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베스의 기도(대상 4:9-10)
중국 송나라 범협이 편찬한 후한서에 보면, 황하강 상류에 용문이라는 계곡이 있었습니다. 그 계곡에 물길이 빠른 폭포가 있었는데, 그 폭포 아래에는 큰 물고기들이 많았습니다. 대부분의 물고기들이, 그 폭포를 올라가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그 폭포를 올라가는 물고기는 용이 되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이것이 “등용문”의 유래가 되었습니다.
옛말에, “개울에서 용난다.”는 말이 있습니다. 그런데 요즘은 “개울에서 이무기도 나지 않는 시대”라고 말을 합니다. 요즘은 자신이 아무리 노력해도, 신분 상승이 어려운 시대라는 말입니다.
요즘 보면, 수저 계급이 유행을 하고 있습니다. 자산과 수입을 기준으로, “금수저, 은수저, 동수저”로 나누고 있습니다. 그리고 최하위계층을 “흙수저”라고 하고, 최상위 계층을 “다이아몬드수저”라고 합니다.
그리고, “칠포세대”라는 말이 있습니다. 젊은이들은 “연애, 결혼, 출산, 내 집 마련, 인간관계, 꿈 그리고 희망”마저 포기했습니다.
젊은이들은 패배감, 절망감이 팽배합니다.
그들은 “나에게는 미래가 없다”라고 생각합니다.
그들은 “내 인생에는 꿈과 즐거움이 없다”라고 생각합니다.
신분 상승의 희망이 전혀 보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자신이 아무리 노력해도, 신분 상승이 어려운 시대입니다.
그래서 젊은이들은 패배자가 돼 버렸습니다.
여러분! 야베스라는 사람도 도무지 신분 상승의 가능성이 없어 보이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신분 상승의 축복을 받은 사람이 되었습니다.
역대상 1장에서 9장까지, 무려 600여명의 사람들의 이름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역대상 4장에서만, 44명의 이름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대부분 발음하기도 어렵고, 들어보지도 못한 이름들입니다.
9절 말씀입니다.
“야베스는 그의 형제보다 귀중한 자라 그의 어머니가 이름하여 이르되 야베스라 하였으니 이는 내가 수고로이 낳았다 함이었더라” 아멘.
요즘 말로 하면, 야베스는 “흙수저”로 태어났습니다.
야베스의 어머니가 야베스를 낳고, 그 이름을 야베스라고 지었습니다.
왜냐하면, 야베스를 수고로이 낳았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야베스”라는 말은 “고통, 고난, 아픔”이라는 뜻입니다.
대부분 사람들은 아기를 낳으면, 최대한 좋은 뜻을 가진 이름을 지어줍니다. 그런데 야베스의 어머니는 자신이 낳은 아들에게 “고통”이라고 이름을 지어주었습니다.
야베스는 태어나면서부터, 축복받지 못하고, 고통스러운 존재로 태어났습니다.
그는 밑바닥 인생으로 태어났습니다.
그는 흙수저 중의 흙수저였습니다.
그렇다면 야베스의 어머니가 왜 아이를 낳고, 야베스라고 이름을 지었을까요? 유대인들은 아이를 낳으면, 아버지가 이름을 지어주는 것이 전통이었습니다. 그런데 어머니가 이름을 지어주었습니다. 이것은 “아버지가 없다”는 이야기입니다. 왜 아버지가 없는지는 나와 있지 않습니다. 아버지가 죽었는지 아버지와 이혼을 했는지, 아버지를 드러낼 수 없는 상황인지, 정확하게 알 수는 없습니다.
그런데 분명한 것은, 아버지가 없는 상황에서 태어났고, 아버지가 없는 상황에서, 성장해야 하는 상황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어머니가 아이의 현재와 미래를 생각할 때, 절망감을 느끼고, “야베스” 즉 “고통”이라고 이름을 지은 것입니다.
어쩌면, 그의 출생은 아무도 축복해 주지 않은 불쌍한 “출생”이었습니다.
또한, 야베스의 어머니는 “내가 수고로이 낳았다”고 말했습니다.
한 마디로 “난산”입니다. “순산”하지 못했습니다.
어머니가 야베스를 낳을 때, 죽을 고비를 넘기며, 간신히 낳았습니다.
얼마나 해산의 고통이 심했으면, 아이를 낳고 나서, 그 아들의 이름을 “고통”이라고 지었겠습니까?
