그때 쇼킹했어요. 하이젠버그가 말하기를 "인류의 미래를 그린다면 개인의 인권이 존중되고 언론 자유가 있고 인류의 유토피아적인 미래상의 모델이라면 미국인을 그렸는데 그 미국이 다 이긴 전쟁에 원자탄을 투하해서 비무장인 시민을 순간적으로 몇 십만씩 살륙하니 이제는 미국 사람들도 도리 없이 제국주의자라는 소리를 면할 수 없게 됐고 약육강식의 누명을 벗을 수 없게 되지 않았느냐 이것은 인류를 위해서 굉장히 불행한 일이다. 미국의 정책 수립자들이 히로시마에 투하하는 것을 결정할 때 이 점을 고려했다면 투하를 안했을 것이다. 인류의 가장 큰 오점으로 길이 남을 것이다. 참으로 통탄할 일이다." 이제 와서는 반세기가 지났는데 그 당시 한국의 목사님들의 말은 답답하나 하이젠버그의 말은 길이 남을 말이 되잖아요. 한국의 목사님들은 한국이라는 좁은 부분에 매달려서 그저 하나님 만세만 부르고 앉아 있고 하이젠버그는 세계 전체를 보고서 그런 얘기를 해요. 퀘스트라의 {야누스}라는 책을 보면 첫마디가 "이제는 인류의 기원을 다시 써야 한다. 1945년이 PH 1년이다. 1945년이 인류의 신기원이다. 포스트 히로시마 1년부터 인류는 기원을 다시 생각해야 된다."

 

뉴튼의 도그마가 생명 세계에 200년 지각해서 들어온 것이 거든요. 우리들이 생명할 적에는 어떤 생각이 있어요. 제가 유기화학 강의를 30년 하면서 정년퇴직을 한 사람이니까 유기화학은 좀 가르치는 편이겠죠. 그런데 유기화학 첫 강의 시간에 유기화합물이란 뭐냐를 가르칩니다. 1828년에 네라라는 사람이 무기물에서 요소를 만들었습니다. 생명체에 관한 물질은 유기화합물이고 생명체와 관계가 없는 것이 무기화합물이거든요. 개미를 빨면 개미산이 나오니까 시죠. 그것도 생명체이므로 하나님의 것이니 사람이 터치하면 안된다. 오줌, 똥도 그렇구. 1828년에 네라라는 사람이 가열해서 유리아를 만들거든요. 무기물질을 가지고 요소를 만드니 이때까지의 개념이 뒤집혔죠. 말하자면 유기물질은 터치못하는 것인데 무기물질을 가지고 유기물질을 만들었으니까 이 경계가 부서져버립니다.

 

왓슨과 크릭은 단세포 생물, 대장균을 가지고 연구한 거예요. 제 아우와 나와는 얘기하는 폼이 비슷한 점이 있죠. 이것을 미국 사람들은 family resemblance라 합니다. 물리화학적인 성질을 가지고 유전 현상을 설명해 보자는 것 아닙니까. 뉴튼의 제1차적인 물리화학적인 성질을 가지고 생명현상을 탐구해 보자 그래서 DNA가 나와요. 이것도 왓슨이 쓴 {이중나선} 이라는 책이 서울대학의 하두곤 교수가 번역했어요. 노벨상을 탄 학자들이 못나게 싸우는 것을 보면 재미나요. 왓슨이 그 책을 썼을 때 자연과학자들이 이것은 내면 안된다는 것을 왓슨이 내버렸어요. 왓슨하고 루이스 폴링하고 싸우는 것을 보면 재미나요. 루이스 폴링이라는 사람을 제가 존경했었는데(노벨상을 두개나 탔는데 하나는 화학상 가지고 타고 하나는 평화상으로 탔다) 그 책을 읽고 정 떨어졌어요(노벨상을 먼저 타려는 암투). DNA는 물리화학적 성질이 지배하는 세계인데 단세포 생물인 대장균 가지고 연구를 했어요. 그런데 다세포 생물로 되니까 안되는 거예요. 단세포 생물에서 했던 것이 맞어들어 가면 좋은데 다세포 생물에서는 안맞어 들어가는 거예요. 그래서 궁지에 몰려요. 1987년도 도네까와 스스무가 면역학으로 노벨상을 타게 됩니다. 다세포에 혁명이 일어나게 되요.