지금은 산모가 산부인과에서 아기를 낳기 때문에, 산모에 대한 위험부담이 적습니다. 그런데 옛날에는 집에서 아기를 낳았습니다. 그래서 해산하다가, 산모도, 아기도 잘못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야베스의 어머니도 그런 상황입니다. 그래서 야베스의 어머니는 아들을 낳을 때, “내가 수고로이 낳았다”고 말한 것입니다.
아이를 낳을 때, 얼마나 고통스러웠으면, 아들 이름을 “야베스, 고통”이라고 지었겠습니까?
야베스는 죽을 지경에서 간신히 태어났습니다.
그는 고통의 사람입니다. 고난의 사람입니다. 아픔의 사람입니다.
그는 환경적으로, 시대적으로, 희망이 보이지 않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야베스는 그의 형제보다 귀중한 자라”고 했습니다.
“그의 형제보다 귀중한 자”라는 말은, 그의 가정에서, 그의 가문에서, 그의 민족 중에서, 가장 귀중한 자가 되었다는 말씀입니다.
여기서 “귀중한 자”라는 말은 “존귀한 자, 존경받는 자”라는 뜻입니다.
야베스는 그의 가문 가운데서, 가장 존경받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야베스는 고통의 사람, 고난의 사람, 아픔의 사람, 환경적으로 시대적으로 희망이 보이지 않는 사람에서, 가장 존경받는 사람으로 운명이 바뀌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역대상 2:55절을 보면, “야베스에 살던 서기관 종족”이라고 했습니다. 이 말은 야베스가 태어난 부족 이름을 아예, “야베스”라고 부르게 되었다는 말씀입니다.
왜냐하면, 부족 가운데서, 야베스가 가장 존경받는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또한, “야베스가 살던”이라는 말은, 그가 태어나 살았던 그 땅 이름을 야베스라고 불렸다는 것입니다. 충무로, 을지로, 세종로라고 부르는 것처럼, 그가 태어난 땅 이름을 아예, “야베스”라고 불렀습니다. 그 만큼 야베스는 모든 사람들에게 존경받는 축복의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고통과 슬픔뿐이었던 야베스의 운명이 모든 사람들로부터 존경을 받는 축복으로 바뀐 비결이 무엇입니까?
한 마디로, “기도”입니다. 기도는 볼품없는 사람을 위대한 인물로 만들어 줍니다. 귀중한 자, 존경받는 자로 만들어 줍니다.
야베스는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야베스는 고통과 환난을 원망과 불평거리로 삼는 것이 아니라, 기도의 제목으로 삼았습니다.
그렇습니다. 오늘의 아픔과 고통을 원망과 불평이 아니라, 기도로 만들어야 승리할 수 있습니다.
기도의 위대함은 기도하는 사람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기도를 들으시는 하나님께 있습니다.
하나님이 계시지 않는다면, 우리의 기도가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우리가 하나님께 기도하면, 하나님은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고, 응답하여 주시고, 크고 비밀한 일을 우리에게 보여주십니다.
하나님은 크고 놀라운 능력의 하나님이십니다.
야베스처럼 기도하면, 하나님은 고통과 저주를 복과 은혜로 바꾸어 주십니다.
여러분! 왜 야베스의 기도가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고 있습니까?
한 마디로 기도 응답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야베스처럼 하나님께 기도해서, 야베스처럼 기도 응답을 받아, 야베스처럼 신분이 상승하는 축복을 소망하기 때문입니다.
10절 말씀입니다.
“야베스가 이스라엘 하나님께 아뢰어 이르되 주께서 내게 복을 주시려거든 나의 지역을 넓히시고 주의 손으로 나를 도우사 나로 환난을 벗어나 내게 근심이 없게 하옵소서 하였더니 하나님이 그가 구하는 것을 허락하셨더라” 아멘.
야베스는 이스라엘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야베스가 하나님께 기도했더니, 고통의 운명이 축복의 운명으로 바뀌었습니다.
기도는 고통받는 인생을 축복의 운명으로 바꾸는 놀라운 능력이 있습니다.
야베스의 축복의 비결이 여기에 있습니다.
하나님께 아뢰었더니, 고통의 운명에서 축복의 운명으로 바뀌게 되었습니다.
야베스는 하나님께 “주께서 내게 복을 주시려거든 나의 지역을 넓혀 달라”고 기도했습니다. 그는 하나님께 풍성한 은혜와 충만한 복을 내려 달라고 간절하게 기도했습니다.
그는 하나님께 자신의 활동영역을 넓혀 달라고 기도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작은 공간만을 허락하셨다면, 우리는 기꺼이 그 작은 테두리 안에서 살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 하나님은 자녀된 우리의 삶의 영역이 훨씬 더 넓어져서 더 귀하게 쓰임 받기를 원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나의 지역을 넓혀 달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크게 쓰임받게 해 달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나를 크게 사용하여 달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여러분! 흙수저로 태어난 야베스의 인생에, 환난과 근심이 얼마나 많았겠습니까? 그래서 그는 하나님께 “주의 손으로 나를 도우사, 나로 환란에서 벗어나 내게 근심이 없게 하옵소서”라고 기도를 했습니다.
시편 138:7-8절을 보면, “내가 환난 중에 다닐지라도 주께서 나를 살아나게 하시고 주의 손을 펴사 내 원수들의 분노를 막으시며 주의 오른손이 나를 구원하시리이다 여호와께서 나를 위하여 보상해 주시리이다”라고 기도했습니다.
여기서 “주의 손”은 전능하신 “하나님의 능력”을 상징합니다.
여기서 야베스는 만일 주님의 손이 자기와 함께 하지 아니하면, 즉 주님의 능력이 그에게 임하지 않으면, 아무 것도 할 수 없다고 고백한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의 손이 그와 함께 하시면, 모든 것을 능히 해낼 수 있다고 믿은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라 놀라지 말라 나는 네 하나님이 됨이라 내가 너를 굳세게 하리라 참으로 너를 도와 주리라 참으로 나의 의로운 오른손으로 너를 붙들리라”(사 41:10)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은 능력의 손으로 우리를 붙들어 주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께 “주의 손으로 나를 도와주소서”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야베스는 하나님께 “나로 환란에서 벗어나 내게 근심이 없게 하옵소서”라고 기도를 했습니다.
다윗은 “나를 눈동자 같이 지키시고 주의 날개 그늘 아래에 감추사 내 앞에서 나를 압제하는 악인들과 나의 목숨을 노리는 원수들에게서 벗어나게 하소서”(시 17:8-9)라고 기도했습니다.
근심을 하게 되면, 고통이 뒤따르고, 염려 속에 빠지게 됩니다.
우리는 무슨 새로운 일을 하거나, 어떠한 일이 잘 되지 않을 때, 근심하여 고통을 받게 됩니다. 염려하게 됩니다.
근심은 하나님에 대한 신뢰의 결핍에서 생깁니다. 하나님을 믿지 못할 때, 근심하게 됩니다. 근심이 늘어가면, 믿음은 차츰 없어지고 맙니다.
근심은 모든 인생의 희망을 잃어버리게 합니다. 믿음을 잃게 합니다. 하나님을 떠나게 합니다. 그리하여, 믿음이 없는 인생은 희망을 가질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없는 인생은 희망이 없습니다. 하나님이 없는 인생은 낙심과 절망뿐입니다.
여러분! 왜 근심합니까? 근심하는 것은 앞날이 보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환난을 벗어날 문이 보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환난 중에도, 믿음을 가져야 하는 것은, 하나님은 우리를 환난에서 벗어나게 할 수 있는 능력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야베스의 운명이 바뀌게 된 것은 기도 때문입니다.
야베스는 하나님께 운명이 바뀌는 기도를 했습니다.
하나님께 기도하면, 인생은 얼마든지 바뀔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기도하는 사람에게 응답해 주십니다.
하나님은 기도하는 사람에게 축복해 주십니다.
기도하면, 하나님의 응답을 받게 되고, 축복을 받게 됩닏.
10절을 보면, “하나님이 그가 구하는 것을 허락하셨더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야베스가 구하는 것을 허락해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구하는 것을 허락해 주시는 분이십니다.
고통과 환난으로 인하여, 원망하고 불평하므로, 삶이 망가지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고난과 아픔을 통해서, 오히려 영롱한 진주처럼 삶을 가꾸어가는 걸작품 인생들도 있습니다.
여러분! 주변을 둘러보면, 나만 고통과 환난 속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나만 염려와 걱정 속에, 힘들게 살아가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나만 가난과 아픔과 질병 속에, 괴로워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설령 나만 그런 환경 속에 놓여 있다 할지라도, 우리는 실망할 필요가 없습니다. 절망하거나 낙심할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에게는 하나님이 계시고, 하나님께 기도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고난이 많아도,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을 계속 받으면, 사막 인생이 옥토 인생으로 바꾸어 집니다. 쓴물 인생이 단물 인생으로 바뀌어 집니다.