 

다세포 생물을 모르니까 세포 가위를 가지고 잘라 붙이는데 여기까지는 이미아는 것이고 이것은 다시 배양시켜 보면 여기까지 알던 이외의 성질이 나오면 이것 때문에 나오는 것 아니겠어요. DNA재조립은 아직 우리가 모르는 유전자의 미지의 분야를 알기 위해서 생긴 분자 생물학의 연구 방법이에요. 핵분열 반응이 원자탄으로 둔갑하듯이 이것이 유전공학으로 둔갑했어요. 요즘에 유전공학이라면 다들 신기해합니다. "무추" 아시죠? 위는 배추이고 밑에는 무우이다. DNA를 가지고 장난을 해서 만들어 내는데 나는 걱정이에요. 유전공학하는 연구실에 가보면 실험관에 이 세포 저 세포 서로 접붙여서 놓았는데 저것이 쏟아져 나오면 어떻게 될 것인가! 원자탄이 서울시내에 떨어지면 서울시 인구가 몇백만명 죽고 말겠지만 저것이 흘러나와서 생태학(ecology)적인 균형을 깨트리기 시작하면 무슨 괴물이 나와서 일류가 어떻게 될지 끔직해요. 함석헌 선생님이 노자 강의에서 말하기를 "지성소라는 것이 달리 있어 너희들은 들어오면 안돼, 하나님이 만들어 놓은 것을 자꾸만 들어갈려고 하니까 그래 너희들 그렇게 들어와 보고 싶으냐. 조금 볼래 하고 열어 봐 주신 것이 원자탄이야!" 안 봐야할 데까지 파고 들어가서 보니 원자탄이에요. 자연과학 그 자체를 부인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과학의 윤리학적인 측면을 염두해 두셔야 합니다.

 

로저 스페리(Roger Sperry)는 좌우반구의 절단 수술의 세계적인 권위자입니다. 심한 간질병 환자를 치료하는 최후의 수단은 좌반구와 우반구를 갈라 놓는 것이다. 좌반구와 우반구를 절단해 놓으면 처음에는 사람은 한사람인데 두사람 같이 행동한데요. 그런데 오래 동안 관찰해 보니까 언어 중추가 좌반구 쪽에 있으니 좌반구가 손상된 사람은 말은 못하지만 서서히 우반구가 좌반구의 기능까지를 회복해 간다는 것이다. 바퀴가 있으면 바퀴를 구성하는 원료(고무, 철,나무 등)은 일차적인 물리화학적인 성질을 가지고 있다는 거죠. 어쩌다가 바퀴가 되면 굴러가는 성질이 나오지 않느냐 이 굴러가는 성질은 바퀴를 구성하고 있는 일차적인 물리화학적인 성질은 아무 데도 없고 제3의 성질이 나옵니다. 그러면 이 굴러간다는 속에 다 종속되어 버린다. 그러니 이 사람은 이원론이 아니예요. 이때까지의 연구 방법은 자르고 잘라서 더 이상 자를 수 없는 최하 단위까지 가서 원인을 찾는 것은 upward causation인데, 굴러가는 성질 밑에 종속이 되니 원인은 여기에 있는 것이다. 그러니까 모랄도 여기에 넣을 수 있는 것으로 downward causation이다. 이런 새로운 Holist-Mentalist를 스페리가 말합니다.

 

[브로노프스키는 모든 생물은 같은 생물종 사이에서 서로 교통할 수 있는 언어를 가지고 있는데 사람은 이에 더하여 또 하나의 언어를 가지고 있으며 이 또 하나의 언어가 사고를 위한 언어이며 바로 사고를 위한 언어가 과학이라는 것이다.] 브로노브스키의 {나는 누구인가}란 조그만 책이 있는데 제가 번역을 했습니다. 동양학(자연과학)을 하시는 여러분이 읽어 보시면 좋을 것입니다. 은행나무는 은행나무끼리 벌은 벌끼리 개미는 개미끼리 통하는 communication language를 가지고 있고 사람은 언어를 말하지 않아도 통하는데 그런 같은 생물종 사이에 통하는 언어 이외에 사고(thinking)를 위한 언어가 과학이다. 저는 이 정의가 좋아서 늘 씁니다. 다이슨(Freeman Dyson)의 {무한한 다양성을 위하여}를 강원대학에서 과학철학을 하고 있는 신중섭 박사가 번역을 했습니다. 다이슨은 박사학위가 없는 노벨상급의 물리학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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