그러므로, 내가 있는 환경과 조건 때문에, 낙심하거나 절망할 이유가 전혀 없습니다.
현재의 조건이 내 인생을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나의 나 됨은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으로 결정됩니다.
내 인생은 기도로 결정됩니다.
내 인생은 하나님의 손에 달려 있습니다.
기도하면, 우리의 인생은 바뀌게 되어 있습니다.
여러분! 기도는 인생을 바꾸고, 운명을 바꾸는 비결입니다.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가, 주님 앞에, 우리의 모든 문제를 내려놓고, 간절하게 기도해야 합니다.
주님은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고, 반드시 응답하여 주십니다. 기도 응답을 통하여, 우리는 영롱한 진주처럼, 빛나는 존귀한 삶을 살아가야 할 것입니다.
기도에 대해서 잘 알아도, 기도하지 않으면, 응답의 축복은 누릴 수 없습니다.
기도를 아는 것도 필요하지만 기도하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그리고 쉬지 않고, 계속 기도하는 것이 더욱더 중요합니다.
여러분! 하나님께 기도하면, 우리는 귀중한 자로 살아갈 수 있습니다.
그러나 기도하지 않으면, 우리는 고통의 아들로, 슬픔과 환난 속에 살아가야 합니다.
인간이 겪는 모든 고통의 문제는 하나님께 기도하므로 해결될 수 있습니다.
우리가 그 고통의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는 것은 하나님께 기도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템플”이라는 목사님이 켐브리지 대학에서, 설교 부탁을 받아, 설교를 하게 되었습니다. 그는 석학들이 모인 그 곳에서, “도대체 무슨 얘기를 해야 하나”라고 고민하다가, “기도를 응답하시는 하나님”이라는 제목으로 설교 준비를 했습니다. 그리고 그는 담담하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했습니다. 그런데 한 청년이 그에게 와서, 따져 물었습니다.
“목사님 지금이 어느 시대인데 기도가 응답 된다고 말씀하십니까? 기도가 응답되는 것은 우연입니다. 어쩌다 그렇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연의 일치라는 말이 있지 않습니까? 기도는 응답되는 게 아니고, 우연히, 그저 그렇게 요행으로 된 것입니다.”
템플 목사님은 그 청년의 말을 듣고, 다음과 같이 대답해 주었습니다.
“그래, 청년의 말도 일리가 있네. 그런데 이상한 것은, 기도하면, 우리가 우연이라고 생각하는 일들이 생기지만, 기도를 안 하면, 그 우연이 안 생긴다는 거야. 그래서 나는 기도하는 거라네. 기도가 응답되는 것이 우연이든, 아니든, 기도하면 응답이 오기 때문에, 기도하는 것은 중요하네.”
그렇습니다. 기도하면, 생각지도 못했던 놀라운 역사가 일어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기도하고. 또 기도해야 합니다. 기도를 중단해서는 안됩니다.
역대하 16:9절을 보면, “여호와의 눈은 온 땅을 두루 감찰하사 전심으로 자기에게 향하는 자들을 위하여 능력을 베푸시나니”라고 말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사정을 알고 계시지만, 우리가 그 사정을 하나님께 아뢰지 않으면, 우리는 하나님께서 주시고자 하시는 복을 받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온 땅을 두루 감찰하사, 전심으로 자기에게 향하는 자들을 위하여, 능력을 베풀어 주십니다.
야베스는 고통 속에서 태어났지만, 하나님께 기도함으로, 귀중한 자, 존귀한 자가 되었습니다.
그는 아무도 축복해 주지 않는 흙수저로 태어났지만, 그는 하나님께 기도함으로, 모든 환경을 극복하였고, 더 나아가, 모든 사람들로부터 존경받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여러분! 야베스의 기도는 하나님을 기쁘게 했습니다.
야베스의 기도는 그 구하는 것을 하나님께로부터 허락받게 했습니다.
야베스의 기도는 그를 고통을 받는 자에서, 수고와 근심이 사라진, 존귀하고 귀중한 자로 변화되게 했습니다.
고통받는 자였던 야베스가 존귀한 자로 변화된 것은 그가 한 기도 때문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에게도 그러한 기도가 필요하지 않겠습니까?
여러분! 야베스처럼 하나님께 구하여, 야베스처럼 하나님께 응답받아서, 야베스처럼 고통과 슬픔의 운명이 축복의 운명으로 바뀌는 복 있는 성도가 될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오늘 말씀을 생각하면서, 함께 기도하기를 원합니다.